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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어와 방언

등록일 2024-11-25 19:21 게재일 2024-11-2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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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대한제국이 기울어지면서 신문명과 함께 서구 문학도 외세의 바람을 타고 한반도로 밀어닥쳤다. 문학 양식은 옛날 운문체 형식의 언어와 문자에서 벗어나 우리말과 우리 글자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되 새로운 서구의 문학 양식에 맞춘 문학 형식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최남선, 이광수와 같은 문인들이 개화 문물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문학 양식으로 시나 소설을 짓기 시작하였다. 일부에서는 우리의 글과 말을 갈고 닦으며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전신)는 표준어 사정, 맞춤법의 정리, 외래어 표기 등 우리말과 글의 규범을 정립하는 일이 곧 나라를 수호하는 일이라며 우리말큰사전 편찬 작업에 힘을 모았다. 정확하게 1933년 맞춤법통일안이 만들어진 그 이전의 시공간 속에서 활동한 20~30년 사이의 문학 활동을 한 이들에게는 오늘날과 같은 맞춤법의 기준이 아주 희미했다.

우리 근대문학은 일제침탈이라는 정치적 역경 속에서 형성되고 전개되었다.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문학의 표현 매체인 우리말글을 마음대로 갈고 다듬을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문학은 우리말을 세련되게 꾸며 보급시키려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다. 구어체가 문학작품 속에 잘 발달되지 않았던 상태였다. 곧 고전시가와 소설들은 대체로 문어체였는데 그것으로는 현대소설을 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문과 대화체를 분리해서 구어의 속성을 반영하는 단계에서는 지역 방언이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현대시 역시 음수율에서 벗어나 리듬과 운율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문어체보다 구어체가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고전문학과 달라진 근대적 문학 언어의 사용 환경이 구어체와 문어체의 결합이라는 문학 언어로 탄생되었지만 표기 기준은 기껏 성경책 표기나 한글신문 기사나 잡지의 글쓰기 표기법을 흉내낼 정도였다. 근대문학 초창기에 우리 시인 작가들은 모두 글쓰기 방식에 대한 새로운 지향점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김동인은 훗날 ‘약한 자의 슬픔’을 쓸 때 “나는 자라난 가정이 매우 엄격하여 집안의 하인배까지도 막말을 집안에서 못쓰게 하여 어려서 배운 말이 아주 부족한데다 열다섯 살에 외국에 건너가 공부한 만치 조선말의 기초 지식부터 부족하였고 게다가 표준어(경기말)의 지식은 예수교 성경에서 배운 것뿐이라 어휘에 막히면 그 난관을 뚫기는 아주 곤란하였다. 썩 뒤의 일이지만 그때 독신이던 나더러 경기도 마누라를 아내 삼으라 권한 일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정확한 조선어(표준어)를 좀 더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경기도나 서울 출신의 아내를 얻으라는 충고를 들을 정도로 문인의 고뇌가 잘 드러난 내용이다.

최남선, 이광수, 김동인, 주요한, 김억, 이상화 등 20년대 이전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말의 표준어와 방언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감각을 가지면서 여러 독자 또는 대중에게 신선하게 느껴질 말과 문장도 아직 분명하게 확립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 당시 조선어학회의 표준어 맞춤법 제정을 위한 노력도 매우 중요했지만 ‘창조’, ‘장미촌’, ‘백조’, ‘폐허’ 등의 동인지 활동을 통해 당시 문인들이 표준어로 공식화할 수 있는 말을 골라 쓰고 문장을 만들어 대중에게 다가갔다.

근대 문학어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문인들의 시도가 우리 어문의 근대화와 표준화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시와 소설은 아주 강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의 시대에 문학 작품은 가장 큰 문화 교양을 알려주는 매체였고, 신지식을 습득하는 수단이었으며, 새로운 글쓰기와 글 읽기의 기풍을 확립해 준 셈이다.

1910년대 말에서 20년대 초에 걸친 시인과 작가들의 언어를 당대의 문학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근대문학 초창기 우리 문인들은 아직 우리말글의 표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서구의 양식에 발을 맞춘 문학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 후,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자, 한강은 많은 선배문학인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했다. 한강이 읽었던 선배문학인 또한 1920년대 현대문학 선구자들이 문학적 글쓰기의 힘든 길을 닦아낸 덕분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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