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 비(琵), 거문고 슬(瑟), 비슬산 가는 길은 벚꽃이 지기가 무섭게 화려한 영산홍들이 길을 연다. 비슬산은 갈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으며, 명산답게 이름의 유래도 다양하다. 나는 인도의 힌두교 신 ‘비슈누’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왔다는 설을 좋아한다. 왠지 먼 나라의 신화를 떠올리면 평범하던 산은 더 깊고 신비로워 보인다. 8대 적멸보궁으로 이름난 용연사가 그 안에 있다.
5대 적멸보궁에 건봉사, 도리사, 용연사를 넣으면 8대 적멸보궁이다. 용연사는 912년(신덕왕 1년)에 보양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이 절터에 용이 살던 곳이라 용연사로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에 사명대사의 명을 받고 인잠, 탄옥, 경천 등이 재건하였다. 1650년에 일어난 화재로 보광루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으나 다시 중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슬산 용연사 자운문(琵瑟山 龍淵寺 慈雲門)’ 일주문 현판은 여느 사찰보다 이색적인데 그곳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없다. 살짝 돌아앉은 일주문은 제 구실을 못하고, 오르다 보면 좌측으로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보물 제539호 석조계단(石造戒壇)이 있는 적멸보궁 가는 길, 우측으로는 극락전을 비롯한 많은 당우들이 기다리고 있다.
용현사의 백미는 적멸보궁이라는 것을 모르는지 대부분 우측길로 접어든다. 극락교를 지나 천왕문을 통과하는데 수많은 염원을 담은 문구들이 철재 난간에 빼곡히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사업 성취, 의대 합격, 글씨체만큼이나 다양한 소원들, 재미삼아 걸어놓았을 소원들이 승자독식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듯 치열하다. ‘우리 아빠 아침에만 출근하게 해주세요.’ 어린 아이의 비뚠 글씨체에 눈길이 머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내게 간절한 소원 하나 있다면 함부로 발설하지 않으리라. 마음속에서 기도를 먹고 자라는 소원은 눈빛과 행동으로도 그 완곡함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미끄러지기를 좋아하는 언어에 나의 간절한 마음을 싣고 싶지는 않다. 영험함을 경험하고 싶다면 몰래 하는 사랑처럼 은밀하고도 진중하게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
누하진입식으로 안양루를 지나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 극락전을 지키는 삼층석탑 난간에도 수많은 소원종이 댕강거리며 맞는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삼층 석탑의 우아한 자태와는 달리 고만고만한 소원종들의 아우성으로 마음은 심란하다. 세상의 모든 바람이 이곳에 모여 든 것 같다.
보물 제 1813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극락전에서 불자들이 기도를 할 때도 소원종은 쉬지 않고 저만의 방식으로 기도를 한다. 바람이 거칠어지면 소원종의 호흡도 벅차다. 많이 펄럭일수록 그들의 기도가 간절히 전해진다고 믿는 히말라야 산기슭의 룽다와 타르쵸처럼, 그들은 경쟁하듯 시끄럽다.
다시 극락교를 건너 적멸보궁으로 향한다. 자연석 계단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딴 세상처럼 한적하다. 오래된 나무들의 미소 사이로 보이는 벤치에는 4월의 고요가 뒹굴고 숲은 싱그럽다. 크고 작은 돌탑들도 보인다. 강한 바람에도 누설되지 않을 돌탑의 소원이야말로 궁금하다.
적멸보궁은 용연사를 떠나 그 안에 섬이 되어 또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파른 계단 위로 보광루가 보이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둔 보물 제 539호 금강계단(金剛戒壇)을 향하는 마음이 자꾸 앞서 걷는다. 계단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해지는 성스러운 곳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적멸보궁 문은 일시적으로 잠겨 있다. 유리문에 얼굴을 대고 법당을 훔쳐본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초연한 세계 하나가 창문 너머에 존재한다.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그곳, 적멸보궁에서 기도하면 가까이 갈 수 있을까.
뜰 앞을 거니는 내게 담장 너머로 연분홍 철쭉들이 사랑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저 여린 나뭇가지 끝에도 무한한 애정을 쏟는 신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 철쭉은 꽃의 이미지를 벗고 유순하고, 금강계단 주변은 온통 4월의 기도로 평화롭다. 이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을 감지하며 나는 비슈누 신을 떠올린다.
우주의 질서와 인류를 보호하는 신, 두루 꽉 차다는 뜻을 지닌 비슈누를 ‘깊은 내부에서 우주 전체를 들고 있는 신’이라 괴테는 표현했다.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금강계단을 향해서인지 숲을 향해서인지 분명치는 않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들과 신화에 대한 경의였는지 모른다.
마당 건너편에 있는 보광루 법당에 올라 백팔 배를 하는 동안 사리탑이 내 안으로 성큼 들어와 앉고 마음은 철쭉빛으로 물든다. 천왕문 난간에 매달려 있던 소원글들이 또 다시 비집고 들어온다. 작은 흥밋거리로 치부했던 나의 무례함을 사죄한다. 어쩌면 그들은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신산한 언어들의 보챔을 잠시라도 외면했던 순간을 반성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떨어지는 햇살 속에도, 참새의 작은 부리 끝에도, 눈길이 머무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과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