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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뱀이 허물을 벗듯… 무주 안국사(安國寺)

붉은 치마를 두른 것처럼 단풍이 요란하다는 적상산(赤裳山),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한여름에 오른다. 물안개가 산자락을 휘감고 있어 숲은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마음이 이토록 평온한 것을 보니 불이문은 벌써 지나쳤는지도 모른다.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양수발전소 댐을 지나도 산은 좀처럼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참을 올라서야 안국사 일주문을 만났지만 해발 1000m의 고지대라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금산사의 말사인 안국사는 충렬왕 3년(1277년)에 월인 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복지(卜地)인 적상산에 성을 쌓고 절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그 뒤 광해군 6년(1614년)에는 조선왕조실록 봉안을 위한 적상산 사고를 설치하려고 절을 증축하여 사고를 지키는 수직승의 기도처로 삼았다.그 뒤 영조 47년(1771년)에 법당을 다시 지어 나라를 평안하게 해주는 사찰이라는 뜻으로 안국사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1910년 적상산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호국의 도량 역할을 해왔다. 1989년 적상산에 무주 양수발전소 건립이 결정되자 안국사가 수몰지구로 편입되어 옛날 호국사(護國寺)가 있던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긴 계단을 올라 누하진입식으로 청하루를 통과하자 제 모습을 드러내는 안국사는 뜻밖에 소박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극락전이 법당문을 활짝 열고 불자를 맞느라 여념이 없고, 큰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성보박물관과 그 위로 선원록을 봉안했던 적상산 사고 건축물인 천불전이 절의 품격을 더해 준다.나는 법당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며 학이 단청을 하였다는 설화를 찾아 극락전을 돌아본다.극락전을 지은 스님이 단청불사를 고심할 때, 하얀 도포를 입은 범상치 않은 노인이 나타나 단청을 해주겠다고 한다. 단청을 하는 백 일 동안 절대 들여다보지 말기를 당부했지만, 스님은 99일째 되던 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막 안을 들여다본다. 그 때 노인은 보이지 않고 학이 입에 붓을 물고 단청을 하다 낌새를 채고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이다.내소사의 대웅보전 단청 설화와 흡사해 신선함은 떨어지지만 극락전 뒤편 한쪽에는 하루 분량의 목재가 그대로 남아 있어 신비감을 실어준다. 재미로 그치던 설화가 오늘따라 묵직한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호기심을 경계하는 숱한 신화들도 생각난다.불경의 육바라밀 중에는 인욕바라밀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며 참고 견디는 수행을 말한다. 바라밀은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법으로,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번뇌와 고통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건너간다는 뜻이다.보다 나은 인격을 갖추기 위해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다니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 반성할 때가 많다. 몸을 절제하고 말을 삼가는 일조차 쉽지 않은데 육바라밀은 개인의 인격 완성 단계를 넘어 이타(利他)를 향한 덕목이라 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비워내면 자연히 인욕이 된다고 하지만, 바른 지혜와 바른 알아차림으로 참된 인욕바라밀을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지장전 앞에서 사람들이 수런거린다. 가까이 가보니 풀밭 위에 커다란 뱀 한 마리가 가부좌를 한 듯 적당히 몸을 접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구경꾼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혐오스런 눈빛들을 묵묵히 감내하며 참선이라도 하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사람과 뱀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누군가 이 절에서 가끔 보았노라며 절 지킴이라고 말하자 그제야 하나 둘씩 자리를 뜬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여 뱀의 눈빛을 바라본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지켜보며 연민의 눈빛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그와 나의 정체조차 묘연해지는 순간이다. 는개를 맞으면서도 뱀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만 경내를 적시고 또 적신다.조낭희수필가사람들이 빠져나간 조용한 극락전에서 뒤늦게 백팔 배를 한다. 법당 안에는 영조 4년(1728년)에 기우제를 지낼 때 조성한 보물 제 1267호인 괘불이 사진에 담겨 있지만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는다. 동쪽으로 괘불함이 드나들 수 있는 앙증맞은 문 하나가 눈에 띤다. 마치 세상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문을 연상시킨다. 오직 저 문이 아니면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는, 생명의 문처럼 특별해 보인다. 그동안 법당문을 여닫는데 마음을 모으느라, 있어도 보이지 않던 문이었다.내 안에 존재하는 틀도 보인다. 그것은 안국사 돌 축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견고하고 무서운, 나의 의식과 에고가 빚어낸 프레임이다. 어떤 집착이나 사심 없이 대상을 대하려면 알에서 깨어나야 한다. 조금 전 보았던 뱀의 눈빛이 떠오르고 신비주의적인 진리를 상징하는 아프락사스도 생각난다. 그토록 몸을 오싹거리며 혐오하던 뱀도 상처가 생기거나 더 큰 성장을 위해서는 허물을 벗을 줄 안다.학문의 길은 쌓고 또 쌓아야 의미가 있지만, 진리의 길은 버리고 또 버리며 비우고 또 비워야 한다고 했다. 노자의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상이라는 미혹한 옷 하나 벗을 줄 아는 지혜가 그리운 날이다.

2020-08-10

어떠한 걸림이나 위태로움도 없는 눈빛으로… 영동 반야사(般若寺)

달이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을 지나 석천계곡을 따라 반야사로 향한다. 불어난 계곡물로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는데, 긴 장마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햇살을 업고 백화산 둘레길을 걷는다.줄지어선 잣나무 그늘 끝으로 반야사가 보인다. 반야는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한다. 접근성 좋은 천변에 자리 잡은 널찍한 경내로 들어서는데 계단 옆에서 봉숭아꽃이 무리지어 반긴다. 문턱이 높지 않은 개방적인 절임을 알 수 있다. 템플 스테이로 머무는 참가자들과 관광지에 들른 듯 반바지 차림에 뒷짐을 지고 둘러보는 방문객들로 절은 조금 어수선하다.법주사의 말사인 반야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지만, 성덕왕 19년(720년) 의상의 십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더 지배적이다.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서 세조 10년(1464년)에 크게 중창하였지만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고졸미는 찾기 어렵다. 다만 맞은 편 지붕 위로 꼬리를 치켜들고 포효하는 돌무더기 호랑이가 신비감을 자아낸다.이 절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극락전과 오백 년 된 배롱나무, 절이 창건될 당시 세워졌다는 보물 제 1371호 삼층석탑이 섬처럼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배롱나무 꽃그늘에서 바라보는 극락전 주변은 사대부가의 후원처럼 아담하고 운치가 있다. 그 옆 돌계단 위에는 산신각이 홀로 꿈꾸듯 외롭다.아득한 과거를 그리워하는 극락전과 무심하도록 개방적인 대웅전의 훤한 이마, 비밀스런 아픔 하나쯤 풀어놓고 싶은 앙증맞은 산신각,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엄숙한 수행 공간까지 다양한 매력이 숨어 있다. 하나가 아닌 듯 하나로 존재하는 절, 방문객들의 시선을 즐기며 성장하는 사찰 같다.불자들이 많이 찾는 대웅전보다 극락전이 백팔 배를 하기에는 훨씬 아늑하고 편한 공간이란 걸 뒤늦게 알았다. 사람들은 주로 대웅전을 들른 후 약속이나 한 듯 문수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수전 가는 두 갈래의 길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담장을 끼고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 대신 대웅전 뒤편의 넓은 돌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참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반야사의 뒷모습은 지극히 평범하고 편안하다.길지 않은 산길을 따라 오르자 뜻밖에도 문수전은 시원스럽게 펼쳐진 허공을 안고 벼랑 끝에 돌아앉아 있다. 아슬아슬한 문수전 절벽 아래로는 장마로 불어난 물길이 울창한 숲을 뚫고 나와 도도하게 흐른다. 법당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도 중이고 물길은 너른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제 갈 길을 가느라 바쁘다.문수전 법당은 아주 작다. 느긋하게 기도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서둘러 삼배만 하고 나왔다. 쉼 없이 발길을 재촉하는 물길을 바라보며 불심이 강했다던 세조를 생각한다.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 계곡을 찾은 세조와 등을 밀어주고 사라진 문수보살 이야기가 이곳에도 전해진다. “왕의 불심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문수보살은 복덕과 반야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문득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떠오른다. 세상의 본성을 나타내는 공(空)은 무한한 가능성이며 잠재적인 무엇이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실체는 공이다. 양자역학이 있기 수천 년 전에 이미 부처님은 이 모든 색의 실체는 공이라 말씀하셨다. 상식적일 만큼 흔하게 쓰는 철학 용어이지만 여전히 어렵고 먼 세계이다. 내게 공의 세계는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늘 지식적인 수준의 앎에서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머리로 아는 실존의 방식은 참으로 단순한데 내 삶은 늘 무언가에 목 말라하며 허기져 있다. 수많은 절을 찾아다니며 백팔 배를 하는 것조차 본질을 놓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어쩌랴. 마지막 문을 열 때까지 내 존재의 크기만큼 발버둥치다 가는 게 인생인 것을.내려오는 길은 다른 길을 택했다. 좁고 가파른 돌계단이 바짝 긴장한 채 나를 이끄는데 나는 자꾸 생각이 많아진다. 격렬하게 굽이치는 계곡물의 힘찬 맥박소리에 숱한 사념들이 자맥질을 해댄다. 반야사로 이어지는 인적 없는 오솔길을 문수전의 자유로운 눈빛이 함께 걷는다. 어떠한 걸림이나 위태로움도 없는 하나의 말씀이 되어.조낭희 수필가다시 만난 반야사는 더 새롭고 깊이가 느껴진다. 한낮에도 백화산 돌무더기 호랑이가 지켜주는 절, 그 신비로운 비경 속에 문수보살의 지혜와 영험함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이른 새벽이나 밤에 기도하러 오는 여성 불자들을 위해 특별히 문수전은 비구니 스님이 관리한다는, 절 앞 카페 여주인의 친절한 설명에도 자부심이 가득하다.사람이 많지 않을 어느 호젓한 날에 백화산 둘레길을 걸어서 다시한번 반야사 일주문을 들어서고 싶다. 그리고 한 번도 온 적 없는 곳에 온 듯 두근거림을 안고 문수전으로 향하리라. 저 참나무 숲 언저리를 오를 때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면, 나는 그를 문수보살로 기억하며 흥분할지 모른다. 그가 평범한 불자여도 상관없다. 깨달음의 길은 멀고 험하지만 그 도상에서 만나는 신기루 같은 기쁨들이 있어 우리는 또 힘을 내지 않는가.

2020-08-03

사막의 낙타처럼 묵묵히… 군위 법주사(法住寺)

법주사를 찾아가는 길은 후덥지근한 여름 홀로 적적하다. 인적 없는 들길을 개망초가 하얗게 무리지어 밝힐 뿐 모든 게 나른하다. 버려진 땅을 악착스럽게 지켜낸 숱한 고독들이 있어, 귀화식물이란 꼬리표가 결코 밉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꽃이다.청화산 남쪽자락에 있는 법주사는 은해사 말사로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심지왕사 또는 은점조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주석하고 일연이 총림을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조선 중기 화재로 법당이 소실되자 1623년 보광명전을 중건하고, 15년 전 지금의 주지 육문 스님이 중창불사하였다.넓은 주차장과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당우들의 당당함 앞에서 잠시 당황스럽다. 불이문과도 같은 보광루를 통과하자 너른 마당 건너편에 위압적일 만큼 거대한 보광명전이 시선을 끈다. 1만여 평의 넓은 대지가 옛 사세를 짐작케 하지만 오랜 역사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저 멀리 보광명전 앞 너른 계단을 스님 두 분이 내려오신다.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장엄한 경관과 달리 다소곳한 젊은 비구니 스님이 친절하게 절을 소개해 주신다. 법주사 주지는 전국 비구니 회장 육문 스님, 평생을 올곧게 살아오셨는지 젊은 스님의 얼굴에는 존경과 자긍심이 가득하다. 스님들이 하안거 수행 중이니 보광명전 우측 뒤로 보이는 청화선원 쪽은 피하기를 당부하신다.남성적인 느낌이 드는 보광명전은 선뜻 들어서기가 부담스럽다. 보광명전을 짓기 전에는 영산전이 주법당으로 쓰였다는 스님의 말씀이 떠올라 발길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 영산전은 별채처럼 시선을 피해 다소곳하게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질곡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오층석탑과 내면을 키우며 살아가는 향나무가 영산전을 지킨다.법당 안은 고색창연한 역사의 깊이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단청이 벗겨진 천장과 오래된 마룻바닥이 주는 편안함,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도량이라 그런지 아늑하다. 석가모니 삼존불을 향해 천천히 백팔 배를 시작한다. 무심과 무심의 연속, 어떤 사념이나 청원도 없이 백팔 배를 끝내고, 텅 빈 마음으로 가부좌를 하고 앉는다.시간을 잊은 채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공간이다. 내 안에도 지혜를 모을 수 있는 법당 같은 내면의 공간이 있다면 좋겠다. 석가모니 삼존불 뒤로 보이는 후불탱화에 유난히 마음이 끌린다.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영산불국, 사바세계의 불국토가 단순하면서도 차분한 색감으로 표현되어 있다. 법당을 독차지하고 앉아 국보도 보물도 아닌 후불탱화를 감상하는 이 시간이 좋다.법당을 나서는데 청화선원 앞마당에 스님들이 줄을 서서 돌고 계신다. 수행을 하다 잠시 포행 중인 듯하다. 가슴 서늘하도록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 나는 물푸레나무를 떠올린다. 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이 푸르게 변한다하여 이름 붙여진 나무다. 가까이 있으면 나도 푸르게 물이 들 것만 같다. 나는 무슨 의식을 치르듯 포행이 끝날 때까지 멀리서 지켜보았다.그 사람을 제대로 알고 싶으면 주변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모든 욕망의 고리를 끊고 맑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머무는 공간과 대화, 고독을 껴안고 행해졌을 수많은 날들의 기도를 떠올리며 나를 돌아본다. 나의 한 주는 늘 그렇듯 어수선하고 분주했다. 보광명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잠긴 문고리를 풀고 법당으로 들어서는데 커다란 괘불함이 아미타삼존불보다 먼저 반긴다. 짐작컨대 보물 제 2005호로 지정된 법주사 괘불도가 보관되어 있는 함이리라. 1714년 숙종 40년 아홉 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완성한 대형괘불이다. 찬란했을 한 때의 영광이 영겁의 세월 속에서도 끄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조낭희 수필가넓은 법당에는 조금 전까지 기도를 한 흔적이 남아 있다. 반으로 접혀진 좌복을 펴자 누군가 외우다가 만 경(經)이 염불이 되어 흘러나온다. 아미타삼존불을 향해 삼배를 하고 나서는데 하얀 피부에 가녀린 체구의 스님 한 분이 다리를 절며 들어오신다. 봉침을 맞았다는 발이 슬프도록 희다. 상냥한 말투와 미소조차 애잔해진다. 독백처럼 걷는 스님의 길이 마냥 꽃그늘일 수만은 없으리. 누군가와 함께 걷는 내 길도 외롭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육체적인 아픔에서 벗어나 수행에 전념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어둡지 않은 그림자 하나 남겨두고 법당을 빠져 나왔다. 너무 웅장해서 정이 가지 않던 첫 느낌의 보광명전이 제법 든든해 보인다. 오늘 마주친 스님들의 위태롭지 않은 시간들이 법주사의 넉넉한 미래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절을 나서는 내 발걸음에도 정갈한 기운이 실린다.국내에서 가장 큰 왕맷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볍게 찾아갔던 법주사, 맷돌 위에 소탈한 웃음을 띠고 앉아 있는 동자승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곳에는 사막의 낙타처럼 묵묵히, 힘들고 고단한 외길을 고집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푸른 기도가 사시사철 자라고 있다. 삼천 년만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 같은, 그 깨달음을 만나기 위해 지금도 정진 중이다.

2020-07-27

모든 날들이 아침 기도 같기를… 김천 고방사(古方寺)

문득, 새벽 기도가 하고 싶은 날이다. 한 시간 반을 달려 산사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의 산사는 싱그러웠다. 비가 올 듯 흐린 하늘, 바람에 적당히 몸을 흔드는 7월의 숲에 싸인 주차장, 단정한 어깨를 자랑하는 일주문, 그 안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지는 길, 모든 게 사랑스러운 아침이다.일주문을 들어서는 마음도 여느 때보다 정갈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 계곡을 따라 누워 있고, 바람 소리에 깨어나는 나뭇잎들의 은밀한 아침 인사가 높은 곳에서 들려온다. 세월이 낸 흔적 사이로 쭉쭉 뻗은 참나무들이 무리지어 살아가는 곳, 떨어진 나뭇잎과 채 익지 않은 도토리를 보니 굴참나무다. 내 영혼도 함께 깨어나는 아침 산길, 그곳에는 절제와 균형, 고요하면서도 부산한 은혜로움으로 가득하다.이내 하늘을 가리던 숲이 환해지며 고방사가 보인다. 팽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끌며 분위기는 달라진다. 아주 작은 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크다. 천왕문을 지나 높은 계단 위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대광보전, 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도 모두 기도가 된다. 지은 지 오래 되지 않은 전각들은 여느 절과 다름없이 평범하고, 절에 비해 큰 삼층 석탑이 시선을 모으고 있다.고방사는 직지사의 말사이다. 경내의 현판 기문에는 418년 아도가 창건했다고 적혀 있지만 일설에는 신라 법흥왕 13년(526년)에 창건했다고도 한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지만 45동에 이르는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여러 차례 중창하였지만 숙종 45년(1719년) 수천이 절을 새로 옮겨 지었다. 보광전만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나머지 전각은 빈대가 많아서 모두 태웠다고 한다. 보물 제 1854호 고방사 아미타여래 설법도는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보광명전 법당문이 활짝 열려 있다. 비가 올지도 모를 날씨에 불자를 맞는 스님의 세심한 정성이 보인다. 누군가 새벽이슬을 털며 들어섰을지도 모를 법당, 신발을 벗고 문턱을 넘는 무심한 행동에도 아침공기가 떨며 일어선다. 목조 아미타삼존불의 평온한 시선을 의식하며 백팔 배를 시작한다. 호흡은 여느 날보다 더 차분하다.손녀가 태어나던 날, 한 편의 잘 빚어진 서정시처럼 아이의 인생이 펼쳐지길 얼마나 숨죽이며 기도했던가. 인생은 고행이라 하지만 아름답고 호기심 가득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가끔은 전쟁 치르듯 긴장과 아픔으로 숨죽일 때도 있지만 삶은 분명 축복이다.작은 소리에 반응하고 시선이 옮겨갈 때는 또 얼마나 경이로웠던가. 어느 별에서 저토록 고귀한 생명이 흘러와 나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아이가 순수한 눈빛을 보내올 때마다 나는 수많은 다짐들로 화답하곤 했다. 너무 높지도 허술하지도 않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겠노라고. 하지만 인생은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생후 10개월을 넘긴 손녀는 발육이 늦은 편이라고 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언어와 대근육 발달이 늦다며 젊은 의사는 두어 달 지켜보다 정밀검사 받아보기를 권유했다. 그토록 총명해 보이던 아이를 방점처럼 찍혀 따라 다니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억지로 아이를 세워보기도 하고 걱정스러운 눈빛 속에 스며드는 불안감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힘들었던 며칠이 그대로 아침 기도에 실린다. 절을 거듭할수록 법당문을 드나드는 아침 공기는 더욱 상쾌해지고, 점점 보이지 않던 내가 보인다. 아이의 든든한 울타리는 경제력도 지성적인 잣대도 아니다. 아이를 믿고 지켜볼 수 있는 무한한 긍정의 힘이다. 그런데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얹어 사랑이라 둘러대며 허우적거렸으니, 저토록 순수한 영혼이 모를 리 없다. 벌써부터 또래와 비교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향해 아이는 어찌 첫발을 용감하게 뗄 수 있으랴.손녀의 양육을 책임져야 할 상황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가만히 나를 들여다 본다. 체력적인 한계와 주변인들의 만류, 미련을 버리기 힘든 것들과의 단절, 그 속에서 나는 중심을 잡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아침, 훌륭한 양육자로서의 내적 성장이 절실함을 깨닫는다. 확신 없이 심은 꽃씨가 어찌 건강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수 있으랴.조낭희 수필가스스로를 믿고 사랑하지 못하면 어떠한 성공과 행복도 무의미하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지 않고 언제나 밝고 꿋꿋한 아이로 성장시키고 싶다. 타인을 향한 시선에도 이해와 사랑이 실릴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어둡고 불안했던 마음들이 아침 기도에 쓸려 나가고 내 안에는 젊고 의욕적인 기쁨들로 채워진다. 그것은 새로운 목표가 되어 가슴이 설렌다.법당 밖으로 펼쳐진 참나무 숲이 유난히 아름답다.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나무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한 몸이 되어 움직인다. 참나무는 결코 송백(松柏)의 절개를 꿈꾸거나 탐하지 않는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나무들이 제각각 어울려 숲은 풍요롭다.한 때의 어둠을 토해내고 아침이 잉태한 숲의 언어들이 나를 격려하며 배웅한다. 내려올 때 바라본 숲은 훨씬 깊고 거룩했다.

2020-07-20

숱한 오류들의 연속… 청도 적천사(碩川寺)

적천사의 은행나무를 보러 떠나라고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초입에서 펼쳐지는 소나무 숲에 한껏 부풀어 있는데 느닷없이 8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와 마주 선다. 시간을 벗어난 존재의 환희, 푸르고 깊은 눈빛과 마주친 이상 차에서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은행나무의 오랜 침묵과 장엄한 자태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화석, 나무에게서 서늘하도록 도도한 기운이 흐른다.천연기념물 제 402호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수형이 곧고 반듯하며 큰 상흔 없이 자랐다. 고령의 몸으로 유주를 늘어뜨린 채 손톱만한 은행들을 품고 본분을 다하는 모 앞에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여성의 젖가슴처럼 자라는 유주가 남근처럼 길게 자란 탓에 이것을 끓여 먹으면 남자아이를 잉태한다는 속설이 전한다. 은행나무와 옛 여인들이 재워둔 아픔들이 쿨럭이며 깨어날 것만 같다. 그 지난한 시간들이 먹먹하다.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유유히 은행나무를 돌아 산 아래로 내려가는 고급 승용차의 뒷모습이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은행나무를 올려다본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젊은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은행나무 연시 한편이 떠오르고, 유난히 은행잎이 노랗게 슬픔으로 차오르던 바이마르에서 몇 달만이라도 머물고 싶던 낭만어린 나의 꿈들도 살아난다. 숱한 꿈들은 현실에 치여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져 갔다. 젊은 날 문학과 감수성에 불을 붙이던 은행나무가 오늘은 성스러울 만큼 외경스럽다.동양에서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강학을 즐겨 한 까닭에 유학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졌다.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곳을 행단(杏壇)이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릴 적 고향 집 앞에도 은행나무 한 그루 자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회화나무가 지성적인 나무라면, 은행나무는 지성과 감성을 고루 갖춘 나무라고.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허기진 시간들이 그리움이 되어 몰려온다.고령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돌아보는 지난 세월은 허무하도록 짧고 애틋하다. 찰나에 불과했던 시간들이 푸른 잎 사이에서 여전히 서성일 것만 같은데, 나무 아래에는 괴테의 연시나 나의 짧았던 청춘은 간곳이 없다. 촛불 밝히며 빌었던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들이 삶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부처님 계신 극락정토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천왕문이 앞을 막아선다. 탐욕과 오염된 마음 내려놓고 들어서라며 사천왕상이 눈을 부라리는데 그 표정조차 친근하다. 사천왕의 발밑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온갖 악귀와 축생, 잘못을 저지른 중생들, 천국와 지옥이라는 말도 낯설기만 하다. 오늘 하루의 생각과 행동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합장한다.적천사는 문무왕 4년(664년) 원효가 수도하기 위해 토굴을 지으면서 창건되었다. 828년 심지왕사가 중창했으며 고승 혜철이 수행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175년 고려 명종 5년에 지눌이 크게 중건 했을 때 참선하는 수행승이 오백 명이 넘었으며 많은 고승대덕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토록 유명했던 절은 인기척이 없고 쓸쓸하다.커다란 괘불을 걸고 위엄을 갖추었을 당간지주, 명부전 지붕 위로 보이는 잘 생긴 소나무, 영산전 앞의 수국의 침묵과 허공을 닮아가는 눈빛들, 흐린 날씨 탓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인다. 천천히 대웅전 법당에 들어가 백팔 배를 한다. 온몸이 젖어들지만 마음은 고요하지가 않다.원음각 뒤로 곧게 뻗은 길은 소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풀들 사이로 시(詩)가 자랄 것만 같은 길, 걷다보니 도솔천이 부럽지 않다. 시원한 소나무 숲길이 나를 편안하게 이끈다. 수풀 우거진 부도밭이 보이고 길은 울창한 대숲 사이로 이어진다.아름다운 길이다. 새로 올라온 대나무의 푸른빛이 매혹적이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빛깔들이 묵은 대나무들 사이에서 청량한 기운을 뿜어낸다. 줄기는 이미 단단한 마디가 생겨 대나무로서의 손색이 없다. 푸른빛에 홀려 수없이 셔터를 눌러대는데, 지나치게 현상에 이끌려 실체를 놓치지 마라는 말씀 한 자락이 대숲에서 들린다.조낭희 수필가길이 끝나는 곳에 대나무로 만든 사립문 하나 열려 있다. 암자는 아닌 듯하다. 정성스럽게 꾸며진 정원과 집 한 채가 숨어 있듯 앉아 있다. 마당 한가운데 덩치 큰 외제 차가 사천왕상보다 더 무섭게 지키고, 잘 가꿔진 나무들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곳은 무슨 용도로 쓰여질까? 급하게 사립문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에 온갖 의구심이 실린다.내 발길은 대나무 사립문 앞에서 그쳐야 했다. 무심코 넘은 선이 애써 찾은 마음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선(線)을 넘지 않는다는 것, 중용의 도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마음만큼 무서운 게 있을까? 소나무 길을 내려올 때쯤 마음이 고요해진다. 환경에 이토록 민감해지는 내 마음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인가?부처님은 법당을 고집하지 않는다. 혼자서 걷는 길이나 무심코 만나는 나무와 풀, 낮게 부는 바람에도 부처님은 계신다. 우리가 무언가에 한눈을 팔거나 부처님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오류들의 연속, 그것이 삶이다.

2020-07-13

그것은 필연적인 나와의 조우… 경주 보리사(菩提寺)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주 남산에 보리사가 있다. 불국사 말사로 헌강왕 12년(886년)에 창건된 절로 남산에서 가장 큰 사찰이다. 삼국사기에 ‘헌강왕과 정강왕의 능이 보리사의 동남쪽에 위치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서 깊은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폐사로 남아 있던 절을 1911년 비구니 박덕념 스님이 중창하면서 지금에 이른다.수없이 화랑교를 지나다니면서도 산림환경연구원 뒤쪽 미륵골에 보리사가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접시꽃이 예쁘게 핀 작은 마을을 지날 때까지 보리사에 대한 기대감은 그리 높지 않았다. 왕대밭에 싸인 너른 주차장, 키 큰 적송들 품에 정갈하고 아담한 사찰 하나 앉아 있다.“보리사, 이름부터 참 예쁘다.”다행히 친구가 좋아한다. 소나무 아래를 걸으며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주제도 없는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마음을 전한다. 그저 그런 나의 일상에 비해 그림을 그리는 친구는 새로운 기법에 열정을 쏟으며 재미를 붙이고 있다.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며 살아가는 친구가 오늘따라 더 젊고 아름다워 보인다.부처님 계신 수미산을 오를 때면 무언가에 집착하고 서두르던 일상들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아서 좋다. 고만고만한 날들이 모두 감사할 뿐이다. 오늘은 친구가 여유를 가지고 멋진 영감을 얻어 갔으면 좋겠다. 보리사로 향하는 우리의 걸음은 느리지만 소소한 것들로 행복하다.깊은 역사에 비해 젊고 현대적인 당우들. 하지만 고도(古都)의 도시 경주에 어울리는 경관과 품격이 느껴진다. 대웅전의 반듯한 이마와 단아한 탑과 석등, 범종각과 요사채, 소나무에 둘러싸인 석불좌상까지 어느 하나 허술함 없는 짜임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친구가 나보다 먼저 합장 반배한다.우리는 대웅전에 들르는 것을 잊고 정성스럽게 꾸며진 화단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들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정원에는 누군가의 노고가 먼저 읽혀진다. 군데군데 수국이 주존불처럼 넉넉하게 자리를 잡으면 크고 작은 꽃들이 협시보살처럼 조화롭게 어울려 유월의 마지막은 한껏 풍요롭다. 주지 스님은 어떤 분일까?절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지만 생동감이 느껴진다. 덩굴을 뻗어 올라가는 호박꽃도 이곳에서는 어엿한 화초로 손색이 없다. 아침저녁 예불소리 듣고 자라는 꽃들의 맑은 낯빛이 탐스럽다. 무리 속에서 저마다 가치를 드러내는 저 구김 없는 자존감들! 서로의 향기에 어깨를 기대며 살아가는 꽃의 세계에도 부처님 말씀이 숨어 있다.잘 생긴 소나무 숲 아래 보물 제 136호 보리사 석불좌상을 만나러 가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다. 대좌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 보존 상태나 조각기법이 남산에 있는 불상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받는다. 주존불의 수인이 항마촉지인이라 석가모니불로 볼 수도 있고, 뒤편에 동쪽의 부처인 약사불을 배치한 것으로 보아 앞은 서쪽의 부처인 아미타불로 보는 견해도 있다.천년을 견뎌온 불상은 어떤 아픔이나 회한의 흔적도 없이 연화좌대 위에 안정감 있게 앉아 있다. 인고의 시간들을 굳건하게 승화시킨 석불의 자비로운 미소 앞에서 누구나 두 손 모을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도 환하게 미소 지으며 합장 삼배로 화답한다.조낭희수필가뒤늦게 대웅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요사채의 화려한 유리문이 붙든다. 거울처럼 반사가 심한 유리문에는 유월의 마지막 풍경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담겨 있었다. 그 광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드는 순간 사진을 찍지 마라는 호통 소리가 들린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굳게 닫혀진 반사유리에는 푸른 잔디만 눈부시다. 요사채를 향해 얼떨결에 두 손 모으며 사죄했지만 반사유리가 주는 묘한 구조적인 관계에서 나는 폭력성을 느끼고 말았다.무안함과 동시에 불쾌감이 인다. 잠깐 문을 열고 훈계하였다면 훨씬 인간적인 따뜻함이 묻어났을 텐데.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저토록 꽃을 사랑하고 절을 정성스럽게 꾸민 주지 스님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절이 가진 정갈한 이미지와 경관이 싸늘하게 멀어져간다. 문턱 높은 절 앞에서 마음이 무겁다.깨달음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보리사, 대웅전 법당은 부처님 계신 불단도 화려하다. 절의 재정 상태가 넉넉해 보인다. 원고료 중 일부를 불전으로 내오던 나름의 원칙이 잠시 흔들린다. 이토록 유치하고 조잔해지는 이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가? 탁하고 분별심 가득한, 너덜해진 마음 앞에서 잠시 참담하다.바람 한 점 없는 법당에서 백팔 배를 시작한다. 촉촉하게 몸이 젖어 올수록 마음은 평온해져 온다. 작은 바람에도 파문을 일으키는 마음, 여전히 갈 길이 먼 나와의 조우는 필연적인 만남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며 법당을 나서는데 보리사의 경관은 첫 인상 그대로 정갈하고 아름답다.요사채를 피해 돌아서 나오며 연화좌대에 앉아 있는 불상을 향해 두 손 모은다. 아무도 없지만 여전히 미소 짓고 있으리라. 궂은 날에도 흔들림 없이 지을 참다운 미소를.

2020-07-06

일상 속에서도 ‘나무아미타불’…청도 불령사(佛靈寺)

여기저기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는 효양산 초입에 차를 세우고 운동 삼아 비탈길을 오른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불령사가 보인다. 좋은 친구와 유익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은 물리적인 거리조차 단축시킨다.불령사는 신라 선덕여왕(645년)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중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1912년 봉주 스님이 중창했지만 허물어져 1985년 지선 스님이 요사채와 산신각을 짓고 2000년에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등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가파른 계곡을 따라 오밀조밀 전각이 들어선 불령사는 시멘트 다리가 일주문인 셈이다. 낯선 소리에 순한 개 두 마리가 짖고 주지 스님이 소탈한 차림으로 나와 인사를 건네신다. 원효대사가 수행하던 동굴과 범바위, 절의 자랑거리인 전탑까지 하나하나 안내하며 설명해 주신다. 원효대사의 일체유심론이나 무아사상, 대승기신론, 요석공주의 지아비를 향한 사랑까지. 스님은 원효대사에 대한 존경심과 절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하다.문양이 새겨진 벽돌로 만든 전탑을 보러 가는 산길에는 바람과 누워 있던 고요가 몸을 일으키고, 천불천탑이라 불리는 삼층탑은 지방문화재답게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서서 산새를 기다린다. 허리 굽혀 부처님과 전각 들이 새겨진 문양들을 찬찬히 살펴보지만 세월의 깊이는 얕고 푸르기만 하다.역사적 가치를 담고 있는 벽돌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대부분 새로 제작하여 쌓은 것으로 3층이던 탑은 5층으로 변하고 2009년에 해체하여 다시 3층으로 보수하였다고 하니 그 원형이 궁금하다. 일제강점기 때 찍은 흑백 사진이 자꾸만 아른거리는데 탑은 맹숭한 낯빛으로 말이 없다.스님은 열흘 만에 맞는 불자인 우리가 반가운 모양이다. 털털한 입담과 말투로 스산한 추억을 재미있게도 풀어내신다. 흔들리며 흘러가는 계곡물처럼 스님의 말씀은 꾸밈없고 거침이 없다. 권위적이고 형식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스님 같지 않은 스님의 말씀이 조용히 바위가 되었다가 시원한 폭포수가 되기도 한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전탑을 지키는 참나무들과 산새들도 귀를 세운다.“발 조심하세요! 발 조심!”무심코 발장난을 하는데 스님이 소리치신다. 놀라 발밑을 보니 개미떼가 무리지어 이동 중이다. 작은 생명까지 놓치지 않는 스님의 산중 생활이 꽃처럼 환하다. 아주 소소한 것이 스님을 다시 보게 만든다. 말씀은 투박하고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부처님의 말씀 실천하며 살아가는 든든한 참나무 같은 분이리라.가난한 시절 뱀을 잡아 모은 돈으로 학교를 다녔다는 스님, 아직까지 기도를 할 때마다 기억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참회하게 된다는 서늘한 말씀들이 법문처럼 가슴에 꽂힌다. 나는 얼마만큼 나 자신도 모르는 죄를 짓고 살아왔을까? 꿀벌들이 참나무 가지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느라 허공을 털어내는 명징한 소리들과 마을의 진돗개에게 물려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강아지 발걸음에 실린 설렘들, 삼성각 벽에 그려진 호랑이의 눈동자에 서려 있는 죽은 이의 영혼들까지, 고요한 절집에도 보이지 않는 관계들이 저마다 얽혀 활기차다.“젊음도 잠깐이에요. 나이들 수록 베풀며 살아야 돼요.” 격의 없이 던지는 스님의 말씀이 하늘을 가르는 별똥별이 되어 내 안으로 떨어진다. 나도 모르게 몸과 입, 행동으로 쌓은 카르마들, 여전히 욕심에 휘둘려 부질없는 일에 집착하는 아둔함이 생채기를 낸다.대웅전 법당에서 백팔 배하는 나를 위해 스님은 일일이 법당 문들을 활짝 열어주시고 법구경까지 틀어주신다. ‘언제나 남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라. 남에게 베푸는 보시보다 더 큰 선은 없다’ 향기로운 법구경 말씀들이 숲과 계곡, 마음까지 촉촉하게 적신다. 불자가 아닌 친구는 참나무 그늘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나의 기도는 누군가의 수고로움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조낭희수필가하던 청소를 멈추고 시간을 내어주신 주지 스님, 흔쾌히 불령사까지 따라나서 준 친구가 소중한 탑이 되어 오늘을 밝힌다. 불령사가 불자들에게 사랑받는 곳이 되기를, 친구의 마음에도 법구경 한 구절이 바람처럼 머물다 가기를 기도한다. 속세를 등지며 살아간다고 해서 저절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 있든 나의 마음이 결과를 만든다.부담 없이 찾아간 사찰에서 수행과 명상이 얼마큼 내 삶에 자리하고 있는지 점검해 본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마음들, 화가 나거나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일조차,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 마음을 제대로 관찰하며 살리라.“배가 고프면 가다가 매운탕 한 그릇 사먹고 가세요. 내 배를 채워준 물고기를 위해 나무아미타불 정도는 해주고, 뭐든 맛있게 먹으면 돼요.”농담처럼 던지는 스님의 말씀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생활 속에서 ‘나무아미타불’ 염불 정도는 놓치지 말고 살아가라, 염불을 읊다 보면 일상은 조금씩 변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리라. 붓다의 말씀대로 사는 일은 아주 쉬울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자주자주 길을 잃는다. 애석하게도.

2020-06-29

진정한 행복의 척도는… 영천 부귀사(富貴寺)

산길을 접어들자 더이상 민가는 보이지 않고 차는 하염없이 숲을 빠져들듯 나아간다. 산은 적막감에 싸여 베일에 가려진 듯 조심스럽고, 무성한 나무들의 푸른 눈빛은 너무나 성성하여 두려움조차 인다.네비게이션은 태연하게 그 길을 고집하는데 친구와의 대화는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말수마저 줄어든다. 흔치 않은 경험이다. 잠시 그늘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연다. 커피를 마시며 애써 숲을 예찬해보지만 하오의 신록은 끊임없이 나를 불안 속으로 몰아넣는다. 용기를 내어 꾸역꾸역 낯선 이름, 부귀사를 찾아 산길을 오른다.부귀사는 신라 진평왕 13년(591년)에 혜림대사가 거조암과 동시에 창건한 1400년이라는 긴 역사를 지닌 절이다. 고려 때는 보조국사 지눌이 주석한 절로, 도중에 폐사되지 않고 명맥을 이어온 크게 알려지지 않은 고찰인 것이다. 산이 좋고 귀한 물이 있다는 산부수귀(山富水貴)로 알려져 약수는 아토피성 피부병에 효험이 탁월하고 각종 차맛을 내는 찻물로 유명할 만큼 수질이 뛰어나다고 한다.몇 개의 굽이를 지나자 커다란 바위 아래 부도밭이 보이고 그 너머로 아늑한 분지형 터에 부귀사가 자리하고 있다. 어떤 인위적인 꾸밈도 없이 환하게 트인 공간 위로 뻐꾸기 소리만 쏟아져 내린다. 신비스러울 만큼 작은 절이 고요를 삼키며 참선 중이다. 결코 낯설지 않은, 그런데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신세계에 이른 듯 경이롭다. 여느 사찰과는 달리 깊고 깊은 산중에 자리한 때 묻지 않은 절이다.불안했던 여정은 계단 위 보화루 앞에서 씻은 듯 사라지고 감탄사만 쏟아낸다. 소박하면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절이다. 보화루를 향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저절로 경건해진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은 없지만 보화루는 사찰의 마지막 문인 불이문에 해당한다. 저 해탈문을 들어서면 부처님의 나라, 불국정토에 이른다. 우측 담장 끝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큰 나무들의 눈빛도 넓고 깊다.어쩌면 부귀사에 오는 동안 우리를 두렵게 했던 나무들은 천왕문을 대신했던 것이 아닐까. 현란하고 삿된 마음 돌아보지 않고 잡담을 이어오는 우리를 향한 무언의 경고였으리. 산 아래에서부터 이어지는 일주문과 천왕문을 마음으로 읽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숲의 적막함만 보였던 것이다. 모든 나무와 숲, 자연에는 오염되지 않은 혜안을 가진 기운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아담한 보화루를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하면 부처님 세상에 닿을 수 있다. 누각 아래의 어두운 통로 저쪽 편은 마치 딴 세상처럼 밝고 환하다. 누각 밑의 어두움은 나의 어리석음을 뜻한다. 그 장애물을 극복해야 비로소 극락에 들어설 수 있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처럼 누각을 낮게 만든 것도 깊은 뜻이 숨어 있다. 머리를 숙이며 나를 내려놓고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즉 하심(下心)하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이다. 불교 공부에서 첫걸음이자 마지막이 곧 하심이다.그 동안 수도 없이 머리를 숙이고 절을 들어섰으며 법당에서의 백팔 배도 오로지 하심을 위한 기도였다. 그런데도 절문을 나서면서 그 간절함은 어디론가 흩어지고 일상은 또 허둥거리며 자기반성만 되풀이하느라 바쁘다. 절실함이나 일념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절 기행은 성숙한 외관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멀고 힘든 일이지만 하심하는 마음은 죽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하리라.보화루를 통과하는 마음이 더없이 차분하다. 경내에 들어서자 몸과 마음이 불국토임을 먼저 알고 편안해진다. 절은 어떤 인기척도 없고 오래된 석등 하나 외롭다. 극락전을 지키는 배롱나무 그늘 뒤편으로 하얗게 피어서 지고 있는 클로버 무리들과 알 수 없는 꽃향기로 경내는 아찔하다. 빈 절에 들어서면 몸가짐과 행동은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고향집에 돌아온 것처럼 따뜻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조낭희 수필가극락전에는 주존불인 아미타여래불을 중심으로 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삼존불 뒷벽에는 1754년에 제작된,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양식의 후불탱화 미타회탱이 보인다. 부족한 안목으로 탱화를 감상하기보다는 법당의 아늑한 분위기에 이끌려 가부좌를 하고 앉는다.불안과 공포, 평화와 행복을 오갔던 일련의 마음들을 모처럼 들여다본다. 일상을 따라다니던 생각과 잡념의 징그러운 고리들, 쓸어내고 비워내도 다시 쌓이는 탐욕들을 가만히 응시해 본다. 이내 마음이 고요해져 온다. 친구는 요사채 뜰에 앉아 시간을 즐기고 나는 수행기도도량인 부귀사의 청정한 맥박 소리를 듣는다.요사채를 돌아 작은 마당에 들어서니 요사채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스님은 잠시 포행이라도 나가신 듯하다. 뜰 위에 쌓여 있는 장작과 큰 채반에 널린 밥이 유월의 햇살 속에서 말라가고 있다. 수행 중인 스님의 삶과 첩첩 산중에 홀로 깨어 있는 작은 절이 내 안에 불을 밝힌다. 보화루 처마에 걸린 하얀 지등(紙燈)을 향해 두 손 모으는 내게 말씀 하나 들린다.‘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가지느냐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느냐에 달려 있다.’

2020-06-22

대구 도성사(道成寺)

예정되지 않는 만남과 계획 없는 여행이 좋을 때가 있다. 휴일 아침 날씨나 컨디션에 따라 불현듯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만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일 년에 고작 서너 번 정도의 만남이지만 그 시간들은 값지고 소중한 추억으로 이어진다.“네가 좋아할 만한 절을 발견했어. 천년고찰이 아니기에 재미있는 전설이나 볼거리는 없지만 꽤 느낌이 괜찮은 절이야. 너도 가보면 분명 좋아할 거야.”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작은 절을 떠올리며 나는 온갖 상상으로 행복해진다. 한 달째 허리통증을 호소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배려하는 친구의 마음씀이 더 고맙다. 성격이나 전공은 다르지만 정서적인 교감 하나로 언제나 든든한 친구, 그녀는 나를 믿고 아픈 몸을 움직였고 나는 그녀를 의지하며 운전대를 잡았다.천연기념물 제 1호인 도동 측백나무숲을 조금 지나자 좌측 편으로 절의 안내판이 보인다. 들꽃처럼 소박한 눈을 뜨고 길가를 지키는 생소한 이름이다. 이 길을 몇 번이나 오가며 관심없이 지나쳤던 나의 무심함이 부끄럽다. 낯설고 조심스럽던 길은 다리지라는 작은 연못 하나로 갑자기 익숙하고 친근해진다. 어릴 적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주 작고 정겨운 못이다.못 둑에 갈대가 필 무렵, 도시에서 공부를 하던 삼촌이 양동이 가득 우렁이를 잡아주던 오랜 기억 하나가 월척이 되어 낚인다. 못물을 빠져나간 진흙 속에서 팔딱거리던 미꾸라지들의 몸부림, 눈부시게 뽀얗던 삼촌의 발목, 산골짜기를 울리던 때묻지 않은 웃음들을 떠올리며 나는 오랫동안 전하지 못했던 안부를 전한다.그 많은 꿈들과 따스했던 눈빛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기억들로 내 영혼은 촉촉해져 온다. 추억은 변함없이 삶에 물기를 더해주는데 육신은 늙어가며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다. 친구의 심장에도 월든의 호수같은 무욕의 자연 하나 박혀 있나 보다. “좋재 좋재”만 되풀이 하던 친구도 생각에 잠겨 말이 없다.자동차는 한껏 무거워진 몸으로 가파른 시멘트 길을 오른다. 각박한 삶처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인 오르막이다.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다. 비탈길을 오르고 나니 한적한 솔밭 내리막길이 펼쳐지고 구릿빛으로 그을린 중년 남자가 산악용 자전거를 타고 맞은편에서 올라온다. 건강한 열정을 토해내는 숲길을 들어서기가 참으로 미안해진다.길은 혈류처럼 천혜의 자연 속으로 이어지고, 절은 숨바꼭질을 하듯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솔숲 그늘 길은 이따금씩 이글거리는 태양에 목덜미를 잡히기도 하면서 도성사를 찾아 나아간다. 밤꽃 향기가 스멀스멀 숲으로 숨어들 무렵 내리막길 끝에 제법 너른 하늘이 열리며 절이 있음을 알린다. 담장은 낮아서 넉넉하고 그 뒤로 나무로 만든 사립문이 도성사의 불이문을 대신한다.몸집 자그마한 여인 홀로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맨발로 걸어 나온다. 하늘과 숲과 하나가 되어 힐링 중인 그녀에게서 나무냄새가 날 것 같다. 정자에서 자전거와 쉬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도착하자 헬멧을 쓰고 폐달을 밟으며 다시 숲으로 향한다. 숲은 말없이 그들을 받아주고 그들은 힘들게 숲을 통과하여 또 도시로 향할 것이다.결코 적막하지 않은 일련의 풍경들을 높은 곳에서 대웅전이 내려다보고 있다. 긴 계단을 오르며 친구는 조심스럽게 할미꽃씨를 따서 주머니에 넣고 나는 우리가 올라온 길을 내려다본다. “요즘은 채송화, 할미꽃, 봉숭아 같은 꽃들이 좋아지더라.” 친구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또 다시 숲을 빠져 나오는 자전거들의 반짝거림을 응시한다. 사람들은 정자 앞에 멈춰 헬멧을 벗고 약속이나 한 듯 대웅전을 바라본다.조낭희 수필가평화가 흐르는 풍경, 무탈을 기원하는 대웅전, 어느 새 법당에 들어가 아픈 몸으로 삼배를 하는 친구, 이 모든 광경들이 보석처럼 눈부시다. 나도 뒤늦게 백팔 배를 시작한다. 친구의 건강이 빨리 회복될 수 있기를, 배낭을 메고 이 솔숲을 다시 걸어와 나란히 백팔 배할 수 있기를, 나의 기도는 소박하고 평범하지만 간절해진다.절을 하는 동안 삽질소리가 쉬지 않고 들린다. 서걱서걱 염불소리만큼 경건하게 만든다. 6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절에는 주지 스님의 살아있는 기도가 끊이지 않을 것만 같다. 백우당 쪽에서 젊은 처사님과 울력 중인 스님의 야심찬 정성을 위해 가만히 두 손을 모은 후, 친구를 찾아 나선다.칠성각에 부처님처럼 앉아 있는 친구의 얼굴에도 생기가 돈다. 우리에게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랴. 소소한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있고, 내 힘으로 열지 못하는 문 앞에 설 때까지 감성 충만한 풀꽃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의 생각들이 일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절을 내려온다.추억이 우리를 겸허하게 성장시키듯 도성사도 아름답고 건강한 염원들로 채워질 것이다. 오층석탑은 교신이라도 하듯 저 멀리 팔공산 레이더 기지를 응시하고, 스님은 또 손수레를 끌고 유월의 햇살 속을 걸어가신다. 가까이서 팔공댐은 저토록 태평스레 졸고 있는데도.

2020-06-15

저 아름다운 자유의지들… 영천 죽림사(竹林寺)

누적된 피로로 절을 찾아가는 몸과 마음이 밝지만은 않다. 결국은 네비게이션의 지시를 몇 번이나 놓치고 헤매듯 죽림사를 찾아간다. 차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어수선한 도로를 달리다 어느 사이 산속으로 숨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죽림사 일주문 앞에서 나는 엉클어진 내면의 길을 보고 말았다.양쪽으로 대나무 숲을 거느린 쭉 뻗은 길이 화강암으로 만든 배흘림기둥 안으로 이어진다. 절은 은해사 말사로 신라 헌덕왕 1년(809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사찰이 전소되어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가 또 다시 6.25 전쟁을 겪으며 폐사되고 만다. 그 뒤 1990년 성수 주지 스님이 대웅전을 지으면서 대대적인 불사가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고 나를 반기는 건 따가운 유월의 햇살뿐이다. 언덕길을 오르는 몸이 유난히 무거운데 드디어 죽림사가 보인다. 뜻밖에 절 앞의 작은 주차장에 제법 많은 차들이 모여 있다. 가파른 돌계단 위에서 보화루가 조금은 위압적으로 내려다본다.오천관음불전이라는 또 다른 현판을 단 보화루를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하자 극락보전 앞 삼층석탑이 연등에 싸여 화사하다. 눈이 부실 만큼 티끌 한 점 없이 가볍게 허공에서 일렁이는 연등들, 나풀대는 저 수많은 ‘자유의지들’을 향해 나는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다.마당에서 담소를 나누던 주지 스님이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소탈한 말투로 먼저 인사를 건네며 맞아주신다. 낯설지 않은 편안함이 일순간 지친 시간들을 몰아내고, 태어난 지 한 달이 막 지난 강아지 두 마리의 재롱에 빠져 사찰에 온 걸 잊는다. 강아지와 노는 스님의 장난스런 손길에는 애정이 가득하다.불자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격식과 권위의 옷은 일찌감치 벗어버린 듯하다. 순진무구한 강아지와 선지 주지 스님의 사람 좋은 웃음이 지친 발걸음을 쉬어가게 하는 절, 깊은 산중이 아니라서 그런지 절 일을 돕는 보살님과 처사님들도 많아 생동감이 느껴진다.극락보전 법당으로 향하는 등 뒤로 날씨만큼 쾌청한 보살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참배 후 꼭 공양하고 가세요.” 모처럼 절에서 들어보는 사람 반기는 소리, 인간다운 따뜻함이 살아 있는 사찰이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내 걸음에 비로소 작은 연등이 걸린다. 백팔 배를 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마음은 잠시, 절을 하는 동안 몸은 점차 가벼워져 온다.지난 한 달간은 힘에 버거울 만큼 손님을 맞느라 기력이 쇠하여 멘탈이 붕괴되고 말았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벗어나고자 전원으로 왔는데 그 새로운 환경이 덜미가 되어 평온했던 삶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모처럼 시간을 거슬러 삭막한 도시 이야기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도 체력적으로 한계가 올 거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자고나면 피로가 풀린다는 착각은 내 몸을 함부로 평가하는 오만이었다. 육신을 보살피지 않은 탓에 모든 관계들이 부담스럽고 무의미해지기 시작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한없는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다. 전원에도 삶이 따라온다는 것을 간과했었다. 정신과 육체의 예민함을 알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고 말았던 것이다. 휘슬 소리는 늘 아픔과 함께 왔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건 살아 있음을 뜻하며 여유로움을 내포한다고 위안해 보지만 쉽지 않았다. 나의 백팔 배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던 걸가? 스스로 나약한 존재가 아니길 바라며 기운을 담아 백팔 배를 한다.조낭희 수필가수많은 시행착오들을 통해 좀 더 성장하고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늘 인스턴트식 자기 위안으로 끝낸 건 아니었던가. 절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자기 점검은 간절해진다.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멀리하고 때로는 대결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크고 육중한 몸을 금빛으로 숨기고 빛나는 철조여래좌상, 형상화된 부처님이지만 분명 자기만의 아트만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한동안 관계에서 벗어나 내면을 응시하라는 답을 안고 법당을 나선다. 극락보전 앞에서 눈과 귀, 입을 가린 귀여운 동자상 셋이 나를 붙든다. 겸허하게 두 눈 가리고, 두 귀를 막으며, 말을 줄이는 절제성, 그게 사랑이라고 말한다. 되도록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며 고귀한 생각 속에 나를 노출시키고 싶다.모처럼 공양간에서 맛보는 절밥도 감사하다. 뽀드득 소리 나도록 내 그릇까지 씻어주는 불자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몸에 배인 익숙한 정성의 언어들, 나는 그녀의 오래된 기도를 읽는다. 설익은 배려와 정성은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 남을 위하는 일은 나를 사랑하는 데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지쳐 있던 세포가 깨어나고 다시 아름다운 생각들로 채워진다. 눈부신 생각들이 삶에 잔뿌리를 내리고 무성한 가지를 뻗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돌아오는 길에는 끊임없이 하품만 따라온다. 삶은 수많은 장애물과의 싸움인 걸 어찌하겠는가.

2020-06-08

태극나비를 본 적이 있는가… 밀양 무봉사(舞鳳寺)

이름만으로도 끌리는 도시 밀양, 영남루 바로 옆에 무봉사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불리는 영남루에는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어수선한데, 그곳에서 살짝 돌아 앉은 무봉사 가는 길은 대숲이 밀양강을 막아주어 아늑하고 호젓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 위로 해탈문을 대신하는 무량문(無量門)이 보이고 작은 문안으로 하늘을 나는 봉황 모형이 선명하게 카메라에 잡힌다.무봉사는 신라 혜공왕 9년(773년) 법조(法照)가 세운 절이다. 지금의 영남루 자리에는 영남사라는 절이 있었지만 절이 타고 없어지자, 당시 무봉암이었던 절을 무봉사로 승격시키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여러 차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무봉사는 봉황이 춤추는 모습인 이곳 지형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무봉사에는 재미있는 전설도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힘들 때, 날개에 태극무늬가 있는 나비가 무봉사가 있는 아동산을 날아다니다 사라진 후 고려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나비가 나타날 때마다 경사스러운 일들이 생겨나, 지금도 태극나비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무봉사를 참배한다고 한다.일주문에서부터 가파른 계단이 이어지지만 우측으로 밀양강변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절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 정갈하고 고요하다. 대웅전에서 피부가 맑고 고운 비구니스님이 예불을 끝내고 막 나오실 것만 같은데, 아름드리나무들이 사찰을 지키고 봉황 두 마리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나비를 보지 않아도 길한 기운들이 내게로 전해져 올 것만 같다.참배는 되도록 짧게 끝내라는 안내문이 대웅전 법당 앞에 선 나를 주춤거리게 만든다. 매 주 산사를 찾아 백팔 배 하겠노라는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아 남편과 나란히 백팔 배를 시작한다. 손 소독제를 비치하고 참배자들이 직접 연락처를 기입하도록 방명록을 준비해 둔 세심함까지, 대웅전 법당 마루도 유난히 정갈하여 구석구석 여성성이 느껴지는 사찰이다.화강암으로 만든 보물 제 493호 무봉사 석조여래좌상과 5구의 화불이 장식된 광배는 조각솜씨가 뛰어나고 화려하다. 법당 앞에는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당당히 푸르고, 지장전 가는 모퉁이길 쪽에서 바라보는 절의 풍경도 멋스럽다. 무엇보다 절과 이어지는 두 갈래의 오솔길이 유혹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저만큼 걷다 돌아서고 말았다.운이 좋게 포행을 가시려던 스님과 마주친다. 비구니 스님이 아니라 평온한 인상의 비구 스님이다. 인사를 나누고 스님과 함께 둘레길을 걷는다. 스님은 아동산과 무봉사의 역사, 밀양읍성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작은 절이지만 종각이 따로 있어 무봉사의 봉황이 날아가 알을 품을 수 있도록 아침저녁으로 타종을 하신다는 말씀까지 친절히 들려주신다.둘레길은 약간의 가파름을 숨기고 아동산 허리를 감고 이어진다. 초록은 녹음으로 변해 햇살을 차단하고 푸른 그늘을 드리운 오솔길을 만들고 있었다. 인적 없는 낯선 숲길이 스님이 계셔 든든하다. 벌걸음이 빠른 스님은 저만치 앞서 걷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마치 태극무늬 나비 한 마리 왔다가 사라진 것처럼.모처럼 둘레길을 걸을 수 있는 이 시간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둘만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은 요즘, 함께 다녔던 절과 숲, 도시를 떠난 일 년간의 삶을 돌아본다. 전원생활을 반대하던 남편이 쉽게 적응해 준 것도, 번번이 절 기행에 동참해주며 낮고 겸허한 자세로 법당에 들어서는 점도 고맙다. 그로 인해 공통의 관심거리가 생겼으며 대화도 많아졌다.이따금씩 알 수 없는 향기가 날아와 대화는 자주 멈춰야 했다.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고 돌아보게 만든 것은 백화등 향기였다. 나무들을 감고 울창하게 정글을 이루는 백화등 꽃무리에 탄성을 쏟아낸다. 수백 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황홀하다. 적어도 백화등 덩굴에 감겨 질식할 것만 같은 나무들의 창백한 표정이 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둠을 지닌 안쓰러운 생동감과 저 아득한 몸짓들, 내 안에서 한 마리 나비가 파닥거린다.조낭희 수필가밀양읍성 동문이 보일 무렵 우리는 성곽을 밟으며 다시 무봉사 쪽으로 향한다. 산책길 초입 쉼터에서 움츠리고 있던 한 남자가 생각났다. 햇빛 하나 들지 않은 어둠을 벗 삼아 강물의 소용돌이에 쓸려버릴 듯 작은 체구의 그가 떠오른다. 그는 어쩌면 태극나비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나는 왜 우리와 함께 걷자고 말하지 못했을까. 선택은 그의 몫이지만. 일상에서 만난 작고 소소한 즐거움이 지친 날개에 힘을 실어 줄 때가 많다. 운이 좋아 무봉사 타종 소리가 그의 가슴에 스며들고 젖어들어 그의 어둠을 털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행운이란 그렇게 아무도 몰래 조용히 가슴을 흔들고 가는 것이리라.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그가 날개 꺾인 한 마리 태극나비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찾아 이곳까지 날아온 전설 속의 나비를 나는 마음이 어두워 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백화등 향기는 더 이상 따라 오지 않았고, 무봉사는 말없이 밀양강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2020-06-01

관계에서 보다 자유로워지기를… 청송 주왕암(周王庵)

거대한 바위와 가파른 절벽, 기암 단애라 불리는 바위 7개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서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불리는 주왕산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불과 물, 시간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합작품으로 경관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가치도 높다.신비스런 계곡을 따라 걷는 탐방로는 완만하고 볼거리가 많아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 대전사에서 10여분 쯤 걷다 갈림길에서 우측 자하교를 지나면 운치 있는 돌계단이 나타나고 호젓한 오솔길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은 아쉬울 만큼 짧게 끝이 나고, 바위협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주왕암이 보인다.대한불교 조계종 대전사의 부속암자 주왕암은 919년(태조 2년)에 눌옹이 대전사와 함께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이곳에 은거하였던 주왕을 기리기 위하여 주왕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창건 이후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기왓장으로 쌓아올린 담장 위 작은 돌멩이들이 운치를 더하는 오솔길은 가학루 앞에서 멈추고 만다. 끌리듯 가학루를 들어서면 우람한 바위 절벽 아래 아늑하게 절이 앉아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띤 건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석불좌상이다. 미소가 넉넉해 보이는 석불 앞에서 두 손을 모으지만, 목에 걸린 금빛 목걸이가 자꾸 눈에 거슬린다. 어울리지 않은 세속적인 장신구로 인해 석불의 신성함은 사라지고 호객하듯 격이 떨어져 보인다.착잡한 마음으로 높은 축대 위에 자리 잡은 나한전으로 오른다. 계단 주변을 금낭화가 허리 굽혀 불자들를 맞는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꽃말처럼 다소곳하며 지고지순한 자태에 암자는 환하다. 금낭화가 없었더라면 비탈진 계곡에 위치한 암자는 훨씬 음습하고 쓸쓸해 보였으리라. 금낭화로 인해 가파른 돌계단은 수미산을 오르듯 경건해진다.요사채에서 나오던 비구니 스님이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네신다. 외진 암자를 지키는 바위 같은 분이시리라. 스님은 나한전을 들러 이내 주왕굴로 총총히 사라지고 그 뒷모습을 금낭화가 배웅을 한다. 짧지만 따뜻한 일련의 풍경들이 내 마음까지 밝힌다.적막한 산속에 비구니 스님과 금낭화의 아름다운 동거를 상상한다. 이른 새벽 법당에 불이 켜지면 금낭화도 눈을 뜨고 주왕암의 하루가 시작되리라. 날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얻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혼자서 가는 길이 멀고 힘들 때, 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보듬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바위산에 앉아 있는 전각들처럼 진부한 삶을 택하지 않은 스님의 길 또한 고단했으리라. 쓸쓸한 바람벽에 피어나는, 귀밑 하얀 금낭화의 오염되지 않은 모습에서 스님은 서방의 정토를 보았을지 모르고, 금낭화는 아침저녁 스님의 예불 소리 들으며 순결한 꽃빛을 피워냈을지 모른다.인생은 수많은 관계와 관계의 연속이다. 관계 속에서 상처를 안게 되면 영혼은 고독해지기 마련이며, 그 상처 난 마음을 제대로 치유해주는 것도 역시 관계이다. 높다랗게 앉아 있는 산신각과 칠성각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내 주변을 돌아본다.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요즘은 자연을 가장 든든한 벗으로 삼고 있다. 아무리 캄캄해도 자연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진분홍 복주머니 모양의 꽃을 단 금낭화가 허리 굽혀 사랑을 전하는데 느닷없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무벤치에 앉아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불자가 아닌데도 자식들을 위해 난생처음 불전을 놓고 절을 했노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책무처럼 한평생 쏟아 붓고도, 어쩌면 제대로 쏟아 붓지 못해서 늘 미진하기만 한 그의 부정(父情)이 애틋하다.문도 없이 오두막처럼 짜여진 산신각과 한 사람만 받아줄 만큼 협소한 칠성각은 욕심이 없는데 인간의 마음은 끝이 없다. 내려오는 길에 나한전에 들러 백팔 배를 시작한다. 조선 후기 작품인 석가여래 삼존불과 영험하다는 나한들, 색감 고운 영산회상도까지 작은 법당에는 그윽한 시선들로 가득하다. 나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관계에서 좀더 자유로워지길 기도한다.조낭희 수필가법당을 나설 때 절은 한결 편안하고 따뜻하게 보인다. 주왕굴에 가기 위해 협곡 사이로 난 철제 계단을 오르는데 스님의 독경소리가 낭랑하게 마중을 나온다. 당나라 때 주도라는 사람이 스스로 주왕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패하자 주왕산으로 숨어 들어온 뒤, 주왕굴에 은거하다 굴 입구에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 발각되어 신라의 마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조금 전 인사를 나누었던 비구니 스님의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뒷모습이 보인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를 닮은 스님 뒤에서 여성 불자 한 분이 쉬지 않고 절을 한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금낭화가 다시 보이고, 더러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연민으로 다가올 때가 있어 나도 절을 시작한다.다리가 후들거린다. 스님은 꽤 긴 시간 예불을 드리고 폭포수는 하염없이 떨어진다. 협곡을 빠져나오는 등 뒤로 스님의 독경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2020-05-25

작은 것에 감사하며… 군위 지보사(持寶寺)

해발 437미터의 선방산(船放山)은 마치 배를 띄운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전에 의하면 선방산 꼭대기에 배를 띄우고 놀 만큼 큰 못이 있었지만 당나라 장수들이 그곳에서 뱃놀이를 즐기고는 못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설화를 간직한 그곳에 지보사가 있다.지보사(持寶寺)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할 뿐 그 이후 근대까지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그 옛날에도 그리 큰 절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만 지보사에는 이름처럼 세 가지 보배가 있었다.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 맷돌과 사람 열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가마솥 그리고 청동향로이다. 향로 대신 단청의 물감으로 쓰이는 오색 흙을 꼽는 경우도 있지만 향로만 은해사 성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송홧가루 날리는 오월,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텅 비어 있는 주차장을 두고 극락교 앞 그늘에 차를 세운 후 다리를 건넌다. 큰 나무 그늘이 내 발등을 서늘하게 적셔주고 곧게 뻗은 길은 다시 돌계단으로 이어진다.“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을 좌우한다.”계단 입구에 새겨진 글이 마음 밭을 돌아보게 한다. 첫 느낌이 가지런한 절이다. 계단 위에서 은행나무가 사천왕처럼 내려다볼 뿐 한낮의 풍경은 모든 게 멎어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은행나무 뒤로 아담한 루(樓)가 막아서는 작은 뜰, 한쪽에는 삼층석탑 하나가 투명한 햇살에 몸을 씻고 있다.가지가 휘어지도록 핀 불두화, 막 씻고 나온 듯한 순백의 얼굴빛과 마주하며 나는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무언가로 꽉 찬 절은 비밀의 화원처럼 조심스럽다. 저들만의 따스한 언어들이 두런두런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작고 경이로운 세계로 초대받은 이 순간조차 우연과 필연으로 예정된 약속이었으리.불두화 한 그루 심고 잠들었던 어제 일을 떠올린다. 이토록 많은 불두화를 만날 운명이었을까. 종자를 맺지 못하는 애잔한 불두화, 그 순결한 아름다움에 빠지노라면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숨소리 낮춰가며 사진을 찍고 한참을 서성인다. 주지 스님이 어떤 분인지 뵙지 않아도 그려진다.작은 소읍에 위치한, 적요처럼 말간 추억들이 꿈꾸듯 살아가는 절, 어디선가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른다. 나는 오월의 품에 안겨 또 다른 세계로 빠져든다. 별 기대없이 찾아온 내게 절은 빛바랜 고향처럼 푸근하다.조각미가 뛰어난 고려시대 석탑, 보물 제 682호 삼층석탑의 시선도 부드럽다. 대웅전을 비켜나 두 단 아래 서 있지만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구석구석 시선 닿은 곳마다 부처님의 섬세한 눈길이 머물고 커다란 은행나무는 대웅전만큼이나 든든하다. 섬세함과 고요함, 소박함까지 갖춘 지보사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향수가 어룽거린다.욕심 없는 평온함이 경내를 가득 메우는 이 시간, 현판도 없는 작은 루에 올라 시집을 읽으며 한껏 여유를 부리고도 싶다. 산 아래 정경도 궁금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조심스럽다. 절은 열린 듯 편안하고 비밀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햇살이 따가운 줄도 모르고 행복에 취해 마당을 거니는 이 소박한 특권은 누가 보내주셨을까. 작은 자갈돌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고 풍경이 간헐적으로 울다 멈추는 처마 아래에서 나는 한량없는 감사함에 젖는다. 수많은 경쟁 속에서 키 재기를 하며 살아왔던 눈 먼 날들, 어쩌면 그런 시간들이 있어 지금의 작은 행복에 감사할 줄 아는지도 모른다.대웅전 법당에 들어가 석조아미타여래 삼존불 앞에서 백팔 배를 시작한다. ‘비록 적게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종무소 입구에 걸려 있던 글이 법당까지 따라왔다. 손에 잡히지도 않은 것들을 끝없이 좇으며 쉼 없이 달려왔던 가여운 내 육신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은 언제나 작고 소박한 것들이었다.삼존불 옆으로 보이는 일타 큰스님의 인자한 미소가 빈 법당을 더 푸근하게 밝힌다. 법당 문 앞에 고여 있는 투명한 햇살, 더 이상 울지 않는 풍경, 모두가 숨을 죽이고 참선 중이다.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안기듯 자리 잡은 루(樓)의 처마 끝에는 빛바랜 염원들이 걸려 있다.조낭희 수필가그 아래로 조금 전 내가 들어왔던,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는 출구가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면 출구는 다시 입구가 되어 바쁜 시간 속으로 이어지리라. 지보사에서 만난 오월의 말씀들은 까마득히 깊다.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면 아주 낮은 자세로 걸어오던, 작아서 혹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말씀들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해마다 오월이 오면 지보사를 찾으리라. 내 안에 든 영원성을 잊고 만족할 줄 모를 때, 손 안에 움켜쥔 젖은 아픔들이 되살아날 때도 지보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때도 나의 기도는 언제나 한결같기를 바란다.“교만하지 않고 작은 일에 감사하며, 여름 풀냄새 같은 기도로 살아가게 해 주소서.”

2020-05-18

오래된 것들은 기도가 되어… 대구 북지장사(北地藏寺)

그는 백중날 태어난 크리스천이다. 산사기행을 떠나는 나에게 자기 몫의 기도를 부탁한다며 입버릇처럼 말할 때마다 나는 흘려들었다. 서둘러 떠날 걸 예감조차 못했을 그가 부처님 앞에서 무슨 기도를 하고 싶었을까.농담처럼 주고받던 말들이 가끔은 하나의 의미가 되어 우리를 아프게 할 때가 있다. 북지장사 가는 소나무숲길에 들어서며 그가 무심코 흘린 말들을 나는 또 낚고 있다. 훌훌 털고 일어나지 못했던 그는 가끔씩 휘파람새가 되어 나타나거나 꿈결에 스쳐가듯 다녀가는 게 전부였지만, 그럴 때마다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레테의 강을 건너는 자는 모든 것을 망각할 텐데, 그와 관련된 것들은 오로지 살아 있는 자의 몫으로 남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까지도. 떠난 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바람결에 떠도는 독백 같은 언어가 되어 주변을 배회하는 것이다. 북지장사 오르는 소나무숲은 변함없이 평화로운데 나는 생각이 많아진다.북지장사는 동화사보다 8년 먼저인 신라 소지왕 7년(485년) 극달화상이 창건했다. 한 때는 절의 밭이 200결이나 되었으며 동화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정도로 매우 큰 절이었다. 19세기 초 동화사의 부속암자로 편입될 만큼 사세가 기울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중창불사와 함께 삼국유사에 기록됐던 ‘공산 지장사’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이태 전, 그가 희망의 끈을 놓고 이별의 강가에 바투 앉아 있을 때 나는 이곳을 찾아왔다. 나의 작은 기도가 새롭고 청정한 생명의 다리가 되어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소나무 숲길을 걸어 대웅전에서 백팔 배를 하고 다시 소나무 숲길을 걸어서 내려오던 그날, 나는 텃밭에서 키운 채소 파는 할머니와 잡담을 나누며 웃다가 내려왔다. 삶은 공허하고 부조리한 것이다.계단 위 낡고 소박한 용호문이 흙벽을 지탱하며 서 있다. 변함이 없다. 오래된 시골집 대문간처럼 보이지만 세속을 벗어나 진리의 세계로 첫발을 대딛는 천왕문 겸 불이문인 셈이다. 그 너머로 보이는 보물 제 805호 지장전은 별천지처럼 찬란하다. 꽃잔디가 숨넘어갈 듯 절정을 토해내고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불자들을 맞는다.관세음보살과 삼보에 귀의하고, 악업을 금하며 탐, 진, 치 삼독을 멸하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기원한다는 주문이 오늘도 그날처럼 가슴을 헤젓는다. 익숙하다는 건 길들여진다는 것을 뜻한다. 오래 알아온 사이일수록 자연스레 서로에게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불과 몇 년 만에 대웅전에 이어 또 다른 당우가 새롭게 완공되어 규모가 커져 있지만 북지장사는 여전히 편안하다.가까이 있는 지장전보다 대웅전 앞 배롱나무가 나목인 채로 붉은 연등을 달고 먼저 달려 나와 반긴다. 갑자기 내 안에 연등 하나 켜진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아니라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는 대웅전에서 삼배의 예를 갖춘다. 백팔 배로 친구의 완쾌를 빌었던 그 작은 법당에는 오월이 길을 잃지도 않고 찾아와 침묵을 다스리고 있다.눈부시도록 화사한 이 봄날, 무언가 허전하다. 두 개의 대웅전 현판을 향한 석탑의 눈빛이 아련하게 흔들린다. 한 때의 영화를 떠올리며 감자꽃 같은 눈물을 그렁거리는 석탑 위에는 송홧가루만 날린다. 올해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석가탄신일 행사조차 윤사월로 미뤄진 탓일까. 술렁거릴 거라 여겼던 절간의 풍경은 뜻밖에 차분하다.근처에서 환담을 나누던 젊은 스님이 방으로 들어가신다. 편리함과 바꾼 스님의 정신세계만큼이나 오래된 요사채가 눈길을 끈다. 물결치듯 기울어진 지붕, 마루도 없는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진 철 지난 털신 한 켤레에 마음이 젖는다. 남루해 보일만큼 낡은 건물은 너와집을 연상시킨다. 운치 있게 기왓장을 올려놓은 키 낮은 지붕 아래 작은 종무소도 있다.아직은 우리에게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일깨워주는 따스한 풍경들,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한 처마 낮은 집, 저 문턱을 나서면서부터 우리는 탐욕에 길들여졌는지 모른다. 허기지듯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느라 늘 지쳐 있었다. 오래된 것들이 기도가 되어 발길을 붙드는 곳, 그것이 북지장사가 지닌 매력이다.조낭희 수필가한 차례 마음을 정화시키고 지장전으로 들어선다. 정면 한 칸, 측면 두 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을 한 지장전의 출입문은 특이하게도 측면의 뒤쪽 편에 붙어 있다. 텅 빈 법당을 석조지장보살좌상이 홀로 지키고 있다. 민머리에 늘어진 두 귀, 왼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계신 부처님은 지장전 뒤뜰 땅 속에 묻혔다가 발견된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이다.죽은 뒤의 육도윤회나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구제해 준다는 지장보살을 향하여 백팔 배를 시작한다. 그리움만 남기고 서둘러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것들, 몇 번의 봄을 보내고 나면 내 늑골에 살점처럼 돋아날, 애잔한 것들이 있어 우리는 겸허함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마음이 가볍다. 지장전을 나오는데 새 한 마리 지붕에 앉았다 날아간다. 잠시 천수경이 출렁, 다시 송홧가루 날린다.

2020-05-11

눈길이 머무는 모든 곳에는… 달성 용연사(龍淵寺)

비파 비(琵), 거문고 슬(瑟), 비슬산 가는 길은 벚꽃이 지기가 무섭게 화려한 영산홍들이 길을 연다. 비슬산은 갈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으며, 명산답게 이름의 유래도 다양하다. 나는 인도의 힌두교 신 ‘비슈누’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왔다는 설을 좋아한다. 왠지 먼 나라의 신화를 떠올리면 평범하던 산은 더 깊고 신비로워 보인다. 8대 적멸보궁으로 이름난 용연사가 그 안에 있다.5대 적멸보궁에 건봉사, 도리사, 용연사를 넣으면 8대 적멸보궁이다. 용연사는 912년(신덕왕 1년)에 보양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이 절터에 용이 살던 곳이라 용연사로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에 사명대사의 명을 받고 인잠, 탄옥, 경천 등이 재건하였다. 1650년에 일어난 화재로 보광루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으나 다시 중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비슬산 용연사 자운문(琵瑟山 龍淵寺 慈雲門)’ 일주문 현판은 여느 사찰보다 이색적인데 그곳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없다. 살짝 돌아앉은 일주문은 제 구실을 못하고, 오르다 보면 좌측으로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보물 제539호 석조계단(石造戒壇)이 있는 적멸보궁 가는 길, 우측으로는 극락전을 비롯한 많은 당우들이 기다리고 있다.용현사의 백미는 적멸보궁이라는 것을 모르는지 대부분 우측길로 접어든다. 극락교를 지나 천왕문을 통과하는데 수많은 염원을 담은 문구들이 철재 난간에 빼곡히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사업 성취, 의대 합격, 글씨체만큼이나 다양한 소원들, 재미삼아 걸어놓았을 소원들이 승자독식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듯 치열하다. ‘우리 아빠 아침에만 출근하게 해주세요.’ 어린 아이의 비뚠 글씨체에 눈길이 머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내게 간절한 소원 하나 있다면 함부로 발설하지 않으리라. 마음속에서 기도를 먹고 자라는 소원은 눈빛과 행동으로도 그 완곡함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미끄러지기를 좋아하는 언어에 나의 간절한 마음을 싣고 싶지는 않다. 영험함을 경험하고 싶다면 몰래 하는 사랑처럼 은밀하고도 진중하게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누하진입식으로 안양루를 지나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 극락전을 지키는 삼층석탑 난간에도 수많은 소원종이 댕강거리며 맞는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삼층 석탑의 우아한 자태와는 달리 고만고만한 소원종들의 아우성으로 마음은 심란하다. 세상의 모든 바람이 이곳에 모여 든 것 같다.보물 제 1813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극락전에서 불자들이 기도를 할 때도 소원종은 쉬지 않고 저만의 방식으로 기도를 한다. 바람이 거칠어지면 소원종의 호흡도 벅차다. 많이 펄럭일수록 그들의 기도가 간절히 전해진다고 믿는 히말라야 산기슭의 룽다와 타르쵸처럼, 그들은 경쟁하듯 시끄럽다.다시 극락교를 건너 적멸보궁으로 향한다. 자연석 계단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딴 세상처럼 한적하다. 오래된 나무들의 미소 사이로 보이는 벤치에는 4월의 고요가 뒹굴고 숲은 싱그럽다. 크고 작은 돌탑들도 보인다. 강한 바람에도 누설되지 않을 돌탑의 소원이야말로 궁금하다.적멸보궁은 용연사를 떠나 그 안에 섬이 되어 또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파른 계단 위로 보광루가 보이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둔 보물 제 539호 금강계단(金剛戒壇)을 향하는 마음이 자꾸 앞서 걷는다. 계단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해지는 성스러운 곳이다.조낭희 수필가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적멸보궁 문은 일시적으로 잠겨 있다. 유리문에 얼굴을 대고 법당을 훔쳐본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초연한 세계 하나가 창문 너머에 존재한다.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그곳, 적멸보궁에서 기도하면 가까이 갈 수 있을까.뜰 앞을 거니는 내게 담장 너머로 연분홍 철쭉들이 사랑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저 여린 나뭇가지 끝에도 무한한 애정을 쏟는 신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 철쭉은 꽃의 이미지를 벗고 유순하고, 금강계단 주변은 온통 4월의 기도로 평화롭다. 이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을 감지하며 나는 비슈누 신을 떠올린다.우주의 질서와 인류를 보호하는 신, 두루 꽉 차다는 뜻을 지닌 비슈누를 ‘깊은 내부에서 우주 전체를 들고 있는 신’이라 괴테는 표현했다.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금강계단을 향해서인지 숲을 향해서인지 분명치는 않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들과 신화에 대한 경의였는지 모른다.마당 건너편에 있는 보광루 법당에 올라 백팔 배를 하는 동안 사리탑이 내 안으로 성큼 들어와 앉고 마음은 철쭉빛으로 물든다. 천왕문 난간에 매달려 있던 소원글들이 또 다시 비집고 들어온다. 작은 흥밋거리로 치부했던 나의 무례함을 사죄한다. 어쩌면 그들은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신산한 언어들의 보챔을 잠시라도 외면했던 순간을 반성한다.그리고 기도한다. 떨어지는 햇살 속에도, 참새의 작은 부리 끝에도, 눈길이 머무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과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2020-04-27

사월, 충만한 영혼이 꽃 피고… 함양 벽송사(碧松寺)

비가 그친 지리산은 봄이 한창이다. 저마다 다른 연둣빛 사이로 산벚꽃이 어울려 꽃길을 연다. 민족상잔의 비극이 서려 있는 골짜기에도 4월의 유순함이 피어나는데 벽송사 가는 길은 가파르기만 하다.지리산 칠선계곡에 위치한 벽송사는 1520년(중종 15년) 벽송 지엄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정통 조사들이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룬 유서 깊은 사찰이다. 하지만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6·25때는 빨치산 토벌을 위해 방화된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이곳은 판소리 여섯 마당 중 ‘변강쇠가’의 배경이기도 하다. 변강쇠가 나무는 하지 않고 장승을 뽑아 땔감으로 쓰자, 장승 우두머리가 통문을 돌려 팔도의 장승을 불러 모아 변강쇠를 혼내준다는 이야기이다. 부당한 대접과 억압을 받는 민중을 장승에 비유하고 변강쇠를 기층 질서로 풍자한 민중문학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벽송사에도 밤나무로 만든 한 쌍의 목장승이 보호각 안에 서 있다. 왼쪽 여장승은 잡귀 출입을 통제하는 금호장군(禁護將軍)으로 산불에 윗부분이 타서 파손이 심하다. 오른쪽 남장승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대신(護法大神)으로 짱구모양의 민머리에 돌출된 큰 눈과 주먹코, 합죽한 입, 무성한 수염으로 표정이 풍부하면서도 익살스럽다.변강쇠와 옹녀의 외설적인 이야기를 떠올리면 장승과 벽송사의 만남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하지만 질박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한 쌍의 목장승이 사천왕이나 인왕의 역할을 대신했다는 걸 알면 궁금증이 풀린다. 불교와 민속신앙의 자연스런 융합인 셈이다.세 단으로 조성된 벽송사의 첫 느낌은 여느 사찰과 다르다. 절의 중심에는 주법당이 아니라 벽송선원이 자리하여 맑고 고요한 기운을 뿜어낸다. 선불교의 종가다운 배치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내로라하는 대사들을 배출한 사찰치고는 소박하다. 흐트러짐 없는 선원의 이미지가 제대로 살아있어 발걸음은 저절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간월루와 선원 사이로 고독한 눈물처럼 서 있는 홍도화가 방문객을 응시한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낮은 탄성이 터지고 말았다. 저 대책 없는 붉음 앞에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한옥을 배경으로 홍도화는 너무나 고혹적이다. 화려하면서도 절제미가 돋보이는, 이토록 이지적인 붉음을 본 적이 있는가.선원을 돌아서 가는 발길이 까닭 없이 바쁘다. 유일하게 단청옷을 입은 원통전과 산신각은 겸허히 뒤로 물러나 있다. 안정감 있는 배치에 감탄하면서도 내 눈은 온통 선원 뒤뜰의 봄꽃에 팔려 있다. 붉게 하혈을 시작하는 동백과 청승스러울 만큼 창백한 돌배나무꽃, 우아함을 갖춘 키 큰 자목련까지, 홍도화와 어울려 만다라가 따로 없다. 모처럼 내린 봄비에도 벽송사 풍경들은 지나치게 차분하다.젖은 봄꽃들의 자태에서 숭고함이 듣는다. 벽송사는 이름난 선원답게 뒤안의 분위기까지 완벽하다. 비가 온 뒤의 4월, 함양에서 오도재를 넘고 추성마을을 지나면서 쏟아냈던 감탄들과는 또 다르다. 아찔한 계절, 중심을 향해 살아가는 벽송사 풍경에 취해 나는 한참을 뒤뜰에서 서성이고, 곧게 뻗은 도인송은 그런 나를 지긋이 내려다본다.높은 축대 위에서 도인송을 향한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미인송의 구애도 눈물겹다. 높다란 지지대에 의지하면서도 아슬아슬 기울어진 채 살아가는 미인송의 한결같은 마음과 도인송의 곧은 정신이 살아 있는 죽비가 되어 준엄하게 꾸짖는다. 삶에는 수많은 유혹이 따른다. 나는 얼마만큼의 진중한 자세로 나다움을 지키려 노력해 왔는가.돌계단을 오르자 보물 제 474호 삼층석탑이 홀로 너른 터를 지킨다.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초에 조성되었을 거라 보는 석탑은 미인송의 기울어진 목덜미를 외면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강인한 홀로는 언제나 눈길을 끄는 법이다. 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옛날에는 분명 이곳에 금당이 있었으리라.뒤늦게 원통전 법당 문고리를 잡는 손이 떨려온다. 작고 아늑한 법당, 백팔 배를 하는 몸이 신기할 만큼 가볍다. 기도는 단조롭고 엄숙하지만 잡념이라고는 일지 않는다. 그런 우리를 관세음보살부처님의 자비로운 눈길이 함께 한다. 문 밖에는 다시 봄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원통전을 향해 오시는 부처님 발걸음 소리 같기도 하고, 떠나는 동백을 위한 아련한 연가 같기도 하다.절을 하는 동안 법당문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만을 위한 작은 공간에는 오로지 감사와 행복이 물결친다. 봄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우산을 가지러 뛰어가고 홀로 원통전 뜨락을 서성인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처연히 비를 맞고 있다. 용기를 내어 돌계단을 내려선다. 허둥대거나 서두르고 싶지 않다. 적어도 오늘만큼은.인적 끊긴 벽송사는 봄비 맞으며 다시 참선에 들고, 간월루 뒤 요사채 뜰 위에는 비에 젖은 우산 하나가 물기를 머금은 채 절을 지킨다. 따뜻한 풍경이다. 벽송사를 향해 두 손 모으는 순간 고단했던 나의 하루는 감사함으로 충만해진다. 깊어 가는 4월, 봄비는 하염없이 내린다.

2020-04-20

가릉빈가의 울음을 찾아서… 경산 환성사(環城寺)

차는 대규모 공사현장 근처에서 길을 잃고 몇 번을 헤매다 쉬엄쉬엄 산길로 접어든다. 끊임없이 개발을 서두르는 도시의 풍경들을 순식간에 따돌리고 고개를 넘어 팔공산 깊은 자락으로 숨어든다. 마치 영겁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듯.파스텔톤의 옷을 갑아 입은 분지형의 명당 터에 벚꽃이 부풀어 올라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사위는 조용하다.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부도밭을 서성이다 키 낮은 벚나무 아래에 서서 천년고찰을 올려다본다. 바람 한 점 없는 햇살 아래 벌들의 비행소리만 요란하다.환성사(環城寺)는 성처럼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신라 흥덕왕 10년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가 창건했지만 고려 말에 화재가 발생하여 사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35년 중건 후 여러 차례 불사를 거듭하여 현재는 대웅전과 심검당을 비롯한 여러 당우들이 아픈 기억을 지우고 좌선하듯 평화롭다.일주문을 지나 수월관으로 향하는 흙길도 좋다. 옛것이 살아 숨 쉬는 곳에서는 또 하나의 시간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을 수 있다. 아른거리는 벚꽃잎 그림자를 앞세우고 바람이 잠든 길을 걷는 이 순간이 참으로 감사하다. 저만치 계단 위에 서 있는 수월관이나 보물 제 562호 대웅전조차 궁금하지 않다. 계획하지 않은 봄날, 환성사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용연(龍淵)이라는 작은 연못이 기어이 나를 불러 세운다. 연못을 메우면 절이 쇠한다는 설화를 간직한 못이다. 절이 번창하던 시절, 게으른 주지가 손님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겨 연못을 메우는데 물속에서 금송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 슬피 울면서 날아가 버렸다. 연못을 완전히 메우자 절은 불에 타고 대웅전과 수월관만 남았다고 한다.발길이 뜸한 환성사의 봄은 슬픈 옛 기억은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찬란하다. 초록빛 물 위에는 벚꽃잎이 하얗게 떠돌고 못가에는 백목련 한 그루와 누군가를 기다리는 빈 벤치가 그림처럼 처연하다. 나는 하나의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가 벤치에 앉는다. 수월관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물가에 비쳤을 그 옛날의 수월관을 그려본다.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한 수월관 안마당에는 연화탑이라 불리는 특이한 석탑이 대웅전을 지킨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절의 배치가 오히려 안정적이다. 서원에 온 듯하여 신발을 벗고 수월관 난간에 기대어 앉는다.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 벚꽃 만발한 이곳으로 이끌어 준 이는 누구일까. 일주문 쪽으로 곧게 뻗은 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길은 모든 소리를 삼킨 채 벚꽃에 안겨 나른하게 졸고 있다.적막한 산사에 가면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법구경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오늘은 숨 멎을 듯한 고요가 고마운 날이다. 일주문 쪽에서 벚꽃잎 아래를 걸어오는 노부부가 보인다. 두 손을 꼭 잡은 둘은 잠시 서로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다가 또다시 손을 잡고 걷는다.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했지만 잔잔히 퍼지는 그윽함만은 감출 수가 없다.봄날의 환성사에 어울리는, 꽃보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눈을 떼지 못한다.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들은 수월관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긴 담장을 끼고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멀리서 전각을 감상한다. 불자가 아닌 듯한 그들의 조신한 행동에서 부처님의 시선이 느껴진다.나는 뒤늦게 대웅전으로 향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이 막돌로 쌓은 석대 위에 균형감 있게 앉아 있다. 깔끔한 외양과 달리 법당 안은 고색찬연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색이 바랜 단청 사이, 천정에 달려 있는 용 모양의 종이 이색적이다. 파이프 오르간과 비슷한 용도로 종에 줄을 달아 당기면 위에서 신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한다. 하지만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오늘날에는 스님들조차 용도를 아는 이가 드물다고 한다.통판에 투각을 한 수미단도 목공예 작품을 보듯 훌륭하다. 책에서만 보던 가릉빈가 한 마리가 푸드득 내 눈으로 날아든다. 머리는 사람이지만 새의 몸을 한 인두조신(人頭鳥身)의 기이한 형태, 소리 또한 묘하고 아름답다는 상상의 새다. 가릉빈가 울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 귀를 기울여보지만 인간의 이기심으로 지구상에서 멸종된 도도새만 떠오른다.조낭희 수필가영원히 듣지 못할 울음소리, 무엇으로도 저울질 할 수 없는 인간의 욕심이 존재하는 한 가릉빈가는 경전 속에서만 살아가야 하리라. 바람 불어 벚꽃이 휘날리는 날, 좋은 사람과 함께 환성사를 찾고 싶다. 젊은 날엔 홀로 드나들 수 있는 찻집 하나 간직하길 원했다면 이제는 좋은 절에 가면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행복은 자주 불러주고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주변을 맴도는 작은 행복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날마다 가릉빈가가 날아와 울지 않을까. 가릉빈가 울음소리가 궁금하다. 어쩌면 아침마다 설중매 가지에 날아들어 배설물을 난사한 뒤 사라지는 참새 떼나 뒷산에서 구슬피 우는 멧비둘기 울음처럼 지극히 평범할지 모른다.우리는 귀한 것일수록 멀리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2020-04-13

그곳에 오래된 사랑 있어… 산청 내원사(內院寺)

지리산의 봄은 물소리로부터 시작된다. 지리산 가는 길은 온통 봄꽃이 피어 열병을 앓는데 깊은 계곡에 몸담고 있는 내원사는 어쩌면 저토록 차분하기도 할까. 내원계곡과 장당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절의 양쪽으로 지리산의 청정 계곡이 흐르는 까닭만은 아니리라.내원사(內院寺)의 옛 이름은 덕산사(德山寺)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무염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무염국사는 무열왕의 후손으로 중국 마조 문하의 법맥을 이루었으며 동방의 대보살로 일컬어졌던 분이다. 무염의 법은 충남 보령에 소재하는 성주사의 일맥을 이루어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이 되었다.덕산사는 이후 천여 년을 면면히 이어오다 조선 광해군 1년(1609년)에 원인모를 화재로 소실된 채 수백 년 방치되었다가 1959년 원경스님이 절을 다시 세우고 이름을 내원사(內院寺)라 하였다. 내원(內院)은 도량이 느껴지는 불교 용어로 도솔천에 있는 선법당을 말한다. 미륵보살이 살면서 설법을 한다고 하니 절 이름만으로도 깊고 심오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찰이다.계곡 건너편 높다란 석축 위에 쌓아올린 담장과 그 위로 고개를 내미는 기와지붕들, 절은 결코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으며 아담하고 고요하다. 물소리가 예불 소리를 대신하는 반야교를 건너는 동안 이미 세속의 때는 벗겨진다. 노선비의 곧은 숨결 같은 경내로 들어서는 발걸음만 조심스럽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들떠 있는 봄조차 내원사의 담장을 넘지 못하고 비켜가는 걸까.절은 봄소식에는 무심한 듯 돌아앉아 묵직하다. 무언가에 끌려 들어서는데 검붉은 색을 띤 삼층석탑이 온몸으로 안겨든다. 보물 제 1113호 삼층석탑은 철분이 많은 석재로 만들어진 것인지 온통 붉은 빛깔로 얼룩져 있다. 1609년 큰불이 났을 때 화마가 할퀴고 간 상처인지도 모른다. 우주와 탱주가 굵게 모각되어 튼튼해 보이지만 비바람에 버텨온 노쇠함은 감출 수가 없다. 안내문에는 무열왕 때인 657년에 세워졌다고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고, 고려시대에 건립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사학자가 아닌 내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단한 역사를 안고 서 있는 탑 앞에서 끊임없이 표류하던 자아도 닻을 내린다. 불법을 수호하며 나라를 지켜온 고대부터 빨치산과 마지막 토벌전을 벌이던 근래의 아픔까지 탑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역사가 응축되어 살아 숨 쉬는 위대한 석탑은 지난한 풍파 속에서도 천년의 기품을 잃지 않는다. 훼손이 심하다. 인적이 없는 내원사, 허리 휜 할미꽃들만 옹기종기 모여 앉아 탑을 지킨다.대웅전도 단청이 벗겨져 나이보다 깊고 쓸쓸해 보인다. 잎 새 뒤에서 수줍게 꽃을 피우는 연륜 깊은 동백나무와 은목서 한 쌍의 깊은 눈빛, 스님의 법복이 걸려 있는 대웅전 법당에서 느껴지는 훈기와 안온함, 게다가 대부분의 전각들이 작고 소박한 것은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가. 향냄새에 몰려나오는 한 때의 가난과 아픔조차 우리에게는 소중한 역사이지 않은가.국보 제 233-1호 동양 최초의 비로자나불이 있다는 안내판을 따라 들어선 비로전 법당에는 삼층석탑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비로자나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불상 앞에 서는 순간 전율이 느껴진다. 동아시아를 통틀어 명문이 밝혀진 최초의 지권인 비로자나석불, 얼얼한 울음과도 같은 감동이 온몸을 휘감는가 싶더니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단아한 눈, 단정한 코, 작고 예쁜 입, 볼록한 뺨의 양감이 돋보인다는 안내문과 달리 아무리 찾아보아도 석불의 표정은 잡히질 않는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것도 같고 고통으로 힘겨워 하는 것도 같다. 입자가 거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마멸이 심하다. 세월은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가 버렸고 또 여전히 많은 것을 남겨 두었다.조각 솜씨는 거칠지만 오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어 감동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표정 없는 불상 앞에서 어쩌자고 내 가슴은 자꾸 아련해지는가. 지리산 골짜기 인적도 드문 절에 숨어 있듯 살아가는 삼층석탑과 비로자나불상의 심한 마멸과 상흔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무엇에 기뻐하며 무엇을 향해 살아가는지를.조낭희 수필가석조비로자나불상과 함께 있었던 국보 제 233-2호 납석사리호는 현재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명문을 통해 혜공왕 2년(766년)에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와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역사적 의미가 크다. 반야교를 걸어 나오는데 무언가로 가슴이 뿌듯하다. 그런데도 왜 자꾸 뒤가 돌아 보이는 것일까.잃어버린 시간과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싶으면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내원사로 가라. 물소리 홀로 내원사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봄조차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비켜가는 스산한 적요 속에 당신의 모든 것 내려놓고 한 떨기 꽃이 되어보라.그리운 사랑 하나, 그대 가슴에 달처럼 차오를 것이니.

2020-04-06

봄꽃보다 더 아름다운 날에… 진주 응석사(凝石寺)

십여 년 전 아들이 공군 훈련병으로 있으면서 장문의 편지와 함께 보내온 벚꽃잎만큼 아련했던 꽃이 있을까. 훈련을 마칠 즈음, 꽃은 간 곳이 없고 무성한 나뭇잎처럼 성장해 있던 아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차는 진주로 달린다.벚꽃이 만개하기에는 조금 이른가 보다. 연둣빛 새싹과 봄꽃들이 수런대는 시골길은 평범한 들판과 촌락을 지나 집현산 아래에서 싱겁게 끝나 버린다. 접근성이 좋은 응석사(凝石寺)는 신라 진흥왕 15년(554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 문무왕 2년 의상대사가 강원을 열었고 그 뒤 나옹, 무학 등 이름난 고승들이 거쳐 간 대사찰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불상 밑에 숨겨둔 무기를 발견하고 많은 당우를 불살랐다고 한다.절은 서너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이 육중하고 화려한 다포식 일주문을 붉은 동백꽃이 지키고 담장너머 경내는 온갖 봄꽃들로 생기가 넘친다. 우아한 백목련과 키 작은 수선화까지 시샘하듯 눈길을 사로잡는데 뒷산조차 온통 진달래로 붉다. 다투듯 존재감을 과시하는 청순한 봄꽃무리들, 두견화 향기에 귀촉도 소식이 궁금해서 오늘밤은 응석사도 몸살을 앓을 것만 같다.계곡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돌탑들의 호위 속에서 봄꽃에 취한 마음 애써 진정시키며 일주문을 들어선다. 금강문 겸 범종루를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하면 계단 위로 멀리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렬로 배치된 구조가 나를 더 경건하게 만든다. 보물이 있는 대웅전보다 바로 앞을 막아서는 하늘을 찌를 듯한 스기나무 두 그루에 위압당하고 말았다.불법을 수호하는 나무답게 큰 키로 낯선 이를 내려보며 점검한다. 잠시 긴장감이 흐른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곧게 뻗은 한 쌍의 스기나무는 큰 행사가 있을 때 괘불을 걸기 위한 용도로 심어졌다고 하니, 절의 당간지주인 셈이다. 처음 보는 이색적인 풍경에 계단을 오르내리며 셔트를 눌러대다 끝내는 범종루 위에 서서 두 손을 모은다.지척에 스님이 계시지만 차담을 청할 처지가 아니라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 이 좋은 봄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까지 눌러쓴 방문객의 모습에 꽃들도 놀라지나 않을까 조심스럽다. 응석사의 보물은 계절에 관계없이 살아 있는 나무들과 돌담이다. 흔한 풀꽃조차 불심으로 가득하다. 불국토에 온 것처럼 구석구석 평화가 흐르고 생명의 기운이 넘쳐난다.응석사는 지나친 정갈함보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듯하다. 어린 시절 함께 자랐던 풀꽃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돌담은 햇살에 몸을 말리며 응석사(凝石寺)의 상징성을 드러낸다. 분위기와 느낌이 다른 돌담과 돌축대, 청이끼를 두른 돌담에서부터 큰 돌로 만들어진 웅장한 돌축대까지, 모두 예불소리로 다져진 사랑스러운 몸짓이 담겨 있다.산신각과 나한전이 있는 마당에는 냉이꽃이 무리 지어 햇살에 반짝인다. 다시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돌담 사이로 난 통로로 들어서면 허리 꼿꼿하게 세운 민들레가 씨앗을 품고 바람을 기다린다. 눈물겨운 광경도 잠시, 뒷산을 물들인 진달래가 유년의 기억 속으로 나를 이끈다. 이 모든 풍경에도 독성각은 흐트러짐 없이 홀로 참선 중이다.유서 깊은 사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잔잔한 평화 그리고 여유로움, 몸과 마음은 절을 둘러보는 사이 깨끗이 정화되었다. 올라 갈 때는 봄의 정취에 마음을 빼앗겼다가 내려오면서 산신각과 나한전 사이에 서 있는 아름다운 쌍사자 석등을 보았다. 그 아늑한 터전에서 시간을 보내다 뒤늦게 대웅전을 떠올린다. 300년 된 은행나무가 법당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지켜보고, 보물 제 1687호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앞에서 남편과 나는 나란히 백팔 배를 시작한다.조낭희 수필가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예상했던 대로 길어지자, 일상을 지배하던 긴장과 불안감도 차츰 둔화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우리를 좀 더 자중하고 사유할 수 있는 기회로 몰고 간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 무언가로부터 위협받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임을 암시한다. 오늘 처음 법당에서 백팔 배를 한 남편의 행위 역시 그런 의미였으리라.법당에 들어오지도 않던 남편이 삼배의 예를 갖추고 드디어 백팔 배를 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우연히 백팔 배를 하자는 제안에 흔쾌히 응해 준 남편이 고맙다. 응석사 대웅전이 그에 대한 믿음을 심어준다. 우리의 기도는 부처님의 영험함을 기대하기보다 스스로와 삶에 대한 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을 위한 다짐이며 약속이다.백팔 배를 마친 남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인다. 말없이 법당을 나오는 우리를 맞아준 것은 관음전 뒤 언덕을 지키는 무환자나무였다. 통일 신라 말 9세기경 도선국사가 무환자 열매를 먹으면 전염병을 예방하고, 가정의 나쁜 일을 쫓아준다하여 중국으로부터 들여와 심었다고 한다. 무환자 열매로 만든 염주 하나쯤 곁에 두고 싶다.늘 숙제하듯 절을 찾아 나섰던 발걸음에 이제서야 조금씩 힘이 실린다. 매주 절 기행을 하는 동안 백팔 배를 함께 하겠다는 남편의 약속, 고통과 시련도 잘만 다스리면 꽃을 피우기도 한다. 오늘은 봄꽃보다 사랑스런 날이다. 인생은 그런 맛에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2020-03-30

길, 길고 질긴 삶의 이랑… 괴산 각연사(覺淵寺)

신라 법흥왕 2년(515년) 유일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각연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유일 스님이 사찰을 짓기 위해 칠성면 사동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공사를 시작하는데, 자고 일어나면 목재를 다듬은 대패밥이 남아 있질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스님이 밤잠을 자지 않고 지켜보니 까치들이 몰려와 대패밥을 하나씩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따라가 보니 까치들은 산 너머 못에 대패밥을 떨어뜨려 메우고 있었다. 그 못에서 이상한 광채가 솟아 들여다보니 석불 한 기가 들어 있었다.스님은 못 있는 데로 절을 옮겨 짓고 못에서 나온 석불을 모신 후 ‘깨달음이 연못 속의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覺有佛於淵)’라는 뜻에서 절 이름을 각연사(覺淵寺)로 지었다. 비로전에 모셔진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못에 있던 그 석불이다. 그 뒤 이 불상에 지성으로 기도하면 영험함을 얻는다 하여 참배자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산봉우리에 둘러 싸여 아늑하게 자리한 각연사는 고려 초 통일 대사가 중창하여 대찰이 되었으며 조선시대와 근래에도 여려 차례 중수되었다. 유서 깊은 사찰 치고는 규모가 크지 않다. 절은 텅 빈 듯 고요하다. 사회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절은 햇살에 감금된 것처럼 적요만 감돈다. 들어서는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 아담한 전각들이 단을 달리하며 침묵에 싸여 있을 뿐이다.지루한 삶의 고갯길을 넘어가듯 깨끗하게 비질이 된 마당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대웅전 법당에서 예를 갖춰 보지만 마당 한켠에 있는 감로수도 외로워 보이고 살짝 모습을 드러낸 비로전의 왼쪽 어깨도 시려 보인다. 비로전 앞 커다란 보리수나무 한 그루가 기도하듯 서 있다. 350년이라는 세월동안 비로전이 나무를 토닥이고 보리수나무 긴 그림자가 마당을 내려와 비로전의 굴곡진 심장소리를 들었으리라. 둘은 분명 오랫동안 하나였다.인적이 없는 절간에서는 모든 것이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살집이 갈라진 늙은 비로전 기둥에서 온갖 맑음과 궂음의 순간들이 읽혀진다. 거칠고 척박한 세월을 인고의 힘으로 거너온 조상들의 숨결 같기도 하고, 세상을 등지고 무욕으로 나를 다스리는 고독한 스님의 절제된 모습 같기도 하다. 서늘함이 느껴지는 법당은 너무 고요해서 애잔하다.비로전 안을 지키는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보물 제 433호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불상과는 달리 크지가 않고 단아하다. 자그마한 체구와 빨갛게 칠한 입술, 왼손 집게손가락을 앙증스럽게 감아쥔 지권인, 삼존의 화불이 섬세히 새겨진 광배까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무언지 모를 편안함이 나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문이 닫혀 있는 법당 안은 과거의 세계로 초대받아 온 느낌이다.높은 봉우리를 끼고 계곡 길을 하염없이 달려서 찾아온 이 곳, 길은 가파르지 않고 평탄했지만 인가에서 멀어지는 동안 무수한 삶의 갈기들을 떠올렸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공양거리를 머리에 이고 걸어서 찾아왔을 가난한 불자들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절의 풍경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옛 불자들의 불심이 굽은 나무처럼 자꾸만 따라 왔다.각연사 오는 길은 결코 험난하지 않은데 왜 이토록 인간사가 짠해 오는 걸까. 언젠가 전생에서 홀로 걸었을 지도 모를, 처음 오지만 수많은 애환과 시름이 숨 쉬는 생명력 느껴지는 길의 근육을 보고 말았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을 역동적으로 추체험해 보면 길 자체에도 근육이 있고 반(反) 근육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처럼.조낭희 수필가대부분 사찰로 이어지는 길은 삶과 실존에 대한 몸부림으로 얼룩져 있으리라. 그 옛날 여인들의 애환이 화석처럼 살아 있을 길을 언젠가 조용히 걸어보고 싶다. 한때 여성 불자들의 기복신앙을 못마땅하게 여긴 적이 있다. 자식의 대학입시나 남편의 승진, 사업 번창을 위한 일시적인 기도는 지나치게 가족 이기주의적인 행위로 비쳤기 때문이다.깨달음을 구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우거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맹정진하며 차원 높은 선의 경지로 몰입하는 자세가 불교의 가장 큰 매력이라 여겼다. 하지만 사찰에서 육신의 고통을 불태우며 철야기도를 하는 여인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은 채 불심으로 가족의 건강과 평화를 세우고 공덕을 회향하는 모습은 묵직한 울림을 안겨줬다. 시대가 열악하고 그늘진 환경에서 살아가는 여인일수록 마음의 의지처가 필요했으리라. 여인들의 고달픔과 지난함이 살아 숨 쉬는 길, 산사 가는 길은 길고 질긴 삶의 이랑이다. 무수한 이타행으로 공덕을 쌓은 위대한 인물들도 이런 헌신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았을까? 승용차에 몸을 싣고 풍경을 감상하며 안일하게 무언가를 구하러 달려온 내 육신의 호사스러움이 잠시 부끄럽다.창호지 위로 비치는 햇살이 은은히 기웃대고 비로자나부처님의 눈길도 한결 더 친근해졌다. 수천 년의 기억을 헤매다 실낱같은 인연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천천히 백팔 배를 시작한다. 옛 여인들이 그래왔듯 출렁이는 마음 모두 내려놓고, 내 안에 숨겨져 있는 희미한 길을 찾아 나선다.

202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