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가 물러가면 목련이 피고
지평선을 볼 수 있을 만큼 너른 곡창지대에 우뚝 솟은 산, 그 품에 안긴 금산사가 보고 싶었다. 강인하고도 넉넉한 어머니를 떠올리며 금산사로 향했다.
우리를 맞아준 것은 심한 황사 속에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서성이는 겨울의 그림자였다. 봄 햇살의 몸짓이 어딘지 불안하다. 보제루 앞을 지키는 목련 봉오리의 창백한 눈빛과 관광객들의 분주한 발걸음, 넓은 터와 웅장한 전각에서 여느 사찰과 달리 장군다운 기상이 느껴진다. 이른 봄날의 사찰은 어수선하지만, 희망과 기대감으로 술렁인다. 황사가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목련처럼 금산사는 미륵불이 도래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어, 통일신라 때 진표율사가 중창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최고의 미륵도량으로 알려졌다. 또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자신의 복을 비는 원찰로 삼고 중수했으며,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중기 사상가 정여립이 혁명을 꿈꾸었고, 조선 후기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과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 역시 모악산과 금산사를 무대로 활동했다. 어지러운 세상, 미륵의 힘을 빌려 세상을 구원하려 했던 이들의 꿈과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사찰이다.
금산사의 중심 전각은 미륵전으로 금당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불전으로 국보 62호이다. 1층은 대자보전, 2층은 용화지회, 3층은 미륵전의 구조로 되어 있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 중생을 구제하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장육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금산사에 가신 분은 주인 찾아 인사하소`라는 유명한 금산사가(歌)가 생각나 미륵전으로 향한다. 발걸음이 떨려온다.
법당문은 열려 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삼존불이 숨이 막힐 듯 웅장하다. 주불이 11.82m, 좌우 보불이 8.8m로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라고 한다. 진표율사가 처음 세운 미륵불은 철불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다시 목불로 조상하였지만, 그마저 불에 타고 지금 있는 석고불은 1938년에 중건된 것이다. 크기에 눌려서일까? 3배를 하는 동안 한없이 작고 낮아진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한참을 서서 삼존불을 우러러보지만 미륵불의 마음을 읽을 길이 없다.
동행인이 미륵존불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시루모양의 철수미좌가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쪽문을 열고 불단 뒤로 난 좁은 통로를 들어선다. 승승장구하던 견훤의 도피와 한이 떠오르고, 시대를 앞서갔던 명민한 역사 속의 인물들도 생각난다. 순간 나를 붙들고 있던 한계의식이 부끄럽다. 지금까지 사찰에서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느낌이다.
거대한 미륵장육상을 받치고 있는 쇠로 된 연화대를 조심스레 만져본다. 가슴이 뭉클하다. 오랜 세월로 심하게 부식되었지만 불자들의 손길이 닿은 곳은 매끄럽게 윤이 난다. 믿음과 염원만큼 강한 것이 있을까? 유토피아적 미래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떡시루 연화대가 부식되기 전에 미륵불이 나타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면 좋겠다.
떡시루는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솥이 모든 것을 조화시킨다면 시루는 그것들을 익혀 성숙시킨다. 시루는 솥 위에 있을 때 비로소 제 역할과 쓰임을 다한다. 둘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시루에 넣고 찌듯이 미륵불이 새로운 세상을 오게 한다는 믿음에서 만들어진 연화대이다. 어쩌면 역사는 그 가능성 하나로 발전해 왔는지 모른다.
미륵전에서 조금 떨어진 마당에 커다란 석련대가 보인다. 아름다운 연꽃과 작은 잎들이 새겨져 화려하고 우아하다. 오랜 세월에도 크게 파손된 흔적 없이 양호하다. 그러나 제 역할을 잃고 보물 23호라는 이름표만 단 채 쓸쓸히 마당을 지키고 있다. 부식되어 가면서도 큰 미륵불을 받치고 있는 떡시루 연화대와는 대조적이다.
석련대 앞에 서서 솥과 시루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제 쓰임을 다 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나는 솥의 존재를 무시한 채 시루 같은 존재로 살아가지는 않는가? 어쩌면 물과 숯을 외면하고 좋은 떡시루만 찾아 헤매는 아둔한 무쇠솥일 수도 있다.
대적광전 옆 돌담위에 측백나무가 폭포수처럼 가지를 아래로 드리우며 자란다. 측백나무의 유연한 생명력은 인공돌담을 자연스럽게 가려주어 운치를 더해 준다. 멋진 솥과 시루의 만남이 빚어낸 경관이다. 세상이 힘들수록 아집을 버리고 나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어울림이 필요하다.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는, 그런 솥과 시루의 인연을 기대해 본다.
인생은 무(無)라고 말하지만 존재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느릿느릿 목표를 향해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가녀린 봄 햇살이 언 땅을 녹이듯, 새로움을 위한 시도는 언제나 필요하다. 나이를 핑계로 방치하거나 잃어버렸던 의욕들을 다시 점검해 본다. 낯선 지방에서 만난 금산사, 그 눈빛은 의욕과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목련이 몸을 푸는 날, 금산사 떡시루를 생각하며 소박한 꿈을 다시 설계해 보리라. /조낭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