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소월, 상화 등 20년대의 대표적인 근대 시인들은 그 시대의 다른 시인들에 비해 특별한 시적 성취를 이룩해 내었다고 평가된다. 그 이유로 시대 의식이 뛰어났다는 점과 토착어 지향의 시어를 사용한 것을 손꼽을 수 있다. 그들의 시작품은 서정성이나 시적 리듬을 살리기 위해 한자어를 피한 대신 토착어 지향을 뚜렷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20년대 말에서 30년대에 걸쳐 우리는 새로운 시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에게 있어서도 토착어 지향성은 한결 두드러졌고 시의 세련성은 배가되었다.
1930년에 발간된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은 박용철을 비롯하여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 신석정, 이하윤 등이 그 중심적인 작가였다. 그들은 새로운 시어의 연마와 세련된 시상으로 세칭 ‘기교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군의 시인들이다. ‘시문학’파로 알려져 있는 시인들에게서 우리는 근대시의 세련미를 갖춘 시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김영랑이나 박용철은 순수한 토착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토속의 울림을 가진 리듬을 확보했다.
‘시문학’의 동인이었던 정지용은 현대시문학사에 매우 눈부신 시의 자취를 남겼다. 1927년에 발표된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는 뛰어난 서정적 시와 노래로서 우리의 눈과 귀에 매우 익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질화로에 제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봄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이 시에 나타나는 토착방언은 시인이 의도적으로 지향했던 고향의 그리움을 불러오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서정적 운율을 유효하게 맞출 수 있는 의도된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시에 등장하는 토착방언은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향에 대한 추억과 신화에 대한 믿음을 환기시켜 준다. 어린 시절 자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모티브가 방언으로 나타나 한결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토착 방언은 본래 민중의 말이다. 또 외래어나 한자어처럼 어른들만의 말이 아니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말이다. 방언 시어는 잃어버린 낙원, 곧 고향에 깃들어 있던 말이기 때문에 시의 모티브와 각별한 조화를 이룬다. 고향의 재발견이 토착 방언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시인의 자기동질성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정지용은 우리 현대시문학사에서 소중하고 견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정지용은 ‘문장’지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1939년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발굴하여 등단시켰다. 이로써 30년대 순수 ‘시문학의 전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되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壁)’이라는 작품으로 등단한 미당 서정주의 토대를 마련해 준 것도 ‘시문학’ 동인들의 영향이었다. ‘시문학’파의 토착어 세련성에 대한 강력한 반발에서 시적 출발을 했다고 할 수 있는 미당 서정주조차도 처녀 시집 ‘화사집’에서는 가급적 한자어를 배제한 덕분에 한층 더 높은 시적 성취에 도달하였다.
서정주의 ‘자화상’이라는 시를 살펴보자.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파격적인 호소력을 가진 ‘자화상’의 첫 부분이 이렇게 토착적 고유어로 조직되어 있음에 반해서 한자어를 의도적으로 무절제하게 사용하고 있는 ‘정오의 언덕에서’, ‘웅계’, ‘문’ 등의 작품은 오히려 시적 설득력을 잃고 있음이 역력해 보인다.
훌륭한 시는 시인의 작가 의식과 함께 고양된 감정의 통합된 산물이다. 시인의 몸에서 울려나오는 시어로 꾸려낸 텍스트가 청각과 시각의 공명을 일으키는 효율적인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시어로서의 방언의 효용성을 확인할 수가 있다. ‘시문학’파에서 ‘청록파’로 이어지는 서정의 시적 물결을 일으킨 일군의 근대 시인들에게 토착적인 방언은 시작(詩作)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재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