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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가파도 대원사

배는 방어축제로 술렁이는 모슬포 항을 떠나 섬 속의 또 다른 섬을 향해 달린다. 겨우 20분이면 닿는 거리지만 뱃길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인다. 몇 명 되지 않은 승객을 실은 배는 생각보다 컸다. 하지만 높은 파도의 힘에 크게 울렁이며 가파도로 향한다. 어제까지 내린 비로 가파도에 갇혔던 사람들이 흐린 하늘을 이고 몰려 있다. 내리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많은 선착장에서 우리를 맞는 것은 바람뿐이다. 봄이면 청보리 축제로 몸살을 앓는 곳, 인적이 드문 가을날 찾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한 무리는 우측 해안을 따라서 걷고 우리는 좌측 해안도로를 걷는다.우리 나라에서 가장 키가 작은 섬, 해발 20.5m의 나지막한 가파도는 그 흔한 언덕하나 없이 평평하다. 송악산에서 바라본 가파도는 밋밋하고 별 특징 없는 섬이었다. 하지만 섬에서 바라본 풍경은 달랐다. 날마다 그리움을 실은 파도가 먼 바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뜨내기손님들이 육지의 소식을 전해 주는 순결한 섬이다.송악산 갈대들의 노랫가락이 손에 잡힐 듯하고, 그 뒤로 산방산이 우뚝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며 최남단의 작은 섬 마라도를 보살피는 의젓함도 지녀야 할 섬이다. 흙, 바람, 돌, 파도가 만들어낸 태곳적 묵직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단순함이 빚어내는 아름다움, 그 속에는 애환을 담은 서사가 있고 평화를 노래하는 시(詩)가 존재한다.지중해를 닮은 코발트빛 지붕이 산토리니 섬을 상징한다면 가파도의 지붕은 하나같이 하얀 벽에 붉은 지붕을 이고 있다. 대지에 따개비처럼 몸을 낮추고 도란도란 모여 살아가는 처마 낮은 집들이 주는 정겨움 속에는 강인함도 보인다. 섬은 고요한 듯 침묵하지만 때로는 포효하듯 사나우리라.비어 있는 들은 황량해 보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꿈꾸고 있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을 떠올리다가, 나는 청보리와 유채꽃을 심기로 했다. 이내 초록과 노랑 물결이 번갈아 넘실대는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안겨든다. 바람의 몸짓과 파도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완벽한 작품, 나는 어느새 섬과 하나가 된다.큰 파도가 덮치면 모습을 감출 듯 연약해 보이지만, 탄소 없는 섬으로 유쾌하고 건강미가 넘치는 곳, 작은 전원주택 하나 가지고 싶은 나의 꿈을 내려놓고, 오늘은 허락도 없이 가파도의 주인이 된다. 하나의 점이 되어 제주도의 배경이 되어도 좋고 지구본 속에는 등장하지 않아도 좋다. 바람도, 구름도, 파도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가파도를 향해 모여들고 흩어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하다.들판 사이로 난 길을 걷는 사람은 우리뿐이다. 나와 연결된 것들과의 단절, 그것은 때로는 가벼워짐을 뜻한다. 너무 홀가분해서 바람 같은 섬, 너무 강인해서 돌처럼 묵직한 섬, 때로는 사무치게 외로워서 파도처럼 몸부림치는 가파도다. 여행자에게는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여유가 그들에게는 막연한 기다림이거나 희망 없는 인내일 수 있다.마을로 접어들자 현무암으로 만든 키 큰 관세음보살상이 반긴다. 한국 불교 태고종 사찰인 관세음보살 해수도량, 대원사가 수행하듯 살아간다. 큰 하늘과 바다를 품에 안은 부처님 앞에 서자, 인드라의 하늘에 걸려 있는 수많은 구슬이 떠오른다.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춘다. 어떤 구슬이든 하나가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게 그 울림이 퍼져 영향을 준다는 화엄사상,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거룩한 일이다.나와 얽혀 있는 수많은 인연들을 생각한다. 본성을 거르지 않고 부처님 말씀에 귀의하며 살려고 노력했는지 반문하며 극락전으로 향한다. 염불소리가 조용히 절을 지킬 뿐, 인기척이 없다. 붉은 양철지붕을 한 법당에는 아미타부처님이 계신다. 섬사람들의 삶이 곧 수행이며 부처님이었을 텐데, 그들은 무엇을 기원했을까? 작은 법당이 한량없이 커 보인다.몇 안 되는 관광객들이 드문드문 빈집을 기웃거리며 바람처럼 떠돌고, 그 뒤로 하얀 첨탑이 보인다. 도시 냄새가 나는 짙은 벽돌건물, 교회도 절도 분위기는 다르지만 붉은 지붕으로 통일했다. 299명의 주민들과 갈등 없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다른 종교 앞에서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높다랗게 걸려 있는 십자가가 관세음보살상만큼 정겹다.▲ 조낭희 수필가끊임없이 테러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톨레랑스라는 관용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던 프랑스의 분노, 지금 세계는 불안에 떨고 있다. 삶과 신앙의 빗나간 관계를 생각하며 잠시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놀랍게도 나는 작은 섬에서 처음으로 가장 큰 기도를 한 셈이다. 바람이 해수관음상의 허리를 감싸 안다가 십자가를 한 바퀴 돌고 사라진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다. 언젠가 푸른 몸을 일으키며 새벽을 여는 가파도의 청보리밭을 걷고 싶다. 한낮엔 돌담 위를 뒹구는 바람과 놀고, 밤이면 거친 파도를 잠재울 달빛 자장가도 듣고 싶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별 같은 섬, 때로는 우주만큼 커 보이는 섬, 그곳에서 나는 인드라의 구슬이 일제히 울리는 것을 보았다.

2015-11-27

제주도 관음사

▲ 조낭희 수필가종려수들이 비바람을 맞으며 제주의 아침을 연다. 한라산 등반은 무산되고 홀로 우중의 관음사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애초부터 관음사가 목적이었기에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는지 모른다. 한라산의 가슴팍을 향해 난 산간도로도, 관음사의 주차장도 텅 비어 있다. 빗물들이 모여 작은 개울을 방불케 하며 힘차게 흐른다. 거친 빗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석조대불이나 폭우를 뚫고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는 불자의 모습에서 삶의 진지함을 읽는다. 침묵을 공유하며 돌아서는 불자의 얼굴에는 안온함이 어려 있다. 그 한 줌의 희망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리라.거짓말처럼 비가 온순해졌다. 일주문을 통과하자 잘 뻗은 삼나무와 돌담 아래 수인이나 표정, 입고 있는 가사의 모양이 저마다 다른 현무암 석불들이 일렬로 반긴다. 제주를 상징하는 삼나무와 검은 현무암의 조화로운 풍경이 장관이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 채 부처님의 표정을 하나하나 읽으며 걷는다. 이토록 토속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사찰이 있을까?관음사를 창건한 사람과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제주의 신화나 전설에 괴남절(제주 방언으로 관음사)이 전해오고 있어, 불교 전래 초기에 창건되었을 거라 추측할 뿐이다. 제주는 한때 `절(寺) 500 당(堂) 500`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불교가 중흥했지만 조선 숙종 때 억불정책으로 모든 사찰은 폐사되고 200년 간 불교와 사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러다 1908년 비구니 해월 스님이 복원하였다. 떠돌이 무당이던 해월 스님은 비양도를 가다 풍랑을 만나 사경에 이르렀을 때 관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남자, 비구니가 되어 이 절을 짓고 관음사라 명명한다. 그러나 제주반란사건으로 사찰이 전소되어 1968년 중창 후, 지금은 제주 불교의 본산으로 40여 개의 말사를 둔 대가람으로 거듭나고 있다.나는 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사천왕문 안으로 펼쳐진 풍경은 그리운 이로부터 날아든 애절한 가을엽서를 한 통을 연상케 한다. 넋을 놓고 있는데 좌측으로 난 오솔길 위에도 은행잎이 쌓여 환상적이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목마와 숙녀`가 떠오르고, 시몬을 향해 나뭇잎 져버린 숲으로 가자고 재촉할 뻔 했다. 사찰답지 않은 낭만과 멜랑콜리한 사색을 깔고 관음사의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누구나 크고 작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리 후회하거나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 잠깐의 갈등과 설렘이 주는 느낌은 오랫동안 상상과 그리움이 되어 삶을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을 향해 걷는다. 자욱하게 떨어진 낙엽 위로도, 높다란 석조좌상의 침묵 위로도 하염없이 가을비가 뿌린다.잘 가꾸어진 나무와 연못, 현무암 석불들의 조화가 마치 야외 전시관을 찾은 기분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듯한 몽환적인 가을날, 문득 팽팽한 긴장감이 밀려든다. 발밑에서 스러지는 낙엽들의 처연한 몸부림, 쉽게 부서지지 않으며 밟혀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가을날의 절규 같은 무거운 침묵을 감지한다. 빗속에서 담담히 잎을 떨구는 은행나무를 지나고 현무암 자갈이 바스락대는 마당을 지나 대웅전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이 숙연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4·3사건을 떠올린다. 역사 속의 아픔을 더러는 외면하고 더러는 무지로 인해 놓치며 살아왔다. 고통 따위는 기억의 저편으로 흘려보내려는 미욱한 습성을 반성하며 안일함을 추구하는 나를 돌아본다. 때마침 스피커에서 `명상의 말씀`이 경내를 흐른다. 어떠한 상처도 치유될 것만 같다. 새살이 돋듯 모든 사람의 마음에도 불심으로 가득 채워질 것만 같다. 서둘러 대웅전 법당에 들러 석가모니불 앞에서 제주의 아픈 원혼을 위해 잠시지만 기도한다. 짧은 역사를 말해 주듯 전각들은 정갈하고 소박하지만 무언가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언덕 위에 보이는 미륵대불을 향해 걷는데 삽시간에 안개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뒤 56억7천만년이 지나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는 부처님, 황금빛 미륵대불이 저만큼 베일에 가려 사라진다.크고 웅장한 미륵대불, 그 뒤로 어렴풋이 드러나는 검은 실루엣들, 삽시간에 내 몸은 경직되어 꼼짝할 수가 없다. 낯선 세계에 홀로 갇혀 서성대는 이방인의 막막함과 두려움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수많은 석불들이 온전히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나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그 섬찟한 무서움의 근원에서 내 영혼은 낯설고 초라하게 떨고만 있다.제주인의 염원과 응집력이 담긴 석불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며 다가온다. 나는 한참을 지나서야 안정을 찾는다. 습한 기후 때문인지 눈물처럼 번지고 있는 이끼 옷들과 거미줄에 맺힌 빗방울조차 정겹고 친근해진다. 감정의 노예가 되어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짧은 순간들이 참으로 허탈하다.어떠한 일에도 휘둘리지 않는 내 안의 참된 주인은 누구인가? 계절의 정취와 신비로움을 겸비한 관음사가 숙제를 안겨 주며 떠다민다.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으며 가을비는 벌써 그쳐 있었다.

2015-11-20

합천 해인사 백련암

▲ 조낭희 수필가해인사 진입로는 가을 단풍이 숨넘어갈 듯 절정이다. 금빛 햇살 아래 나뭇잎은 속살을 투명하게 드러낸 채 수줍고도 요염하다. 차는 단풍 터널을 미끄러지듯 달린다. 계절에 충실한 자연으로의 초대는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오늘은 가을 귀빈이 따로 없다.해인사에는 암자가 많아서 백련암이 어디쯤 숨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사람들을 따라 걷다가 정갈하게 누워있는 아스팔트길로 접어든다. 포장된 길은 내 인생의 탄탄대로처럼 여겨졌으며, 길은 호젓한 숲으로 이어져 있다. 이 계절에 가슴 벅차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30년 지기와 모처럼 시간을 낸 것을 아는지 가야산 단풍들이 떼 지어 반긴다.뜻밖에도 백련암 가는 길은 오래도록 한적하다. 꽃이 진 자리마다 신록이 들어서는가 싶더니 이내 숲은 이별을 서두른다. 지치도록 아름다운 한 때를 견디지 못해 숲이 벌인 축제에 우리는 빈손으로 구경 왔다.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짧은 가을해가 언제 떨어질지도 모를 초행길 앞에서 우리는 느긋하고 여유롭다.백련암은 해인사의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예로부터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수도처로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며 가야산 제일 승지로 꼽혀 왔다. 초창 연대는 정확히 모르고 조선 선조 38년(1605년) 서산대사의 문도인 소암스님이 중창했다. 그 뒤 성철 스님이 가야산 호랑이로 주석하며 해인 총림 초대방장, 조계종 종정을 지내며 법력을 펴다가, 오늘처럼 만산에 홍엽이 지던 날 이곳에서 열반하셨다.성철 스님을 친견하려면 부처님께 삼천 배를 해야 한다는 전설 같은 일화 때문인지 백련암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할 거라 생각했다. 뜻밖에도 적당히 몸을 푼 우리를 암자는 친근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맞아주었다. 긴 돌계단 위로 백련암 현판을 건 산문이 청명한 가을하늘을 이고 있다. 살짝 일본풍이 느껴지는, 정갈하면서도 도도한 첫 느낌이 여느 암자와는 다르다.오래 된 나무들이 사천왕을 대신하고 암자 같지 않은 큰 규모와 적막감에 눌려 우리는 경내에 들어서기도 전에 발소리를 낮추고 숨을 죽인다. 길고 높다란 석축 위에 위풍당당한 전각들이 보인다. 부처님 얼굴처럼 생긴 불면석이 마당을 지키며 압도한다. 햇살 가득한 마당에 서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방향을 잃는다. 전시장에 들어온 듯 다양한 나무와 바위들, 게다가 어느 것이 중심전각인지 모르겠다.고심당에 들러 성철 스님의 좌상 앞에 예를 갖추고 적광전 법당 문을 연다. 젊은 불자 한 분이 열심히 기도 중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천태전에서도 비슷한 연배의 불자가 기도 중이다. 계절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도 삼매경에 빠져 있는 두 불자는 아무래도 마음이 통하는 벗 같다. 삼천 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누군가와 같은 방향을 함께 걷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가. 나란히 숨을 고르며 백련암을 오른 우리처럼 저들도 무언가를 간절히 염원 중이다. 절에 들어서면 저절로 마음이 비워지고 충만해져 진정한 존재의 뿌리로 살아가기 위해 고민해 왔다. 짧지만 영혼을 깨우기 위해 몰입의 시간도 갖는다. 기도하는 그들의 정성 때문인지 백련암은 가을의 한가운데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의연하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에 들떠 건성으로 기도를 끝내고 말았다. 배회하듯 절을 서성이는 스스로를 애써 외면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두운 법당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시간을 보내기엔 억울하다. 숨어있던 낭만성이 고삐가 풀리고 감성이 말랑말랑해져 버린 것이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심정으로 백련암 가을에 빠져든다. 경련을 일으키듯 타오르는 나무들의 오르가슴 속에 숨어 있는 아픔들, 우주의 맥박과 숨결까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30년을 넘도록 붙어 다니던 지기와의 한나절 여행, 그녀도 나만큼 편안해 보인다. 물질적인 환경이 달라지면서 한동안 우리의 일상과 관심사도 달라졌다. 공통된 화제나 공감의 빈도도 줄어들었으며 작은 오해와 소원함이 밀려들기도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걸음씩 물러섰다. 약간의 의무감 같은 어색함을 안고 간간이 만났지만, 그럴 때마다 나의 빈약하고 부실한 내면과 맞닥뜨리며 아파하곤 했다.오늘은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들이 클래식 소품처럼 녹아들고 별 것 아닌 일에도 가슴이 열린다. 화강암 위에 새겨진, 형체도 불분명한 여래불의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로뎅의 `대성당`이 생각난다. 마주 잡지는 않았지만 각도에 따라 살짝 닿아 있는 것도 같고, 때로는 친밀하게 맞닿아 있는, 영원히 마주보는 두 오른손. 분명 우리는 살아있는 날까지 서로를 응시하며 함께 갈 것이다.가을이 우리의 대화를 기도처럼 부드럽고 충만케 해 주었다. 햇살이 바래지면 이내 소슬바람이 불고, 숲은 다시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드리라. 그러나 봄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긴 겨울의 아픔을 견뎌 내고 기다릴 줄도 안다. 세월만큼 스스로를 낮추고 성숙하게 하는 선물이 또 있을까? 둘이서 백련암을 내려오는데 하늘에 낮달이 홀로 외롭다.

2015-11-13

은해사 운부암

▲ 조낭희 수필가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린다. 문득 운부암 은행나무가 비의 무게를 감당치 못해 서둘러 낙화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손톱이 빠지는 듯한 아픔을 감내하며 가을을 보낼 나무 한 그루를 떠올리며 빗길을 재촉한다. 언젠가 벽안의 노랑머리 처녀가 보화루에 앉아 계절에 빠져들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동양적인 분위기에 매료된 서양 처녀의 고독은 엄숙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은행나무는 유난히 색이 고왔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도 샛노랗게 물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암자와 은행나무, 젊음의 혼연일치가 빚어내는 환상적인 가을날이었다.은행나무의 이별가만큼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은 암자를 지키는 노구(拘) 누렁이의 존재다. 손님이 오면 덩치 큰 몸을 이끌고 나와 인사를 건네는 누렁이의 눈빛은 고승처럼 깊고 맑았다.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운부암에서 도를 닦다 입적한 어느 스님을 만나는 것처럼 숙연해진다. 개는 총명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사색을 즐기는 듯한 걸음걸이와 촉촉한 눈빛이 좋아 나는 그를 철학자라 불렀다. 먹는 일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등을 쓰다듬고 속삭여도 꼬리를 함부로 흔들어대거나 눈빛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진중한 그의 눈빛 속으로 은행잎이 마구 떨어지는 날에는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기도 했다. 몇 번의 만남으로 정이 듬뿍 들고 말았다.은해사에 도착할 무렵 비가 그치고 날이 갠다. 길가에는 낙엽들이 젖은 몸을 말리느라 분주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바싹 마른 참나무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어수선한 가을 숲길만큼 사색하기 좋은 곳이 있을까. 치열하게 살다 묵묵히 사라지는 존재들, 숲은 고결한 성자의 품속처럼 경건하다.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이 겸허함도 좋다.연지의 한가운데에서 달마대사 석상이 반겨주기가 무섭게, 불이문 너머 보화루가 손짓을 한다. 단청이 벗겨지고 세월의 깊이를 간직한 자연스럽고 운치 있는 암자다. 예로부터 북쪽의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함께 남쪽에서는 최고의 지기를 갖춘 도량으로 이곳을 꼽았다. 은해사(銀海寺)의 산내암자로 711년(성덕왕 10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누하진입식으로 보화루를 통과하면 보물 제 514호인 청동보살좌상을 모신 원통전이 보이고 좌측에는 우의당, 우측에는 운부란야가 마주하고 있다. 운부란야는 경허 스님과 성철 스님을 비롯한 고승들이 수행한 곳으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다투는 소리 없이 조용하다는 뜻을 가진 선원이다.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의 가람 배치가 욕심 없고 기품 있는 선비의 집을 연상시킨다.비가 온 뒤의 운부암은 더욱 적막하다. 웬일인지 철학자 누렁이조차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 원통전에 들러 108배를 하고 보화루 창가에 앉는다. 은행잎은 여전히 푸른빛이 돌고 햇살은 화사하다. 무언가 허전하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누렁이를 찾아 헤매다 나는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롭기로 했다. 애써 호흡과 명상을 하고, 내 안에도 가을이 깊어가기를 바라면서 준비해 온 시집을 읽는다.날씨가 흐리다 개기를 반복하는 사이, 나는 운부암의 일부가 된다. 내 안에서 어린 나무가 자라고 바람도 불고 잎이 떨어진다. 안정감 있는 고독과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가도, 더러더러 젊은 날의 방황과 아픔이 그리운 것은 청춘이라는 이름 때문이리라.갑자기 배가 출출하다. 시집보다 부피가 큰 도시락을 꺼낸다. 김밥 몇 개가 들어가자 운부암이 또 다른 눈빛으로 속삭인다. 일용할 양식에 대해 고민 없이 살 수 있음에 가슴 뭉클하도록 고맙다. 형태도 불분명한, 멀고도 아련한 정신적인 가치를 좇으며 살아왔던 내게 일상의 행복은 당연한 것이거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생계의 부담을 묵묵히 짊어진 채 살아가는 남편의 존재가 싸하게 다가온다. 문득 그가 나의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치열하게 도를 행하고 깨달음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전쟁터, 나는 그곳에서 멀찍이 물러나서 자유롭다. 어쩌면 형이하학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장 형이상학적일 수 있다. 일상을 돌아보니 도(道) 아닌 것이 없다. 좀 더 깊고 그윽한 눈길로 본질을 볼 수 있는 힘이 도를 행하는 지름길인지 모른다. 가슴이 따뜻해져 오는데 다시 보슬비가 내린다. 나무는 처연하게 온몸으로 비를 맞고 나는 가을비에 갇혀 일어설 줄을 모른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부여한 깨달음, 공(空)처럼 청빈한 도와 미천해 보이는 도를 함께 맛본 시간이다.비가 그치고 산길을 내려오다 운부암 스님을 만났다. 얼마 전 누렁이가 세상을 떠나 은행나무 아래 묻혔다는 소식 앞에서 온 몸에 힘이 빠진다. 우수에 젖은 눈빛이 자꾸만 말을 걸며 따라온다. 젊은 날 안내견이었던 누렁이의 삶에 비해 나의 일상은 허세로 가득 찬 것 같다. 누렁이가 전하려던 말은 무엇일까? 운부암 은행나무가 올해는 유난히 노랗게 타오를 것만 같다.

2015-11-06

양산 홍룡사

▲ 조낭희 수필가그윽한 국화향을 생각하며 중양절 아침을 맞는다. 국화잎을 따서 술을 담그고, 화전을 부쳐 먹으며 국화 감상을 해야 하는 멋진 날, 하늘은 뿌옇게 미세 먼지로 덮여 있다. 가난하면 막걸리에 국화를 띄워 마실 정도로 조상들은 삶에 멋과 여유를 곁들였다. 시야는 한껏 흐리지만 우리는 가을을 노래하며 남쪽으로 달린다.홍룡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원효 대사가 낙수사(水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원효 대사가 당나라 승려 천 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득도하였기에 원적산이라는 이름이 천성산(千聖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1910년대 통도사의 승려 법화가 중창하고 1970년대 말에 주지 우광이 중건 및 중수하였다.양산의 팔경으로 알려진 홍룡폭포 때문인지 휴일이 아닌데도 주차된 차들이 제법 많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한적한 가홍정의 자태와 낙엽이불을 덮은 오솔길이 자기 성찰을 하듯 고즈넉하다. 왕대 숲 사이로 보이는 대웅전에서는 예불소리가 낭랑하고, 우측 계곡길에는 예기치 않은 방문객들로 가을이 수줍게 타고 있다.양수 9가 두 번 겹쳐 중구일이라고도 부르는 중양절은 추석 때 제사를 지내지 못한 집에서는 차례를 지낼 만큼 큰 명절이었다. 홍룡사 대웅전에서도 대가족이 모여 제를 지내는 중이다. 우리는 폭포를 뒤로 하고 대웅전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함께 동참한다. 수많은 방황과 노력으로 쌓아올렸던 삶을 홀연히 남겨두고 한 순간 안개처럼 떠나야 했던 영혼들, 그들을 위한 기도는 결국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언젠가 운문사 북대암에 갔더니 방금 제를 지냈다며 일면식도 없는 방문객들에게 푸짐한 공양상을 차려주었다. 대접하는 사람의 환한 미소와 친절이 모두를 감동시켰다. 그 때 진 빚을 뒤늦게 이곳에서 갚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정성껏 기도를 한다. 내 생각이 여기에서 멈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누구 하나 공양을 권하지도 않고 지인들끼리만 공양간으로 들어서는 풍경이 조금은 씁쓸하다.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하여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갑자기 마음에 허기감이 몰려온다. 도시라는 거대한 사회가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정서와 변화가 절집까지 스며든 것 같아 마음이 스산하다.그들의 모습이 내 모습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에고의 시각에 갇혀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할 때가 많았으리라. 삶이 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절대적인 빈곤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 따뜻한 마음과 겨자씨만한 진실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지성이 자꾸만 그리워진다.뒤켠에 있는 무설전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법당을 한 아름의 햇살과 고요가 끝없이 채워 주고, 문밖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대숲이 청량하다. 기도를 하는 동안 마음이 밝아 오고 이내 모든 것이 감사하다.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세가 부족했던 스스로를 반성한다. 어디선가 쌉싸름한 국화향이 실려 오는 것 같다. 홍룡폭포로 향하는 발걸음도 가볍다. 옛날 하늘의 사자인 천룡이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을 가진 폭포로 인해 사찰은 더 유명해졌는지 모른다. 승려들이 폭포수를 맞으면서 몸을 씻고 설법을 듣던 엄숙한 곳이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명소가 되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바위 절벽에서 몸을 날리는 물의 비상, 하얗게 떨어지는 순간 물은 다시 태어나고 있다. 밤이 되어 숲이 잠든 시간에도, 경배하는 태양이 산 위에 떠올라도, 폭포는 오로지 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고요히 머물기를 원한다면 더 이상 폭포가 아니다. 힘찬 역동감이 더해질수록 폭포는 더 크고 깊은 물길을 만들어 내리라. 속이 깊고 단단한 사람이 많은 상처를 숨기고 있듯, 홍룡폭포는 얼마만큼 속을 파내고 비워냈을까?물보라가 무지개를 만들자, 아이처럼 좋아하는 어른들이 시간을 잊고 자기를 잊는다. 떨어지는 물줄기와 관음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하얀 치아를 드러낸 이 순간이 영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영화나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감상하듯 의미심장하게 지켜본다. 무지개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내가 어린 날을 떠올리며 소원을 빌 때까지.물 위를 떠다니는 … 나뭇잎들의 정처 없는 몸짓들이 나를 기도하게 했다. 저마다 타고난 운명이 달라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그들 모두에게도 정겨움이 녹아들 수 있으면 좋겠다. 무겁고 엄숙했던 순간들조차 지나고 나면 무지갯빛처럼 영롱해진다는 것을 알지만, 가을은 우리를 사색케 하고 더러는 고독 속으로 데려 간다.갈팡질팡하는 사이 인생이 끝났다는 누군가의 묘비명처럼 나는 늘 스스로 답을 구하고 찾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지 모른다. 가을에는 기도하며 살고 싶다. 한 순간도 살지 않은 것처럼, 온전히 썩기를 바라는 나뭇잎처럼, 사랑하고 기도하며 살고 싶다. 어쩌면 기도와 염원, 그 자체를 통해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2015-10-30

대구 비슬산 은적사

▲ 조낭희 수필가앞산이라는 이름에는 친구처럼 편한 정겨움이 숨어 있다. 은적사가 있는 앞산은 비슬산, 대덕산, 최정산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사람들은 앞산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옛날에는 남쪽을 `앞`이라 했기에 `남쪽에 있는 산`이란 뜻에서 앞산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안타깝게도 큰골로 향하는 구길은 순환도로가 나면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봄기운에 취해 나풀거리는 벚꽃들의 향연이 슬프도록 그리운 날이나, 새로 난 도로가 통행량으로 몸살을 앓을 때, 나는 이 길을 떠올릴 뿐이다. 옛 친구를 만난 듯 가슴이 따뜻해져 오지만 자주 찾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언젠가 앞산 자락길을 걷다 우연히 은적사를 만났다. 먼발치에서 대웅전을 올려다보고 자목련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돌아왔을 뿐이다. 산허리를 감고 도는 오솔길에 잘 어울리는 아담하고 정갈한 사찰이었다. 아름드리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도시의 매연과 소음을 차단해 주어, 절은 깊은 산중에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은적사는 926년(경애왕 3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국운이 위태롭자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한다. 왕건은 구원병을 이끌고 달구벌(대구)에 입성하지만 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고 만다. 명장 신숭겸의 지략으로 구사일생 비슬산으로 피신한 왕건은 이곳 굴에서 3일간 숨어 지낸다. 짙은 안개와 거미들이 동굴 입구에 줄을 쳐주어 안전하게 피신했던 그가 왕 위에 오르자, 고승 영조대사에게 명하여 이곳에 사찰을 건립하고 자신이 숨어 생명을 건진 곳이라 하여 숨을 은(隱)자, 자취 적(跡)자를 써 은적사로 명명하였다.오늘은 자락길 대신 큰골의 포장된 도로를 택했다. 화창한 시월의 오후, 나는 결 고운 햇살이거나 단풍이 들어가는 벚나무 잎이 되어 걷는다. 사박사박 발밑에서 햇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눈길 닿는 곳마다 안온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도둑고양이처럼 엄습하는 이 초조함의 정체는 무엇일까?나의 청춘은 부서지고 없는데 길은 저 홀로 옛날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휴게소 매점에서는 퉁퉁 불은 어묵이 손님을 기다리고,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가요가 마중을 나온다. 세월 속에서도 늙지 않는 풍경들이 마음을 적신다. 아이의 재롱을 사진에 담는 젊은 부부의 환한 이마가 예뻐 보이고, 도토리를 찾아 헤매는 다람쥐의 불안한 눈빛까지도 아름답다. 세상은 변화를 찾아 늘 쫓기듯 바쁘다. 도태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 새로 난 도로 위를 질주하는 차들의 소리가 아우성처럼 들린다. 젊은 날엔 나도 무리 속에서 존재감을 키우며 살아 왔다. 느긋한 여유는 권태롭게 느껴졌으며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다. 나이가 들면서 내 안의 소리를 듣는 기회가 잦아졌다.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면, 자신을 좀 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아는 사람보다 조금 더 내려놓을 줄 알고, 배려할 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산란기에 접어든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듯, 남은 시간은 낮고 겸허한 세계에서 유영하고 싶다.가파른 길 위에서 은적사가 기다린다. 봄날 한 철 화사하던 자목련은 핼쑥한데, 보랏빛 국화는 유난히 향이 깊고 싱싱하다. 비바람과 천둥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꿈을 키워온 영광의 결실이다. 내게 다시 청춘이 주어진다면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삶은 상실의 아픔이 따른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커다란 파초 잎사귀를 타고 놀던 햇살과의 조우 앞에서, 나는 숨을 죽이고 산사의 오후에 빠져드는데 친구는 거침없이 대웅전으로 향한다. 108 염주를 손에 걸고 아주 천천히 절을 시작한다. 기도하는 모습만큼 성스럽고 가슴 뭉클한 풍경이 있을까. 그녀는 순간순간 108송이 꽃으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정성을 다하는, 가냘픈 새의 날갯죽지 같은 그녀의 몸짓에서 나는 인생을 읽는다.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삶에는 사막이 있고, 오아시스도 있다. 바람이 어느 곳에서 불어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순풍 속에서 자기를 낮출 줄 알고 역풍 속에서는 의연하게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무념으로 절을 하는 이 시간, 모든 번뇌는 사라지고 아픔은 승화되지 않을까. 그녀 곁에서 나도 조용히 절을 한다.이국의 처마 밑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고 꿈을 키우는 파초의 생명력을 바라보며 대웅전 댓돌에 앉아 땀을 식힌다. 나를 나답게 이끌어주는 힘의 원천은 따뜻한 감동과 경이로움이다. 상투적인 만남의 지속성이 주는 무의미함이나 냉정함이 감도는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다. 낮은 바람에도 풀잎이 흔들리듯 건강하고 따뜻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삶이 공허하거나 허기감이 일 때,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앞산을 오르리라. 낙엽이 지는 소리,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의 몸짓, 바람이 까치발로 개울을 건너며 들려주는 이야기를 경청하다 보면, 제대로 나를 사랑하게 되리라.

2015-10-23

대구 팔공산 동화사

중양절을 앞두고 국화 축제가 한창인 동화사를 찾아 나선다. 도로는 연휴 첫날의 신고식을 호되게 치르는 중이다. 속수무책 끼어드는 차량들 틈에 갇혀 나는 느긋하게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를 듣는다. 중저음 첼로 음색이 우울한 마음을 다독인다. 아침 하늘도 나만큼이나 심기가 흐려 보인다.단풍이 든 도로를 휘이휘이 돌고 걸어서 큰 금강문을 통과한다. 승시축제로 모여든 인파들로 수미산 불국정토는 간 곳이 없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국화를 좋아하는 마음만 챙겼던 것 같다. 옛날 스님들이 물물 교환하던 이색적인 장터도 인파에 떠밀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동화사는 493년(소지왕 15년) 극달 화상(極達和尙)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다가 832년(신라 흥덕왕 7년)에 심지 왕사(心地王師)가 중창하였다. 겨울철인데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여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로 대구를 대표하지만 내게는 이름만 익숙한 사찰이다.보물 제 1563호 대웅전 앞마당을 국화로 만든 법계도와 인파가 막아선다. 많은 사람들이 법당에서 절을 하거나 법계도를 돌고, 또 그만큼 많은 사진작가와 관광객들로 절은 북새통을 이룬다. 국화의 자태와 향기는 인파에 갇혀 내게로 전달되지 못하고 멀기만 하다. 낯설고 어색한 풍경 속에서 그만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디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난감하다.때마침 문화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으로 웅장한 동화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적 가치는 생각보다 훌륭했다.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인 봉소포란형의 명당에 위치한 대웅전 용마루에는 호국사찰임을 말하는 녹유가 자랑스럽게 반짝이고 해설사의 낯빛은 더욱 환하다. 점심공양을 하고 가라며 하나 뿐인 식권을 선뜻 내어주는 해설사, 멀기만 하던 동화사가 또 한 겹을 벗고 다가온다.유대감이란 것은 바깥으로 향하는 작은 연결고리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나는 낯선 이들 앞에 서면 습관처럼 문을 닫아걸고 내 안에서 무언가를 구하려고 했다. 내가 찾는 열쇠는 언제나 현재에 있는데 나는 늘 뒷걸음만 쳤다. 무엇이 인파를 싫어하는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까?공양 후 다시 찾은 대웅전은 여전히 북적이는데 지척에 있는 영산전은 조용하다. 법당에서 홀로 기도하는 불자와 흙담 너머를 기웃거리는 코스모스들의 가냘픈 몸짓, 비질 자국이 선명한 선방 마당 위로 번지는 가을, 그 낮고 고요함 속에는 근접할 수 없는 엄숙한 평화가 있다. 또 다른 동화사의 모습이다.아치형 해탈교를 건너고 백팔번뇌 계단을 오르면 300t 원석으로 조각된 통일약사여래대불을 만날 수 있다. 1992년 완공된 약사여래대불은 높이가 17m로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2과가 모셔져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 안고 있는 난제, 통일을 향한 염원에 나도 마음을 모으고 싶다.다양한 빛깔의 국화들이 빚어내는 모형들과 통일대전 앞에 설치된 특설무대, 크고 웅장한 여래불과 인파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허탈감만 안고 돌아갈 것이다. 우측 벽면을 장식한 금색의 반야심경이 이제는 제법 친숙하다. 낮은 소리로 반야심경을 읊고 나니, 군중 속에 홀로 있는 나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다.무리에 섞여 나도 노란 국화들이 길을 여는 화엄일승 법계도를 돌기로 했다.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의 요지를 한 줄 시(詩)로 축약한 법계도는 54개의 각을 이루면서 210자가 한 줄로 연결되어 있다. 시작과 끝이 같은 지점에서 만나는 신기한 미로를 두 손을 모으고 걷는다. 국화향기에 젖고 또 사색에 젖는다.인파 속에서 나를 지키려고 발버둥 쳤던 내가 보인다. 앞서 가는 사람이나 나를 위협하듯 주변을 맴도는 꿀벌은 나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는 게 세상의 이치일진데 무엇을 그리 두려워 했던가. 경계 짓는 마음이 없으면 어디서나 편안해질 수 있다.우울했던 아침, 먼 데서 걸려온 친구의 전화 한통이 유난히 반갑고 낯선 타인의 웃는 얼굴이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원인과 결과가 서로를 전제로 하여 성립하듯이 기쁨과 슬픔도 어쩌면 맞물려 있다. 가난과 고독 속에서도 순수하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던 시인 천상병의 `국화꽃`이 떠오른다.▲ 조낭희 수필가“오늘만의 밤은 없었어도/ 달은 떴고/ 별은 반짝였다/ 괴로움만의 날은 없어도/ 해는 다시 떠오르고/ 아침은 열렸다/ 무심한 내가 아니라도/ 탁자 위 컵에 꽂힌/ 한 송이 국화꽃으로 나는 빛난다.” 행복은 내 안에 스스로 심어야 한다. 행복을 심고 가꾸는 일은 어렵지 않은데, 다만 소홀했거나 무심했을 뿐이다. 노란 국화를 좋아하던 친구가 떠오른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정을 국화 분 하나에 심어 보내야겠다. 그녀의 방에 국화꽃이 필 때 내 안에도 향기 가득한 별이 뜨리라. 저만치 법계도의 출구가 보인다. 날씨만큼 마음도 청명해졌다.

2015-10-16

순천 송광사 불일암

▲ 조낭희 수필가일상이 버거웠던 젊은 날, 법정 스님은 나직한 소리로 무소유의 가치를 일러주셨다. 스님의 말씀은 바람에 댓잎이 서걱대거나, 물결에 쓸려 내려가는 조약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지치고 힘들 때면 단비처럼 마음을 적셔 주던 분, 나는 몇 번이나 벼르고 별러 불일암을 찾았다. 불일암은 송광사의 사내 암자로 고려시대 자정국사가 창건하여 자정암으로 불리었다. 몇 차례 중수를 거듭했지만 6.25 전쟁으로 퇴락하여, 1975년 법정스님이 중건하면서 불일암으로 불리며 스님의 명성만큼 유명세를 타게 된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종교를 초월하여 각박한 시대와 황량한 가슴에 윤기를 더해 주었다.키 낮은 대나무 사립문이 한쪽 문만 열고 기다린다. 자기를 낮추고 들어오라는 뜻일까 컴컴한 조릿대 숲 터널이 이어진다. 불이문과도 같은 대숲 터널을 통과하면 피안의 세계처럼 불일암이 자리 잡고 있다. 감나무 한 그루가 쏟아지는 가을빛을 무심히 맞으며 반긴다. 정적이 흐르는 아늑한 세계 앞에서 나는 얼어붙듯 멈춰 서고 말았다.철 지난 채소들은 윤기를 잃어가고 축대 위에는 불일암이 겸손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고요와 평화, 가을 햇살과 불일암의 신성한 만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조용히 돌계단을 오르는 내 앞에 `정진 중, 묵언`이라는 팻말이 막아선다. 키 큰 오동나무와 후박나무도 좌선 중이다. 묵언이란 말에서는 몸짓 언어도 제약을 받는다. 내 몸이 이토록 조심스러울 수가 없다.선뜻 암자 앞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마당 한켠에 놓여 있는 나무 의자에 앉는다. 암자는 굳게 문을 닫은 채 숙연하고, 댓돌 위에 놓여있는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유난히 고결해 보인다. 흑백영상 같은 소박함이 마음을 따뜻하게 밝힌다. 채워도 채워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가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덩달아 불안해지곤 했다. 가질수록 두려움에서 놓여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물질뿐만 아니라 무언가에 가치를 두는 순간 그것을 상실할까 두려움과의 동거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후박나무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잎을 날린다. 떨어진 잎은 남김없이 갈색이다. 후두둑후두둑 비 듣는 소리가 일품인 후박나무를 올려다본다. 잘 뻗은 줄기와 무성한 잎에 미련을 두지 않고 버릴 줄 아는 나무의 성품을 닮고 싶었던 걸까. 스님은 일본 목련이라 불리는 잎이 큰 후박나무를 사랑하고 지금 그 아래 잠드셨다.스님이 손수 만드신 낡은 나무의자, 빠삐용이 주인 없이 외롭다. 인생을 낭비한 죄로 절해고도에 갇힌 빠삐용을 떠올리며 이름 붙였다는 의자 위에는 방명록과 책갈피가 마련되어 있다. 필요한 분은 하나씩만 가져가라는 글귀 앞에서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어디 있는가? 모두 한 때일 뿐, 그러나 그 한 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 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에서 -책갈피에 적힌 글이 둔중한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스님은 세속의 명리와 번잡함을 피해 이곳에 칩거하여 한 달에 한 편의 글로 세상과 소통하며, 청빈의 도를 실천하셨다. 낮고 부드러운 가르침이 불일암 곳곳에 숨어 있다. 스님이 떠난 지도 수년이 흘렀건만 그 온기와 감동은 여전히 그대로다. 잠시 고단한 몸을 내려놓고 명상에 잠기고 싶다. 투박한 나무의자에 다시 걸터앉는다. 아무런 감정의 소요나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욕심에 눈이 멀다가 때로는 홀가분해지는 마음, 끊임없이 불행과 고통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내 안에 잠든 에고의 정체는 무엇인가? 침묵 속에서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본다. 두어 차례 사람들이 대숲 터널에서 빠져나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둘러보거나 댓돌 위에 앉아 가을볕을 쬐다 사라지곤 했다. 커다란 후박나뭇잎이 가볍게 낙하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무하도록 간결하다. 그 동안 내 삶은 크고 작은 소유욕으로 점철되어 온 것 같다. 침묵만이 감도는 불일암 마당에서 모처럼 상쾌한 죽비소리를 듣는다. 내면이 고요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은 텅 빈 상태를 갈구한다. 무(無)가 아니라 무궁무진한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空)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바람이 오동나무 잎사귀를 간질이며 지나가지만 미동도 않는다. 대신 도토리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다. 충만한 행복에 빠져 있는 순간 저혈당 증세로 온 몸에 기운이 빠진다. 하늘이 노랗다. 점심시간을 넘기고 오랜 시간을 머문 탓이다. 예측이나 한 듯 바구니 안에 준비되어 있는 쿠키와 비스킷이 나를 구해 주었다. 불일암이 지닌 유일한 소유, 그것조차 가치 있고 아름다웠다.차고 넘치는 나의 소유는 언제쯤 남을 위한 배려로 이어질까. 애착과 두려움을 버리고 비우고 베풀면서 살아가기를 꿈꾸었지만 늘 제자리걸음이다. 대나무 숲길을 빠져 나오는 동안 무언가의 다짐으로 꿈틀대는 에너지를 보았다. 이번에는 믿어 보기로 했다. 머뭇거리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

2015-10-09

상주 갑장사

▲ 조낭희 수필가산길은 가파르고 인적이 없다. 가을의 숨결이 은은히 숲 속을 떠돌 뿐, 햇살은 나무 위 높은 곳에서 어른거리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등줄기가 촉촉해져 올 무렵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 모처럼 동생과 둘이서 갑장사를 오른다. 해발 806m의 그리 높지 않은 갑장산은 연악이라 불리기도 한다. 뾰족하면서도 모가 나지 않아 상주사람의 순후한 인심을 대변하는 산이다. 게다가 내 유년의 기억을 오롯이 품고 말없이 받아주는, 거부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핏줄과도 같다. 상사바위와 백길바위, 사선암이 풀어내는 다양한 전설과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갑장산의 9부 능선에 갑장사(甲長寺)가 자리 잡고 있다.절은 상주 4장사(북장사, 남장사, 승장사) 중 으뜸가는 사찰로 고려 공민왕 22년(1373) 나옹선사가 창건했다. 기도발이 영험하다고 알려진 절은 암자처럼 작고 소박하다. 1990년 법당이 화재로 전소하자 세웅 스님의 노력으로 청정한 도량으로 거듭난다. 스님은 수년 전에 열반하셨지만 갑장사는 그 뜻을 이어 청빈하고 실천적인 정신을 그대로 지켜나가고 있다.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해마다 우리 남매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소풍 오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여름 더위가 한 풀 꺾이면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을 메고, 다래와 머루가 익어 가는 가파른 산길을 다람쥐처럼 잘도 올랐다. 할아버지는 현판의 글씨를 풀이해 주시기도 하고 이곳을 빛 낸 학자들의 일화도 들려주셨지만, 어두컴컴한 법당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불자들 뒤에서 훔쳐본 무섭고 두렵던 부처님의 존재만은 잊을 수가 없다.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서글픔을 어렴풋이 느낀 소중한 경험이었다.작은 부도를 지나고 발끝에 와편들이 채일 무렵 갑장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단풍나무와 산벚나무가 마당 끝에서 반짝인다. 잊었던 기억들이 흑백필름처럼 돌아가고 가슴이 뛴다. 기억은 퍼즐 맞추듯 빨라진다. 긴 돌계단을 오르는 순간, 가을빛을 쬐고 있을 퇴락해가는 법당에 대한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으며, 덩달아 유년의 기억도 달아나 버렸다. 새 옷을 차려입은 소년과도 같은 사찰이 맑고 티 없이 서 있을 뿐이다. 40여 년만의 해후는 어색하기만 하다.절 뒤편에 넓게 펼쳐진 대숲과 마당을 지키는 삼층석탑만 옛 모습 그대로이다. 작은 텃밭에는 배추가 참선하듯 정갈히 자라고, 추녀 끝에 달린 풍경 너머로 푸른 하늘만 눈부시다. 법문을 하지 않고 참선과 울력으로 몸소 불성을 보여주신 이 시대의 선지식 세웅 스님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두 손을 모은다.깨끗이 비질된 마당에서 선잠 든 햇살이 깰까 조심조심 법당 문을 연다. 어떤 부처님이 계실까 호기심 가득한 나를 금동관세음보살상이 반긴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그 옛날의 부처님이 아니다. 정성을 담아 삼배를 하는데 뿌듯한 무언가가 올라온다. 험한 세상에 청빈한 정신을 잃지 않고 품격을 지켜온 갑장사가 고맙다. 유교정신이 강한 선비고장에 어울리는 등불 같은 사찰이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한눈을 팔지 않고 고향을 지켜온 아름다운 혼불 앞에서 나는 짧았던 내 유년을 떠올린다. 들과 산으로 마음껏 뛰어놀던 그 때도 지금처럼 하루해가 짧았다. 어둑해지면 집집마다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총총히 집으로 흩어지던 내 어린 친구들과 형제들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 그토록 소중했던 기억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가슴에 애절한 그리움이 쌓일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내 곁에는 흰머리 성성한 동생이 그 옛날의 할아버지처럼 어렵고 고답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을 지키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가신 것처럼 동생에게서 어쩔 수 없는 회귀본능을 읽는다. 도시에서 청춘을 소진한 그가 새벽이슬 맞으며 살아가는 강아지풀이 되기를 꿈꾸는 것 같다. 가슴이 젖어온다.뿌리에 대한 자긍심과 애향심은 거대한 자본의 흐름에 영혼을 팔지 않도록 나를 지켜 주었다. 자유를 꿈꾸던 내게 거추장스럽고 때로는 족쇄 같았던 뿌리, 돌이켜 생각하니 수십 억 유산보다 더 풍유롭게 나를 키워준 것들이다. 가난하던 시절, 내 어린 날의 영혼은 결코 초라하거나 남루하지 않았다. 그 저린 기억 저편으로 갑장사가 꿋꿋하게 서 있다.많은 것을 이루고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은 삭막해진 내면과 자주 맞닥뜨린다. 도시는 끊임없이 서로를 비교하며 저울질한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상대적 박탈감이나 열등감으로 한없이 초라해질 수 있다. 평범하고 소박한 삶은 자존감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는 갑장사를 바라보며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한 편을 떠올린다.“한때 그렇게 빛나던 광채가/ 지금 내 눈에서 영원히 사라진들 어떠랴/ 풀의 광휘의 시간, 꽃의 영광의 시간을/ 다시 불러오지 못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영생불멸의 노래`)

2015-10-02

남해 금산 부소암

이정표를 따라서 부소암을 찾아간다. 웅장한 암석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길은 능선을 따라 친절하게 흐른다. 작은 헬기장을 만나고 쭉 뻗은 나무 계단을 지나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은 없다. 가을 오는 소리로 가득한 숲 속에 오솔길만 홀로 외롭다.갑자기 하늘이 뚫리고 우뚝 솟은 부소암(扶蘇岩)이 툭 트인 남해를 배경으로 반긴다. 사람의 뇌를 닮은 듯한 거대한 바위는 협곡 건너편에서 하늘과 교신을 하듯 신령스럽다. 중국 진시황의 장자 부소가 유배되어 살았다는 전설과 단군의 셋째 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이곳에서 천일기도를 했다는 설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경이롭다.신비한 부소암(扶蘇岩)의 품에 안겨 어딘가 부소암(扶蘇庵)이 자리 잡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바람과 운무가 길을 잃고 비틀대는 철재 다리를 건넌다.침묵에 싸여 있던 바위 협곡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든다. 다랭이 논들은 바다를 향해 달려 나가고, 부소암(扶蘇岩)은 하늘을 우러르며, 나는 설렘을 안고 암자를 찾아간다.문학과 예술, 낭만이 살아 숨 쉬는 남해 바다는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술렁댄다. 서포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하며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남겼다는 노도와 앵강만의 다숲길이 어디쯤 있는지는 크게 궁금하지 않다. 금산은 쪽빛 바다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바다는 신령스런 금산을 흠모하며 날마다 시를 읊으며 살아갈 것만 같다.남해를 유난히 사랑하는 시인과 오래 전 이곳에 온 적이 있다. 그녀는 2월 말쯤의 남해 바닷빛이 가장 아름답다며 함께 가자고 재촉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뜨는 날이면 남해 바다가 그리워 한달음에 어둠을 뚫고 달려왔다는 무용담을 들으며, 나는 그녀의 시보다 자유로운 영혼과 삶의 적극성을 더 좋아했다. 카리브 해의 샴페인 거품 빛깔 같은 바다를 떠올리며 다가서던 내 앞에, 수줍고 겸손한 남해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부소암을 끼고 좁은 오솔길을 돌자 철재 출입문이 열려 있다. 암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보리암로 693번지가 천상이 아님을 확신시킨다. 돌로 만든 성곽처럼 좁고 운치 있는 계단은 여전히 피안의 세계로 향하는 출구 같다. 달리아가 수줍게 피었고 암자는 정숙하기를 요구했지만 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붉은 양철지붕을 인 작은 암자가 적요하게 누워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수행 중이다.법당에서 들려오는 회심곡을 들으며 마당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퍼렇게 멍이 들도록 부서지고 부서지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될 수 있을까. 금산의 든든한 가슴팍에 안겨 온갖 잡념과 근심을 털어낸다. 쪽빛 바다가 아닌들 어떠랴. 흐린 날의 바다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허공이 있어 좋다.부소암 현판은 어린 아이처럼 눈빛이 맑은데, 암자는 노쇠한 몸을 지탱하느라 힘겹다.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집착은 상처를 낳고 욕심은 또 다른 탐욕을 부른다. 옥돌이라 여기며 집착했던 것들이 어쩌면 푸석돌일 수 있다. 가끔은 좁은 오솔길을 걸어서 신선처럼 살아가는 부소암에 들러 마음을 비우는 것도 좋으리.스님의 인사에 뒤늦게 석가모니불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한다. 작은 암자가 품고 있는 기운은 참으로 맑고 편안하다. 보물 제 1736호 대방광불 화엄경 진본 권 53이 나온 이곳에 새 건물이 들어선다고 했다. 옆구리가 툭툭 터져 쓰러질 것만 같은 암자를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두고 싶다. 사라져가는 것은 아름다운 법, 머지않아 우리는 새 건물에 또 익숙해져 갈 것이다.평상에 앉아 스님이 타주신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시종일관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 스님과의 대화는 물 흐르듯 거침없고 편안하다. 속세에서 자주 만나온 지인 같다. 오랫동안 수행 생활을 해 오신 선조 스님은, 산중에서 홀로 도를 깨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들과 호흡하며 잡념을 없애는 것도 도라고 하신다. 일에 몰두하여 잡념을 없앤다는 스님의 일상이야기가 곧 법문이다. 스님의 화려한 이력보다 소탈하고 평범한 언행 속에 숨어 있을 둔중한 깊이를 찾아내는 것이 내 몫이다.▲ 조낭희 수필가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우리는 급히 법당으로 몸을 피하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뜰과 마당 위로 거침없이 내리꽂히며 수직으로 죽어가는 소나기의 장렬한 죽음, 순식간에 운무가 시야를 삼키고 법당 앞에 선 단풍나무와 굴참나무만 덩그러니 남았다. 나를 떠받치고 품어주던 대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누가 남해의 쪽빛바다가 없으면 금산이 없다고 했던가. 나는 운무 가득한 부소암에 갇혀 삶의 어느 부분이 아닌, 나라는 존재 자체를 생각한다. 스피커에서는 금능 스님이 `먼 산`을 노래하고 나는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을 떠올린다. 울면서 돌 속으로 떠나간 그 여자가 되어도 좋고, 남해 푸른 하늘가에 혼자 있는 내가 되어도 좋다. 아니면 금산 부소암에서 잠깐 살다간 소나기가 되어도 좋다. 이곳에서는 인연과 집착에서 놓여나 홀로 서 있는 나를 신뢰할 수 있으니까.

2015-09-18

군위 압곡사

▲ 조낭희 수필가유영하듯 이어져 있는 길을 달리다 보면 이내 사색이 거추장스러워진다. 몇 채 되지 않는 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살아가는 산골마을에는 정갈하게 다듬어놓은 밭이랑 사이로 부는 바람처럼 욕심 없고 순박한 사람들이 시간을 잊고 살아갈 것만 같다. 찔레꽃이 하얗게 피는 봄이면 마을은 햇살에 반사되어 그야말로 눈이 부시도록 투명하다. 압곡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7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아미산 봉우리에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던졌더니 이곳에 떨어져, 절 이름을 압곡사(鴨谷寺)라 지었다. 배 모양을 한 선암산의 조타석 자리에 법당을 앉혀 군위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기록되어 있다. 물을 상징하는 수태사가 산 너머에 있어 풍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명당인 셈이다.방금 지나온 사하촌이 옹기종기 발아래 펼쳐지고, 몸은 구름 위를 산책하듯 가볍다. 노송들이 줄지어 선 비탈길을 휘휘 돌아서 내려가면 불이문과도 같은 돌계단을 올라 압곡사 마당에 이른다. 하늘과 산들이 오로지 압곡사를 위해 존재하듯 아늑한 지형 속에서, 170년 된 전각은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의상대사와 사명대사를 비롯해 수많은 고승이 득도한 곳으로, 선사 아홉 분의 진영이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압곡보궁이라는 전서체의 현판이 사리를 봉안했다는 화려한 과거를 말해준다. 지금은 대중과의 소통을 꾀하기보다는 빈 하늘처럼 청정하고 내공이 깊은 사찰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적막하던 산사가 오늘은 부산하다.10여 년 전에 만난 압곡사의 첫 느낌은 강렬했다. 고독을 사랑하되 결코 무력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 한 계절이 빠져나가는 마지막 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사에 초연해 보이는 그 모습이 좋아, 불자인 친구를 채근하여 달려오곤 했다. 절은 늘 적막했다. 한 번도 스님이나 기도하는 불자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압곡사는 한결 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고 품어주었으며 또 배웅해 주었다.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아미타부처님께 108배를 하고 나오는데 스님이 차를 권하신다. 뜻밖에 주지 보안 스님과 젊은 지산 스님이 공양주 보살 없이 살림을 꾸려가고 계셨다. 정갈한 살림 솜씨만큼이나 정겨운 도반으로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특별히 선방에서 수행하시던 각혜 스님까지 오셔서 잔칫집처럼 활기가 넘친다. 첩첩 산중에서 각혜 스님이 만들어 주신 비엔나커피 맛은 참으로 환상적이다.스님 바리스타의 재담과 멋이 어우러진 산방 카페를 초가을 햇살이 기웃거리고 뜰 앞의 채송화가 부러운 시선을 던진다. 처음 압곡사를 찾았을 때 난생 처음 받아보던 소박한 공양이 떠오른다. 나는 그 날 적막감이 감도는 산사의 분위기에 홀린 듯 빠져 들었다. 햇살이 꾸벅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했다. 눈이 시린 한낮의 풍경은 과거로 향하는 거대한 늪 같기도 하고 마이크로 세계처럼 자연의 숨결이 생생하게 살아서 쿵쾅댔다.실핏줄처럼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조촐한 평화가 넘실대는 압곡사가 내 첫사랑의 산사인 셈이다. 마당 위로 쏟아지던 은빛 햇살과 바람의 숨결, 파리한 잎새의 정적이 그리운 날이면 마음이 먼저 달려온다.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전생에 있었던 일처럼 아련한 기억들이 눈물처럼 번져오는 곳이기에, 나는 공감할 수 있는 벗들에게만 소개한다. 그리고 내 은밀한 아지트가 함부로 오염되지 않기를 잊지 않고 기도한다. 山堂靜夜坐無言(산당정야좌무언)/ 物物拈來無?碍(물물염래무가애)/ 着得心頭切莫忘(착득심두절막망)/ 六塵心識本來空(육진심식본래공)산속 토굴의 밤은 고요한데 말없이 앉았으니/ 오고가는 경계마다 걸림이 없도다/ 마음 끝자리를 간절히 붙잡아서 잊지 말지어다/ 바깥 경계인 객관과 주관은 본래 공하노라.나의 이기심을 비웃듯 지산 스님이 마당에 서서 주련을 읊고 풀이해 주신다. 주지 스님과 혜각 스님은 짧은 커피 타임을 끝내고 예초기를 메고 햇살 속으로 걸어가신다. 붉은 샐비어와 맨드라미가 경청하는 마당에는 관조하는 즐거움에 젖은 눈빛들이 모여 있다. 백로인 오늘 가을햇살은 유난히 따사롭고 압곡사는 평화롭다. 마당 끝에 모여 그리움을 달래는 장독들을 바라보며 나는 텅 빈 빨랫줄에 젖은 승복과 고추잠자리를 그려 넣는다.석탑도 석등도 없는 마당이 울적해 보일 때면 연대감을 상실한 자의 소외감 같은 외로움이 먼저 떠올려지던 압곡사였다. 석탑 주변에 잡초가 무성하고 늙은 느티나무의 흐린 시선이 애잔해 보일 때면 마음은 더욱 심산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점잖은 주지 스님과 지성을 갖춘 지산 스님의 따뜻한 눈빛과 행동 속에서 압곡사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읽었다.젊고 희망찬 압곡사의 속살 앞에서 오늘 하루도 행복했다. 일을 하시던 스님들이 집으로 향하는 나와 친구에게 방금 딴 호두 세 알씩을 건네주신다. 십 년 동안 만나 왔던 압곡사와 오늘 하루 새로운 모습의 압곡사, 어느 것이 본래 모습이런가? 생각에 잠긴 내게 압곡사가 속삭인다. 시방삼세가 한 덩어리라고.

2015-09-11

전남 구례 천은사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로 알려진 천은사는 신라 덕흥왕 3년(828년) 인도의 승려 덕운조사에 의해 감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고려 충렬왕 때는 남방 제일 선찰로 승격되기도 했지만 화재로 소실되고 1679년(숙종 5년) 단유선사에 의해서 중건되었다. 중건 당시 샘가에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한 승려가 잡아 죽였더니 그 후 샘이 말라버렸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하여 천은사라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뒤 원인 모를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하나인 원교 이광사가 수체(水體)로 `智山 泉隱寺`라는 글씨를 써서 수기를 불어 넣고 일주문 현판을 달았더니 다시는 화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 일주문에 귀 기울이면 현판 글씨에서 물소리가 연연히 들린다고 한다.과연 일주문은 물 흐르듯 부드러운 글씨를 자랑하며 나를 반긴다. 정교한 조각과 오래된 단청에 어울리는 유려한 서체 사이로, 23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잃고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외로운 삶이 떠오른다. 결코 녹녹치 않았던 삶의 그림자가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역적의 후손이라는 오명 속에서 출세의 욕망을 버리고 귀양지를 전전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서체에 대한 열정과 꿈이 그를 버티게 했으리라.무지개가 드리워진다는 수홍루의 반영과 작은 호수의 풍광 앞에서 나는 버려야 할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제대로 인식하며 살아가는지 반문해 본다. 버리면 반드시 다른 길이 보이는 법, 그런데도 긍정적인 희망을 외면하고 지나치게 스스로를 닦달하며 엉뚱한 것에 집착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보다 위기 속에서 지혜롭고 의연하게 대처한 그의 철학이 더 존경스럽다.현판도 없는 천왕문이 상념에 젖어 있는 나를 흔든다. 잠시 생각을 비우고 부처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한 예를 갖춘다. 인적 없고 고요한 마당, 누하진입식이 아닌 보제루도 문을 닫은 채 고요하다. 지척에 있는 화엄사의 명성에 가려 힘들 것만 같은 천은사의 아픔과 고독이 먼저 떠오른다. 상대적 열등감이나 박탈감만큼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기우였다. 재야에 묻혀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선비 같은 지조와 품격을 뒤늦게 발견한다. 어쩌면 화엄사가 곁에 있어 천은사의 소박한 절제미가 더 빛나 보이는지도 모른다.주법당 극락보전은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용마루 끝장식의 용두를 비롯하여 무려 13마리의 용을 키우고 있다. 좌우측에는 황룡과 청룡의 머리가, 대각선 쪽에는 꼬리가 조각되어 눈길을 끈다. 용을 찾으며 다양한 조각들이 펼쳐내는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어 유영하는 것도 재미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마당은 연못이고 극락전은 연꽃이기에 연못으로 뛰어드는 형상의 수달과 하마는 생동감이 넘친다. 수백 년 전의 지혜로운 상상력과 창의성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무엇보다 극락보전 현판이 원교 이광사의 글씨라는 것을 알고 가슴이 더 두근거린다. 제자인 창암 이삼만이 쓴 보제루 현판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천부의 필재(筆才)를 타고난 창암은 병중에도 하루에 천 자 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벼루를 세 개 구멍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아 없앴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미치도록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다르면서도 닮은 듯한 창암과 원교의 글씨를 번갈아 보노라니 두 분의 모습을 대하는 것 같다. 원교가 쓴 극락보전은 창암에 비해 기름지진 않지만 힘이 넘쳐 볼수록 매력적이다. 창암은 해서의 기본 되는 50자를 매일 반복 연습할 정도로 기본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보제루 현판은 구김 없이 맑게 자란 사대부 도령의 청정한 기운을 보는 것 같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보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전해오는 영혼의 울림이 더 감동적일 때가 있다.천은사가 어떤 국보급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지 오늘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산사 마당에 서서 조선의 두 명필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햇살만 가득할 뿐, 바람 한 점 없다. 글씨가 살아나와 바람이 되고 물소리 되어 가슴을 적셔주기를 바라보지만 나의 부족한 안목과 심미적 감성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며 나를 다독인다.▲ 조낭희 수필가목탁소리 들리지 않아도 가슴에 법문이 이는 절, 계곡물은 쉼 없이 흘러가고 담장너머 나무들의 자태도 수려하다. 우거진 녹음과 새소리를 벗 삼아 숲속으로 난 길을 걷고 싶다. 밥술이나 뜨는 시골 유생의 설익고 떫은 자존심이 아니라 고요한 품격과 여유가 넘치는 절, 천은사는 겸손해서 좋다. 천 년 고찰의 품에 안겨 자라는 300년 된 보리수나무를 올려다본다. 오래된 석축과 단아한 담장에 기대 앉아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싶다. 호젓한 숲길을 걸으며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도 싶다. 빈곤한 언어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던 나는 사라지고, 분명 내 안에는 숲이 자라고 맑은 햇살과 물소리가 넘실되리라.

2015-09-04

선산 도리사

▲ 조낭희 수필가녹음 짙은 가로수 터널을 달린다. 한때는 화사한 벚꽃잎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다 분분히 떨어졌을 시린 날의 기억을 안고 길은 묵묵히 산을 향해 달린다. 이내 가파른 산길이 나타난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리고 있는 성성한 하늘빛, 천 년 고찰이 만든 숲 터널은 오르막에서도 지치지 않는다. 자동차로 굽이굽이 계곡이 없는 산길을 오른다. 도리사는 신라불교 초전법륜지로 잘 알려진 불교의 성지이다. 19대 눌지왕 때(417년)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로 알려진 아도화상이 포교를 위해 처음 세운 신라불교의 발상지이다. 아도화상이 수행처를 찾기 위해 다니던 중 한겨울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좋은 터임을 알고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짓고 이름을 도리사로 지었다.아도화상이 모셔온 세존 진신사리가 사리탑 보수 공사 중 국보 제208호인 금동육각사리함에 봉안되어 발견된 후 도리사는 더 유명해졌다. 하마(下馬) 대신 하차(下車)라는 표지석과 산사 음악회를 알리는 커다란 현수막 앞에서 대중과 호흡하려는 도리사의 발 빠른 변화를 읽는다. 높다란 계단 위에서 홀로 아래를 굽어보는 적멸보궁과 여름의 막바지를 장식하는 배롱나무꽃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호흡을 고르며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배롱나무꽃의 슬픈 화사함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간결하고 단아한 적멸보궁 앞에 선다. 내 안의 잡다한 생각들이 사라지고 꽃이 열리듯 마음이 비워지기를 바란다. 선뜻 법당에 들어설 수가 없다. 겹겹이 가로막은 산들과 너른 들녘을 헤치며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멀리 구미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우울한 마음을 서리서리 풀어낸다.가끔은 소통이라는 그럴싸한 희망 앞에서 출구를 잃고 비틀거릴 때가 있다. 진심이 통하지 않는 삶 앞에서는 유난히 허기가 인다. 대화 속에서 상대의 진실성이 보이지 않으면 나는 입을 닫아버린다. 상대를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노련함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람 사이의 궁합이 결정된다고 믿기에, 갈등의 실마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스타일의 문제일 경우가 많다.어쭙잖은 진실 하나만 걸치고 살아가는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곧잘 상처를 받는다. 사람들은 이것저것 손익을 계산하며 털어버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철이 덜 든 채로 늙어가고 싶다.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는 사리탑을 향해 벽 전체가 유리문인 법당 안에서 기도를 한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은 특별한 휴가 없이도 행복했다. 절을 찾아다니며 나와의 대화만으로도 일상은 눈물날 만큼 고마웠다.무엇이든 순탄하면 재미가 없다.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휘청거리면서 성장하는 법이다. 스스로를 격려하며 극락전으로 향한다. 과거 선방으로 쓰였다는 태조 선원과 오래된 단청 옷을 입은 정방형 다포 팔작지붕인 극락전, 그 앞을 지키는 보물 470호 석탑이 태곳적 은은함을 발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고려 시대로 추정되는, 소박하고 안정감 있는 석탑에 끌려 탑돌이를 시작한다. 화려함이나 우아함을 거부하고 병풍처럼 둘러싸인 기단과 벽돌을 쌓은 듯한 탑신 부분의 안정감 있는 비율이 든든해 하염없이 탑을 돈다. 상념에 빠져 있다 퍼뜩 정신이 든다. 비탈진 솔숲 아래 돌계단 길을 홀로 걷고 있다. 집착과 갈등이 없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피안의 길처럼 아늑하다. 무리 지어 하늘을 가린 노송들 사이로 수성한 기운이 자욱하다. 아도화상이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을 피해 수행했다는 좌선대와 사적비가 침묵하며 서 있다. 얼굴빛이 검다는 묵호자가 상서로운 기운을 풍기며 좌선하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히자, 아무도 몰래 높고 평평한 좌선대 위에 나도 맨발로 올라 정좌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나오는데 배불뚝이 중국 스님, 포대화상의 넉살 좋은 웃음이 눈에 거슬린다. 천 년 고찰 도리사에 안개처럼 스며드는 변화의 기운들이 안타깝지만, 시대의 흐름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숙고의 선택이었으리. 주차장에서 반대편으로 이어진 나무데크길을 걸으며 삶은 선택의 연속임을 깨닫는다. 수려한 풍경을 발아래 드리운 전망대 위에 서서 몸과 마음이 구름처럼 가벼워지기를 기도한다.뒤늦게 수십 개의 나무 좌선대를 발견한 것은 얼마나 운이 좋은가.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생각에 잠기거나 대화를 나누며 여름의 하오를 즐긴다. 특별히 나를 위한 좌선의 공간임이 틀림없다. 자리를 잡고 앉자 솔바람이 숨결처럼 위무한다.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던 시절 읊어대던 푸쉬킨의 시구가 떠오른다. 나는 나를 위해 속삭이듯 읊어본다. 키 작은 가로등이 눈을 감고 경청해 주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서….“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마음 아픈 날에는 가만히 누워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먼 미래에 살고/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 되리니.”

2015-08-28

의성 고운사

인가를 벗어나 한참을 달려서야 고운사 입구에 닿았다. 잔디밭이 넓은 현대식 전원주택 몇 채가 눈길을 끌 뿐 천년 고찰에 어울릴 법한 사하촌이나 식당도 없다. 산문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한낮의 적막과 싸우며 여름 과일을 팔고 있다.노송들과 잡목이 어울려 만든 천년의 숲, 그 사이로 매끈한 흙길이 누워 있다. 여름이 짠 푸른 그늘과 고요만이 머무르는 길은 마치 꿈 속에서 본 듯하다. 일주문까지 걷기로 했다.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인다. 아주 느리게 끝도 시작도 없는 곳으로 거슬러 오르는 것도 같다. 이 길은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고운사의 순결한 자존심이다.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는데, 최치원이 여지·여사 대사와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바꾸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당시 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를 가진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고운사,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이 좋다. 그러나 경내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라 약간은 산만하고 어수선하다. 무언가 서먹서먹하고 낯설다. 잠시 호흡에 집중하며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이 무심한 허공, 아득한 억겁의 세월 속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고운사도 심드렁하게 나를 지켜볼 뿐 표정이 없다.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천천히 경내로 들어서다 연세 지긋한 해설사를 만난 건 행운이다. 애향심인지 불심인지 분간키 어려운 진지한 자세와 해박한 불교지식 앞에서 나의 왜소한 젊음을 발견한다. 다양한 전각을 소개하고 주련을 풀어낼 때마다 잠자던 고운사가 생기를 띠며 질서 있게 깨어난다.18개의 긴 기둥이 계곡 밑에서부터 거대한 몸체를 떠받치고 있는 가운루는 사찰 중심을 흐르는 계곡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전각이다. 공민왕이 두 번의 내란과 노국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이곳에 와서 만사를 잊고 선인으로 돌아가고파 현판을 남겼다고 한다.구름 위에 뜬 누각, 구름 같은 필체에 어울리지 않게 판문은 굳게 닫혀 있고 온통 검은 휘장이 쳐져 있다. 휘장을 걷고 가운루에 올라서니 마룻바닥에는 수확한 감자를 말리고 있는 중이다. 누각에 앉아 부용반개형(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 기운을 느껴 보고 싶은데 참으로 어이없다. 불이문과도 같은 가운루를 통과해야 극락전에 이를 수 있도록 설계된 데에는 분명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지금은 계곡을 막아 그 위에 대웅전과 범종각을 지어 옛날의 운치는 느낄 수 없고, 양옆으로 새 길이 생겨 가운루는 제 역할과 가치를 잃고 외로움만 삼킬 뿐이다. 등운산 너머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면 절로 시 한 수 떠오를 법도 한데, 기껏 농작물을 보관하거나 건조시키는 창고로 전락하다니 참으로 애석하다.가운루를 건너면 계곡을 비켜 앉은 우화루와 만난다. 꽃비가 내린다는 뜻의 불교적 색채를 풍기는 우화루(雨花樓) 현판은 보이질 않고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인 우화루(羽化樓)만 쓸쓸히 실내를 지킨다. 유교, 불교, 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과 어울리는 누각이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눈을 감고 선인들의 향기를 느낀다.나무 그늘 하나 없는 경내에는 여전히 불볕더위가 어슬렁거린다. 하지만 해설사는 시종일관 온화하고 진지하다. 다양한 질문을 통해 만나는 그의 해박함도 부럽지만 훌륭한 인품의 근원이 더 궁금하다. 정년퇴임 후 뒤늦게 불교공부를 시작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불심 가득해 보이던 얼굴, 놀랍게도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예수님만큼이나 부처님과 사찰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가진, 유연하면서도 확고한 삶의 철학이 존경스럽다.언젠가 들은 고운사의 일화가 생각난다. 오래 전 주지 근일 스님을 프랑스 신부 드봉 주교가 찾아왔다. 드봉 주교는 주지실이 아닌 대웅전 법당부터 찾아가 석가모니 부처님 앞에 큰 절을 올린 후, 예수도 석가도 모두 성인이기에 예를 갖추는 일은 당연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주문 앞, 낡은 선풍기가 삐걱대며 돌아가는 작은 사무실이 가운루 못지않게 멋져 보인다.▲ 조낭희 수필가끊임없이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태곳적 운치는 사라졌지만 고운사는 분명 명당의 기운이 서려 있는 천년고찰로 손색이 없다.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을 정도로 유명한 명부전이나 보물 246호인 석조여래좌상, 이끼가 끼고 깨어져 나간 나한전 앞의 삼층 석탑의 아련한 기억들보다 나를 더 감동시키는 건 구름처럼 높고 유연한 의식의 흐름이다. 자연이든 신이든 얼마나 깊이 교섭하느냐가 어떤 신을 믿느냐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본질을 놓치고 편협한 눈으로 세계를 함부로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고운사에 가면 어떤 자로도 잴 수 없는, 생각 없이 살아가는 내가 잠시 부끄러워지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아주 운이 좋다면.

2015-08-21

구례 화엄사

아침부터 폭염의 방해가 만만치 않다. 영호남의 분수령인 지리산, 그 영산의 기운 앞에서 무엇이 두려우랴. 오랜 벗이 있어 더욱 든든한 여행길이다. 짙은 녹음과 노고단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 소리에 싸여 시원한 일주문이 우리를 반긴다. 의창군이 썼다는 `지리산 화엄사`라는 필체에서 천년 고찰의 웅혼함이 느껴진다.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절의 이름을 화엄경(華嚴經)에서 따서 화엄사라 하였다. 부처님의 세계이며 깨달음의 성지라는 뜻이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종의 원찰로 삼아 머물고, 신라 경덕왕 때는 8가람, 81암자의 대사찰이 되어 남방 제일 화엄대종찰이란 명성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0년(선조 30년) 벽암선사가 복원시켰다.짧은 시간에 화엄사의 모든 걸 알기에는 역부족이기에 낯선 곳이 주는 신선함과 감동을 섣불리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경내를 거닌다. 관광객의 분주한 방문 속에서도 화엄사는 흐트러짐 없는 기운으로 나를 긴장시킨다. 다행히 템플스테이를 담당하시는 유일한 홍일점 비구니, 동호 스님의 맑은 눈빛과 미소 속에서 여성적인 화엄사를 발견한다.절제와 안온함을 갖춘 화엄사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나를 사랑하고 예뻐해야 우주만물 모두를 사랑할 수 있다는 단순한 화두를 잡고 보제루 마룻바닥에 정좌한다. 저녁 예불이 끝났지만 대웅전 염불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물소리 바람소리에 천천히 몸을 맡기자, 함께 온 친구의 존재감도, 처음 만난 인연들도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내면을 고요하게 만들 때만큼 행복한 순간도 없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느낀다. 사찰에서 엄수해야 할 규율과 절제, 화엄사의 구석구석을 느끼고 싶어하는 나의 열정들, 그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걸 알아차린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지 않으면 화엄사는 좀체 속살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긍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좀 더 깊고 높은 곳으로 데려간다.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던 자잘한 감정들도 유순해진다.저녁 예불의 감동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벌써 어둠이 내려앉는다. 나는 다시 한 번 국보 67호인 각황전이 보고 싶다.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비례미로 나를 단번에 압도시켰던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건물이다. 거대한 통나무 기둥이 이음새 없이 5층 높이의 통층을 받치며 위엄을 풍기던 장엄함이 자꾸만 아른거린다.홀로 어둠 속을 걷는다. 완만하거나 가파른 계단들과 석축을 경계로 전각들은 짜임새 있게 잘 구분되어 있다. 가로등 불빛만이 불 꺼진 전각들을 비추며 밤을 밝힌다. 밤바람이 시원하다. 전각들은 어둠 속으로 침몰하지 않고 은은하게 위용을 드러내며 침묵 중이다. 잘 생긴 삽살개 두 마리와 손전등을 들고 순찰을 도는 경비 아저씨를 통해 흐트러짐 없는 또 다른 화엄사를 만난다.누하진입식이 아니라 최대한 키를 낮추고 넉넉한 품을 누구에게나 열어주는 보제루, 기둥은 자연그대로의 나뭇결이 살아 꿈틀대듯 아름답다. 우측으로 돌아서니 저녁 예불을 알리던 법고의식과 타종 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두두둥 둥둥 절도 있는 리듬과 엄숙한 감동이 밀려들고 화엄사는 어둠 속에서 또 다시 생기를 발한다.보제루 툇마루에 가만히 걸터앉는다. 정적만이 감도는 화엄사가 내게로 다가온다. 건물 전체가 국보인 각황전과 6.36m의 거대한 석등의 조화,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봉안한 대웅전, 석축 아래에서 두 전각을 떠받들 듯 우아하고 겸손한 동·서 오층석탑까지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전각들의 적당한 공간배치와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석등과 탑들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다.고즈넉한 밤 풍경에 취해 있다가, 각황전 석등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뒤늦게 발견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돌부처처럼 오래도록 서서 기도를 한다. 끝날 줄 모르는 기도가 나와 화엄사를 긴장시킨다. 호기심은 어느 새 그를 위한 기도로 이어진다. 그는 각황전과 석등을 향해, 나는 일면식도 없는 그를 위해 기도한다.▲ 조낭희 수필가모두가 잠든 밤, 무엇을 저토록 간절히 빌고 있을까? 병상에 누운 가족이나 쓰리고 혹독한 상실의 아픔, 상상력의 범주는 자꾸만 확대되어 간다. 막다른 길 앞에 서 그의 쳐진 어깨가 유난히 외로워 보인다. 절망이 존재하지 않으면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절절한 기도와 염원이 있어 화엄사의 밤은 더욱 평화롭고 안온한지 모른다. 새벽예불을 알리는 목탁소리에 명징해져 오는 기운들, 부처님의 발걸음처럼 낮고 은은하게 젖어들던 타종 소리, 서른 분이 넘는 스님들과 함께 보는 각황전의 새벽예불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친구와 저만치 떨어져서 걷던 구층암 가는 대숲 길, 마음을 씻어내자 바람소리, 물소리가 온 몸에 스며든다. 무언가에 한눈을 파느라 잊고 살았던 고요의 세계, 어쩌면 나는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늘 숲에 들어가서야 숲의 느낌을 기억해 내고 그리워할 줄 아는, 나는 아둔한 한 그루의 나무인지 모른다.

2015-08-07

밀양 표충사

하늘은 곧 비를 뿌릴 듯 잔뜩 찌푸리고 있다. 표충사 주차장은 한산하다. 뜻밖의 호젓함을 즐기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홍제교 너머에서 일주문이 반겨준다.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일주문은 편액도 없이 빈 몸으로 서 있다. 애써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일주문이 좋다. 시원스럽게 뻗은 길과 신록이 토해내는 풍요로움 속에서 벗과 함께 걸을 수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우리는 천천히 세속적인 잡담을 내려놓고, 유교와 불교 문화가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호국불교의 본산지를 향해 걸어 들어간다.사기에 의하면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 원효대사가 삼국 통일을 기원하고자 산문을 열고 죽림정사라 하였다. 이후 흥덕왕 4년(829년) 인도의 고승 황면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동방에서 찾다가 황록산 남쪽에 오색서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3층 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였다.당시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약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되자, 왕이 가람을 크게 부흥시키고 절 이름을 죽림사에서 영정사로 개칭하였다. 근세에 억불정책이 심할 때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셔와 표충서원이라 편액하고 표충사(表忠祠)로 눈을 가렸다가 지금은 사당과 사찰이 나란히 공존하는 곳이다.저만치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누각이 보인다. 경내에 표충서원이 있기 때문에 일반 서원처럼 정문에 3문 누각을 세워 좌우 칸에는 수충루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독특한 것은 수충루를 들어서면서 보이는 가람신을 모신 가람각이다.가람은 승려들이 사는 사찰 등의 건물을 의미하는데 가람신은 부처와 상관없이 가람을 지켜주는 신으로 토속 신앙에서 보면 가람신이 진짜 절의 주인인 셈이다.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구국의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당 3대사의 진영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사당에 참배를 할 수 있는 것도 기쁨이다. 높다란 계단 위에 악귀를 몰아내고 청정도량임을 뜻하는 사천왕문이 사당(祠堂)과 사원(寺院)의 영역을 구분하며 서 있다. 수충루와 표충사는 유교적 공간이고 사천왕문을 넘으면 불교적 공간이다. 표충사(表忠祠)와 표충사(表忠寺), 불교와 유교가 통합된 한국사찰의 독특한 유연성이 흥미를 끈다.천왕문을 지나니 수려한 재약산이 그제서야 위용을 드러낸다. 유명한 필봉과 사자봉을 비롯한 여덟 봉우리가 아늑하게 절을 감싸고, 봉우리마다 운무가 걸려 있다. 바람에 일렁이는 푸른 대숲의 서걱거림을 들으며 오래된 배롱나무가 붉디붉은 정념을 토해낸다. 결코 나른하지 않은 표충사의 여름이다.주법당이 사찰 중심에 서 있는데 반해 이곳은 삼층 석탑 주변으로 흩어진 가람배치가 특이하다. 나는 곧바로 주법당인 대광전으로 향한다. 화려한 단청 옷을 입은 대광전은 추녀가 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네 개의 활주가 팔작지붕을 받치고 있다.추녀마루에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잡상이 있으며, 용마루 중앙에는 찰간대가 있다. 덕이 높은 승려가 있음을 표시한다는 찰간대를 바라보며 문득 효봉 스님을 떠올린다.개화기 때, 평양 복심법원 판사를 하다가 돌연 입산하여 대종사 최고 법계를 불교사에 남기신 마지막 고승이다. 구십 고령으로 선정에 드시면서, 앉은 자세 그대로 예언하신 시각에 입적하신 분, 저절로 두 손을 모으고 머리가 숙여진다. 고승의 일화가 서려 있는 곳이라 그러지 더욱 경건해진다.대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협시보살로 봉안돼 있다. 친구와 나는 108배 대신 삼배 후 정좌하고 잠시 마음을 씻기로 했다. 간간이 불자들이 들락거릴 뿐, 법당에서 보내는 침묵의 시간은 평화롭고도 빠르게 흘러간다.대숲에서 일렁이던 바람이 재약산 허리를 감돌다 활짝 열린 법당 문으로 들어와 땀을 씻어준다. 바람의 손길이 부드럽다. 부처님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는 법당에는 한동안 댓잎 냄새를 품은 바람만이 들락거린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대화로 마음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나란히 법당에 앉아 말없이 서로를 챙겨주는 마음만큼 큰 행복도 없다.▲ 조낭희수필가대광전에서 나오는 우리를 산영각과 독성각이란 현판을 단 작은 전각이 뒤켠에서 맞는다. 소박한 전각과 오래된 보리수 한 그루, 군데군데 피어난 상사화가 펼쳐내는 풍경이 아름답다. 굳건한 보리수와 달리 상사화의 기도는 애절해 보인다. 잎이 지고난 뒤 꽃대를 밀어올리고 눈물겨운 꽃을 피워보지만 또 흔적 없이 사라질 그리움의 꽃, 그 속에 내가 보인다. 하염없이 절을 찾으면서도 나의 불심은 늘 허전하고 목이 마르다.유난히 넉넉해 보이는 표충사다. 경건하고 엄숙해지는가 하면 어느 새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함이 밀려들기도 한다. 유교와 불교, 민간신앙까지 한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사찰을 둘러보노라니, 배타적이고 경계 짓기를 좋아하던 나의 편협함이 부끄러워진다. 그러나 어찌하랴. 나의 아집은 슬프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망각해 버린다.

2015-07-31

문경 대승사 묘적암

▲ 조낭희 수필가사불산 중턱에서 길은 갈라진다. 윤필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솔길을 걷는다. 깊은 산 중에 숨어서 자라는 전나무들이 있어, 가파른 시멘트 길은 구도자의 길처럼 숙연하면서도 평화롭다. 나는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뭇잎 사이로 드러나는 햇살 사이로 누군가의 마음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따사로움도 기억된다.다람쥐가 숨바꼭질을 하고 풀벌레 소리가 지지 않고 존재감을 알려오는 곳, 숲은 푸른 허파처럼 싱그럽고 울창하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지만 하염없이 걸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머지않아 숲을 장악할 매미의 울음에도 제법 힘이 실려 우렁차고, 내 안에도 어느 새 초록 물결이 일렁인다.묘적암은 신라 646년(선덕여왕 15)에 부설거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말에 나옹 선사가 출가하여 수행한 사찰로 유서 깊은 암자이다. 성철, 서암 스님처럼 덕이 높은 고승들의 수행처로도 유명하다. 오르막길에서 땀을 식히며 돌아보니 윤필암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작은 물통을 들고 산모롱이 비탈길을 걸어오신다. 점심 공양 후 포행 중인 스님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세련된 도시 여인을 닮은 윤필암에 비해 소탈하면서도 기품 있는 남성적 분위기의 산사, 묘적암은 초행길이 아니다. 때 묻지 않은 스님이 지난 시간을 스케치하며 나무처럼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비탈길을 오른다. 노스님의 온화한 미소 한 자락이 그리운 시간, 모퉁이를 돌자 소박한 반가의 기와집 같은 암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텃밭으로 사용되었을 법한 황무지에는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암자를 밝힌다.탁 트인 터에 자리 잡은 묘적암에는 오후의 햇살이 마당에 뒹굴 뿐 인기척이 없다. 활짝 열린 법당 문을 보니 걸음이 빨라진다. 낡고 오래된 산문의 겸손함이 가슴을 적시는 곳, 한마음으로 진리에 귀의한다는 일주문이면 어떻고,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서는 불이문이면 어떠리. 고향 집 앞에 선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삐거덕 소리를 내며 낡은 산문이 열린다. 객이 왔음을 알리는 산중 신호음이 좋다. 행여나 스님이 수행 중이거나 오수를 즐기지는 않을까 조심스럽다. 절집 같지 않은 편안한 건축 구조 때문일까? 숨을 죽이고 살쾡이처럼 살금살금 들어서는 나를 `묘적암`이라는 현판이 반긴다.뜰 위에는 회색빛 고목이 댓돌을 대신해 누워 있다. 나는 부처님 계신 것을 까맣게 잊고 마루에 앉아 고즈넉함을 즐기다가 뒤늦게 법당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천장 낮은 법당에는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종이 장판과 온돌방이 주는 특유의 포근함이 긴장을 풀어준다. 절집에서 느껴지는 엄숙함은커녕 어머니 계신 안방처럼 편안하다.법당은 참으로 소박하고 정갈하다. 1500년이라는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과욕을 부리지 않은 청빈한 흔적들이 따스하게 감겨든다. 법당문을 열면 건너편 봉우리에 있는 사불암이 한눈에 들어오니 명당터가 분명하다. 진평왕 9년(서기 587년) 사면에 여래의 상이 새겨진 한 척이나 되는 큰 돌이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여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 사불암이다.`일묵여뢰`라는 편액도 가슴에 와 박힌다. 침묵은 곧 우레와 같으며, 그 폭넓은 파장은 언제나 본질을 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옹 선사가 쓴 마음 심(心)을 가슴에 새긴 채 마당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돌도 예사로이 보이지 않는다. 침묵과 마음, 불심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며 나는 잠시 내면을 들여다본다. 마침 텃밭에서 올라오는 스님께 인사를 건네자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무뚝뚝하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쫓겨나듯 돌아서 나왔다. 당황스럽고 무안하다. 묘적암과 스님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산사 기행을 하는 동안 좋은 것만 보아왔던 내게 새로운 화두 거리로 다가온다. 나는 무엇을 위해 다녀간 지 달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묘적암을 찾았으며, 하필이면 일면식도 없는 스님이 그토록 뵙고 싶었던 걸까? 일부러 먼 길을 달려온 스스로가 부끄럽고 원망스럽지만 이 또한 불교와 부처님을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이리. 윤필암 사불전 법당에 들러 108배를 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몸은 땀으로 흠뻑 젖고 마음은 평온해져 온다.명성 있는 절집이나 훌륭한 스님의 법문 속에서만 부처님을 만나려고 헤매다녔던 나의 아둔함이 문제였다. 승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 속에도 부처님은 존재할 것이며, 절이 아니라도 생활터전 어디서든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었다. 나는 너무 먼 곳에서 부처님을 찾았다.묘적암 앞에 누렇게 떠서 고사한 두 그루의 전나무가 자꾸만 아른거린다. 아침저녁으로 예불 소리 들으며, 사불암을 우러러볼 수 있는 명당자리에서 자라던 전나무가 고사한 것은 불성이 없어서였을까? 아무리 좋은 명승터라도 내 안에 불성이 없으면 결코 부처님을 만날 수 없다. 나는 고사한 전나무의 명복을 빌며, 조금 가벼워진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응시하며 사불산을 내려왔다.

2015-07-24

제주 약천사

▲ 조낭희 수필가태풍 `찬홈`의 영향으로 파도가 심상치 않더니 결국 마라도 가는 뱃길이 막히고 말았다. 성당과 교회, 절이 사이좋게 모여 있는 최남단의 섬, 오랫동안 꿈꾸었던 마라도 기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택한 약천사는 고색창연함 대신 키 큰 야자수들과 넓은 잔디밭, 29m의 통층으로 지어진 대적광전이 동양 최대의 사찰임을 자랑한다.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일정에도 없던 하루를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영천 은해사 말사란 점과 잠시 인사를 나눈 도관 스님의 대구 사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귀포 앞바다와 넓은 정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방에 짐을 풀고 절을 둘러본다.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과 금산사의 미륵전의 구조를 응용하여 설계된 대적광전 안에는 4.5m의 커다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약사여래불을 모신 굴법당도 유명하지만, 오솔길에서 만나는 좋은 글귀들과 하귤나무가 줄지어 선 정원을 거니는 행복감도 놓칠 수 없다. 이국적인 풍광을 뿜어내는 대사찰이건만 낯설거나 어색하지가 않다.나한전 법당에 앉아 책 속에서 이 절을 창건하신 혜인 스님을 만났고, 점심 공양 시간에는 수원에서 오신 불자 한 분을 알게 되었다. 시원스런 생김새에 걸맞게 막힘이 없다. 우리는 이내 말문을 트고 시원한 커피집을 찾아 뙤약볕 속을 걸었다. 멀리서 울어대는 파도 소리와 키 큰 야자수의 서걱거림이 멀어져 갈 즈음, 서른 명의 직원을 거느린 커리어우먼인 그녀가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휴식 차 이곳에 왔다는 걸 알았다.인생의 대선배 같은 그녀는 나와 동갑이다. 내가 쓴 조그만 양산은 자꾸만 바람에 뒤집어지고, 그녀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 맨 얼굴로 땡볕 속을 걷는다. 비바람 앞에서도 굳건한 뿌리 깊은 나무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고무 슬리퍼 끄는 소리가 타닥타닥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나는 몸으로 인생을 체득해 온 그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그녀의 인생 노정이나 사업적인 성공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와 사람을 대하는 너그러운 태도가 존경스럽다. 세상사에 달관한 듯한 표정과 초연한 말투에서 나는 조촐한 평화를 느낀다. 간혹 무심코 던지는 말들조차 울림이 되어 남는다.그녀가 제주의 맛이 느껴지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했다. 도관 스님을 모시고 범섬이 바라보이는 작은 식당에서 늦은 점심과도 같은 이른 저녁을 먹는다. 파도는 범섬을 지나 우리가 앉아 있는 해안까지 밀려들고, 나는 애꿎은 전복만 잘근잘근 씹어 삼킨다. 그녀의 아픔과 공허한 슬픔이 파도에 씻겨지기를 기도할 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전복죽을 그대로 남긴 그녀가 저녁 값을 지불했다. 마음이 아리다.오랜만에 실컷 바다가 보고 싶다. 우리는 파도가 거칠게 춤을 추는 바닷가 커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다는 울부짖듯 포효하고, 해안가에 떠밀려온 부유물들은 높은 파도의 벽을 넘질 못하고 우물쭈물 그 자리를 맴돈다. 한동안 커피를 마시지 마라는 의사의 지시를 무시한 채 나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커피향을 느끼며 바다를 응시한다. 모두 말이 없다. 바다가 토해내는 이야기에 저마다 귀를 기울이고 반대편 창에선 그림 같은 한라산이 우리를 들여다본다.명문 S대를 나와 훌륭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다 뒤늦게 출가한 도관 스님은 가끔씩 시간이 나면 이 커피숍에 앉아 책을 읽는다고 했다. 익숙하고 자연스럽던 일들과의 결별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그저 살아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녀는 모처럼 주어진 여유 속에서도 일에서 얻는 기쁨을 자랑했다. 태풍이 끝날 즈음 그녀의 휴가도 끝나리라. 나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코스를 멋지게 소화해내는 사이클 선수를 떠올린다. 약천사의 밤은 더욱 화려하고 웅장하다. 불면의 밤을 보냈다는 그녀는 근처 리조트로 짐을 옮기고 나는 홀로 남았다. 사위는 적막하다. 내 방 불빛만 외로이 서귀포 밤바다를 지킨다. 키 큰 야자수들은 밤새도록 휘청거리며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굳건해 보이는 그녀의 가슴을 밤새 할퀴고 지나갔을 소리들, 덥고 갑갑하면 달려오라던 그녀의 마음을 떠올리며 나는 책을 읽는다.보슬비가 내리는 새벽예불 시간, 꼭 참석하겠다던 그녀가 보이질 않는다. 예불을 보는 동안 몇 번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없다. 예불이 끝난 후 그녀를 대신해 정성을 다해 108배를 했다.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지만 참으로 편안하다. 스스로에게 빚진 무언가를 갚은 듯한 홀가분함으로 법당을 나서는데, 노스님이 먼저 인사를 건네신다.“저기 수평선을 보세요.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보이나요?”우중(雨中)의 바다는 잔뜩 찌푸리고 있다. 아상(我相)의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삼악도(三惡道)의 바다는 깊어만 간다는 지난밤에 읽은 글귀가 떠오른다. 아침 공양을 하고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정류장에서 리무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줄곧 그녀만 생각했다.

2015-07-17

경주 불국사

비 오는 날의 산책은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 함부로 들뜨지 않고 차분히 일상을 돌아보며 나를 점검할 수 있는 프리즘과 같다. 나만큼이나 비를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불국사로 향한다. 처연하게 비를 맞는 천년의 고도 속에 갇혀 신라인의 숨결을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 시를 쓰는 친구는 요즘 천년의 미소와 하회탈의 매력에 빠져 있다. 비오는 날의 첫사랑처럼 그녀의 이야기는 설렘과 감동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경주에 도착하자 이미 빗줄기는 그쳐 있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동안 모래알들이 발밑에서 바스락대고, 아름드리나무 그늘에는 청이끼가 세월의 깊이를 자랑한다. 비 온 날의 색 다른 풍경들도 좋다.역사를 알 무렵부터 만나온 불국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한국인의 긍지이며 자존심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올 수 있는 곳이기에 특별히 나를 긴장시키거나 새로울 것이 없었다. 우리는 산책하듯 걸으며 역사와 문학을 이야기한다. 유창하게 영어로 떠들어대는 가이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소복하게 모여 재잘거리는 아기단풍잎에 경탄하기도 하며, 다양한 구경거리들로 정신이 없다.어느 사이, 노송 뒤로 커다란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둘이서 조각난 지식들을 늘어놓으며 머리를 맞대지만 이내 말문이 막힌다. 불국사에 대해 식상할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부끄럽다. 우리 것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했는지 반문해 본다. 사랑하면 알 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제대로 알면 저절로 사랑하게 되리라. 내 안에 새롭게 꿈틀대는 역사의식을 느낀다.불국사는 토함산 줄기에 높은 석단을 쌓아 그 위에 조성한 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찰이다.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불국사고금창기`에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십이연기 불교의 윤회설에 따라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 석불사를, 현생의 부모를 섬긴다는 뜻에서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완공 후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고, 1973년에 대대적으로 중창되어 오늘에 이른다.우리는 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듯 천 년의 역사 속으로 빠져든다. 크고 작은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아랫단과, 정교하게 네모로 다듬은 윗단의 단아함, 툭툭 튀어나와 전체를 받치는 돌못들과 우아한 아치형 홍예교까지, 그 옛날의 건축기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위용이 넘친다. 건축술과 미적 감각이 뛰어난 신라인의 예술혼과 지혜에 머리가 숙여진다.여느 때와 달리 안내문을 꼼꼼히 읽고 잘못된 기억을 바로 잡는다. 윗계단은 젊음을 뜻하는 청운교, 아래는 늙음을 뜻하는 백운교이다. 물을 건너고 구름을 지나야 갈 수 있다는 부처님의 세계, 붉은 안개를 뜻하는 자하문을 통과하면 그제서야 대웅전이 나온다. 좌측에 있는 연화교와 칠보교도 똑같은 방식으로 안양문을 거쳐 극락전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나는 눈을 감고 계단 아래로 물이 흘렀을 그 옛날의 불국사를 그려본다.가슴이 두 방망이질한다. 내 안에 흐르는 한국인의 혼과 정서, 그 끈끈한 아름다움은 결코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저마다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과 의미들을 풀어내며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그 옛날 신라인들의 정신과 숨결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진다. 우리의 문화를 하나씩 알아 갈 때마다 벅차오르는 감동들, 그것은 나이 듦이 주는 또 다른 행복감이다.산 위로 피어오르는 운무와 호위하듯 둘러선 회랑으로 불국사는 더욱 신성해 보인다. 왕궁같은 엄숙함이 느껴져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대웅전을 들어서면서 그 뿌듯한 자부심은 격감되고 만다. 법당 문 앞에 앉아 불공비 1만원을 요구하듯 읊어대는 두 불자의 행동은 참으로 민망하다. 언제부터 부처님이 마음보다 재물 보시에 따라 자비를 베푸셨던가?▲ 조낭희 수필가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자하문에 서서 대웅전을 바라본다. 유리로 된 건물에 갇혀 해체 수리 중인 석가탑의 어수선함을 지켜보는 다보탑이 나만큼 쓸쓸해 보인다. 그의 품에 있던 4마리의 돌사자 중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다. 형체가 없는 석가탑 주변에는 아사녀의 애틋한 혼이 함께 할 것만 같은데, 홀로 서 있는 다보탑이 참으로 고독해 보인다. 둘이 있다 홀로 남게 된다는 것, 그만큼 애잔한 풍경이 있을까.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다보탑과 석가탑, 현세계와 부처님 세계, 음과 양이 빚어내는 조화가 있어 불국사는 아름답고 위풍당당한지 모른다. 홀로 일 때의 온전함과 둘이 주는 하나 됨, 여럿이 주는 합일의 느낌은 다르다.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에 가 닿으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사랑이라 규정했던 플라톤의 향연을 떠올리며, 독신자가 늘어가는 요즘의 세태와 홀로일 때의 즐거움을 고집하는 나를 돌아본다.인간은 외로운 존재라고 하지만 오늘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어 기쁨이 넘치는 하루다.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큼 감사하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 석가탑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보탑 앞에 설 때까지, 의연하게 버텨줄 다보탑을 향해 나는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다.

2015-07-10

예천 용문사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을 기대했지만 인적 없는 주차장에는 오후의 땡볕만 이글거린다. 바람 한 점 없는 길에는 열기가 가득하지만 햇살과 신록, 맑은 하늘빛이 아름답다.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회전문과 커다란 법고가 있는 해운루를 통과하면 고요한 적멸의 공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첫인상이 유난히 정갈한 사찰이다. 용문사는 870년(신라 경문왕 10년) 두운 선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할 때,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여 용문사라 불렀다. 한 때 영남 제일강원으로 불릴 만큼 큰 사찰이었으나 화재로 인해 사세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해운루를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하면 높다란 계단 위에서 보광명전이 위엄있게 우리를 내려다본다. 험준한 소백산맥의 지형을 이용해 만든 사찰이다. 조용한 경내에는 햇살만 넘실거릴 뿐 아무도 없다. 넓은 마당을 두리번거리다 영남제일강원의 주련 앞에 섰다.“漢武玉堂塵已沒 (한무옥당진이몰)/ 石崇金谷水空流 (석숭금곡수공류)/光陰乍曉仍還夕 (광음사효잉환석)/ 草木在春卽到秋 (초목재춘즉도추)/處世若無毫末善 (처세약무호말선)/ 死將何物答冥侯 (사장하물답명후)”“한무제의 궁궐은 이미 티끌이 되었고/ 석숭의 별장에도 쓸쓸히 물만 흐르네/ 세월은 빨라 새벽이다 싶으면 이내 곧 저녁이 되고/ 초목은 겨우 봄인 듯하면 어느덧 가을이 되고/ 세상을 살면서 털끝만한 선행도 못하면/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무엇으로 대답하리.”약간의 나른함이 밀려드는 오후의 시간, 번쩍 정신이 든다. 갱년기로 우울해 있던 나를 향한 죽비였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선행은 말로, 혹은 마음속에서만 머물다 늘 엉뚱한 것에 밀려 잊혀지곤 했다. 쫓기듯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정체 모를 허기감이 몰려왔다. 그것은 삶에 대한 경고였다. 땡볕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돌아본다.보광명전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넝쿨식물들이 가지를 뻗고 일렁인다. 하염없이 쏟아내는 햇살의 고운 마음들이 잎새 위에서 빛난다. 햇살과 바람은 결코 서두르거나 분주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서로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잎새들이 다칠까 조심조심 계단을 오른다.화재로 소실되어 최근에 중수한 보광명전은 새 전각답게 깔끔하고 화려하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룻바닥의 촉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매료되고 말았다. 흔들림 없이 빈 몸으로 불어오는 듯하지만 성성한 기운이 실려 있는 바람을 보광명전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 몸으로 맞는다.대장전은 고려 명종 3년(1173년)에 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 조선 현종 때 중수한 건물이다. 보물 684호인 우리나라 유일의 회전식 윤장대가 있는 곳이다. 큰 맞배지붕을 이고 서 있는 전각에는 국보급 보물로 가득하다. 전각 모서리에 새겨진 연꽃과 물고기, 도깨비를 닮은 귀면의 주술적 방어력 때문인지 유일하게 화재를 면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대견하고 신통할 뿐이다.세월의 깊이를 품고 있는 법당에도 다양한 조각과 장식들로 화려하다. 삼존불 뒤에 금빛으로 도금을 한 아미타후불목각탱도 조선 숙종 10년에 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불교신자가 아닌 지인이 모자를 벗고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린다. 주름이 지고 머리가 희끗한 노신사의 일배(一拜)는 거룩해 보이기까지 하다. 뜨뜻한 무언가가 전신에 퍼진다. 신앙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혼과 문화에 대한 사랑과 정성, 그것은 숭고함이다.질풍노도의 시간들을 견뎌온 대장전 건물과 작은 법당을 지키고 있는 보물들을 호젓하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쉽지 않은데, 오늘은 이래저래 운이 좋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보이는 것들이 있어 때때로 삶은 숙연하다. 엉뚱한 것에 한눈을 팔고 있던 나를 기다려준 세월과의 조우, 가슴이 뭉클하게 젖어 온다. 장구한 역사를 버텨온 우리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나의 무관심,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된다.윤장대를 돌리면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정성을 다해 한번 돌리면 한 권의 경전을 읽는 것과 같다는데 지금은 일 년에 단 두 번만 돌릴 수 있다. 손때가 묻어 노쇠한 흔적이 느껴지는 윤장대는 어떤 소리를 내며 돌아갈까? 나는 두 손을 모으고 탑돌이를 하듯 주위를 돈다. 삐거덕삐거덕 낡은 마룻바닥이 걸을 때마다 고통을 호소한다.▲ 조낭희 수필가경전 한 권을 읽는 것과 같은 `정성`이란 얼마만큼을 말하는가? 돌고 돌아도 감이 오질 않는다. 습관처럼 흔하게 썼던 말이다. 정성이란 말로 몇 번이나 내 삶을 기만했던가? 그 말이 가지는 무한한 힘을 생각해 본다. 깊은 생각에 잠겨 응진전으로 향하는데 스님 서너 분이 뙤약볕에서 풀을 뽑고 계신다. 스님의 미소 뒤로 마중을 나오는 순백의 꽃물결들, 마가렛 무리가 꽃등이 되어 길을 밝힌다. 일하는 스님들과 하늘빛이 아름다운 용문사, 그곳에 가면`정성`을 눈으로 만날 수 있다.

201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