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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청암사

조낭희 수필가
등록일 2015-05-01 02:01 게재일 2015-05-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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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그 이루지 못할 사랑
▲ 김천 청암사 경내 육화료 앞에 핀 자목련.
▲ 김천 청암사 경내 육화료 앞에 핀 자목련.

봄비가 성주호를 적신다. 운무의 흐느낌조차 안온한 4월, 자기만의 색깔로 다투어 피어나던 파스텔톤의 빛깔들이 차분하게 호수 속에 잠들었다. 봄날의 유혹 앞에서 호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하지만 그 내면에는 굉장한 소용돌이가 있음을 안다. 뒤늦게 핀 산벚꽃들과 색색깔의 연둣빛 치장이 이어지는 무흘구곡을 따라가면 청암사가 나온다.

청암사는 직지사의 말사로 헌안왕 3년(859)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으나, 인조 25년 화재로 전소되어 혜원 스님이 중건하였다. 여러 번의 전소와 폐사로 성쇠를 거듭했지만 지금은 청암사 승가 대학이라는 비구니 강원이 설치되어 100여 명의 스님들이 공부하는 사찰이다. 단청 없이 나무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반가의 고택 같은 전각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불령산 북쪽 진입로의 경관도 아름답지만 인현왕후로 인해 더욱 알려졌다.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되었을 때 서인의 신분으로 3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환궁 후 인현왕후는 큰스님에게 서찰을 보내 고마움을 전하고, 불령산 적송림을 국가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전답을 하사하여,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일주문 앞에 도착했을 때 비는 그쳐 있었고 인적이 없다. 촉촉하게 젖은 흙길을 걷다 보니, 목조로 만든 무시무시한 사천왕상 대신 벽에 그려진 사천왕이 맞는다. 여느 사찰과 달리 표정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긴장감이 돌만큼 엄숙한 통과의례가 오늘은 마음이 가볍다. 저만치 청암사 전각들이 보이고 맑은 물소리와 푸른 이끼,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필체조차 흉하지 않다.

재물을 멀리한 스님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는 우비천(牛鼻泉), 그 샘물을 마시면 부자가 된다는 전설을 알고 친구가 물 한 바가지를 권한다. 경각심을 주기에는 낡고 묵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은 걸까? 부채를 가린 스님의 자세보다는 재물을 얻는다는 전설에 재미삼아 물을 들이킨다. 결국은 잃어버리고 말 것들이란 걸 알면서도 경계에서 얼쩡거리는 나와의 조우, 물맛이 덤덤하다.

조용한 경내에는 봄비가 도둑고양이처럼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한다. 반가의 사랑채 같은 육화료 앞에는 오래 된 자목련 한 그루가 몸을 풀다 침묵 중이다. 봄을 알리는 목련의 개화치고는 늦어도 한참 늦은데 해산은 느리고도 신중하다. 목련은 연못 없는 절에는 연꽃을 대신하여 심는 나무다. 그러나 이토록 품격 있는 자목련을 본 적은 없다. 60년의 수령치고는 줄기가 굵고 이끼까지 두른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단아하고 순결한 모습으로 우리를 설레게 하던 백목련 봉오리는 죽음 앞에서 우리를 실망시킨다. 순백의 흰빛은 질척거리며 품위를 잃는다. 몰락한 폐가마냥 쓸쓸하고 허무하다. 그나마 자목련은 큰 자줏빛 꽃잎이 주는 우아함과 후덕함이 있다. 정숙하고 마음씀이 넉넉한 반가의 여인 같다. 목덜미가 유난히 애처로우면서도 꿋꿋해 전통적인 한국 여인 같은 꽃이다. 인기척이 없는 육화료 마루에 앉아 자목련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숙종을 두고 장희빈과 빚어졌을 사랑과 갈등, 기구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삶을 생각하니 명치끝이 아려온다. 매혹적이고 향이 강한 매화는 선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나 봄을 훔친다는 목련은 향기가 없다. 꽃샘추위 이겨내며 꽃을 피워보지만 봄날의 꿈은 짧고도 짧다.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는 슬픈 꽃말 하나 남기고 지고 만다. 뒤안길은 슬프고 외롭다.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게 인생이라지만, 후덕하고 어질다고 평가받는 인현왕후는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돌아볼까? 성주호의 잔잔한 수면이나 우아하게 봄비를 맞는 자목련처럼, 고요함을 위한 내면은 번민과 아픔의 연속이었으리. 명예를 회복하지만 3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비련의 여인 명성왕후, 이 비 그치고 나면 자목련도 후두둑 실밥이 터지듯 바쁘게 꽃을 피우고 떠날 것이다.

육화료 마루에 앉아 자목련에 빠져 있을 때, 가냘픈 체구의 젊은 스님 한 분이 올라온다. 합장을 하고 인사를 건넨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는 목소리, 눈빛도 미소도 선하다. 또 다시 성주댐 속에 잠들어 있던 파스텔톤의 봄이 떠오른다. 스님이나 수녀님, 성직자의 편안한 낯빛과 마주할 때 우리는 겸허한 행복을 맛본다.

▲ 조낭희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하지만 누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하는가가 나 자신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나는 나 자신 외의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짧은 생은 끊임없이 갈등만 하다 어느 순간 목련처럼 지고 말리라. 아름다운 감성과 현실적인 꿈을 내려놓고 묵묵히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 어쩌면 그 삶이야 말로 진정한 향기를 뿜어내는 불사(不死)의 길인지 모른다.

/조낭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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