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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통도사

조낭희 수필가
등록일 2015-03-06 02:01 게재일 2015-03-0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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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 피는 날에는
▲ 조낭희 수필가

통도사에 홍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접한 지는 한참이나 지났다. 바람이 분다는 소식에 친구의 가슴에도 분분히 매화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걸까. 통도사의 자장매가 궁금했나 보다. 그녀의 용기에 내 마음은 이미 매화 꽃잎 화사한 나무그늘에 앉아 있다. 자장율사를 기리기 위해 스님들이 심고 자장매라는 이름을 붙여준 홍매화,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봄은 언제나 통도사 홍매화에서 시작된다. 꽃봉오리를 터뜨렸다는 소식이 들리면 겨울은 갑자기 수척해지고 내 안에서도 전혀 다른 세상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파란 싹을 틔우듯 새로운 각오로 무언가를 꿈꾼다. 칙칙한 일상도 산뜻해질 것만 같다. 이러한 통과의례를 거치고 나면 그제야 세상은 봄빛을 쏟아낸다.

통도사는 영축산에 자리한 대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 율사가 창건했다. 석가모니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로 규모가 큰 적멸보궁과 사리탑이 있다.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 하여 통도사라고 칭했다.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설과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하여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웅전은 부처의 신골(身骨)인 사리를 봉안하였기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 대신 큰 유리 벽 뒤로 펼쳐지는 노송들의 자태가 심장을 뛰게 한다. 일상을 내려놓고 법당에 들어서면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다른 세계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독특한 전각이다.

언젠가 와본 통도사를 소개하는데 그녀는 온통 홍매화를 만날 생각에 마음을 빼앗긴 듯하다. 천왕문을 들어서자 매화향이 먼저 반긴다. 홍매화는 보이지 않고 수많은 전각과 상춘객만 어지럽다. 이토록 진한 향을 가슴에 품고 사막 같은 겨울을 건너오다니 가슴이 두근댄다. 경이로운 생명의 순환 앞에서 통도사가 허파처럼 숨을 쉰다.

뒤늦게 영각 앞에 선 홍매화와 눈이 마주쳤다. 수령이 350여 년이나 된 자장매는 화사한 분홍빛으로 차려입고 마지막 정념을 토해내고 있다. 수줍은 미소는 없지만 고풍스런 사찰의 안주인다운 기품이 넘친다. 두껍고 거친 수피와 작고 여린 꽃이 토해내는 짙은 향기, 그 불균형이 빚어내는 눈부심은 슬프도록 황홀하다.

북풍한설 이겨내고 두근거림으로 피었다가 진한 향기를 토해내는 꽃, 이황과 두향의 사랑이 더 고상하고 영원성을 가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리라.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할 때, 관기 두향이 매화를 선물하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당시 두 부인과 아들을 연달아 잃은 퇴계의 빈 가슴에 매화 같은 두향의 존재는 참으로 그윽했으리. 그러나 짧은 인연을 끝으로 퇴계는 풍기군수로 떠나면서 두향이 준 수석 2개와 매화 분 하나를 평생 가까이 두고 그녀를 대하듯 사랑을 쏟는다. 두향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둘의 사랑은 사려 깊고 지조가 있었다.

퇴계는 임종 시에도 수척한 몸으로 `매형(梅兄) 볼 면목이 없다`며 송구스러워했고, 매화에게 물을 주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매화 사랑이 극진했다. 애틋한 사랑과 절개는 지금도 천 원권 지폐에 남아 향기를 발하는데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삭막하지는 않은가. 매화꽃이 필 때면, 잠시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할 것 같다. 그 작은 여유가 봄을 맞는 예의리라.

매화 향 가득 품고 일주문을 빠져나와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를 걷는다. 수백 년 된 노송들이 숲 그늘을 만들고 흙길의 감촉도 좋다. 우리가 두어 번 만나는 동안 겨울은 무심하게 가버렸다. 그러나 또 다른 계절이 있어 이토록 아름다운 만남을 준비할 수 있다. 친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소리도 맑다. 속절없이 홍매화가 진다 한들 어떠랴. 자장매를 함께 보러 가자고 불러주는 벗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가.

문득 다산 정약용의 죽란시사(竹蘭詩社)가 생각난다. 젊은 시절, 서울 인근에 사는 남인계 청년들의 문예창작과 풍류를 즐기는 사교 모임이다. 다산 집 마당에는 꽃과 과일나무가 가득한데, 심부름하느라 쫓아다니는 비복들의 옷깃에 스쳐 상처를 입을까봐 마당의 동북쪽으로 대나무 난간을 세운다. 이를 죽란(竹蘭)이라 하고, 때 맞춰 찾아오는 선비들도 죽란을 거쳐 온다 하여 모임의 이름을 죽란시사라 했다.

▲ 양산 통도사에 핀 매화.
▲ 양산 통도사에 핀 매화.

살구꽃이 피면, 복숭아꽃이 피면,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초가을 서늘할 때 서지(西池)에 피는 연꽃을 보기 위해, 국화가 피면,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세모(歲暮)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번씩 모이되, 모임 때마다 술, 안주, 붓, 벼루 등을 갖추어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 참으로 멋스럽고 운치 있는 모임이다. 꽃이 피고 싹이 트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우주의 신비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고 교분을 쌓았으리. 멋과 풍류가 빠지지 않는 옛 선비의 삶이 오늘은 그리 부럽지 않다.

우리의 대화처럼 물빛도 찰랑거리며 흐른다. 친구에게서 매화향이 나는 것 같다. 봄을 시샘하는 겨울바람이 장난을 치며 따라온다. 통도사의 조춘(早春) 풍경은 그림처럼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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