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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개목사

조낭희수필가
등록일 2015-06-12 02:01 게재일 2015-06-1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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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 정겨운 시골집 같은 안동 개목사 입구

자동차가 천등산 자락을 힘겹게 오른다. 신라의 고승 의상 대사가 수도할 때 하늘에서 큰 등불이 비춰주어 99일만에 도를 깨쳐 99칸의 절을 짓게 되었다는 개목사(開目寺)가 저기 저 산 아래 숨어 있다. 사찰과 불교에 박식한 동행인이 고찰에 대한 전설을 풀어낸다.

개목사는 처음 흥국사(興國寺)라 하였다. 당시 안동 지역에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많았는데 비보(裨補)사찰을 삼은 후에 소경들이 없어졌다하여 개목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조선 초기 재상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부임해 왔을 때, 안동의 지세가 눈병 환자가 많을 형상이어서 개목사로 이름을 바꾸었더니 눈병 환자가 없어졌다고 한다.

종교적인 색채를 풍기는 설화든, 훌륭한 목민관의 자세와 풍수도참설을 귀히 여기던 시대성이든, 내게는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재미있는 전설이나 건축물의 양식보다 절의 기운이나 분위기가 내심 궁금하다.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끊어지는가 싶으면 어느 새 논밭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숨바꼭질을 하듯 이어진다. 멀미가 일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슬슬 시장기가 도는데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이 우리를 긴장시킨다. 무료함을 깨고 나타난 낯선 객을 끊임없이 예의주시하는 햇살과 툭 트인 시야 때문인지 첩첩산중 오지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길이 보이지 않아 당황할 무렵, 밭두렁에 검붉게 익어가는 오디가 보인다. 반색을 하며 달려갔지만 오디는 작고 물기가 말라 별 맛이 없다.

어린 시절 뽕나무가 많은 고장에서 자란 내게 오디는 친숙한 간식거리였다. 입 주변이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고 나면 며칠 전 새로 산 옷에도 얼룩덜룩 오디물이 들어 있곤 했다. 달콤한 유혹 뒤끝은 언제나 어머니의 꾸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고 열정적이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가슴이 젖는다. 햇살 속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에는 그리운 것들이 가득하다.

갑자기 앞이 훤하다. 해발 400m 높이에 자리 잡은 개목사는 제법 넓고 평평한 터를 확보하고 있다. 여염집처럼 작고 소박한 사찰을 돌담이 에워싸고 있다. 오래 된 누문이 있는 전각, 싱그러운 유월의 잎새와 꽃들이 환한 낯빛으로 반긴다. 누문 위에 걸린 `천등산 개목사`라는 현판이 인사를 건네 온다. 겸손한 눈빛이 좋다. 정겨운 시골집 앞에서 감회에 젖듯 선뜻 들어서지를 못한다.

넓은 터가 99칸의 절이 있었다는 설화에 신빙성을 실어줄 뿐, 영화의 뒤안길은 참으로 소박하다.

“옛날 흥국사에서 공부할 적에/ 때때로 밤이면 꿈속에서 청산에 놀러 갔네/

옛적 친하던 주지 스님 생각 간절하니/ 틈내어 나를 위해 한번 다녀가구려.”

개목사에서 10년간 수학한 포은 정몽주가 훗날 이곳을 추억하며 지은 시가 돌에 새겨져 입구를 지킨다. 시비는 저 아래 너른 세상이 아니라 풀숲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앞이 트인 경관이 수려하여 해마다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는데 눈부신 하늘만 응시한다. 초연한 자태에서 읽혀지는 여유가 좋다.

민가의 대문 같은 누문을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보물 제 242호 원통전과 우측 뒤편에 산신각이 보인다. 1457년(세조 3년)에 건립된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柱心包) 양식의 맞배집인데 지금은 보수를 해서 운치가 덜하다. 한 칸의 툇마루와 양 측면의 풍판 때문인지 지붕의 무게가 누르는 것처럼 안쓰럽다.

원통전이라는 현판이 깊은 처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얼굴보다 큰 모자를 눌러쓰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전각은 분명 묵언수행 중이리라. 한 쪽 문이 열린 법당 안에는 목조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고, 원통전 앞에는 탑이나 석등 하나 없다. 작은 마당이 햇살을 이고 정적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오래된 건물 마루에 앉아 원통전을 바라본다. 정오의 뙤약볕이 장악한 사찰은 숨이 멎을 것처럼 적막하다. 산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찰은 무심할 정도로 편안하다. 텅 빈 산사의 적요, 아름다운 침묵은 개목사의 훌륭한 법문이다. 어느 암자가 이토록 외로움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적막이 감도는 산사에 홀로 앉아 침묵이 토해내는 언어에 귀를 기울인다.

▲ 조낭희수필가
▲ 조낭희수필가

개목(開目)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뜸`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눈을 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나를 돌아본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시간을 정지시키고 나는 고요와 하나가 된다. 짧은 시간, 적막 속으로의 몰입은 경이롭다. 온전히 홀로 있는 시간이다. 홀로 됨은 외로움이 아니라 하나 됨인데, 일상에서 그 짧은 몰입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짧은 명상 속으로 뛰어드는 익숙한 소리들, 봉정사로 넘어가는 오솔길 쪽에서 나를 부르는 외침이 들려온다. 아쉬움을 접고 경내를 빠져 나온다.

도도한 강물처럼 햇살이 흐르는 풀밭 너머, 소나무 숲에서 일행이 기다린다. 좋은 인연들을 향해 뛰어가는 내 몸짓이 한결 가볍다. 발밑에서 찰방찰방 시냇물 소리가 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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