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청경과 탁금은 원래 하나

조낭희 수필가
등록일 2015-02-27 02:01 게재일 2015-02-27 17면
스크랩버튼
군위 인각사
▲ 조낭희 수필가

옛 기억을 더듬으며 군위 인각사를 찾았다. 부푼 기대와 달리 평지에 있는 경내는 쓸쓸하다 못해 황량하다. 개울 건너 학소대만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절을 지키고 있다. 인각사는 한 때의 영화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해서 일연 스님으로 인해 유명해진 인각사는 전국불교의 본산이었을 정도로 대가람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퇴락하기 시작하여 옛 전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폐사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다 삼국유사의 고향으로 각광받으면서 조금씩 옛 모습을 복원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발굴할 게 많아서 그런지 어딘지 어수선하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와 신라의 향가 등 귀중한 자료가 기록된 문헌, `삼국유사`를 일연 스님이 이곳에서 완성하셨다.

혹자는 삼국유사가 불교와 신라중심에 머물렀다고 비판하지만 우리나라 고대 역사,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기록한 서사시로서 큰 가치를 띠고 있다. 스님은 이 책뿐만 아니라 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충렬왕 때 국존에 책봉되었을 정도로 큰스님이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를 봉양키 위해 편안한 삶을 버리고 인각사로 낙향한 욕심 없는 분이다.

스님이 입적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중국 최고의 명필 왕희지체를 집자하여 보각국사비를 만들었다. 지나치게 좋은 것은 오히려 평범한 것보다 못한 법인가? 보각국사비는 생각지도 못한 수난을 당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왕희지체에 관심을 보이며 무절제한 탁본이 이어졌다. 특히 왜적이 엄동설한에 비석을 쓰러뜨리고 불을 지펴 탁본을 하는 바람에 훼손이 심해, 결국 열 몇 개의 덩어리로 깨져버리고 말았다.

보각국사비의 글씨를 갈아 마시면 유생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임신한 여인은 영재를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게다가 국내외에서 이어지는 탁본 요구에 승려들이 고의적으로 파손했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보각국사비의 수난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다행히 파손되기 전에 탁본한 것이 남아 있어 인각사비는 왕희지체로 웅장하게 복원되었다. “겁화(劫火)가 모든 것을 살라 산하가 다 재가 되어도 이 비석은 홀로 남아, 이 글은 마멸되지 않으리.” 당대 대표적인 문신 민지가 쓴 비문의 끝머리 구절이다. 그런데도 개인의 탐욕에 눈이 멀어 소중한 우리것을 지키지 못해 부끄럽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기도 하다.

“맑은 거울(청경)과 탁한 쇠(탁금)는 원래 다른 것이 아니요, 흐린 물과 맑은 물은 그 근원이 같다. 다른 것은 거울의 닦고 닦지 않음과, 물의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데 있을 뿐이다. 모든 부처와 중생의 불성도 거울과 물의 경우와 같아서, 다만 어리석고 깨달은 차이만 있을 뿐이니, 누가 감히 무지하고 슬기로움에 다른 종자가 있다고 말하겠는가”

몇 번이나 읽고 싶어지는 이 명문 역시 민지가 쓴 비문의 서문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왕희지 서체를 음미하면서 스님의 행적과 정신을 마음에 아로 새길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슬픈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인각사비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 군위 인각사비
▲ 군위 인각사비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인각사 뒤편에 있는 선조의 묘소를 참배하러 다닌 적이 있다. 학소대의 비경과 쓸쓸한 인각사가 내려다보이는 유택 앞에서 할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현감을 지낸 조부가 이곳에 잠드실 때 인각사 스님들이 도와주셨다는 말씀을 끝으로, 잊지 않고 인각사에 들르셨다. 어렴풋한 그 때 기억으론 전각 하나만 달랑 남은 서글픈 사찰이었다.

인각사에서 할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서너 명의 남자가 인각사비 앞에서 종이 위에 물을 뿌리고 마구 두드려대는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본 적이 있다. 후일 그들이 탁본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가 인각사를 자주 들렀던 이유는 무엇일까?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할아버지는 하교하는 나를 기다렸다가 숙제를 도와주시곤 했다. 처음 글자를 배우고 익힐 때 정성들여 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며 엄하게 가르치셨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할아버지 덕에 나는 글씨체만큼은 칭찬받으면서 컸다. 인각사비 앞에 서니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잔잔히 밀려든다.

컴퓨터와 휴대폰의 등장으로 글씨체의 중요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급변하는 시대는 늘 새로운 무언가를 요구해 왔으며 사람들은 쉽게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며 떠난다. 가난했던 그 때나 풍요로운 지금이나, 우리가 소중한 어느 한 부분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인각사비의 명성과 추억을 더듬으며 찾아 왔지만 거친 얼굴조차 쓰다듬을 수 없다. 보호망에 갇힌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돌아서야 했다.

상처뿐인 영광, 두 동강이 난 몸은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나고 있다. 염불소리라도 들렸으면 좋겠다. 그윽한 향기 피우고 열매 맺는 쥐똥나무 울타리나, 굴뚝새 몇 마리쯤 친구 되어 날아와 주어도 이처럼 서글프지는 않으리. 황량한 계절이 인각사비를 더욱 쓸쓸하게 하는 오후다.

산사 가는 길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