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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낙조, 그 아름다움을 위해… 칠곡 도덕암(道德庵)

미모사를 아는가?살짝만 건드려도 잎이 밑으로 처지고 싸늘하게 오므라드는 풀꽃이다. 뜬금없이 날아든 시끄러운 소리에 마음이 불같이 달아올라, 결국은 부족한 스스로에게 상처받아 의기소침해진 나는 한 포기 미모사가 되어 집을 나선다.능엄경에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다시 들여다 본다는 말이다. 나의 반문문성은 늘 한 발 늦게 행해져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든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감정의 노예가 되어 허둥대는 마음을 또 다른 내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무작정 절을 찾아 팔공산 순환도로를 달린다. 리기다소나무와 적송들이 어울려 있는 초입을 지나자 적송 우거진 숲이 이어진다. 호젓한 평화에 마음이 즐겁다.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임산물 체취를 막는 커다란 가로펼침막과 길가에 쳐진 줄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세상 모든 사물에는 눈과 입이 있다. 남이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은 자칫 교만함으로 이어지기 쉽다. 불필요한 오해는 사고 싶지 않아 경사 심한 비탈길을 용을 쓰며 오른다. 도시의 소음과 불협화음을 피해 왔지만 삶은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따라 온다.높다란 콘크리트 기단 위에서 도덕암(道德庵)이 나를 지켜본다. 팔공산 자락에 있는 사찰이지만 절 이름을 따서 도덕산 도덕암이라 부른다는 독자적인 자존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컹컹 개 짖는 소리에 팔공산이 떨리고 공양주 보살이 반긴다. 위협적으로 보이던 덩치 큰 두 마리 개가 법당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서야 이내 온순해진다. 낯선 이를 식별하는 그들만의 지혜조차 크게 보인다.435년(눌지왕 18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도덕암은 968년(광종 19년)에 혜거국사가 대대적으로 중수하여 칠성암이라 칭하다 1854년 선의대사가 중수하여 도덕암으로 부른 후 영남 3대 나한기도 도량으로 알려진 암자다. 스님은 저녁 무렵에나 돌아오실 거라는 귀띔에 홀로 햇살 따가운 경내를 산책한다.800년의 풍파를 견뎌온 모과나무나 고려 광종이 혜거 국사를 왕사로 모시기 위해 이곳에서 사흘간 머물며 속병을 고쳤다는 어정수도 건성으로 지나친다. 자연석 축대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나한전과 산신각, 응진전 사이에 나도 전각처럼 서서 서쪽을 바라본다. 저 멀리 물결을 이루는 산들을 넘고 넘으면 피안의 세계에 이를 것만 같다. 내 안에 느닷없이 들어온 껄끄러움을 피해다니느라 지쳐 있던 나를 가만히 다독여 주는 이는 누구일까?경내는 적막할 만큼 고요하다. 보살님들은 기척이 없고 덩치 큰 개들도 나른한 오후에 취해 졸고 있다. 요사채 돌담 위에 핀 꽃들을 카메라에 담는데 가파른 경사길을 차 한 대가 올라온다. 부리나케 공양주 보살이 마중나가는 모습이 잡힌다. 그 종종걸음을 따라 내 눈도 호기심 가득 안고 비탈길을 따라나선다. 저녁 무렵에나 오신다던 주지 스님이 일찍 돌아오신 듯하다. 스님의 가방을 받아 들고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며 올라오는 보살님의 환한 표정에서 잊고 있었던 옛날을 떠올린다.내 어린 날, 출타하신 할아버지가 돌아오면 어머니는 언제나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나가곤 했다. 조부의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이나 짐을 받아들며 웃는 얼굴로 맞는 것은 집안의 질서와 공경의 표현이었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히 예가 우러나던, 그 그립고 따뜻한 풍경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소소한 풍경에서 도덕암의 숨결이 읽힌다.나를 키워준 아름다운 기억들과 흔들리며 사라져간 그리운 것들로 가슴 한켠이 허전하다. 햇살도 한껏 자세를 낮추고 휘어질 무렵, 스님은 모과나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올라오신다. 퍼뜩 정신이 든다. 하필이면 나는 주지 스님의 방 앞을 서성거렸던 모양이다.조낭희 수필가운이 좋게 스님과 차담을 나눈다. 임종을 앞둔 환자처럼 누워 있는 겹겹의 산들과 피곤한 하루가 너울거리며 사라지는 서쪽 풍경이 커다란 유리문으로 들어온다. 깔끔한 이미지를 풍기는 법광 주지스님, 산사에서 마시는 캡슐커피조차 낯설지가 않다. 모과나무, 어정수, 낙조, 도덕암의 세 가지 자랑거리와 대를 이어 찾아오는 불자들이 많아 가족처럼 화목하다는 스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어느 새 도덕암이 내 안에 자리잡는다.커피를 마시면서 내 눈길이 자꾸 서쪽풍경을 향해서였을까? 스님은 내면을 바라보고 성찰하기를 바라시며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대해 말씀하신다. 사람이나 사물이 쇠멸하기 직전에 잠시 왕성한 기운을 되찾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자의 일생 중 세 번의 아름다운 때를 언급하시며, 스스로를 돌아보며 중후함을 갖춰야 할 마지막 시기의 아름다움을 당부하신다.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돌이켜 볼 줄 안다면, 그것이 부처님 자리에 들어서는 순간이리라. 멀고도 먼 길이지만 가는 길은 뿌듯하다. 중후한 아름다움, 커다란 과제 하나 안고 도덕암을 나서는데 저녁 공양하고 가라는 보살님의 따뜻한 미소가 암자를 밝힌다. 덩치 큰 개도 더 이상 짖지 않았다. 도덕암의 낙조는 결국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보다 아름다울까.

2019-10-21

동심의 세계로 가는 길 - 청도 대적사(大寂寺)

길은 와인 터널 옆 감나무 밭을 끼고 이어진다. 소란스러운 인파의 그림자를 사뿐히 벗어날 즈음 감나무 잎새에 머물던 계절이 풀잎 위로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다. 최대한 느긋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고 싶었지만 길은 짧았다.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높은 석축이 보이고 절은 그 위에서 흔들림 없이 고요하다.대적사(大寂寺)는 876년(신라 헌강왕 2년) 보조선사가 토굴로 창건한 후 조선 숙종 15년 성해대사가 중수하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돌계단에는 젖은 이끼가 법문처럼 자라고 절 문 안으로 불교도의 이상향인 극락정토를 표현한 극락전(보물 제 836호)이 보인다. 절간을 지키던 낮달 같은 독백 하나 마중을 나온다.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극락전은 크지 않지만 탄탄한 기단 위에 앉아 당당하다. H자형의 선각과 연꽃이 새겨진 기단은 멀리서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연스럽게 풍화된 시간의 흔적과 살아 있듯 활기찬 움직임들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아이의 그림 속에서 몰래 도망쳐 나온 듯한 바다 생명체들이 소금기를 풍기며 절간을 활보 중이다. 사랑스럽고 앙증맞다.동화 속 같은 그곳에도 고독과 가난, 죽음의 그림자가 있나 보다. 어미거북은 필사적으로 새끼를 데리고 극락정토로 가려고 애를 쓴다. 가파른 면을 힘차게 부여잡고 올라가는 거북의 네 발이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다. 반야용선에 오르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악착보살과 같은 숨결이 읽혀진다.우측에는 거북 한 마리 연꽃 위에서 한가롭다. 영혼 없는 연꽃 위가 지상 최고의 낙원인 줄 알고 빈둥거리는 팔자 좋은 녀석, 어느 것 하나도 밉지 않다. 이토록 온전한 풍경이 있을까. 아이와 동물들의 경계 없는 혼재로 천진함의 세계를 표현했던 화가 이중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들여다볼수록 의미심장해진다. 인생을 탕진한 바람 한 줄기 불어올 것만 같다.극락전으로 오르는 중앙 계단 소맷돌에 새겨진 투박한 용비어천도는 세련되거나 장중함과는 거리가 멀다. 소맷돌과 계단의 아귀가 맞지 않은 것을 두고 옛날의 석재를 이용하여 고쳐 쌓은 거라 전문가들은 추측한다지만 나는 이 어색함이 오히려 좋다. 마치 추사 김정희가 죽기 사흘 전에 쓴 봉은사 판전을 보는 것 같다. 불심으로 빚어진 이름 없는 석공의 노숙함이 묻어나는 무구(無垢)의 경지라고나 할까. 오랜 숙련을 거쳐 그 법마저 지워버리고 해체하는, 깨달음의 세계도 이렇지 않을까.어렵고 방대한 경전보다 시각적으로 단순화 시켜놓은 작품 앞에서 더 큰 감동이 밀려올 때가 있다. 혼탁한 정신을 치료해 주는 정화수 같은 세계에 시간을 담근 채 한참이나 행복하다.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특별한 느낌들, 가까운 곳에 보물을 두고도 가치를 몰랐던 나의 무지와 고비처럼 살다가는 찰나의 생에 대한 존재의 질문도 해본다. 햇살 눈부신 마당에 홀로 서서.텃밭 너머 산신각 근처에서 일 하는 스님이 보인다. 주지 정혜(精慧) 스님이시다. 장화와 토시, 밀짚모자 아래로 흐르는 땀, 손길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경내가 정갈한 까닭을 알았다. 사찰을 답사하는 동안 절도 주지스님을 닮아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요사채에 앉아 스님과 대화를 나눈다. 방치하듯 낙후된 절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신 흔적이 역력하다. 좋은 기도처로 거듭나기 위한 스님의 의욕과 열정은 굳이 묻지 않아도 드러난다. 북적이는 와인터널 인파의 반이라도 찾아 왔으면 하는 아쉬움을 드러내자 “모두 제 정진이 부족한 탓이지요.”무심한 스님의 말씀에 쓸쓸한 가을 공기 한 줌 출렁거린다.“가난한 시절의 기도는 부처님의 공덕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기도가 더 기복적으로 흐르는 것 같아요. 입시나 승진,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는 지극정성 기도하다 일이 해결되면 기도를 멀리 하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절박함이 닥쳤을 때 하는 기도는 이미 때가 늦은 겁니다. 곳간이 비면 마음이 허전하듯 평상시 늘 기도로 삶을 충전하고 복을 지어야 하는데, 다들 뭐가 그리 바쁜지….”스님의 말끝은 흐려지고 나는 마당에 핀 국화를 보면서 찬란한 생의 한때를 장식할 그 향기를 더듬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아침마다 백팔배로 하루를 열겠노라 다짐해 보지만 쉽지 않음을 토로했다.조낭희 수필가“기도도 대상이 있어야 수월합니다. 집에서는 청정수 한 사발이라도 떠놓고 오욕의 탐욕을 씻는 마음으로 해 보세요. 기도도 욕심을 부리면 안 돼요. 욕심을 내면 혼탁해지고 힘들어지니 작은 것부터 설정해서 집중기도를 해 보세요. 하루 이십 분 정도 편한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요.”무너진 흙담 사이에 온기가 피어오르듯 희망이 생긴다. 철웅 스님의 법어집 한 권을 받아들고 내려오는데, 연꽃 위에서 놀던 거북 녀석이 꾸역꾸역 따라온다. 습은 그저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는데, 산사 가는 길은 여전히 외롭고, 계절은 또 이토록 아름답다.굽이굽이 옛길 따라 산을 넘는데, 스님 말씀 자꾸만 밟힌다.“눈이 밝은 자는 오겠지요.”

2019-10-14

심지 굳은 바람처럼-안동 봉정사 영산암(靈山庵)

적요를 먹고 크는 배롱꽃, 깊이를 알 수 없는 평화, 오래된 침묵, 그리고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오후의 햇살이 관심당 툇마루의 나이테를 세다 창살에 기대 졸고 있다. 모두 하나가 되어 멎어 있는 풍경들, 발걸음 소리에 정제된 시간들이 파문을 일으키며 깨어날 것만 같아 고양이 걸음으로 들어선다. 귀 밝은 솔이가 컹컹 영산암이 떠나가도록 짖는다.봉정사 영산암은 석가불이 법화경을 설법하던 영취산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취산에 모여 설법 듣는 나한을 모신 응진전이 주법당이다. 온통 국보와 보물로 가득한 봉정사와 달리 경상북도 민속자료라는 아주 작은 명함이 전부지만 어느 암자와는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는 우화루, 이름의 유래는 불교적 색채를 띠지만 유학자의 선비다운 풍류마저 느껴진다. 키가 닿을 듯 낮은 누하문을 조심스럽게 들어서면 자연석을 이용한 계단 위로 사대부집의 아담한 정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만난다. 명문가의 자존심이 묻어나는 노할머니의 장죽(長竹)이 기척 소리에 문을 열며 내다볼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완만한 구릉지를 깎거나 다듬지 않고 바깥의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정원, 그래서 관심당 마루는 우화루 쪽으로 내려갈수록 높아진다. 뿐만 아니라 문의 크기도 다르다. 단아하고 기품 넘치는 유가적인 분위기의 건물들과 시공간을 압축시켜 놓은 듯한 묘한 공간배치 앞에서 낮은 탄성이 절로 나온다.응진전 좁은 툇마루는 낡고 삭아서 내려앉을 듯 안쓰럽다. 법당에 들어서기도 전에 저절로 두 손부터 모으게 되는 인고의 고단함이 마음을 시리게 한다. 응진전보다 낮은 자세로 송암당과 관심당이 좌우를, 맞은 편 입구에는 우화루가, 세 건물은 툇마루로 연결되어 건물이 가지는 위계질서조차 잃지 않는다.송암당 나지막한 처마와 소나무 한 그루의 어울림, 서로가 서로에게 배경이 되어주며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관계가 조화롭다. 시설 좋은 봉정사 템플관을 굳이 마다하고 영산암에 머물기를 고집한 이유다. 영산암 해주 스님은 출타 중이라 봉정사 주지 도륜 스님의 배려로 관심당 방 하나를 차지한다.오랫동안 떠나 있다 옛집을 찾은 것처럼 편안하다. 주지 도륜 스님의 자상한 설명으로 봉정사도 영산암도 내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시대별 특징들이 모여 살아 숨쉬는 건축박물관, 봉정사가 세월의 맛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시간의 멋을 지녔다면 영산암은 미학적인 혜안 속에서 오로지 지금 나로만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새벽 4시 도량석 목탁소리에 천등산이 눈을 뜬다. 새벽예불을 위해 나도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다. 툇마루를 내려서는데 무심코 기봉의 눈빛이 느껴진다.‘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영화는 모든 것을 깊고 쓸쓸하게 담아냈다. 최대한 빛을 아끼고 말을 아꼈다. 돌보지 않은 영산암은 쓰러질 듯 고뇌에 찼으며,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조차 투명하도록 슬펐다.절제된 대사들이 오래도록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지옥과 극락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가는 것이 오는 것이고, 오는 것이 가는 것이다’. 노스님의 기름기 없는 목소리가 들려 올 것만 같다. 죽음을 앞 둔 노스님과 호기심으로 세상을 열어가는 동자승의 뒷모습이 우화루 위에서 아른거린다.어둠 속의 영산암은 어제의 옷을 벗고 무의식 속의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내 앞에 선다. 대자유의 길을 걷고자 출가하지만 생애의 고뇌마저 사랑하지 않고서는 피안의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가는 기봉의 뒷모습은 그래도 희망적이다. 영산암은 사바와 피안 사이에 앉아 말이 없다.대웅전에 앉아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린다. 타종 소리와 함께 어둠이 밀려들고 은행잎이 아픈 소리를 내며 떨어지던 늦가을 저녁, 고령의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새로운 나를 다짐했다. 오로지 나 혼자만을 위한 설레는 부름들, 영원할 것 같은 순간들, 잎새의 마지막 떨림처럼 의욕이 살아 숨 쉬던 젊은 날의 각오, 봉정사는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조낭희 수필가변화는 있어도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했던가. 안타깝게도 봉정사보다 더 빨리 변한 건 나였다. 지나친 의욕과 많은 생각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도시를 벗어나 길과 숲, 오래된 공간 속으로 자주 떠나 볼 일이다. 오래된 것들은 시간에 휘둘리지 않고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어둠을 품고 잠든 나무들 사이로 새벽이 꿈틀거린다.유명세로 봉정사 문턱은 높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은 나만의 기우였다. 날마다 긴 세월을 견뎌내 준 극락전에 감사 기도부터 드리고 새벽 예불을 보신다는 도륜 주지스님, 끼니때마다 환한 미소까지 덤으로 얹어주던 공양주 보살님, 친절함이 몸에 배인 종무소 보살님, 모두에게서 잘 여문 과일향이 난다.차를 내린지 반나절이 지나도 차향이 남아 있듯, 좋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품 넘치는 사찰이다. 스님과 나눈 대화를 가슴에 품고 봉정사를 내려오는데 천등산 맥박소리가 들려온다.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지독히도 낯익은 소리였다.

2019-10-07

가을, 선정에 들다 - 상주 원적사(圓寂寺)

십여 년 전 원적사에 들렀던 적이 있다. 청정한 절의 경관보다 닳고 해진 소매끝과 천을 덧대 기운 젊은 스님의 승복 앞에서 가슴 서늘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청빈한 산사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불자도 아닌 내가 산문을 쉽게 개방하지 않는다는 선원에 다시 가볼 기회는 오지 않았다.무작정 원적사를 찾아 나섰다. 문경과 상주, 괴산을 끼고 있는 청화산 중턱을 향해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 ‘청정수행도량이니 돌아가라’는 표지판이 가로 막는다. 절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7년) 원효 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학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비학승천혈(飛鶴昇天穴) 명당이라 예로부터 깨달음을 빨리 얻을 수 있는 수도처로 알려졌다. 학의 부리에 해당하는 크고 뾰족한 바위 아래 원적사(圓寂寺)라는 현판을 단 주법당이 좌선하듯 앉아 있다.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법당에는 불전함이 보이지 않는다. 제단 위에 발가벗은 지폐 한 장 올려놓기가 민망하다. 나의 공양은 정성스런 마음보다 그저 습관 같은 의식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요사채에서 차담을 나누던 주지 스님이 소탈하고 쾌활한 얼굴빛으로 맞아 주신다. 가을빛 한 아름 안고 따라오던 숲이 그제서야 뒤로 물러나 앉고, 머지않아 이 골짜기도 짧고 깊은 사색의 계절로 접어들 것이다.교통사고로 왼팔에 깁스를 한 채 보이차를 대접하는 범린 주지 스님은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처럼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다. 형식적인 틀과 권위를 좋아하지 않는 스님은, 저절로 내면이 원숙해지고 중물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나오길 원하신다며 두루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신다.승(僧)과 속(俗)은 하나일 수 없다. 그렇다고 온전히 분리될 수도 없기에 스님 노릇도 쉽지 않으리라. 공양주 보살을 두지 말고, 산방도 꾸미지 말고, 산문도 열지 말고 수행에만 전념하라던 서암 스님은 이제 벽에 걸린 사진 속에서만 환하게 웃으신다. 해우소 가는 길섶에는 때이른 가을이 선정에 들고, 나무들은 서로를 품고 기도하듯 온화하다.부처님 오신 날만 산문을 여는 수행도량 봉암사와 50여 년 수좌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고 입적하실 때까지 지켜온 원적사, 두 사찰의 맑은 이미지 속에는 서암 큰 스님이 계신다. 나는 한 그루 갈매나무를 떠올린다. 백석의 시 속에서 하얗게 눈 맞으며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곧고 의연한 아름다움을 지닌 갈매나무.젊은 시절 토굴에서 지내며 용맹정진하셨다는 스님은 인도의 오르빌과 명상센터를 수차례 다녀온 경험담을 꺼내신다.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나의 인도여행기와 책에서 만났던 오르빌의 환상들을 뜻밖에도 산중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세계적인 지휘자 첼리 비다케와 폰 카라얀, 말러와 베토벤의 교향곡,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오쇼 라즈니쉬, 전문적인 깊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스님의 해박한 식견은 쉬지 않고 이어진다. 어둠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아침이 오도록 저린 걸음으로 걸었을 스님, 선정을 위해 곱게 물 들어가는 담쟁이덩굴의 안색조차 눈부시다.조낭희 수필가잠시 전생의 습을 생각한다. 안간힘을 써도 털어내기 힘든, 일종의 굴레 같은, 그 업을 벗기 위한 노력을 나는 하긴 했던가? 스님은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정의감도 유별나다. 중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씁쓸해 하신다. 내 몸 하나 위로하며 살기도 바빴던 나를 원적사 가을빛이 말없이 다독인다. 보물 하나 없어도 원적사가 아름다운 까닭이다.“불교는 종교를 넘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철학이지. 공부해야 시건방 들 새가 없어.” 스님의 말씀이 소슬하게 날아와 꽂힌다. 그것은 가난한 절 살림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서암 큰스님의 상좌다운 자존심이다.산중 생활이 무섭지 않느냐고 여쭙자 “뭐가 무서워. 무서운 건 나지.” 우문현답이다. 어김없이 2시 50분이면 일어나 도량석을 시작으로 두어 시간씩 조석예불을 드리고 혼자서도 잘 논다던 스님은, 하루 30분이라도 명상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당부하신다.“명상이란 내 안에 침잠해 들어가서 실체, 즉 본체를 확인하는 작업이지. 명상을 하면 생각의 흐름이 잡히고 소중한 것과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되거든. 아침에 명상하는 습관을 들여 보셔요. 습은 길들이기 나름이지. 모든 것은 내 의지,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이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끊임없이 정진하는 길밖에 없어.”“불자들이 찾아오면 좋은 말씀 좀 해달라는데 참 딱해. 이 세상에 좋은 얘기가 적어서 이 모양인가? 작은 것부터 실천할 수 있어야지.”나의 허약한 의지가 댓돌에 벗어놓은 신발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 어떤 추임새도 넣을 수가 없다, 가까운 곳에서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행여 원적사가 궁금하여 청화산 가파른 언덕길 오르거든, 반야라는 이름을 가진 영리한 개와, 공부하기 좋아하는 스님 한 분을 찾아보라. 해우소 창틀로 들어오는 푸른 잡목 숲 닮은 스님이 그대를 반겨 맞을 것이니.

2019-09-30

간절함의 끝은 어디에… 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

막 깎아놓은 풀냄새가 좋다. 먼 곳으로 자식을 떠나보낸 늙은 부모처럼 국보 제 112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오늘도 기다림에 젖어 있다. 장중함의 눈빛이 하도 외롭고 쓸쓸하여 한참 동안 고개를 젖히고 우러러본다.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왜구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으려고 짓기 시작한 감은사는 신문왕 2년(682년)에야 완성된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동해에 해중릉을 만든 후, 절의 금당 밑으로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물길을 낸 충과 효가 배어 있는 절이다.천천히 서탑을 돌며 까마득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신라를 생각한다. 긴 회랑으로 둘러진 감은사, 13.4m의 장대한 동서 삼층석탑은 최초의 쌍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크다. 폐사지를 지키는 퇴락의 그림자는 마르지도 않고 두 탑은 해탈이라도 한 듯 초연하다.창건 당시 감은사 앞까지 이어지던 바다는 천년의 세월 속에서 자꾸만 물러나 앉고 감은사도 사라졌다. 길 잃은 문무왕의 애타는 넋이 떠돌았을 동해를 뒤로 한 채 두 탑의 기다림은 하염없이 길었다. 저녁 연기처럼 흩어지는 옛 왕조의 기억과 낙서 자국이 눈물로 번져간 상처들, 수많은 시인의 찬란한 시구(詩句)들이 서로를 다독이며 절터를 지킨다.늦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바람이라도 불면 울창한 대숲에서 만파식적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데 늙은 느티나무의 투병하는 소리만 애처롭다.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차들과 술렁거리며 오는 계절의 풍경에 익숙해진 삼층석탑은 또 다시 천년의 기다림을 반복이라도 할 듯 말이 없다.천년 세월의 간절함을 담고 있는 그의 눈빛에 비해 나의 기도는 조촐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가고 또 누군가는 잠시 머물다 훈장 같은 말씀 한 마디 던져 주고 떠난다. 바람을 잠재우고 물결이 되어 뒤척였을 수많은 날들의 기다림은 모두 헌사가 되어 그를 위무한다.묵직해진 마음을 끌고 솔숲에 앉아 문무대왕릉을 바라본다. 햇살 아래 연거푸 일어섰다 쓰러지는 파도들, 여름날의 빈집을 기웃거리듯 조용한 발걸음으로 가을이 들어서는데, 꽹과리 소리에 춤을 추며 무아의 경지에 빠져 접신 중인 무녀가 보인다. 이 곳 저 곳, 솔밭이 온통 굿판이다. 나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위치에서 신탁을 받을 영매자를 위해 조심스럽고 미안한 구경꾼이 된다.문무대왕릉을 향해 정성스럽게 예를 올리는 무녀의 손에 들린 붉은 깃발은 언젠가 네팔 여행 중에 보았던 룽다와 타르초를 떠올리게 했다. 소음과 공해로 정신없이 어수선하던 카트만두의 오래된 사원에서, 안나푸르나를 보기 위해 오르던 전망대 근처에서도, 오색 깃발들은 경전을 읽듯 바람 앞에서 사정없이 울어댔다. 많이 펄럭일수록 신에게 그들의 기도가 더 간절히 전해진다고 믿는 이색적인 풍경 앞에서 신의 부름 앞에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 가난한 영혼을 보았다.더위를 업고 답을 기다리는 동해의 붉은 깃발, 환생을 꿈꾸는 미이라처럼 젊은 여인의 몸을 감싼 채 자갈밭을 구르던 흰 천의 오열, 모래사장에 수없이 꽂혀 타다만 향의 잔해들, 갈매기와 까마귀의 번들거리는 군무, 굿당이 되어버린 솔밭을 수중릉은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문무왕의 호국정신이 서려 있어 신령스러운 기운이 강한 곳이라고 한다. 이제는 절터만 남은 감은사지, 그래서 갈 곳 잃은 천년의 정신이 끝내 신탁으로 양도되기라도 한 것일까. 온갖 염원이 대왕암을 향해 끓어오른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이 이곳으로 뛰어들어 동해는 깊고 푸른지 모른다. 간절함을 이기는 능력은 없다 했던가. 그들의 곡진한 의식을 있게 한 그 간절함은 도대체 무엇일까.까마귀 떼들이 버려진 젯밥에 몰려들어 배를 채우고는 유유히 날아간다. 윤이 나는 깃털이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일 뿐, 그들에게 간절함은 없다. 파도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갈매기 무리 속에도 이제 조나단 리빙스턴의 후예는 없다. 높이 나는 법을 잊어버렸으며 더 이상 높이 날 명분마저 사라졌는지 모른다. 풍요 속에 가려진 나른하고 권태로운 눈빛들, 꽹과리 소리는 접신의 문턱을 몇 번이나 넘나들며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조낭희 수필가서너 시간을 솔밭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삶은 불가해한 것들로 가득하다. 무너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절박한 몸짓들이 때 아닌 폭설 되어 내 안에 쌓인다. 지척에 보이는 대왕암은 꼼짝도 않는데 숨 가쁜 염원들은 하혈하듯 동해로 흘러들고 바다는 답신하듯 파도를 만들어 보낸다.도시가 갑갑하면 찾아오던 바다에서 오늘은 교만의 옷을 벗는다. 삶의 완성도는 슬픔과 기쁨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관조하는 것. 새살이 돋아 그들의 영혼이 좀 더 말랑말랑해지길 바라며 가을 햇살 같은 기도 한 줌 보낸다.어찌하랴. 가장 영험해 보이는 신을 찾아 간절히 두 손 모을 수밖에 없는 운명 앞에서 우리는 차안과 피안 사이를 정처 없이 오가며 때때로 난처해지기도 하는 것을.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은 저리도 평온한데….

2019-09-23

엎질러진 한 통의 발효액… 김천 수도암(修道庵)

포장된 외길을 오르다보면 은둔하듯 숲속에 터를 잡은 김천 수도암을 만난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길이 울창한 초록숲의 유일한 출구이다. 본사인 청암사가 수도산을 지키는 여신(女神)같다면 해발 1000m 쯤에 자리 잡은 수도암은 남신(男神)이라 할 만하다.신라 헌안왕 3년(859년) 절을 창건한 도선국사가 터를 발견하고 만대에 수도인이 나올 곳이라 기뻐했다는 천하 명당, 풍수적으로 여인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형국이다. 대적광전 앞에는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동탑과 서탑이 늠름하고, 실 감는 도토마리석이 발견되어 전설 같은 이야기에 힘을 더한다.경내는 세 단으로 나뉘어져 높고 웅장하다. 관음전에 들러 백팔 배를 하고 가파른 계단을 천천히 오르면 오래된 대적광전을 만난다. 대적광전에 봉안된 보물 307호 석조비로자나불은 석굴암 본존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풍만하고 장대하다. 게다가 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불상답지 않게 보존상태도 양호하다.운무도 고요한 골짜기를 유빙처럼 떠다니며 기도 중인가. 절은 참선에 든 듯 고요하고 까마귀 한 마리 죽은 나뭇가지에 앉아 간헐적으로 울어댄다. 수행하는 스님들은 굳게 닫힌 선방문 안에서, 나는 까마득한 옛날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걷는다. 꾹꾹 눌러 밟는 시간 속에 그리움이 피어난다. 오늘처럼 안개 냄새가 나는 천 년 전 어느 구월의 하루를.왕희지의 재림이라 일컫던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로 추정된다는 도선국사비 앞에 마주 선다. 선명하던 눈빛이 꺼져가던 순간 빛나던 말씀은 얼룩으로 남고, 옛사람이 남긴 지문은 바람이 지워 버렸다. 수많은 날들이 통증을 일으키며 손을 내민다. 무심히 지나쳤던 별 특징 없던 비(碑)가 새로운 의미가 되어 내게로 온다.내 안에 깊게 뿌리내린 이 알 수 없는 뜨거움, 결코 만질 수 없는 아득한 그리움 같은 이것을 누군가는 얼이라 했다. 큼지막하게 음각해 놓은 (개)창주도선국사(開5231主道詵國師)라는 글자만 뚜렷이 들어온다. 그 등판에 흐르는 유일한 김생의 친필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이제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가 없다. 대부분 마모되고 10여 자만 낡은 무늬로 남아 자유를 꿈꾼다. 이름을 남긴다는 건 빛나는 존엄 뒤에 깊고 여윈 빈 의자 하나 만드는 일인지 모른다.약사전 툇마루에 앉아 잠시 사색에 잠긴다. 절 살림을 맡아하는 실장님이 차 한 잔을 권한다. 종무소에 앉아 보이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내 눈은 높다란 계단 위에 앉은 비로전으로 향한다. 자유롭게 자라는 풀숲에는 이른 가을이 일렁이고 공양주 보살은 텃밭에서 막 따온 고수를 다듬는다. 목청을 낮추지 않고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마저 평화롭게 들리는 산사의 오후다.스스로 빛을 낸다는 수도암의 비로자나불상, 그 위신력(威神力)에 관한 신비성보다 세속의 삶을 뒤로 하고 산중에서 봉사하며 살아가는 두 분의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다. 어떤 깨달음이 있어 평생을 열망하며 이루어놓은 화려한 이력들을 버릴 수 있었을까.향이 강한 고수 같은 분들이다. 피를 맑게 하고 심신을 안정시켜주어 예로부터 스님들이 애용했다는, 호불호가 뚜렷이 갈리는 채소다. 절집에서 맛보는 고수의 맛이 궁금해 한 잎 따서 베어 문다. 내 몸은 낯선 이국의 향기를 거부한다. 천천히 보이차로 입가심을 한다. 발효된 차가 은은하게 온몸을 돌아 나를 안정시킨다.미생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친환경 농법 EM(Effective Micro-organisms)으로 채소를 키운다는 소식은 얼마나 겸손한가. 이랑마다 촘촘한 망들을 씌워 유해한 벌레를 차단하고 주지 스님이 손수 풀을 깎는다. 수행과 울력을 기도처럼 하시는 스님은 뵙지 않아도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선지식 같은 분이리라.조낭희 수필가산사를 나서는데 공양주보살이 커다란 통 하나를 건넨다. 주지 스님이 손수 만들고 희석시켜 놓은 발효액이다. 친환경적인 삶에 욕심이 생겨 반가운 마음으로 넙죽 받고 말았다. 발효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유익함을 준다는 말이며, 앎이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커다란 EM 한 통을 트렁크에 싣는다. 묵직하다. 기도하고 실천하는 삶 그리고 무심으로 베푼 정성이 덤으로 실린 까닭이다. 하지만 기쁨은 짧았다. 밤늦게 집에 도착한 후 트렁크에 있는 발효액을 꺼낸다는 걸 잊고 말았다. 다음 날 시큼한 냄새가 진동하여 살펴보니 엎질러져 깨진 통 틈새로 발효액이 죄다 흘러나와 차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참담하다. 바빠서 종종걸음을 치던 내게 일거리 하나가 보태졌다.텃밭이며 정원에서 향기를 피워야 할 발효액이 쓰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몸의 수고로움 없이 좋은 결과를 원했던 나의 아둔함과 설익은 동경이 불러온 참사였다. 향이 강한 고수처럼 혹은 눅진눅진한 발효액처럼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고수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자기 고유의 향을 지키며, 발효가 된다는 것은 내가 없어지고 또 다른 나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수도암에는 고수 같은 보살과 발효액 닮은 스님이 계신다. 그 곳을 다녀온 후 쓸쓸한 삼귀례(三歸禮)의 고백 하나, 지금까지 내 가슴에서 그렁거린다.

2019-09-16

젖은 눈빛이 전하는 말… 영천 영지사(靈芝寺)

비가 지나간 뒤 숲은 온통 젖어 있다. 도랑물이 콸콸 젖어 흐르고 이끼 낀 부도들도 잿빛으로 젖어 있다. 젖은 나무들이 천년고찰의 일주문을 대신한다.영지사의 주차장은 키 큰 참나무 숲이다. 세속을 비켜 앉은 무념의 기운이 지배하는 소박한 곳,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싶다. 발 빠른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를 담담히 돌아앉아 고요히 참선하는, 그런 절이다.영지사는 신라 무열왕 때 의상대사가 웅정암(熊井庵)이라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때 중창하면서 영지사(靈芝寺)로 바뀌었다. 영조 50년에 중수하였다는 유적비와 지금까지 사찰을 지켜 온 주지 스님들의 부도 네 기가 나란히 초입을 지킨다.가난한 민초들의 등 휜 일생을 말없이 보듬으며 함께 늙어갔을 법한 절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마중을 나온다. 느릿느릿 한가로운 걸음걸이와 방문객을 맞는 애교가 보통이 아니다. 고양이의 안내를 받는 사이 먼저 온 불자와 차담을 나누던 스님이 인사를 건네 온다. 편안하다. 절도 스님도.절은 작지 않다. 공사중이라 그런지 숙환을 앓는 노인의 젖은 눈빛 같은 안쓰러움이 묻어난다. 그 중심을 범종각(泛鐘閣)이 지키고 있다. 누하진입식(樓下進入式) 형태를 갖췄는데 현판에는 루(樓)가 아닌 각(閣), 불경 범(梵) 대신 들 범(泛)자를 쓴 까닭은 옛날에 이곳은 물 위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타원형으로 생긴 법고도 특이하고 종을 치는 당목의 나이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운판과 목어, 갖출 거 다 갖춘 범종각이 어딘지 외롭고 허전해 보인다. 시방세계를 깨우치며 지옥중생을 구제한다는 법고는 속울음 삼키듯 안으로 우는 법에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범종각 위를 서성이며 한 때는 찬란했을 영지사의 옛날을 그려본다.해질녘 절간에서 울리는 타종 소리나 노을을 등에 업고 댕강대는 교회의 종소리는 생각만 해도 엄숙하고 평화롭다. 타종 소리는 종과 당목, 온도와 습도, 절간의 분위기에 따라 그 울림이 다르다. 영지사의 타종소리가 궁금하다. 그리운 것들 떠나보내느라 한철 꽃잎 지듯 아플 것 같다. 쇠줄과 당목을 연결하는 무명천의 낡고 쓸쓸한 눈빛 위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머물다 갔을까.대웅전 법당문은 굳게 닫혀 있다. 기도하는 불자 대신 여름풀들이 드문드문 앞마당을 지키고 고양이와 강아지가 삼층석탑 주변을 돌며 장난을 친다. 일상적인 그들의 평화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인간만이 불성을 가진다는 말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린다.양측 문이 잠겨 있어 조심스럽게 어간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도하는 불자보다 스님 홀로 예불 보는 시간이 많을 것 같은 작은 법당, 문 여는 소리에 숲과 바람이 먼저 귀를 세우고, 축원을 담은 불자들의 주소와 이름이 천장에 매달려 무심히 바라본다. 이 찰나적 순간에도 계절은 오고 한동안 익숙했던 계절은 또 사라져 갈 것이다.주지 스님이 가리키는 곳에 작은 악착보살이 줄을 잡고 반야용선에 오르고 있다. 악착(齷齪)스럽다는 강한 말의 이미지와는 달리 귀엽고 천진한 표정이다.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몰입하는 순간만큼은 꽉 찬 비움의 상태임을 말해 주듯이. 흔하게 쓰는 ‘악착스럽다’는 좋은 의미를 가진 절집 용어였던 것이다.어원은 이렇다. 불심 깊은 한 여인이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반야용선에 오르기로 했는데 그만 늦고 말았다. 반야용선을 타지 못해 발을 구르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밧줄을 내려주자 여인이 악착같이 매달려 반야용선에 오르게 되었다. 용맹정진 수행하라는 뜻으로 악착보살은 그 오랜 세월 법당에 매달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권위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성천 주지 스님의 미소는 소탈하다. 삶의 철학도 분명해 보인다. 드러나는 것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기에 나는 긴장을 놓지 않는다.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부질없는 분별심을 습관처럼 즐기고 있다.그럴수록 스님은 여유롭고 나는 점점 방향을 잃고 미궁을 헤맨다. 고양이 요요가 소리도 없이 잔디밭을 지난다. 그 발걸음과 스님이 닮았다고 생각할 때, 스님이 말씀하신다.“언행이 실망스러운 스님을 만나면 감정을 소진하지 말고 ‘스님, 초심으로 돌아가십시오’ 하고 마음으로 기도하세요.”조낭희수필가와르르 아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산사를 찾아다니면 번뇌가 줄어들 거라 믿었던, 어리석음을 위한 송가이기를 바란다. 허탈하다. 처음 출발선 그 자리에서 여태 맴 돌고 있는 나를 보았다. 무욕(無慾)의 가벼움은 멀고도 멀다. 절집을 찾아다닐수록 허기졌던 이유를 알 것 같다.스님이 어떤 분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리라. 일상의 진리 앞에서 나는 지나치게 얕았거나 깊었다. 마음과 마음을 드나들 수 있는 바람 한 줄기 내 안에 재워두고 살고 싶다.낮은 창문을 기웃거리던 은행나무 그림자가 넉넉해지는 오후, 고양이 요요의 몸짓도 느려지고, 젖었던 내 발걸음의 뒤축도 한결 가벼워 온다. 영지사는 여전히 돌아앉아 참선 중이다.

2019-09-09

소중한 것은 내 곁에… 청도 운문사

지난 밤 꿈에 그가 하얗게 핀 파꽃을 안고 찾아왔다. 안부를 물어야 하는데 그만 가위에 눌려 잠을 깨고 말았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정원으로 나갔더니 젖은 달빛아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넘쳐흐른다. 잔디밭이나 바위 틈, 담장 너머 빈터의 강아지풀숲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댄다. 생의 가장 눈부신 한 때를 위한 이 장엄한 합창들이 나를 숙연하게 한다.고요의 겹을 벗고 아침이 열리는 시간, 운문사로 향한다. 미처 가슴 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것들과의 재회는 세월이 흘러도 아름답다. 그런 기억들이 사라질까 두려워 우리는 가슴 속에 애틋한 시구 하나 쯤 만들어 두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비록 그 때는 힘들었다 할지라도.운문댐의 수위와 물빛은 계절마다 달랐고, 봄날의 벚꽃은 언제나 내 늑골 사이에서 통증을 일으키며 피고 졌다. 보슬비의 속삭임이나 여름날 폭풍우의 거친 숨결조차 나를 위무하던 곳, 크고 작은 외로움이 방점처럼 찍히는 날이면 무작정 달리던 길, 이 길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신라 진흥왕 18년(서기 557년) 신승이 창건한 운문사는 대작갑사(大鵲岬寺)라 불리다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로 불려졌다. 지금은 승가대학과 대학원, 율원과 선원을 갖춘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 교육 도량으로 알려졌지만 관광지화 된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 호거산 아래 스스로를 가둔 듯 세상으로 열려 있는, 활짝 핀 연꽃 같은 사찰이다.미혹으로 결박당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비로자나불, 그 아래 무릎을 꿇고 백팔 배를 하노라면 이내 지혜의 눈이 떠질 것만 같다. 색 바랜 단청과 오래된 마룻바닥이 주는 편안하고 정갈한 기운들, 비로전을 지키는 동서삼층석탑과 담장 너머 불이문의 세계를 상상하는 일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까치 떼가 땅을 쪼는 곳에 절을 지었다는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압전(鵲鴨殿) 앞을 지나노라면 작은 공간 속에 나를 맡기고 싶어진다. 두어 시간 정도는 온전히 나를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하며. 가부좌를 하고 앉았노라면 백팔배를 할 때와는 다른 기분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천연기념물로 지정된 500년 수령의 처진 소나무나 젊은 후박나무의 늠름함 앞에서 일상을 돌아보고, 불이문 앞을 지나다 젊은 스님이라도 만나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면 만다라의 세계가 그리 어렵고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드리 전나무 길과 노송들이 늘어선 솔바람 길을 걸어 나올 때쯤이면 내 안에서도 맑은 샘물소리가 들린다.이제는 만남보다 이별을 경험하는 일이 훨씬 많아졌다. 투병하는 그를 데리고 이곳에 오겠다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세상에 덩그러니 남아 있을, 주인 잃은 약속들이 모두 하늘에 올라 별이 되어 빛나기를 빌어본다. 건강했던 그가 어느 틈에 내 곁에서 걷는다.생전에 그도 이 길을 걸었을까. 나처럼 홀로 핀 쑥부쟁이와 사진을 찍고, 미간을 찌푸리며 전나무 꼭대기에 걸린 하늘을 올려다보았을지 모른다.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몇 번이나 뒤 돌아보기도 했을 것이다. 한 줄의 편지글조차 닿을 수 없는 아득한 허공, 때로는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지척에 그가 있을 것만 같다.백팔배는 그를 위한 기도로 시작되었다. 땀이 흐르고 몸이 젖는다. 이따금씩 무릎 관절이 경고를 보내오지만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없어지고 젖은 몸이 바다가 된다면 후련해질까. 그는 자주 썰물이 되어 내 가슴에서 파도친다. 잘 지내느냐는 흔하디흔한 한 마디를 어디에다 전하랴.버거울 정도의 아픔이나 고난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사치로 보여질 수 있다. 힘내라는 말만 되풀이하다 돌아오는 날이면 나의 헐벗은 문장들이 마른 나뭇잎마냥 밤새 떨다 잠들곤 했다. 오히려 상대편의 빠진 머리칼과 창백한 얼굴, 말을 아끼는 눈빛 속에 훨씬 깊고 쓸쓸한 문장들이 설산처럼 쌓이곤 했다. 그가 떠나자 마지막 경전의 문구처럼 내 안에서 종소리가 되어 울린다.인연이 깊든 얕든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힘들다. 이별 뒤에는 고통과 아픔만 따르는 것은 아닌데 여전히 두렵다. 있을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떠난 후에야 주변을 밝히는 경우가 있다. 나는 한 동안 그를 떠올릴 것이다. 시시할 정도로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그리워할 게 분명하다.조낭희수필가법당을 나서는데 바람이 어깨를 치며 장난을 건다. 재빠르게 전나무 숲으로 숨어버린 바람의 뒷모습에서 얼핏 그를 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자주, 어쩌면 모든 순간에 함께 하는지 모른다. 멧비둘기의 구슬픈 울음소리나 길고 긴 여름 말없이 타오르던 배롱꽃, 때로는 시집(詩集) 속에 내리는 밤비가 되어 함께 할 수도 있다.아름다운 삶은 기도로 성장하며 고귀한 죽음을 전제로 한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와 연결된 많은 추억들이 어딘가에서 사랑스럽게 빛나고 있으리라. 세상은 소중한 것들로 넘쳐나고, 수많은 감사의 기도로 충만해진다.바위틈 이른 쑥부쟁이 한 송이 피어 가을을 알린다. 가만히 두 손 모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진실로 소중한 것은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다.

2019-09-02

통도사 서운암

봄을 시샘하는 무리들이 저만치 물러났다 싶더니 또다시 기승을 부린다. 그래도 통도사 자장매는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선암사의 선암매나 백양사의 고불매보다 가장 서둘러 눈을 뜬다. 고혹적인 자장매 향기를 품고 서운암을 오른다. 투두둑투두둑 실밥이 터지듯 내 가슴에서 홍매화가 쉼 없이 꽃을 피운다. 서운암은 봄이 완연해질 때 와야 좋다. 매화밭에서 한바탕 꽃축제를 열고나면 더 낮은 자리에서 봄꽃들이 지천으로 핀다고 했다. 봄의 문턱에서 여전히 바람은 차건만 영축산은 봄꿈을 안고 나를 맞는다. 꽃등처럼 환하게 서운암을 밝히는 수많은 장독대들, 어둡고 답답한 장독 안에서 발효되어가는 먹거리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매화꽃 아래에서 익어갈 서운암 된장을 상상하며 나를 돌아본다.더러더러 매화가 하얗게 눈을 뜨는데 수백 년 된 모과나무는 미동도 않고 장독들을 지킨다. 온 몸에 칭칭 모포를 감고 있는 어린 나무들도 있다. 저마다 다른 것을 꿈꾸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질서 앞에서 나다움을 생각하며 탑돌이 하듯 장독대 사이를 거닌다.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다.서운암은 통도사 19암자 중 하나로 1346년(고려 충목왕 2년) 충현 대사가 창건하였다. 1859년 남봉 대사가 중건하였고 근래에는 성파 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불교의 전통을 지켜가면서 다양한 문화 행사와 들꽃 축제를 통해 서운암은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빈 매화나무 가지를 스치고 흙길을 따라 쉬엄쉬엄 장경각으로 오른다. 거위 두 마리가 물가를 노닐고 공작새들의 화려하고 긴 꼬리깃털까지, 암자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많다. 비탈길이 삭막할까 황매화 나무들이 무리지어 울타리처럼 둘러서 바람을 막아준다. 머지않아 마른 가지에 물이 오르면 잎새는 유난히 푸른빛을 띠며 노란 꽃물결로 장관을 이룰 것이다.어릴 적 사랑방 동문을 열면 황매화가 무리를 지어 안겨들곤 했었다. 고향집은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수많은 추억은 총천연색으로 살아 숨 쉰다. 황매화도 향기가 있었던가. 뜬금없이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릴 적 후각을 더듬으며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기억 속을 헤매는 동안 치마폭을 펼쳐놓은 듯 넓은 마당과 우람한 장경각이 반긴다.저 아래 서운암이 보이고 좀 더 아래 통도사도 보인다. 내 눈은 이내 숲을 빠져나가 콜록거리며 흐린 하늘을 이고 있는 아파트 숲까지 읽어낸다. 갈색빛 숲의 졸린 눈이 무겁다. 봄이 오면 숲은 파스텔 톤으로 갈아입고 나들이 하듯 사뿐히 일어설 것이다. 봄빛에 물드는 풍경을 상상하다 호젓한 겨울의 끝자락, 아니 봄의 출발점을 즐기기로 했다.장경각은 새로 지은 건물답게 세련되고 멋스런 ㅁ자 형식으로 16만 도자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와인빛이 도는 문과 기둥은 옷칠을 여러 번 해서 그런지 고급스럽고 격조가 넘친다. 조용히 슬리퍼를 갈아 신고 미로처럼 놓여 있는 장경판 사이를 걷기로 했다. 성파 스님이 1991년부터 2000년까지 해인사 팔만대장경 앞 뒤판을 분리하여 완성했다는 대장경이 가지런하면서도 빼곡히 들어차 있다. 가로 52cm, 세로 26cm 크기의 도자대장경을 보니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아무도 없는 장경각 미로를 합장을 한 채 걷는다. 높다랗게 쌓인 장경판 사이를 걷는 동안 어떤 방해꾼도 없다. 적막감을 친구 삼아 홀로 미로를 헤쳐나가는 동안 무서움과 두려움은 일지 않는다. 낯설고 어색하던 절집이 이제는 내 집처럼 편안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사찰을 찾는 일은 설렘만큼 부담감도 컸었다. 그러나 기행을 통해 삶은 훨씬 여유로워졌으며 사고의 폭과 깊이도 더해 졌음을 확신한다.기쁨과 아픔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나는 언제나 그 두 가지의 감정을 오가며 글을 썼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산사의 밤과 훌륭한 스님들과의 만남, 어쭙잖은 글을 잃고 격려해 주던 독자들도 떠오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아픔이 필요했다. 서둘러 비워내려고 조바심을 치기도 했고 때로는 지쳐서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조낭희 수필가행복했던 순간들은 가슴 속에 별이 되어 힘들 때마다 나를 밝혀 줄 것이다. 연재를 마치면서 나는 무한한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또 다른 시작 앞에서 긴장을 감지한다. 처음 혹은 마지막, 그 의미는 상반되지만 분명한 건 서로 이어져 있으며 닮아 있다는 점이다.설렘과 긴장이 있는 처음, 자유와 허전함을 몰고 오는 마지막, 둘은 언제나 서로를 그리워하며 동경하리라. 그것이 인생이다. 나는 또 다시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인생은 끊임없이 폐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아가는 두발 자전거와 같기 때문이다.

2016-03-04

양산 통도사 자장암

▲ 조계종 통도사의 산내암자 중 하나인 통도사 자장암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계율이 높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짓기 전에 이곳의 석벽 아래에서 수도하며 창건했다.눈이 녹아서 비나 물이 된다는 우수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데 내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 있다. 며칠간의 불면증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린다. 도로는 확장공사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부산한데 그 틈바구니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실눈을 뜨고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의 두근거림을 찾아 나는 좁고 어수선한 도로를 달린다.어쩌면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을 통도사를 애써 외면하고 곧장 자장암으로 향한다. 만개한 홍매화 소식을 접하고 두어 번 문안인사를 드리러 온 적은 있지만 일부러 암자를 찾은 적은 없다. 요염한 자태와 향기에 젖기 위한 나만의 시간, 그 사치스러운 여유를 오늘은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통도사에서 바라보던 가파르고 잘 생긴 영축산의 품은 뜻밖에도 넓고 크다. 깎아지른 벼랑에 제비집처럼 걸려 있을 암자를 떠올린 건 실수였다. 차는 통도사를 지나 가파르지 않은 언덕길을 휘이휘이 돌고 돌아 고개를 넘는다. 그제서야 영축산이 제법 너른 들을 두르고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자장암은 멋진 개울을 앞에 끼고 맞은 편 골짜기에 숨어 있었다.모든 번뇌를 내려놓으라는 108계단을 무심히 오른다. 성곽처럼 높은 돌 축대 위에 들어서자 간결하면서도 남성적인 영축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인돌을 닮은 돌문과 좀 더 깊은 세계로 안내하는 기와를 인 나무문의 어울림도 아름답다. 그 너머로 노송의 푸른 몸이 그림처럼 붙박혀 허공을 지킨다. 그리 크지 않은 암자의 고즈넉한 풍광 앞에서 숨이 멎을 것만 같다.자장암은 1천400여 년 전 신라 진평왕 때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에 바위 아래 움집을 지어 수도하던 곳이다. 통도사 내의 칠방의 하나로 자장율사의 제자들이 수도하여 자장방이라 부르다가 회봉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고종 때와 1963년에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 법당은 암벽 아래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옆에 4m에 달하는 마애불상까지 있어 짜임새가 훌륭하다.어디선가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법당 뒤쪽 암벽에서 나오는 석간수 앞에 한 무리의 여자들이 서 있다. 자장율사가 손가락만한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했는데, 도력으로 오늘날까지 생존한다는 금와공 전설이 비로소 떠오른다. 입과 눈가에 금줄이 있고 등에는 거북모양의 점이 있는 개구리가 불심 지극한 불자에게만 보인다는 이야기, 나는 손가락 만하게 뚫려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들의 수다를 지켜보며 기다린다.금개구리는 때때로 벌, 나비, 거미 등으로 변화무쌍하게 살아가며 여름철에는 바위가 과열되어 솥처럼 뜨거워도 그 위를 뛰어다닌다. 많은 참배객들이 금와보살이라 부르며 친견하고자 하지만 여간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불자도 아닌 내 눈에 보일 리가 없건만 나는 그 작은 구멍에 눈을 대고 이리 살피고 또 저리 살핀다. 은근히 기대감에 싸였던 스스로가 우습다.이슬람과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양식이 공존하던 성소피아 성당에서 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던 벽이 생각난다. 그 때도 나는 반질반질 닳고 닳아 구멍이 난 금속판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위해 긴 줄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그 한 바퀴를 위해 나는 온몸을 비틀며 안간힘을 쏟았고 그 뒤 허탈감을 맛보았다. 흥미 위주의 작은 행운조차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은 모양이다.금와당을 나와서야 나는 주법당을 들르지 않았음을 알았다. 관음전을 둘러보고 마애불의 순박한 표정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새겨져 있지만 지쳐 있는 몸과 마음 때문인지 마애불의 표정도 어두워 보인다. 멍하니 마애불과 마주 보고 서서 마음에 햇살이 일기를 기다린다. 마음이란 돌처럼 견고하기도 하지만, 여리고 변덕이 심해 사소한 것 앞에서도 온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금와불을 보았다고 너스레를 떨던 여자들이 관음전에서 빠져나와 까르르 웃음을 흘리며 사진을 찍는다. 비슷한 연배의 그들은 외모나 말투조차 닮아 있다. 관음전에서 절을 하는 동안 진지함과 엄숙함은 두고 나온 듯, 그들은 쉴 새 없이 속살거리고 웃어댔다. 은사시나무처럼 팔랑대며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조낭희 수필가썰물처럼 빠져나간 법당에 홀로 앉아 시간을 보낸다. 절도 하고 싶지 않고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다.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도 무언가에 대한 정체 모를 갈증이 인다. 그동안 삶의 만족도와 행복의 기준은 얼마큼 진정성을 가지느냐로 가늠했던 것 같다. 가끔은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낯선 내가 되어 살아보고 싶다. 자장 율사의 신통력으로 살아가는 금와불은 결코 암혈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겨울잠에서 깨어나 금개구리가 될 때 비로소 구멍 속의 금와불도 보일 것이다. 머지않아 경칩이 온다. 그 때는 폴짝폴짝 가볍게 뛸 수 있는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6-02-26

의성 운람사

운람사는 산아지랑이(嵐)가 구름(雲)으로 피어오르는 절, 혹은 구름(雲)과 바람(嵐)으로 만든 절이란 뜻을 가졌다. 이름에서 설렘이 묻어난다. 하늘로 오르는 산, 천등산 정상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을 향해 차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꺾고 꺾으며 힘겹게 오른다.이름처럼 운람사의 풍경은 장관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전해지지 않지만 유적과 유물을 통해 신라 신문왕(682-692년)때 의상 조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추정하고 있다. 운람사가 위치한 지형이 구름 가운데 반달이 솟은 형상, 운중반월형이라 그런지 굽이굽이 산능선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한 눈에 들어온다.소박한 절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린다. 묘한 향수와 정감에 싸여 경내로 들어서는데 뜻밖에 소란스럽다. 사찰 같지 않은 어수선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불을 지피며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 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불자들과 마당을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정신이 없다. 설 연휴 분위기에 들뜬 평범한 시골집 마당을 기웃거리듯 선뜻 들어설 수가 없다.이끼 낀 삼층석탑만 분위기에 밀려 먼 데 산을 바라보며 쓸쓸하다. 사진을 몇 컷 찍으며 기다려 보지만 산만한 분위기는 쉽게 가시질 않는다. 절집을 가정집처럼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모습에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심기 불편한 마음을 안고 법당으로 들어선다.주법당인 보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11세기경에 제작된 보물 1646호 초조본 불설가섭부불열반경 복장유물이 나온 불상이다. 절을 하는데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출렁출렁 법당으로 밀려든다.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마음이 평온하기는커녕 은근히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다. 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불자도 아닌 나는 무엇을 위해 불전을 내고 절을 하는가?앙증맞은 산왕각과 영험한 산신탱화도 감흥이 일지 않는다. 단지 소란함을 피해 천천히 축대 위에 있는 삼성각으로 향한다. 법당문은 열지도 않고 내 앞에 펼쳐진 겹겹의 능선들을 바라본다. 눈부실 만큼 아름답고 고요한 세계, 나는 모든 것을 잊고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서서히 마음이 평온해져 온다.자연만큼 위대하고 존귀한 멘토가 있을까? 저 반대편 산에서 바라보면 천등산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까? 자기 안에 갇혀서는 세상을 결코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누워 있는 산들이 내게 말한다. 사찰은 늘 정숙하고 침묵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싸여 평정을 찾지 못하고 붉으락푸르락 했던 마음들이 부끄럽다. 그 때 겹겹의 능선들 사이에 숨어 있던 와불이 선명하게 보인다. 거짓말처럼 마음이 꽃처럼 피어오르고, 와불이 조용히 내 안에 들어와 눕는다.햇살 좋은 2월의 산사, 우측으로 소나무 숲길이 보인다. 길은 어떤 치장이나 오염도 없이 순결했으며 정성과 온기로 가득하다. 잘 다듬어 놓은 길 위에는 솔잎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고 나무들의 그림자가 가득하다. 천천히 자라는 소나무들이 세월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관목들은 낮은 곳에서 꿈꾸는 법을 일러 준다. 숲을 사랑하고 사색을 좋아하는, 성실하고 사람 좋아하는 스님이 계시는 모양이다. 고요한 숲길을 두르고 있는 운람사가 새롭게 다가온다.숲은 적당히 시야를 가려 주어 자연스럽게 내면을 바라보도록 돕는다. 홀로 묻고 답하며 상상하다 보니 마음이 충만하다. 정상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어디쯤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지척에 운람사가 있으니 두렵지가 않다. 편안한 마음으로 햇살 가득한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머지않아 봄이 오면 적막하던 숲은 다시 부산하게 눈을 뜨리라. 숲은 기다릴 줄 알고 때로는 비축해 둬야 할 때를 정확히 알기에 오늘도 많은 것을 배운다.무심코 우측 아래를 내려다보니 임도가 하얗게 눈을 덮어쓴 채 우리를 따라서 걷고 있다. 길은 넓고 잘 닦여졌지만 응달에 갇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체념하듯 쓸쓸하다. 잠시 내가 걷는 길이 북쪽 길에게 미안해했다. 닮은 듯 다른, 길과 길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참을 같이 걷다 어느 시점에서 갈라섰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저 혼자 산모롱이를 돌아서 가버린 모양이다.▲ 조낭희 수필가산길을 걸으며 인생을 본다. 그리 높지 않은 산에도 서로 다른 길이 공존하고 있다. 만남과 이별, 햇살 가득한 날과 어둡고 그늘진 날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자만심에 빠져 우쭐거리거나 자괴감으로 힘들어 할 필요도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을 정확히 구분 지을 수 없으며, 양지가 음지로, 음지는 양지로 변하며 이어지는 게 인생이다. 내가 걷는 길은 산모롱이가 나타나기도 전에 운람사를 향해 내리막을 치닫고 있었다. 또 다른 풍경을 안고 내려오니 나무벤치가 말없이 기다리고 있다. 차들은 모두 빠져나갔고 경내는 조용하다. 그토록 바라던 고요와 침묵, 여느 절간과 다름없는 운람사의 모습 앞에서 왠지 마음이 허전하다.

2016-02-19

경주 백률사

겨울 공기가 유난히 맑고 상큼하다. 한 차례 진눈깨비가 다녀갔는지 들과 길은 드문드문 잔설을 이고도 눈부시다. 어렵지 않게 찾은 소금강산은 초입부터 정갈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소나무 숲 아래로 이어진 길은 호젓하고 평화롭다. 오르막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산책하듯 가벼워 보인다. 소나무와 바위가 적당히 어울린 산은 천년 신라의 숨결을 간직한 야외 박물관으로 손색이 없다. 국보 28호 금동약사여래입상을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만난 후 백률사를 만나고 싶었다. 두 팔이 없지만 풍만한 얼굴에 미소가 아름답고 우아한 불상 앞에서 백률사라는 출처는 생소하고 낯설었다. 삼국유사에도 백률사의 영험한 관음상 이적 이야기가 소개된 것을 보면 큰 사찰이었음이 분명하다.백률사는 불국사의 말사로 이차돈의 순교와도 관련이 깊은 성스러운 사찰이다. 이차돈이 불교 승인을 위해 처형을 당할 때 목을 자르는 순간 하얀 젖이 한길이나 솟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잘라진 머리는 하늘을 날아 이곳 소금강산에 떨어졌다. 이에 527년(법흥왕 14년) 불교를 승인하고 목이 떨어진 자리에 `자추사`라는 절을 세웠다. 훗날 백률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것을 경주의 부윤 윤승순이 중수하였다.산길을 오른다는 긴장감이 없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커다란 석불이 보인다. 경덕왕이 백률사로 가는 도중에 염불소리가 들려 땅을 팠더니 나왔다는 보물 121호 굴불사지 사면석불이다. 왕이 그 자리에 굴불사를 세웠으나 절은 없어지고 석불만 남아 있다. 다양한 불상들이 풍만하고 자연스럽게 조각되어 신라인의 불성과 향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불교 예술과 역사를 간직한 채 천오백 여년을 살아온 사면 석불이 뿌듯하고 대견하다.잘 닦인 포장도로를 두고 돌계단을 디디며 산을 오른다. 쉬엄쉬엄 10여 분을 오르자 백률사는 푸른 대나무 숲에 몸을 숨긴 채 긴 돌계단만 드리우고 있다. 결이 거친 돌계단에 서린 청이끼와 뒹구는 낙엽의 조화, 어느 새 자연과 하나가 되어버린 인공물 앞에서 우리는 웃음을 날리며 사진을 찍는다. 머릿속이 홀가분해진다.가끔은 사찰보다 산사 가는 길에서 더 큰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어떤 의식이나 노력 없이 몸과 마음이 가볍고 투명해져 오는 것이다. 백률사 가는 산길 역시 너무 짧아서 아쉬울 정도이다. 그런 시간 속에 한량없이 묻히고 싶은데 나의 의식은 또 다른 무언가를 늘어놓으며 발길을 재촉해 댄다.계단 끝으로 백률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뜻밖에도 아담하고 소박한 사찰이다. 큰 나무 두 그루가 불이문처럼 서서 산사를 지키며 우리를 맞는다. 정적이 감도는 마당과 트인 듯 숨어 있는 경내로 선뜻 들어설 수가 없다. 고즈넉한 여유와 평화 그리고 침묵이 감도는 긴장감 앞에서 가슴만 두근거린다.마당 끝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뒤늦게 발견했다.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도심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미동도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 한 남자의 고독과 침묵이 백률사를 서늘하게 적신다.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 범종 앞을 지날 때 무심히 질주하는 차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대웅전은 팔작지붕이 아니라 맞배지붕이다. 앞마당에 탑을 세울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암벽 바위에 마애삼층석탑을 새겨 놓은 것도 이색적이다. 고요한 경내와 달리 좁은 법당에는 서너 명의 불자가 기도 중이다. 나도 덩달아 108배를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몸이 마음처럼 가볍질 않아 당황스럽다. 몸과 의식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다 108배를 끝내고 말았다.절에 오면 의식적으로 나를 돌아보고 삶에 대한 견고함을 다짐하거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삶에 대한 예의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의식이 독단적으로 무언가를 계획할 때 몸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무심했던 것 같다. 몸은 의식의 강제성에 습관처럼 지배 받아 온 것은 아닐까? 의식과 몸의 불협화음에 자꾸만 의문이 인다.▲ 조낭희 수필가삼성각 앞에 서서 가만히 내 안을 살핀다. 그러고 보니 마음을 살피듯 몸의 반응을 제대로 살핀 적이 없다. 늘 컨디션이라는 말로 일축하며 의식으로 몸을 달랬다. 정신은 몸보다 우위였으며 둘을 동등하게 다뤄주지 않았음을 알아챈다. 오늘 같은 날은 바람처럼 산을 휘저으며 동천동 마애삼존불을 만나고 오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 산이 백률사를 품고 있는 듯도 하고 백률사가 산을 거느리는 것처럼도 보인다. 산과 백률사는 서로에게 부분이기도 하고 전체의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홀로 앉아 있던 남자는 가고 없다. 팽팽히 그를 포획하고 있는 고삐를 풀기 위해 그 역시 내면과의 만남을 가졌으리. 몸과 의식의 흐름을 읽는 일만큼 자기를 바로 세우는 일도 없다. 세상의 움직임과 나의 반응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행하는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려오는 길이 길게 느껴진다. 백률사가 나를 첫 출발선에 다시 세운 까닭이리라.

2016-02-12

경산 반룡사

잔뜩 찌푸린 하늘을 달래며 반룡사를 찾아 나선다. 절은 깊은 산속이 아니라 마을과 들을 동무 삼아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넓은 주차장 위로 성벽처럼 둘러싸인 석축과 큰 누각이 위용을 자랑하지만 깔끔한 전각들이 조금은 어색하다. 반룡사는 661년(문무왕 1년) 이 지역 출신인 원효 대사가 창건하였다. 신라 삼국 통일의 성업을 달성하기 위한 호국도량으로 한국의 3대 반룡사(경산, 고령, 평양) 중 하나로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고려 중기에는 원응국사가 중창하여 신흥사로 불렸으며 수많은 고승과 명사들이 줄지어 찾아와 한 때는 5개의 암자와 26개의 당우를 가진 대가람이었다. 그 후 반룡이 승천한 격이라 하여 반룡사라 명명하였지만 영화롭던 절은 배불정책의 폐해와 원인모를 화재로 폐사되었다가 복원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높다란 계단을 따라 경내에 들어서자 굽이굽이 이마를 드러낸 산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방금 달려왔던 시골길은 다시 산을 향해 나아가고,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사하촌의 풍경도 여느 농촌마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반룡사의 유물은 흥망을 거듭하면서 다른 사찰로 옮겨지거나 도난당하고, 석조 부재들만 마당 한 귀퉁이에 남아 과거를 회상한다. 낙조의 아름다움을 읊은 이인로 선생의 시조차 애잔하고 쓸쓸하다.이곳은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불리며, 우리 민족 최초의 글인 이두 문자를 집대성한 설총이 그의 어머니 요석 공주와 어린 시절을 보낸 사찰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 내외는 딸 요석공주와 설총을 만나기 위해 절 뒤에 있는 왕재를 넘어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를 대표하는 성현의 삶과 정신이 담긴 절집치고는 너무나 허전하다.대가람으로서 찬란했던 한 때를 알 리 없는 전각들은 먼 데 산을 볼 뿐 말이 없다. 절집을 지키는 노송이나 오래 된 느티나무, 좌선대로 쓰였을 법한 흔한 바위조차 보이질 않는다. 가난한 상상력에 불을 지펴줄, 원효와 요석의 애달픈 사랑이나 총명한 설총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할 무언가를 찾아 나는 경내를 헤맨다. 계절조차 을씨년스러워 마음이 더욱 찹찹하다.대웅전을 지키는 일타 스님의 필체가 유난히 돋보인다. 물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황금빛 기운 속에서 나는 야심찬 희망을 엿본다. 대웅전에 들러 삼배를 해 보지만 15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기란 쉽지 않다. 새 전각은 낯설기만 한데, 역사적 설명이 장황한 안내문들이 자꾸만 발길을 붙든다. 오늘은 낙조의 아름다움조차 기대할 수 없다.할 수 없이 태종 무열왕이 딸과 아들을 보기 위해 넘나들었다는 왕재로 향한다. 산길은 초입부터 가파르고 인적 없는 길 위에는 낙엽만 수북하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낮다. 낙엽이 발길에 차일 때마다 애틋함이 느껴진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산길을 오르며 나는 요석 공주를 생각한다. 사흘간의 사랑만 남기고 떠나버린 원효를 찾아 부른 배를 안고 도착하지만 거절당하는 요석, 그러나 지아비를 원망하지 않고 이곳에 머물면서 설총을 훌륭히 성장시킨, 내공 깊은 여인이다.여러 가지 생각들로 마음이 바빠진다. 채 한 시간도 오르지 않았는데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가던 길을 되내려온다. 낙엽이 빗물에 젖어 미끄럽다.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다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나는 무엇을 찾겠다고 무모하게 이 가파른 산길을 올랐을까? 의상과 같이 당나라를 찾아가다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스스로 깨닫고 되돌아온 원효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그제서야 떠오른다.정자에 앉아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며 반룡사를 바라본다. 무심히 비를 맞고 있는 전각들과 넓은 터가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무한한 가능성으로 꿈틀댄다. 고풍스런 건축미나 보물급 문화재를 찾느라 나는 반룡사가 면면히 지켜온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모든 것에 걸림이 없어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는다는 무애(無碍), 지금 내가 알고 깨달아야 할 것은 원효의 유물이 아니라 그 정신이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중한 가르침을 알리기 위해 그는 광대 복장을 하고 난해한 화엄경의 이치를 노랫가락에 담아 쉽고 재미있게 서민의 삶 속에 심었다.▲ 조낭희 수필가자칫 계율을 어기고 욕망을 좇는 파계승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원효 대사는 거침이 없고 영혼이 자유로운 분이다. 매순간 그대로의 모습을 중요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한 위대한 고승, 남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나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실천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사랑하되 집착을 내려놓은 원효와 지아비에 대한 믿음 하나로 흔들림 없었던 요석 공주를 떠올리며 천천히 비탈길을 내려온다. 겨울비 내리는 쓸쓸한 절 마당에 서서 한동안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시작도 끝도 없는 하늘, 그 어디쯤에 원효를 향한 요석 공주의 애잔한 그리움과 눈물이 서리어 있을 것만 같다. 언젠가 그들의 못 다한 사랑이 황홀하게 피어날 반룡사의 멋진 낙조를 꼭 한번 보고 싶다.

2016-02-05

통영 미래사

전국을 강타한 한파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정겨운 다도해와 낭만의 편린들을 안고 살아가는 동양의 나폴리, 따뜻한 통영 앞바다가 그립다. 그곳에 가면 미륵불이 오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미래사를 볼 수 있다. 오늘 같은 날은 절을 에워싼 편백나무 숲을 거닐고 싶다. 피톤치드 향기로 샤워를 하고 나면 온몸은 파랗게 물이 들고 지쳐 있던 영혼도 금세 생기를 찾을지도 모른다. 바다를 끼고 달리던 차가 어느 지점에서 급하게 산비탈을 향해 꺾어들고, 1Km쯤 오르면 하늘을 찌를 듯 키 큰 편백나무들이 나타나 미래사가 지척에 있음을 알려 준다.미래사는 미륵신앙이 살아 숨 쉬는 미륵산 남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스님의 상좌였던 구산 스님이 석두, 효봉 두 스님의 안거를 위해 1954년에 창건하였다. 역사는 짧지만 주로 효봉 큰스님의 문도들이 키워온 선도량으로 법정 스님이 출가하여 효봉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행자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불영담이라는 작은 연못과 구름처럼 떠 있는 아치형 다리, 그 너머 숨어 있듯 모습을 드러내는 사찰과의 조화는 사진 속에 등장하는 한국의 옛 정원을 보는 것처럼 운치 있고 멋스럽다. 불영담은 동장군에 밀려 얼어붙은 채 침묵 중이다. 그러나 얼음장 밑에는 벌거벗은 물고기들이 봄을 기억하며 유영할 것이다. 편백나무들은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길을 밝힌다.전각들이 아담한 정원을 중심으로 서로를 보듬으며 둘러 서 있다. 가람의 크기나 배치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소박하다. 병풍처럼 사위를 둘러싼 편백나무들의 기상 때문인지 겨울 절간답지 않게 안온함과 평화로움이 넘친다. 미래사와 편백나무, 미륵산은 각자 존재감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를 배려한다. 절은 미륵산의 유명세에 눌리지 않고, 편백나무 숲도 절의 배경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체이면서 객체가 되어 자리를 빛낸다.미래사의 가장 큰 보물은 편백나무 숲인지 모른다. 십자 팔작 누각의 범종루나 티베트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삼층 석탑보다 절을 호위하고 있는 편백나무 숲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문다. 효봉 스님이나 법정 스님에 대한 친근한 일화와 맑은 정신을 그리다보니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편백나무 숲과 잘 어울리는, 단아하면서도 정갈한 사찰이다.`한려해상 바다 백리 길`의 시작점이라 그런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들른다. 오늘도 요사채 영매당 마루 위에 서너 명의 등산객이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다. 그들에게서 향기로운 미소가 날린다. `세상의 모든 일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슬픔 없이 티끌 없이 안온한 곳, 그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네.` 입구에서 본 글이 클로즈업 된다.세상을 살아가는 데 마음 다스리는 일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날마다 기도를 하고 마음을 비워 보지만 의식보다 먼저 자리를 잡는 숱한 감정과 욕망들, 나는 얼마나 좌절했던가? 인생이란 바라보기의 연속이다. 묵묵히 있는 그대로의 나와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 시선은 언제나 너무 깊거나 얕았다. 그러나 어이하랴?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허무하게 제 자리에서 맴돌다 그칠지라도.법관으로서 첫 사형선고를 내린 후 존재와 삶에 회의를 품고 출가한 효봉 스님이나 평범한 대학생활을 접고 큰스님의 제자가 된 법정스님을 떠올린다. 무엇이 그 분들을 이곳으로 이끌었으며, 진정 내 안에서 다투고 있는 갈등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 안의 소리를 찾아 나는 천천히 절을 빠져나와 절 뒤쪽으로 나 있는 편백나무 숲길을 걷는다.편백나무 꼭대기에서 바람이 파도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쏴아쏴아 무서운 바람소리에 나무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바람은 허공에서 몸부림치다 멀리 사라져 버린다. 나는 심연의 바닷속을 헤엄치듯 편백나무 숲길을 걷는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또한 인간에게 의지가 주어졌다는 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인가?▲ 조낭희 수필가편백나무 숲을 지나 소나무와 잡목 숲 사이로 난 등산로로 접어든다. 잡목들은 숭숭 구멍이 뚫린 가슴으로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다. 신명난 바람이 내 얼굴을 따갑게 때리고 나무들의 옆구리를 할퀴며 지나간다. 숲은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도 다르지만 바람이 있어 더 풍요롭고 의연한지 모른다. 정상에 이를 무렵 내 등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바람이 심해 케이블카 운행을 중단한다는 방송에 사람들이 황급히 자리를 뜬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을 밟은 후, 바람 같은 웃음을 날리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올 때처럼 제일 긴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다. 나는 아무도 없는 정상에서 한동안 바람을 맞고 떠나보내기를 반복했다. 내 안은 텅 빈 것처럼 가볍다가 이내 또 무언가로 꿈틀댔다. 땀이 식어 등줄기가 선득한데 또 바람이 몰려온다.

2016-01-29

영덕 장육사 홍원루

햇살 좋은 오늘, 영해 바다는 화사한 옥색 치마를 두르고 저 혼자 꿈을 꾸듯 살랑댄다. 바람까지 상큼하다. 장육사 가는 길은 바다를 두고 산을 향해 달린다. 슬쩍 돌아보면 여전히 눈부신 바다가 따라올 것만 같다. 저만치 일주문이 보이는데 길은 엉뚱한 곳으로 비켜나 있다. 오직 한마음으로 진리에 귀의한다는 뜻을 가진 일주문은 사바세계에서 오는 사람을 맞지 못하고 개울 건너에서 섬처럼 홀로 떠 있다. 쓸쓸함을 삼키고 먼 곳을 응시하는 일주문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제 역할과 기능을 다 하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장육사는 1355년 고려 공민왕 때, 이곳이 고향인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열두 살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문경 공덕산 묘적암에서 승려가 된 나옹 선사는 공민왕의 스승으로, 왕의 청을 받아들여 내전에서 설법도 하고 왕사가 되어 이름을 떨친다. 나옹선사의 명성만큼 한 때는 장육사를 찾는 이도 많았을 것이다. 세종 때 산불로 사찰이 소실되어 중건했지만 또 다시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 의해 폐찰된 것을 1900년 중수했다.작은 주차장 앞에서 길은 멈춘다. 가슴에 담아 왔던 동해 바닷빛이 운서산 위로 펼쳐져 있고 그 아래 성성한 기운의 소나무들이 산사를 호위하고 있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몸을 녹이는 감들, 따사로운 장육사의 겨울 풍경 앞에서 오히려 가슴이 시리다. 순백의 지성을 겸비한 눈 쌓인 산사나 혹한 속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장육사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쩌면 앞으로 칼날 같은 지성을 겸비한 겨울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유명한 나옹선사의 선시를 떠올리며 잘 닦여진 돌계단을 오른다. 당당한 풍채로 손님을 맞는 홍원루에게서 여유와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누하진입식으로 홍원루를 통과하자 정면 높은 곳에 대웅전이 기다린다. 아늑할 거라 기대했는데 경내는 엄숙함도 긴장감도 내려놓고 어수선하다. 몇 해 전 여름, 일행들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던 요사채는 사라지고 황량한 빈터에 중장비 두 대가 하던 일을 멈추고 서 있다. 화재로 소실되었는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익숙했던 인연의 부재만큼이나 공허하다.간헐적으로 풍경이 울어대는 고즈넉한 산사, 스님께 차 한 잔을 대접 받으며 나옹 선사의 정신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행운을 꿈꾸었는데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사전에 정보도 없이 무턱대고 길을 나선 내 잘못이다. 멋쩍게 서성이는 나를 전각들이 멀뚱히 둘러서서 바라본다. 참 어색한 해후다.석가모니부처님이 아니라 아미타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는 대웅전에 들어가 예를 갖추고 서둘러 관음전으로 향한다. 보물 제993호 건칠관음보살좌상을 자세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굳힌 다음 속을 빼내어 만든다. 그러나 86cm의 이 보살상은 삼베 대신 한지를 이용하여 만든 조선 초기 작품이다.환하게 비쳐드는 햇살을 업고 관음보살좌상을 향해 삼배를 한다. 겨울 법당치고는 따뜻하고 평화로운데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상체가 약간 앞으로 숙여진 관음상에게서 인간적인 고뇌와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마치 등신불을 대하듯 가슴 한켠이 저리다. 순간 묵묵히 희생하며 자식들을 키워낸 한국의 어머니상을 떠올리고 말았다.불자들이 염불할 때 가장 많이 찾는다는 관세음보살, 이상하게 장육사의 건칠관음상에서는 인간적인 친숙함이 먼저 느껴진다. 병든 어머니의 쾌유를 기원하며 대웅전을 짓던 목수가 생각난다. 완공되기도 전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자신의 부족한 정성을 비관하여 종적을 감추었다는 슬픈 전설 때문일까?관음상과 나 사이의 어색하던 기운이 사라진다. 쉽게 인간적인 교감이 이루어질 것만 같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있지만 헤질 듯 얇고 닳아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은 관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모든 탐욕과 번민을 내려놓고 시선은 다소곳이 아래로만 향한다. 나는 우리의 삶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읽는다.▲ 조낭희 수필가600여년 동안 수많은 불자와 애환을 같이 했을 관음상, 언젠가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온몸에 피가 돌고 영혼이 심어져 온화한 미소를 띠울 것만 같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어린 날들을 떠올리고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모성애만큼 눈물겹고 위대한 사랑이 있을까? 낙엽처럼 가벼운 몸으로 긴 세월을 견뎌 온 건칠관음보살좌상이 어머니만큼 소중하고 위대해 보인다. 법당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생각에 잠겨 홍련암으로 향하는데 대숲이 일제히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속을 비운 채 유연하게 왕대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 작은 바람에도 온몸으로 서걱이며 잠 못 드실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젖는다. 세월이 갈수록 빚진 사랑은 늘어만 가는데 나는 또 염치도 없이 어머니가 보고 싶다.

2016-01-22

부안 내소사

뜬 눈으로 겨울밤을 새운 내소사 달빛은 참으로 교교하다. 인시를 넘기자 도량석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정적에 싸인 사찰과 능가산을 깨운다. 시린 달빛을 밟으며 대웅전으로 향한다. 새벽 공기가 제법 차다. 선잠을 깨고 나서는 길이지만 마음은 맑고 명징하다. 대웅전 법당에는 두 개의 대형 히터가 돌아가지만 냉기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법당을 지키는 부처님보다 예를 갖추고 새벽 예불을 준비하는 스님에게서 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좌복 위에 다소곳이 앉아 마음을 가다듬는데 히터 돌아가는 소리와 벽쪽을 흐르는 찬 공기가 보채듯 신경을 자극한다. 스님 몇 분이 올리는 단출한 새벽 예불에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인원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앉는다.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두타라는 비구니 스님이 창건했다. 원래 두 개의 절을 창건하여 큰 절은 대소래사, 작은 절은 소소래사라고 하였다.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아 내소사가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인조 11년에 청민 선사가 중건했다. 지나치게 웅장해서 위압적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산만하거나 조야하지도 않다. 중용의 도를 알고 살아가는 선비처럼 깊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사찰이다.꽃창살이 화사한 대웅보전은 보물 291호로 못하나 쓰지 않고 지었다. 공포 하나가 없지만 날렵한 조각은 화려하면서도 품격이 넘친다. 3년 동안 목침만 깎는 목수를 놀려 주려고 사미승 선우가 목침 하나를 숨겼다 뒤늦게 내어 놓아 공포 하나 없이 지었다는 전설은 꽤나 유명하다. 무릎을 꿇고 공손히 합장을 해보지만 마음은 자꾸만 법당을 헤맨다.단청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절대 안을 들여다보지 마라는 화공의 당부를 무시한 호기심 많은 스님처럼 나는 법당을 두리번거리며 미완으로 남아 있는 단청을 찾는다.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는 오색영롱한 관음조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나타날 것만 같다. 높은 천장의 보머리에 생동감 넘치는 용 두 마리가 물고기를 문 채 눈을 부라릴 뿐 법당은 엄숙하기만 하다.깊고 그윽한 새벽 종성이 울려 퍼진다. 길고 긴 역사를 품고 우주를 가르며 달려왔을 것만 같은 떨림, 온몸이 얼어붙듯 경건해진다. 장중한 소리는 만물을 흔들어 깨운 후 맥박이 되어 고동치다 어느 순간 은은한 속삭임이 되어 내 안에서 스러진다. 하늘의 별들과 달, 바람과 어둠까지 모두 내소사 새벽예불에 동참하는 순간이다.경전을 따라 읽을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몰려나왔다 허공으로 흩어진다. 나는 무엇을 찾고자 이 새벽 냉기 가득한 법당에 꿇어 앉아 있는가. 지금까지 어떤 것도 구하지 못했으며 끝끝내 아무 것도 찾지 못할지 모른다. 역사의 숨결이 묻어나는 높은 천장과 알 듯 말 듯한 부처님의 표정, 엄숙하게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들 속에 끼어 깨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 벅차다. 순간순간의 몰입과 기쁨으로 점철되는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일행이 빠져나간 법당에 남아 스님의 독경소리에 맞추어 기도를 한다. 낯선 처사님 한 분이 문 쪽에 서 있는 나에게 선뜻 자리를 양보한다. 누군가를 위한 배려와 사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불심이다. 한 배 한 배 이마를 바닥에 대고 백팔 배를 한다. 오체투지, 그것은 생명과 인간에 대한 공경과 겸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일 년 전 처음 산사를 찾던 그 긴장된 마음으로 돌아가 절을 한다.조국의 템플스테이가 그리워 찾아왔다는 프랑스의 교포 여성,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남은 게 무언지 공허하다는 대기업 임원, 대안 학교를 졸업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아픈 청춘, 차 한 잔을 나눈 인연들을 떠올린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물러나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은 머지않아 평화로운 일상에 젖어들며 성장의 기회를 찾을 것이다.겨울 내소사에는 시간의 톱니바퀴가 비켜가는 것만 같다. 짐을 풀기가 바쁘게 눈발이 날렸고 나는 아이처럼 흥분했다. 그러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어둠 속에서 탑돌이를 할 때는 누구보다 성숙한 자세로 돌아왔다. 천 년을 살아온 할머니 당산나무의 침묵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와의 조우, 나는 때때로 오만하거나 좌절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웅혼한 기운이 빚어내는 적막 속에 갇혀 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러나 내소사는 푸른 새벽이 올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긴 밤을 침묵했다.▲ 조낭희 수필가이른 새벽, 혼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을 걷는다. 쭉쭉 뻗은 전나무들은 냉정할 만큼 기운차고 향기는 짙어서 고독감이 느껴질 정도다. 뒤늦게 산책을 나온 한 분이 인사를 건넨다. 몇 마디의 대화로 홀로 걷던 길이 편안하다. 어쩌면 인생이란 낯모르는 이와 잠시 인사를 주고받는 것과 같은지 모른다. 겨울 풀밭에 은빛 서리가 내려 반짝인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흔적 없이 사라질 짧고도 찬란한 풍경들 앞에서 가슴이 저려온다. 오늘도 해는 전나무숲 사이에서 떠올라 긴 그림자를 그리다 반대편으로 질 것이다. 나는 언 손과 볼을 비비며 오래도록 전나무숲길을 걸었다. 아침 공기가 유난히 상큼하다.

2016-01-15

여수 향일암

겨울 안개가 자욱한 아침, 새해 첫 산사기행을 나선다. 남편의 차에는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바쁘다는 핑계로 남편의 음악적 취향이 바뀐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부재된 아내의 자리 앞에서 약간의 어색함과 미안함이 밀려든다. 다행히 좁은 차 안은 음악실이 되어 활기를 띤다. 그는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심포니 곡을 좋아하고 나는 고독과 애잔함이 느껴지는 독주곡이나 콘체르토를 좋아한다. 곡이 바뀔 때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짧은 지식을 곁들인다. 베토벤의 열정, 쇼팽과 연상의 여인 조르주 상드의 사랑, 슈베르트의 가난과 요절 따위를 이야기하며 남쪽으로 달린다. 평이하던 그가 연인처럼 새롭게 다가온다.안개 속으로 숨어든 겨울 풍경,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음악이 강물처럼 흐른다. 이순신 대교의 날렵하면서도 웅장한 자태, 그 너머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산업단지의 연기, 여수의 하늘은 봄날처럼 눈부시다. 먼나무가 빨간 열매로 치장을 하고 간간이 후박나무가 묵직한 눈빛으로 길을 밝힌다.여유로운 정취는 잠시 뿐, 향일암 길목은 차량과 인파로 북새통이다. 갓김치며 말린 해산물들이 즐비한 상점을 지나 291개의 계단을 밟으며 가파른 바위산을 오른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생각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사뿐히 오르고 싶은데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러다가 내가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향일암은 의자왕 4년(644년) 원효대사가 원통암이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가 고려 광종 9년 윤필대사가 섬의 형세를 보고 금오암이라 개명하였다. 그 뒤 조선 숙종 때 인묵대사가 관음전 아래 대웅전을 짓고 금불상을 조성, 봉안한 후 향일암으로 고쳐 불렀다. 낙산사의 홍련암과 남해 금산의 보리암, 강화도 보문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해수관음기도처 중 하나이다.집채만한 바위를 칼로 잘라놓은 듯 좁고 기다란 바위통로가 나타난다.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통과하지 못한다는 해탈문이다.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가는 돌문을 통과하자 연이어 두 번째 석문이 기다린다. 엄숙하고 경건하기보다 탐험을 하듯 재미있다. 어느 틈에 겨울나무 사이로 에머럴드 바닷빛이 펼쳐져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가파른 바위 절벽에 향일함이 있다. 원통보전 뒤로 책을 쌓아놓은 듯 높다란 바위도 이색적이다. 원효대사가 경전을 걸망에 다 담지 못해 허공에 던지자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떠오른다. 거북 등껍질처럼 육각모양이 새겨진 바위는 자연이 만든 기이한 예술품이다. 남해를 붉게 물들이며 솟아오를 태양과 온몸으로 해를 품을 향일암, 점점이 피어나는 붉은 동백꽃의 열정 앞에서 누군들 합장하지 않으랴. 게다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거북들이 난간마다 줄을 지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연화세계는 어디쯤 있을까?아무래도 날을 잘못 택한 것 같다. 인파 속에서 향일암의 기운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다. 체념하듯 마음을 비우고 가만히 바다를 바라본다. 깊고 아름다운 빛깔을 품으며 살고 싶다. 기도 대신 너른 바다를 내 안에 담는다. 관음전 가는 길에도 돌문이 두 개 있다. 자세를 낮추고 마주 오는 사람들을 배려해야 통과할 수 있다. 보다 높은 세계로 향할 때 우리는 이처럼 겸손해져야만 한다.원효대사가 수행하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유서 깊은 곳, 나는 해수관음상 앞에서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비좁은 법당에서 절을 하는 사람, 원효스님의 좌선대 위로 재미 삼아 동전을 던지는 사람, 무언가를 염원하는 마음은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관광지가 되어버린 향일암의 인기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살아가고 세계는 바쁘게 움직인다.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잡아끄는 것이 있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후박나무와 동백나무로 살아가는 사랑나무, 연리근이다. 아프고 힘든 날이 많아도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한 쌍의 나무, 각자의 정체성을 지켜가며 한 뿌리로 살아가는 부부 같은 나무다. 다른 둘이 만나 조화를 이루고 균형감각을 잃지 마라는 연리근의 속삭임이 들린다.▲ 조낭희 수필가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주는 남편이라는 존재와 그 자리의 중요성을 생각하니 가슴이 싸하다. 살며시 남편의 손을 잡자 가슴 속에 훈풍이 분다. 무거운 바위를 짊어지고 바다로 향하는 거북이 형상의 금오산이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뒷다리를 힘 있게 밀며 저 넓은 대해로 헤엄쳐 나갈 듯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바위 틈에서 촉수처럼 살아 움직이는 나무들의 침묵, 겨울에도 깨어서 꽃을 피우는 동백의 노고가 염불소리에 섞여 가슴을 적신다.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석문을 통과하여 향일암을 빠져 나왔다. 일곱 개의 돌문을 모두 통과해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산 위에 있는 석문 하나는 남겨 두기로 했다. 살다가 털썩 주저앉고 싶어지는 날이면 진지하게 나를 돌아보며 마지막 돌문을 통과해 보리라. 어둠을 뚫고 돌아오는 길, 여전히 차 안에는 음악이 흐르고 안온함으로 출렁인다.

2016-01-08

성주 선석사

삶은 맑은 날이 지속되는 걸 지켜봐 주지 않는다. 가끔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단내가 나도록 오열케 하고 반성할 기회를 안겨 주는 게 삶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맞은 아침, 또 비가 내린다. 참 구슬프게도 내린다. 하지만 어김없이 짐을 챙겨들고 우중의 산사기행을 나설 수밖에 없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준 친구와의 동행길에 겨울비는 추적추적 쉬지 않고 따라온다. 작은 연못이 있는 식당에서 수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숱하게 밀려오는 생각의 고리를 끊고 대화를 나눈다. 거침없이 수직으로 하강하는 빗줄기처럼 단순하게 살다갈 수는 없을까. 소소한 풍경들이 쉼표가 되어 마음을 달래 준다.선석사 가는 길은 한적하다. 겨울 안개가 들길을 헤맬 뿐, 거리도 마을도 유령의 도시처럼 적막하다. 몇 번이나 네비게이션을 확인하는 동안 한기를 느낀다. 들길이 끝나고 비탈길을 오르자, 텅 빈 주차장 너머로 수령이 오래된 겨울나목이 처연하게 산사를 지킨다. 잎을 떨구고도 의연한 기상으로 품격을 밝히는 고목 몇 그루가 있어 겨울 산사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선석사(禪石寺)는 신라 효소왕 1년(692년)에 의상대사가 화엄십찰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神光寺)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10년에 나옹대사가 원래 서쪽에 있던 절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당시 새 절터를 닦는데 큰 바위가 나왔다고 하여 닦을 선(禪) 자를 넣어 선석사라 하였는데 지금도 대웅전 앞뜰에 바위의 머리 부분이 보인다.선석사는 세종의 왕자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은 이색적인 사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왕자 태실은 남아 있지만 어필각은 화재로 소실되고 영조 어필의 병풍만 정법료에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법당문은 한파를 이기기 위해 비닐 방한복을 입고 월동 준비를 끝냈는데 절간은 썰렁하다.규모가 큰 태실법당의 문을 열자, 아기를 안고 가슴을 드러낸 자모관세음보살상을 중심으로 작은 놋 항아리들이 빼곡히 정렬되어 있다. 태를 봉안하고 기도하는 태장전이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을 보는 것 같다. 숯과 고추, 생솔가지 등으로 만든 금줄로 탄생의 기쁨을 신성하게 여기던 옛 풍습이 떠오른다. 동네에 금줄이 쳐지면 어머니는 무슨 큰일이나 날듯 함부로 들어가지 말기를 누누이 당부하셨다. 그래서인지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금줄은 내게 환희와 축복보다는 신령스러운 두려움으로 먼저 다가왔다.혼돈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신비로운 터널, 모체로부터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 주고 완벽한 생명체를 만들기까지 긴 침묵의 시간을 떠올리며 삼배를 올린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를 향한 기도이기도 하다. 나는 생명의 존귀함만큼 삶을 진실하고 겸허하게 살아 왔는지 반문해 본다. 한 차례 가슴에 통증이 지나간다. 대웅전은 단청이 벗겨지고 퇴색되어도 고색창연한 기품을 유지하고, 태실법당 앞의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도 말이 없다. 뿌연 안개가 절을 에워싸고 적당히 시야가 흐린 날, 선석사의 모든 것은 생명을 위해 기도 중이다.생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명이 잉태되고 신성한 의식이 깃드는 일은 참으로 경이로운데 죽음을 생각하면 여전히 허무하다. 인도의 젖줄이자 성지인 갠지즈 강가에서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던 삶과 죽음의 광경이 떠오른다. 남루하게 펼쳐졌던 삶과 바라나시의 화장터에서 시체를 태우던 역겨운 냄새들, 삶의 허무함 앞에서 온 종일 속이 매스껍고 두통이 심해 나는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하지만 에너지가 모이는 신체의 중심점 차크라를 인도 여행에서 접하게 된 후 나는 삶과 죽음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생명과 인간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명상을 통해 욕망과 에고의 근원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들끓는 감정과 욕망들이 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선석사 경내를 돌며 여전히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는 내면을 들여다본다.가슴이 답답하다. 그런 날은 꿈을 꾸고 싶지도 않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모처럼 성가를 듣는다. 명상법보다는 훨씬 쉽고 간편한 치유책이다. 가슴으로 사랑과 자비를 호흡한다. 서서히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조낭희 수필가“내게 주어진 하루를 감사합니다. 내게 또 하루를 허락하심을. 이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며 살기 원합니다. 이런 은총 받을 만한 자격 없지만 주의 인자하심 힘 입음으로 이 하루도 내게 주어졌음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이 하루도 정직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친절하게 하소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이 하루도 온유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겸손하게 하소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이들에게 용서를 베풀게 하소서. 행복을 빌게 하소서. 축복을 베풀게 하소서.”(다윗과 요나단 `오늘 이 하루도`)

2015-12-18

팔공산 묘향사

고급 전원주택단지를 지나 작은 솔밭을 넘으면 곧바로 묘향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빼어난 산세나 절경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는 길이라 부담이 없다. 기온이 뚝 떨어져 제법 날씨가 찬데 상큼한 상춧잎이 반들거리며 겨울정원을 밝힌다. 절은 솔숲에 숨어서 낯선 객을 기웃거리는 바람을 무심히 쳐다볼 뿐 고요하다.계단을 오르자 울릉도 굴피집 같은 작은 지붕을 인 하얀 콘크리트 건물이 우리를 반긴다. 예술미 듬뿍 안은 갤러리나 카페, 세련된 전원주택을 연상시키는 대웅전이다. 소박한 법당에는 높은 법상도 없고 단정한 나무문살과 창호지 사이로 배어든 햇살만 뒹굴고 있다. 모든 게 생경하고 이색적이다.짧은 기도를 끝내고 법당을 둘러본다.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다양한 종류의 연등도 아름답지만 부처님 뒤의 후불탱화는 여느 사찰과는 다른 현대예술의 새로운 장르를 연 듯 흥미롭다.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문봉선 교수가 2년에 걸쳐 만든 작품들이다. 가로 36cm, 세로 30cm 크기의 수묵담채 165장에는 다양한 모습의 신세대 부처님이 그려져 있다. 한지에 옷칠을 해 넣고, 먹으로 그림을 그린 뒤 색깔을 입힌, 21세기에 맞는 기발하고 참신한 발상이 마음을 사로잡는다.두 손을 모으고 상큼 발랄한 부처님들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눈인사를 나누자, 편안한 기도 속으로 지인들의 얼굴이 하나씩 클로즈업 되며 전신이 따뜻해져 온다. `화엄경` 경전에 나오는 진리의 구도자 선재동자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은 참으로 삼빡하다. 어쩌면 느린 소 대신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가면 선지식을 좀 더 빨리 만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청진기를 들거나 골프를 치는 부처님도 있지만 화투나 술병을 든 부처님도 있다. 모두 존귀하고 존중받아야 할 부처들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에 휘청거리는 사람들, 그들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까? 마음이 싸해지며 토닥토닥 안아주고 싶어지는 부처들은 전혀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친근한 사람들이다. 마더 테레사 수녀도 종교를 뛰어넘어 이곳에 살아 계신다. 나이나 신분, 국적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반겨주는데 안타깝게도 법당은 썰렁하다.점심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가 뎅뎅 울리는가 싶더니 곧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경내를 적신다. 법구경이 아닌 클래식 음악이라니, 나는 귀를 의심했다. 온갖 파격의 집합체와 그 조율이 주는 신선함은 연이어 충격을 몰고 온다. 고시공부를 하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공양간에서 식사를 하고 친구와 나는 법당에서 대화를 나눈다. 바깥 잔디밭에는 햇살 업은 바람이 춤을 출지도 모른다. 조용하던 절간에 생기가 넘친다.스님과 공양주보살이 직접 기른 채소들로 차려진 점심공양은 참으로 맛깔스럽다. 천장 낮은 공양주 보살 방에서 스님과 우리는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어릴 적 추억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온기 가득한 방에서 스님은 경건하고 엄숙한 법문 대신 문화로만 머물고 있는 한국불교의 한계를 안타까워하신다. 불교는 철학이며 과학이며 삶임을 알기에 나 역시 불교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그리스 문학의 거장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불교, 자아와 무아를 위해 프로이드와 융도 잠시 다녀가고, 우리는 시대를 뛰어넘고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사이 더욱 진지해진다. 절간에서 듣는 이야기치고는 참으로 진취적이며 현대적이다. 언제나 난해한 선문답 같은 스님의 말씀 앞에서 쩔쩔 매며 주눅 들던 나였다. 모처럼 신바람이 난다. 문학과 철학을 통해 나와 사회, 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고민할 수 있는 시간, 거시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읽고 내다보며 시대를 앞서가는 혜민 스님, 부지런하고 싹싹한 공양주 보살, 이 모든 것이 묘향사가 가진 매력이다.절의 특이한 외관을 보고 어떤 이들은 이단 종교쯤으로 의심하기도 하지만 어엿한 조계종 사찰이며, 부산 범어사로 출가하신 혜민 스님은 지금도 조계종 종무원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계신다. 권위적이고 기복적인 불교가 아니라 명상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좀 더 긍정적인 사고로 행복해지는 길을 찾을 수 있는, 좀 더 책임감 있는 승려가 되고 싶어 하신다.▲ 조낭희 수필가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거나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는, 우리 사회의 의식수준이 안타까울 때가 더러 있다. 전통을 유지하되 시대에 맞는 불교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스님의 외로운 노력과 각오가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늘 안일한 자세로 그 자리에 머물기를 고집해 온 나도 멀고 거창한 수행보다 일상 속에 작은 명상부터 들여놓고 싶다. 그러면 연꽃이 피듯 삶은 좀 더 맑고 향기로워지리라.해거름 무렵 사찰을 빠져나오는데 공양주 보살이 따라 나오며 인사한다.“동짓날에는 꼭 팥죽 드시러 오세요.”살가운 인사가 산을 빠져나올 때까지 웅웅거리며 우리를 배웅한다.

2015-12-11

포항 오어사

▲ 조낭희 수필가또 비가 온다. 올 가을은 유난히 길었고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다. 단풍이 고운 오어사(吾魚寺)를 뒤늦게 떠올리며 안타까워했지만 철 지난 우중의 사찰 기행을 놓칠 수가 없다. 적당히 사색할 수 있는 한적한 고속도로와 비 내리는 호수의 풍광, 게다가 절은 고독할 만큼 조용할 게 분명하다. 비가 오는 날은 무작정 마음이 먼저 집을 나선다.드문드문 남아 있던 단풍이 운제산을 밝히는데, 오어지(吾魚池)는 수면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만 그려낼 뿐 반영이 없다. 물가에 피어 있는 단풍이나 먼 하늘, 새로 놓인 출렁다리조차 밀어내고 묵묵히 비를 맞는다. 산은 산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각각 그렇게 생각에 잠겨 묵언 중이다.오어사는 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하여 항사사(恒沙寺)라 하였다. 신라 고승 원효(元曉)와 혜공(惠空)이 먹은 물고기를 살리는 법력을 겨루는데, 한 마리는 살지 못하고 한 마리가 힘차게 헤엄치자 이것을 두고 서로 자기 물고기라 하여 오어사라 명명하였다. 원효, 자장, 혜공, 의상 등 당대의 고승들이 수도했던 신라 천년고찰이다.절은 월동 준비를 서두르다 갑자기 내린 비로 어수선하다. 대웅전 뒷마당은 머리 푼 광녀처럼 을씨년스럽고 산만한데, 공사 중이던 포크레인은 시치미를 떼고 느긋하다. 대웅전에서 절을 하는데 발이 시려온다. 준비도 없이 나는 덜컥 겨울 품속에 서 있다. 한해를 장식하는 마지막과 맞물려 저절로 기도는 진지해진다. 조용히 법당을 비질하는 불자의 모습이 기도만큼 경건해 보인다.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만큼 큰 기도가 있을까?오랜 세월 땅 속에서 잠을 자던 동종의 긴 기다림이나 낡고 낡은 원효대사의 삿갓을 바라보며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이 추구해온 세계관이 있었던가? 그저 그렇게 발버둥치며 세월에 떠밀려 살아온 것만 같다. 올 한 해도 예술과 여행,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있어 그나마 지루하지 않게 보낸 것 같다.오어사 담벽을 끼고 돌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옷을 벗지 못하고 가을을 부여잡고 있다. 이미 계절은 떠나고 없는데 그 뒤안길의 처연한 몸부림이 애처롭다. 가야 할 때를 알고 돌아서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답듯이 살아가는 데에는 반드시 시의적절한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잎 큰 오동나무나 후박나무처럼 후두둑 미련없이 지는 나무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다리를 건너고 비탈진 산길을 도는데 때 아닌 진달래가 피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한 녀석을 따라 여러 송이가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피었으리. 눈을 뜨고 나서야 결코 평탄치 못할 삶의 비극을 예감한 진달래, 오어지를 사이에 두고 은행나무와 둘 사이에는 아련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들의 눈빛은 초조하고 불안한데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봄, 가을, 겨울이 혼재하는 운제산을 바라보며 오어사도 나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낙엽 쌓인 산길을 천천히 사색하며 오른다. 빗소리에 묻혀서도 돌돌돌 존재감을 드러내며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 제 몸의 물을 짜내듯 발밑에서 미끌거리는 촉감도 비오는 날만 느낄 수 있다. 한 때는 요새처럼 숲을 지키던 나무들이 제 몸 하나도 가리지 못하고 하늘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숭숭 뚫린 겨울 숲에 하늘이 키를 낮추고 앉아 있다. 가끔은 바람이, 또 더러는 햇살이 숲을 지키며 키워 줄 것이다. 비가 와서 숲은 더 적막하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인적도 없다. 젖은 숲길을 걷다보니 손이 싸늘해져 오지만 800m의 산길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그저 고마운 일이다. 따끈한 보리빵과 커피 한 잔의 온기가 그리울 무렵, 붉은 감을 주렁주렁 단 감나무들이 원효암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형체를 잃고 피범벅이 된, 결코 아름답지 않은 홍시의 주검 위로도 빗줄기는 어김없이 떨어진다. `때`를 잊은 존재들의 몸부림은 왠지 왜소하고 서글퍼 보인다. 수확의 기쁨에서 제외된 감이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관상수가 아니라는 선입견 때문이리라. 어린 시절 고향의 감나무는 앙상한 가지 끝에 까치밥 서너 개만 달고 겨울을 맞곤 했다. 소박한 풍요와 미덕, 평화가 담긴 풍경이었다.우산을 쓰고 배추밭을 둘러보시던 노스님이 아이처럼 해맑게 반겨 주신다. 원효암이 환하다. “비 오는데 혼자 어떻게 왔어?” 낯선 이에게 보내는 첫인사치곤 유난히 살갑다. 귀가 어두우신 고령의 스님, 천진한 표정 앞에서 나는 덥석 손을 잡을 뻔했다. 스님은 요사채 뜰 위에서 잰걸음으로 운동을 하시고 나는 관음전 댓돌 위에 앉아 비 내리는 숲을 감상한다. 싸락싸락 비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스님의 신발 끄는 소리만 크게 들린다.쓸모없이 존재하다 사라지는 것이 어디 있으랴. 시의적절한 때라는 것도 편협한 사고의 관점일 뿐이다. 고령의 육신에도 화사하게 피어나는 노스님의 미소 한 줌, 초겨울의 쓸쓸함을 밝히는 붉은 감들이 심금을 울린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란 없다. 보면 볼수록 새로워지고 알면 알수록 사랑하고 싶어지는 사람,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런 자세로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2015-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