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를 닮은 산, 바람을 담은 사찰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육육봉이 연꽃잎처럼 절을 둘러싸고 그 연꽃 수술 자리에 청량사가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봉우리마다 크고 작은 암자가 27개나 있어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메울 만큼 불국토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은 청량사와 외청량사라 불리는 응진전만 남았지만 겸재 정선의 동양화 한 폭을 보듯 비경을 자랑한다.
몇 년 전 처음 청량사를 찾았을 때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은 그야말로 고행길이었다. 서둘러 사찰을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길은 더 험난하고 고되게 느껴졌다. 오늘은 여유를 가지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오른다.
결코 쉽게 넘보아서는 안 될 사찰이다. 한걸음 한걸음 뗄 때마다 다리는 아프지만 백팔번뇌 내려놓고 마음을 모으다 보면, 이내 기왓장을 이어붙인 수로를 따라 맑은 물길이 마중을 나오고, 안심당 찻집이 마당보다 낮은 곳에 서서 우리를 맞는다.
땀을 닦으며 올려다 본 청량사는 열두 폭 바위 병풍을 두른 듯 아늑하고 편안하다.
자연석 축대 위에 자리 잡은 적당한 크기의 전각들과 층을 이룬 담장, 잘 배열된 장독들, 절을 호위하듯 둘러 선 기묘한 봉우리들이 가슴을 뛰게 한다. 수행이나 철학보다 문학과 풍류를 논하고 싶어지는 경관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오층석탑 옆에 서서 낮게 펼쳐진 산등선과 기암괴석 봉우리들을 가슴에 담고 싶다.
나무 계단 위로 오색 등이 춤을 춘다. 그러나 `삼각우송` 아래에는 이미 수많은 등산객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땀을 식힌다. 하늘을 찌를 듯 절제된 간결미가 돋보였던 오층 석탑은 등산객들 사이에서 포즈를 취하느라 여념이 없고, 독립영화 `워낭소리`에서 소의 극락왕생을 빌던 노부부의 쓸쓸하고 가슴 시린 장면도 간 곳이 없다. 오늘의 청량사는 뜻밖의 풍경으로 나를 맞는다.
초파일을 맞기 위한 형형색색의 오색 등과 등산객들로 절은 잔칫집 분위기로 한껏 들떠 있다. 수 년 전, 기억 속의 청량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맑고 따뜻한, 선비 같은 품을 기대했었다. 마음을 둘 곳이 없다. 경내를 배회하다 사진을 몇 컷 찍어본다. 청량사는 사진 속에서도 화사한 웃음으로 화답해 온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흰 갈매기(白鷗)뿐/ 흰 갈매기야 떠들 리 있겠냐마는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부(魚舟子)가 너를 보고 이곳을 알까 두렵도다.”
퇴계 이황 선생이 지은`청량산가`를 떠올리며 유리보전으로 향한다. 현판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중생의 병을 다스리고 생명을 연장해 주는 의술에 능한 부처인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지장보살 우측에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는 아무도 없다. 종이로 만든 지불 약사여래불을 향해 기도를 해 보지만 마음은 여전히 어수선하다.
기이한 바위 봉우리를 이고 가파른 산 중턱에 자리한 청량사를 둘러보고 정상으로 향하기로 했다. 선비 같은 산, 바람처럼 욕심없는 절이다. 주희의 무이정사를 본 따 지은 청량정사 앞에서 나는 정통 주자학을 계승한 퇴계 선생의 자부심을 읽기보다는 두향을 먼저 떠올리고 말았다.
후학들이 그랬듯이 청량산을 두루 돌고나면 퇴계 선생의 정신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초야에 묻혀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키고 후진을 양성하며 영남학파의 큰 획을 그은 분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학문적 업적보다 두향의 잔영이 떠나질 않는다. 단양 군수 시절 매화가 인연이 되어 정분을 나눈 관기 두향과의 맑고 그윽한 사랑과 이별, 그리움의 뒤꼍에는 빙기옥골(氷肌玉骨) 매화가 있지만, 사무침이 깊어지면 바람처럼 청량산을 찾았을 법도 하다.
단양을 떠난 후 20여 년간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향과의 애틋한 사랑과 선생의 학자다운 기품이 발길 닿는 곳마다 숨어 있을 것만 같다.
동방의 주자라 불릴 만큼 온건하고 합리적인 학자였지만 그가 더 인간적이고 따뜻해 보이는 것은 두향에 대한 올곧은 사랑 때문이 아닐까. 학문적 깊이와 더불어 수양과 절제, 죽는 날까지 한결같던 지조 높은 사랑은 청량산을 닮았다.
명종 때 성리학자 주세붕도 탁문아라는 기생과 청량산에 자주 올라 술에 취해 학문과 재담을 논했다. 탁문아는 `대학`을 거침없이 암송하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춤과 글에 능한 기생이다. 일패 기생과 달리, 정을 주고 몸을 파는 이패 기생이었지만 그들의 관계를 추하거나 난잡하게 여기지 않는 까닭은 선비로서의 사도와 기생이 지켜야 할 기도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발 870m의 자소봉과 선학봉을 잇는 아찔한 하늘다리 위에서 나는 조선의 선비와 그들의 연인을 생각한다.
지성과 감성이 겸비된 삶, 거기에 초승달 같은 이지적인 사랑까지 품고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바람이 분다.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바람의 몸짓은 더 부드럽고 고혹적이다. 어느 봉우리에서인가 거문고 소리와 노랫가락이 환청처럼 들려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