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냄새 찾아서
지척의 거리에 있는 고도 경주는 가깝고도 먼 도시이다. 자주 들르긴 하지만 천 년의 역사를 제대로 음미하거나 감동해 본 적은 거의 없다. 신라의 전통 문화와 예술이 가까이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소극적이었다.
용장골에서 시작된 긴 산행의 행렬을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며 맞는다. 봄이 오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리 높지 않지만 신라 불교예술의 보고인 지붕 없는 박물관, 간 밤에 내린 비로 자욱한 운무가 숲을 지키고 있었다.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젖은 솔 내음이 후각보다 가슴을 먼저 자극한다.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 말문이 막히고 겸허해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정직한가. 자연은 끊임없이 비경을 만들어내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예술가이며 가치를 논할 수 없는 예술이다.
는개가 내린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소리 없이 젖어들며 느낌으로 자기를 알려온다. 가냘프고 미약한 몸짓이지만 우리를 적당한 감성과 차분함에 젖게 하는 사랑스런 존재다. 칠불암을 향한 설렘은 간곳이 없다. 는개 내리는 이 솔숲길을 마냥 걷고 싶다.
“어머나! 개불알꽃이 벌써 피었네요.”
“개불알꽃이 며느리밑씻개와 결혼했다는 소식 들었어요?”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진 어느 시인의 경탄에 위트 넘치는 입담이 이어진다. 봄이 놀라서 주춤거린다. 계절 좋은 어느 날, 개불알꽃과 며느리밑씻개가 결혼식을 올리고 남산 백운사 아래 길가에 신혼방을 차린 후 애기똥풀을 낳고 천년만년 살았단다. 지천에 널려 있는 풀꽃들이 왜 내게는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을까. 자연을 사랑하고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만 받을 수 있는 특별한 풀꽃들의 초대가 부러울 뿐이다.
남산이 멋진 배경을 연출하니 다들 재치가 반짝인다. 다리는 아프지만 칠불암을 향하는 마음은 경쾌하다. 이영재를 넘어 가파른 바위 계단을 내려가면 곧 칠불암이 나타난다고 누군가 격려한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운무가 비경을 연출하는 이 비탈진 산등성이 어느 쯤에 칠불암이 숨어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존경하는 문인이 칠불암에 대한 예진스님의 사랑과 열정, 달빛 냄새를 얘기할 때마다 나는 꿈을 꾸듯 온몸으로 들었다. 나도 달빛냄새를 맡고 싶다.
조용한 칠불암의 옆구리를 습격하듯 들어선 한 무리의 등산객들은 마애불 앞에서 잠시 숙연하다. 4.26m 높이의 병풍바위에는 항마촉지인을 한 본존이 꽉 차게 부조되어 있으며,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도 인체보다 훨씬 장대하다. 사각 돌기둥에 부조된 4구의 부처도 훼손되지 않은 채 늠름하게 남산을 지키고 있다. 모진 세월을 버텨온 힘은 무엇일까? 위엄 있고 근엄한 자태 속에서도 잃지 않은 자비의 덕이며 신라인의 염원이리라.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삼존불은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천년의 시간을 뚫고 금방이라도 걸어 나와 미소로 제압할 것만 같다. 남산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국보 312호인 마애불상군, 그 이름을 따온 칠불암은 원효가 머문 도량과 현존하는 유물로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작은 법당에는 부처님을 따로 모시지 않고 마애불상군이 보이는 벽에 커다란 유리문을 내어 안과 밖을 하나로 묶었다. 작은 지혜로 인해 법당의 영역은 창 너머 마애불상군과 남산 전체로 확장된다.
근엄함 뒤에 감추어진 미소를 찾느라 뒤늦게 점심공양을 서두른다. 먼저 도착한 문인이 좁은 마루에 걸터앉아 공양을 하다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짓한다. 연꽃 위에 앉은 사방불에 이어 5방불이 따로 없다. 칠불암을 찾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피로 모두 5방불이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편안해질까.
마애불상군이 보이는 돌 위에 앉아 비빔밥을 먹으며 내 안에도 미소를 심기로 다짐한다. 대화를 나누며 먹는 오찬은 소박하지만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칠불암을 사랑하는 지인이 신선암으로 안내한다니, 운이 좋으면 달빛 냄새로 낭만적인 후식까지 곁들일지 모른다.
일행들 몰래 찾아간 낭떠러지에 신선같은 마애불이 기다리고 있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산야를 배경으로 구름을 타고 유희좌를 하고 있는 관음보살상은 온화하면서도 인자하다. 아우라가 넘친다. 수행하던 승려가 마애불을 사모하다, 그 열정을 참지 못해 바위 아래로 몸을 날리자, 연꽃잎으로 변해 산산이 흩어졌다는 애틋한 전설을 가진 마애불이다.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마애불을 앉힌 신라인의 불심 앞에 가슴이 먹먹하다.
옆에서 마애불의 미소가 보인다고 하는데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빛의 방향을 가늠하고 자리를 옮겨가며 애를 써보지만 마애불은 쉽게 미소를 띠지 않는다. 후일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리다 무심코 돌아본 순간, 달빛 냄새가 가득하다. 보름달이 훤히 산등성이를 밝히면 미소가 드리워질 신선암, 그 냄새가 온몸으로 파고든다. 대낮에 본 달빛냄새는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황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