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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말로 다할 수 없는 기도들… 완주 화암사(花巖寺)

꿈결에 다녀온 듯 어렴풋하지만 문득문득 사진첩을 펼쳐보듯 생각나는 절이 있다. 아름다운 오솔길, 속세를 등진 고독감이 눅눅하게 온몸으로 배어들던 산사, 나는 벼르고 별러 마지막 산사 기행을 화암사로 정했다.새파랗던 청춘이 고스란히 살아서 반겨줄 것만 같아 마음이 설렌다. 하지만 멀고 먼 길을 달려 불명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 모든 기대감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넓은 주차장과 맞은편으로 뚫린 포장길 앞에서 변화의 예감은 적중했다. 신비롭던 오솔길은 넓고 완만해졌으며 가랑잎의 뒤척임조차 없이 산길은 적적하기만 하다. 도솔천을 찾아가듯 몽환적이던 그 가을날이 자꾸만 그리워진다. 오솔길에 취해 홀린 듯 따라가면 별천지처럼 숨어 있던 절, 화사한 단풍 속에서도 유난히 외로워 보이던 산사였다.계곡물도 폭포수도 하얗게 얼어붙었다. 얼음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를 고로쇠나무 한 그루가 귀 기울이며 들을 뿐, 겨울 숲은 고요하다. 산은 가파르지만 길은 끝까지 친절하다. 나는 군데군데 잉크자국이 번진, 젊은 날의 일기장을 펼쳐보듯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달래며, 일말의 기대마저 무너져 내리지 않기를 기도한다.그토록 다시 보고 싶었던 화암사 앞에서 선뜻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한참이나 서서 그 옛날을 회상한다. 먼 속삭임들이 하나 둘 마중을 나오고 나는 몇 미터 앞에서 조각난 퍼즐을 맞추듯 기억들을 조립한다. 큰 나무들이 몇 그루 잘려나갔지만 그 옛날의 애잔함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의 세계가 확고한 선비처럼 반듯하다.밤 새 눈발이 날렸나 보다. 응달에 남아 있는 잔설을 뒤로 하고 절로 향한다. 사찰의 규모에 비해 높고 큰 우화루가 요새처럼 든든하게 앞을 가로막는다. 절의 배치로 보자면 우화루를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하여 경내로 들어가는 게 제일 흔한 방법인데 이곳 우화루는 반누각식으로 만들어져 아랫부분은 돌벽으로 막혀 있다. 요사채처럼 보이는 행랑채에 크지 않은 문이 있어 마치 여염집을 연상시킨다.요사채 댓돌 위에 놓인 털신 한 켤레와 스님의 지팡이로 보이는 알루미늄 폴대가 벽에 기대어 있을 뿐, 인기척이 없다. 겨울바람 홀로 우화루 처마 끝에서 풍경을 타고 논다. 꽃비가 내린다는 우화루, 그 이름 앞에만 서면 왜 쓸쓸하고 처연해지는지 모르겠다. 지독히도 고독해 보이던 옛 기억과 달리 절은 엄숙하고 평온한 적요에 잠겨 편안하다.주인 없는 집을 기웃거리듯 조심스럽게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ㅁ자 형식으로 전각들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다.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주법당인 극락전이 제일 높게 자리하고, 마주보는 우화루와 그 옆에 적묵당이 서열대로 키 높이를 달리한다. 탑 하나 없는 마당과 적묵당에 딸린 부엌문 때문인지 절집이라기보다 자식을 대처로 떠나보낸 노부부가 살아가는 시골집 같기도 하다.한마음으로 둘러앉은 어깨들 사이로 깊고 깊은 깊은 시간들이 살아간다. 절의 배치가 안정적이면서도 신비롭다. 외부의 나쁜 기운이 함부로 기웃대지 못하도록 경계라도 하듯 절은 폐쇄적일 수도 있다. 겨울 햇살 몇 줄기가 떨고 있는 우화루의 거친 마룻바닥, 투박한 나뭇결이 아름다운 목어, 적묵당 기둥에 박혀 있는 나비 모양의 짜깁기까지, 누수된 세월의 흔적들이 가슴을 뭉클거리게 한다. 무욕(無慾)의 작은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가 서로를 향한 저 공(空)의 눈빛들에서 나는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맛본다.국보 제 316호 극락전은 화암사의 주불전으로 중국과 일본의 건축에서 쓰이는 하앙 기법이 유일하게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서까래가 빠져나온 처마, 그 밑에 길게 가로 놓인 처마도리 밑으로 조각된 용머리들이 보인다. 그것이 하앙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백제 건축에 주로 쓰였지만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절에 대한 연혁은 전해지는 게 없고 조선 초에 세워진 중창비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머물며 수도했다는 내용만 전해진다.적묵당 차가운 툇마루에 앉아 처마 끝으로 와 안기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적막한 숲에도 여름이면 별들이, 겨울이면 새하얀 눈들이 소리 없이 화암사 안마당에 내려와 예불을 볼 것이다. 산 속에 앉아 있으면서도 숲을 등지고 내면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절, 바위 위에 피어나는 한 송이 꽃 같은 사찰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고요 속으로 나는 빠져들어 간다.조낭희 수필가극락전 법당 안은 바깥보다 훨씬 춥다. 손과 발이 시리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백팔 배를 시작한다. 다시 시작된 1년 4개월의 기행, 돌아보니 부처님의 자비로 충만했던 날들이었다. 날마다 백팔 배로 나를 돌아보고 하루를 접는 일은 이제 일기를 쓰듯 자연스러워졌다. 남은 세월도 소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자세로 한 걸음씩 성장할 수 있다면 좋겠다.나의 청춘이 쫓기듯 불안했다면, 지금은 새로운 희망과 목표가 있어 든든하다. 짧은 나와의 조우가 행복하다. 뒤안에서 일렁이는 대나무 숲, 한 자 한 자 떨어져 앉은 극락전 현판, 요사채를 지키는 늙은 모란에게도 두 손을 모은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기도들이 내 안을 채우자, 우화루 처마 끝에서 다시 풍경이 울어댄다.끝

2020-12-28

절제 속에서 빛나는 완강함… 전남 남원 실상사(實相寺)

지리산 서쪽 들판에 천왕봉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절이 있다. 천왕봉과 반야봉, 덕유 산맥의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연꽃의 꽃밥 자리에 위치한 실상사이다. 일주문을 대신하는 해탈교를 건너도 익숙한 차안의 고리는 그대로 따라온다. 익살스러운 표정의 세 돌장승을 지나고 천왕문을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불국토는 멀어 보였다.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홍척 증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로 문을 열었다. 중국으로 건너가 제일 먼저 선법을 배워온 이는 가지산문의 도의국사였지만 산문을 연 이는 실상산문의 홍척국사가 먼저라고 한다. 단일 사찰로는 국보 1점과 보물 11점으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구산선문은 귀족, 왕실과 결탁하여 타락한 교종불교에 반기를 들고 나말여초에 중국 달마의 선법을 수용한 선종불교의 아홉 산문을 말한다. 교종불교가 인과율에 얽매어 운명론적 인식을 가졌던 데 비해 선종은 누구나 마음을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신라 말 혼란기 때 실상산문을 최초로 형성하게 된다.하지만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실상사도 불타버리고 백 년 가량 폐사처럼 방치되어 오다 숙종 16년, 크게 중창되었지만 고종 때 다시 소실 돼 1884년에 여러 승려들의 힘으로 10여 채의 건물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엄청난 양의 와편들로 이루어진 탑이 웅장했을 실상사의 옛날을 짐작케 한다. 멀리 정면으로 보광전이 보이고 그 앞에 보물 제 37호 동·서 삼층석탑의 정교한 상륜부가 추위 속에서도 꼿꼿하다.둥근 장고모양의 기둥과 소박한 듯 우아한, 보물 제 35호 석등은 소박한 전각들에 비해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한다. 온갖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실상사를 지켜온 진리의 등불,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사찰을 환하게 밝혔을 석등 앞에 서니 스스로가 작아진다. 어둠이 찾아오면 의식을 치르듯 성스러웠을 수많은 점화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다.마당을 흐르는 겨울의 찬 공기도 천년의 보물들 앞에서는 유순하기만 하다. 삼층 석탑이나 석등에는 철재 보호막이 없지만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위용이 느껴진다. 하늘을 찌를 것만 같은 신라인의 기상을 안은 두 탑과 석등의 아우라가 뿜어내는 깊은 정적, 큰 상흔 없이 천 년의 시간을 건너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내 안에 흐르는 한국인의 혼이 자랑스럽다.단청이 벗겨진 보광전의 수수한 자태 앞에서 신발을 벗지 않을 수 없다. 아미타 삼존불 옆에서 광채를 발하는 범종, 종을 치는 부분에 일본 지도 모양이 있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설로 일제 말기에는 주지가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주치는 것들마다 스토리가 숨어 있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만 같다.경관 좋은 산속을 두고 하필이면 황량한 들판에 자리한 실상사, 그로 인해 마주해야 할 고난의 순간을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촉촉해져 온다. 이토록 많은 보물들이 큰 상흔 없이 천년의 세월을 살아 온 게 고맙고 대견할 뿐이다. 남아 있는 빈 터마다 과거의 영화와 아픔이 애틋하게 피어오른다.천천히 옮기는 발걸음에 사색의 무게가 더해진다. 크고 웅장했던 옛 전각을 그려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옛 기단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낮은 기단을 쌓아 아담하고 소박한 전각들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서둘러 절을 증축하기보다 최대한 옛 흔적을 간직하려는 진중함이 보여서 좋다. 적어도 전통과 현대가 어색하게 어울려 격을 떨어뜨리는 과오를 범하지는 않았다.조낭희 수필가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이적을 보인다는 영험한 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실상사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약사전으로 향한다. 낮은 기단 앞에 놓인 댓돌 하나에도 생명력이 느껴지는데 약사전을 지키는 나목의 자태는 왠지 모르게 안쓰럽다. 법당 문을 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철불이 좌대 없이 맨땅에 모셔져 있다. 실상산문의 2대 조사 수철화상이 4천 근의 철을 녹여서 만든 3m의 거대한 철불이다.천왕봉의 정기가 일본 후지산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자리에 모셨다고 하지만 수난의 시기도 있었다. 조선 시대 지방 유생들의 방화로 가람이 불에 타는 비운을 맞자, 철불은 들판에 방치되어 인근 주민들에게 병을 고쳐 주는 약사여래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숙연한 마음으로 나는 백팔 배를 시작하고 법당 밖에서는 대나무들이 스산하게 울어댄다.법당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더 없이 차분하다.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보물들을 찾아가는 발길도 엄숙해진다. 절제미가 뿜어내는 소박함, 그 속에 숨어 있는 의연한 기상, 새로운 것에 휘둘리지 않는 안정된 눈빛, 다양한 기운들이 자꾸만 가슴을 뭉클거리게 한다.짧은 겨울 해가 소나무 가지에 걸려 보석처럼 부서지자, 황량하던 실상사가 한껏 몸을 일으키며 다시 살아난다. 석양으로 지는 해가 명부전의 엄숙한 이마 위에 번지고, 차가운 겨울 공기로 초췌해 보이던 실상사의 낯빛도 환해진다. 오랜 시간을 머물렀는데도 돌아서는 발걸음은 좀체 가볍지가 않다. 나는 옷깃을 여미며 멀리서 실상사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2020-12-21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가 보이고… 전남 곡성 태안사(泰安寺)

유순한 보성강 줄기를 따라 겨울 햇살이 반짝이며 따라온다. 보성강을 건너 잡목숲사이로 접어들자 차는 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힘들게 나아간다. 그토록 그리던 태안사 가는 길은 온통 그리움에 젖어 있다.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운 건 지붕 있는 다리, 능파각 때문이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능파각은 850년 혜철국사가 지었지만 파손되어 1767년에 복원했다. 누각이면서 다리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아름다운 건축물에서 선인들의 여유와 풍류를 읽는다. 능파각 아래로 펼쳐지는 계곡의 풍경과 물소리에 저절로 번뇌가 사라진다. 나는 큰길을 두고 능파각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옛길을 걷기로 했다.피안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차고 딱딱한 시멘트 길이지만 이상하게 편안하다. 낙엽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정갈한 길, 곧게 뻗은 전나무들의 선한 눈빛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일주문이 보인다.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편액에는 그린 듯 편안한 성당 김돈희의 서체가 담겨 있다. 고전적인 묵직함보다 세련미가 돋보이는 서체와 잘 어울리는 사찰이다.산세가 오동나무 속처럼 아늑해서 오동나무 속이라는 뜻을 가진 동리산, 그 깊은 곳에 보금자리를 꾸민 혜철국사의 풍수적 안목은 가히 뛰어나다. 사찰은 지나치게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으며 중용의 도리를 몸에 익힌 군자처럼 기품이 넘친다. 부드러운 고요 속에 잠든 경내, 내 발걸음 소리에 산사가 깰 것만 같아 조심스럽다.화엄사의 말사로 대안사(大安寺)라고도 불린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에 세 분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였다. 백여 년 뒤 문성왕 9년(847년), 적인선사 혜철국사가 동리산문을 열고, 고려 태조 때 광자대사가 중창하여 동리산파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조선 초 효령대군이 머물기도 했으며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사세가 컸지만 6.25전쟁 때 전각이 불타 대부분 복원한 것이다.겨울 산사답지 않게 바람 한 점 없이 안온하다. 풍경마저 잠든 고요한 경내를 걷는 동안 알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을 파고든다. 흔한 법구경이라도 흐를 법한 휴일, 절은 굳게 침묵하고 있다. 선원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는 꼿꼿한 자존심과 시대에 편승하지 않는 올곧음이 보인다. 단청 없는 염화실과 선원, 머리 숙여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혜철국사의 부도비, 독백처럼 흐르는 기운들 속에 붉은 열매를 맺은 남천이 인적 없는 산사를 지킨다.보제루에는 사계를 담은 사진들이 쓸쓸히 축제를 벌이고 목어의 눈빛은 먼 곳을 더듬는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고 추구하던 고결한 정신과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무엇을 향해 떠밀리듯 가고 있는가? 물질과 정보의 홍수에 밀려 철학의 빈곤으로 신음하는 사회, 그 아픔조차 무디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내 불안한 상념과 달리 태안사는 조급함에 휘둘리지 않고 확신에 찬 듯 초연하다.대웅전 법당 문을 열자 일렬로 걸려 있는 스님들의 가사가 유난히 따스하게 안겨든다. 정갈하게 깔린 카펫, 은은한 자연 채광으로 인한 아늑함에 이끌려 백팔배를 시작한다. 혜철선사와 도선국사가 득도한 수도 도량, 무아 무소유의 삶을 몸소 보여주신 선지식 청화 스님의 아름다웠던 시간들, 그 때의 영화가 다시 태안사에 머물기를 기도한다.수년 전 정만 스님이 스승이신 청화 스님의 수행법에 관한 책을 주시면서 맺게 된 작은 인연이 오늘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과 고매한 정신과 인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던 청화 스님, 생전에 친견한 적은 없지만 서적과 법문을 통해 감동 받은 후 나는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빠져들게 되었다.조낭희 수필가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 참다운 진리는 우주에 가득 차 있어서 부처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곧 부처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 좋았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분별과 시비심에 사로잡혀 중생의 선을 조금도 넘지 못하고 있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를 아는 것은 쉽고 간단한데 그 경계를 넘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마음과 부처는 둘이 아닌데 내 구분하는 마음은 언제쯤 내려질 것인가. 날마다 백팔배를 하면서도 뜬구름 같은 감정에 휘말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놓치고 살아가는 나를 돌아본다. 쉽다고 일러주신 스님의 말씀과 달리 근본자리를 지키는 일은 멀고도 험하다. 오늘만큼은 청화 스님을 기리며 참마음으로 시주를 하고 기도를 한다.법당을 나오자 태안사의 반듯한 어깨 위에 얹힌 밝은 미래가 보인다. 200여 미터 산길을 오르면 한 때 수행하는 스님들로 북적였던 선원이 있다고 들었지만 애써 궁금함을 누른다. 우주의 기운은 모든 중생을 본래의 성품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다니 부질없는 걱정일지 모른다. 다만 동안거에 들어간 스님들의 용맹정진을 조용히 응원할 뿐이다.청화 스님이 중창불사를 할 때 젊은 스님들이 손수 지겟짐을 져나르며 만들었다는 연지, 커다항 연못 안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삼층석탑과 태안사가 스스로를 비추고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아미타불을 외며 연못을 돈다. 염불과 참선은 둘이 아니라는 청화 스님의 말씀이 내 어깨를 토닥인다.

2020-12-14

비탈에 서도 외롭지 않은 그대… 경주 주사암(朱砂庵)

오봉산은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의 군사들이 여근곡(女根谷)에 숨어 있다 격퇴된 곳이며, 부산성(富山城)이 있어 경주의 서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뿐만 아니라 화랑 득오곡이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그 오봉산 정상 아래 숨어 있는 주사암을 찾아 산길을 오른다.‘53 선지식의 돌탑’,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라는 팻말과 작은 돌탑들이 썰렁한 겨울 산길을 밝힌다. 섬세한 손길은 이내 담력시험이라도 치르듯 53굽이의 아찔한 경사길로 이어진다. 조금만 방심하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산길을 비틀거리며 차가 오른다. 마주 오는 차와 교행할 수 있도록 중간중간 길어깨를 만들어 놓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겨울 응달에 기대선 나목들의 침묵, 그 사이로 얼어붙 듯 숨죽인 허공이 우리를 지켜본다.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거쳐 간 험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내 나약한 숨결에도 기도가 실린다. 산 위 주차장에 이르렀을 때, 스피커에서 마중 나온 염불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창건한 주사암은 투구모양을 한 오봉산 정상(685m)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주사암은 풍수지리학적으로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있는 형국이라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절 입구 양쪽에는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며 서 있다.조심스럽게 경내로 들어선다. 작은 법당 뒤로 투구 모양의 바위가 주사암을 보듬고 앞으로는 부산성이 든든하게 막아주고 있다. 활짝 열린 법당문 안으로 겨울 햇살 홀로 부처님 진신 사리를 친견하고 나는 염불 소리에 젖어 산사의 풍경에 몸을 맡긴다.산악용 자건거를 탄 남자가 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법당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평화롭던 공기는 달아나고 말았다. 잠시 인드라망의 그물이 출렁이며 파동을 일으킨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마당 바위 쪽으로 사라지는 그의 당당한 발걸음과 근육질 몸매가 안쓰럽다. 상호 배려와 겸손의 깨달음은 그토록 멀고 힘든 것인가.경내를 둘러보다 나도 마당바위로 향한다. 까마득한 절벽 위, 툭 트인 산과 허공을 배경삼아 자전거로 한껏 멋을 내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근처에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날렵한 동작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화랑들의 기상이 들릴 듯 하고, 주사암 설화 속에 등장하는 좌선 중인 도인의 모습도 아른거린다.저 너른 허공의 품에 안겨 나도 참선하듯 앉아 있고 싶다. 조용한 날 다시 오리라 마음먹고 돌아오는데 어느 보살님이 국수공양을 하고 가라며 인사를 건넨다. 매주 일요일은 무료로 국수공양을 한다는 안내문이 생각났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소박한 건물을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들어섰다.공양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 사이로 국수를 삶아 건져내느라 분주한 봉사자들이 보인다. 그저 받기가 조심스럽다. 국수에 육수를 붓고 갖가지 고명을 얹어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몸과 생각이 자유로워지는 곳. 이 공양 받으시고 하루빨리 도업 이루소서’ 걸어놓은 현수막에서 주사암의 마음을 읽는다. 귀한 음식을 앞에 놓고 고작 ‘오관게’를 읊고 있는 나, 편안함에 길들여진 마음조차 남루하다.담백한 육수와 갖가지 고명이 어울린 국수에서 정갈한 산사 맛이 난다. 주지 스님이 어떤 분인지 뵙고 싶다. 삶의 근간인 밥의 힘을 알고 사람을 제대로 섬길 줄 아는 분이리라. 산문 걸어 잠그고 참선하는 수행에도 높은 뜻이 숨어 있지만 대중들과 호흡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은 세상을 좀 더 낮고 가깝게 만들 것이다.뒤늦게 대웅전 법당에서 백팔 배를 올린다.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보살행을 실천하는 불자들의 짧은 인사가 문턱을 넘나들고 겨울 햇살이 내 등을 어루만진다. 진정한 보살은 의지하는 것이 없어 즐거움이나 기쁨을 구하지 않으며, 선정의 결과로 색계천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긴 겨울 앞에 선 암자가 쓸쓸해 보이지 않는다.조낭희 수필가주지 스님을 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구적인 외모와 소탈한 인품의 효웅 주지스님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산문 근처에 목사님의 시를 걸어놓을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진 분, 53굽이의 산길을 손수 청소하고 불자들을 맞으며 무료공양 해 오신지가 벌써 5년째라고 한다.스님은 무료공양의 덕을 옆에 앉은 송경규 회장과 봉사자들, 소식을 듣고 다시마와 국수를 보내주시는 분들의 공으로 돌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송 회장의 맑은 눈빛과 동안의 비결을 알 것 같다. 주사암과 스님에 대한 애정이 보살행으로 이어진 것인지, 그의 보살행으로 주사암과 스님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선지식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묵묵히 선업을 닦는 사람들을 통해 부처님은 오시리라. 이곳에서는 높고 낮음,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보름달이 뜨면 마당 바위에 도인처럼 앉아 계실 효웅 스님을 떠올려 본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적막이 있을까?

2020-12-07

지혜의 등불을 찾아… 경남 합천 해인사 원당암(願堂庵)

해인사의 중후한 품격은 변함이 없다. 열세 개의 해인사 부속 암자들까지 모여 있는 가야산, 매표소를 지나면서부터 불국토에 들어선 듯 무심(無心)이 된다. 사람들이 몰리는 해인사를 지나쳐 무생교 너머 외길 끝에 앉아 있는 암자로 향한다. 해인사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원당암(願堂庵)이다.계곡 옆 푸른 이끼를 두른 거대한 바위는 인파당 스님의 자연석 사리탑이다. 백련암에 주석하던 인파당 스님은 살아생전 고매한 인품과 학문에 능하여 많은 분들로부터 무위자연의 도인이라 칭송받았다. 1846년 열반에 드시자 기대했던 사리가 나오지 않아 허탈감에 빠진 제자들이 나름의 견해들로 큰스님을 평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다비식이 있던 마당에 오색 빛이 나타나 사라지는 곳으로 따라와 보니 바위 위에 스님의 사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그제야 어리석은 분별심을 깨우쳐 주고 죽음 후에 자연으로 돌아가 바람처럼 묻히기를 원했던 스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바위 위에 구멍을 파서 스승의 사리를 모시게 된 것이다. 초겨울의 문턱에서도 굴하지 않는 푸른 이끼 때문일까. 바위는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진리를 찾아 정진하는 선승처럼 범상치 않아 보인다.신라 애장왕 3년(802년), 부처님의 가호로 공주의 난치병이 낫게 되자, 순응과 이정 두 대사의 발원으로 해인사가 창건되었다. 당시 왕은 서라벌을 떠나 원당암에서 불사를 독려하면서 국정을 보았으며, 이로 인해 원당암을 ‘수도 서라벌의 북쪽에 위치한 궁궐’이라는 의미에서 북궁(北宮)이라 불렀다.창건 당시에는 이곳의 산 모양이 봉황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 비봉산(飛鳳山) 기슭에 위치해 봉서사(鳳棲寺)라 이름하였고 진성여왕 때부터 본격적인 신라 왕실의 원찰(願刹) 역할을 하여 원당암이라 불렀다. 또한 1887년 전후에는 원당정토사(願堂淨土寺)라 칭해 중창불사와 함께 염화만일회를 결사해 국난극복을 발원했다.아름드리 팽나무와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전나무가 산문을 대신하고, 이내 크고 작은 전각들이 청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묵언수행 하듯 서 있는 고목들이 암자의 규모와 역사를 말해 주는데 절은 조용하다. 묵직한 고요가 나를 긴장시킬 때, 까마귀 울음이 정적을 깨며 숲을 흔든다.지혜의 칼을 찾는 집, 심검당(尋劍堂) 뒤쪽에 중심 전각인 듯한 보광전이 숨어서 기다린다. 고요 속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이 보인다. 작은 법당의 꽃문살이 애써 쓸쓸함을 들키지 않으려 유난히 화려하다. 매화와 목단, 소나무, 학 들이 펼치는 무한 긍정의 세계는 추운 날이 와도 흔들림이 없으리라.법당 안에는 목조 아미타 삼존불과 해인사에서 주석한 아홉 분의 고승진영이 모셔져 있다. 누군가 피워놓은 향이 법당 안을 경건하게 밝히고 나는 남편과 나란히 백팔 배를 시작한다. 향 내음이 게으름으로 괴로워하는 세포들을 깨운다.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살다간 선사들의 향기를 더듬는 동안 내 기도는 싸늘하게 식어가도 좋다.보광전 앞을 지키는 보물 제 518호인 점판석 다층탑과 석등은 단아하면서 공예적 수법이 뛰어난다. 벼루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점판암을 화강암 위에 탑신으로 세운 다층석탑은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감로수 떨어지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석탑과 석등, 지난했던 시간들이 응축되어 빛난다.미소굴이 있다는 안내판을 따라 계단을 오른다. ‘공부하다 죽어라’는 혜암 큰스님의 사자후가 죽비가 되어 내려친다. 평생을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하루 한 끼만 공양하며 용맹정진하신 큰스님의 서늘한 기운을 미소굴은 흐트러짐 없이 간직하고 있다.비상하는 봉황의 모습으로 가야산의 정기를 받아들인다는 최고의 전망대 운봉교에 서자 법보종찰 해인사가 손닿을 듯 가깝다. 오랜 세월, 수많은 선지식들이 하나의 화두를 붙잡고 머물다 간 신성스러운 수행도량, 그 엄숙한 눈빛과 마주한다. 가야산을 감고 있는 상서로운 기운들이 잡힐 것만 같아 오래도록 자리를 뜰 수가 없다.조낭희 수필가그런 나를 달마선원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생전에 큰스님이 재가불자들에게 참선을 가르치던 시민선방, 그 침묵 앞에서 나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지혜의 빛을 찾아 먼 길을 달려 왔을 사람들, 봄날이 오면 저 선방의 댓돌 위에 내 신발 한 켤레도 안부를 여쭐 수 있다면 좋겠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좀 더 뚜렷하게 보인다. 요즘 의도치 않게 당면하는 문제들과 우연히 만나지는 선지식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지 모른다. 아무리 힘들고 캄캄해도 변하지 않을, 그런 당신 내 안에 함께 하라고 이곳으로 이끈 이는 누구일까?청량한 바람이 인다. ‘공부하라’는 거룩한 말씀 하나 품고 무생교를 건너는데 어떤 부부가 말을 걸어온다. “원당암에도 볼거리가 있던가요?”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 나란히 암자로 향하는 사람들, 그들의 돌아 나오는 발걸음에도 지혜의 등불 하나 켜질 수 있다면 좋겠다.

2020-11-30

이 계절도 기러기 날아가듯… 울산 석남사(石南寺)

떠나는 가을이 아쉽다. 일주문 안에는 늦가을 풍경이 전하지 못한 인사를 부여잡은 채 우리를 기다린다. 초췌한 계절의 끝자락과 잔뜩 흐린 하늘,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약간의 고독과 우수가 실려 있다.유모차를 탄 손녀의 손에 들려진 나뭇잎 하나, 돌 지난 아이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코로 가져가 냄새도 맡는다. 그리고는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이 작고 아름다운 교감을 바라보며 모든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대화를 나누다 수시로 찾아드는 적적함에 가끔은 까칠한 허공을 응시할 수 있어서 좋다.곧게 뻗은 700m의 거리가 지겹지 않다. 누구나 자연 속에 서면 몸과 마음은 넉넉해지고 상대의 마음을 살필 줄 아는 배려심도 생긴다. 몸살과 감기 기운으로 힘든 몸을 추스르고 나온 나도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겸허해진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계절을 즐기며 반야교를 건넌다.석남사는 통도사의 말사로 헌덕왕 16년(824년), 최초로 우리나라에 선을 도입한 도의 선사가 호국기도도량으로 창건한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화관보탑(華觀寶塔)의 빼어남과 각로자탑(覺路慈塔)의 아름다움이 영남 제일이라고 하여 석남사(碩南寺)라 하였다고 한다. 가지산의 별명이 석안산(碩眼山)이기 때문에 석안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몇 번의 중수를 거치고, 6.25전쟁 이후에 폐허가 되었던 절을 1957년 비구니 인홍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증축하여 비구니 수도처로서 각광 받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최대 규모의 비구니 종립특별선원으로 정수원, 금당, 심금당 등 세 곳의 선방에서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다. 정수원은 여느 선방처럼 동안거와 하안거 결제, 해제를 지키지만 금당은 해제가 따로 없이 수좌 스님들이 모여 정진하고 있으며 심검당은 노스님들이 자유롭게 수행한다고 한다.누하진입식으로 침계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석가탑을 닮은 삼층 석가사리탑이 크지 않은 마당을 지키며 우뚝하다. 스리랑카 스님이 가져온 사리를 모셔놓은 대석탑이다. 대의 선사가 세웠다는 소석탑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극락전 쪽으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다. 연륜이 쌓인 탑은 뒤로 보이는 선방 때문인지 정숙한 여인과도 같은 품격이 흐른다.작지 않은 사찰이지만 전각의 위치나 정원의 짜임이 빈틈없이 아름답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영남 9봉 중 가장 높다는 가지산이 넉넉하게 절을 품어 주어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아늑하고 평화롭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절은 한 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조용하다.대웅전 뒤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도의국사의 사리탑이라고 전해지는 보물 제 369호 승탑이 나온다. 정갈하게 비질이 된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스님 한 분이 정원에서 풀을 뽑으며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 사는 스님과 안부 인사를 나누는 흔하디흔한 대화가 마음을 아리게 한다. 육신을 절집에 가두고 사는 스님들의 절제된 삶 속에 녹아든 각별한 동료애가 유난히 애틋하다.삶은 인연의 늪이며, 대부분의 인연은 그리움을 동반한다. 마음속에 달처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가을 마음껏 그리움에 젖어들고 싶다. 젊은 날, 친구와 둘이서 탑돌이를 하던 승탑이 변함없이 거기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때는 재미삼아 해보던 탑돌이였다. 문득 내 생활 반경에서 사라진 친구의 소식이 궁금하다.나이가 들수록 만남이 조심스럽다. 친한 벗을 잃고부터는, 남은 인연조차 이별의 무게로 클로즈업 될 때가 있다. 삶의 터전이 바뀌면서 새로운 범주의 사람들을 알게 되고 친분 있게 지내던 사람들과는 소원해졌다. 소식이 뜸하거나 끊어진 인연들도 나뭇잎 지고 새잎 돋듯 무탈하게 지내기를 기도한다.두 손을 모으고 마음도 모아 탑돌이를 한다. 하나씩 떠오르는 인연들, 그들과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를 떠올리고 싶은데 서둘러 꿰맨 상처자국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흔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좀 더 사랑하고 배려하지 못했던 시간들도 보인다. 젊은 날엔 인연의 귀함을 몰랐다. 아둔했던 나에게 지혜의 눈은 언제나 한발 늦게 찾아오는 모양이다.조낭희 수필가사색에 잠겨 승탑을 돌고 있는데 딸이 손녀를 안은 채 내 뒤를 따른다. 성큼성큼 따라오는 딸의 건강한 발길에 묻어나는 소원들, 해맑게 웃는 손녀의 하얀 앞니에 머무는 계절은 얼마나 눈부신가. 소소하고 작은 것들이 아름다운 날, 나를 성장시켜 준 모든 인연에 감사하며 탑돌이를 마친다.반야교를 건너 내려오는데 계곡에 홀로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쏠리듯 눈에 들어온다. 남자의 가슴 속으로 하염없이 가을이 쌓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하얀 수첩이 눈길을 끈다. 그는 분명 시인이거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계절의 품에 영혼을 맡기고 앉아 있는 그에게 훌륭한 시적 영감이 내려앉기를 기도한다.남과 나를 향해 마음이 모아지는 계절, 가을은 무언지 모를 허전함을 남긴 채 기러기 날아가듯 또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2020-11-23

우리의 인연이 다하는 그날까지… 통영 도솔암(兜率庵)

가을날의 하루는 유난히 짧다. 용화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숲은 부산하게 하루를 접고 있었다. 용화사 오르는 반대편으로 넓은 시멘트 길이 시원하게 산으로 이어져 있지만 우리는 걸어서 도솔암을 오르기로 했다. 만만치 않은 비탈길에서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숲을 깨운다.지척에 있을 거라 여겼던 도솔암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친구는 지친 기색도 없이 잘도 오른다. 관음암으로 향하는 자동차가 우리 곁을 가볍게 지나칠 때마다 그 편안함이 부럽지만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급한 마음으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뒤늦게 놓친 것들을 알고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사위어가는 가을 숲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즐거움도 크다.‘소치는 사람이 채찍으로 소를 목장으로 몰고 가듯 늙음과 죽음은 중생의 목숨을 몰고 간다.’중간중간 비석처럼 서 있는 글귀들이 피곤함을 잊게 한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여가 없이 세월에 쫓겨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만나는 글귀들을 주제로 삼아 소소한 마음밭을 일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이끌려 살아온 숱한 시간들을 이 곳에 내려놓고 갔을까. 가파른 길은 겸허해지고 아파오는 다리와 거친 숨소리가 뿌듯하다.관음암을 지나고 미륵산 정상으로 향하는 오솔길과 헤어진 후에야 도솔암이 보인다. 고려 태조 26년(943년) 도솔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한때는 남방제일선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도솔암은 한국 불교 선종의 고승인 효봉스님이 6.25전쟁 직후 제자인 구산 스님과 함께 이곳에서 선종의 법맥을 계승하였다.도솔선사가 미륵산 암굴에서 수도할 때 호랑이와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어느 날 호랑이가 처녀를 업어와 바치자, 선사는 호랑이를 꾸짖고 처녀를 고향으로 데려간다. 처녀의 아버지가 은혜를 갚기 위해 300냥을 선사해 그 돈으로 도솔암이 지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어느 절에나 있을 법한 설화는 신빙성이 없지만 도솔암 위쪽에는 여전히 바위굴이 남아 있다고 한다.절은 조용하다. ‘컹’하고 외마디로 짖던 누렁이의 눈빛도 이내 무심해진다. 가을 앓이를 하는지 조용한 산사를 찾아든 객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꼬리를 흔들며 반기거나 경계심으로 불안해 하지도 않는다. 온전히 자유롭다. 그의 이름은 보리이거나 반야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스님은 출타 중이신 듯하다. 하루치의 낙엽이 가만가만 뜰아래로 모여들고 있다.늦가을 늦은 오후의 정취로 마음이 심산해지는데 도솔암은 통영 앞 바다를 그윽하게 내려다 볼 뿐 흔들림이 없다. 선지식 효봉 스님을 생각하며 절을 둘러본다. 일제 강점기 와세다 대학 법대를 졸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가 되었지만 조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승려가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일화를 남긴 분이다. 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여수로 가던 중 뱃멀미가 심해 잠시 통영과 인연을 맺게 된다.마침 용화산 도솔암이 비어 있어서 며칠 쉬었다 갈 요량으로 주저앉다 아주 눌러 살게 되었다고 한다. 효봉 스님은 수행을 시작하면 엉덩이가 짓물러 깔고 있던 방석이 엉덩이에 달라붙을 정도로 꼼짝하지 않아서 절구통 수좌라고 불렸다. 그리고 동료 스님을 고자질하던 제자에게 “너나 잘해라.”고 소리를 치셔서 ‘너나 잘해라’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조낭희 수필가편백나무가 울창한 미륵산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의 부도를 본 듯한데 이곳 도솔암에서는 효봉 스님에 대한 어떤 자취나 이야기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대웅전이나 동국 선원보다 요사채의 쓸쓸함과 담장 밖에 선 오랜 느티나무가 떠난 스님이 남기고 간 법문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벽속에서 울어대는 겨울 귀뚜라미처럼 절 안에 갇혀 세상을 읽던 그 서슬 푸른 기운은 사라지고, 도솔암의 텅 빈 눈빛 속에는 그렁그렁 그리움이 잠겨 있다.대웅전 가는 길에 ‘말씀은 가만가만’ ‘걸음은 조용조용’ 이란 음각으로 새긴 글자가 맹숭맹숭하게 쳐다본다. 누구를 향한 글귀일까. 성성하게 푸른 기운이 살아 있을 경내, 발소리 낮춰가며 들어섰을 한 때의 도솔암을 그려본다. 수행하는 스님이 신경 쓰여 걸음을 눌러 밟고 숨죽이며 법당 문고리를 당겨 보고 싶다. 가는 절마다 번듯한 선원들이 비어 있듯 쓸쓸하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잠시 대웅전에 들러 기도한다. 남의 시선에 휘둘림 없이 마음의 주인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친구는 언제나 내 삶의 질을 돌아보게 만든다. 인연이 다하는 그날까지 참 좋은 인연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어떤 인과 관계에 얽혀 이곳까지 함께 떠나올 수 있었는지 그 오랜 인연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우리가 갖는 순간순간의 생각이나 염원은 우주에 남아 진동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인연도 사랑의 파장으로 진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들꽃이 흔들리듯 향기롭고 잔잔했으면 좋겠다.짧은 기도를 끝내고 법당을 나설 때 고목의 느티나무는 여전히 맑은 기운 성성하고, 친구는 마당을 서성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륵산에 얼굴을 묻은 작은 바다 홀로 먼 데를 꿈꾸듯 항해 중이다.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의 도솔암은 하나의 큰 말씀으로 남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2020-11-16

아주 작은 인연에도 부처님이… 보은 법주사 복천암(福泉庵)

속리산의 주말은 발 디딜 틈이 없다. 법주사 선원에서 동안거에 들어가셨던 스님의 부름이 없었다면 감히 차로 들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할 곳이다.차로 옮길 짐이 있어 인파를 헤치며 들어서는 일은 쉽지 않다. 몇 번이나 검문 받듯 상황을 설명한 후에야 비상등을 켜고 나아갈 수 있었다. 법주사에 대한 기대감보다 특혜를 누리는 듯한 불편함이 무겁게 가슴을 누른다.법주사 뒤편에 자리한 선원에는 인적조차 없어 몸과 마음이 조심스럽다. 동안거가 끝났지만 여전히 선원을 지키며 수행하는 스님들이 계셔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 먼 길 온 내게 법주사 공양을 대접하겠다는 스님의 말씀에서 가을 향기가 난다. 스님은 법주사에 처음 온 나를 배려해 지름길을 두고 천왕문 쪽으로 이끄신다.샛노랗게 물이 든 은행잎들의 황홀한 잔치판에 시린 눈을 뜰 수가 없는데 스님의 걸음은 무심하게도 빠르다. 카메라에 법주사의 가을을 마음껏 담고 싶다. 모처럼 서 보는 거대한 사천왕상 앞에서 잠시 세속의 때를 씻어내고 싶다. 국보급 문화재들도 둘러보고 싶은데 스님의 걸음은 흐트러짐이 없다.사진으로만 보던 팔상전을 몇 번이나 힐끔거리며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스님을 놓칠 세라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공양간에는 사찰 일을 돕거나 스님을 친견하러 온 방문객들이 공양 중이다. 푸짐하고 정성들인 공양 앞에서 잊고 지내던 공양의 기도가 나를 위로 한다.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지키는 대웅보전의 고색창연한 위엄 앞에서 잠시 숨 돌릴 여유를 찾는다. 중층으로 이루어진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삼존좌불, 그 인자하고 근엄한 눈빛이 나를 내려다보신다. 나는 무엇을 위해 스님의 부름을 받고 이곳까지 한걸음에 달려 왔는가. 화두처럼 와서 박힌다.인파에서 벗어나 고즈넉한 암자를 보고 싶다고 하자 스님이 산내 암자 중 가장 깊은 역사를 지닌 복천암을 소개해 주신다. 단풍과 등산객들로 활기가 넘치는 잘 닦여진 시멘트길이 우리를 안내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출렁거림을 따라 사람들은 걷고 있다. 인적 없는 시간 이 길을 오르면 내가 가야할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사람들이 붐비는 세심정을 지나고 이 뭣고 다리 건너편 산비탈에 복천암이 보인다. 문장대로 향하는 거친 숨소리는 멀어져 가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느티나무 서너 그루가 처연한 자태로 복천암의 깊은 역사를 말해 준다. 이곳은 법주사의 암자로 신라 선덕여왕 때인 720년에 창건된 사찰이다.고려 공민왕이 극락보전에 무량수라는 편액을 친필로 썼으며, 세조는 이곳에서 신미 대사와 함께 3일 동안 기도드리고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여 피부병이 낫자 절을 중수하도록 이르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 쓴 사각옥판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신미대사에게 왕사이자 혜각존자라는 호를 내리고 존경심을 표한 세조, 몸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치유되었을 세조의 아름다운 인연을 복천암은 간직하고 있다.이곳은 속리산의 배꼽에 해당하는 명당자리다. ‘나랏말싸미’ 영화를 접한 적이 없는 내게 산중에 계시는 스님이 영화에 비친 신미대사 이야기를 풀어내신다. 수행뿐만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정세까지 두루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스님은 3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로지 선방에서 수행만 하셨지만 어느 부분도 막힘이 없다.복천암은 여느 암자와는 달리 선원 뒤로 극락보전과 산신각이 숨어 있듯 앉아 있다. 절 이름과 관련 있는 복천수가 흐르는 바위 옆에 극락보전이 있다. 궁궐의 많은 어의들이 고치지 못한 세조의 병을 고친 복천암,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가을경치에 밀려 아미타삼존불이 쓸쓸히 법당을 지키고 있다.일반인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나한전 쪽을 스님이 안내해 주신다. 산신각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조실 스님이 머무는 요사채와 나한전이 후원처럼 아늑하다. 기와를 얹은 작은 문 안으로 숨이 멎을 것 같은 오랜 기다림 하나, 남들이 드나들지 않는 문을 통해 나를 기다리는 부처님이 보인다.조낭희 수필가조용히 합장한 채 문턱을 넘지 못하는 나와 달리 스님은 벌써 긴 계단을 올라 나한전 문 앞에서 예를 갖추신다. 홀로 돌아앉은 이 쓸쓸한 고립의 풍경이 주는 울림은 크다. 가슴이 먹먹하다. 나한전 뜰 앞에 앉아 하나의 계절로 나투시는 부처님을 오래도록 뵙고 싶은데 스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사라지셨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경이로운 만남, 그 여운은 길 것이다.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후원을 빠져 나오는데 뜰 위에 놓인 조실 스님의 털신 한 켤레가 마음을 붙든다. 외롭고 고독한 수행, 거기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 하나 머문다. 화두가 풀린다. 하마터면 드러나는 현상에 취해서 이 가을을 송두리째 놓칠 뻔했다. 올 가을은 유난히 갈증이 심했다.나태해지거나 흔들릴 때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를 지켜 주시는 부처님, 비로소 스님의 부름 속에 깃든 참뜻을 알아차린다. 무시로 나를 성장시키는 소중한 인연들, 무심히 걸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이 가을보다 아름답다.

2020-11-09

이 가을, 마음을 헹구며… 청도 북대암(北臺庵)

북대암을 처음 찾은 것은 수십 년 전 시를 쓰는 친구와 함께였었다. 고즈넉한 절간의 정취도 좋았지만 선한 미소로 반겨주시던 치자향 닮은 스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때 마침 제를 지낸 뒤 우리 앞에 차려진 푸짐한 공양상과 친절함은 감동적이었다. 봄기운 가득한 북대암의 첫 이미지는 두고두고 나를 미소 짓게 했다.북대암은 창건연대가 확실치 않고 창건자도 신승 혹은 보양국사라는 설이 전해진다. 네 개 암자 중 가장 먼저 세워졌으며 운문사 북쪽에 제비집처럼 높은 곳에 지어져 북대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우연찮게 오늘은 동화 작가와 함께 북대암을 찾아간다. 작가의 신도증으로 매표소 앞을 무사통과하는 것도, 전설 같은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도 흔치 않은 행운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송진 체취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노송들, 그 상흔의 그림자를 밟으며 사색하던 길을 오늘은 문우들과 한껏 들떠서 지나간다.어릴 적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북대암을 오르내렸다는 동화작가가 그 옛날의 암자와 스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간으로 다져진 인연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존경과 신뢰로 엮여진 오랜 인연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는지 반문할 수밖에 없다.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의 일상들이 푸석거리며 먼지를 일으키는데, 그녀의 추억담은 가을 햇살에 녹아들어 가파른 포장길을 운치 있게 만든다. 소통이 된다는 것은 정신적인 안온함을 나누는 일인데 오늘은 햇살조차 곱다.불현듯 장르가 다른 문인들이 북대암을 찾기로 한 건 파장이 통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직은 서로의 깊이를 잘 모르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걷는 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즐거움은 크다.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제 영역을 확고히 지키며 살아가는 문우들을 바라보며 나는 청명한 하늘이었다가 거침없는 바람이기도 하고 속으로 흐느끼는 억새가 되기도 하며 비탈길을 오른다.벼랑에 둥지를 튼 제비집 같은 정겨운 북대암, 작은 마당에 배를 깔고 누운 가을 햇살을 깨우며 동화작가가 익숙하게 대웅전을 향하고 우리는 그녀를 따른다. 준비해 온 떡을 다소곳이 제단에 올리는 시조 시인, 가톨릭 신도인 문우도 자기를 낮추고 절간의 법도를 따라 절을 한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손을 잡는 훈훈한 시간이다.가파른 계단 위 작은 전각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현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뒤로는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신비로움을 더하고, 법당은 햇살의 품에 안겨 잠든 듯 고요하다. 북대암에서 가장 기돗발이 영험하다는 독성각의 동자승 앞에서 또 나란히 기도한다. 함께 한 문우들의 건강과 문운을 기도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참으로 감사하다.숨어 있듯 열려 있는 산길을 따라 바위 앞에 이르면 운문사와 북대암이 한 눈에 보인다. 거대한 바위 어딘가에 스님과 보살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수행을 열심히 하신 스님이 열반에 들면서 사리가 나오면 북대암 뒤 바위에 안치하라는 유언에 따라 모셔진 것이다. 그리고 아랫마을 노보살이 평생을 눕지 않고 염불하여 생시에 치아에서 사리가 나와 이곳에 봉안되었다고 하니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정갈한 나무데크에 앉아 내려다 본 운문사는 한 송이 연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운문사, 그 청렴한 정수리가 향기롭게 빛난다. 노송 아래에서 좌선하듯 앉아 홀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숱한 잡념들은 솔바람에 씻겨 나가고 온몸에 나무향이 배일 것만 같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서로의 눈빛에 젖어들고 싶은데 쉽지 않다. 뒤에 오는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다.구절초가 한들거리는 볕 좋은 산기슭을 따라 내려오는데 앞서 간 동화작가의 나지막한 소리가 들린다. “스님, 스님.” 요사채 방문 앞에서 노스님을 부르는 그녀의 자태가 가을 들꽃을 닮았다. 굳게 닫힌 방문은 끝내 기척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나 사람을 먼저 섬길 줄 아는 배포 크신 노스님, 법춘 스님을 뵙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크다.들어올 때 공양주 보살이 내다준 홍시가 여태 평상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인심 좋은 북대암이다. 노스님의 안부를 여쭙자 보현사로 감을 따러 가셨다며 특별히 떡까지 내어오신다. 평상에 앉아 홍시와 떡을 먹는다. 물 귀한 북대암에 감로수 대신 글귀 하나가 마음을 헹구라고 자꾸만 눈빛을 빛낸다.조낭희 수필가“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내가 나를 바꾸는 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 또한 내가 나를 바꾸는 것이다.”대화를 나누면서도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는 글귀에 붙잡혀 꼼짝을 못한다. 스스로의 단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연거푸 좌절감만 맛본 나에게는 멀고도 난해한 글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느 스님은 카르마라는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단한 수행뿐이라고 하셨다.귀한 오늘, 되담을 수 없는 숱한 말을 뱉어낸 벌로 북대암이 안겨 준 숙제 하나 무겁다. 돌아오는 발길에는 가는 계절이 채여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문우들에게서는 잘 익은 시향(詩香)이 난다. 특별했던 가을날의 하루가 추억 속에 또 둥지를 튼다.

2020-11-02

내 삶에 의지와 모험을… 영주 희방사(喜方寺)

이른 아침 중앙고속도로는 안개로 자욱하고, 대형 전세버스들로 몸살을 앓았을 소백산 입구조차 한산하다. 붉게 물든 단풍과 상실의 눈물처럼 떨어지는 낙엽들, 소백산 가을잔치는 화려하고도 쓸쓸하다.희방사는 고운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두운이 창건하였다. 1850년 화재로 소실되어 강월이 중창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네 채의 당우와 보관되어 오던 월인석보 판목 등이 소실되었다. 다행히 주존불은 무사하여 두운이 기거하던 천연동굴 속에 보관하다가 1953년 중건한 뒤 대웅전에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희방사는 생각보다 작은 사찰이다. 보수 중인지 인부들이 자재를 옮기느라 경내는 분주하다. 일행은 여러 번 와본 절이라며 스치듯 등산로로 접어들고 나와 남편은 대웅전에 들러 삼배의 예를 갖춘다. 어수선한 절 분위기 때문인지 마음이 신산하다. 수런거리는 가을의 수다가 법당까지 흘러들어와 나를 유혹한다.서둘러 법당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편하지가 않다. 절 기행과 등산,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에 소백산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다. 절 주변을 밝히는 단풍들과 시나브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자꾸 나를 돌아보게 한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들으며 붉은 슬픔이 차오르는 숲으로 흐느끼듯 걸어 들어간다.가을 숲과 음악이 있어 행복하다. 하지만 계절에 대한 감탄도 잠시, 하늘은 멀미가 일 듯 단풍으로 출렁이고 산길은 점점 더 가파르다. 얼마 오르지 않아 아픈 다리와 거친 호흡으로 걸을 수가 없다. 산을 잘 타는 남편이 앞에서 잡아주고 호흡법을 가르쳐 주며 격려하지만 몸은 등반에 대한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가슴이 죄어오고 두통까지 몰려온다.내 곁을 떠나지 못하는 남편과 기다리고 있을 일행이 점점 부담스럽다. 지켜보는 눈들이 산행을 더 힘들게 한다. 중간중간 이정표는 까마득히 남은 거리를 제시하며 낙오자 하나쯤 자랑스럽게 내걸고 싶어 하는 눈치다.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명산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작정 산을 오른다. 시야에서 벗어난 일행을 좇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것도 같다.지금이라도 희방사로 내려가 스님을 뵙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토록 황홀하던 단풍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험난한 등산로 앞에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싣고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나 자신의 사막으로 달려가고 있다. 산을 오를수록 나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벤치가 있는 나무 아래에서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나를 위로하는 남편의 주름진 얼굴 위로 선득한 바람이 분다. 젖은 옷 속으로 스며드는 한기보다 더한 서글픔이 밀려든다. 가는 세월 앞에서 나는 무엇으로 위안 받기를 원하는가.연화봉 정상에 설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을지 모른다. 아름다운 시간은 덧없이 짧고 머지않아 닥칠 겨울은 길고 건조하리라. 무엇이 두려워 주어진 시간과 젊음을 포기하려고 하는가. 비록 정상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극복하며 최선을 다하는 게 삶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이른 점심을 챙겨 먹고 남편보다 먼저 폴대를 잡고 앞서 걷는다. 바닥을 보이던 체력은 놀랍게도 다시 힘이 난다. 일행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과 언젠가 다녀온 비로봉의 힘든 노정이 나를 옥죄었던 것일까. 몇 번의 난코스를 힘겹게 오르자 나는 지친 낙타에서 한 마리 사자로 변하고 있었다.육체적인 고통은 무감각해지고 길은 스승이 되어 나를 이끈다. 나와 길은 하나가 되기도 하고 때론 내가 길보다 앞서 걷는다. 거친 장벽과도 같던 산은 다양한 즐거움을 안겨주며 함께 걷는다. 고비를 극복하고 난 뒤에 안겨드는 희열이 좋다.“많이 힘들지요?” “힘내십시오.”마주치는 사람들이 건네 오는 격려에는 진심어린 온기가 담겨 있다.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이며, 같은 아픔을 맛본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믿음과 위로이다.연화봉은 아직 멀기만 한데 능선에서 바라본 희방사는 한참이나 아래에 있다. 절은 작지만 또렷한 상징물이 되어 나를 격려한다. 어수선하고 산만하던 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머리를 맞댄 당우들이 자기를 낮춘 채 소백산 품에 안겨 있다. 어떤 확고함으로 중심을 지키고 서 있다.조낭희 수필가날이 밝기까지 고뇌하지 않은 어둠이 있을까. 묵묵히 이 길을 올랐을 사람들의 땀방울과 그들이 짊어졌을 무게를 생각한다. 고통의 밑바닥에서 쟁취한 자유는 더 깊고 클 수밖에 없다. 일행보다 한참 늦었지만 1,376m 연화봉에 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고독한 낙타가 아니었다. 의지와 모험을 추구하며, 나 스스로를 극복해 나가는 한 마리 사자가 되어 있었다.내려오는 길에 들른 희방사는 그제야 속살을 드러내며 다가온다. 지장전 앞을 지키는 상록수는 흔들림이 없고 종소리가 은은하다는 동종도 함부로 울지 않았으며, 요사채 뜰 위에 검정 고무신 한 컬레가 좌선하듯 사색에 잠겨 있다.

2020-10-26

하루하루 경전을 읽듯… 군위 오도암(梧道庵)

하늘 정원을 향하는 길은 인파의 물결로 가득하다. 하늘은 흐리고 억새는 하얗게 부풀어 시리다. 청운대 절벽에 자리 잡은 서당굴은 원효가 6년간 수도해 깨달음을 얻은 수도석굴이다. 접근조차 쉽지 않은 천인절벽에 어떻게 굴을 만들었는지 쉽게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팔공산의 천기가 서려 있어 한 시간만 앉아 있어도 정신이 맑아진다는 좌선대 이야기도 결코 빈말이 아닌 듯하다.오도암은 쏟아질 듯 가파른 나무계단을 끝없이 내려가야 한다. 툭 트인 경관이나 송신소의 탑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묵묵히 긴장을 놓치지 않고 아래로아래로만 향한다. 오도암까지 714계단,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올라올 일에 대한 걱정이 무게를 더한다.더 이상의 나무 계단은 보이지 않고 열려 있는 사립문 너머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당황스럽다. 거북이 형상의 나지막한 돌탑 뒤로 무릉도원처럼 숨어 있는 암자, 소박한 풍요로움이 보인다. 시끌벅적한 소리는 모조리 숲에 흡수되고 말지만, 어수선함 속으로 구겨넣듯 나를 밀어넣고 싶지가 않다. 산문 앞에서 조용해지기를 기다린다.한 차례의 등산객과 아이들이 빠져나간 뒤 절은 조용해졌지만, 소란함 뒤에 찾아온 고요는 어딘지 어색하다.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대웅전, 활짝 열린 법당문 안으로 허리 꼿꼿한 어느 보살님의 뒷모습이 유난히 아름답다. 관음전 법당에도 경전을 읽고 있는 처사님이 보이고 스님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느라 정신이 없다.언제 소란스러웠느냐는 듯 모두가 자기 일에 빠져 있다. 적송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절 뒤로 청운대가 하늘을 떠받치듯 신비스럽다. 나는 티 없는 암자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마당을 서성이고, 남편은 어느 새 대웅전 법당에서 백팔 배를 시작하고 있다.오도암은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963년까지 폐사로 남아 있다 운부암 선원장 불산스님의 원력으로 천년고찰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일타스님이 썼다는 불인선원(佛印禪院) 현판이 토담벽에 걸려 무구한 그리움을 더한다. 부처로부터 직접 인가를 받은 곳이란 뜻이다.선지식 일타스님이 생전에 이곳에서 일주일만 살아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는 오도암 마당을 나는 훌쩍 바람처럼 달려와 감격하고 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도암의 언어 앞에서 잠시 시간이 멈춘다. 오늘은 삼배의 예만 갖추기로 했다. 자리를 뜰 줄 모르고 경전을 읽는 불자의 자태가 부처님보다 크게 다가온다. 오래 머물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법당을 빠져나온다.요사채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방하각이란 나무정자를 지나자 숲 속에 투박한 나무집 하나 홀로 쓸쓸하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오두막은 스님의 수행 공간인 듯, 단호하면서도 고독하다. 문명사회에 반대하며 월든 호숫가에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떠오른다.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영적 자아를 발견하던 그의 오두막 풍경도 이보다는 풍족했으리.‘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어록을 되새기며 깨달음을 구하는 스님을 위해 오두막도 좌선 중이다. 주체적인 삶을 위해 섬처럼 홀로 떠 있는 오두막, 멜랑콜리한 감성은 달아난 지 오래다. 잃어버린 여름이 떠오르고 묵직한 가을이 자꾸만 내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나는 마당가 통나무벤치에 앉아 경전에 빠져 있는 두 불자의 모습을 지켜본다. 대웅전과 관음전에 떨어져 앉아 금강경을 읽고 있는 두 분은 아무래도 부부 같다. 같은 방향을 걷고 있는 삶의 자세가 그윽하다. 스님은 키 낮은 아궁이에 온몸 낮춰 불을 지피고, 뒤란에서는 차담을 나누는 도반들의 대화가 익어가고 있다. 고요한 성실성이 암자를 밝힌다. 무심코 산문을 들어서는 등산객의 투박한 발걸음조차 평온하게 녹아든다.잠시 경전을 읽다 휴식을 취하러 나온 불자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선한 눈매와 차분한 말투, 그 안에 오래도록 쌓아올린 견고한 탑 하나 보인다. 휴일이면 오도암에 와서 경전을 읽으며 하루를 보낸다는 부부가 존경스럽다. 나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평범한 이의 낮고 조용한 발걸음에서 오는 울림은 크다. 대책없이 그 삶의 자세를 탐낸다.나조차 몰랐던 헛된 욕심에 붙들려 세월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계절은 또 쓸쓸히 멀어져 갈 것이다. 운이 좋아 땔감을 가지러 산문을 나서는 스님과 마주친다. 환한 미소가 편안하다. 몸과 영혼이 건강해 보이는 석범 스님이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선뜻 들어서지 못한 나와 달리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불자님과 아이들의 순수함이 좋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스님, 내 쪽으로 외로운 바람이 분다.조낭희 수필가휴일이라 등산객의 발길이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다. 조용한 날 사시예불에 참석해 보기로 약속하며 산을 내려온다. 남편은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올라가고, 나는 무명의 어둠에 갇혀 파닥거리는 스스로를 부축하며 산을 내려온다. 이 가을도 나를 기도하게 만든다.삶의 근간은 성실이다. 섣부른 열정에 기만당하고 싶지 않아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정직한지 되묻는다. 하지만 원효 구도의 길은 흔들림 없이 평온하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스스로를 맡긴 채 물들고 있었다.

2020-10-19

다시 미니멀라이프를 꿈꾸다… 문경 심원사(深源寺)

청화산과 속리산 사이 828m의 도장산 깊숙한 곳에 심원사가 있다. 쌍용구곡의 비경을 감상하며 절을 찾아 가는 길은 초입부터 걸음이 설렌다. 계곡 옆 작은 주차장에 두어 대의 차가 주차돼 있지만 산길을 한적하다. 발밑에서 돌멩이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가빠지는 나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온다.심원사는 직지사 말사로 태종 무열왕 7년(660년) 원효 대사가 창건하여 창건 당시에는 도장암(道藏庵)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뒤 이 절의 연일이 유정을 도와 일본에 가서 포로들을 데려오는 등의 공훈을 세워 선조 38년 나라로부터 부근 십 리 땅을 하사받았다. 영조 5년 낙빈대사가 옛 절터에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현재의 심원사로 고쳐 부른다. 1958년 건물이 전소되어 1964년 법당과 요사채를 세워 오늘에 이르지만 예전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으며 특별한 문화재도 전하지 않는다.돌길에 익숙해져 갈 때쯤 서서히 숲의 속삭임이 들린다. 계곡 물소리도 들린다. 좁은 산길은 가을 공기로 가득하다. 발품을 팔지 않으면 당도할 수 없는, 오염되지 않은 절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즐겁다. 쉽게 얻은 것일수록 쉽게 잊혀지게 마련이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산사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다.미세한 숲의 소곤거림에 내 귀는 훨씬 예민해진다. 작은 폭포와 맑은 물,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바람, 숲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작은 움직임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경이롭다. 그토록 반짝이던 나뭇잎은 어느 새 윤기를 잃고 까칠하다. 머지않아 이 계절도 눈 깜짝할 사이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성급히 돌아서는 계절의 뒷목덜미를 바라보며 나는 진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으리.저만큼 보이는 산문 앞에서 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낮고 겸손해서 오히려 높아 보이는 문, 이토록 아름다운 일주문은 본 적이 없다. 가벼운 양철지붕과 작고 소박한 현판, 무명옷 두르고 사립문을 서성이던 잊혀진 애환과 정서가 녹아 흐르는, 저문 기억들이 말없이 서 있다. 세파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온 산문이 뿌듯하도록 자랑스럽다.작은 산문을 경계로 속세로 이어져 있던 길은 더 이상 나를 따르지 못한다. 적송 한 그루와 오동나무가 사천왕을 대신하고 주목이 울타리처럼 자라는 길을 따라 경내로 향한다. 이 길 위에서는 누구나 나무향이 날 것 같다. 살이 오른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노닐고 있는 조그만 철재다리, 그 극락교 너머에 심원사가 있다.숲이 울리도록 진돗개가 짖어대며 나온다. 녀석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서둘러 대웅전으로 향한다. 크고 잘 생긴 녀석의 눈에 나는 큰 불청객은 아니었나보다. 이내 경계심을 푼다. 꼬리를 흔들며 법당 문 앞을 지키는 영리한 녀석에게 나는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단청을 하지 않은 대웅전, 석가모니 삼존불을 모신 수미단과 후불탱화, 어디에도 화려함을 탐내지 않았다. 법당 안은 단출하고 소박하다. 천장에 달린 소원등도 많지 않다. 소박함이 나를 낮고 경건하게 만든다. 하지만 허리통증이 심해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삼배를 마칠 수밖에 없다.풍족해 보이지 않지만 결핍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맑은 기운이 일렁이는 심원사의 가을은 온전한 소박미로 눈부시다. 가지런한 장독대에서는 여성스러운 정갈함이 배어 있다. 비구니 스님이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오실 것 같다. 요사채 뒤편 허름한 건물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주인이 있음을 알린다.잘 자란 산수국과 돌배나무가 대웅전을 지키고, 흔하디흔한 풀꽃들이 이곳에서는 더 사랑스럽다. 요사채와 삼성각, 존재감을 드러내는 풀과 나무들의 눈빛을 읽을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고즈넉한 평화가 머문다. 고향집에 온 듯 꾸밈없는 따스함이 곳곳에서 피어난다.대웅전 옆 빈터에는 빛바랜 연등 하나 모과나무 가지에 걸려 홀로 쓸쓸하다. 그 아래 시멘트 벽돌 위에 나무판을 얹어 만든 투박한 벤치가 허전하도록 시리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모과나무 이파리가 툭툭 어깨를 치며 무뎌진 감성을 깨워줄 것만 같다. 서리 오기 전에 모과를 거두는 밀짚모자 쓴 스님이나 시집을 읽으며 고독한 영혼을 달랠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풍경조차 비어 있다.조낭희 수필가가을이 깊어지기 전에 모과나무는 빈 몸으로 서기 위해 묵상 중이다. 떨어진 나뭇잎을 밟는데 풍경소리가 대신 울어준다. 이곳에는 외로운 것이 없다. 이 계절이 서늘하도록 아름다운 건 비움의 미학 때문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 나도 몇 번이나 미니멀라이프를 꿈꾸었다. 하지만 비워진 공간은 또 다시 물건들에 점령당하곤 했다. 영혼을 방치한 채 소유에 지쳐가는 삶, 비우지 않고는 어떤 것도 품을 수 없다.심원사의 묵언 같은 말씀 한 자락 품고 나오는데 운치 있는 별채가 보인다. ‘금장암’이란 현판을 내건 개집을 보고 뒤늦게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금장이를 향한 스님의 애정이 곳곳에 묻어나는, 숨어 살 듯 고요함을 사랑하는 심원사는 독백 같은 절이다.산문을 나서는 내게 가을의 속삭임이 들린다. 그대, 이 가을엔 시집 한 권 들고 여행을 떠나라. 아름다운 계절일수록 걸음이 빠른 법이니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서둘러야 하리.

2020-10-12

부동(不動)의 바다가 그리운 날… 창녕 관룡사(觀龍寺)

가을이면 억새밭이 장관인 화왕산, 그 어디쯤에 관룡사라는 사찰이 있다. 정확하게는 화왕산 동쪽, 창녕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관룡산 품에 안겨 있다.옥천 저수지를 지나고 큰 벚나무 우거진 산길을 오르면 주차된 차들로 인기를 실감하게 된다. 가을이면 오르내리는 차들과 하산하는 사람들로 마음 비우는 과정을 생략한 채 관룡사를 맞아야 한다는 게 유일한 흠이다.작은 주차장 맞은편으로 돌계단이 있지만 사람들은 잘 닦여진 큰길을 따라 오르내린다. 돌계단 위에는 문 없는 돌담 출구 홀로 혼잡함에서 벗어나, 소박한 자태로 서 있다. 붉은 꽃무릇이 절정인, 이 운치 있는 산문이 일주문을 대신하는 것일까. 서서히 출구가 드러나면서 나는 관룡사를 사랑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낯설지 않은 속삭임들이 서성이는 대나무 숲길, 그 끝에는 꽃무릇이 환하게 햇살에 타오르고 있다. 저곳이 극락정토가 아니라면 무엇이랴. 더 이상 등산객들의 소란함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길에 빠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하지만 길은 경내가 아닌 또 다른 주차장과 화장실이 있는 절 바깥으로 이어져 있었다. 관룡사의 주된 진입로인 듯한 어수선한 공간 앞에 섰을 때야 걸어온 길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오색연등이 터널을 이루는 계단길을 올라 천왕문으로 들어선다.관룡사는 신라 진평왕 5년(583년) 증법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 이름을 떨쳤으며, 원효대사가 제자 1천여 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곳이라고 한다. 증법국사가 절을 지을 때 화왕산 위에 있는 세 개 연못에서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관룡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적당한 크기의 전각들이 관룡산을 배경으로 흐트러짐 없이 조화롭다. 절의 기운은 깊고 안정적이다. 대충 둘러보기에는 아쉬울 만큼 정감가는 사찰이다. 뒷산의 웅장한 바위절벽과 절을 둘러싼 노송들, 짜임새 있게 배치된 전각과 이름표를 단 국화분 시주들, 절은 가을의 기도로 충만하다.웅장하지 않으면서 연륜 깊고 내실 있어 보이는 아름다운 절이다. 관광지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큰 사찰과 달리 안온한 정겨움이 흐른다. 사람 많은 대웅전을 피해 원음각 측면에 있는 약사전부터 향한다. 작은 전각에 어울리는 고려 양식의 아담한 삼층석탑이 국화분에 둘러싸여 약사전을 지키고 있다. 보물 제 146호 약사전은 관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법당 안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도 보물 제 519호이다.법당 안에서 나올 줄 모르는 불자 한 분의 기도가 참으로 절절해 보인다. 언제나 약사전의 기도는 마음이 쓰이는 법이라 나도 바깥에서 합장만 한 후 대웅전으로 향한다. 결 고운 가을햇살이 배를 깔고 누운 대웅전 뜰과 앞마당에는 국화꽃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국화꽃이 일제히 개화를 하면 관룡사의 가을은 절정에 이르리라.보물 제 212호인 대웅전 안에도 보물 제 1730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보물 제 1816호 관음보살 벽화가 봉안되어 있다는데 법당은 내부 수리 중이다. 지그시 아래로 눈을 내리뜬 삼존불이 제 자리를 잃고 측면에 앉아 계신다. 참배자들이 많아 나는 법당문 밖에서 작품 대하듯 부처님을 감상한다. 여느 부처님보다 더 과묵해 보이는 부처님 때문인지 절은 많은 보물과 사람들 속에서도 들뜸 없이 침착하다.남편과 나는 응진전에서 백팔배를 시작한다. 하나 뿐인 좌복을 남편이 내게 양보한 탓에, 딱딱한 마룻바닥에 스칠 남편의 무릎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때문에 정성들여 백팔 배를 올리는 남편의 모습이 유난히 애틋하고 시리다. 하지만 백팔배를 하고나면 촉촉이 가슴 젖을 수 있는 것도 모두 부처님의 공덕이다.우리는 서둘러 용선대로 향한다. 전망 좋은 바위, 연꽃모양의 대좌 위에 보물 제 295호 석조여래좌상이 동쪽을 바라보고 계신다. 이곳에서도 어느 불자의 낮은 기도가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부처님의 시선 어느 즈음에, 소나무 숲에 싸인 관룡사가 보인다. 용선대 여래좌상이 절을 지켜주는, 든든하고 평화로운 보금자리임이 드러난다.조낭희수필가잠시 나무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감탄사를 뿜어내는 내 눈에 명상 중인 부부가 보인다. 남쪽으로 난 바위 절벽 위에서 두 눈을 감고 좌선 중이다. 당당히 햇살에 얼굴을 노출한 채 명상에 잠긴 두 사람의 모습이 서늘하도록 아름답다. 우주의 근원, 참된 자아를 찾고 있는 구릿빛 얼굴에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그들만의 자유가 어려 있다.서둘러 내려오는 발걸음에 무언가 허전함이 실린다.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좌선 중인 그들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함께 걷는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서 맛볼 수 없는 깊고 은밀한 침묵의 기쁨을 나누는 부부, 얼핏 약사전의 여래좌상을 닮은 것 같다.어둠 속에서도 목이 마르지 않는 지혜의 바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손짓을 한다. 나는 다만 용기를 내지 못하거나 그 언저리를 서성대다 돌아서기를 반복한다. 부동의 자세로 떠 있는 바다, 그 바다가 그립다.

2020-10-05

소박함이 주는 그 편안함… 대구 팔공산 염불암(念佛庵)

가을이 오고 있다. 폭염과 폭우를 피해 산사를 찾아다니던 지난하던 여름은 잊고, 어느덧 새로운 계절 앞에서 나는 또 설렌다. 풍요와 감사함으로 물결치는 계절이다. 매표소를 지나 동화사 산내 암자들이 모여 있는 길로 접어들자 울창한 숲 그늘이 이어진다. 휴일 뒤의 숲은 지친 기색도 없이 평온하다. 잘 닦여진 길조차 서로를 포용하며 숲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다.부도암을 지나자 숲은 더욱 고요하다. 가끔씩 배낭을 메고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시끌벅적한 말소리와 배가 터질 듯 불룩한 배낭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그들이 누리는 수확의 즐거움이 내 눈에는 다람쥐의 먹잇감을 뺏는 탐욕으로 비쳐져 씁쓸하다. 나는 묵묵히 산길을 오르고 그들은 더 큰 만족감을 얻기 위해 숲을 헤치며 사라진다.인드라망의 그물 같은 인연과 관계 속에 존재하는 삶, 그들이 주운 도토리는 어떤 통로를 거쳐 내 입을 즐겁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 했던가. 누군가에게는 채우지 못해 안달하는 삶이 또 누군가에게는 비우지 못해 괴로운 게 인생이다. 아름다운 소유, 그것은 인간이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이며 딜레마이다.숲은 도토리 줍는 사람들로 떠들썩하다 다시 조용해지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가을햇살이 비쳐드는 숲은 그 자체만으로 자비롭다. 천천히 걷는 발걸음 사이로 번뇌는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가 물결친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볍다. 이 평정심과도 같은 마음, 아라한의 상태가 이와 같지 않을까?염불암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경순왕 2년(928년)에 영조선사가 창건한 염불암은 동화사 부속암자이다. 고려중기에 보조국사가 중창한 후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는데 나는 초행길이다. 다리가 아파오자 수없이 떨어진 도토리들이 사랑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도토리를 줍는다. 이내 주머니가 가득하다. 해찰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 산 위에서 차 한 대가 내려오다 멈춘다.“내가 주우려고 봐둔 도토린데 다 주워가면 안 돼요.”창문을 열고 농담처럼 건네시는 스님의 미소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탐욕에 눈 먼 몰지각한 사람으로 비쳐진 건 아닐까. 그런데도 사람을 무안케 하지 않는 스님의 너그럽고 재치 있는 화술이 고맙고 향기가 되어 머문다. 산 아래로 사라지는 차를 바라보며 뒤늦게 염불암 스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토토리를 줍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염불암이 보인다. 암자는 가을 햇살 속에서 눈이 부시도록 환하다. 팔공산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절,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낮은 감탄사가 자꾸만 터져 나온다. 역사의 깊이가 느껴지는,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사찰이다.인적 없는 경내에는 약수 떨어지는 소리만 가득하다. 작은 극락전은 단청이 벗겨져 고졸미가 흐르고, 그 뒤쪽에는 대구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과 보살좌상이 새겨진 커다란 자연석이 두 손을 모으게 한다. 한 승려가 바위에 불상을 새길 것을 발원하자 안개가 7일 동안이나 낀다. 그 후 바위 양쪽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문수보살이 조각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한 불상이 새겨진 바위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염불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마당을 서성이며 암자의 풍경을 마음에 담는다. 극락 전 앞에는 보조국사가 쌓았다는 청석탑이 유리보호막 안에 애처로이 서 있다. 세월의 흔적은 마음을 여미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극락전 법당으로 들어서는데 마룻바닥이 삐걱이며 고통을 호소한다. 세월의 무게조차 기도가 되어 숙연해지는 순간이다. 수많은 불자들의 염원이 실렸을 마룻바닥 위에 내 작은 기도도 더해진다.손때 묻은 카펫에서 어느 불자의 노고와 정성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평범하고 작은 것들이 더 마음을 끈다. 오늘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위해 기도하리라 마음 먹고 백팔 배를 하는데 허리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신기하다. 합장을 할 때까지만 해도 불편했는데, 이런 것을 두고 부처님의 가피라고 하는 것일까?조낭희 수필가마당 한켠에 한 됫박 정도의 도토리가 수행하듯 몸을 말리고 있다. 농담처럼 던지던 스님의 말씀이 떠올라 가슴이 훈훈해진다. 포행 중에 틈틈이 주워 모으신 듯하다. 도토리묵을 좋아하는 스님과 왠지 잘 어울리는 염불암이다. 탱글탱글하게 쑤어진 도토리묵이 공양으로 올려질 걸 생각하니 더 정감이 간다.다람쥐와 도토리를 나눠 먹는 염불암의 소박한 살림, 지나침이 없는 소유는 보는 이조차 겸허하게 만든다. 그 소박함 속에는 염불암의 오랜 기도와 여유로움이 서려 있다. 처음 와보는 절이지만 포근하고 신뢰감이 간다. 작은 도토리가 나를 염불암으로 이어준 것인지도 모른다.염불암 옆 동봉으로 가는 등산로는 휴면 기간이다. 자연도 인간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몇 차례의 태풍과 자연재해들로 마음을 졸이고 있는 지구촌, 그런데도 삶의 방식은 바뀔 줄을 모른다. 우리는 좀 더 천천히 갈 수 없을까?이 가을에는 소유욕에 물든 일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풍요로움을 느끼고 싶다. 특유의 떫은맛이 감도는 도토리묵 같은, 그런 소박한 즐거움을 누려 보리라.

2020-09-28

인향과 법향이 머무는 곳… 대구 관암사(冠巖寺)

네비게이션이 팔공산 갓바위 오르는 길 중턱에 자리 잡은 사찰로 나를 안내할 때까지 나는 관암사를 기억하지 못했다. 무심히 오르내리던 길목에 배경처럼 서 있던 절, 언제나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경내를 지나다니기만 했던 곳이었다.관봉은 내 젊은 날 즐겨 찾던 등산코스였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사색이 필요할 때면 그곳을 찾곤 했지만 절은 한결같이 침묵에 싸여 있었다.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고 이제 험난한 돌계단이 이어질거라는 묵시적인 길 안내만으로 충실했다. 모처럼 추억을 더듬으며 산길을 오른다.폐사의 비운으로 방치된 절터에서 한국 불교 태고종 제 14대 종정 백암 대종사가 기도 중 불상을 발견하여 1962년 관암사가 창건됐다. 팔공산 관봉의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갓바위 아래에 자리하여 관암사라 지었다고 한다. 갓바위 석조약사여래좌상은 불교 미술적 가치도 높으며,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영험함이 알려져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찾아오는 곳이다.백암 대종사가 중생의 안식처를 만들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갓바위까지 손수 돌을 져 나르며 길을 닦은 업적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미륵불로 불리던 갓바위 부처님을 약사여래불로 명명하여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로 등재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한 것도 백암 대종사의 원력에 의해서다. 하지만 1970년 소유권분쟁에 휘말려 지금은 관리권이 선본사에 넘어가 있는 상태라고 한다.자신과 중생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서원은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자비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좌선의 수행보다 스스로의 노고로 남을 기쁘게 하는 실천하는 구도자, 그가 겪었을 아픔과 좌절 앞에서 잠시 숙연해진다. 지금은 새롭게 정비된 돌계단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숨긴 채 사람들을 맞을 뿐이다.오로지 개인의 소원 성취를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오르는 불자들과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해탈하신 부처님의 삶이 묘하게 교차된다. 참된 종교는 자기 성찰과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서 시작되어야 하리라. 갓바위 오르는 돌계단이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구도의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관암사가 오늘은 목적지가 되어 내 앞에서 위풍당당하다. 2대 주지 혜공 화상이 2010년 대웅전 등을 낙성함으로써 지금은 관음전, 지장전 등 12동의 전각이 모여 제대로 된 전통가람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십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마주 선 감회가 남다르다.고요하던 사찰은 활짝 문을 열고 큰 품으로 대중을 맞고 있다. 몇 개의 벤치와 공양간 쪽마루에 걸터앉아 늦은 오후의 피로를 풀고 있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잡힌다.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와 관암사에 이르면 하산의 안도감이 밀려들던 곳, 그들의 땀자국 위로 부처님의 그림자가 일렁인다.공손히 합장한 후 돌계단을 올라 대웅전으로 향한다. 관음전과 지장전이 좌우로 든든하고 대웅전 앞을 지키는 자귀나무 두 그루도 눈길을 끈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첫인상과 달리 대웅전 쪽에서 내려다본 관암사는 위엄과 격조가 느껴진다. 가을 공기가 머무는 법당에서 처사님 홀로 명상 중이다. 석양으로 떨어지는 햇살이 법당문을 비추고, 처사님은 대웅전과 하나가 되어 미동도 않는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나도 좌복 대신 요가용 매트를 깔고 백팔 배를 시작한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또다시 허리 통증이 신호를 보내오지만 차분히 마음을 다스린다. 윤이 나는 마룻바닥, 눈 꼬리가 약간 올라간 부처님의 이색적인 미소조차 낯설지가 않다. 비로소 관암사는 내게 새로운 출발점이거나 성장점이 되어 손을 내밀고 있다.잠시 가부좌를 하고 명상에 잠긴다. 맑고 안온한 기운이 흐르는 법당에는 하오의 여유로움이 밀려들고, 팔공산 정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관암사의 역동성이 느껴진다. 쪽마루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도 언젠가는 인간의 심성 안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처님과 산사를 사랑하게 되리라.조낭희 수필가종교를 떠나 팔공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가 되어주는 관암사의 선행이 햇살보다 곱다. 약수를 마시고 법당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저 깊숙한 상처가 아무는 소리가 들린다. 십여 년 전 조심스럽게 지나다니던, 그 까칠하던 문턱은 사라지고, 지금은 사람의 향기와 부처님의 향기 가득한 도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갓바위 부처님을 시봉했던 사찰, 관암사만이 지닌 자존심이다.태고종 사찰인 관암사의 가슴 넉넉한 보시가 흥건한 온기로 피어나고 있다. 자타불이(自他不二), 남을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일임을 우리는 알지만 잊고 산다. 불국정토는 자비로운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지리라 믿는다. 인향(人香)과 법향(法香)이 머무는 관암사의 새로운 서원인 불국정토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한다.행여 갓바위 오르는 길 있거든 잠시 관암사에서 쉬어 가라. 발걸음이 법당까지 허락하지 않는다면 두 손 모아 합장이라도 하고 가던 길을 가라. 그대 안이 환해지고 지혜의 강물이 서서히 그대를 휘돌아 나갈 것이니.

2020-09-21

저 자비롭게 나투는 꽃처럼… 고령 반룡사(盤龍寺)

일주문은 길을 살짝 비켜나 높은 곳에 서 있다. 절을 드나드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고독한 품격은 그 상징성만으로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쉽게 일주문을 통과했지만 이내 단단한 철문이 더 이상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장내 집회를 금한다는 하얀 안내문이 콜록거리며 반룡사를 보호한다. 경내는 공사 중인지 푸른 가림막이 쳐져 약간은 어수선하고, 인기척 없는 산중에 빗줄기만 뿌려댄다. 그냥 돌아서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철문 아래로 몸을 굽혀 허락없이 경내로 들어선다.반룡사는 동화사의 말사로 신라 애장왕 3년(802년) 해인사와 함께 창건된 절로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가 중건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다시 중건하였다. 대가야의 후손들이 신령스러운 용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에 세웠다고 해서 반룡사라 이름 붙였다.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진된 것을 사명대사가 중건하였지만, 화재로 전소되어 1764년 영조 때 대웅전과 만세루를, 1930년경 다시 중수하였으며 1996년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허락 없이 들어서는 사찰이라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미숭산 품은 더 없이 아늑하고, 그 안에 자리 잡은 반룡사는 바깥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따뜻한 기운이 흐른다. 퇴락해 가는 천년고찰의 상실감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가지런히 쌓아올린 담들과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절의 품격을 한껏 높여 주고 있다.커다란 굴참나무가 불이문을 대신하고 맞은편에는 잘 정돈된 승탑밭이 숙연하게 나를 돌아보게 한다. 크게 두 곳으로 나뉘어 배치된 당우들도 산만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대적광전 앞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예불을 볼 수 있도록 검은 차양막이 쳐져 시대의 아픔을 호소하는데, 법당 뒤편 레이스빛 불두화들만 축제를 벌이듯 쓸쓸히도 탐스럽다.굵어지는 빗줄기를 피해 대적광전 법당문을 열고 들어선다. 손 세정제와 방명록이 사천왕처럼 나를 점검하는 이색적인 풍경, 이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이름을 적고 백팔배를 시작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법당은 언제나 위험과 불안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던 가장 안온한 공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법당에서 기도할 때면 저절로 감사함으로 행복해지곤 했다.그런데 오늘은 텅 빈 법당에서 올리는 백팔배가 부끄럽다. 잔인했던 태풍의 상흔과 도무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회는 의기소침한데, 나는 그들의 아픔을 방관하지는 않았는지, 위기 앞에서 나를 동여매느라 타인과 사회로부터 돌아앉아 있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본다.궂은 날씨에도 몸은 가볍다. 가뿐히 백팔배를 끝내고 가부좌를 하고 비로자나불을 올려다본다. 만물의 창조주인 비로자나불의 미소에는 견고한 침묵만 흐를 뿐 말이 없다. 부드러움과 힘이 공존하는 목조비로자나삼존불상은 경북 유형문화재로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혜희(慧熙)의 작품이다. 여느 불상과는 다른 묵직함이 마음을 사로잡는다.영혼을 태워 불상을 탄생시켰을 조각승의 일생이 떠오른다. 오로지 한 곳을 향한 집념과 절절함으로 이루어졌을 모든 날들, 그의 삶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깊고 푸른 호수 하나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생명의 기운이 도는 부처님, 마침내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는 순간의 감격과 희열을 무엇에 비하랴.조낭희수필가비로자나불의 엄숙하고도 잔잔한 미소에서 조각승의 얼굴이 보인다. 일상의 위기 앞에서 수많은 염원과 기도로 무릎을 꿇던 순간들도 있었으리. 생각지 않았던 역병과 수많은 자연재해들, 인류가 쌓아올린 질서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좀 더 겸허해지고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 오래도록 비로자나부처님을 우러러 본다.부처님과 나 사이에 수많은 말씀들이 오고간다. 생명력이 느껴진다는 것은 세월과 정성이 빚어낸 아우라를 뜻한다.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와 현실 앞에서 부처님은 꺼지지 않는 빛이 되어 존재하신다. 나의 백팔배는 좀 더 이웃의 아픔을 돌아볼 줄 아는 자비심으로 이어져야 함을 깨닫는다. 내 안에 맑은 기운이 솟아오른다. 법당을 나설 때는 바람은 멎고 빗줄기는 유순해졌다.물기를 머금은 절은 한층 깊고 힘이 넘친다. 대단한 풍광을 자랑하지도 않고,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도 없다. 하지만 눈길 닿는 곳마다 안정적인 맥박이 함께 한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소나무와 배롱나무 들은 조화롭게 서로를 보듬고, 적당한 높이의 돌축대에서는 반듯함이 읽혀진다. 욕심 없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중용의 아름다움을 갖춘 선비와 대화를 나누듯 나는 경내를 거닌다.우측 산기슭에 자리 잡은 약사전과 지장전을 둘러보는데 여성 불자 두 분이 우산을 쓰고 절을 빠져나간다. 어디에 있었던 걸까?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가는 발걸음에 부처님이 보인다. 이끼 낀 돌축대는 여전히 좌선 중이고, 넓은 파초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염불을 외며 그들을 배웅한다.나는 철 늦은 꽃들이 시간을 품은 채 나투시는 모습을 그윽히 바라보며 절을 나선다.

2020-09-14

불교는 실천의 종교… 영천 충효사(忠孝寺)

꿈자리가 어수선하여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태풍이 북상중이라는 소식으로 하늘빛조차 우울한데 영천댐 백리길 벚나무들은 꽃이 없어도 그 눈빛은 시리지가 않다. 나는 차이콥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의 볼륨을 좀 더 높인다. 서정적이고 차분한 음악과 터널을 이루는 나무들 사이로 비쳐드는 잔잔한 물빛까지, 완벽한 축복의 아침이다.보현산을 향해 달리던 차는 영천댐을 벗어나자 이내 충효사 앞에 이른다. 겉보기는 여느 사찰과 다름없이 평범하지만 어마어마한 크기의 오백나한상들 앞에서 무언가 색다른 분위기를 감지한다. 세계 최대 백옥 오백나한상은 석고로 빚은 듯 희디희다. 무심코 어느 나한상과 눈이 마주쳤는데 온몸이 오싹하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서 생명력을 느꼈기 때문이다.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오백 명의 제자들, 나한의 법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통력이 자유자재하다고 한다. 오백나한상을 참배하고 기도하면 오백 분의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과 같으며 무량공덕을 짓는다고 하는데, 도망치듯 서둘러 빠져나오고 말았다. 나를 두렵게 한 그 눈빛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커다란 12지신상을 시작으로 불교 전시장을 들어선 듯 크고 작은 조각상들이 즐비하다. 청이끼가 낀 약사여래불과 넓은 중앙에는 지장보살과 통일지장보살, 육지장보살이 우뚝하고 그 뒤를 메우고 있는 1인 1지장보살들까지, 경내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볼거리를 제공한다. 한 사람이 한 분의 지장보살을 모시게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업장소멸의 공덕을 쌓으며, 스스로 지장보살처럼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우러나 보살행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조상의 영구 위패가 모셔진 안양요까지 둘러보고 나니 영험한 지장보살 도량임이 드러난다. 오늘따라 사후의 세계가 왜 이토록 낯설고 멀게만 느껴질까.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혀 죽음과 삶을 분리시킨 채 떨고 있는 스스로를 지켜본다. 영가들은 편안히 잠들어 있는데 나만 잔뜩 긴장한 채 이방인처럼 헤매고 있다.볼거리가 많을수록 온갖 상상과 억측들이 고개를 내밀고 마음은 점점 더 심산해진다. 중심전각으로 보이는 삼세보전의 법당문을 열자 과거불인 연등불, 현세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 부처님을 모두 모신 전각이라 삼세보전이라 이름 붙여진 듯하다. 신중단에는 경북 유형문화재인 사룡산금정암제석탱을, 다른 면은 일천지장보살 목탱으로 이루어진 위모설법전도 여느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법당 안은 아늑하고 편안한데, 허리 통증이 오늘도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조심스럽게 좌복 위에 무릎을 꿇으며 절을 시작한다. 선풍기를 틀어놓아도 등줄기에서는 쉴 새 없이 땀이 흐른다. 반이라도 하겠다는 처음의 마음은 결국 백팔배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때마침 단아한 비구니 스님이 사시 예불을 드리러 들어오신다.예불이 시작되는데 나가기도 난처하다. 혼자 예불 보실 스님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떨결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스님은 한 시간이 넘도록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예불을 드리는데, 예불 절차나 격식, 진언조차 모르는 내게는 인고의 시간이 따로 없다. 하지만 끝내고 나니 백팔배에서는 맛볼 수 없는 충만한 기운들이 전신을 휘감는다.인연이 닿아 회주 스님까지 뵐 수 있었다. 1993년 대웅전 하나로 시작한 충효사를 지금의 모습으로 사세를 확장시킨, 외모와 풍모가 수려하신 원로 스님이다. 덕을 갖춘 인자함과 사람을 편하게 하는 세련된 매너, 간간이 농담까지 곁들인 스님의 화술은 시간조차 잊게 만든다. ‘일체유심조’를 가슴에 새기고 21살 청춘의 나이로 생활하신다는 스님의 따뜻하고 경쾌한 미소가 곧 법문이다. 사찰 일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과 봉사로써 대중과 함께하는 스님은 깨달음과 해탈을 위해 수행하는 스님들과는 삶의 질감이 다르다.스님은 오백나한 중 455번째 조사에 오른 신라 성덕왕의 셋째 아들인 무상공존자의 후신이라는 현몽을 꾼 후, 곧바로 그 분의 수행처를 찾아다니며 큰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미륵보살이 나타날 때까지 석가모니불을 대행하는 지장보살을 많은 불자들이 영가천도 정도로만 떠올리는 것이 안타까워 세계적인 지장도량을 만들겠다는 큰 포부다. 떠도는 영가를 위해 기도하고 49제 지장제를 백 번이나 올렸다는 스님의 정성과 열정이 존경스럽다.조낭희 수필가사세가 기울어가는 천년고찰을 바라볼 때 밀려들던 안타까움과 달리 일촌의 역사를 가졌지만 충효사는 든든하고 희망적이다. 안이한 태도로 횟수만 거듭하는 나의 산사기행과 턱없이 부족한 불교 지식을 돌아보는 일조차 부끄러운데, 불교는 실천의 종교라는 말씀 앞에서 나는 또 한없이 작아진다. 모처럼 듣는 스님의 말씀이 단비가 되어 나를 적신다.충효사를 나와 영천댐이 보이는 곳에 잠시 차를 세운다. 구름이 가득 끼어 있으면 해가 보이지 않는다는 스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스님의 법문집을 펼쳐든다. 말씀처럼 글도 편안하다. 행간마다 꽃이 피듯 새로운 다짐과 공감대가 자리 잡는다.삶이 위태롭다고 느껴질 때 산사는 그 자체만으로 위안이 되고, 스님의 말씀은 따뜻한 섬김이 되어 나를 일으킨다.

2020-09-07

평온함이 숨기고 있는 것들… 경주 도덕암(道德庵)

도덕암은 해발 702m밖에 되지 않는 도덕산 안에 숨어 있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지나 비포장길을 달릴 때도 나는 참나무숲에 일렁이는 바람을 노래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다시 차가 포장길을 달릴 무렵, 소형차는 진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막아선다. 사륜구동이 아닌 차로 오를 수 있을지 잠시 막막하다.걸어서 오를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용기를 내기로 했다. 가파른 급경사를 몇 구비 꺾을 동안에도 절은 보이지 않고 식은땀만 흐른다. 수많은 산사를 찾아다녔지만 이토록 험난한 오르막길은 처음이다. 내려오는 차라도 마주치면 난감하다. 담력 테스트를 하듯 진땀을 빼며 아슬아슬 도덕산을 오른다.드디어 절벽 위에 암자가 보인다. 산그늘에 싸인 오후의 절은 평온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첩첩 산중, 푸른 생명의 기운만 가득하다. 결코 외롭지 않은 한가로움들, 폭우와 폭염으로 이어졌던 여름의 끝자락이 보인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도덕암은 고립이 주는 절경을 홀로 누리고 있었다.도덕산은 신라 선덕여왕이 찾아왔다하여 두득(덕)산으로 불리다가 조선 중기 회재 이언적에 의해 도덕산으로 바뀐다. 도덕암 역시 정혜사의 부속암자로 신라 경덕왕(742년~765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국보 제 40호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보면 정혜사는 꽤 큰 사찰인 것 같다. 12개의 부속암자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도덕암, 창건 당시에는 다른 이름이었지만 이언적이 도덕산이라 고쳐 부른 후 도덕암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한다.이토록 가파른 곳에서 명맥을 유지해온 암자가 대견하다. 불자들의 정성어린 불심보다 좌선을 위한 몇몇 스님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나 지금이나 쉽게 들락거릴 수 있는 암자는 아닌 듯하다. 산문도 없이 절은 어떤 격식이나 형식도 거부하며 자유로워 보인다. 오로지 소박함만을 성찰한다.작은 대웅전과 요사채, 그 뒤로 낡은 공양간도 보이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다. 흔한 석탑 대신 꽃 진 수국 하나 쓸쓸히 대웅전을 지킨다. 스님은 출타 중인 듯하다. 마당에는 키 작은 풀들이 자라고 등받이 없는 나무 벤치 두 개와 네 개의 플라스틱 의자가 일렬로 앉아 그 쓰임을 기다리고 있다. 오랫동안 앉지 않은 의자의 눈빛에서 간간이 외로움이 잡힌다.가진 것이 많지 않은 암자, 산 그림자도 무료해 성큼성큼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작은 감나무 한 그루가 절을 지킨다. 암자는 한없이 몸이 가벼운데 나는 가진 것이 많아 이것저것 생각이 많다. 마당 끝에 서보지만 시선은 더 이상 산을 넘지 못한다. 멀리 몇 개의 고압선 철탑이 보일 뿐 문명의 이기는 한참이나 돌아 앉아 있다. 묵은 티끌들이 쓸려 나가고 몸과 마음이 고요해져 온다.이곳에서는 모든 존재가 크게 보인다. 뒤늦게 대웅전 법당을 지키는 부처님이 떠오른다. 작은 법당 안의 석가모니 삼존불은 도덕암 풍경보다 더 쓸쓸하다. 낡은 비닐 장판 위에서 좌복 없이 삼배를 드린다. 허리 통증 때문에 스스로 세운 백팔배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씁쓸한데, 가난한 절의 부처님이 큰 품으로 안아 주신다.법당 문을 죄다 열어놓고 하염없이 앉아 있고 싶다. 겹겹이 펼쳐진 숲과 허공 속에 마음을 싣고 싶다. 주인 없는 빈 절이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법당 문을 닫는다. 법정 스님이 손수 만든 빠삐용이란 이름을 가진 작은 나무의자가 생각난다. 책에서 만났던 빠삐용은 불일암을 찾았을 때, 묵직한 풍경이 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조낭희 수필가이곳에도 그런 소박한 나무의자 하나 있으면 좋겠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고 해거름 비탈길을 서둘러 내려가는 산 그림자를 배웅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의자. 그런 무욕의 사치를 즐기고 싶어 스님이 출타할 때마다 나는 암자를 들락거릴지 모른다. 저 긴 벤치에 홀로 앉으면 더 쓸쓸해질 것만 같다.목탁대사가 새벽 일출을 화두로 삼고 참선하여 득도했다는 산신각 쪽으로 향한다. 편평한 바위가 허공을 안고 새 주인을 기다린다. 산신각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 앞에서 좌선의 충동이 인다. 나는 잠시 바위 위에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는다. 그토록 평온하던 마음이 깊은 산중에 홀로 있음을 상기시킨다. 순식간에 무서움이 엄습한다.난생 처음 산신각에 들러 삼배까지 올리던 그 여유로움은 어디로 갔는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정체들과 헛기도로 이어지는 산사 순례, 모든 노력들이 재가 되어 허물어져도 좋다. 산 그림자가 몸집을 부풀리며 돌아갈 시간을 알린다. 막 경내를 벗어나는데 차 한 대가 힘차게 올라온다. 출타 중이던 스님이 열린 창문으로 손을 흔들며 지나가신다.어떤 스님인지 뵙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다. 도덕암이 버려진 암자가 아니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산속 깊은 암자를 홀로 지키는 일, 어쩌면 그 자체가 수행이다. 내려오는 길은 기분 탓인지 한결 쉬웠다. 옥산 저수지를 돌며 하산의 뿌듯함을 즐기는데 몸의 여기저기가 가렵다. 그때서야 밝혀지는 도덕암의 숨은 진실 하나, 그것은 모기보다 더 독한 스님이 계신다는 점이다.이 시간 모기떼와 사투를 벌일 스님께 뒤늦게 합장한다.

2020-08-31

삶의 뒤안길에 부는 바람… 상주 도림사(道林寺)

일명 육산이라 불리는 백원산 국사봉 기슭, 상주 시내가 지척에 보이는 곳에 도림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지만 모두 훼손되어 변변한 법당조차 없는 절을 자용, 탄공, 법연 세 비구니 스님이 재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마을을 지나 비탈길을 오르면 일주문 대신 600여 개의 장독이 먼저 반긴다. 오래된 독에는 건강한 시간들이 익어가며 향수에 젖게 한다. 탄공 주지 스님은 전통 사찰음식의 맥을 잇기 위해 사찰음식과 장 담그기에 열정을 쏟는 분이다.해마다 정월이면 3000장의 메주로 장을 담근다고 하니 그 정성과 규모가 놀랍다. 외부 시주에 의존하지 않고 스님들이 손수 된장과 간장을 빚어 판 수익금으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지금의 불사를 이루었다고 하니 존경스러울 수밖에 없다. 스님들의 정성어린 노동력이 곧 수행이다.절 옆으로는 한양 옛길이란 안내판이 무료하게 서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옛날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앞산의 천년 아미타부처님 와불을 향해 소원을 발원하고 도림사에서 불공을 드리면 그 기돗발이 영험했다고 한다. 그들이 금의환향하여 다시 도림사에 시주를 하였으니 도림사의 위세는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으리라.도림사는 고즈넉한 산중의 정취를 고수하기보다 대중과 소통하는 사찰, 좌선의 수행보다 세상과 하나가 되는 도량을 꿈꾸고 있다. 행여 자본의 위력에 초심을 잃지 않기를, 몸소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대중과 더욱 친숙해지는 멋진 사찰로 거듭나기를 소원하며 나는 경내로 들어선다.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각들이 산재해 있다. 와불산이 잘 보이는 와불전 앞에 108탑 불사가 눈길을 끈다. 한낮의 열기가 후끈거리는데 어디선가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운이 좋다 생각하고 법당으로 달려갔더니 빈 법당에는 녹음된 염불소리가 홀로 더위를 쫓으며 맞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큰 유리 안에 봉안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작은 불보살들이 가득 차 있으며 수미단 풍경도 이색적이다.법당까지 좇아 온 더위를 업고 백팔 배를 시작한다. 갑자기 찾아온 어머니의 치매 증상으로 몸과 마음이 무거운 터라 법당이 더없이 안온하다. 절을 해도 가슴 한 켠에이는 찬바람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모를 뵙고 오는 날이면 허무함으로 힘들었다. 효를 위한 약속들은 언제나 일상에 쫓겨 밀려나기만 했다. 결국은 예기치 못한 사태 앞에서 큰 불효를 한 것을 깨닫는다.온몸은 금세 땀으로 젖고 절을 할 때마다 좌복 위로 뚝뚝 땀이 떨어진다. 눈물도 떨어진다. 불경에 이르는 부모은중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때 3말 8되의 응혈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를 먹인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양쪽 어깨에 부모를 업고 수미산을 백천 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이제야 가슴을 후벼 판다.젊은 날 그토록 멀게만 느껴지던 말씀들이 이토록 절절할 줄이야. 흐르는 눈물은 부모에게 무심했던 스스로에 대한 속죄와 회한이리라. 삭아서 푸석거리는 시간을 안고서도 어머니는 젊은 우리보다 의연하시다. 자식들이 걱정할까 혼자서 병원을 다니며 약을 복용하는 모습은 평생 나를 아프게 할 것이다.조낭희 수필가삶의 뒤안길만큼은 아름답고 평화롭기를 바랐다. 신은 왜 인생의 말년을 한평생 살아온 삶으로 평가받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긍정적이고 강인했던 어머니에게 이런 시련쯤은 비켜갈 줄 알았다. 요양사의 도움을 받는 시어머니와 분노조절 장애가 나타나 작은 일에도 화를 내신다는 아버님의 증상까지, 어디를 둘러봐도 아름다운 노후는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살아온 당신들의 서글픈 뒤안길을 지켜보는 일만큼 잔인한 게 있을까. 머지않아 그 씁쓸한 바람들은 방향을 돌려 내 쪽으로 불어오리라.법당을 나와 멀리 서쪽하늘 아래 열반에 드신 와불 형상의 부처님을 바라본다. 도시는 열기에 눌려 꿈쩍도 않고 극락정토를 지키는 아미타부처님은 폭염 속에서도 한량없이 편안하다. 삶이 짊어져야 할 무게와 고통이 없는 세계, 그 머나먼 나라도 지척에 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하는 것들 앞에서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하기보다 초연해져야 하리라. 누구나 업고 가야할 세상의 마지막 짐들, 당신들의 짐이 좀 더 가볍기를 바라며 와불을 향해 합장한다.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기 위해 내려가다 옛 양반들이 풍류를 즐겼을 법한 고옥 하나 만난다. 도림원이란 현판에 용기 내어 문을 열었더니 관세음보살 부처님과 수많은 불보살들이 봉안되어 있다. 눅눅한 나무 냄새가 안겨드는 법당에는 오랜 향수와 그리운 시간들이 숨을 쉬고 있다.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공간에 나를 맡기고 절을 한다.어머니의 애틋한 여름은 속절없이 가고 있는데, 이 잠깐의 여유조차 사치로 느껴진다. 야윈 슬픔들 앞에서 속수무책 무릎 꿇지 않기를, 잃은 것에 안타까워하기보다 남은 시간이 있음에 감사하자고 다짐한다. 계곡물이 토닥토닥 법문을 들려주며 흐른다. 앉아 있어도 저절로 기도가 자랄 것만 같은 곳, 나는 또 시간에 떠밀려 자리를 떠야 했다.천년 와불 하나 묵직하게 가슴에 안긴다.

2020-08-24

때로는 말씀보다 무거운 침묵으로… 영동 영국사(寧國寺)

산세가 빼어나 충청북도의 설악산이라 불리는 천태산, 그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영국사를 찾아 내비게이션에 하루를 맡긴다. 차는 산길을 한참 올라 화전민들이 살았을 법한 평평한 고원지대로 들어서고, 한 때는 밭이었을 것 같은 평지와 드문드문 몇 그루의 호두나무들이 보인다.영국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527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했다. 그 후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해 절을 국청사라 부르고 지륵산이던 산 이름을 천태산이라고 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원 마니산성에 머물며 이절에 와서 기도를 드린 뒤 국태민안이 찾아와 영국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천연기념물 제 223호인 영국사 은행나무는 어떤 모습으로 반길지 내심 기대가 컸는데 첫 만남이 실망스럽다. 축대 아래에 자리를 잡은 터에 700년 된 고령의 은행나무는 나이에 비해 어딘지 왜소해 보인다.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소리 내어 운다는 나무, 불교가 전래되어 들어올 때 같이 들어 왔다는 설로 수령이 부풀려지기도 하는 은행나무가 사진과는 많이 다르다.절 앞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하고, 만세루는 보수 중이라 분진 방지막을 두른 채 어수선하다. 고령의 은행나무와 절 사이에 주차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먼 길을 달려왔지만 나무와 나는 어떤 교감도 나눌 수 없다. 축대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서자 나무의 웅장함이 비로소 보인다.또 하나의 길이 계단 아래로 이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려가고 있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일주문 쪽의 광경이 그제서야 잡힌다. 나는 두 갈래의 길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힘이 빠진다. 어떠한 노력이나 수고로움도 없이 무례하게 절의 옆구리를 박차고 들어온 셈이다.한참 동안 나무를 올려다보지만 그의 시선은 먼 곳을 응시할 뿐이다. 쉽게 얻은 것일수록 감동은 적고 쉬이 잊혀질 수밖에 없다. 편리함에 중독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난치병과 우리가 잃어야 할 것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마음을 씻으며 일주문을 들어설 때의 감회와 고령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겸허하게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나무는 품격이 넘치지만 미동도 않고, 나는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언어 이전의 언어를 애타게 불러본다. 풀벌레 소리 가득한 산중에 밤이 찾아오면 달과 별들 모두 내려와 은행나무에 깃들리라. 새벽을 여는 도량석 목탁소리에 밤새 피안에 들었던 나무는 또 하루를 열 것이다.양산 팔경 중 일경에 속한다는 곳, 영국사를 찾는 방문객은 의외로 많았다. 그에 비해 절은 소박하다. 마당을 지키는 단아한 수형의 단풍나무가 눈길을 끌고, 그 옆에는 오래된 보리수나무 한 그루가 보물 제 533호인 삼층 석탑을 지킨다. 그 석탑은 또 대웅전을 지킨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시선은 오로지 한 곳으로 모아져 있다. 나만 홀로 무언가를 찾아 절간을 두리번거린다.바깥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대웅전 법당에서 바라보는 한여름 풍경은 여유롭다. 낯설고 어색한 마음을 가라앉힐라치면 모습을 감춘 만세루의 정경이 안타깝게 아른거린다. 오늘따라 부처님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법당에 앉아 정신없던 한 주를 돌아보고 싶은데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경내는 약속이나 한 듯 침묵 속에 잠겨 있고, 7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도,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백팔 배를 올린 부처님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다시 먼 길을 돌아갈 생각에 마음만 초조해져 온다. 법당을 나와 천태산 주봉 쪽으로 100m쯤 올라간 곳에 있었다는 옛 절터를 멀리서 더듬어 보다 발길을 옮긴다.또 다른 보물이 있다는 이정표를 따라 산길을 오른다. 개발을 서두르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흙길이 말을 걸어온다. 당신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느냐고. 보물 제 534호 원각사비와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를 보물 제 532호 팔각원당형 승탑조차 감흥 없이 둘러본다. 한여름의 태양을 이고 그 뒤로 이어지는 산길을 무작정 걷고 싶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나를 석종형 승탑이 지긋이 바라본다. 내 앞에는 높은 곳을 향해 모든 것을 버렸을 맑은 생 하나 말없이 서 있다.조낭희 수필가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나는 심사숙고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음에도 단호히 뿌리치지 못했다. 절 기행은 자연히 뒤로 밀려났고 나는 시간을 다투며 절을 찾아 나서야 했다. 어쩌면 영국사의 침묵은 예고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모든 일에는 과정의 무게가 따르는 법, 그것을 기꺼이 짊어질 용기도 없이 섣불리 절 문을 두드렸다.솔밭에서 만난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끊어진 길 앞에서 홀로 서성이고 있는 나, 그 모습은 장마가 할퀴고 간 상흔보다 더 남루했다. 영국사의 침묵은 그런 나를 향한 엄중한 경고였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내려오는 길에 대웅전을 향해 두 손 모을 때 내 안에 길이 보인다. 희미하게 영국사도 보인다.

2020-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