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온갖 사물과 사람들이 사물과 교감하는 정서들이 스멀스멀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이 손수 만들어 썼던 물건들이 모두 대량 생산으로 흔해졌다. 그것도 도가 넘어선 대량생산의 결과 옛것들은 모조리 우리 주변을 떠나고 있다. 사라져가는 물건들은 정보화 처리로 디지털 속으로 숨어들면서 우리는 빠른 속도로 잊어버리고 있다.
삶의 격식과 엄숙함을 가르쳐주었던 제의(祭儀)도 사라져 버렸다. 동네 당산제, 성황당제에서부터 집안의 온갖 가신제와 부모와 조상의 제사마저 단촐해지더니 어느덧 사라져 가고 있다. 또 어린 시절의 구석구석에 도깨비나 귀신들이 숨어 있었다고 믿었던 성령이 어디로 다 숨어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페미니즘이 강화되면서 에로스 종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들의 우울한 삶을 물리치도록 힘과 용기를 주던 에로스의 증발로 신생아 출생률이 전 세계에서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시간의 향기라고 할 수 있는 기다림의 미학을 상실한 시대이다.
우리는 새로운 삶의 꼴이 만들어낸 디지털의 터널 속에서 점점 더 외로운 혼자가 되고 있다. 잃어버린 옛 물건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우리들의 정서와 삶의 품격, 시간의 향기 에로스의 환희를 어떻게 호명할 수 있을까? 사물의 소멸과 함께 덩달아 사라져 가는 언어, 변두리의 방언들을 시로 불러낸 아름다운 시인들이 여기에 있다. 허림 시인은 ‘봄날의 방언’에서 “그려 방언이며 헛것이 보이겠나”라며 넋두리를 한다.
방언은 이젠 헛것처럼 눈에 들어오질 않는 세태가 되었다. 그의 시편에 올올이 박혀 있는 강원도 방언은 소리로 이어진다. “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리이요오 아리라앙 고오개에르을 너머간다” 한글이 표음문자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유장한 강원도 아리랑이 봄이 되니 그리운 꽃이 피듯 목에 걸리는 강원도 사투리 가락을 옆에 끼고 터억 나타난다.
시인 허림의 시각에는 흘러간 시간이 보이고 그 흘러간 시간 속에서는 잊혀진 사물들의 생김새와 소리와 모양과 맛의 느낌이 이미지로 전환한다. “다시 돌아올 것처럼 떠난 자리마다/나무들이 죄인처럼 서서 기다리고/나이테며 잎맥마다 숨겨둔 빛빛의 단풍이 붉었다/나무진골에 묻어둔 전설은 조금씩 잊혀져갔고/능이버섯이나 따라 갔다 따온 개복상 먹으며/벌거지처럼 기어나오는 기억을 잇대보다가/흘러간 신간들은 다 어디로 갈까/우두망찰 바라보는 눈시울 너머/잠행했던 이름들 흩어지고”-허림의 ‘흘러간 시간들은 무엇이 되었을까’
시인은 ‘개복상’, ‘벌거지’를 방언으로 꽂아 넣으면서 그리운 시간 속으로 회전한다. ‘우두망찰’ 바라보는 그리움이다. ‘조풍냉이’라는 시에서는 메좁쌀로 빚은 강원도 떡을 불러온다. “보실보실 쪄진 조풍냉이/입안에서 몽글몽글 차지다//어른들 밤바치로 잔치 보러 간 눈먼 날들/젖멍이 도톱해지던 여서너 살 섣달 하순 날이 샌다/, ‘조풍냉이’처럼 잊혀진 젖망울이 도도롬해지던 열서넛 그 시절 여자아이들이 지금 다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그립다. 외마디 지르듯 생뚱한 방언들을 흩어놓은 어설픈 방언시가 아니라 정겨운 고향의 소리다.
가장 오밀조밀한 방언은 지명에 많이 담겨 있다. 허림 시인의 과거 회상법 가운데 고향의 사투리 지명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한 시편은 ‘골말 산지당골 대장간에서 제누리 먹다’라는 작품이다. ‘제누리’는 ‘곁두리’의 강원도 방언으로 농경문화시대 일하는 사이사이에 간식처럼 먹는 음식인데 방언 분화형이 매우 다양하다. “골말, 산지당골, 복골, 붉은데이, 버덩말, 섬터, 아랫비랑, 늘원”등의 지명에서부터 입에 착 달라붙는다. 엄씨 대장장이가 시골에 와서 낫이며 괭이며 벼름하는 대장간에서 제누리를 먹는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농경시대 대장장이를 찾아와 농기구 벼름하다 마을 노인들과 함께 나누어먹는 ‘제누리’의 입맛과 추억은 마치 한 폭의 김홍도의 그림같다. 그런데 이 시에 숨겨놓은 서사적 장치는 풀무질하는 풍구를 시루는 새각시와의 인연이다. 풀무질하다 불길에 붉게 익어 올라 볼이 붉어져 수줍어하는 색시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잊혀져가는 사물들과 정감들을 이렇게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잊혀진 사물들이 품었던 이름과 사물들이다. 방언은 그 오래 묵은 불씨를 일으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