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절한 동백꽃 연가
문득 봄소식이 궁금하여 남해의 섬, 비진도를 찾았다. 산수가 수려하고 풍광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해산물이 풍부하여 보배에 견줄 만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섬이다. 공기는 투명하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벌써부터 돌아갈 뱃시간을 생각하며 바쁜 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나는 모처럼 낯설지 않은 것들과 호흡하며 바닷가 산책로를 걷는다. 밭둑에서는 매화꽃이 터지고, 길가에는 새로 돋은 쑥이 무리지어 나풀거린다. 햇살에 반사되어 빛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위를 통통배가 지나간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바다와 마주 하고 싶다.
통통배 소리조차 정적 속으로 흡수되는 시간, 친구는 저만치 뒤에서 카메라에 섬 풍경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타박타박 봄빛 속을 걷는다. 똑같은 풍경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길이다. 한참을 걷자 이색적인 바다풍경이 펼쳐진다. 긴 사주를 중심으로 전혀 다른 바다가 나란히 공존한다. 서쪽은 고운 모래사장과 산호빛의 잔잔한 바다가, 동쪽은 깊고 그윽한 푸른빛의 바다가 몽돌해안을 넘실거린다.
조각보를 이어놓은 듯한 밭에는 채 뽑혀나가지 않은 시금치들이 봄나물에 밀려 존재감을 잃어 간다. 새로운 것 앞에서 빛을 잃고 묵묵히 견뎌야 하는 인고의 힘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나 보다. 쑥이며 달래, 마늘잎을 파는 할머니들 뒤로 가파르게 솟은 선유봉이 꿈을 꾸듯 졸고 있다. 비진도를 지키는 아름다운 자존심들이다. 다양한 바닷빛을 연출하는 신비로운 섬, 그 안 어딘가에 비진암이 있다.
미인의 치맛자락 같은 산호길이 한동안 바다를 끼고 이어진다. `바다 백리길`의 한 구간에 속하는 경관 좋은 명품길이다.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오솔길 옆으로 끝없이 바다가 속살대고, 이따금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흔들린다. 섬 전체가 투명한 베일에 싸인 듯 고요하고 평화롭다. 구실잣밤나무 그늘에 서서 바람이 햇살을 업고 바다 위를 흐르는 광경을 지켜본다. 느슨한 시간과 꽉 채워진 여유, 종잡을 수 없던 일상이 잠시 닻을 내린다.
비진암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평온한 돌담길을 끼고 돌자 조금 높은 곳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망부석 같은 암자다. 비진암으로 향하는 돌길 위에는 동백나무가 토해낸 붉은 잔해들이 뒹군다. 추억을 삭이지 못해 동백꽃의 낙화법은 무겁고 슬플 수밖에 없는 걸까. 모가지가 부러진 통꽃의 주검들, 선혈이 낭자한 꽃잎 곁을 봄 햇살이 말없이 지키고 있다. 동백꽃의 눈부신 절규와 봄빛의 짧은 동거가 겨울 송가처럼 애절하다.
충신이 간언하다 목이 잘린 것처럼 통째로 진다하여 동백꽃을 충신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나는 슬픔이 듣는 그리움을 먼저 떠올리고 말았다. 노란 꽃가루가 붉은 꽃잎에 번져 주검조차도 고혹적이다. 자존심과 절개를 목숨처럼 여기며 왔건만 그 뒤안길은 시리고 허무하다. 화사한 봄날, 눈물처럼 지는 동백꽃을 보노라면 자연의 이치는 모질고 잔인하다.
비진암을 지키는 동백나무 앞에서 `춘희`를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가슴에 흰 동백꽃과 붉은 동백꽃을 꽂아 월경일을 표시하며 호색한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냈던 고급 창녀, 그녀의 애절한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비진도의 동백꽃에는 아픔은 있지만, 순수함이 빚어내는 품격이 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친구가 `동백아가씨`를 흥얼거린다. 식상할 정도로 듣던 노랫말이 울컥 가슴을 적신다. 봄날의 비진암이 빨갛게 물이 든다. 동백나무가 드리워진 돌계단은 속세를 벗어나는 출구가 아니라 그리움 짙어지는 인연의 늪으로 빠져드는 입구 같다. 일주문도 불이문도 없다. 작고 소박한 법당이 전부다. 그리운 인연들을 끊기엔 동백꽃은 청순하고 봄 햇살은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깎은 머리가 파르스름한 비구니 스님이 반겨줄 것만 같은데 아무도 없다. 법당은 오래 비어 있었는지 자물쇠가 굳게 잠겨 있다. 처마까지 가지를 드리운 동백나무의 붉은 정념들이 햇살에 반짝이고, 동박새들의 지저귐이 염불을 대신한다. 문틈으로 들여다 본 법당 안에는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닫혀진 문 밖에서 선 채로 삼배를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은 회색빛 바다가, 사람이 그리운 날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법문을 들려줄 것 같은 암자다. 좁은 툇마루에 앉아 얼굴도 모르는 스님을 기다린다.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한참을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스님이 계시지 않은 빈 암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런데도 법당 안 부처님이 그리움에 지쳐 빨갛게 멍이 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비진도의 동백꽃이 모두 이울고 나면 비진암 석등에도 불이 켜질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온다. 친구가 또 다시 동백 아가씨를 흥얼거리며 뒤따른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다. 비진암과 동백꽃의 눈빛을 기억하는 동안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