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산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평범한 마을을 지나 산세조차 평범한 낮은 골짜기 얼마쯤을 가다보면 자태와 눈빛이 다른 나무들이 절이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좌측 모퉁이를 돌아 오르자 주차장 너머 절의 풍경이 들어온다.
학의 부리에 해당한다는 명당터, 신라 태종 무열왕 6년(659년) 혜공이 창건한 경흥사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머물렀으며 승병들이 이곳에서 처음 훈련을 해 전장에 나가 싸운,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사찰이다. 사찰의 규모 역시 대단했음을 고승의 부도들과 동학산 곳곳에서 발견되는 초석과 석축들이 반증하고 있다.
상서로운 기운을 막아주는 병풍산이 건너편을 막고 있어 세월의 풍파조차 비켜갔을 법한 절이지만 승병을 훈련시켰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 때 탄압을 받았으며, 6·25 전쟁 전후 극심한 도굴로 사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절은 차안의 세계를 돌아앉아 아늑한 길 하나 내며 상흔을 잠재우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절 풍경에 낮은 감탄사로 첫인사를 건넨다. 여느 절과는 다른 전각의 배치들,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고 모여 앉아 가족적인 다정함이 느껴진다. 집의 가장 격인 대웅전은 한 단 높은 뒤쪽으로 물러앉아 위엄을 더하면서도 앞의 전각들을 품에 안은 듯 온화함을 배가시킨다. 가장 오래 되었다는 지장전은 경흥사의 품격을 더해주는 안주인 같았으며, 좀 더 높은 곳에 아담한 산령각이 조부모처럼 한발 물러나 인자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은행나무 한 그루 나를 호명하듯 시선 속으로 들어온다. 세상을 관조하는 고령의 은행나무와는 달리 젊은 나무에게서 중심을 벗어나지 않은 정직함이 보인다. 분분히 떨어지는 스산한 슬픔이나 사색을 즐기는 길손의 모습이 환상처럼 잡히고, 나무 아래 벤치에는 그의 나이보다 더 깊고 오랜 침묵이 앉아 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단정한 겨울 풍경 속으로 카이로스의 압축된 시간이 흐를 것만 같다.
빈 벤치의 정갈한 기도를 뒤로 하고 대웅전 법당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좌복을 깔고 앉는다. 보물 제 1750 호의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보다 수미단 좌측 편에 모셔진 낯선 영가 두 분의 위패 앞에서 낮과 밤의 저린 기억들이 모여든다. 마음이 시리다.
생과의 단절이 아닌, 사후의 세계와 접속하는 매개점인 죽음 앞에서 무엇을 떠올렸을까? 행여 무성한 풀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새들조차 지저귀지 않는 폐허의 처마 같은 곳이 떠올라 두렵지는 않았을까? 대웅전을 나서는 발걸음이 지극히 낮아진다.
나무의 시선은 해의 각도와 관계없이 가는 곳마다 따라온다. 아름다운 노을이 되어 내 안에 걸려 있다 내 안에서 질 것 같다. 절은 비어 있지만 결코 빈 절이 아니다. 한눈을 팔지 않는 은행나무 눈길이 길손의 젖은 발걸음을 기도로 이어지게 만들고 감로수 물줄기도 홀로 청정하다. 싸늘하던 법당에도 머지않아 저녁 예불 소리로 밝아 오리라.
어마어마한 폭설이 내려 산의 허리가 잠기고 법당의 부처님이 눈에 갇혀 숲의 나무들이 죄다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되어도 젊은 은행나무는 과거와 미래를 홀연히 드나들 것만 같다. 중심에 선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뜻하며 고요함을 말한다. 염불 소리 듣고 자란 은행나무의 평온한 숨결, 나는 법당이 아닌 나무 아래 서서 나를 점검한다.
중심으로 향해야 할 눈길이 자꾸만 가장자리로 향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바깥으로 무게 중심이 쏠릴 때마다 스스로를 휴머니스트로 만들거라 착각하지만 결국 나를 놓치고 내가 가야할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날들만 남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의 중심에 서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내 안에 있는 티끌을 부지런히 털고 닦아내기에도 주어진 시간은 부족하다. 신은 나에게 은행나무처럼 수백 년의 시간을 허락해주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만 내생의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게 참으로 부담스럽다. 젊은 은행나무 한 그루 곧게 귀를 세우고 손을 내민다. 도반처럼 든든하다.
중심에 서면 고요하다.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입구도 출구도 없이 오로지 빛과 같은 길이 있을 뿐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설이 내려도 마을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피안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안다. 게으름과 헛된 관계들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 결코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오늘은 모처럼 저녁 송년 모임이 있다. 무엇을 입고 갈지의 고민 따위는 사라졌다. 약간의 설렘과 분위기에 들떠 술에 취하듯 구업(口業)이나 쌓지 않을까 걱정이다. 캐롤송 울려 퍼지는 번화가에서도 중심을 향해 뿌리 내리는 숭고한 나무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뿌리 없이 연말만 밝히는 트리가 아닌.
어느 어두운 밤/ 사랑의 강렬한 갈망으로 불붙은 채/ 나는 보이지 않게 집에서 빠져 나왔다/ 내 집은 아직도 그저 고요할 뿐.
- 성 요한 ‘카르멜의 산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