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허수경의 ‘진주 저물녘’

등록일 2024-04-22 18:58 게재일 2024-04-23 16면
스크랩버튼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허수경 시인은 고고학자가 되고 싶어했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고대동방문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허 시인은 유적발굴을 위해서 1년의 절반 이상을 이집트와 시리아와 이라크로 떠돌며 살아왔다.

유목민같은 삶을 살다가 독일에서 얻은 암으로 이승을 떠났지만 그녀는 자신의 시를 오래된 유적처럼 이 땅에 남겨 두었다. 녹슨 청동 구릿빛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그녀를 기리는 이는 더 늘어날 것이다,

허수경은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에 그의 꿈을 소리와 문자로 새겨두고 우리곁을 떠났다. 시집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진주 저물녘’이라는 시에서 그는 서쪽 바람이 일으켜 놓은 황혼의 고향을 시의 그물로 당겨놓았다. 이 시에는 경남 진주의 토박이말이 걸쭉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경상도 전역에서 두루 쓰는 방언인 ‘문디’를 만나니 반갑기도 하다.

방언은 추상화된 보편 언어가 아니다. 관념과 같은 무중력의 언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방언은 현실 세계에서 지역에 따라, 계급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파생되고 갈라지다가 그 ‘곳’에 자리를 차지한 민들레 씨방과 같은 존재다. 그러면서 방언은 공동체 안에서 그들끼리만 소통함으로써 내부적 결속을 강화해주기까지 한다. 표준화된 무채색의 언어인 표준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대상과 사건의 신비로운 숨결까지 방언에 깃들어 있다.

“기다림이사 천년같제 날이 저물셰라 강바람 눈에 그리메 지며 귓불 부콰하게 망경산 오르면/잇몸 드러내고 휘모리로 감겨가는 물결아 지겹도록 정이 든 고향 찾아올 이 없는 고향/문디 같아 반푼이 같아서 기다림으로 너른 강에 불씨 재우는 남녘 가시나/주막이라도 차릴거나/승냥이와 싸우다 온 이녁들 살붙이보다 헌출한 이녁들/거두어나지고/밤꽃처럼 후두둑 피어나지고”, -허수경 ‘진주 저물녘’

허수경은 스스로 “남녘 가시나”라고 고백한다. 가난에 쫓겨 어디 주막의 작부노릇이나 할까보다고 생각하다가 “기다림으로 너른 강에 불씨 재”운다.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송기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허수경을 두고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에게 버림받고, 그렇게 버림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어, 드디어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을 제 살붙이로 여기는 진주 남강이나 혹은 낙동강 하류의 어느 가난한 선술집의 주모를 떠올렸다”고 표현했다.

좀 더 깊이 성찰해 보면 일본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 물에 뛰어든 정열의 기생 논개를 연상하다가 진주 남강 너른 강 같은 마음에 기다림의 불씨로 그 망상을 손질한 것일 것이다. 진주 시가지를 휘돌아가는 남강과 일본의 침략군 적과 싸우다 죽은 숱한 양민들의 피가 저녁노을처럼 붉게 물든 진주성의 저물녘과 역사성이라는 그물의 코로 이어있다.

가끔은 폐병에 걸린 남성과 사랑에 빠져보고 싶은 내면적 충동을 시로 쓴 ‘폐병쟁이 내 사내’에서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라며 20대 젊은 여성의 내면적 욕망을 변주하고 있다.

“산가시나가 되고 백정집 칼잽이가 되어 폐병에 효험이 있다는 뱀과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선한 물같이 맛깔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어디 내 사내뿐이랴”에서는 눈빛이 타오를 듯 고혹적인 사내를 위해 헌신한 우국충절의 논개가 되고 싶은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나의 어머니, 아니 나의 할머니부터 나에게 이어 내려온 강렬한 정념을 포효하고 있다.

폐결핵이 걸린 사내라도 잎차같이 함께 눕고 싶어한다. 후후 불어 더운 보양국물 먹여 가며 그 사내가 흘린 식은땀을 후후 마시고 싶다. 그 여인 슬픈 눈길로 사내를 내려다보며 땀과 눈물 닦아줄 것이라는 환영에 빠진다.

이상규의 詩와 方言이야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