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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수만 번의 헛기도로 이어지는… 충주 석종사(釋宗寺)

충주 금봉산(金鳳山) 자락에 석종사라는 절이 있다. 그리 멀지 않지만 내게는 낯설고 생경스러운 도시를 혜국 스님의 말씀 하나 잡고 찾아 나선다. 휴일이 무색할 정도로 고속도로는 한산한데 두어 시간 만에 도착한 석종사에는 뜻밖에 봄기운이 완연하다.일주문을 지나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를 문패처럼 내건 곳에 넓은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 죽장사라는 절이 있던 폐사지를 봉암사에서 수행하던 혜국 스님이 현몽을 꾼 뒤 찾아와 석종사를 세웠다. 스님은 갈 곳 없는 연로한 스님들과, 이들의 외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부모 없는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대웅전 창건을 시작으로 혜국 스님의 상좌들이 직접 중장비를 운전하고, 신도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대대적인 불사를 이루었으니 불심의 깊이가 제대로 살아 있는 절이다.크고 작은 당우들이 널찍하게 거리를 둔 경내는 인적 없이 고요하다. 천척루를 배경으로 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늙은 어머니와 딸인 듯한 모녀가 봄꽃 같은 미소를 피우며 반긴다. 마스크를 하지 않은 채, 두려움 없는 민낯의 온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고려 때 만들어진 오층석탑은 멀찍이 서서 홀로 참선 중이다. 결코 쓸쓸하지 않은, 환한 평화가 넘실거리는 경내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석종사는 웅장한 외형만큼 내재된 힘을 자랑한다. 군장병을 위한 템플스테이와 출가한 승려만을 위한 공간을 지양하고 재가자(在家者)도 사찰에 머물며 수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찰은 그리 흔하지 않다. 진지하게 명상에 잠긴 불자들의 모습은 매너리즘에 빠져 살아가는 내게 고무적일만큼 서늘하게 다가왔다. 육신의 눈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들, 그들은 모습은 참으로 경건해 보였다.누하진입식 천척루를 지나 마당보다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감로수에 손을 씻는다. 대빗자루 자국이 선명한 마당, 눈부신 햇살, 잘 생긴 나무들, 모두가 흐트러짐 없이 참선 중이다. 지독히도 그립고 그립던 봄이 오는 풍경이다. 신선한 설렘과 전율들을 뒤로 하고 대웅전으로 향한다. 마스크를 벗지 않고 계단을 오르는 나와 신음 소리를 내며 물러서는 햇살의 만남이 어색하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계단을 오른다.대웅전 팔작지붕은 툭 트인 산야를 향해 날아오를 듯 힘차고 웅장한데 너른 뜰 위로 수많은 좌복들이 나와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이색적인 사찰의 봄맞이 풍경이다. 풍수에 문외한인 내게도 명당 터라는 게 느껴진다. 가부좌가 아닌 편한 자세로 대웅전 뜰 위에 하염없이 앉아 있고 싶다.가지런히 전지를 한 나무들처럼 탐욕과 집착으로 멍든 마음 깨끗이 잘려나가고 고착된 습은 봄볕에 녹아 재가 될 것 같다. 고만고만한 종류의 반성과 다짐이 되풀이 될 때마다 겪어야 했던 자괴감들, 행동은 마음을 따르지 못해 자주 괴로워했다. 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를 바꾼다는 건 쉽지 않았다. 천하의 법도로 삼을 만큼 한결 같은 ‘하나’, 그것이 부재인 채로 나는 육신이 끄는 대로 살아왔다.게으름으로 시간을 낭비할 때마다 맞닥뜨려야 했던 순간들이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새해 첫날의 다짐처럼 오래지 않아 기도는 무질서 속으로 함몰되었으며, 감정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수많은 사찰과 말씀들이 든든한 위안처가 되어 주었다.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며 대청소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법당에 끌리듯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그들도 나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도하듯 청소를 하고 열린 어간문 앞을 서성대던 햇살이 나를 안내하고 처마 끝의 풍경도 울지 않았다. 삼배의 예를 갖추자 한결 마음이 정갈해진다.조낭희 수필가큰 절은 무언가로 꽉 차 흐른다. 삼라만상 실개성불(森羅萬象 悉皆成佛).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것들이 모두 부처를 이루었다는 부처님 말씀이 떠오른다. 보이지 않는 아우성으로 가득한 이 어수선한 봄날, 둘러보니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 실눈을 뜨는 나무와 바위, 높다란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시선 닿는 곳마다 생명이 숨 쉰다.대웅전 뜰 위에 서서 내 안을 응시한다.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맬 때마다 어김없이 손 내미는 분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번에는 혜국 스님의 말씀이 봄꽃처럼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모든 건 필연이다. 어둠 속에서 만나는 한 줌의 햇살, 뒤이어 따라오는 수많은 전율들, 인생은 결코 고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혜국 스님의 말씀을 따라 햇살 속을 걷는다. 한 번의 참기도는 수만 번의 헛기도를 필요로 한다는 스님의 가르침이 죽비가 되어 내려친다. 나는 언제나 조급했다. 달팽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걸 간과했었다.서둘러 피었다가 이내 이울더라도 다시 그렁그렁 눈물 같은 꽃눈을 달고 헛노력이라도 해봐야겠다. 언젠가 이승을 떠날 때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미안해지지 않도록, 더 이상은 두렵거나 쓸쓸하지 않을 미지의 세계를 위해….삶은 수많은 출발들로 점철되어 있지 않은가.

2020-03-16

봄은 한 마리의 달팽이처럼…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올 겨울은 큰 추위 없이 그럭저럭 보냈다. 하지만 끄트머리에서 만난 복병은 위협적으로 우리를 흔들고 있다. 저만치서 창백한 모습으로 주춤거리는 봄을 위해 전원의 삼월은 어김없이 분주하다.텃밭 한쪽에는 상추며 파가 얼어붙었던 계절을 견디고 용케도 살아남았다. 여린 잎채소의 겨울나기처럼 모두가 건강하게 기지개를 켰으면 좋겠다. 긴 겨울이 때가 되면 물러나듯 이 어려움도 머지않아 지나가리라.불안함 속에서도 마음의 근력이 생겨 제법 초연해져 온다. 제2 석굴암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팔공산 계곡, 천연 절벽 동굴에 만들어진 통일신라 초기의 석굴사원은 7세기경에 조성 되었다. 경주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보다 1세기 정도 앞서 만들어졌지만 뒤늦게 발견되어 제2 석굴암으로 불린다.신라 19대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수도전법을 하던 곳이라 ‘아도굴’이라고도 하며, 원효대사가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여 해동 제일의 석굴사원으로서 신라 불교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본존불 아미타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석굴은 우연히 마을 사람에 의해 발견되어 주민들의 치성터로 쓰이다, 1962년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 109호로 지정되었다.석굴암에 밀린 두 번째 석굴사원이라는 이미지때문일까. 큰 기대감 없이 들어섰는데 안온한 느낌의 절 풍경이 좋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지나자 담장너머로 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나무들의 그림자가 담장을 지키고, 절벽의 석굴로 인해 일촌의 역사를 가진 전각조차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불이문을 지나듯 천천히 다리를 건너는 나를 석조비로자나 불자상이 맞은편 마당에서 지켜보고 있다.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어수선하고 삿된 마음 계곡에 흘려보내면 잠시지만 극락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혼란스럽던 사바의 세계는 더 이상 계곡을 건너지 못한다. 오염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전각과 나무들은 맑고 건강하다.비질 자국이 선명한 마당이 나를 비로전으로 이끌고, 정갈한 마당 위로는 커다란 목련나무 가지가 꽃눈을 밀어 올리느라 정신이 없다. 마당 한쪽에선 특이하게 생긴 모전석탑이 홀로 봄볕에 빛나고, 그 주변을 마스크 쓴 사람들이 느릿느릿 시간을 즐긴다. 한 마리의 달팽이처럼 봄은 그렇게 어김없이 오고 있었다.화강암 판석으로 만들어진 널찍한 단층기단 위의 4m 높이 모전 석탑은 시간의 깊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크고 작은 상흔들을 이끼 옷으로 감춘, 눈빛 진한 탑이 아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이만큼의 연륜이 느껴지지 않는 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은 계통으로, 삼존상과 비슷한 시기인 7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거라 추정하지만 크게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절벽 동굴에 봉안된 아미타여래삼존불과 모전 석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수천 년을 함께 해 왔으리라. 훼손을 우려하여 철문으로 굳게 잠겨 있는 삼존불, 나는 지척의 거리에서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둘 다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어둠을 안고 있는 동굴 속 삼존불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 때문일까. 과거와 현재, 없음과 있음, 묵직함과 가벼움 같은 사유의 공존성이 보인다.목련나무 그늘에 서서 오랫동안 삼존불을 바라본다. 모전석탑은 햇살 속에서 더없이 명랑하고 굴속의 삼존불은 일심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밝음 뒤에 가려진 어둠, 그 묵직한 세계가 우리를 지탱시켜 주는 힘인지 모른다.문득 빛 읽기의 대가인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랄프 깁슨이 떠오른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 어둠이 있어 밝음은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시선은 밝은 쪽으로 쏠리지만 상대적인 어둠은 마음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다. 그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서 아미타삼존불이 내 안에 들어왔다 또 다시 멀어진다.한결 마음이 차분하다. 절을 빠져나오는데 노점상들이 각종 약재와 채소, 과일 들을 풀어놓고 행인을 기다린다. 하얀 마스크에 가려진 그을린 얼굴, 삶은 때때로 별 것 아닌 모습으로 우리를 싸하게 만든다. 사과를 산 손님이 상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사고 보니 비싼 것 같다며 오천 원을 돌려달라는 요구였다. 근처에 세워둔 승용차의 엔진소리가 쓸쓸하게 쿨럭인다.조낭희 수필가바이러스의 여파로 여유를 잃어가는 사람들, 빗나간 ‘사회적 거리두기’다. 조금 전까지 얼굴을 맞대고 덤까지 주고받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다. 값으로 셈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은 놓치고 있다. 사회가 힘들고 어수선할수록 하나라도 더 챙기려는 심리는 본능일지 모른다.어쩌면 저 손님도 비로전이나 아미타삼존불 앞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고 나오지는 않았을까. 문득 드는 생각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말이나 기도만큼 부끄러운 게 있을까. 절을 나서기가 무섭게 우리는 형이하학적으로 채워진 현실과 맞닥뜨려야 하고, 삶은 우리를 자주 시험에 빠지게 한다. 행여 우리는 이상과 현실을 기도로 오가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나는 어제와 오늘이, 지난해와 올해가 조금도 성숙되지 않은 채 절집을 찾아 다닌지도 모르겠다. 봄볕이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린다.

2020-03-09

참된 종교인은 일상에서… 경산 불굴사(佛窟寺)

절을 찾아나서는 발걸음이 편하지가 않다. 들리는 소식이라곤 ‘코로나 19’ 확진자 증가수와 그들의 동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불안한 마음으로 팔공산 뒤편,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불굴사로 향한다.불굴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신라 신문왕 10년(690년) 원효대사가 정진하여 득도한 곳에 암자를 세운 게 시초가 되었다. 한 때는 50여 동의 전각과 12개의 부속 암자, 8대의 물레방아로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의 공양미를 해결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소문난 기도 도량으로 알려진 절이지만 초행길이다.썰렁한 절집에 혼자 들어설 거라 예상했는데 드문드문 보이는 불자들이 봄꽃처럼 반갑다. 하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봄소식이 멀기만 하다. 모처럼 찾아온 맑은 공기와 햇살이 마당을 서성이며 봄소식을 전하지만, 반기는 이 없는 화창함이 제 그림자와 놀고 있다.침묵에 싸인 풍경들이 서로를 품어주는 경내로 조심스럽게 들어선다. 일렁이는 햇살 속에 서 있는 보물 제 429호 삼층석탑 뒤의 극락보전, 조선 후기 건축물로 가장 오래되었다는 약사보전, 그 옆에 관음전까지, 전각들은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다. 활짝 열린 법당 문턱에는 서둘러 나온 봄 햇살이 졸고 있다.나도 모르게 발길이 약사보전으로 향한다. 인자하고 온후해 보이는 약사여래입상은 1736년 큰비로 사찰 전각이 무너질 때 매몰되었다가 순천 송광사 노스님의 현몽으로 발굴된 것이다. 파손이 심한 왼손과 얼굴부분은 보수한 흔적이 보이지만,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과 같은 시기인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갓을 쓴 갓바위 부처님이 남성적이라면 족두리를 쓴 불굴사 약사여래불은 여성적이다. 양지인 갓바위와 음지인 불굴사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음양의 조화로 안치된 듯하다. 갓바위 부처님께 기도를 한 후 불굴사의 약사여래불에게도 기도를 하면 훨씬 더 영험함을 얻는다고 알려져 있다.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오늘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전국을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서 하루빨리 놓여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하다. 다른 날보다 더 넉넉히 불전을 놓고 절을 한다. 사재기를 하는 사람들을 비웃다가 결국은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더 큰 불안감에 갇혀버린 나를 위한 기도였으리라.북적대던 오일장과 드나들던 금융기관이 폐쇄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조용하고 작은 면소재지 마을은 더 이상 정겹지가 않다. 확진자가 늘어나면서부터 거리의 한적함은 공포로 변해 밤낮을 배회한다. 대구로 출퇴근하는 남편은 몇 장뿐인 마스크를 재활용하며 견디고 있다. 어린 손녀까지 있어, 마치 전쟁터로 남편을 보내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다.절벽처럼 높다란 바위굴에 있는 홍주암을 향해 철제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겁다. 원효대사와 김유신 장군이 치성을 드렸다는 약수터 앞에는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불자 한 분이 기도 중이다. 마치 정화수 앞에서 비는 모습처럼 이색적이다.기도 대신 서둘러 사진만 찍고 독성전으로 오른다. 순수한 아이의 눈빛마냥 무심으로 반짝이는 산 아래 풍경에 취해 있는데 봉사자 한 분이 홍주암의 영험함을 강조하며 초파일 등 달기를 권한다. 난처하다. 가진 것이 많아 가는 절마다 등 하나 달아주고 오면 얼마나 좋을까? 좀 전에 보았던 불자가 올라와 시선은 자연스럽게 옮겨졌다.익숙하게 불전을 넣고 촛불을 켜는 일련의 행동들이 익숙하다. 모든 게 정성스럽다. 기도는 천천히, 안정감 있게 행해졌다. 차분한 눈빛과 자태가 그녀와 기도를 훨씬 돋보이게 했다. 나는 넋을 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으로 지켜보던 마음에 묵직한 기운들이 번져오고 온몸이 따뜻해져 왔다.조낭희 수필가어느 순간부터 정부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불안감이 나를 지배했다. 무서운 속도의 전파력을 지켜볼 때마다 육신보다 정신이 먼저 병들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그녀의 일상은 나보다 훨씬 건강해 보인다. 사재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거나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지도 않았으리라. 산사는 그녀에게 좋은 도피처이며 위안처였음이 분명하다.그동안 ‘방역실패’라는 말을 매스컴에서 접할 때마다 심장이 얼마나 오그라들었던가. 무능한 정치인과 재난을 이용하는 기회주의자들, 이해할 수 없는 이단 종교계로 화살을 쏠 때마다 허탈해지는 건 오히려 나였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분노와 비난보다는 감염병이 하루빨리 종식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며 지킬 수밖에 없다.오늘도 대문간에는 두 주 정도 버틸 분량의 마스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넉넉지 않지만 급한 대로 나눠 쓰자는 친구의 말이 밤새 온기로 남아 나를 다독인다. 작은 것들이 쌓여 얼마나 깊어지는지를, 지혜로운 방법으로 위기를 대처할 줄 아는 크리스천 친구에게서 나는 예수님을 본다.부처님이든 하느님이든 맹목적인 신암심보다는 힘들수록 스스로와 주변을 아름답게 밝힐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이 시대의 참된 종교인이 아닐까?

2020-03-02

오어사 자장암(慈藏庵)… 내가 사는 이곳이 피안

상큼한 겨울날, 반쯤의 물만 채운 오어호는 공사중이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흔들다리나 오어사의 아침 풍경은 등산객들로 어수선하다. 그들의 한량없이 가벼운 웃음과 대화들이 내 귀를 자극한다. 그들에게 오어사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길목에 있을 뿐이다. 개발의 편리함이 빚어낸 풍경을 나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옛날의 오어사를 자꾸만 그리워한다.운제산은 신라사성(新羅四聖)으로 불리는 자장, 의상, 원효, 혜공이 수도한 명산이다. 오어사를 중심으로 골짜기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원효암, 가파른 바위산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자장암, 두 암자의 느낌은 많이 다르지만 전설 속의 스님들은 구름을 사다리 삼아 서로 왕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구름 운(雲), 사다리 제(梯)자를 써서 운제산이라 부른다.오어사의 아침 예불소리는 인파 속에서 외로운 배경이 되어 흐르고, 절은 관광지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왁지지껄 절을 구경한 뒤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느라 정신이 없다. 커다란 동종 앞에서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게임을 하듯 동전을 던지며 환호성을 지른다. 예불소리 홀로 대웅전 근처를 맴돌 뿐 경건한 산사의 아침풍경은 고대할 수가 없다. 휴일에 산사를 찾아나선 나의 불찰이다.오어사 뒤쪽 산 위에 앉아 있는 자장암이 보인다. 접근조차 쉽지 않은 천상의 세계, 마치 영겁의 시간을 안고 살아갈 것만 같다. 아픔과 괴로움, 시끄럽고 번잡한 세속을 뒤로하고 살아가는 자장암의 눈빛을 만나고 싶다. 자장암은 오어사(吾漁寺)의 산내 암자로, 신라 진평왕 (578년) 자장율사와 의상조사가 수도한 곳으로 오어사와 함께 창건된 절이다.이십여 년 전 가파른 산길을 미끄러지며 올라갔던 기억을 더듬으며 산을 오른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면 간간이 나무그루터기에 앉아 숨 고르며 일상 속의 나를 만나는 것도 좋다. 부도밭을 지나자 대나무 숲길이 바람을 품고 일렁이며 길을 연다. 뜻밖에도 가파른 경사길 마다 나무계단이 친절히 놓여 있다. 옛것을 그리워하면서도 편리한 나무계단 앞에서 좋아하는 부조리한 내 몸을 읽는다.산길은 인적 없이 고요하다. 한 마리 까마귀가 정적을 깨며 지나갈 뿐, 겨울 햇살이 잡목 숲의 주인이다. 숨이 찰 때마다 산 아래 풍경을 돌아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어른거리는 호수의 풍광보다 얼마큼 올라왔는지 가늠해 보는 뿌듯함도 크다.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소음은 멀어지고 나는 숲의 일원이 된다. 북적대는 둘레길에 비해 자장암 오르는 산길은 여유로 넘친다.외롭고 적적할거라 여겼던 산길은 아늑했지만 아쉬울 정도로 짧았다. 자장암과 인사를 건네기가 무섭게 세찬 바람이 안겨들어, 나만의 특별했던 의례도 이내 끝이 나고 말았다. 고즈넉한 암자를 예상했는데 산 너머로 이어지는 차로를 이용한 차들이 벌써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제를 지내는지 사람들로 북적대는 설법전을 지나쳐 무심의 그림자 길게 드리우고 벼랑 끝에 서 있는 대웅전으로 향한다. 애초의 목적지도 그곳이었다. 대웅전은 허공 속에 가려진 동해의 푸른 바다를 더듬고 있는 듯하다. 높은 곳에 서면 내 눈도 높고 먼 곳을 향할 줄 알았는데 눈길은 자꾸만 아래로 향한다. 내가 올라온 길을 더듬고 둘레길을 걷던 낯선 사람들의 소란함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반짝이는 오어호의 윤슬과 낮은 자세로 침묵을 지키는 오어사가 유난히 아름답게 보인다. 흔들다리를 구르며 장난을 치던 남자들의 행렬도 시끌벅적함을 이끌고 산모롱이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유치한 행동들조차 이곳에 서니 정겨운 것으로 변한다. 눈을 감고 바람결에 귀를 기울인다. 멀리 오어호의 은빛 물결이 내 안까지 밀려들어와 찰랑거리는 아침이다.조낭희 수필가뒤늦게 자장암의 의연함도 눈물겹다는 것을 알았다. 햇살을 품은 대웅전의 온화한 앞모습과 달리 그 뒷덜미는 겨울바람에 한없이 떨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맞는 바람은 더 차고 세다. 대웅전 뒤편 사리탑 옆에는 어린 홍매가 꽃을 피운 채 심하게 휘청인다. 홍매의 화려한 시련이 절벽 위의 자장암과 닮았다. 멀리서 볼 때 피안처럼 여겨지던 이곳에도 그만의 아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결코 그저 얻어지지 않는다.소란과 번잡함에 휘둘리지 않고 수행하듯 흔들림없이 깨어있는 오어사, 호수의 파란들이 일으키는 쉼없는 재잘거림과 삼삼오오 둘레길에 피어나는 건강한 수다들, 공사를 하는 중장비의 모습조차 정겹고 사랑스럽다. 어쩌면 우리가 갈망하는 피안의 세계는 차안의 세계 안에 있을지 모른다. 멀어져간 것들이 그립 듯,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우리의 주변과 일상이 혼탁하고 힘들수록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 아침,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외출을 삼가며 불안에 떨고 있는데 이웃에서 과일이며 채소가 든 보따리를 대문간에 두고 갔다. 함께 마음 모아 위기를 이겨내자는 문자 하나 남기고. 어수선한 마음에 햇살이 퍼진다. 코끝이 찡하다.모두가 힘들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곳은 살 만한 세상, 바로 피안이 아닐까.

2020-02-24

느티나무 아래에서… 달성 도성암(道成庵)

햇살을 동무삼아 도성암까지 걷기로 했다. 굽이굽이 비슬산을 감고 오르는 콘크리트길을 한 시간 가량 걸으면 비슬산 최고의 참선도량, ‘천인득도지(千人得道地)’로 불리는 도성암이 나온다. 저마다 다른 수피의 나목들이 인사를 건네 오는데 나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사진을 찍고 눈을 맞춘다.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 행복한 산행이다.남편은 목적지를 향해 성큼성큼 앞서 걷고 나는 겨울 산의 매력에 빠져 엉뚱한 짓을 하느라 시간을 지체한다. 그런 나를 재촉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남편은 한 번씩 뒤돌아보고 기다려 준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며 다른 생각에 잠겨 같은 길을 걷고 있다.잡목 숲이 끝나자 잘 생긴 소나무 숲이 한참 이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확 트인 골짜기 건너편, 해발 700미터 고지에 청기와가 보인다. 도성암은 선산 도리사, 팔공산 성전암과 함께 경북 3대 참선수도처 중 하나로 신라 혜공왕 때 도성(道成) 스님이 창건하였다.삼국유사에는 도성과 관기의 득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 때 포산(비슬산)에 도성과 관기라는 두 성사가 있었다. 도성은 북쪽 굴, 관기는 남쪽 고개 암자에서 살며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10여 리 거리를 서로 왕래하였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고 하면 산속의 나무가 모두 남쪽으로 굽어 영접하는 것처럼 보여 이를 보고 관기는 도성에게 달려갔으며,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나무가 북쪽으로 구부러져 도성이 관기에게로 달려갔다.어느 날, 도성이 굴 뒤 큰 바위에서 좌선을 하던 중 바위를 뚫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간 곳을 알 수가 없다. 얼마 뒤 관기도 도성을 따라 세상을 떠났는데 그 역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두 성사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살던 곳에 도성암과 관기봉이라 이름 붙였다. 도성이 도를 통하여 바위를 뚫고 사라진 바위를 도성암(道成巖) 혹은 도통바위(道通巖)라 부르고 그 아래에 도성암(道成庵)을 지은 것이다.대나무로 만든 소박한 정낭이 암자의 산문을 대신한다. 활짝 열려 있지만 수행도량이라 발소리를 낮춘다. 스님의 털신 하나가 단정히 놓여 있는 도성선원, 유리문에는 오후의 햇살이 그려놓은 나뭇가지들이 황홀하게 일렁인다. 청기와로 치장한 대웅전이나 푸른 소나무 숲, 예사롭지 않게 솟아 있는 도통바위조차 잊은 채 홀린 듯 커다란 느티나무를 바라본다.느티나무 아래에는 부부인지 연인인지 모를 남녀가 서 있다.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 때문에 얼마만큼의 거리를 둔 그들의 풍경은 검은 실루엣이 되어 그림처럼 아름답다.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삼층 석탑이 무색하리만치 다가가도 미동을 않는다. 간절한 몸짓이나 우수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옹이진 싸늘함이 감도는 그들의 침묵을 나무는 느긋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냉랭함을 피해 남편과 나는 조용히 대웅전 법당으로 향한다.뜰아래에는 잔설이 남아 있지만 비닐 방한복으로 무장을 한 법당 안은 아늑하다. 최고의 기도처에서 특별한 기도를 하고 싶은데 난감하다. 적당한 기도가 떠오르질 않는다. 마당 끝에 서 있는 느티나무만 아른거리다 얼떨결에 조금 전에 본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말았다. 행여 서로의 무게가 버겁고 힘겹더라도 모진 말로 상처주지 않기를,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는 말로 부디 위안 삼기를.법당을 나오자 그들은 떠나고 없다. 대신 중년 남자 하나 나무의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의 고독은 둘 사이에 흐르는 냉랭함보다 더 무겁고 안쓰럽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몸짓과도 같은 아픔이 느껴진다. 그것이 비록 잠깐의 휴식이라 할지라도. 곁에 있는 느티나무의 자태는 정령이 깃든 것처럼 신령스럽다.아무도 없는 느티나무 아래 남편과 나란히 선다. 미세먼지로 산 아래는 뿌연 허공에 잠겨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도성대사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250살의 느티나무가 벼랑 끝을 지킨다. 고개를 젖히고 우러러 본다. 섬세한 가지들이 참선하듯 허공을 향해 저마다 길을 내고 있다. 맑고 청아한 기운들이 뻗어가는 길을 따라 아름다운 생명의 언어들이 물결친다.조낭희 수필가시름에 젖어 홀로 찾아와 머물다 가도 좋을 자리, 눈길이 향하지 않아도 무언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로받고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조용히 서쪽을 응시하는 남편, 문득 그의 쳐진 어깨를 보고 말았다. 허무함으로 구멍 난 내 시간에 집착하느라 상대를 살피지 못했다. 언제나 햇살처럼 은은하고 든든한 존재로만 여겨왔다.가까운 사이일수록 거리를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는 느티나무 같은 존재여야만 했다. 지치고 쓰러져서는 안 될 무게로 버티는 나무. 그가 가진 긍정성이 아픔과 시름 속에서도 사랑하며 살도록 이끌었으리라. 가끔은 모든 것 내려놓고 고독 속에 남겨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숙연하다. 눈먼 나를 위해 기도한다. 나보다 남을 보살피는 마음으로 삶을 채색하고 싶다. 평온한 저녁 인사처럼. 암자를 나서는데 비슬산 정상에 하얗게 쌓인 눈이 보인다. 잔설 같은 낮달 하나 멀찌감치 서성인다. 낮달을 처음 본다는 남편의 말이 애잔하게 따라 걷는다.

2020-02-10

아름다운 천 년의 고독… 경주 분황사(芬皇寺)

인적 없는 분황사에 겨울비가 내린다. 나무들의 젖은 손짓이 기도하듯 평화로운 날, 명절 연휴의 분황사는 더없이 적막하고 스산하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하염없이 내린다. 그 너른 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분황사는 선덕여왕의 숨결이 살아 있는 절이다. 여왕이 즉위할 때 당나라 태종이 모란꽃 그림을 선물하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 없는 꽃임을 눈치 챈 후, 당 태종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에 빗대어 향기 나는(芬) 황제(皇)의 절(寺)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날씨 좋은 어느 봄날 황룡사를 찾았을 때 사람들로 붐볐다. 지혜로운 여왕의 이미지나 원효대사의 깨달음은 바람결에 스치는 언어가 되고 마음은 봄날에 들떴다. 조용한 분황사를 만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분황사에 가면 달아났던 언어가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절문을 들어서자 국보 제 30호 모전석탑(模塼石塔)이 비를 맞고 서 있다. 신라 최초의 석탑이며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양식이다. 인도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신라로 들어올 당시 중국에는 흙으로 벽돌을 구워 만든 전탑이 유행했다. 하지만 벽돌 만들 환경이 여의치 않던 신라인들은 자연석을 일일이 깎아 모전석탑을 만들었다.유학파 스님들이 만든 모전석탑은 창건 당시 7층이나 9층으로 추측되지만 임진왜란 때 반이 파손되고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기단의 각 모서리에는 사자상 네 마리가, 일층 네 개의 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왕상 여덟 구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모습으로 탑을 지키고 서 있다.근육질 사내의 분노에 찬 표정과 불끈 쥔 주먹, 금강역사상이라 불리는 인왕상은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로 사찰이나 불상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 탑의 꼭대기까지 연꽃장식을 만들 정도로 절과 탑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던 선덕여왕과 신라인의 불심이 드러나는 걸작이다. 하지만 오늘은 1300여 년을 견뎌온 석탑의 위용조차 무색하다.두 눈 부라리며 지켜온 사리 장엄구는 백 년 전에 발견되어 지금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그런데도 인왕상은 여전히 분노에 찬 표정을 내려놓지 못한다. 신라인의 불심과 예술혼을 대변하는 특유의 감각들이 살아 있는 저 정교함도 언젠가 흐물흐물 눈물처럼 내려앉을 것이다. 세월은 끊임없이 서 있는 것들을 공격하지 않는가.담장 너머에는 신라 최고의 사찰, 황룡사가 있었다. 한때 서라벌을 밝혔을 당당한 자태의 두 절은 어디 가고, 모전석탑 홀로 반쪽짜리 키로 담장 너머 황룡사지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탑을 바라보는 나의 한 쪽 가슴도 기운다. 황무지가 되어버린 절터에는 무심히 겨울비만 내리는데….머지않아 유채꽃 피는 봄이 오고 또 다시 메밀꽃 부케 같은 여름 찾아와 온몸이 아득해지기도 하겠지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욱신욱신 슬개골 쑤셔와 스스로의 무게조차 버거울 텐데 저 흔들림 없는 눈빛은 무엇인가? 모전석탑을 지켜온 것은 네 마리의 사자상도, 여덟 구의 인왕상도 아닌 천년의 고독 속에 감추어둔 질긴 그리움인지 모른다.사진을 찍을 때마다 출입문 근처를 지키고 서 있는 음료자판기가 눈에 거슬린다. 무채색 분황사 겨울 풍경이 원색의 자판기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잠시 탑의 고독이 와르르 무너진다. 이 비 그치고 나면 다시 관광객들 찾아와 예찬하고 탑은 기품 넘치는 모습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기억되리라.조낭희 수필가분황사를 적시는 쓸쓸함 사이로 애잔함이 흐른다. 아무도 없는 절, 마당에 고여 있는 빗물을 조심스레 피해 다니며 모전석탑을 돌고 또 돌아보지만, 천년의 저쪽, 신라의 향기는 까마득히 멀기만 하고 탑은 미동도 않은 채 찬란했던 한때의 시공(時空)을 더듬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영원히 붉은 꽃은 없다 했던가.바람에 날리는 겨울비가 내 옷자락을 적신다. 우산을 든 손도 시리다. 나는 작고 아담한 보광전으로 향한다. 빗속에서도 어간문은 활짝 열려 있다. 유난히 커 보이는 약사여래입상이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나를 가만히 지켜본다. 약함을 든 손과 넙적한 얼굴, 너그럽고 수더분한 인상은 여느 부처님보다 편안하다.그 옛날 희명(希明)이 앞 못 보는 자식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천수대비 부처님 앞에 설 때의 심정을 생각하니, 나의 작은 소원조차 사치다. 빗속을 뚫고 분황사를 달려올 수 있는 건강과 여유가 주어짐에 감사하자. 문 밖에는 겨울비가 소리없이 내리며 갈 길을 막고, 법당은 안온하다.혼자 법당을 차지하고 비 오는 겨울풍경에 젖어들 때, 젊은 불자 한 분 마당을 가로질러 법당으로 들어선다. 그녀도 나처럼 혼자다. 자리를 비켜주고 나오는 내 뒤로 절을 하는 그녀의 뒷모습이 유난히 간절해 보인다. 모전석탑의 고독한 뒤태를 닮은 그녀의 기도도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겨울비가 자꾸 허무감을 부추긴다. 이런 날은 저자거리를 돌며 춤추고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던 원효대사의 유현한 일생이 그립고 그립다.

2020-02-03

우리의 삶이 더욱 환해지는… 의성 수정사(水淨寺)

첫눈이 내린다. 잔디밭에도 집 앞 상수리나무 가지에도 하얗게 눈이 내린다. 전원을 적시는 설경을 사진에 담아 친구에게 보냈다. 며칠 간의 해외 연수로 잠은 설쳤다던 그녀가 푸석한 목소리로 절에 가자고 제안한다.방점 찍히듯 남아 있는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흔쾌히 집을 나섰다. 생각이 많고 소심한 나와 달리 그녀는 늘 적극적이고 대범하다. 눈은 녹고 하늘은 무심히도 맑지만 모처럼의 수다가 눈꽃처럼 화사하다.“저 산에 묘를 쓰면 후손이 큰 부자가 되지만 마을에는 심한 가뭄이 든다네. 그래도 기어코 밤을 틈타 몰래 묘를 쓰고, 마을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오물을 갖다 뿌리고…. 지금도 산에 가면 오물을 뿌린 구덩이가 남아 있대.”차가 금성산을 끼고 달릴 때, 친구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고단하던 시절의 어두운 탄식들이 들릴 것만 같은데 산은 늠름하고 기품이 넘친다. 잘 생긴 기암괴석이 뿌리를 박고 있는 명산이다. 길은 비봉산과 만나는 지점에서 끝이 났다. 금성산과 비봉산 그 사이 계곡을 끼고 수정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늑하다.고운사 말사로 신라 신문왕 때 의상이 창건한 절, 동국여지승람에는 수량사(修量寺)라고 소개된 절이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이 머물며 승병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조선 헌종 때 대광전만 남기고 불에 탄 것을 뒤에 중수하였으며, 월산 스님과 탄허 스님 같은 대선사가 머무시기도 했다. 이 지역의 불자들에게는 성지처럼 사랑받는 절이지만, 내게는 친구의 유년을 담고 있는 곳이라 더 특별한 곳이다.수년 전 동짓날, 그날도 눈이 왔다. 불자인 그녀는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 팥죽을 먹였다. 좋은 곳이면 어디든 나를 데리고 가는 친구가 있어 절집은 더 편안했고 팥죽도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눈 쌓인 절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는 환한 미소와 함께 커다란 대접에 팥죽을 떠주던 공양주보살의 후한 마음이 아른거린다.금성산의 기운이 약수로 변하여 사시사철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수정사(水淨寺), 오늘도 절의 입구에는 약수를 받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래 된 벚꽃나무 한 그루와 돌에 새겨진 약사여래불이 일주문을 대신한다. 크기와 높이가 다른 돌들이 어깨를 맞댄 채 운치를 더하고 앙상한 벚나무 그림자와 낮달이 우리를 경내로 이끈다.다행히 절은 변화의 물결을 비켜나 소박한 고졸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향집을 찾아온 듯 포근하다. 대광전을 받치는 돌너덜을 연상케 하는 돌무더기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걸작이다. 새파란 이끼 옷을 입은 돌들이 부처님을 모시는 수미단처럼 주법당과 나무들을 받쳐주고 있다. 이 질박하면서도 이색적인 풍경은 말더듬이 박 처사의 불심이 담긴 역작이라고 한다.오래도록 머물고 싶어지는 공간이다. 나는 법당에 들어가는 것조차 잊고 요사채 마루에 걸터앉아 돌무더기를 바라본다. 박 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아는 이가 없다. 분주히 경내를 오가며 궂은 일을 하는 그의 젖은 목덜미와 활짝 열린 법당문 안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가 한 편의 영상처럼 흐른다.땔나무와 잡일, 절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묵묵히 돌을 쌓아올렸을 박 처사의 불심을 생각한다. 그는 전생에 조금은 게으르고 절밥만 축내는 불목하니였을지도 모른다. 고단한 몸 하나 절집에 얹혀살면서 무슨 소원이 그토록 간절했을까? 돌무더기 옆에 시멘트 옷을 입고 서 있는 수정 같은 샘물은 알고 있으리라. 큰 법회나 예불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는 날마다 염불소리 들으며 업을 씻어 내렸고, 내면에는 종소리 같은 평화로움을 그를 즐겁게 했으리라. 오래된 돌무더기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준다.조낭희 수필가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대광전을 향해 나는 박 처사를 생각하며 가운데로 나 있는 돌계단을 오른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좁고 가파른 계단은 편리하고 정갈한 것을 외면하고 있는 그대로 세월을 다독이고 있다. 살다보면 묵직한 세월의 힘이 야속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감동의 눈시울을 젖게도 한다. 시간의 흔적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주지 스님의 지혜로운 안목도 고맙다.비로자나 부처님이 봉안되었을 거라 생각했던 대광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신다. 불목하니 박 처사의 외로운 불심이 더해져서 일까. 겨울 법당이 따뜻하다. 불목하니 박 처사에게 숙제처럼 따라붙던 업과 그의 길고 외로웠을 기도가 자꾸 내게 말을 건다. 숨 가쁜 세월 나는 어쩌면 빚쟁이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풀어야 할 이승의 업은 많은데 절간의 풍경은 쓸쓸하고 삭막하다. 공양주 보살 없는 절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불목하니는 이미 사라진 말이며, 불심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물질에 밀려 외면 받는 세상이 되었다. 법당을 두리번거리는 나와 달리 친구는 다소곳이 절을 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생각보다 몸이 앞서는 친구다.뒤늦게 나도 오래된 것들을 위해 기도한다. 박 처사의 역작처럼 별 특징없고 평범한 돌도 기도와 정성이 더해지면 아름다워지듯, 우리의 오래도록 이어져온 우정에 감사했다. 사랑 없는 세상에 때때로 우리의 삶이 환해지도록, 수정사 앞뜰에 피는 벚꽃처럼 자비를 베푸시길.

2020-01-27

포효하는 사자처럼… 구미 문수사(文殊寺)

겨울은 문수사를 비켜가고 있었다. 햇살이 죄다 문수사에 몰려와 반짝이고 절은 무언가 밝은 기운으로 가득하다. 적막감이 감도는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 젊은 연인이나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 오듯 드나드는 가족의 모습도 이채롭다.문수사의 전신인 납석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고종 2년에 폐사되었다. 산 너머 의성으로 가는 열재에 산적과 도둑이 들끓어 그로 인해 폐사되었을 거라 추측한다. 그 후 혜봉 선사가 초가삼간을 짓고 수행하다 꿈에 문수보살을 본 후 그 때부터 절 이름을 문수사로 하였다.절은 크지 않지만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극락보전이 나타나고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문수사의 사계가 담긴 사진들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별한 행사가 열린 줄 알았는데 늘 손님이 많다고 어느 처사님이 귀띔해 주신다. 천년고찰도 아니고 절의 풍광이 유달리 빼어난 것도 아니기에 그 속살이 궁금하다.주지 스님 뵙기를 청했다. 불자와 차담을 나누시다 흔쾌히 시간을 내 주는 주지 월담(月潭) 스님, 첫인상이 참 좋다. 과하지 않은 미소도 아름답다. 꾸밈없고 편안한 웃음과 농담을 곁들인 화술에는 오랜 수행이나 숙련된 노력이 따랐으리라. 스님은 스승 혜향 스님에 대한 존경심부터 풀어내신다.가난하던 시절, 불자들의 시주에 의존하지 않고 손수 농사를 짓고 양봉법을 배워 동네 분들에게 전수해 주며 평생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신념을 지키며 절을 키우셨다고 한다. 유일한 제자인 월담 스님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20여 년 선방을 찾아다니며 수행에만 전념하다 혜향 스님이 입적하자 어쩔 수 없이 문수사 주지를 맡게 된 것이다.“주지가 되면서 종교를 논하지 않고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도량을 만들고 싶었어요. 틀을 깨지 않으면 소통이 되질 않고 절도 살아남지 못해요. 절이나 집, 회사도 주인이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돼요.”문수사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남다르다. 편안한 가운데 눈빛은 빛나고 말씀은 흐트러짐이 없다. 할 일 많은 스님이 참 행복해 보인다. 직관적으로 기운이 맑고 성실한 분이란 게 느껴진다. 추임새를 넣듯 울어대는 풍경소리마저 경쾌하다.한때는 고색창연한 사찰의 적막한 고독을 좋아했었다. 고찰만이 풍기는 고즈넉함에 젖어들다 보면 찌든 마음이 씻겨 내려가고 심란함도 잠든다. 그 하나만의 이유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절집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산사에 대한 애정이 깊어갈수록 그토록 좋아하던 고즈넉함은 대책없는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불심이 떠나버린 법당의 썰렁함이나 처량한 풍경소리에 나는 때때로 슬퍼졌다.무작정 변화에 편승하는 사찰을 보면 더 심란하다. 산사 음악회나 비슷비슷한 행사에 치우치는 사찰은 오히려 정체성을 잃고 본질만 훼손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문수사의 변화가 성공적인 것은 주지 스님의 흔들림 없는 목적의식과 성실함 때문이다. 시주를 떠나 진심으로 베푸는 마음에서 존경심과 신뢰감이 묻어난다.“중은 하루에 세 번 자기 머리를 만져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결코 중의 신분을 잊지 마라는 뜻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자꾸 게을러져서 편한 것만 찾게 되거든요. 스님도 사람이니까요.”산중 생활은 속세보다 더 나태해지기 쉽다. 어디에서든 스스로 깨어 있지 않으면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고 마는 법이다. 두어 시간은 걸어야 도착한다는 스님의 농담 한 자락을 걸치고 사자암으로 향한다. 적당한 크기의 소나무들이 자라는 솔숲 사이로 ‘솔바람길’이 친절하다. 바람은 장난치듯 소나무 사이를 빠져나가 저 아래 들판으로 달려가다 문수사를 되돌아본다. 나도 잠시 나무 벤치에 앉아 바람소리를 듣는다. 아주 작은 것들이 나를 즐겁게 해준다.드디어 커다란 암석에 기댄 반쪽자리 전각, 사후전(獅吼殿)이 보인다. 사자의 형상을 한 사자암을 중심으로 지장전과 산신각, 야외 테라스, 어디에서도 멋진 경관은 함께 한다. 사자의 울음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조낭희 수필가셀프찻집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빈자리가 없다. 와불 형상의 큰 암석 앞에서 책을 보는 아이들, 준비된 다과를 나누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이곳에는 묵언을 강요하는 엄숙한 부처님은 없다. 그저 편안하고 친근한 부처님이 함께 할 뿐이다. 테이블마다 정갈한 다기들과 푸짐한 다과가 손님을 맞고, 찻값은 성의껏 지불하면 된다. 통유리창 너머로 기웃대는 햇살도 오늘은 귀중한 손님이다. 차이와 경계가 없는 곳.내 안에 차향보다 더 깊고 진한 향기가 돈다. 사후전 석가모니 부처님도 유난히 행복해 보인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말씀보다 책임을 다하는 성직자를 만나면 감동이 배가 된다. 나는 사후전 난간에 서서 빈 몸으로도 하염없이 반짝이는 겨울 들녘을 바라보았다.“늘 깨어 있어라.”그제서야 포효하는 사자 울음이 들린다. 아주 지척에서.

2020-01-20

산사 가는 길

오염되지 않은 산세를 자랑하는 청정지역 봉화, 호랑이가 걸터앉은 형국을 지닌 북지리 호거산 자락에 지림사가 있다. 신라 문무왕 13년(673) 의상대사가 지림사에서 산쪽을 바라 보다 멀리 서광이 비치는 곳에 지금의 축서사를 지었다고 전한다.지림사 일대는 ‘한절’이라 불리는 큰 사찰과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수도하는 승려가 5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조선 정조 때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까지 사찰이 존속하며 법통을 이어온 것을 알 수 있다.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혹은 ‘축서사로 인하여 사세가 기울었다’는 등의 이유로 폐사되었다고 한다.그러다 1949년경에 한 승려가 법당을 세우고 수월암이라 불렀다. 땅속에 묻혀 있던 마애불여래좌상을 발견하여 지림사라는 이름을 되찾아 다시 불사하여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부석사 가는 길목, 너른 들녘을 외다리 물새처럼 지림사가 지키고 있다.지림사에는 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높이 4.3m 부조형식의 거대한 마애여래좌상(국보 제 201호)이 있다. 현재까지 파악된 우리나라의 마애불은 모두 195점으로, 이 가운데 국보는 7점뿐이다. 그 중 하나가 북지리 마애불여래좌상이다. 자연 암석을 파서 만든 감실은 무너지고 보호각 속에서 태백산을 바라보듯 눈길은 동북쪽으로 향한다.일주문이 없는 경내에 들어서자 멀리서도 마애불상이 눈에 띈다. 새로 지은 전각들은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너른 마당은 더 황량해 보인다. 단조로운 절 풍경이 마애불의 존재감을 훨씬 크고 웅장하게 한다. 거침없이 위협적으로 불어오던 바람도 지림사 마당에서는 포복하듯 엎드리고, 척추를 곧추세운 이들조차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다.가까이 가서 보니 그 장중함이 더 놀랍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 몸이 먼저 저기압의 신호를 감지하듯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절부터 하게 된다. 나의 기도가 하루살이의 무심히 내젓는 날갯짓과 무엇이 다르랴만, 흔들림 없고 끝없이 아늑하면서도 평온한 기운에 사로잡힌다.나를 따라다니던 수식어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가볍다. 태생의 동물들만이 갖는 징표인 배꼽 한가운데 앉아 있는 기분이다. 모체와 분리되는 최초의 단절, 불안은 그곳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삶의 젖줄이며 생명줄이 되어준 나의 모든 기도가 돌아가는 곳이기도 하다.상처투성이 마애불이 내뿜는 아우라에서 슬픔이 묻어 나온다. 마애불을 쳐다볼수록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외경함에 찬탄할 뿐이다. 온갖 고난과 아픔을 이겨낸 세월이 안겨준 훈장을 모를 리 없다. 마애불의 장엄한 위엄 뒤로 인간적인 고뇌가 크게 다가온다. 움츠러든 어깨와 풍화와 훼손으로 떨어져 나간 오른손, 보일듯 말듯 한 미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묵직하게 가슴을 헤집는다. 일상의 번잡함과 흔들림을 내려놓고 나를 찾던 여느 때와 달리, 나는 하나의 미약한 생명체가 되어 마애불을 바라본다.얼마나 많은 비바람이 다녀갔을까? 나는 마애불의 사라진 미소를 찾아 헤맨다. 숨은 그림을 찾듯 세상 빛을 보던 날의 온화한 표정을 상상하기도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실눈을 떠보지만 좀처럼 잡히질 않는다. 군데군데 깨지고 뭉개진 자리에는 민초들의 한과 슬픔이 두껍게 녹아 흐른다. 처음 누군가가 혼을 불어 만들었을 그 옛날의 선명한 미소가 그립다.조낭희 수필가수천 년 전, 누군가의 간절한 불심에 의해 존재감을 드러낸 마애불, 순수한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경외의 옷을 입는 순간 고난은 시작되었으리라. 무릎을 꿇고 간절함을 호소하는 기도가 바람이 되어 밀려든다. 마애불의 가슴을 툭 치면 역사가 남기고 간 수많은 아픔들이 선혈처럼 쏟아져 흐를 것만 같다.길고 긴 옹이진 세월을 건너왔을 마애불의 심경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언어의 경계 저쪽 너머에서 마애불은 무심히 앉아 있고, 사람들은 보물을 찾듯 숨어 있는 미소를 찾아낸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하고 쉬운 일이 나에게는 번번이 어렵고 힘들다. 때가 되면 누구나 돌아가야 할 가장 근원적인 곳, 언어가 없는 그 길목에도 마애불이 있을 것 같다.바람을 동무 삼아 할머니 한 분이 걸어오신다. 자그마한 육신과 소박한 몸놀림, 더 이상의 욕심도 없어 보이는데 더 내려놓을 것이 있으랴. 쇳소리가 날 것 같은 무릎관절은 절을 허락할 리 없다. 선 채로 삼배를 올리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거친 세월의 숨결이 선명하다. 할머니께 물었다. 아프지 않고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셨는지를.“살아온 대로 가는 길도 정해져 있지. 엉터리로 살아놓고 이제와 그런 기도하면 못써. 그건 도둑놈 심보야.”합죽한 웃음 한 자락 흘려놓고 또 법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신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잔잔한 겨울 햇살 같은 미소가 걸려 있다. 그것은 여유와 달관이 빚어내는 마애불의 미소였다.

2020-01-13

나를 세우는 첫걸음은… 경주 함월사(含月寺)

달을 품은 절, 함월사는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있는 비구니 사찰로 삼릉 근처에 있다. 함월사가 달을 품고 있어서일까? 삼릉 숲에서는 낮달이 보이지 않는다.하지만 천 년의 시간을 품은 삼릉이 달처럼 다사롭고 은은하게 소나무 숲을 지킨다. 소나무 아래로 난 길은 참선하듯 조심스럽고, 그 가운데 깊고 예스러운 숨결들이 늘 그렇듯 먼저 안부를 물어온다. 육신의 피로와 정신의 때가 녹아내린다.솔숲을 배경으로 식당과 카페들이 늘고 있다.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는 거대한 자본의 유혹들, 함월사가 깊은 산중을 두고 이곳에 자리잡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금자라가 달을 먹으면 캄캄하여 어두운 쪽으로 기울어지고, 달을 먹지 않고 그대로 내 보내면 밝은 쪽으로 기울어지니,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조실 우룡 스님이 이름을 지었다는 함월사다.절은 정갈하다. 향기 강한 수종의 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설법당 앞마당에는 커다란 은목서들이 겨울에도 눈길을 끌고, 봄을 기다리는 목련의 순결한 꽃눈은 차고 건조한 허공에 몸을 맡기고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여름이 오면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해 농염함을 뿌려댈 치자나무의 아찔한 눈빛과 그에 질새라 은목서들의 향기가 존재감을 드러낼 늦가을을 상상하니 턱턱 숨이 막힌다.철마다 각기 다른 향기로 부처님을 맞을 함월사의 나무들이 앞마당을 거니는 내 안에 하나의 말씀이 되어 머문다. 지금은 향기 없는 피라칸타의 붉은 열매들이 꽃처럼 익어 차가운 계절을 견디고 있다. 어느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스스로를 틀에 가두지 않고 탐욕도 근심도 모두 내려놓고 중도의 길을 걷듯 함월사의 겨울은 편안하다.차가운 땅을 밟고 선 나무들의 짧고도 긴 휴식, 제 각각의 향기를 품고 때를 기다리는 나무들의 눈빛이 아름답다. 침묵의 시간이 길수록 향기도 강한 법, 언젠가부터 어둠을 견디는 흐느낌과도 같은 고요가 좋다. 차고 썰렁한 법당과 달리 요사채는 훈기가 돌고 안온하다.올해 아흔을 맞는다는 우룡 스님은 향기 강한 나무처럼 정정하시다. 어쩌면 반가부좌의 자세가 저토록 편안할 수 있을까? 스님의 살아오신 긴 세월이 보인다. 뿌리 깊은 나무를 연상케 하면서도 미소는 아이처럼 천진스럽다. 힘이 담긴 목소리보다 깊은 연륜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이 더 큰 말씀으로 다가온다.앉기가 무섭게 음식 앞에서 감사 기도를 하느냐고 물으신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내심 깊고 감동적인 말씀을 기대했었는데 스님은 자꾸 그 말씀만 되풀이 하신다. 쪼그리고 앉은 다리는 눈치도 없이 저려오는데 스님은 몇 번이나 하신 말씀을 되풀이 하신다.“가족 간에 함부로 던진 말 한 마디가 원수 원결(怨結)을 낳게 돼요. 그 원결은 쉽게 녹아내리지 않아요. 깊은 참회나 수행, 크나큰 선업을 닦아야 맺힌 원한을 풀 수가 있어요. 허물없는 사이라고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돼요. 명심하세요.”스님은 가족 간이나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마음자리를 돌아보게 하신다. 말씀은 쉽고 평범하면서도 명료하다. 그 실천의 길은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듣고 들을수록 말씀들이 살아서 콕콕 나를 찌른다. 풀풀 바람처럼 날리던 눈 속을 걷다 폭설에 갇힌 기분이다.삶의 기본이 되어야 할 언행을 뒤늦은 나이에 귀 기울인다는 게 부끄럽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현학적인 지식을 좇으며 지적 호기심을 채우거나 끝없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 달려왔던 오랜 시간들, 그 만족감은 오래 가지 못하고 늘 뒤가 허전했다. 늦었지만 내게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절을 나서며 받아든 우룡 스님의 법어집 두 권,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삼배를 한 후 책장을 펼쳤다. 커다란 활자들이 주는 가벼움, 그 고정관념을 없애고 싶었다. 아상의 불길을 끄는데 도움이 될 활자들은 곧 나의 부처님이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고 지혜의 눈이 밝아오는 것 같다.조낭희 수필가입문단계에 서 있는 내게 불교와 선(禪)은 한없이 깊고도 어렵다. 잡힐 듯 하면서도 까마득히 멀다. 머리로 아는 것도 아니고 맹목적인 기도가 지름길도 아닌 것 같다. 아직은 좌충우돌 안간힘을 쓰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딜 뿐이다. 지혜와 덕을 갖춘 불성이 내 안에도 있다는 그 말씀 하나만 믿고서.사람들이 함월사를 좋아하는 건 향기 강한 수종의 나무들 때문이 아니다. 지혜가 담긴 부처님 말씀을 우룡 스님은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행해야 할 과제임을 일러주신다.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또 다른 길이 보인다. 아주 작은 오솔길도 언젠가는 큰길로 통한다는 것을 안다.타인의 불성은 참 잘 보이는데 왜 내 안의 불성은 보이지 않는 걸까? 끝없이 솟아오르는 의문을 안고 오늘도 식탁 앞에서 공양의 기도를 드린다. 작지만 신심을 바로 세우는 길, 그것이 첫걸음이다.

2020-01-06

자유를 위한 아름다운 고독… 성주 심원사(深源寺)

가야산 허리를 감으며 차는 심원사를 향해 달린다. 한적한 겨울 산사를 상상했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자 주차장에는 차들로 가득하다. 큰 행사가 끝난 듯 많은 사람들이 총총히 심원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인적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지만 공양간 앞에는 여전히 남은 사람들로 어수선하다.해인사의 말사인 심원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 도은 이숭인이 심원사를 고사(古寺)라 칭한 시가 남아 있고 오랫동안 법등도 이어져 왔다고 전한다. 조선 중종 때 승려 지원이 중수하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 새로 지은 전각들 사이로 삼층석탑과 부서진 석조 유물들이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생각보다 큰 절이다.북적이는 산사의 정경이 낯설다. 고즈넉한 산사 분위기에 익숙해 오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만나기는 처음이다. 스님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불자들 사이에서 나는 이방인처럼 어색하다. 술렁이는 인파를 피해 대웅전 법당으로 들어선다. 아무도 없는 법당에 나를 내려놓지만 마음은 아득한 허공처럼 잡히지를 않는다.대웅전을 나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종각 앞에 놓인 팥죽을 보고 뒤늦게 동지임을 알았다. 특별한 날의 기도는 무엇이 다르기에 이토록 사람이 모이는가. 눈앞에 펼쳐진 비슬산과 가야산의 빼어난 경관 앞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신산하다. 스님과 차담을 나누기엔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것 같다.‘문 없는 문을 뚫는다’는 무문관(無門關)이 심원사에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장 달려왔는데 허탈하다. 깨우침의 길을 뜻하는 문 없는 문, 무문관 수행의 규범은 매우 엄격하여 일체 문밖을 나올 수 없으며 조그만 창구로 음식물이 들어간다. 심원사의 무문관도 바깥에 자물쇠가 있어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지만 하루 한번 문이 열린다고 한다.스스로 화두를 잡고 고행의 길을 선택한 스님들이 계시는 상왕선원(象王禪院), 청정한 눈빛들이 문풍지를 울리고 허기진 언어들은 바람에 업혀 달아날 것만 같다. 술렁이는 절 분위기와 상관없이 상왕선원은 섬처럼 고독하다. 마치 비어 있는 것처럼.이름을 남긴 대선사들의 면벽 수행과 깨달음의 이야기는 수없이 회자된다. 스님이라면 한번쯤 꿈꾸고 도전해 볼만한 유혹이 담긴 고행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꿈꾸기는 쉬워도 그 꿈을 현실로 이루기는 쉽지 않다. 안거 경력 40년이 넘은 선원장 스님에서부터 선방 생활을 오래한 구참 스님들에게만 허락된 고독이다.숭모전으로 향하는 높다란 계단 좌측편으로 상왕선원이 또렷이 보인다.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은 삭제된 일기장을 대하듯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대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단청 없는 소박한 전각을 향해 두 손을 모은다. 더없이 작고 평범한 나와 팥죽 같은 미소를 안고 총총히 사라지는 불자들, 상왕선원 앞에는 깊고 도도한 강물이 흐른다.의식주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하품인생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나 역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발버둥쳐 보지만 언제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욕망과 번뇌, 나태와 게으름 앞에서 속수무책 넘어질 뿐이다.조낭희 수필가심원사를 다녀온 후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이란 다큐멘터리 영화가 또 나를 흔들었다. 일체의 외출도 허락되지 않는 봉쇄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기로 약속한 수도사들의 눈빛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엄격한 규율과 절제, 기도와 노동, 청빈함으로 살아가는 위대한 침묵 앞에서 내 안에 뜨거운 것이 일렁였다.구멍이 난 양말과 소품들, 가난을 통해 얻어지는 무소유의 즐거움, 육신의 노화와 질병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는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했다. 이웃과 인류를 향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고독이 면류관이 되어 내 안을 밝힌다. 평범한 사람들은 범접조차 할 수 없는 무문관 수행에 비해 수도사들의 삶은 좀 더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오랜 역사를 가진 가톨릭의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과 불교의 무문관, 종교는 달라도 영원의 진리를 좇는 목표는 닮았다. 신과 하나가 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오로지 고독과 싸우는 길을 택한 사람들. 참된 믿음은 교회나 절, 성서나 경전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절제와 고독을 좀 더 사랑할 수 있다면 나의 일상도 달라지리라.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어느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 연말이다. 오늘 하루의 평화도 누군가의 기도와 자비의 힘으로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나는 삶을 헌신할 만한 간절한 목표가 없다. 하지만 불어터진 빵조각 같은 삶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 넘어지고 방황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채찍을 가해야 할 시시포스의 운명을 죽는 날까지 사랑하리라. 그것이 하품인생의 어설픈 고독이라 할지라도.

2019-12-30

나무, 중심에 서다… 경흥사(經興寺)

동학산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평범한 마을을 지나 산세조차 평범한 낮은 골짜기 얼마쯤을 가다보면 자태와 눈빛이 다른 나무들이 절이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좌측 모퉁이를 돌아 오르자 주차장 너머 절의 풍경이 들어온다.학의 부리에 해당한다는 명당터, 신라 태종 무열왕 6년(659년) 혜공이 창건한 경흥사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머물렀으며 승병들이 이곳에서 처음 훈련을 해 전장에 나가 싸운,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사찰이다. 사찰의 규모 역시 대단했음을 고승의 부도들과 동학산 곳곳에서 발견되는 초석과 석축들이 반증하고 있다.상서로운 기운을 막아주는 병풍산이 건너편을 막고 있어 세월의 풍파조차 비켜갔을 법한 절이지만 승병을 훈련시켰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 때 탄압을 받았으며, 6·25 전쟁 전후 극심한 도굴로 사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절은 차안의 세계를 돌아앉아 아늑한 길 하나 내며 상흔을 잠재우고 있었다.예상하지 못했던 절 풍경에 낮은 감탄사로 첫인사를 건넨다. 여느 절과는 다른 전각의 배치들,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고 모여 앉아 가족적인 다정함이 느껴진다. 집의 가장 격인 대웅전은 한 단 높은 뒤쪽으로 물러앉아 위엄을 더하면서도 앞의 전각들을 품에 안은 듯 온화함을 배가시킨다. 가장 오래 되었다는 지장전은 경흥사의 품격을 더해주는 안주인 같았으며, 좀 더 높은 곳에 아담한 산령각이 조부모처럼 한발 물러나 인자하게 내려다보고 있다.은행나무 한 그루 나를 호명하듯 시선 속으로 들어온다. 세상을 관조하는 고령의 은행나무와는 달리 젊은 나무에게서 중심을 벗어나지 않은 정직함이 보인다. 분분히 떨어지는 스산한 슬픔이나 사색을 즐기는 길손의 모습이 환상처럼 잡히고, 나무 아래 벤치에는 그의 나이보다 더 깊고 오랜 침묵이 앉아 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단정한 겨울 풍경 속으로 카이로스의 압축된 시간이 흐를 것만 같다.빈 벤치의 정갈한 기도를 뒤로 하고 대웅전 법당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좌복을 깔고 앉는다. 보물 제 1750 호의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보다 수미단 좌측 편에 모셔진 낯선 영가 두 분의 위패 앞에서 낮과 밤의 저린 기억들이 모여든다. 마음이 시리다.생과의 단절이 아닌, 사후의 세계와 접속하는 매개점인 죽음 앞에서 무엇을 떠올렸을까? 행여 무성한 풀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새들조차 지저귀지 않는 폐허의 처마 같은 곳이 떠올라 두렵지는 않았을까? 대웅전을 나서는 발걸음이 지극히 낮아진다.나무의 시선은 해의 각도와 관계없이 가는 곳마다 따라온다. 아름다운 노을이 되어 내 안에 걸려 있다 내 안에서 질 것 같다. 절은 비어 있지만 결코 빈 절이 아니다. 한눈을 팔지 않는 은행나무 눈길이 길손의 젖은 발걸음을 기도로 이어지게 만들고 감로수 물줄기도 홀로 청정하다. 싸늘하던 법당에도 머지않아 저녁 예불 소리로 밝아 오리라.어마어마한 폭설이 내려 산의 허리가 잠기고 법당의 부처님이 눈에 갇혀 숲의 나무들이 죄다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되어도 젊은 은행나무는 과거와 미래를 홀연히 드나들 것만 같다. 중심에 선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뜻하며 고요함을 말한다. 염불 소리 듣고 자란 은행나무의 평온한 숨결, 나는 법당이 아닌 나무 아래 서서 나를 점검한다.중심으로 향해야 할 눈길이 자꾸만 가장자리로 향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바깥으로 무게 중심이 쏠릴 때마다 스스로를 휴머니스트로 만들거라 착각하지만 결국 나를 놓치고 내가 가야할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날들만 남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의 중심에 서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조낭희 수필가내 안에 있는 티끌을 부지런히 털고 닦아내기에도 주어진 시간은 부족하다. 신은 나에게 은행나무처럼 수백 년의 시간을 허락해주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만 내생의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게 참으로 부담스럽다. 젊은 은행나무 한 그루 곧게 귀를 세우고 손을 내민다. 도반처럼 든든하다.중심에 서면 고요하다.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입구도 출구도 없이 오로지 빛과 같은 길이 있을 뿐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설이 내려도 마을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피안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안다. 게으름과 헛된 관계들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 결코 흔들리지만 않는다면….오늘은 모처럼 저녁 송년 모임이 있다. 무엇을 입고 갈지의 고민 따위는 사라졌다. 약간의 설렘과 분위기에 들떠 술에 취하듯 구업(口業)이나 쌓지 않을까 걱정이다. 캐롤송 울려 퍼지는 번화가에서도 중심을 향해 뿌리 내리는 숭고한 나무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뿌리 없이 연말만 밝히는 트리가 아닌.어느 어두운 밤/ 사랑의 강렬한 갈망으로 불붙은 채/ 나는 보이지 않게 집에서 빠져 나왔다/ 내 집은 아직도 그저 고요할 뿐.- 성 요한 ‘카르멜의 산길’ 중-

2019-12-23

아름다운 불국토의 나라… 경주 신선사(神仙寺)

신선이 노닐 법한 환상적인 이름과는 달리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단조롭고도 가파르게 이어진다. 여느 산과 다름없는 겨울 풍경에 지쳐갈 무렵 독경소리가 마중을 나오고, 산 위의 양지바른 곳에는 바람 한 점 없이 따사롭다. 월동 중인 초록의 으름덩굴과 겨울햇살이 불이문 되어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가 펼쳐질 것만 같다.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한 노인으로부터 신검(神劍)을 얻어 이 산의 바위굴에서 검술을 닦았는데, 시험 삼아 칼로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갈라졌다. 이에 산 이름을 단석산이라 했고 갈라진 틈에 절을 세워 단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더러 신선사라는 절 이름을 화랑과 관련된 미륵신앙의 기도처로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신선사(神仙寺)는 7세기에 활동하던 자장의 제자 잠주(岑珠)가 창건한 법화종 사찰이다. 옛날 절 아래에 살던 한 젊은이가 이곳에 올라와 노인들이 바둑을 두는 걸 구경하고 집에 오니 아내는 이미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5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신선이 바둑을 둔 곳으로 불렀고, 절 이름도 신선사라 했다는 전설도 있다.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염불소리에 귀를 세운 겨울 가지들의 눈빛이 신비스러울 정도로 빛난다. 골짜기는 봄 숲처럼 환하다. 좁은 비탈에 자리한 신선사도 계절의 을씨년스러움을 표정없이 비켜 앉아 있다. 콸콸 감로수 떨어지는 소리 요란한데 나이 많은 느티나무의 위엄이 눈길을 끈다. 겨울을 나기 위한 시래기 타래가 바람에 흔들리며 인사를 건넨다. 소박한 절이다. 산그늘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대웅전과 석등조차 독송에 잠겨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다.대웅전 법당은 작지만 안온하다. 앞마당을 지나치는 등산객들의 발자국 소리 때문일까 마음이 동요를 일으킨다. 대웅전 마당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나무데크 끝머리에 위치한 높다란 암벽과 인공 천정, 미륵전이라 적혀 있다. 나는 암벽을 돌아 서쪽으로 난 보다 넓은 출입구로 들어선다.신라 최초의 석굴사원, 거대한 ㄷ자 암벽의 자연석실에 들어서며 이십여 년 전 찾아갔던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을 떠올린다. 긴 시간을 뛰어 넘어 파라오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람세스를 탐독하던 시절, 나는 풍요로웠던 이집트의 물질 문명보다 람세스와 네페르타리의 성숙한 영혼을 찾아 헤맸다. 거대한 석상들의 웅장함과 물밀 듯 찾아드는 관광객들, 카이로의 회색빛 소음 속에서 나는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 진정한 파라오의 힘과 자존심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듬성듬성 청이끼가 낀 미륵불이 지긋이 미소짓고 있다. 반쯤의 밝음과 반쯤의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기운이 생동감으로 이어진다. 국보 제 199호인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삼존불의 시선 속에 파라오와 비교할 수 없는 전율이 인다. 환상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두 손을 모으고 불상들을 우러러본다. 내부에 새겨진 명문은 마멸이 심해 완전한 판독은 어렵지만 이 석굴의 절 이름이 신선사이며 본존상이 미륵장육상임을 밝히고 있다.신라를 가장 현실적인 불국토라 여겼던 신라인들, 그들은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를 종주국으로, 신라를 아류국으로 폄하하지 않았다. 서축에 견줄 만한 동축의 불교 주인국이라는, 강한 문화적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불교의 종주국으로 여기며 당당한 주체정신을 가졌던 신라인의 숨결, 마치 암벽으로 둘러싸인 영혼의 우물 속에 떠 있는 것 같다.가만히 눈을 감고 젊은 김유신을 생각한다. 성골이 아닌 비주류 가야 왕족 출신으로 신라의 중추적 인물이 되기까지의 갈등과 고뇌, 수많은 낭도들을 이끌고 중악석굴에서 자신을 단련시키는 의연한 모습까지. 8.2m 높이의 거대한 미륵보살은 알고 있으리라. 온화한 시선 속에 담고 있는 말씀과도 같은 궤적들을. 삼면에 10여구의 부처와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지만 북쪽 암벽에 새겨진 주존불인 미륵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중악석굴이 이곳인지 팔공산 중암암인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땅을 빛나게 했던 신라인의 정신문화다. 원광법사와 세속오계, 삼국을 통일한 호국정신, 그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미래상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칼로 잘린 듯한 거대한 암벽을 쓰다듬어 본다.조낭희 수필가주민들이 탱바위라고 부른다는 암벽 속을 염불소리 홀로 기도가 되어 드나들 뿐, 정상을 향해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만 바람처럼 들어왔다 또 바람처럼 사라진다. 한차례 왁자함을 쏟아내며 사진을 찍고 떠난 자리는 참으로 허전하다. 행여 우리는 설화적인 요소에 갇혀 고대 역사를 신화와 혼동하며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가?나와 역사에 대한 깊이가 빈약할수록 현실은 메마르고 비참해질 뿐이다. 신라인들이 가장 축복받고 이상적인 불국토라 여겼던 이 땅, 우리의 문화와 정서 속에 면면히 살아 있는 천년의 혼을 나는 외면한 채 무엇을 갈망하는가?심장에 가까운 붓다의 말씀이 들린다.“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부디 자애의 마음으로 충만하라.”

2019-12-16

너를 위한 소중한 기도… 영천 묘각사(妙覺寺)

차는 영천댐을 끼고 달린다. 가끔 혼자서 찾아오던 길을 석 달 전 어미가 된 딸과 강보에 싸인 손녀가 동행중이다. 길은 한때의 화사함과 초록의 풍성함, 형형색색의 찬란함을 거친 후 차분히 스스로를 굽어보고 있다. 계절이 보내오는 완곡한 서두름들, 숨이 멎을 것 같던 풍경은 그 새 어디로 사라졌을까?겨울이 지닌 섬세한 생명력과 사색이 주는 충만함에 젖어들기를 바라는데 딸은 불쑥 직장 이야기를 꺼낸다. 육아 휴직으로 업무가 늘어나버린 부서원에 대한 미안함과 복직 후 육아 문제와 일에 대한 부담감이 시나브로 그녀를 흔들고 있었나 보다.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빠져든 달콤한 시간 속으로 찾아온 뜻밖의 갈등과 고민들이 겨울 풍경을 앗아가 버린다.한결 현실적이고 성숙해진 대화가 오간다. 잔잔한 수면 위로 장성한 자식의 든든함만큼 안쓰러움이 파도친다. 내 그릇의 크기만한 조언들을 주섬주섬 늘어놓다 습관적인 애착이란 걸 깨닫고, 바람 한 점 없는 수면 위로 빗나간 모성을 날려 보낸다. 잠시 말이 없다.차는 댐과 작별하고 단풍도 가을걷이도 끝나버린 쓸쓸한 산길을 꾸역꾸역 오른다. 나무들은 알몸이 되어서도 자리를 뜨지 않고, 차가 달릴 때마다 길가에 쌓여 있던 낙엽들이 가볍게 몸을 들썩인다. 딸은 젊은 혈기가 불러올 무모한 과욕을, 나는 시나브로 찾아드는 노욕을 경계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나 보다.신라 선덕여왕 때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도량 묘각사가 보인다. 절이 있는 산은 창건할 당시 동해 용왕이 의상대사에게 설법을 듣기 위해 말처럼 달려 왔다고 해서 기룡산으로 불린다. 대사가 법성게 일구를 설 하자 용왕이 묘한 깨달음을 얻어 곧바로 승천하여 감로의 비를 뿌렸으며, 이는 당시 관내의 오랜 가뭄을 해소하는 단비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사가 묘한 깨달음을 얻어 사찰이름을 묘각사라 하였다.게다가 절의 부근은 예로부터 불보성지로 알려져 있다. 절의 뒷산은 보현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현산이며, 산 아래 동네는 미륵불의 용화삼회 설법을 상징하는 용화동에 이어 삼매동, 선원동 등 수많은 지명이 마치 불국정토를 칭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산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마음이 평화롭다.겹겹의 산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트인 시야를 막아주어 절은 아늑하면서도 시원하다. 일주문 없이 ㄷ자 건축물에 산문이 붙어 있는 독특한 건축양식은 단청이 없다면 여염집의 행랑채로 착각할 법하다. 전각의 문살들도 소박하고 단아하다. 온순한 눈빛의 백구 두 마리가 무료함을 달래며 길손을 맞는다.우리는 서로의 생각에 빠져 경내를 둘러본다. 극락전 법당에 앉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하고 싶었지만 아기가 칭얼대며 계획을 방해했다. 딸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내려놓고 법당에 들어가는 일을 접고 아이를 어르며 산문을 나선다.엄마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를 과감히 비울 줄 아는, 본능에 가까운 인내력을 발휘하는 딸아이의 모성이 짠하다. 그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아이는 무엇이 불편한지 자꾸만 칭얼댄다. 아이 키우는 일은 숱한 노력과 인내의 연속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구나 피해가고 싶어하는 것들과 대면하면서 우리는 성장하는지 모른다.나는 극락전 법당에서 아미타부처님을 향해, 딸은 아이를 안고 묘각사 산문 앞을 서성이며 사색에 잠긴다. 숲은 한 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숲이 열리는 소리, 한량없이 대지를 감싸 안은 하늘의 품을 올려다보며 딸은 무언가를 얻으리라. 그리고 무(無)를 향한 평온한 걸음에서 참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을 것이다.잠시 돌아앉아 열린 어간문 사이로 밖을 본다. 오후의 햇살이 내려 쬐는 산문 밖에 별천지가 보인다. 나와 딸, 그리고 어리석은 중생들의 번민과 사랑, 슬픔이 잉잉하게 차오르는 곳, 법당에 앉아서 바라보니 겹겹의 산 너머, 내가 사는 바로 그곳이 도솔천처럼 느껴진다. 묘하고 신통한 마음 잘만 다스리면 극락이 따로 없는데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은 아닐까.조낭희 수필가우리는 지혜를 바로 옆에 두고도 어둠 속을 헤매듯 방황할 때가 있다. 언젠가는 딸도 추억을 되짚으며 이곳을 찾아 번잡한 마음 내려놓고 스스로를 되짚어 볼지 모른다. 그런 날 묘각사의 이름처럼 소중한 깨달음 하나 얻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 산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사바의 세계를 바라보고 서 있는 딸과 그 품에 안긴 손녀를 위해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스스로 사랑하는 법과 침묵하는 법을 배우고,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힘이 들면 가까이 갈 수 있는, 빗장 열려진 곳을 향해 사다리를 내릴 줄 아는 지혜를 갖추게 해 주소서. 마주 잡아 주는 손이 있지만 행여 외롭다 방황할 땐 같은 쪽으로 부는 바람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아주 작은 것에 참다운 행복이 머물고 있음을 한 순간도 잊지 않게 해 주소서.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줄 아는 넉넉한 사람이 되게 해 주소서.’겨울햇살이 감미롭다. 차담을 요청한 주지 스님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고 삼대를 지켜보는 아미타부처님의 시선만 유난히 자비롭다.

2019-12-09

능소화가 피는 계절에는 칠곡 도봉사(道蜂寺)

유학산은 옛날 학이 놀던 명산이다. 병풍처럼 깎아지른 절벽은 학바위라고도 하고 어른 키의 50길이나 된다하여 쉰질바위로도 불린다. 그 아래 도봉사가 가파른 지형에 아담하게 터를 잡고 앉아 있다. 그 비탈진 곳에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채의 전각과 탑까지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눈을 부라리며 절 입구를 지키는 금강역사보다 더 먼저 마중을 나오는 관세음보살 염불 소리, 숙연할 정도로 차분하다. 천년고찰도 아니고 보물급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도봉사를 찾는 이는 많다. 기암괴석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툭 트인 경관을 찾아오는 등산객과 6.25 전쟁 격전지 순례 답사 코스이기 때문이다.도봉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신라의 고찰 천수사의 옛 터에 1962년 건립되었다. 험준한 지형과 치열했던 전투가 주는 남성적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비구니 스님이 맞아 주셔서 내심 놀랐다. 도봉사의 속살은 여성적인 정겨움이 곳곳에 숨어 있다. 기왓장에 심어놓은 야생화와 다육이, 거친 암벽을 아름답게 장식할 덩굴식물, 부지런히 경내를 청소하는 스님 두 분의 세심함까지.서운 주지 스님께서 커피를 건네신다. 편안하고 따뜻한 고성(古城)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당시만 해도 약자인 여성으로서 발심 출가한 것도, 해발 700m 고지의 험준한 절을 선택한 것도 놀랍고 존경스럽다.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싶은 걸 꾹꾹 눌러 담고 도봉사 이야기를 듣는다.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 교통이 두절되기도 하는, 결코 만만치 않은 절 살림을 서운 스님은 여성다운 부드러움과 노련함으로 잘 해내시는 것 같다. 구중을 떠돌던 원혼들도 비구니 스님의 염불 소리에 한결 안정감을 느끼리라. 도봉사와 스님의 하루를 여는 새벽예불은 아마도 젊은 원혼들의 넋을 위한 기도로 시작되지 않을까.부자가 많다는 다부동(多富洞)이나 학이 노닌다는 유학산(遊鶴山)이란 지명에 어울리지 않게 아픔이 서린 곳, 아름다운 풍광만큼 6.25때 격전지로 유명했던 이야기를 스님은 자세히 들려주신다. 슬픔은 언제나 묵직해서 듣는 이의 가슴을 여미게 한다. 주지 스님과 차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관세음보살 독송은 쉬지 않고 허공을 울린다.가파른 지형 때문에 긴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당연하다. 수량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지금도 용왕단의 물을 신성하게 여겨 아침마다 법당에 올린다. 하지만 퍼내도 끝없이 쌀이 나오는 구멍을 욕심 많은 이가 파낸 후 그곳에서 빈대가 나와 빈대절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지금은 그 가난조차 애잔한 추억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과거사다. 끔찍한 전쟁의 비극, 물질만큼 평화를 간절히 원하던 시기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지금 누리는 경제적인 풍요와 여유, 그 밑거름이 된 숭고한 희생들을 생각한다면 좀 더 겸허해지고 좀 더 진중해야 하리라. 모처럼 대웅전 법당에서 내가 아닌 젖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한다. 나와 내면이 훨씬 더 잘 보인다.도봉사 뒤 가파른 암벽을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이 궁금하다. 억척스럽고 투박한 줄기가 고지를 탈환하려는 젊은 병사의 생사에 놓인 몸부림 같다. 그에게 여유와 잉여는 없다. 오직 살기 위한 치열성과 숨 막히는 순간만 존재했을 뿐이다. 능소화라고 하신다. 여름이면 우리의 시선보다 높은 곳에서 화사하게 눈길을 끌던, 왕을 흠모하는 어느 궁녀의 슬픈 전설을 담고 있는, 명예와 그리움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이다.조낭희 수필가여름 날 도봉사를 화사하게 물들일 능소화를 상상한다. 청춘을 바친 호국장병의 넋들이 능소화로 피어나 도봉사는 온통 꽃 멀미로 몸살을 앓으리라. 못다 이룬 꿈들은 어사화란 또 다른 명칭으로 최상의 명예를 얻었지만 그 아픔은 어찌할 수가 없다. 쉰질바위를 훈장처럼 눈부시게 밝히다, 그 해 팔구 월의 절박함에 목이 졸리듯 통꽃으로 뚝뚝 떨어지며 ‘나를 잊지 마세요’ 한 마디를 남길 것만 같다.하늘을 업신여길 정도로 끝없이 위로 향하는 능소화, 헤어지고 떠나온 부모형제와 산천이 그리워 자꾸만 높은 쪽으로 향하는가? 꽃도 잎도 지고, 앙상한 줄기 홀로 오늘도 암벽을 탄다. 간신히 뻗어나가는 저 목마른 감각들, 신전처럼 버티고 서 있는 쉰질 바위, 오로지 바위만 의지하고 나아가는 뜨거운 혈류와도 같은 생명 앞에서 나는 가만히 두 손을 모은다.절벽 아래 잘려나간 느티나무 줄기 위에 동자상 하나 평화롭다. 전쟁은 인간과 문명 자체를 위협하는 가장 비극적인 일이다. 행여 나는 지금 누리는 행복과 나눔을 국한시키지는 않았는가. 물질적 안락함에 빠져 더 높은 가치와 이상을 추구하는 일에 소홀하지는 않은지 돌아본다.도봉사를 빠져나오며 다시 한번 아픈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지 않기를 바라며. 천천히 839고지를 오른다. 크게 분노할 일도 특별히 기뻐할 일도 없는 내게 염불소리가 친구가 되어 한참을 함께 걷는다.그 길은 마치 성소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2019-12-02

숲으로 난 명상의 길… 영천 진불암(眞佛庵)

바쁘게 달려온 일상이 덧없어질 때, 숲길을 걸어보라.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는 나뭇잎 세례가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시킨다. 몸은 젖지 않고 영혼이 촉촉해져 어느 새 활기를 되찾게 된다. 다리가 아프고 호흡이 가빠올 무렵이면 진불암 법구경이 마중을 나와 반겨주던 길, 한때 내가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길은 팔공산 비로봉을 향해 숲으로 이어져 있다.바람보다 먼저 떨어지는 나뭇잎 아래를 걸으며 일상을 잊는다. 한때의 사랑과 우수, 너무도 허무하게 지나가버린 젊음을 돌아본다. 욕망과 집착으로 눈이 멀었던 날들을 반성하고 작지만 빛과 같은 시간도 있어 흐뭇하다. 남은 생은 좀 더 베풀고 사랑하다 나뭇잎처럼 대지로 돌아가고 싶다. 인생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나를 돌아보는 일의 연속이다.다리가 아파온다. 공산폭포의 시원한 물소리가 들린다. 낙수 소리, 낙엽 지는 소리 그리고 책 읽는 소리만큼 맑고 겸허하게 하는 소리가 있을까. 첨단 기기의 소음 속에서 벗어나 자연에 온전히 나를 맡긴다. 발밑에서는 늦가을을 위한 시심(詩心)이 뒤척이고 나는 천천히 산길을 오른다.마음에도 제법 낙엽이 쌓일 무렵, 길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지게 하나 만난다. 시멘트 길이 끝나고 자연 그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오솔길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반갑기보다 애잔하다. 속도와 편리함의 강박증을 벗어나 자연과 한 몸으로 살겠노라는 고독한 맹세 하나 보인다. 지게는 가볍고 견고한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지만 모노레일이나 드론에게 숲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내는 뚝심이 사랑스럽다.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를 스님과 불자를 떠올린다. 내 몸 편하기를 바라지 않고 불편함을 감내하며 묵묵히 수행으로 삼는 사람들, 구도와 명상, 깨달음의 길은 편리함을 좇아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쌕쌕거리던 숨소리가 잠시 부끄럽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내릴 누군가를 생각하면 육신의 무게쯤이야 한낱 가랑잎에 지나지 않으리라. 깊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도 구도자가 된 기분으로 산길을 오른다.진불암 가는 길은 삶의 길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부도 하나 외롭게 서 있는가 하면, 연인처럼 다정한 부도도 만난다. 크고 작은 염원을 담은 돌탑들이 이야기를 건네 온다. 숲이 돌탑을 지키고, 그 돌탑들이 또 숲을 지킨다. 허리 잘린 돌비석에 새겨진 ‘나무아미타불’은 희미해져 가고, 쉬어가는 순간조차 엄숙하다. 숲이 커다란 법당이고 나무와 돌, 지저귀는 새들이 부처님이다.나도 모르게 ‘불정심 관세음보살 모다라니’ 진언을 왼다. 떠듬떠듬 기억을 되짚어가며 읊조리다 보니 벌써 진불암이 보인다. 작은 법당에는 관세음보살 부처님이 반갑게 맞아 주실 것이다. 십여 년 전 친구 따라 어색한 삼배를 올렸던 그날의 첫인연을 기억하고 계실까?진불암은 신라 진평왕(서기 632년)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고려 문종때 환암혼수 국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많은 선지식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도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비로봉 아래 있어 불자보다는 동봉을 찾는 등산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소박한 암자다.잠시 혼란스럽다. 내가 기억했던 진불암은 간 곳이 없고 변화의 몸살로 진통 중이다. 기와가 얹힌 반듯한 돌담 아래 비탈진 채마밭을 파헤치고 무법자처럼 서 있는 포클레인, 그 옆에 들어선 태양광, 모든 게 낯설다. 법당문을 열자 관세음보살 부처님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유리문 밖으로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 보인다. 적멸보궁으로 변해 있었다.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고향집에 온 것처럼 허전하다. 아무도 없는 빈 절을 이곳저곳 둘러보는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심술을 부리며 따라다닌다. 요사채 주련으로 걸려 있는 함허득통화상의 게송이 눈에 들어온다.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세상에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며/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조낭희 수필가짧은 생, 무언가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게송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인데 나는 지금 절집에 와서 무엇을 구하는가.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진다. 주련 옆에 ‘누구든지 과일, 차 드십시오’ 하얀 보드판 위에 쓰인 글귀가 보인다. 맞은 편 천막 아래 일회용 커피와 종이컵, 커피 주전자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한 번도 뵌 적 없는 스님의 정성과 배려가 추위에 떠는 길손을 맞는다. 드나드는 등산객들을 위한 세심한 노력들, 넉넉하지 않을 절 살림에 불자와 비불자를 가리지 않고 나그네를 맞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담장 너머로 늦가을 팔공산 자락이 환하게 들어온다.활짝 열린 공양간에 들어가 따끈한 커피 한잔으로 몸을 녹인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훈훈한 맛이다. 사람을 섬길 줄 아는 절, 그것은 곧 부처님을 섬기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 가도 편안한 암자, 진불암을 만나려면 훼손되지 않은 숲길을 한 시간쯤 올라야 만날 수 있다.

2019-11-25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봉화 각화사(覺華寺)

산골 마을은 온통 무욕의 지혜들이 몸을 날린다. 한 때의 화려함에 미련을 두지 않고 시(詩)처럼 노래하고 시(時)가 되어 낙하한다. 언젠가는 고운 연둣빛으로 피어나 우리를 설레게 할 새로운 만남을 위한 이별들, 가을 숲은 공(空)으로 돌아가는 중이다.아늑하고 깊은 숲속, 장대한 막돌 축대 위로 각화사가 보인다. 신라 신문왕 6년(서기 686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선조 39년에 태백산 사고(史庫)를 세우고 조선왕조실록을 300년간 수호했던 사찰이다. 800여 명의 승려가 수행하는 국내 3대 사찰 중 하나였던 곳, 일제 강점기 때 의병 공격을 목적으로 일본군이 방화하여 월령루만 남은 것을 중창불사하였다.인근에 있는 남화사(覽華寺)를 옮겨 절을 지은 뒤 옛절을 생각한다는 의미로 각화사(覺華寺)라고 불렀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상, 현상은 함께 일어나면서도 서로 의지하며 걸림 없이 교류하고 융합해 생긴다’는 화엄의 진리를 간직한 남화사.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으로 화엄의 도리를 직시하는 절이다. 각화사는 그 뜻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지어진 사찰인 것이다.‘태백산 각화사’ 편액을 단 월령루의 자태는 고고하다. 은은한 달빛이라도 흘러들면 영화로웠던 옛날의 정취가 더해져 교교한 느낌마저 들 것 같다. 전각들은 역사가 깊어 보이지 않고 소박하지만 자존심이 서려 있다. 인적도 없고 염불소리도 들리지 않는 마당을 가을바람 홀로 쓸쓸히 쓸고 있다.사찰의 이름과 어울리는 절이다. 아름답고 그리운 한 때를 각화사는 잊지 않고, 나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 서성인다. 애를 써 봐도 흑백 사진에 담겨 있던 그 옛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경내를 둘러보아도 발길에 차이는 것은 적적함뿐이다. 까마귀 한 마리 울며 날아간다. 나뭇잎들이 놀라 떨어지고 시린 허공이 잠시 떨리고. 하지만 절도 숲도 이내 고요해졌다.인드라의 그물은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을 덮고 있다. 단풍과 빛, 낙엽과 바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수많은 관계와 관계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삶터, 나는 하필이면 백두대간 수목원의 인파 속을 무심히 지나쳐 이곳으로 왔을까?대웅전 법당문을 연다. 화려한 닫집 아래 협시보살 없이 석가모니 부처님 홀로 나를 맞는다. 바깥풍경과 달리 법당 안은 안온한 열기로 가득하다. 누군가의 식지 않은 기도가 머물러 있었을까. 천장에 빼곡하게 매달린 불자들의 소원등과 수미단 위에 정성스럽게 차려진 공양물 때문일까. 늘 드나들던 법당처럼 낯설지 않고 아늑하다.미미하지만 큰 존재임을 깨달아 가슴 뿌듯했던 오늘, 혼자 법당을 차지하고 앉은 이 시간도 좋다. 잘 짜여진 일정처럼 무여 스님에 이어 각화사와의 고요한 만남,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친 나를 떠나보내고 맑고 향기로운 나를 위해 기도한다.후드득 내 안에 꽃이 피어난다.산 그림자가 염치도 없이 법당문을 두드릴 때까지 부처님은 가만히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태백산 정기가 머무는 태백 선원의 비어 있는 선방들이 자꾸 가슴을 헤젓는다. 수많은 고승들이 거쳐간 금봉암이라 불리는 동암은 어디쯤 있을까. 한 때는 선지식의 그늘에서 화두를 잡고 태백산의 기운을 한 몸에 받고자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 좌복을 깔던, 그 자랑스럽던 영화는 어디로 갔을까?조낭희 수필가선지식의 침향 같은 일화들은 두고두고 큰 울림으로 남는다. 지금 우리는 후세에게 남겨줄 정신적인 유산이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향해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월령루 옆 무릎이 시려 보이는 삼층석탑과 눈이 마주친다. 상처가 많아서 보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걸까? 내로라하는 이름표 하나 없어도 탑의 눈빛은 깊고 평화롭다. 속살마저 푸른 기운이 감도는 정감 넘치는 탑, 청이끼가 유일한 훈장이다.고된 삶 위무 받고자 산사를 찾았다가 부처님 가피 받아 이곳에 주저앉아버린 불심 깊은 어느 여인의 모습이 저러할까. 닳고 닳은 무릎을 일으키며 아픈 영혼들을 보듬어 주었을 것만 같은 탑이다. 삶이 힘들다고 섣불리 언설하지 마라. 편한 것만 찾으면 삶이 너무 싱겁지 않겠느냐. 탑의 말씀이 들린다.가슴 적시는 모든 것에는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숨어 있다. 무명의 탑처럼 드러나지 않게 안으로 승화시키며 살겠노라 발원한다. 언젠가는 선지식의 발자국을 찾는 이들로 태백선원 처마 밑도 북적이리라. 인기척 없이 고요한 절을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에 연등 하나 달린다. 내려오는 길이 환하다.달빛이 고운 날, 축서사로 달려와 탑돌이라도 해보고 싶다. 탐진치 내려놓고 팔정도 가슴에 새기며 온몸으로 달의 기운 받는 일은 얼마나 행복할까. 내게로 향하는 깊고 향기로운 기도 하나만 있어도 분명 행복할 것이다. 짧고 따뜻했던 각화사와의 첫 만남이 나를 기도케 한다.‘날마다 깨끗한 마음으로 등불을 켜겠습니다. 눈물로 지새는 누군가의 영혼이 밝아올 수 있도록. 힘들어도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겠습니다. 아주 가까운 이의 가슴에 퍼렇게 멍이 들지도 않도록. 나는 날마다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겠습니다.’

2019-11-18

지혜의 길은 언제나 내게로… 봉화 축서사(鷲棲寺)

문수산 800m 고지에 독수리 한 마리 웅크리고 있다. 독수리가 깃든 축서사(鷲棲寺)는 지혜를 상징하는 4대 문수성지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단체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붉은 마가목 열매 사이로 빠져 나가자 휴일 오후의 사찰은 고요하다. 붉게 타오르는 문수산과 지형을 제대로 살려 배치된 큰 전각들이 위압적이리만치 장엄하다. 높은 계단 위의 보탑성전과 대웅전을 향한 소백의 준령들조차 무릎을 꿇고 낮은 자세로 물결친다.전각은 대부분 새로 지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오층 석탑은 세월이 가져다 준 애잔한 소박미는 없지만 조각이 섬세하면서도 화려하다. 장대한 풍광에 걸맞은 중창불사는 불심의 정성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수천 년 뒤 고졸미가 흐르는 축서사를 상상하면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오래된 전각은 보광전 하나뿐이다. 젊은 대웅전에 자리를 내주고 조용히 옆으로 물러나 앉은 조선 중기 건물, 신라 문무왕 때 만들어진 석조 비로자나불상과 화려한 목조광배(보물 제995호)를 지키며 묵언 중이다.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군의 방화로 소멸의 아픔을 안고 흑백 필름처럼 살아가는 꽃이다.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두로 비추는 비로자나불의 수인,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말아 쥔 지권인에 마음이 한참 머문다.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이며 왼손은 중생의 세계를 뜻하며,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어리석음은 둘이 아님을 말한다. 고색창연한 중후함은 없지만 천년고찰의 명맥이 단단히 뿌리내린 절이다. 문득 주지 스님이 뵙고 싶다.총무 스님을 뵙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시자 스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주지 스님 뵙기를 간청했다.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차방에서 주지 스님을 기다린다. 눈이 부시도록 맑고 정갈한 노스님이 문을 열고 나오신다. 선원장 무여 스님이란 걸 뒤늦게 알았다. 삼배의 예가 채 끝나기도 전에 편하게 앉으라고 손짓하신다.정적이 흐르고 스님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신다. 무엇을 여쭤봐야 할지 당황스럽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돈다. 말씀도 움직임도 낮고 조용조용하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불어나 노예처럼 끌려 다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갈증과 갈등으로 지쳐 있던 몸과 영혼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차향 같은 자비로운 기운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눈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움으로 변해 걷잡을 수가 없다. 난감하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난생 처음 경험하던 성전암의 새벽 예불 종성 앞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그 날의 눈물과 흡사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을 쏟고 있다.나직나직 스님이 말씀하신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정을 줄이고 꾸준히 수행해 나가야 내면의 참 기쁨을 얻을 수 있노라고.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수행을 하다보면 글에 힘도 생기고 일도 즐거워질 거라며 호흡법으로 하는 백팔배를 가르쳐 주신다. 이미 스스로 알고 있는 답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정신과 육신은 텅 빈 것처럼 고요하다.마음 편한 것 만한 행복이 있던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곧 수행임을 알면서 나는 어떤 간절한 목표도 없이 어설픈 앎만 가지고 주변을 얼쩡거렸다. 초심으로 돌아가 염불과 법문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새로운 각오로 산사를 찾고 글을 써야겠다는 각오가 선다. 삼매에 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자세로 어떤 길을 가느냐는 참으로 중요하다.조낭희 수필가책이 나오면 꼭 보내달라고 말씀하신다. 의욕과 효능감을 주기 위한 말씀이란 걸 모를 리 없다. 부처님 대하듯 공경하는 자세로 따뜻하게 맞고 배웅해 주시던 스님, 내 눈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선지가 깊고 계행이 청정하신 참된 선지식의 모습이다. 무지함이 불러온 뜻밖의 행운, 그것은 수도 없이 회의가 들던 ‘산사 가는 길’의 연재가 가져다 준 인연이기도 하다.그동안 고색창연한 전각이나 고즈넉한 사찰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절집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얻은 평화는 수명이 짧았다. 허기진 몸과 영혼은 뜬금없이 마찰을 일으켰고, 나는 그런 나를 다독이느라 늘 분주했다. 절을 내려가도 내게 깃든 감동과 향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는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았으면 좋겠다.응향각을 빠져나오는데 보광전 앞 석등이 나를 잡는다. 그도 나도 허공처럼 무심한데 발아래 굽이치는 산 물결은 지극히 잔잔하고 따뜻하다. 의무와 무게로 느껴졌던 일들이 은혜롭게 다가온다. 산세가 빼어난 명당터에 자리잡은 축서사,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독수리의 지혜로운 날갯짓이 들린다.지혜로 가는 길은, 언제나 나를 향해 뻗어 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고 했던가.

2019-11-11

애틋한 만남, 아름다운 별리… 상주 남장사(南長寺)

노악산 아래 사하촌은 붉게 익은 감들이 선한 이마를 드러내고 마을을 밝힌다. 계절의 아름다움은 늘 거기에 새로운 모습으로 있어 마음이 시리다. 어느 집이라도 문 열고 들어서면 가을볕에 그을린 얼굴들이 반겨 줄 것만 같다. 빈틈없이 가을이 들어차 있는 노악산 골짜기 멀지 않은 곳에 천년고찰이 숨어 있다.남장사는 경상북도 팔경 가운데 하나로 신라 흥덕왕 7년(832년) 진감국사 혜소가 창건하여 장백사라 하였다가 고려 명종 16년(1186년) 각원 화상이 지금의 터에 옮겨 짓고 남장사라 하였다. 보물이 네 점이나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일주문이 보수중이라 보광전으로 통하는 옆문으로 들어서니 지방 방송사에서 취재를 하느라 분주하다.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경내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스님의 예불 소리에 조용히 타오르는 엄숙한 기도들, 소란스러움을 잠재우는 무구한 눈빛들이 싸하게 가슴을 적신다. 대적광전 열린 어간문 안으로 보이는 젊은 스님의 뒷모습이 유난히 고독하다. 숨죽인 탑과 나무들, 허공조차 불심으로 물들어 툭 건드리면 유채색 물감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천년고찰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으며 올곧은 정신을 지켜온 남장사는 층층시하 위계 질서가 느껴지는 전각들의 배치조차 권위적이지 않으며 건축물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편안하다. 내실을 다져온 명찰다운 풍모 속에는 안온함이 흐른다. 극락보전 앞에 일촌의 역사를 가진 탑들조차 천년 고찰에 어울리는 것은 나무 한 그루에도 불심의 역사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리라.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 1635호)이 봉안된 극락전 안에서는 떠난 이의 영혼을 달래는 제(祭)를 지내는 중이다. 은행나무가 유난히 슬퍼 보인다. 영산전 오르는 나무테크 위로 떨어지는 샛노란 이별의 몸짓들, 스님의 경 읽는 소리가 애잔하다. 법당에서 슬픔을 정리하는 가족보다 모든 풍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내게 더 큰 쓸쓸함이 쌓인다.누구라도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를 품고 이승을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 이제 누군가는 하염없는 부재의 기다림과 그리움을 안고 해마다 남장사를 찾아오리라. 가을날의 평화가 망자의 영혼에도 깃들길 기도하며 보광전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천년고찰 가슴팍 위로 쏟아지는 햇살들이 나를 살며시 일으켜 세운다.얕은 가을볕이 배를 깔고 누운 보광전 법당에서 나는 기도한다. 가을날의 섬세한 숨결같은, 그런 사람 되게 해 주소서.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 990호), 후불탱으로 봉안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제 922호) 두 보물의 시선이 두런두런 바깥으로 쏠린다. 서둘러 보광전을 빠져 나왔다.고려 시대에 제작된 맷돌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관심을 모으는 중이다. 현존하는 최대 크기로 민속학적인 가치가 상당할 거라는 전문가들의 설렌 기대감과는 달리 상부맷돌의 창백한 얼굴빛과 마주하는 순간, 내 몸은 통증을 일으키며 딸꾹질을 해댄다. 응이진 그리움이 하얗게 출혈이라도 한 걸까. 상부 맷돌의 몸은 섬뜩하리만큼 희다.세월의 때가 켜켜이 앉은 하부 맷돌의 다부진 몸체와 절제된 눈빛에 비해 극락보전 옆 계단에 거꾸로 엎어진 채 살아온 상부 맷돌의 불안한 눈빛은 자꾸만 가슴을 헤젓는다. 계단석이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상부 맷돌임을 알게 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이라도 일으킨 걸까. 눈빛이 안쓰럽다. 숱한 시간과 세월의 농간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둘의 어색한 만남 앞에서 광란하듯 타오르는 단풍들, 세상은 지나치게 무겁거나 지나치게 가벼운 것 투성이다.만남과 이별은 한 몸이다. 모든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 극락보전 안에서는 애틋한 별리의 슬픔을, 보광전 앞 마당에선 감격적인 맷돌의 만남을 남장사는 말없이 지켜본다. 예불소리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이 진실한 순간에도, 우리는 온전한 내가 아니라 누군가의 무엇으로 회자되어 기억 속을 떠돌 것이다.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뜬금없이 남편에게 문자도 보낸다. 갓 태어난 손녀와의 소중한 새 인연도 가슴 한켠을 밝힌다. 순간순간의 감동을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나의 일부가 되어 가슴 적셔줄 인연이다.조낭희 수필가남장사는 보물만큼 주지 스님에 대한 존경심도 남다르다. 여든이 넘은 성웅 주지 스님을 예약 없이 뵙기는 곤란하다. 보광전 옆 주지 스님이 머무시는 요사채를 향해 공손히 합장하고 절을 나서는 한 처사님의 모습이 가을빛만큼 아름답다. 가슴 찡한 예법을 따라 나도 두 손 모은다. 주지 스님의 건강과 남장사의 평온한 질서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남장사에는 보물보다 더 반갑고 그리운 것들이 살아간다. 극락전 대들보 위에 조각된 서수 두 마리와 소중한 한쪽을 돌아보게 한 맷돌, 남장사 입구를 지키는 해학적인 돌장승, 모두가 내 영혼을 밝혀준 보물이다. 참으로 따뜻했던 시월 하순 어느 날의 인연이다.

2019-11-04

무소의 뿔은 고독하다 - 청도 대비사(大悲寺)

중년의 여자가 홀로 걷는다. 아무런 보호 장치 없는 차로를 묵직한 배낭 하나 메고 걷는 모습이 잘 여문 가을을 닮았다. 마른 꽃잎 같은 여인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탑이 쌓인다.여인은 큰 길을 따라 걷고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안고 대비사를 향해 마을 어귀로 들어선다. 눈길 닿는 곳마다 해묵은 그림처럼 정감 넘치는 가을 풍경이 기도가 되어 따라온다. 그곳이 비록 초행길이라 할지라도.길은 대비지 푸른 어깨를 타고 굽이굽이 이어진다. 수심 깊은 호수에는 하늘의 낮별들 죄다 내려와 반짝이며 수다를 떨고, 일찍 물든 단풍은 무심히 붉고 외롭다. 내 안에 숱한 그리움들 몰려나와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깨달음이란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호젓한 물결이 내게 속삭인다.호수와 헤어지고 골짜기로 접어들 때, 일주문과 천왕문을 대신하는 사천왕상이 길을 막는다. 심란하고 소소한 탐욕들 죄다 접어 호수 위로 띄워 보낸 뒤라, 나를 검문하는 사천왕상의 눈빛은 한없이 너그럽다. 용소루 처마 끝에서 빈몸으로 허공을 가르며 울어대는 풍경처럼 오늘은 몸도 마음도 가볍다.누하진입식의 용소루를 지나 너른 마당을 가로지르면 적당한 높이의 기단 위에서 강렬한 눈빛이 나를 맞는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의 조선 중기 건축물인 보물 제 834호 대웅전이다. 오랜 그리움 품고 피어나는 한 떨기 꽃처럼 대웅전의 자태는 단아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다.텅 빈 마당에 서서 대웅전을 바라본다. 눈 밝은 사람이 아니면 찾아올 수 없는 이곳, 영겁의 세월을 외로이 떠돌았을 독백 하나, 허기진 날들을 견디고 비로소 닻을 내린다. 인연의 끈을 붙잡고 다가오는 숨결처럼, 전생에 한번쯤 다녀갔을 법한 절이다. 어쩌면 나는 이곳에 오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찰을 스쳤던 것은 아닐까.절은 신라 진흥왕 18년(557년) 한 신승이 호거산에 들어와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중심으로 오갑사(대작갑사, 천문갑사, 소작갑사, 가슬갑사, 소보갑사)를 지었는데 서쪽의 소작갑사가 오늘날의 대비사다. 진평왕 22년에 원광국사가 중창하며 대비갑사로 바꾸었다는데,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 왕실의 대비가 수양을 위해 이 절에 오랫동안 머물러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도 한다.호거산 품안의 박속마냥 적당한 크기의 절이 말없이 나를 안아주고 대웅전은 길고 길었던 침묵을 위로하듯 손을 내민다. 빨려들 듯 법당으로 들어가 겨우 삼배의 예를 갖춘다. 이 아늑하고 뜨거운 기운의 정체는 무엇일까. 대웅전이 내 안으로 성큼 들어오고 나는 대웅전의 품에 안긴다.요사채는 인기척이 없다. 새로 지은 듯한 뒷산 선원은 가을날의 빈집을 지키듯 허공만 응시하고, 감로수 떨어지는 소리가 염불을 대신해 천년고찰을 밝힌다. 고색창연한 단아함과 깊고 그윽한 우수가 겹쳐 기품이 묻어난다. 안쓰러움이나 비굴함 따위는 결코 허락하지 않을 듯 간결하고 남성적이다. 스스로의 결을 지켜내기 위해 묵언수행하며 고독을 사랑하는 사찰이 마음에 든다.시대에 편승하며 속세와 물꼬를 트는 일에 중독된 생기발랄한 사찰들과는 달리, 사찰로서의 본질과 정체성을 놓치지 않고 도약하려는 꿈틀거림이 보인다. 절 뒤편에 우뚝 솟은 기개 넘치는 억산의 형세도 대비사와 닮았다. 대웅전의 시선은 앞산 너머 운문사를 향해 있지만, 승천하는 용의 품에 안겨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고 있는 것 같다.입구를 지키는 느티나무 옆 오솔길을 따라 11기의 고승대덕들의 부도밭에 들어서면 가을이 물들고 낙엽 지는 소리가 내 안에서 들린다. 부도밭의 맑고 고요한 분위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즈음, 용이 되어 승천하려다 이무기로 변한 상좌의 억울한 전설을 간직한 억산 봉우리의 깨진 바위로 향하는 등산로도 한번쯤 걸고 싶다.절 뒤 숲에서 마애 아미타삼존불입상을 조성하는 돌 깎는 소리가 천년의 꿈을 안고 몇 번이나 날아오르다 숲으로 떨어져 잠든다. 그의 손길에서 태어날 마애불을 위해 날마다 정성스런 기도로 하루를 열 석공을 생각한다. 아사달의 애절한 전설만큼 불심 가득한 석공에게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천년을 밝혔으면 좋겠다.조낭희 수필가주지 스님은 출타 중이다. 공양주보살도 절일을 돕는 처사님도 없다. 단출한 살림에 문화재를 관리하는 분 홀로 절을 지킨다. 주지 스님을 뵈러 다음 날 다시 절을 찾았을 때, 대웅전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고, 주지 스님은 번잡한 만남은 피한다는 전갈만 보내 오셨다.눈 밝은 자 스스로 찾아와서 스스로 기도하고 공부하면 된다는, 문턱 높은 꼿꼿함이 싫지 않다.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 젖은 걸음으로 찾아왔을 때, 대웅전이 내게 손을 내밀듯 위무해 주시기를 바라며 천천히 대비사를 빠져 나왔다.잔잔한 호수 너머, 절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대비사의 은혜로운 향기가 멀리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 주었다. 호수에서 놀던 뭍별들 어느 새 내 안에서 총총히 뜨기 시작하고.

2019-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