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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거조암

조낭희 수필가
등록일 2015-03-27 02:01 게재일 2015-03-2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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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지쳐가는 날에는
▲ 조낭희 수필가

아침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 부딪치는 소리에 지난 시간의 문을 열고 말았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 또 다른 기억과 생각을 몰고 온다. 무심코 주고받은 말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상처를 내기도 하고,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행동들에 자조적인 물음을 던져보기도 한다. 이런 날은 침묵하고 싶다. 홀로 거조암으로 향한다.

자동차는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다, 개발의 훈풍을 기대하는 소도시의 국도를 천천히 달린다. 낯선 길은 새롭고 신선한 감동을 안겨 주지만 이 길은 익숙하고 편안하다. 오늘 같은 날, 봄빛이나 흙냄새를 기대하는 건 사치다. 사금파리가 되어 내면을 아프게 하는 것들과의 조우, 나는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아픔이 힘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거조암은 은해사보다 먼저 지어 원래 거조사라 불렀다. 신라 효성왕 때 원참조사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는 설과 경덕왕 때 건립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래에 와서 거조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편입되어,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으로 거조암이라 부른다. 오백나한상이 있어 오백나한절이라고도 한다.

국보 제14호인 영산전은 몇 안 되는 고려 시대 목조건물 중 하나로 단정한 맞배지붕이다. 법당 안에는 오백나한상이 극락도의 배열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데, 법화스님이 신통력을 발휘해 이 오백나한상이 모두 스스로 극락도의 그림처럼 자리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때문에 영험 있는 나한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불자들이 많이 찾는다.

봄물이 잔뜩 오른 과수원을 지나고, 평범한 마을을 지난다. 작은 호수를 스치듯 지나면 새로 지은 일주문이 나타난다. 휑하고 쓸쓸한 일주문이다. 때로는 산비탈 험준한 길을 쉼 없이 오르다 보면 산사에 닿기도 전에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거조암 가는 길에 그런 것을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대신 일주문을 지나 영산루 바로 앞에 주차장이 있어 짧은 시간에 다녀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영산루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돌계단을 오르면, 출입문이 하나뿐인 큰 영산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단청이 없고 칠도 하지 않아 소박한 간결미가 돋보이는 중심전각이다. 영산전 앞에 별 특징 없는 삼층석탑이 허전함을 달래며 반긴다. 열린 법당 문 정면에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무엇보다 삼존불 뒤에 있는 우아한 후불탱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려한 듯 차분한, 품격이 넘치는 붉은 바탕의 영산탱이다. 독특한 색감에 빨려 한동안 선 채로 감상한다.

뒤늦게 3배를 하고 만(卍)자 형태로 배치된 오백나한상을 만나러 화살표를 따라 법당을 돈다. 나한이란 아라한의 준말로 저잣거리의 무뢰배인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익살스럽거나 무심한, 때로는 험상궂은 표정들이 개성 넘치고 자유스럽다. 오늘 같은 날은 근엄한 부처님보다 나한상들이 훨씬 친근하다. 갖가지의 표정과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한상들에게서 나를 찾는다.

▲ 영천 거조암
▲ 영천 거조암

오백나한상 모두에게 사탕이나 동전을 하나씩 놓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설이 있다. 오늘도 그 영험성에 의존하여 간절히 빌고 간 불자가 몇 사람 있었나 보다. 모두 같은 양의 사탕과 동전이 놓여 있다. 나는 눈에 띠는 나한상에게만 보시를 하니, 차별을 하는 셈이다.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법당을 돈다.

기분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나한상은 다르다. 지루하고 권태로운 날에는 험상궂은 나한상이, 구름처럼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날에는 마주 웃어주는 나한상이, 오늘 같은 날에는 자비로운 미소도, 해학적인 표정도 아닌 그저 무심한 표정이 좋다. 누군가를 배려해서 쏟아낸 말이, 혹은 고치고 고쳐 쓴 글이 본질과 멀어져 허탈감을 맛보아야 할 때는 어떤 말이나 표정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무심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것 같다. 준비해 온 사탕과 동전을 앞에 놓고 예만 갖출 뿐 소원은 빌지 않는다. 수많은 나한상과 눈을 맞추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생각과 행동이 경솔해 스스로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 할지라도 지나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상처가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아 덧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가 오다 개는 날이면 얼마나 많은 우산을 잃어버렸던가. 내 안에 있는 불필요한 것들도 그처럼 쉽게 잃어버리거나 망각했으면 좋겠다. 도(道)는 단순함에서 온다고 했다. 비워야겠다고 결심하면 할수록 더 차오르는 게 마음이다. 마음이 흘러가는 곳을 가만히 응시해 본다.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스스로가 못마땅해 화가 나면 나는 대로, 있는 그대로의 내면을 지그시 바라보며 거조암을 빠져나온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진푸티상사의 염송이 차 안을 가득 메운다. 자애롭고 편안한 소리가 내 안으로 흘러든다. 누구에게나 상처만큼의 회복 시기가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파할 수 있어 더 아름다운지 모른다. 무심코 산 쪽을 바라보았다. 봄바람이 마른 가지 사이로 분주히 설렘을 실어 나르고 있다. 나는 볼륨을 좀 더 높인다.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햇살 좋은 오후다. /조낭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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