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처럼 기운차고 향기롭게
뜬 눈으로 겨울밤을 새운 내소사 달빛은 참으로 교교하다. 인시를 넘기자 도량석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정적에 싸인 사찰과 능가산을 깨운다. 시린 달빛을 밟으며 대웅전으로 향한다. 새벽 공기가 제법 차다. 선잠을 깨고 나서는 길이지만 마음은 맑고 명징하다.
대웅전 법당에는 두 개의 대형 히터가 돌아가지만 냉기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법당을 지키는 부처님보다 예를 갖추고 새벽 예불을 준비하는 스님에게서 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좌복 위에 다소곳이 앉아 마음을 가다듬는데 히터 돌아가는 소리와 벽쪽을 흐르는 찬 공기가 보채듯 신경을 자극한다. 스님 몇 분이 올리는 단출한 새벽 예불에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인원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두타라는 비구니 스님이 창건했다. 원래 두 개의 절을 창건하여 큰 절은 대소래사, 작은 절은 소소래사라고 하였다.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아 내소사가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인조 11년에 청민 선사가 중건했다. 지나치게 웅장해서 위압적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산만하거나 조야하지도 않다. 중용의 도를 알고 살아가는 선비처럼 깊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사찰이다.
꽃창살이 화사한 대웅보전은 보물 291호로 못하나 쓰지 않고 지었다. 공포 하나가 없지만 날렵한 조각은 화려하면서도 품격이 넘친다. 3년 동안 목침만 깎는 목수를 놀려 주려고 사미승 선우가 목침 하나를 숨겼다 뒤늦게 내어 놓아 공포 하나 없이 지었다는 전설은 꽤나 유명하다. 무릎을 꿇고 공손히 합장을 해보지만 마음은 자꾸만 법당을 헤맨다.
단청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절대 안을 들여다보지 마라는 화공의 당부를 무시한 호기심 많은 스님처럼 나는 법당을 두리번거리며 미완으로 남아 있는 단청을 찾는다.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는 오색영롱한 관음조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나타날 것만 같다. 높은 천장의 보머리에 생동감 넘치는 용 두 마리가 물고기를 문 채 눈을 부라릴 뿐 법당은 엄숙하기만 하다.
깊고 그윽한 새벽 종성이 울려 퍼진다. 길고 긴 역사를 품고 우주를 가르며 달려왔을 것만 같은 떨림, 온몸이 얼어붙듯 경건해진다. 장중한 소리는 만물을 흔들어 깨운 후 맥박이 되어 고동치다 어느 순간 은은한 속삭임이 되어 내 안에서 스러진다. 하늘의 별들과 달, 바람과 어둠까지 모두 내소사 새벽예불에 동참하는 순간이다.
경전을 따라 읽을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몰려나왔다 허공으로 흩어진다. 나는 무엇을 찾고자 이 새벽 냉기 가득한 법당에 꿇어 앉아 있는가. 지금까지 어떤 것도 구하지 못했으며 끝끝내 아무 것도 찾지 못할지 모른다. 역사의 숨결이 묻어나는 높은 천장과 알 듯 말 듯한 부처님의 표정, 엄숙하게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들 속에 끼어 깨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 벅차다. 순간순간의 몰입과 기쁨으로 점철되는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
일행이 빠져나간 법당에 남아 스님의 독경소리에 맞추어 기도를 한다. 낯선 처사님 한 분이 문 쪽에 서 있는 나에게 선뜻 자리를 양보한다. 누군가를 위한 배려와 사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불심이다. 한 배 한 배 이마를 바닥에 대고 백팔 배를 한다. 오체투지, 그것은 생명과 인간에 대한 공경과 겸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일 년 전 처음 산사를 찾던 그 긴장된 마음으로 돌아가 절을 한다.
조국의 템플스테이가 그리워 찾아왔다는 프랑스의 교포 여성,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남은 게 무언지 공허하다는 대기업 임원, 대안 학교를 졸업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아픈 청춘, 차 한 잔을 나눈 인연들을 떠올린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물러나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은 머지않아 평화로운 일상에 젖어들며 성장의 기회를 찾을 것이다.
겨울 내소사에는 시간의 톱니바퀴가 비켜가는 것만 같다. 짐을 풀기가 바쁘게 눈발이 날렸고 나는 아이처럼 흥분했다. 그러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어둠 속에서 탑돌이를 할 때는 누구보다 성숙한 자세로 돌아왔다. 천 년을 살아온 할머니 당산나무의 침묵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와의 조우, 나는 때때로 오만하거나 좌절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웅혼한 기운이 빚어내는 적막 속에 갇혀 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러나 내소사는 푸른 새벽이 올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긴 밤을 침묵했다.
이른 새벽, 혼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을 걷는다. 쭉쭉 뻗은 전나무들은 냉정할 만큼 기운차고 향기는 짙어서 고독감이 느껴질 정도다. 뒤늦게 산책을 나온 한 분이 인사를 건넨다. 몇 마디의 대화로 홀로 걷던 길이 편안하다. 어쩌면 인생이란 낯모르는 이와 잠시 인사를 주고받는 것과 같은지 모른다.
겨울 풀밭에 은빛 서리가 내려 반짝인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흔적 없이 사라질 짧고도 찬란한 풍경들 앞에서 가슴이 저려온다. 오늘도 해는 전나무숲 사이에서 떠올라 긴 그림자를 그리다 반대편으로 질 것이다. 나는 언 손과 볼을 비비며 오래도록 전나무숲길을 걸었다. 아침 공기가 유난히 상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