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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백양사

조낭희 수필가
등록일 2015-04-17 02:01 게재일 2015-04-1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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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탑돌이
▲ ▲ 조낭희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아름드리 갈참나무의 중후함과 파스텔 톤으로 물들어가는 애기단풍들의 두근거림이 길을 밝힌다. 연못에 몸을 담근 쌍계루의 반영도 봄빛으로 수줍다. 하늘과 나무, 햇살, 말끔한 차림의 백암산까지 연못 안에 모여 자기를 반추한다. 약간의 긴장과 평화로움이 살아있는 완벽한 데칼코마니, 백양사의 봄날은 유난히 투명하다.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와 더불어 5대 총림의 하나인 백양사(白羊寺)는 632년(무왕 33)에 여환이 백암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고려 때 중연 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조선 선조 때 환양 선사가 다시 백양사라 고쳐 불렀다.

백양사의 이름은 흰 양을 제도한 데에서 유래한다. 환양이 백학봉 아래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흰 양도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다. 법회가 끝나던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이 소멸하여 다시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며 절을 하였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다. 그 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 불렀다.

천왕문을 들어서는데 매화향이 먼저 반긴다. 천연기념물 486호로 고불총림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고불매는 올해도 때를 놓치지 않았다. 검은 수피와 이끼 낀 옷을 입은 350살의 홍매화가 몸을 푸는 날, 봄비 온다는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수줍고도 우아하다. 고령의 산통이 빚어내는 환희, 깊고 은은한 향기가 물결친다. 연륜과 불심이 묻어나는 눈물겨운 산고, 그것은 성숙된 아픔 뒤에 맞는 희열이기도 하다.

고불(古佛)이라는 이름이 붙기까지 한 그루 매화나무의 일생을 생각한다. 함께 동심을 나누었을 동자승과의 추억, 지혜롭던 노승과의 아름다운 별리만 있었으랴. 천형 같은 외로움과 번뇌로 숱한 밤 잠 못 이루었을 긴 시간들은 단단한 옹이가 되었으리. 불쏘시개로 베어질지라도 평범한 속가의 뒤뜰을 어느 한 때는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애잔한 마음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해탈한 듯 기품 넘치는 초연함으로 섰지만 유난히 꽃빛이 맑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수백 년을 백양사에서 살아온 고불매는 전생에 쌓은 공덕이 컸나 보다. 섬세한 향기가 땅을 진동시키고 보는 이를 감동케 하는 저 노장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불심 가득한 한 그루의 매화나무가 촛불이 되어 백양사를 밝히고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햇살 가득한 뜰에 앉아 온몸으로 매화향기를 맡는다. 나를 돌아보고 삶을 생각한다. 문명의 이기에 발목 잡힌 도시에는 소비만 있을 뿐, 죽비가 없다.

문득 염불 소리가 나를 깨운다. 대웅전의 예불소리다. 어쩌면 천왕문을 들어설 때부터 예불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고불매에 정신이 팔려 내 모든 감각은 차단되어 있었다. 공감 능력에 비해 균형 감각이 떨어지는, 고질병과 같은 나의 실수를 자책하며 서둘러 대웅전으로 향한다. 늦은 인사에도 부처님은 온화하고, 스님의 염불 소리는 고불매의 향기만큼 깊고 은은하다. 108배 대신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는다. 총림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걸맞지 않은 소박함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 조낭희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정갈한 기운을 가득 안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8층 석탑으로 향한다. 팔정도를 상징하는 석탑은 너른 마당을 두고 대웅전 뒤에 자리 잡았다. 홀로 봄볕을 쬐는 사리탑과 멀리 백학봉의 훤한 이마가 조화롭다. 탑의 둘레 모서리마다 팔정도가 새겨져 있다. 바른 삼매(正定)·바른 생각(正念)·바른 정신(正精進)·바른 생활(正命)·바른 행동(正業)·바른 언어(正語)·바른 사유(正思)·바른 견해(正見), 팔정도의 의미를 하나하나 가슴에 새긴다.

무슨 이유에선지 탑돌이는 수행의 의미보다 낭만성이 강해 보였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던 김현과 호랑이 처녀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곤 했다. 초파일 밤, 연등을 들거나 합장한 채 소원을 빌며 탑을 도는 일은 상당히 문학적이고 운치 있어 보였다. 언젠가 나도 달빛을 밟으며 소원을 비는, 그런 탑돌이를 해 보고 싶었다.

염불소리 낭랑하고 매화 향기 그윽한 봄날, 나는 백양사 뒤뜰에서 탑돌이를 한다. 두 손을 모으고 진지하게 탑을 돈다. 부처는 멀리 있지 않다, 나를 바로 보고 제대로 관찰하라, 뜻을 두고 나아가면 길은 언제나 통해 있다, 노를 젓지 않으면 배는 떠밀려 간다, 실천이 곧 수행이다, 모서리마다 팔정도가 죽비처럼 꾸짖는다. 팔정도는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부처님의 행복론이다. 삶의 방향이 보인다.

고장 난 시계바늘처럼 돌고 또 돌았다. 나를 돌아보고 삶을 점검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백양사 고불매가 노령에도 향기를 피워내듯, 내 삶에서도 향기가 묻어나기를 소원한다. 일상이 언제나 오늘처럼 깨어있다면 좋겠다. 충만한 기쁨을 안고 돌아서는 나를 백암산이 배웅한다. 대웅전 염불 소리가 한참을 따라 나온다. 연못 속에는 봄날의 한 때가 여전히 기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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