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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상희구 시인의 ‘수선화 편지’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대구경북 방언으로 연작 시집을 완간했던 상희구 시인이 목소리를 상당히 죽여 침묵에 가깝게 속삭이는 새 시집 ‘수선화 편지’(오성문화, 2024)를 펴냈다. 상희구 시인의 방언 시집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시 해설을 겸한 시평도 쓴 적이 있다. 오늘은 좀 조심스럽게 시의 본질적인 문제를 언급할까 한다. 시가 강력한 목적성을 갖게 되면 메시지 전달에 힘을 주기 때문에 문학적 순결성을 상실하게 된다. 진보적인 목적시와 마찬가지로 방언의 자료를 가능한 작품에 많이 담겠다는 작가의 의도는 자칫 시의 전범을 훼손시킬 위험성을 안게 된다. 너무 많은 방언이 시 작품 속에서 누더기처럼 불어나면 조야해진다. 자칫 시의 품격을 떨어뜨리거나 천박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시 창작을 통해 방언 자료를 끌어 모으겠다는 의도가 오히려 시의 자리를 협소하게 만들 위험성을 보여줄 수도 있다. 최근 AI기술의 발전으로 거대한 음성자료 클라우드가 구축되고 거의 천문학적인 수량의 방언 자료가 이미 수집되어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많은 방언 자료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목적성 뒤에는 시문학 본질의 문제가 훼손돼 있다는 점을 결코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번의 ‘수선화 편지’에서는 시인 스스로 그러한 위험성을 감지했는지 기존의 시와 다른 상당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기는 하다.‘경상도 사투리 호시뺑빼이란 말의 어원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단 시 ‘수선화 편지 24’를 살펴보자. 과연 시인이 방언 어원을 시작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눈여겨본다. “대개의 경우, 각 지역의 사투리는 표준말에 비하여/어투가 아주 거칠고 투박합니다. 그 이유는 어느 지역/사투리든, 의태나 의성의 의미가 도드라지기 때문입니다./”(상희구 ‘수선화 편지 24’ )은 방언학개론서의 설명도 아니다. 오히려 운문성을 일탈한 서술은 시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 표현일 뿐이다.문학 작품 속의 방언은 단순히 문화적 원자재다. 방언시는 부정적 차원에서의 변용을 위한 시가 아니다. 표준어로만 영위되던 문학의 외연을 시간적, 지리적으로 넓혀 정체성을 확대시켜 주고, 인종적 소수자나 이민자나 젠더와 같은 계급적 외곽 집단의 목소리를 유입해 역사적 진폭이나 문학 유산을 더 폭넓게 확장할 수 있음에 의미가 크다. 아마도 상희구 시인은 이러한 목적성 때문에 방언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을 가진 것은 아닐까?“…. 얘들아, 그 작은집에 김 서방, 사업이 망해가아, 멀찌감치 야반도주했다 카디이 요새는 우째 사능공?//아이고 백모님, 그런 말씀 마이소, 김 서방이 사업 망한 그 질로 서울로 가가주고, 서울서 집장사로 해가주고, 돈을 엄청 벌어가아, 요새는 호시뺑빼이로 산답니더.”에서는 시와 산문의 경계도 없어 시적 긴장감마저도 없다.이러한 방언으로 쓴 시의 문학적 한계를 아마도 시인도 의식한 듯하다. 이 시집의 2부에서 보여주는 단행 시편들은 앞서와 달리 서정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최근 1행시, 3행시, 4행시와 같은 일본 하이쿠를 연상시키는 단행 시들이 유행하고 있다. 단행 시의 전통은 우리의 고전, 전통 시조를 이은 현대시조 장르에서와 같이 고도로 압축된 문학 양식이다.그동안 상희구 시인의 방언으로 쓴 시작의 성과들은 문학 해석학의 범위를 확대되는데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방언시들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번역이라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가 있다. 영어권의 소설인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에 등장하는 흑인들의 방언, 계급어를 국내 번역 작품에서 녹여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실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들 언어가 함유하고 있는 계급적 문제까지 함유하고 있으니 표준어로만 번역한다면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역으로 한국 방언이 섞여 있는 문학작품의 외국어 번역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상희구 시인의 거작 대구방언시편을 외국어로 번역할 수나 있을까? 언어학적, 문화적, 지리적 차이와 사회 계급적 방언차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해외에도 알려낼 수 있을까? 문화적 실천으로 연구되고 문학작품이 대답할 수 있는 범주가 넓어졌지만 시대의 이념에 어떻게 조응하고 저항할 것인지 모색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2024-07-29

김성춘의 시론, ‘현곡(玄谷)에서’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요사이처럼 시시(屎屎)한 시가 난무하는 때가 있을까? 인구 비율에 따른 시인들의 숫자가 세계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기이한 시가 천국인 나라가 한국이다. 심지어 시인들을 배출하는 시인학교가 곳곳에서 난립하고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는 가난뱅이 시인이 넘쳐난다.그런데 한 번 시인이 되면 마치 큰 벼슬이나 한 듯, 세상살이를 제 혼자 다 알고 있는 현자인 듯, 정치 패거리에 앞장서고 이념의 프로파간다로 자진 나서서 세파의 정치 물결을 타는 진짜 시시한 시인(屎人)들이 넘쳐난다.경주에 사는 원로 김성춘 시인은 그 어느 시인보다 시가 어떠해야 하며, 또 시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사려 깊은 생각을 하는 몇 안 되는 시인 가운데 한 분이다. 특히 엄청나게 늘어난 시인들, 그리고 품새가 떨어지는 시를 쓰면서 스스로 자신의 문학적 지위를 가늠하지 못하는 시인들의 현 세태를 누구보다 안타까워한다. “친구야 앙 그렇나? 시에 명답이야 많지마는 정답은 딱히 없는 기라/우리 삶이나 시나 생각하모 엇비슷 항기라 그래 어떤 시인은 말했잖/나 시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시에 무슨 근사한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사람들은 낡은 사람이라고 요새 시가 당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말을 너무 비틀어서 난감할 때가 참 만타카이 그거 다/‘낯설게 하긴’가 뭔가 그거 때문에 그렁 거 아이가 낯설게 하기 그거 다 씰 데 없는 소리 아이가/아 하늘 아래 새로운 기 어딨노 생각해 바라 마카 다 거기서 거기 아이가 사는 거나 시나 마카 다 그런 거지 요는/사물의 본질 그 내면을 잘 봐야 하는 거 아잉가베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을 보면 되것나 앙 그렇나? 그러니 시란 자기가 찾/아서 자기가 깨닫는 묘한 거 아이가// 그런데…. 뭐라꼬? 낯설고 새로운 시가 아름답다꼬? 쉬운 서정시는 진부/해서 독자들이 식상해 한다꼬? 그건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한 말이재,/산다는 거 잠시 꿈꾸다 아지랑이처럼 가는 거 아이가, 지금 당신 곁에 시/가 있는지 몰따 우짜든지 단디 해라이!” 김성춘의 ‘현곡(玄谷)에서’김성춘 시인은 찐한 경상도 사투리로 자신의 곡진한 목소리를 그대로 호소하고 전달하고 있는데, 시인에 대한 한탄과 아쉬움이 가득 담겨져 있다. 거창하고 무거운 시론이 무슨 필요가 있나 싶게 솔직한 말이 가슴을 후빈다. 너무나 진솔해서 옳다구나 맞장구를 치고 싶은 시다. “우짜든동 단디 해라”고 경상도 말로 당부하는 원로 서정 시인의 호소가 묘하고도 실감난다.문학이 절망의 늪으로 빠져드는 게 단순한 물질문화와 문명 변화의 요인도 있겠지만 김 시인은 그 결정적인 이유를 세계관이나 인생관이 덜 다듬어진 시인들이 너무 많으며 시 같지 않는 시를 발표하는 잡지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예술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에 시든 신음의 비명을 내어지르는 시인(屎人)이 너무나 많은 현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언어는 무수한 대화가 만들어낸 브리콜라주다. 지역어를 소멸시키지 않아야 할 이유 중 하나다. 김성춘 시인은 시인의 역할을 암시해 주고 있다. 바로 자신의 생생한 목소리인 살아 있는 방언으로 이 시대의 시론을 요약해 주고 있다.참 시인이 할 일은 언어 속에 압축된 여러 갈래의 오랜 대화를 풀어내는 고난한 작업이며, 그러한 작업 과정에서 조그만 별꽃의 몫을 해내는 일이 시인이 해야 할 숙명적인 몫이다. 재미없는 시는 독자들이 외면하고, 엄숙한 교훈시는 재미없다.독자들은 말도 안 되는 기상천외의 언어 표현 때문에 그 시를 재밌게 느낀다. 21세기는 참으로 난해한 시대이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 이후 인간중심의 문명론 시대가 열리는 듯 했으나 이 또한 크리스퍼 N. 캠블이나 토머스 네일과 같은 과학철학 쪽의 반격을 받아 자연 전체 존재가 영원히 유동 상태라는 블랙홀 유물론이 등장하였다.이러한 시대에 앎의 방식이나 존재 방식도 부정형 쪽으로 기울고, 왜소해진 문학인의 나갈 길은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김성춘 시인의 자전적 시론 “시 비슷한 시들이, 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난해한 시들이, 진짜 시 인양 시의 탈을 쓰고 착각하는 시들이 넘쳐난다. 너무나 무거운 시들, 별것 아닌 내용을 심각하게 쓰고 있는 시들도 문제다”라는 말에 귀 기울인다.

2024-07-22

민경탁 시인의 “다음 김천 장날 또 바여”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경상북도 지역 방언은 의문형어미를 중심으로 3개 권역으로 나누어진다.옛날 교통이 덜 발달되었을 때 낙동강을 중심으로 강 우측과 강 좌측으로 나누고, 또 태백산맥 끝자락이 경남으로 휘어지는 큰 산자락이 나뉘듯 3개 방언권이 나누어진다.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북부권은 ‘-니껴’권이고 대구경주권은 ‘-능교’(-능게)권이다. 낙동강 우측 선산에서 김천, 의성 일부지역은 ‘-여’권으로 나누어진다. 경북은 경주와 상주가 경상좌우도로 나눠지기 이전 고대 신라의 웅혼한 고토여서 오늘날 한국어의 기반이자 뿌리를 이룬 지역이다.경북방언은 악센트가 높고, 낮고 또 소리의 길이와 짧음이 아주 또렷하고 말씨는 왁자지껄한 느낌을 주어 투박하지만 그 자체에 리듬을 가지고 있다. 소리문법을 알아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지역보다 모음이 아주 단촐하다. 단모음 10개가 아닌 6개로 족하다. 모음이 적어도 악센트와 음장이 단어의 변별력을 높여주기에 의사소통에 전혀 불편하지 않다. “가가 가가가”, “운제요 나아 몬가니더”라는 말을 서울 사람들은 절대로 흉내 내지 못하며 그 의미도 읽을 수 없다. 경상도 깊은 산중의 오묘하고 심오한 말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오랜 전통과 역사가 악센트에 실려 있다. 또 말 수가 적은 경상도 사람들의 심성이 담겨 있다.김천 출신 민경탁 시인이 사통팔달 경북 김천 시골 장터의 인심과 인정을 소복하게 시집에 담았다. “닷새마다 지례 5개 면에서/푸성귀, 과일, 알곡이 모여 듭니다/증산의 송이버섯, 대덕의 잡곡들/구성 양파 조마 감자 지례 마늘들/구름 타고 담쑥담쑥 모여 듭니다/장바닥에 엉기정기 들면/고등어 갈치는 부산에서/갈치젓은 제주, 목포에서/생굴은 통영에서, 멸치는 삼천포에서/새우젓은 추자도, 강화도에서/벌써 들어와 있습니다/“머라 캐여” “안 비싸여” “고마바여”/호박 같은 인심과 산꿀 같은 인정 버무려/지폐와 맞바꾸다 보면 해거름이 오죠/“또 다음 장날 바여”/파장하고 탁배기 한잔하면, 노을이 찾아옵니다/이때 우린 생선 사고 약 사 가지고/버스 타고 들어갑니다/“다음 장날 또 봐여(바여)”-‘달의 아버지’(‘황금알’, 2024)교통이 발전되기 이전 태백준령의 산맥에 가로막힌 김천은 매우 깊은 산골이었다. 경부철도가 놓이고 경부고속도로가 터지면서 길을 가로막았던 높은 추풍령이 구름도 자고 가는 추풍령 휴게소가 되었고, 경남, 충청도, 전라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소설가 김주영과 송기원을 키운 것은 장터였다. 경북에 있는 객주는 김주영을, 전남 보성의 장터에서는 송기원을 낳고 키웠다. 이효석의‘메밀꽃 필 무렵’ 역시 장터가 배경이다. 사람들이 모였다 헤어지고 사람들 살아가는 삶의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모일 때는 기쁘고 헤어질 때는 안타깝고 그립다. 장터란 바로 집산(集散)의 공간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그리움과 기다림의 미학의 장소이기도 하여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가 된다.민경탁 시인은 ‘달의 아버지’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그렸다. 저녁노을 잔잔하게 퍼지는 서쪽하늘에 하얀 얼굴을 한 달님같은 아버지를 그리며 자식들을 먹여 키우기 위해 장터에서 장보는 아버지를 타자의 눈이 아닌 자신의 시각으로 그려내었다. 장터 풍경화에는 경상도 특유의 목소리가 그림처럼 펴져 있다. “머라 캐여”(뭐라고 합니까), “안 비싸여”(비사지 않아요), “고마바여”(고마워요) 아주 단호하고 칼로 자르는 듯한 토속적인 경상도의 심성이 울려난다.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장터는 여러 지역의 물산들이 한 자리에 모여들 듯 장터 부근 골짝골짝 사람들이 장날이 되면 모여든다. 이웃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누구 집 아들 언제 장가보내고 어느 마실 어른 돌아가신 이야기며, 누구 집 아들 고등고시 되었고 누구 집 아들 유학 간 이야기며 기쁜 일 슬픈 일 함께 나누는 곳이 장터이다. 서녘 저녁노을이 물들면 파장이 된다. 서로 갈 길 다른 길을 떠난다.고향의 추억과 기억들을 김천의 말씨로 호명해낸 시인의 시골 장터는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할 수 있는 황금시장이다. “다음 장날 또 보시더”. 아릿한 장터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민경탁 시인은 장터에 대한 절묘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미학을 김천토박이말로 불러내고 있다.

2024-07-15

이중기 시인의 회상하는 시의 궤도 “우야겠노. 그래도 우야겠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10년 전 고향의 후배이기도 한 이중기 시인에게서 자신의 시집 ‘시월’(삶창)을 전해 받으면서 늦은 시간까지 고향 영천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잠시 백신애문학기념사업회 대표를 맡아 달라고 하여 1여 년 소통한 인연이 있다. 그는 참 아름다운 시인이라는 생각에는 늘 변함이 없다.지난 시간과 공간을 기억하거나 회상하는 과정에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그 공간에 유통되던 방언이 출연한다. 영천 농민 시인인 이중기의 시에는 유독 역사성, 특히 10월 항쟁의 이야기를 재해석하면서 방언이 낯선 얼굴을 내민다. 10월 항쟁의 증언과 진혼의 시편들이 역사적 궤적과 일치하느냐의 문제는 별개로 삼더라도 그의 시편 속에는 영천의 숲속에 살던 분노한 사람들의 영혼을 불러내는 제의성을 띄고 있다. 마치 공수하는 언어의 모습으로 방언들이 빛을 드러낸다. 시인이 민란이냐 항쟁이냐를 평가하거나 재단할 만한 이유를 찾는다거나 화북에서 150여 명이 죽고 이직골에서 300여 명이 처분되었다는 풍문인지 사실인지의 문제를 뛰어넘은 한 시인의 회상적 상상력은 독자들을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예술의 프로파간다적 미묘한 힘이 사회비판적 기능과 엮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시문학은 직접적인 이데올로기가 될 수는 없다. 시는 깨끗하게 처리된 역사도 아니고 이념도 아니다.‘높게더기’, ‘한털뱅이’(서시), ‘깐깐오월’(가죽풍구), ‘생량머리’(밀수출), ‘질금’, ‘더꺼머리’(하곡수집령), ‘보쌀치기’, ‘쪼매만’, ‘쯔그렁’, ‘작달비’(도정 금지령), ‘노굿이’, ‘힘아리’, ‘가무살이’, ‘가치배미’, ‘전나귀’, ‘찔끔’, ‘아갈잡이’(공출량조사), ‘참지름’(영천아리랑), ‘중뜸’(옥장이 아버지), ‘성걸어’(배내기 소), ‘살결박’(새벽 북소리), ‘되직’(면죄부 장사), ‘살결박당한’(입산)과 같은 신선하고 아름다운 토속어가 시 곳곳에 묻혀있다. 그러나 시인의 작품은 대구, 경주, 포항으로 확대된 10월 항쟁이라는 사건을 친일파와 미군정이 빨갱이를 단죄하는 과정에 피를 흘렸던 민중들의 시각을 대변하기 때문에 다소 격렬하고 견강부회의 장면들이 나타나 작품의 예술적 심미의 충격을 줄인다. 역사를 주관적 차원에서 해석한 것이어서 객관적 차원의 사회과학적 진실과는 격리될 수도 있다.“성질대로 한다면 그 새끼들 다 때려죽인 뒤/ 나는 그만 칼을 물고 팍 엎어지고 싶지만 그러나 우짜겠는기요, 성님/아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징징거릴 때마다/ 죽은 어무이 생각보다 먼저 성님 얼굴 떠오르니더/ 그러이 이 판국에 우짜겠는기요/ 배급은 두당 두 홉 네 작으로 즈그들이 정해놓고/ 다섯 식구 목구녕으로 곡기 넣어본 지가 언젠데/ 아나 여깄다. 쌀 한 동가리 안 주니더/ 씨팔, 이게 무신 나란기요.”(이중기의 ‘두형제’) 10월 혁명의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과 연결된다. 작자의 상상이 감정을 폭발시켜 시 정신을 멈추게 한다. 너무 배가 고프다고 할 때나, 너무 추워도 옷을 헐벗어 분노할 때, 시는 사라진다. 잔인한 당시를 간접 체험으로 상상력을 자극할 경우 더욱 격렬해져 보편성의 한계를 좁히고 있다. 그 사이에 향토 방언이 섞여들면서 예술적인 소재주의의 한계를 좀 뛰어넘도록 도와주고 있다. 정경묘사를 위해 방언이 토속의 일부가 되고 오리무중으로 엷어진 시인의 의식을 이데올로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굴절시켜주기도 한다. 이렇듯 방언은 저항적 시작품에서 사회성에서 일탈하여 심미성으로 물줄기를 돌려주는 효과를 발한다.이중기 시인의 ‘시월’(‘삶창’, 2014)은 고향을 지켜온 농민이자 시인으로서 듣고 보아온 10월 항쟁의 생채기를 시의 힘으로 폭로하고 싶다는 목적의식이 다분하다. 역사의 리얼리티 문제와 해석의 문제 이상으로 문학의 예술성의 깊이가 더 중요하다. 사회성의 문제나 정치적 이데올로기 문제보다 더 강력한 충격을 전달하기 위해 그가 동원한 것은 현장의 시어다. 이중기 시인이 질서의 붕괴를 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회비평의 일부로 시의 예술적 지위와 질서를 붕괴시키지 않는 유효한 장치가 되었다. 그의 시에 일관하는 서사적 구조와 사투리의 토속적 분위기는 사실성 문제의 시비를 줄여주는 장치가 되었다. 다만 이런 고발적 문학 작품의 사실성과 시적 정직의 문제는 별도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2024-07-08

이종암 시인의 우주에 모아놓은 꽃, 별, 총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경북 청도 출신 이종암 시인의 시집 ‘꽃과 별과 총’(시와반시, 2024)이 출간되었다.제목은 ‘꽃과 별과 총’인데 내용 배열은 제1부 꽃, 제2부 총(塚), 제3부 별로 구성되어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대지는 세상 만물의 어머니이고 대지에 꽃이 뿌리를 박고 있다. 그 대지의 무덤에는 사람이 묻혀있고 그리고 하늘에는 별이 떠 있다. 하이데거는 우주 만물의 존재론적 상징으로 꽃과 나무, 그리고 하늘의 새와 인간을 얘기했다.이종암 시인은 하이데거를 인식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존재의 무덤을 ‘총(塚)’으로 상징화하였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꿈을 묻어놓은 곳이 무덤이다. 이 시집을 해설한 신상조 평론가는 한 마디로 이종암의 시를 “무구의 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시라고 정리하였다. “사월 산길을 걷다, 엉겁결에/한 소식 받아 적는다/저마다, 꽃!”이라는 이 시인의 인식은 사람이 저마다 다 꽃이라는 말이다. 그의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은 기적이라고 할 만하다.이 시인은 ‘별’을 상징하는 ‘꿈’이라는 시에서 “병든 여든일곱 우리 어머니/어저께 우리 내외 앉혀놓고 하시는 말씀//너거 아버지 세상 버린 지 십칠 년 만에 처음 내 꿈에 왔다 아이가, 집을 새로 다 지어놓았다 하더라, 거기서도 좋은 볏짚은 큰집에다 갖다준 것인지 반쯤 상한 짚으로 지붕을 엮어놓았다고 내가 또 잔소리를 막 하지 않았나, 이 꿈이 뭔공?// (중략) //안돼요, 아버지! 그곳에/ 어머니는 아직 가실 때가 아닙니다.” 이종암의 ‘꿈’에서 아름다운 이 지상의 꽃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존재이다. 그 한정된 “저마다 꽃인 사람, 연로하신 어머님이 꾸신 꿈에서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어머니의 방언 육성으로 전해준다.“입 주변까지 번진 대상포진으로 고생하는/ 여든 일곱의 우리 엄마, 손순연/ 37도 무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꿋꿋하다// 오랜만에 안부 전화드리니/“우리 선상님, 어데 멀리 외국 나가셨든게?”// 이리 무더운데 요새 뭘 드시느냐 하니/ “내사 하늘의 별 따다 안 묵는게.” 하신다// 면구스러움에 앞서, 그것 참!/ 초등학교도 못 나와 한글도 모르는 분이/ 외국 유람은 어찌 알고/ 하늘의 별 따다 먹는 것은 또 어찌 알까?//시인이랍시고 까불락대는/ 헐거워진 내 언어가 다시 탱탱해진다/”. 이종암의 ‘시인의 엄마’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비유와 상징이 시시한 시인보다 더 싱싱한 상상력을 지닌 시인 엄마의 아들이다. ‘시인의 엄마’는 시인보다 더 시적 창조력이 탁월한 ‘시인 엄마’가 아닌가?“내사 하늘의 별 따다 안 묵는게.”, 자주 전화도 안하는 자식에게 “우리 선상님, 어데 멀리 외국 나가셨든게?”는 참 엄중하다. 방언시의 문학적 장치로서 직접화법이 가진 위력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요사이 방언시가 제법 유행을 타자 아무렇게나 사투리로 쓴 하찮은 시들이 얼마나 나도는가? 오만과 독선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폐적 사유를 하는 시인들, 자신의 부족함과 결함을 깨닫지 못한 언어의 창조라고 나불락거리는 시인을 질책하신다.시인들이 쉽게 스스로 갇혀버리는 환영의 틀을 초등학교도 나오시지 않은 엄마가 따끔하게 일깨워주신다. 시인은 천상으로 가는 연도에 선 언어의 마술사나 되는 것처럼 “배터리 닳아가는 자동차에게도 말을 건네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시인은 위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시라는 건 세상에 말 걸기이다. 수업 끝”이라는 자신의 ‘시론’이라는 작품에서 아주 해학적인 자조로 자신을 관조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종암 시인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그는 ‘숙살지다’(청도에 가서), ‘댕강무디’(이총, 댕가무디), ‘우짜든동’(하늘예금), ‘하늘예금’(하늘예금), ‘선상님’(시인의 엄마), ‘안 묵는다’(시인의 엄마), ‘그름감별사’(그름감별사), ‘구름관찰사’(구름감별사)에서처럼 방언도 살짝 빌려오고 새로운 낱말도 창조하는 우주를 관통하는 시인이다. 그의 언어는 청정하고 순수하고 맑고 깨끗해서 살갑다.이 시인의 시의 내면에는 인간 존재의 빈자리들 곧 꽃과 별이 총총한 이 우주 공간에서 적멸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삼인해’라는 시에서는 그 심연의 우주에 빈자리 “허공의 옆자리가 그토록 시리고 아프다”라며 꽃과 별의 시인의 인식의 깊이를 가늠케 해준다.

2024-07-01

유안진 시인의 안동 악센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유안진 시인은 1941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65년 ‘현대문학’에서 박목월 추천으로 등단한 원로시인이다. 시집 ‘달하’,‘물로 바람으로’,‘날개옷’,‘달빛에 젖은 가락’,‘영원한 느낌표’등을 발간하면서 꾸준한 시작활동을 하였다.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이형기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숱한 문학상의 행운을 누렸다. 평생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 교수를 지낸 학자이기도 하다.14권 가까운 시집들의 작품을 일별해 보면 시인의 시작의 기품을 느낄 수가 있다. 서구문학은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을 통해 인간 구원을 언어예술로 풀어내었다면 오랜 세월 성리학의 세례를 받아온 우리나라 시문학은 자기 절제와 안존한 통제를 통한 인격 수련의 자세를 연마하였다. 그래서 문학의 지향성이 다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았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 이후 인간 중심의 존재 탐구 시대로 넘어왔지만 궁극적으로는 참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는 일이 문예예술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유안진 시인은 선비의 고향 안동 명문가 출신이다. 그래선지 전형적인 반가의 여인으로서 그가 직조한 시작의 내면 속에 그 그림자를 읽을 수가 있다. 자신의 삶의 태도와 방법과 같이 안존하고 자신을 치켜세우지 않는다.오양진이 ‘문학의 이유’(파란, 2023) 중 ‘숙맥노트’에서 유안진의 시작의 태도를 평한 바 있다. “말하는 시인이 아니라 귀로 듣는 시를 겸허한 자세로 제목처럼 숙맥같은 모습으로 인생을 조명하는 시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단히 정확한 평가라 아니할 수가 없다. 작가가 청자이면서 화자가 되기도 하지만 시인은 늘 낮은 자세로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심각하게 청취하는 양반가의 문화와 습속을 자신의 시속에 오롯이 담았다. 그는 조물주와 같은 창조자입네 하면서 잘난 체하며 머리를 쳐들고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는 시인이 아니라 기품을 유지하며 안존하게 소리를 듣는 시인이다.화자가 내는 그 소리는 비록 표준어로 발화하지만 안동의 악센트와 안동의 화법이 묻어있다. 유독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만연한 유년의 풍경화 속에는 안동방언이 묻어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지러지게 불러대는 말매미들의 합창을/귀로 먹고 자라는 여름 가족들이/사람 떠난 마을에 더 주민답다”, 유안진, ‘귀도 입이다’에서 유안진 시인의 세상을 조망하는 방식이 보인다. 즉 낮은 마음으로 화자의 소리를 듣는 겸손한 청자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 그리고 비록 화자가 사람이 아닌 말매미라도 고향을 지키니까 사람보다 중하다며 고향지킴이라는 명예를 부여해 준다. 참 신선하다. 오랜만에 시를 왜 읽어야 하는지, 시를 읽어보면서 인간 삶의 도리와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를 배울 기회를 얻는 것 같다.만년에 40년 가까이 함께 살았던 남편의 죽음은 시인에게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의 소리는 억누른다. 대신 퇴근하면서 현관에 들어서는 남편의 투박한 목소리 “나 와 쏘!”에 섞인 사투리 억양. 그래서 더욱 그립고 안타깝다.유안진의 ‘벌초, 하지 말 걸’에서는 들판 벌레들의 소리를 듣는 어머님의 혼령이 말한다. 표준어로 시를 썼지만 내 귀에는 마치 안동의 방언의 에코가 여운으로 날아든다. ‘모자’, ‘바늘에게 바치다’, ‘아버지의 마음’에서는 친정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화자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하여 듣는다.유안진 시인의 시작이 기대는 곳은 고향이다. 안동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 자매, 그리고 일가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할배요 오늘 장에 가시니껴?” 그리운 안동이 어느새 감익는 마을은 온통 고향으로 전환된다.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 /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유안진, ‘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에서는 시집을 가서 아이들을 낳고 시가 부모님과 조상을 모신 타향조차 내 고향으로 치환한다. 내 고향은 멀리 있어도 향기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항상 함께 하는 곳이다.시인은 계절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다. 봄과 가을 겨울의 흰 눈을 소재로 한 섬세한 서정일기도 고요하고 잔잔하게 울려온다.

2024-06-24

전윤호의 기억 속의 고향 정선 방언시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전윤호 시인은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했다. 1991년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2002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한 후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현대시인협회에서 간행한 방언시집 ‘요엄창큰비바리야냉바리야’(서정시학, 2007)에는 강원도 정선 방언으로 쓴 시‘마바리’를 발표하였다. “머이 우태 내게 사랑이란 건/ 마카 뺑때에 걸린 골낭구처럼/ 춥고 적적해서/ 단최 가까이하기 어렵드라/ 니는 당장에야 나가 좋다고/ 착착 달라붙지만/ 까마구 얼어 죽는 겨울이 지나면 / 갱물도 풀려 흘러가는 법/”(전윤호‘마바리’)와 같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 정선방언이 쏟아진다. ‘마바리(멍청이)’, ‘마이 우태(결국)’, ‘뺑때(절벽)’와 같은 방언 낱말의 맛깔은 강원도 사람이면 다들 머리 끄덕이며 발화하고 싶은 강원도 토박이말이다. 뿐만 아니라 “등신처럼 울어 쳐대는 나를 떠나”와 같은 구절에는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실려 있다. 그의 9번째 시집‘정선’에는 오직 시인의 고향인 정선만을 을 주제로 한 60여 편의 시가 고향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고향 정선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과 사랑이 오롯하게 녹아 있다.시에서 방언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고향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을 비롯,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이상향이요, 모두가 그리워하는 기억 속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과 공간의 교점에 남아있는 존재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아니면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버린다. 객체의 소멸과 함께 주체 역시 그리움을 남겨두고 사라지고 있다. 지난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호명하는 열쇠는 그 시공간에 유통하던 언어 곧 방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 이루어지는 만남으로 구성되나 그 삶은 유한하다.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과거로 향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관계를 희미한 기억 속에서 꺼내고 반추하면서 영원히 간직하려 한다.전윤호 시인은 ‘고향’이라는 시로 시작해 ‘정선을 떠나며’라는 시로 마무리한다. 그 공간과 시간 속에 나누었던 기억들의 별빛이 바로 향토색 짙은 언어들이다. ‘아우라지, 곤드레, 아라리, 여량, 동강할미꽃, 정암사, 구절리, 운탄고도, 민둥산, 화암약수, 만항재, 정선시장, 용마소, 수리취떡, 용소’ 등 고향 주변의 장소와 사물과 음식들은 시인의 기억 속에 간직되었다가 시라는 배경으로, 그림으로, 냄새로 그대로 그려져 나온다. 전 시인의 문학의 산실은 바로 고향인 정선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시인의 동료이자 선배인 최준 시인은 시집의 발문을 통해 “이 시집은 이별과 서러움과 같은 전통적인 정한(情恨)의 정서가 전편을 누비지만, 들풀처럼 무성한 그의 고향 사랑이 행간마다 절절하게 녹아들어 있다”고 평가했다.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더 넓은 장소로 그리고 다 빠른 시간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지난 시간 속에 잠겨 있는 고향의 전경은 더욱 그리워진다. 문명의 빛이 더디게 쪼이는 미명의 두메산골이지만 그 삶의 공간이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남이야 뭐라고 하든 ‘마바리’같이 일에만 죽자고 매달린 삶인 ‘일바보’이자 ‘밥장군’인 초부의 삶에 매달린 이유는 자유다. 세상의 끄나풀에 엮이지 않고 어느 누구가 관심을 두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둬도 오순도순 잘 살 이상향이다. “정선은 사람 수보다 산봉우리 수가 많은 곳”이라고 했지만 그곳은 귀한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영하 십칠 도의 아침/ 29억 톤짜리 악모에서 깨어/ 서리꽃 핀 산을 바라본다/ 123미터도 부족한가/ 평생을 가둬놓기엔 자갈과 모래로 다진 530미터 벽 아래/ 여전히 얼지 않는 저 거대한 슬픔/ 강으로 흘리는 눈물 천 리를 가는데/ 후회로 묶여 흔들리는 배 한 척/ 이제는 알겠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평생을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전윤호 ‘소양댐’) 고립된 정선의 경관 속에서는 외로우니까 더욱 슬퍼지고 슬퍼지니 더욱 힘이 세어진다는 역설의 시편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윤호 시인은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라는 시집을 출간하고 또 그 시집으로 제30회 조병화 문학상도 수상하였다.고향 정선을 떠나 대처인 춘천으로 떠난 시절에 쓴 시이다. 거주 장소의 이동은 추억어린 감성을 그 근원적인 장소로 쏠리게 한다.

2024-06-17

문인수의 ‘내 마음의 유민들, 사투리’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오늘 내가 좋아하던 경북 성주에 살던 문인수 시인이 파랑새처럼 하늘로 날라 갔다고 한다. 늘 불그스레한 황혼빛 웃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던 아름다운 시인 한 분이 세상을 떠났다.”지난 어느 날의 내 일기장에서 눈에 띈 짧은 글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쓸쓸하고 마음이 무겁다. 시인과는 고등학교 선배라는 인연도 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그는 항상 따뜻했다. 마침표도 없이 앞뒤로 이어지는 시 화법을 구사한 그의 상상력은 따라잡기 난해한 부조리한 시어 문법의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 편하게 가슴에 다가선다.‘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창비, 2015)는 시집 제목부터 문법 일탈이다. 이 생뚱맞은 제목 자체가 독자를 곧 바로 긴장으로 몰아넣는다.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이곳은 내가 존재할 곳이 못 된다는 말이다.‘굵직굵직한 골목들’의 “작고 초라한 집들이 거친 파도 소리에도 와르르 쏟아지지 않는다. 복잡하게 얽혀 고부라진 골목의 팔심 덕분인 것 같다.”에서는 파도에 의지한 가파른 언덕 섬마을의 모습, 금방 쏟아져 내릴 듯 언덕배기 섬마을을 버티게 해주는 꼬불꼬불한 길을 “질긴 팔심”에 비유한다.시인은 스스로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 비범한 시인이라는 꼿꼿함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실제로 문인수 시인이 범속한 인간이 아닌 건 아니다. “굵직굵직한 동아줄의 기나긴 골목”에서 한국어 조사 ‘-의’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의’는 ‘-와 같은’과 동일한 직유의 기능을 하고 있다. 가파른 섬 언덕에 조개껍질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붉은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난 골목길을 질긴 팔뚝과 동아줄로 유추한 비유는 탁월한 시적 상상이다.“해풍의 저 근육질은 오랜 가난이 절이고 삭힌 마음인데”에서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을 해풍의 근육질로 비유한다. 시인은 철부지 순수한 어린 아이처럼 변덕도 심하다. 골목길을 질긴 팔로, 또 동아줄로 비유하다가 이젠 끊임없이 세로로 일어서는 해풍의 강한 근육질로 눈길이 옮아간다. 이러한 자연의 긴장감, 팽팽히 당겨진 인력은 곧바로 그 섬마을에 삶의 거처를 둔 섬사람들의 끈질긴 생을 이야기하는데 성공한다.문인수 시인에게 사투리는 한 시절의 추억이 유적이 되어 쓸쓸히 서녘 서방정토에 묻혀 있다.‘내 마음의 유민들, 사투리’(‘요엄창큰비바리야냉바리야’, 서정시학, 2007)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자동기술적으로 튀어오른다. “낫살이나 먹은 사람들의 몸엔 묵은 된장냄새 같은 말씨가 숨어 있다./귀에 쟁쟁, 목구멍 속에 오소리길처럼 파묻힌 말뜻이 있다.”라고 했다.방언은 시인의 인식 내부 깊숙이 냄새, 소리, 목구멍으로 숨어 있 있다. 방언이 시학의 미적 가치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시에는 또 다른 액면 구성의 방식으로 시인의 목소리이면서도 마치 타자화한 토박이 방언인 듯 경상도 방언이 실려 있다.“약삐야 덕삐야 살 꺼 없다. 디비가미 애믹이다. 심청머리. 곡식을 까부리다. 아망시다. 양발궂다. 모지락시럽다. 해찰궂다. 까리적다. 야무락지다. 자부럽다. 건성시럽다. 메메 문때다. 짜매다. 허퍼. 개얀타. 쌔비릿다. 넌 갓따리다. 잘 까바지다. 글마가 절마가. 알아서 미미이 잘할까. 각중에. 먹보. 얌새이 시염이다. 통시이. 여불떼기. 수굼포. 호메이. 깨이. 후치이. 써리. 그케. 뺀대기 쌔리다. 가릇부치다.” 이렇게 값진 방언 시어들이 시의 궤적에서는 전혀 일탈되지 않으면서도 정답게 시의 행간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다.문인수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말투들은 거칠지만 얍삽하지 않다. 양단간에 곧잘 앗사리 뿔랐뿐다.”라고 방언시에 사용된 방언 낱말의 정의를 바로 내린다.낮은 여항의 일상의 말씨가 결이 곱지는 않지만 솔직한 유민들의 심정을 전해주는 말이라고 했다. ‘혹가다’(우연찮게) 머리에 떠오르는 모어가 아니라 연속의 불연속, 불연속의 연속으로 방언으로만 쓴 시의 한계치를 뛰어넘는다.울림일까 주문일까? 그러나 경상도 사람 외에는 독해할 수 없는 배타성을 감추기 위해 메시지는 철저하게 감춘다. 이해해 달라는 의미일까? 시인 문인수는 뛰어난 서정 시인이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직관력과 순간순간 변하는 눈길로 풀어놓은 변덕스러운 시적 긴장감이 시의 맛깔을 한껏 돋운다.

2024-06-10

방언시의 놀라운 효과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시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고통을 나누어야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시는 독자들과의 소통 고리를 잃어버리고 표독하게 제 잘난 듯이 알 수 없는 언어로 옷을 갈아입고 미로로 질주하고 있다. 시인은 정치적 선동으로도 모자라 고발과 분열을 미덕으로 삼아 내뛰고 있다. 글로 쓰인 시가 시 본연의 운율과 가락을 찾지 못하고 있다. 황혼에 물든 저녁녘 단 한 줄의 시 구절에 어깨를 들썩이는 독자를 찾으러 나서는 시인이 그립다.말하듯 노래하듯 써야 시가 되는 언문일치와 결별한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표준어라는 그물망이 직조되기 이전에는 가슴을 격렬하게 울리는 싱싱하고 푸른 토착어로 노래하듯 시를 쓴 작가들이 있었다. 소월이 대표적인 시인이다. 구전 전통의 우리 가락을 시작을 통해 안정된 시의 미학에 도달하였다. 한자어는 물론 외래음차표기조차 배제하여 쓴 그의 시는 노래하는 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민요적인 가락과 구어적 글쓰기의 결합으로 가장 전통적인 시혼을 우려내는 시작에 충실하였다. 김소월은 ‘개여울’, ‘가는 길’, ‘팔베개 노래’, ‘진달래꽃’에서 외래어나 외래어 음차표기나 한자어를 철저히 배제하고 토착어 지향적인 자세를 일관하였다. 동시대의 만해나 이상화 등의 시인들과도 비교해 보면 매우 재미있다. 토착어로만 쓴 시들과 외래어나 한자어가 많이 뒤섞인 시들을 비교해 보면 시로서의 품격의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상화 시의 경우에도 고유어로만 시어를 선택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한자어가 뒤범벅이 된 ‘이중의 사망’을 비교해 보면 토착어 지향성의 시들이 훨씬 더 아름답고 가슴을 치는 품격을 지녔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30년대 이후 시문학파나 생명파, 특히 청록파 시인들의 토착어 지향의 시작 경향이 이어져 아름다운 시들을 만날 수 있었다.50년대 한국전쟁 이후 한자어를 선호하거나 외래어나 외래어음차표기를 선호하는 위세적 심층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시 쓰기에도 반영이 되었다. 사회 공간 속에서 지적이고 고급적 집단 무리에 편승하고자 하는 이 시대의 시에는 마치 조선조 양반과 평민층의 계급적 길항관계처럼 외래어나 한자어가 꿈틀거린다. 특히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에게 두드러졌다. 70년대로 들어서면서 민학운동이 촉발되고 상실된 실체로서의 민족과 고향을 강조하는 민족문학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시들이 판소리나 민중극과 함께 많이 나타났다. 특히 새마을운동으로 붕괴된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이들이 잃어버린 고향과 고향의 재발견을 위한 방편으로 토착어 지향성을 보이지만 표준어라는 압박에서 자신의 구어의 맛깔을 온전히 찾아내지는 못하였다.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시인협회 주관으로 두 차례에 걸친 방언시집 간행이 계기가 되었던지 모티브 차원에서 이용되었던 방언이 시작에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표준어를 수호하던 국립국어원이 오히려 토착적 방언시의 창작을 지원하고 주도하였다. 언어의 종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국어정책의 중요한 축이라는 지향이 피상적으로 간간히 이용하던 방언 시어들을 온전하게 활용하는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어른과 아이들이 공유하고 지식과 계급의 차등을 뛰어넘는 상실의 실체, 사라진 것들을 다시 호명해 내는 시적 기술로서 방언시가 나타났다. 토착 지향의 시인들이 방언을 활용한 노래하는 시, 말하는 시로서의 발돋움을 시작하였다.방언으로 쓴 시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온갖 감각 기관을 총동원시키는 시간 회귀의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상실한 사물과 상응하는 토박이 음성이 결합하는데 성공한 작품들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방언으로 쓴 시편들은 시각적 텍스트인 문자로 잊어버린 옛 시간을 당겨오고 가물가물 사라진 기억을 호명하는 힘을 가진다. 떠나온 고향,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친척들과 이웃의 삶터를 개방해 준다. 눈으로는 지나간 시간이나 공간의 빛을 되찾아주고 귀로는 소멸된 소리를 토속적인 악센트로 불러온다. 코로는 증발되어버린 시큼하고 소똥냄새가 뒤섞인 공간의 냄새를 소환하고, 입으로는 소멸된 사물의 존재들을 호명해 온다. 시의 방언은 지나간 모든 시간과 공간을 기억해내고 불러오는 수단이 된다.

2024-06-03

허림 시인의 강원도 홍천 방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세상의 온갖 사물과 사람들이 사물과 교감하는 정서들이 스멀스멀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이 손수 만들어 썼던 물건들이 모두 대량 생산으로 흔해졌다. 그것도 도가 넘어선 대량생산의 결과 옛것들은 모조리 우리 주변을 떠나고 있다. 사라져가는 물건들은 정보화 처리로 디지털 속으로 숨어들면서 우리는 빠른 속도로 잊어버리고 있다.삶의 격식과 엄숙함을 가르쳐주었던 제의(祭儀)도 사라져 버렸다. 동네 당산제, 성황당제에서부터 집안의 온갖 가신제와 부모와 조상의 제사마저 단촐해지더니 어느덧 사라져 가고 있다. 또 어린 시절의 구석구석에 도깨비나 귀신들이 숨어 있었다고 믿었던 성령이 어디로 다 숨어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페미니즘이 강화되면서 에로스 종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들의 우울한 삶을 물리치도록 힘과 용기를 주던 에로스의 증발로 신생아 출생률이 전 세계에서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시간의 향기라고 할 수 있는 기다림의 미학을 상실한 시대이다.우리는 새로운 삶의 꼴이 만들어낸 디지털의 터널 속에서 점점 더 외로운 혼자가 되고 있다. 잃어버린 옛 물건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우리들의 정서와 삶의 품격, 시간의 향기 에로스의 환희를 어떻게 호명할 수 있을까? 사물의 소멸과 함께 덩달아 사라져 가는 언어, 변두리의 방언들을 시로 불러낸 아름다운 시인들이 여기에 있다. 허림 시인은 ‘봄날의 방언’에서 “그려 방언이며 헛것이 보이겠나”라며 넋두리를 한다.방언은 이젠 헛것처럼 눈에 들어오질 않는 세태가 되었다. 그의 시편에 올올이 박혀 있는 강원도 방언은 소리로 이어진다. “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리이요오 아리라앙 고오개에르을 너머간다” 한글이 표음문자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유장한 강원도 아리랑이 봄이 되니 그리운 꽃이 피듯 목에 걸리는 강원도 사투리 가락을 옆에 끼고 터억 나타난다.시인 허림의 시각에는 흘러간 시간이 보이고 그 흘러간 시간 속에서는 잊혀진 사물들의 생김새와 소리와 모양과 맛의 느낌이 이미지로 전환한다. “다시 돌아올 것처럼 떠난 자리마다/나무들이 죄인처럼 서서 기다리고/나이테며 잎맥마다 숨겨둔 빛빛의 단풍이 붉었다/나무진골에 묻어둔 전설은 조금씩 잊혀져갔고/능이버섯이나 따라 갔다 따온 개복상 먹으며/벌거지처럼 기어나오는 기억을 잇대보다가/흘러간 신간들은 다 어디로 갈까/우두망찰 바라보는 눈시울 너머/잠행했던 이름들 흩어지고”-허림의 ‘흘러간 시간들은 무엇이 되었을까’시인은 ‘개복상’, ‘벌거지’를 방언으로 꽂아 넣으면서 그리운 시간 속으로 회전한다. ‘우두망찰’ 바라보는 그리움이다. ‘조풍냉이’라는 시에서는 메좁쌀로 빚은 강원도 떡을 불러온다. “보실보실 쪄진 조풍냉이/입안에서 몽글몽글 차지다//어른들 밤바치로 잔치 보러 간 눈먼 날들/젖멍이 도톱해지던 여서너 살 섣달 하순 날이 샌다/, ‘조풍냉이’처럼 잊혀진 젖망울이 도도롬해지던 열서넛 그 시절 여자아이들이 지금 다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그립다. 외마디 지르듯 생뚱한 방언들을 흩어놓은 어설픈 방언시가 아니라 정겨운 고향의 소리다.가장 오밀조밀한 방언은 지명에 많이 담겨 있다. 허림 시인의 과거 회상법 가운데 고향의 사투리 지명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한 시편은 ‘골말 산지당골 대장간에서 제누리 먹다’라는 작품이다. ‘제누리’는 ‘곁두리’의 강원도 방언으로 농경문화시대 일하는 사이사이에 간식처럼 먹는 음식인데 방언 분화형이 매우 다양하다. “골말, 산지당골, 복골, 붉은데이, 버덩말, 섬터, 아랫비랑, 늘원”등의 지명에서부터 입에 착 달라붙는다. 엄씨 대장장이가 시골에 와서 낫이며 괭이며 벼름하는 대장간에서 제누리를 먹는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농경시대 대장장이를 찾아와 농기구 벼름하다 마을 노인들과 함께 나누어먹는 ‘제누리’의 입맛과 추억은 마치 한 폭의 김홍도의 그림같다. 그런데 이 시에 숨겨놓은 서사적 장치는 풀무질하는 풍구를 시루는 새각시와의 인연이다. 풀무질하다 불길에 붉게 익어 올라 볼이 붉어져 수줍어하는 색시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잊혀져가는 사물들과 정감들을 이렇게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잊혀진 사물들이 품었던 이름과 사물들이다. 방언은 그 오래 묵은 불씨를 일으켜준다.

2024-05-27

박목월의 미발굴 작품집에 거는 기대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경주에 발을 디딜 때마다, 천년고도의 황토 빛이 저녁노을과 함께 내 눈동자에 스며온다. “아베요 오늘이 아베 젯날”이라고 하얀 이밥 한 그릇 제상에 올려두고 기제사를 드리는 만술아비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반월성을 휘돌아 바람에 번진다. 박목월은 왜 이토록 신라 천년의 경주의 말씨를 보듬었을까? 리듬과 운율이라는 순수시의 비장을 그는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50년대 이미지즘의 시가 순수시와 함께 이 땅에 밀려오면서 표현에 공헌하지 않는 말은 가능한 한 배제하고, 대신 표현의 순수성을 유지했던 시인의 심성이었다. 이는 민요적 리듬의 효과를 노리는 동시에 이미지즘을 추구한 몸에 밴 감각적 시쓰기의 결과였으리라. 박목월은 ‘눌담’, ‘적막한 식욕’, ‘치모’, ‘만술아비의 축문’, ‘이별가’ 등에서 방언 어휘뿐만 아니라 경상도의 운율과 가락을 깔아두었다. ‘이별가’에서 외치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에 보이는 ‘뭐락카노’는 경주의 악센트를 제거하고는 아무런 이미지의 맛을 건져낼 수가 없다. 단순히 향토성이니 경상도 정체성을 담아낸 시로만 규정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경상도 악센트다.‘만술아비의 축문’에서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베도 알지러요” 대목의 방언적 형상을 온전히 해석하지 못한 평론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듯이 박목월의 ‘불국사(佛國寺)’라는 시에서 ‘흐는히’라는 시어의 해독을 방언적인 표현이라고 가정하면서 “흥건히” 혹은 “몹시 그리워 동경하여”의 사투리로 해석한 평론가도 있었다. “흰 달빛/자하문//달 안개/물소리//대웅전/큰 보살//바람소리/솔소리//범영루/뜬 그림자//흐는히/젖는데//흰 달빛/자하문//바람소리/물소리”. 박목월 ‘불국사’ 전문이다. 이 작품에 대한 시 형식과 운율에 대해서는 정교한 해석들이 이어져 왔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적절하게 조화한 풍경화같은 불국사의 전경들을 그려내고 있다. 운율적 표현 양식의 특징으로 3음절 대련 형식의 형식적 미학의 품격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수미상관의 구조적 여백이 불국사의 전경과 함께 적절하게 조화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는 설명적인 이미지를 배제하고 “허사가 거의 없는 실사로 현상학의 판단 중지”(김춘수 ‘시의 위상’ 77쪽) 상태로 장면을 훌륭하게 제시한 명작이다.그런데 문제는 ‘흐는히’라는 시어에 대한 해석이다. 이 단어는 표준어 사전에 없는 단어인데 동시에 경주방언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그러면 ‘흐는히’라는 낱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흔흔하다’라는 표준어형을 마치 방언처럼 음절을 재조정한 방언표준형이라고나 할까? 경주방언에서는 유성음 사이에 흔히 ‘ㅎ’이 탈락되는데 여기에 ‘ㄴ’을 밀어 넣어 마치 표준어인 양 방언을 사용한 결과인 듯하다.최근 시인이 돌아가신 지 46년 만에 시인의 맏아들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아버지의 비공개 육필시 166편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우리나라 순수 이미지즘 시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함께 시인 자신의 시적 변화의 궤적을 연구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에 공개된 시편 가운데 ‘용설란’이라는 시에서는 제주 토종의 용설난을 의인화하였다. 어김없이 ‘사투리’를 사용하였다. “어눌한 사투리로 가까스로 몸매를”이라고 표현하면서 “파도소리에 뜰이 흔들리는 /(중략)/ 반쯤 안개에 살아나는 제주도.// 말 辯의 깃자락에 소나기가 묻어오는/ 그 낭낭한 모음의/ 하늘./ 한라산.// 어눌한 사투리로 가까스로 몸매를/ 빚어,// 안개에 반쯤 풀리고/ 안개에 반쯤 살아나는 용설란.” 이 시에서는 제주방언에 남아 있는 아래아를 사용하여 “말 辯의 깃자락에 소나기가 묻어오는” 아래아를 텍스트로 옮겨내고 있다. “그 낭낭한 모음의/ 하늘./”에서의 ‘하늘’은 제주의 하늘이 아니다. 제주의 하늘은 아래아 하늘인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섬세함을 유성호 교수는 “고향에 와서도 고향을 떠나고 타향에 가서도 고향을 발견하는 이중성”이라고 설명했으나 이것은 오류이다. 제주 용설란에서 발견한 ‘낭낭한 모음’은 ‘아래아’가 살아있는 제주의 방언이다. 시인은 어설프고 어눌하지만 제주의 사투리로 제주의 용설란을 이미지화 한 것이다.이처럼 위대한 시인의 작품을 비평가들이 자칫 잘못 평가하여 시 작품의 본의를 허문 경우가 적지 않다. 박목월의 미발굴 작품집이 6월쯤 선보일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다.

2024-05-20

서정춘의 맛깔나는 전라도 방언시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2009년 10월 23일 ‘문학어의 생명’ 주제로 2009 서울문학인대회가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서울(이사장 김후란)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기조발표자였던 필자는 “모든 창조적인 문학 언어나 방언은 고도의 표현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며 방언의 효용성을 강조했다. 서정춘의 시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을 인용하며 “방언의 사용은 표준어라는 규범에서 벗어남으로써 오히려 더욱 풍성해지고 또 한껏 무게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며 “안일한 감상주의나 자아 분열적 글쓰기 방식이 아니라 당당하게 전라도적 언어풍경의 윤기를 발하게 해주는 문학의 언어는 주술이요, 언어의 위반”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당시 서정춘의 시에는 순창 토박이말이 맛깔나게 숙성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시인의 시선이 지역 정서에 충분히 곰삭아 있어서 궁상스럽지 않다.그의 시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을 한 번 살펴보자.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어머니는 어덕배기 구뎅이에 호박씨를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기칼 떽기칼로 나물 캐고 있고./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나는/나는/나는/몽당이 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이 시는 ‘봄, 파르티잔’, ‘캘린더 호수’ 시집에 실려 있다. 한국시인협회가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엮은 100명의 시인들이 쓴 방언시집 ‘요엄창 큰 비바리야 냉바리야’에도 실려 있다. 평범한 시골의 일상 풍경이 펼쳐지다가 갑자기 몽당이손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을 빌려보려고 재를 넘는 시적자아가 등장한다. 농촌 고유의 정취를 진하게 풍기는 방언인 ‘남새밭’은 채소밭, ‘찌끌다’는 끼얹다, ‘어덕배기’는 언덕, ‘떽기칼’은 공식 사전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화살촉처럼 만들어진 칼을 말한다. 이 칼은 농촌에서 부엌의 식칼, 들판의 낫 다음으로 다용도로 많이 사용한 칼이다. ‘몽당손’은 사고로 손가락이 잘린 손이다. 한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정순이가 등장해 여한 없는 하루의 삶을 시작한다. 안분지족이다. 가난이 몸에 익은 문학 소년은 백석시집을 빌려보려 고개를 넘는다. 읍내 서점으로 새 책을 사러가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빌리러 가는 길인데도 그 뒷모습은 너무나 행복에 겨워 보인다. 동구 밖에서 깨금박질하다가 이내 꼬불꼬불 산길 돌고 돌아가며 땀방울 훔쳐내곤 하지만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지금 우리시대보다 더 가난하고 투박한 삶으로 하루살이를 이어가던 시절의 풍경화다. 그 시절 풍진세상의 농촌 풍경인데도 정겨운 미소와 희망과 추억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서정춘 시인은 군더더기 없는 단어로 함축적인 시를 선보이면서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이 연출된다. 특히 전라도 방언을 통해 농촌 풍경과 추억과 친근감을 동시에 재현했다. 마치 ‘TV문학관’이나 ‘전원일기’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느낌을 준다.방언의 풍경 속에는 과거를 호명하는 기호가 삽입된다. ‘꼭지’라는 시의 주인공인 꼭지는 ‘몽당이손 아재비’와 같이 우리의 평범한 이웃사람이다.“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걷다가 또 쉬는데/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노랗다./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 떨어져나가듯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이 시 한 복판에 핀 노란 민들레가 시골 풍경화를 불러온다. 노란 민들레에서 못 먹어 부황 든 아이 꼭지의 얼굴을 연상하고 못 얻어먹어 말라비틀어진 젖꼭지를 주전자 뚜껑 꼭지로 상상한다.서정춘 시편의 미학은 절제미와 함축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류’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하얀 순천의 음결이 섞인 부사 ‘하르르’라는 어휘는 “미풍에 단풍을 휘날리는 가을의 비명이 은닉되어 있”는 것 같다. 비단옷 스치는 듯한 의태어 ‘하르르’가 안겨주는 섬세한 느낌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여울 물소리’를 만나 함께 어우러지며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감각을 자극하며 절묘한 효과를 획득한다. 이렇듯 서정춘은 서정주에 버금갈 만큼 토속어를 가장 잘 활용하는 시인이다.

2024-05-13

홍경나, 기억으로 호명하는 고령 방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우리의 모국어가 단일하고 균질한 소리로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 다성적인 방언으로 엮어져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울 일이 아니다. 홍경나 시인이 시의 언어로 발성하는 모어는 소통되는 장소를 확대하려는, 시로 된 씨앗을 푸른 하늘에 날린다. 시집 ‘초승밥’(현대시학, 2022)에 담아낸 모어의 우주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하릅강생이 복실일 후치다가/욜로졸로 서리병아릴 후치다가/개구멍바지 꿰찬 용남이는 가을볕 따신 마당귀/아물 따다 무더기 똥 내깔기고/똥 묻은 똥구녁을 하늘로 치켜든다.”(‘눈썹담’) 이 시에서 방언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하룻강아지가 천방지축 까불며 마당을 뛰어다니는 꼴이나 어린 용남이가 푸짐하게 똥을 싸고 그것도 모자라 궁둥이를 하늘로 치켜드는 해맑은 모습을 실감나게 살려내기는 어려웠으리라. ‘후치다(내쫓다)’, ‘욜로졸로(요리조리)’, ‘아물따나(아무데나)’처럼 토속적인 경상도 방언 낱말에 묻어있는 풍경화가 다정하다. 방언이 가진 시간성의 이중성이라고 할까 과거로 되돌려 주는 기억의 환기장치로서도 멋진 구실을 해내고 있다.시인은 자신의 모어를 최대한의 시속으로 투입한다. 기억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 간의 호응을 통해 과거로의 기억력을 되살려내는 시적 확장을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주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성의 회귀인 동시에 장소에 대한 기억과 마주치며 완성된다. 방언이 호명해 주는 장소, 혹은 대상이나 사건과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품고 있다. “사창댁 우리 할매/콩지럼 내릴 오리알콩/소반다듬이 하시네/얽은 콩 쪼가리 콩 벌게이 슨 콩/밤결 내 고르시네//사창댁 우리 할매/콩지럼시루 쪼록쪼록 바가치물 치며/한 치 두 치 콩지럼 내리는 소리 들어라시네/오구구 오구구 뿌리 트는/긴 짓소리”(‘콩지럼’)이라는 시는 유년의 기억들을 불러온다. 할머니가 콩나물을 기르기 위해 콩을 고르는 일부터 시루에 물을 주며 애지중지 키워내는 기억 속의 풍경화에서는 그 풍경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방언의 악센트와 리듬을 타고 있다. 시는 노래여야 한다. 리듬을 타며 흥얼거리며 화를 참아내는 할머니의 ‘몸짓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콩지럼’(콩나물)이나 ‘오리알콩’(토종 콩나물콩), ‘소반다듬이’(소반에 곡식을 놓고 고르는 일)라는 독특한 방언들이 배치되지 않고서는 도무지 그 풍경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초가집 부엌에서 올라온 검은 검정이 천장에 스며들어 가무스럼한 방안에는 할머니의 냄새까지 배어있다.홍경나 시인의 경북 방언은 현재의 경상도의 모습이나 풍경화만 그리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한 회생 장치로서 방언을 이용하고 있다. 그 속에는 옛날 소리와 삶의 풍경들이 서사적인 구성을 가지며 때로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의 풍경들을 조명해 주기도 한다. ‘개보름쇠기’는 우리 고유의 풍습 가운데 하나인 ‘개보름’에 얽힌 이야기다. “사대부 팔대부 하동 포수 앞세운 농악대 아제들이 대청지신 큰방성주 조왕지신 철용지신 우리 집 지신풀이 돌 땐 목줄을 닿는 데까지 끌고 나와 덧배기 반덧배기 별달거리 다드래기로 뜀질해쌓다가 싱둥겅둥 윷가치 노는 백구마당 모닥불 불똥 구경하다 백지로 불똥재 앉은 빈 밥그륵을 복실이캉 지캉 서리 연분홍 똥꼬녁을 핥는 거맹키 밝게 달강달강 딧설거지하는 거맹키 밝게 핥아쌓다가 둥두렷이 장뚝산을 돌아 중문 지붕만댕이께 넘쳐 오는 정월 보름달을 짖었다.”(‘개보름쇠기’) 경상도에서는 개가 너무 잘 자라서 살이 찌거나 파리가 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대보름이 뜨기 전까지 하루 종일 굶긴다. 시인은 이 서사 구조에 공동체적 무의식에서 소환한 농악놀이의 풍경과 풍물소리도 섞어 넣었다. 너무나 리얼하다.시인의 무의식에는 온갖 오래 묵은 기억들이 잠재해 있다. 방언의 음성으로 호명하는 순간 큰물 밀려들듯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시인을 과거로 호명해낸 방언의 미학이 여기에서 발화하기 시작한다. “불 간 자리엔/얼마나 두들겨 댔는지/생목 꺾인/새까맣게 그슨 청솔가지만 남았다//집집마다 오줌 싸는 꿈을 꾸었다”(‘쥐불’)에서 유년 시절의 풍경이 생생할 뿐이다. 시의 미학적 본질인 ‘낯설게 하기’는 과거의 기억을 방언으로 호명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경북 언어의 보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살아있는 ‘말’들을 ‘시’로 재생했다.

2024-05-06

허영선의 제주 해녀들의 노래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허영선 시인의 시집 ‘해녀들’(문학동네 시인선 95)은 21명의 제주해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사랑을 품지 않고 어찌 저 바다에 들겠는가”라는 주제시 21편과 산문 한 편으로 엮었다. 제주의 바다는 단 한 번도 누워있질 못한다. 늘 물거품을 일으키며 세로로 일어서려고 몸부림친다. 물의 깊이에 따라 흰색에서 푸른색, 검푸른 색으로 끝없이 펼쳐진 제주의 바다를 일터로 삼은 해녀들의 노래이다.허영선 시인은 “내 안에 오래도록 꽉 차 있던 소리/숨이 팍 그차질 때 터지는 그 소리/숨비소리/그 소리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며 해녀들이 깊은 바다 속에서 참을 대로 참다가 내뱉는 가쁜 숨소리인 숨비소리에서 가슴에만 담아오며 단 한 번도 내뱉지 못한 제주의 한 많은 역사의 소회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허영선 시인의 눈에는 제주바다가 푸르지 않고 붉다. 심장을 드러낸 칸나같은 붉은 빛이다. 4·3항쟁의 아픈 희생을 입 밖으로조차 표현하지 못한 제주토박이들의 한을 해녀의 숨비소리로 형상화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제주방언, 제주의 소리, 제주의 토박이 언어로 자신들의 삶을 노래한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어느 한 군데도 원한에 찬 언어는 없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위험과 맞바꾸어온 벅찬 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해저 깊이 납덩어리를 차고 잠영하는 제주의 여성들, 둥그런 태왁을 안고 풍덩 거꾸로 내려잠수하는 해녀와 그들이 채취해온 ‘ㅁ·ㅁ’의 동그란 모양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제주의 아픈 역사가 불그레 물든 제주의 바다에서 숨이 찰 때까지 물질로 걷어낸 아픔과 슬픔으로 끓인 ‘ㅁ·ㅁ국’ 한 사발로 추위와 고통을 풀어낸다. 4·3항쟁 당시 450여 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북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북촌 해녀사’를 읽어본다. “남자들이 모두 핏빛 바다로 떠난 그날 이후/북촌 여자들은 물질할 수 없으면/바다를 떠나야 했다//그날 이후/북촌 여자들은 온통 바위섬을 건너야 했다//(중략)모두가 대군/물질 끝나 돌아가던 통통배/순간 한 치 눈치챌 수 없이 매복하던/강골의 바람살이/물귀 물 아래 위태위태하더니/엎어지고 까무라치고 부서지더니//북촌 해년 너도 나도 혼 줄 모아/기댔다 두렁박 하나에/등대처럼 기다리는 힘 하나/파도 건너 또랑또랑/어린 입, 입들.” 파도에 휩쓸려 죽음을 이겨야 하는 해녀, 그녀들은 왜 물질하는 해녀가 되었으며 집에 남겨둔 아이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품지 않고는 어이 저 컴컴한 죽음과 같은 바다 속으로 들어갔겠는가?“우린 몸을 산처럼했네”에서는 물질을 하여 ‘ㅁ·ㅁ’을 산처럼 채취만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다시 팔러 나선 해녀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얘기한다. “깊은 바다 그것이 미욱거릴 적/물결 따라 스러져 너울거릴 적/우린 맹렬하게 구애를 했지/몸이 베이는지/몸이 베이는지/ㅁ·ㅁ 삽서/ㅁ·ㅁ 삽서/밀어닥친 흉년에도 우리 몸으로 ㅁ·ㅁ을 했네”에서처럼 제주어에 남아 있는 고어 ‘아래아’를 현대어로 옮기면 ‘ㅁ·ㅁ’이 ‘몸’이 되어 ‘모자반’을 채취한 것인지, 아니며 물질하는 해녀 자신의 신체, 즉 몸을 벤 것인지 모를 정도다. 열심히 모자반을 채취하여 이것을 “ㅁ·ㅁ 삽서, ㅁ·ㅁ 삽서” 외치며 팔러 다닌다. 밀어닥친 흉년에도 굶을 수는 없어 깊은 바다 속으로 몸을 던져 ‘ㅁ·ㅁ’을 건져 올리는 제주 여성들의 고달픈 삶이 선연하다.삶이라는 사랑을 가슴에 품지 않고서야 우주의 분홍 젖꼭지를 드러내며 너울거리는 심연의 바다 속으로 뛰어 들 수 있을까? 빈 몸통으로 깊은 숨을 쉬었다가 깊은 고통이 가득 차오르면 겨우 숨통을 틔우는 해녀들. “어디서 징징징 쇠북소리 울리거든/붉은 칸나가 심장을 드러낸 채 바다로 가거든/한번 돌아보셔요/먼 바다 바람타고 떠나가는 내가 보일 거예요.”“우리 애기 울면 젖 호끔 멕여줍서”에서는 거친 물결에 휩쓸려 죽기 직전 “저 차귀섬 위 큰 마당까지 헤쳐갔다지/물 터지면 올라오지 못해/몸은 자꾸 아래로 허우적허우적/금릉인가 어디까지 막 밀려갔다지 순간,//그 여자 막숨 하나 부여잡고 소리쳤다지/“우리 애기 울면 젖 호끔 멕여줍서”/라고 외치며 죽어간 김녕 해녀의 눈물 쏟는 이야기를 전한다. 허영선 시인의 제주 해녀들의 힘들고 벅찬 삶의 순간순간을 제주의 생생한 목소리와 눈물로 써서 우리에게 전한다. 허영선은 늘 세로로 일어서려는 붉은 제주 바다를 거닐고 있다.

2024-04-29

허수경의 ‘진주 저물녘’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허수경 시인은 고고학자가 되고 싶어했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고대동방문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허 시인은 유적발굴을 위해서 1년의 절반 이상을 이집트와 시리아와 이라크로 떠돌며 살아왔다.유목민같은 삶을 살다가 독일에서 얻은 암으로 이승을 떠났지만 그녀는 자신의 시를 오래된 유적처럼 이 땅에 남겨 두었다. 녹슨 청동 구릿빛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그녀를 기리는 이는 더 늘어날 것이다,허수경은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에 그의 꿈을 소리와 문자로 새겨두고 우리곁을 떠났다. 시집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진주 저물녘’이라는 시에서 그는 서쪽 바람이 일으켜 놓은 황혼의 고향을 시의 그물로 당겨놓았다. 이 시에는 경남 진주의 토박이말이 걸쭉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경상도 전역에서 두루 쓰는 방언인 ‘문디’를 만나니 반갑기도 하다.방언은 추상화된 보편 언어가 아니다. 관념과 같은 무중력의 언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방언은 현실 세계에서 지역에 따라, 계급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파생되고 갈라지다가 그 ‘곳’에 자리를 차지한 민들레 씨방과 같은 존재다. 그러면서 방언은 공동체 안에서 그들끼리만 소통함으로써 내부적 결속을 강화해주기까지 한다. 표준화된 무채색의 언어인 표준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대상과 사건의 신비로운 숨결까지 방언에 깃들어 있다.“기다림이사 천년같제 날이 저물셰라 강바람 눈에 그리메 지며 귓불 부콰하게 망경산 오르면/잇몸 드러내고 휘모리로 감겨가는 물결아 지겹도록 정이 든 고향 찾아올 이 없는 고향/문디 같아 반푼이 같아서 기다림으로 너른 강에 불씨 재우는 남녘 가시나/주막이라도 차릴거나/승냥이와 싸우다 온 이녁들 살붙이보다 헌출한 이녁들/거두어나지고/밤꽃처럼 후두둑 피어나지고”, -허수경 ‘진주 저물녘’허수경은 스스로 “남녘 가시나”라고 고백한다. 가난에 쫓겨 어디 주막의 작부노릇이나 할까보다고 생각하다가 “기다림으로 너른 강에 불씨 재”운다.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송기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허수경을 두고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에게 버림받고, 그렇게 버림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어, 드디어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을 제 살붙이로 여기는 진주 남강이나 혹은 낙동강 하류의 어느 가난한 선술집의 주모를 떠올렸다”고 표현했다.좀 더 깊이 성찰해 보면 일본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 물에 뛰어든 정열의 기생 논개를 연상하다가 진주 남강 너른 강 같은 마음에 기다림의 불씨로 그 망상을 손질한 것일 것이다. 진주 시가지를 휘돌아가는 남강과 일본의 침략군 적과 싸우다 죽은 숱한 양민들의 피가 저녁노을처럼 붉게 물든 진주성의 저물녘과 역사성이라는 그물의 코로 이어있다.가끔은 폐병에 걸린 남성과 사랑에 빠져보고 싶은 내면적 충동을 시로 쓴 ‘폐병쟁이 내 사내’에서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라며 20대 젊은 여성의 내면적 욕망을 변주하고 있다.“산가시나가 되고 백정집 칼잽이가 되어 폐병에 효험이 있다는 뱀과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선한 물같이 맛깔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어디 내 사내뿐이랴”에서는 눈빛이 타오를 듯 고혹적인 사내를 위해 헌신한 우국충절의 논개가 되고 싶은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나의 어머니, 아니 나의 할머니부터 나에게 이어 내려온 강렬한 정념을 포효하고 있다.폐결핵이 걸린 사내라도 잎차같이 함께 눕고 싶어한다. 후후 불어 더운 보양국물 먹여 가며 그 사내가 흘린 식은땀을 후후 마시고 싶다. 그 여인 슬픈 눈길로 사내를 내려다보며 땀과 눈물 닦아줄 것이라는 환영에 빠진다.

2024-04-22

소리문법으로 치유하는 아픔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경남 합천 율곡면에서 태어난 박태일 시인은 시인으로서나 현대문학사 연구에서나 뚜렷한 봉우리 위에 선 학자이기도 하다. 대학을 은퇴할 무렵 연변의 나그네가 되어 연길 안까이 시편들을 시집으로 묶더니 자신의 시선집으로 ‘용을 낚는 사람들’(소명충판, 2024)을 펴냈다. 이 시전집 전반에 경상남도의 산천을 흐르는 물소리와 산새소리가 듀엣으로 합창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박태일의 세 번째 시집 ‘가을 악견산’과 네 번째 시집인 ‘풀나라’에서는 시인이 유년의 회상공간으로 한 경상남도 일대의 경관이 소리문법으로 리듬을 타고 그리움과 만난다. 제3시집에서‘가을 악견산’,‘거창노래’,‘합천노래’와 제4시집 ‘용전사기골’, ‘황강’은 연작시이다. 봄이면 봄의 소리로 여름이면 소낙비 소리로 가을이면 낙엽지는 소리로 산천의 경관이 바뀌고 자낙자낙한 서정의 메아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가끔은 표준 언어에서 벗어난 소리문법인 방언이 툭툭 튀어나온다. 박태일의 시 세계가 이토록 경건하고 진실할 줄을 어이 알았으랴. 가난한 농촌 아이일 적에 체험한 삶의 고뇌를 회상과 기억의 방식으로 변주해 눈물을 정화수로 바꾸는 소리문법으로 쓴 시어들, 태백산맥의 마지막 가야산과 산청 산의 끝자락의 뻐꾹새 울음소리, 바람과 햇살 휩쓸려 내리는 송화가루의 휘날리는 적막, 갑자기 땅땅 총소리에 쓰러지는 숱한 바지저고리가 노란 초가집 지붕으로 날아가는 거창양민 학살의 아픔들…. 경남 사투리를 간간히 섞어 쓰는 노래는 치유의 정화수로 지난 역사의 끝자락에 뿌려놓는다.“피멍 들었제 동복이 아제/쪼그려 앉아 박하 잎만 찧게/저수지 못 미쳐 목이 죄인 물줄기/타닥타닥 옴개구리도 밟으며/애드럽게 집게칼로/손금이나 다듬게//제실 가는 흙담 위 붉은 감또개/고픈 날 숨어 씹던/짚가리 그늘//매호 높은 봉우리에는 속기 많은 산중과 아들과/그 아들이 지른 된똥에 잠자리 날고” -‘합천노래’에는 한국 현대사의 이념적 갈등의 슬픔이 잔잔하게 깔려 있다. 전쟁의 난리 통에 지리산 자락에 있는 합천과 거창지역이 좌우로 갈려 학살이 자행된 역사. 치유하기 힘든 아픔을 추궁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지만 시인은 그 아픔을 오롯이 정화로 깨끗이 씻어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격렬하지 않은 옛 기억을 그냥 그대로 호명하고 있다. 동복이 아제 어린 시절 홀로 소꿉놀이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잘근잘근 경남 사투리로 ‘옴개구리’, ‘애드럽게’, ‘된똥’이라는 지역어를 들춰내어 북바치는 슬픔을 지난 추억으로 묘사하여 슬픔을 잠재우고 있다.지리산 자락 의령으로 흘러내리는‘황강’연작시는 물길처럼 유유히 흐르는 고향의 어린 시절의 풍경화를 소리로 리듬으로 이끌어낸다. 진주로 시집가 혼자되었다는 ‘콩점이’의 설화같은 이야기를 민요자락처럼 펼쳐내고 있다.“두렁콩 배는 날에 해가 저물어/진주로 시집간 콩점이 생각/곡식도 씨 따는데/사람이 못 딸까/내리 딸 넷에 아들/남편 상났단 소식도 이어 들리고//콩점아콩점아 콩 보자/사타리에 점 보자/잔불 놓던 둑너머엔/첫날 첫 봄밤//달빛 홀로 다복다복 어디로 왔나”-‘황강 7’어린 시절 마을에 함께 살던 콩점이, 사타리(사타구니)에 까만 콩같은 점이 있어서 콩점이라 불린 아이. 진주로 시집간 첫날밤의 풍경과 어린 시절 둑너미에 옹기종이 모여 앉아 잔불 지르던 추억이 한 몸으로 엉켜 훤한 달빛으로 걸어오고 있다. 살짝 섞어 넣은 방언의 촉매작용은 그 그립고 안타까운 추억 속으로 회전한다.“콩점아콩점아 콩 보자/사타리에 점 보자” 동요의 리듬은 표준어문법으로 질주하는 시어를 경상도 가락으로 되일으켜 우리들의 감흥을 일깨워 준다. “황강 물 굴불굴불 황강 옥이와 귀엣말 즐겁습니다/황강 모래 엄지 검지 발가락 새 물꽃 되어 흐르듯이/간지러운 옛말이 들리는 봄/재첩 볼우물이 고운 옥이 마을”-‘황강 9’콩점이와 동명이인일 수도 있는 옥이에 대한 그리움이 황강 물줄기로 이어져 온다. 옥이와 고향마을의 추억은 간지러운 옛말, 방언으로 도란도란 울려와 봄을 불러온다. 붉은 진달래꽃빛이 물꽃이 되고 옥이가 속삭이던 귀엣말이 봄빛으로 물드는데 “혼자 사는 옥이 엄지 검지 손톱이 뭉개져 까”매져 세월의 무상함을 저토록 처연하게 나직한 소리로 속삭여 준다.

2024-04-15

백제어의 깊은 바다, 전라도 방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전라도를 흔히 예향이라고 한다. 전라도 시내 엔간한 음식점에는 품격 있는 그림 몇 점은 걸려 있다.전라도 사람과 만나 한 잔 술을 나누다 보면 절로 흥겨운 가락이 쏟아져 나오고 그 중 누구든 판소리 한 자락 정도는 풀어낸다. 어쩌면 판소리에 담겨 있는 애절한 가락은 전라도 방언이어서 제 맛깔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전라도에서는 장음을 이중모음으로 소리내어 아주 끈끈한 부드러운 정감으로 판소리에서 전라도 소리미학을 담아낸다. 판소리가 전라도에서 발달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전라도 방언의 특징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전라도 방언의 말씨는 입을 적게 벌리고 발음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춘향전의 한 구절을 들어보자. “춘향이 깜짝 놀래, “향단아, 저 건너 누각 위에 선 것이 누구냐?”/“통인 서고 방자 선 것 봉게, 이 고을 사또 자제 도련님인개비요.”/춘향이 놀래어, “벌써 나왔겄구나.”/“버얼써부터 나왔어라우.” ‘보니까’가 음절 사이가 뭉쳐져 ‘봉께’로, ‘갑이요’가 움라우트 실현되어 ‘개비요’, ‘벌써’가 장음의 음절 늘이기로 ‘버얼써’, 종결어미가 ‘왔었어요’가 ‘왔어라우’로 실현된 남부전라도 종결어미는 노래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거시기’만 알아도 전라도 방언을 거의 다 배운 셈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채만식의 ‘천하태평춘’과 ‘탁류’에는 “아니야 저 거시기 서울아씨 시집 안보내우?”/(‘천하태평춘’)과 “저 거시기 조사나 잘 좀 해보았수?”‘탁류’)와 같이 ‘거시기’가 곳곳에 보인다. ‘거시기’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명사로서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때, 그 이름 대신으로 쓰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감탄사로서 “하려는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얼른 말하기 거북할 때, 그 말 대신으로 쓰는 군말”의 뜻을 가지고 있다. 전북방언에서는 ‘거시기허다’로 동사를 대신하는 용법으로도 쓰인다. ‘거시기’는 명확하지 않은 사물이나 사실을 말할 때 쓰이고, ‘거시기허다’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나 동작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전라도 구어 가운데 대표선수라 할 수 있다.채만식의 소설에는 ‘돌라먹다’(속이다), ‘갱기찮다’(괜찮다) 등 전북 군산 방언, 혹은 채만식의 개인 방언(idolect)이 작품 속에 소복하게 담겨져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아리랑’, 이병천의 ‘모래내모래톱’과 최명희의 ‘혼불’에 나타나는 ‘달챙이’(허기는 달챙이 숟가락 하나라도 빼놓고 가면 거그서 아쉬울팅게. -‘모래내모래톱’, 놋숟가락 닳아진 달챙이가 거꾸로 꽂혀 있어 이상해 보인다.-‘혼불’)는 ‘놋쇠나 무쇠로 만든, 끝이 상당히 많이 닳은 숟가락’을 의미한다.이 숟가락은 누룽지를 긁을 때 주로 사용하였고, 닳아서 쓸모가 없게 되면 문고리에 거꾸로 꽂아서 열쇠처럼 사용하던 것이었다. ‘매급시’, ‘매럽시’(맥없이), ‘매시럽다’는 “솜씨가 매시랍다, 손끝이 매시랍다”는 표현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걸로 보아 ‘솜씨가 좋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전라 방언에는 “꽤 많다”라는 의미로 ‘솔찬하다’라는 낱말이 있다, 전라 방언의 대표적인 낱말이다. 솔찮다’는 전라도 작가들이 쓴 문학작품에 전라도답게, 전라도스럽게 심심찮게 보인다.장일구는 ‘혼불의 언어’(한길사)에서 요절한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에 담긴 절절한 전라방언을 가려내어 분석하고 있다. “근디 누구는 남원산성 그 거창헌 거이 입 안으로 옴시레기 들왔다고 허고이.”, “사랑마당에서 우세두세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상머슴이 고한다.”와 같이 ‘옴시레기’(모두, 전부), ‘우세두세’(조용하다, 두런두런)와 같은 찰진 전라도 특유한 방언은 대화체에서뿐만 아니라 지문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몇 년 전 작고한 칼럼니스트 김서령의 ‘김서령의 家라는 수필집에는 전남 나주 죽설헌에 살고 있는 박태후 화가와의 대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봄에 서령 씨가 만지던 배꽃이 자라서 된 열매요. 쌍다구는 시퍼래도 맛은 괜찮을 거요, 먹고 더 달라고는 마쇼, 잉.” 일상의 생생한 구어체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쌍다구’(생김새, 또는 생긴 모양)나 문말 어미 ‘마쇼, 잉’에서 전남 방언 특유의 맛깔을 느낄 수 있다.비음을 섞어 길게 끄는 전라방언을 들으면 백제어의 깊은 방언고고학의 심해에 풍덩 빠진다.

2024-04-08

평북 방언으로 서정을 노래한 김소월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평북 정주 출신인 김소월의 시에는 섬세한 향토 방언이 800여 개나 결 고운 무늬를 이루어 향토적인 전통 가락과 장단과 어울린다. 소월은 20년대의 문학 일상어와 평북 방언을 구분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일상어로서, 모어로서 방언을 사용하였다. 소월은 시 작품에 평균 2개 이상의 방언 내지 방언 변이형을 사용하고 있을 만큼 방언을 풍족하게 시에 수용하였다. 방언을 표준어와 대립되는 관점에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어로 인지하였고, 자연스럽게 시어로 사용함으로써 가장 전통에 근접한 서정시의 최고봉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소월이 사용한 북방의 언어는 개여울에 흐르는 서정적 울림의 샘처럼 마르지 않고 우리들에게 감동을 전해 주고 있다.김소월의 ‘진달래꽃’(매문사, 1925)에 실렸던 ‘기억’이라는 시 1연에서는 무려 5군데나 의미 해석이 어려운 방언 시어가 나온다.‘싀밋업시’, ‘실벗듯한’, ‘머리낄’, ‘슷고’, ‘잔물’, ‘해적이다’, ‘축업은’, ‘시메산골’, ‘하롯길’과 같은 시어는‘표준국어대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은 고어이자 평안도 방언이다. 향토색 짙으며 이미 소멸의 길로 들어선 이런 시어는 해석하기가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싀밋업시’는 ‘멋쩍게’라는 의미의 평안 방언인데 ‘평북방언사전’에도 보이지 않아 그 의미를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싀멋업시’는 소월이‘팔베개 노래조’의 서사에서와 ‘시초’에서 사용한 시어이다. “무슨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망연히 있음”을 뜻한다고 이기문 교수의 설명을 듣자 겨우 시 문맥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실 벗듯한’은 ‘실’이 ‘뻐듯한’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벗듯한’으로 교열함으로써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머리낄’은 ‘머리카락’의 방언형이다. 그러나 시집‘진달래꽃’에서는 ‘머리길’로 교열함으로써 엄청난 오류를 범헀다. ‘슷고’는 “담벼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대어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을 의미하므로 ‘스치고’의 의미로 교열하면 좋을 듯하다. 가수 정미조가 가요로 불러서 80년대에 인기를 끈 노랫말이었던 소월의 시 ‘개여울’에도 많은 평북 방언이 보인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에서 ‘잔물’이란 시어는 ‘작은 못’의 의미를 지닌 방언이다.‘해적이다’는 ‘풀따기’에도 보이는데 “무엇을 헤쳐서 들추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평안도 방언이다. 남부 방언에서도 ‘희적거리다, 해적거리다’라는 방언이 있으니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었다가 이젠 고어가 된 어휘다.김억(1939)편 ‘소월시초’‘님에게’라는 시에는 ‘축업은’(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축업은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님에게’)이라는 시어가 있다. ‘축업은(추겁은)’은 평북 방언으로 ‘추겁다, 추거워’로 변칙 활용을 하며 ‘축축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미래사에서 출판한 ‘진달래꽃’(1991)에서는 ‘축업은’(‘님에게’), ‘추거운’(‘여자의 냄새‘)으로 달리 표기가 되어 있다. ‘추겁다’라는 방언을 잘못 이해한 결과로 동일한 시어를 이처럼 서로 다르게 교열해 버린 것이다. ‘축축하다’보다 물기가 좀 더 빠진 상태를 ‘눅눅하다’라고 하는데 이 ‘눅눅하다’의 방언형인 ‘누겁다’ 역시 소월의 ‘오과의 읍’에 나타난다. ‘시 산’에서 보인 ‘시메산골’은 ‘두메산골’과 함께 ‘인적이 드문 산골 마을’이라는 의미로 오늘날까지 정주 지방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의 길”이라는 뜻인 ‘하롯길’이라는 방언형도 이 작품의 외롭고 쓸쓸한 전경을 드러내는데 매우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모든 언어나 방언은 고도의 표현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흔히들 세계의 언어와 방언이 많은 것은 경제적으로 낭비라는 주장이 있다. 개인이나 기업이 의사소통을 하는데 많은 경비가 지출된다는 근거에서다. 사실 세계에 언어와 방언이 다양하면 할수록 이에 대처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언어의 다종성이 가져다주는 지적 축적이나 문화 창조의 힘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방언은 시와 소설을 창작하는데 놀라우리만치 위력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들 방언이 사라지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사고와 세계관, 지식과 이해의 단위를 영원히 상실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우리가 향토 언어, 방언을 아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4-04-01

인류의 기록문화유산, 제주어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데이비드 크리스탈이 쓰고 권루시안이 옮긴 ‘언어의 죽음’은 스티븐 웜이 분류한 언어의 위기 5단계가 있다. 그 가운데 제주어는 이미 5단계로 소멸된 언어로 분류된 바가 있다. 제주어의 소멸을 안타까워했던 필자는 국립국어원장 시절부터 이 제주어를 인류의 기록문화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그 실천에 앞장서왔다. 제주방언의 보존을 위한 국제학술회의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였으며 제주방언연구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제주어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고유한 제주 문화와 역사까지 온전히 남겨져야 할 것이라 강조해 왔다. 그런데 제주 토착인들은 과연 제주어를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 당당하게 제주어를 교육하고 문학작품에도 제주어 사용을 하고 있는가?현길언의 소설 ‘용마의 꿈’에 나오는 ‘안가름’은 마을 이름이다. ‘안가름’(강남(江南) 천자국(天子國) 안가름 김정승 댁에서 솟아나신 총맹스런 세 부인입니다. )은 마을 이름이다. ‘-가름’ 또는 ‘-카름’은 ‘가르다(分)’의 의미를 가진 동사의 명사형이다.제주에서는 동쪽에 위치하면 ‘동카름’, 서쪽이면 ‘서카름’, 중앙이면 ‘안가름’ 또는 ‘안카름’이라 하고, 방위와 관계없이 바다 쪽이면 ‘알카름’, 한라산 쪽이면 ‘웃카름’이라 부른다. 또 ‘그신새’(나는 어머니 등 뒤에 달라붙어 누운 채 그 도깨비를 생각한다. 저건 틀림없이 그신새 귀신일 거야. -‘지상에 숟가락 하나’)라는 낱말의 뜻은 무엇일까? ‘그신+새’로 분석되며, ‘새’는 한자어 ‘사(邪)’에 해당한다. 사악함을 쫓는 것을 ‘새쾓리다’라고 하는데, ‘새쾓리다’의 ‘새’가 바로 이것으로 이것은 허약한 사람에게 잘 나타난다고 생각하고 있다.현기영의 소설에서는 ‘곤밥’(어린 시절에도 파제 후 ‘곤밥’을 몇 숟갈 얻어먹어 보려고 길수 형과 나는 어른들 등 뒤에서 이렇게 모로 누워 새우잠을 자곤 했다. -‘순이 삼촌’, 곤밥(흰쌀밥)으로 손님 대접해여마씸. -‘변방에 우짖는 새’)이 자주 등장한다. ‘곤밥’은 ‘고운 밥’의 제주어인데, ‘곤(麗)+밥(飯)’으로 구성된 낱말로 잡곡을 섞지 않고 흰쌀로만 지은 밥을 말한다. 가난한 제주사람들이 평소에는 잡곡밥을 먹다가 제삿밥으로만 흰쌀밥을 먹었기에 ‘곤밥’이라 하였을 것이다. 쌀밥이 잡곡밥보다 빛깔이 곱다고 생각한 언중들의 생각이 담겨진 어휘다.제주도는 삼다의 섬이라고 한다.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은 섬인데, 특히 바람과 관련한 어휘가 많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대양의 바람을 문충성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샛바람/ 갈바람/ 마파람/ 하늬바람/ 동마바람/ 서마바람/ 갈하늬/ 높새/ 높바람/ 높하늬/ 건들마/ 도껭이/ 도지/ 강쳉이/ 양도새/ 바람주제/ 놀/ 모든 제주 바람들 한데 모여 사는 곳”-(‘허공’). 여러 종류의 바람 이름이다. 이 가운데 특히 ‘도껭이’는 어떤 바람의 이름일까? ‘도껭이’는 ‘도(回)+ㅅ+개(疥)이’로 분석되는데 ‘회오리바람’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동풍을 ‘샛킞름’, 서풍을 ‘놋킞름’, 남풍을 ‘마킞름’, 북풍을 ‘하늬킞름’이라 하고, ‘하늬킞름’도 다시 세분하여 ‘서하늬·놉하늬’로 나누기도 한다.제주의 명물 음식 중에 몸국이라는 게 있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다가 뭍으로 올라와 한기를 가세며 몸국 한 사발을 먹으면 저절로 온몸에는 화사한 봄이 깃든다. 몸국에서 ‘몸’은 모자반의 제주도 방언이다. 돼지 뼈를 고아 끓인 국물에 모자반을 넣은 제주 음식이다. 제주도 시인 허영선은 ‘몸국 한 사발’이라는 시에서 몸국을 요리하고 먹는 제주사람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창밖에 폴폴 눈 내리는 날/그리운 바다가 화악 달려들었다/단 한 숟갈에도 몸을 살려주던 그것/돼지뼈 접쩍뼈/한번 질펀하게 우려내 국물을 내고/그 말갛게 싱싱한 바다의 몸 살짝 밀어 넣어주면/순식간에 덮쳐오던 미친 허기/그 위로 접착제처럼 끌어당기던/배설까지 베지근 보오얀 홀림/아무것도 걸칠 것 없는 바다의 식탁/몸이 ㅁ·ㅁ을 먹다보면/저절로 몸꽃 피어나던/성스러운/그 한 사발/몸국”-허영선의 ‘해녀들’. ‘접짝뼈’, ‘배설’, ‘벶근’, ‘ㅁ·ㅁ’과 같은 제주어로 감싸 안은 ‘몸국 한 사발’을 바다의 식탁에 올려놓고 허기진 배를 채울 몸국 한 숟갈을 떠먹어도 확 바다가 달려든다. 온 몸에 퍼지는 몸국은 제주인들의 성스러운 몸(身)이다. 바닷바람에 지친 마음을 달래는 혼이다. 방언의 힘, 몇몇 제주 단어가 살아 퍼덕이는 시에서 제주 사람들의 역동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2024-03-25

서남 전라도 서사시 ‘그라시재라’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여항의 사람들을 탐구한 언어 풍경화가 한 권의 서사 시집으로 꾸며졌다. 조정 시인의 ‘그라시재라’(이소노미아, 2022)에서는 전라도 서남지방 할머니의 목소리가 벼랑 끝에서 살아남은 하얀 민들레 씨방의 솜털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한 섞인 억양과 까칠하고 쉰 목소리의 사투리 시편을 조정 시인이 서사적 조정자로 개입하여 유장한 한 권의 신화같은 시집으로 묶었다. 전라도 할머니들의 어둔한 사투리 문법은 한 많은 삶을 끈질기게 버텨내며 살아남아 당신들의 말이 표정이 되고 시가 되었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는 그대로 그림이 되었다. 판소리가 되었다.산속에서 울려오는 산바람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간이 알맞게 밴 방언 속에는 죽음보다 더 짙은 비극 속에서도 간간이 희망의 목소리가 끼어있음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어떻게 할머니들의 일상적 회상의 언어가 시가 될 수 있을까? 표준어로 변복도 하지 않은 차림으로 이 세상으로 걸어 나왔을까? 평생 이름대신 태어난 마을의 지명으로 가려진 존재였던 여자들,‘진주떡(댁)’, ‘순천떡이’, ‘화순떡이’, ‘보성떡이’로 서로 호명하는 시적 화자의 언어를 받아쓰기해 낸 조정 시인은 행간과 행간에서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여러 첩의 병풍 속 풍경화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념과 권력의 헤게모니 쌈박질로 굴곡진 현대사에서 검게 물든 핏빛 전라도 여항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진다. 때로는 역사의 흔적이 되어버려 두려운 기억들을 그리움이나 슬픔의 언어로 담담히 깨워내기도 한다.‘그라시재라’는 ‘그러믄요’, ‘그럴 수밖에요’라는 체념이 담뿍 담긴 전라도의 관습적 언어다. 동네마다 사람마다 같고도 다른 모양으로 남아 있는 깊은 상처가 이 한마디에서 이렇게 크게 울려 나오다니? 상대 존대의 화법 ‘그라시재라’는 겸허하고 수수한 전라도 토속의 정서와 태도를 한마디로 보여준다. 가래침 소리가 섞인 할머니의 낮은 자세, 내 뜻보다 그대의 뜻을 더 존중한다는 전라방언의 울림이 전라도에서 지리산을 넘어 경상도까지 넘어 온다. “천지에 아는 사램 한나 없는 디서 머슬 보라꼬 살것능가?”의 어말어미 ‘살것능가’는 경상도의 ‘살겠능개’, ‘살겠능교’로 이어져 있다. 방언은 경계를 허물고 손에 손잡고 이어져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원래 다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다만 지역과 계급을 나누어 차별하는 동안 달라졌을 뿐이다. 몸속에 숨어서 핏줄처럼 살아 있는 할머니의 방언은 원래 한가락이었다. “어야 덕진떡(댁) 자네 친정엄니는 고향이 으디시당가?/예 금정이라 어째 그라쏘?/보 성님도 이상하셌지라? 나허고 같은 생각 하셌고만이/덕진떡 엄니 말씨가 쪼깐 귀에 설드랑께요./갈에 우리집 콩 뚜듬서 이약헌디/항, 항허고 답을 허시등만/매 한말이이다 허고 봉께/아먼 그라재 헐 대목이서/항, 항 그라시드랑께”‘새야 새야 파랑새야’란 시에서 같은 전라도라도 친정이 달라 서로 말씨가 조금 다른 것을 느끼는 시적 화자들의 대화다. 서남전라방언에서는 동의한다는 의사 표현으로 ‘그라재’로 말하지만 동남전남방언을 쓰는 덕진댁의 말은 ‘항’, ‘항’이니 말씨가 서로 귀에 설게 들린 모양이다. 이 말이 태백줄기를 넘어 경상도로 들어서면 ‘하모’, ‘하머’로 나타난다. 방언학을 전공한 나에게 조정의 이 시편들은 마치 방언지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가야와 제주지역에서만 ‘파리’를 ‘포리’하고 ‘팔’을 ‘폴’이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전라도에서도 ‘남’을 ‘놈’이라 하니 ‘아래 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징하게’(매우, 찡하게), ‘보타지것네’(몸이 마르네), ‘느자구’(싹수), ‘끼께’(끌리어), ‘뿌사리’(황소), ‘태끼래지다’(그릇 이가 빠지다)와 같이 전라도 방언사전 없이는 해독이 어려운 방언이 난무한다. 경계의 표지도 없고 무지해 보이기만 하는 변두리 기층민들의 말씨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 묘하게 정겹고 살가운 말씨들에서 역사의 흔적과 사건의 서사가 바람처럼 드나든다. 오래된 나무에 깊이 박힌 옹이, 말의 옹이가 차진 송진을 뿜어내듯 우리 말결을 윤이 나도록 눈이 부시도록 풍요롭게 해 주고 있다. 이 책의 편집자의 말을 빌면 방언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표준말로 통일되기 전에도 이미 전국을 자유롭게 흘러다니고 있었다.” 조정 시인은 이 시집으로 표준어라는 한 가지 꽃만 피어있는 언어의 독방이 아닌 다채롭게 화석화된 방언의 깊은 지층을 우리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았다.

2024-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