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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어의 깊은 바다, 전라도 방언

등록일 2024-04-08 18:12 게재일 2024-04-0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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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전라도를 흔히 예향이라고 한다. 전라도 시내 엔간한 음식점에는 품격 있는 그림 몇 점은 걸려 있다.

전라도 사람과 만나 한 잔 술을 나누다 보면 절로 흥겨운 가락이 쏟아져 나오고 그 중 누구든 판소리 한 자락 정도는 풀어낸다. 어쩌면 판소리에 담겨 있는 애절한 가락은 전라도 방언이어서 제 맛깔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전라도에서는 장음을 이중모음으로 소리내어 아주 끈끈한 부드러운 정감으로 판소리에서 전라도 소리미학을 담아낸다. 판소리가 전라도에서 발달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전라도 방언의 특징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전라도 방언의 말씨는 입을 적게 벌리고 발음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춘향전의 한 구절을 들어보자. “춘향이 깜짝 놀래, “향단아, 저 건너 누각 위에 선 것이 누구냐?”/“통인 서고 방자 선 것 봉게, 이 고을 사또 자제 도련님인개비요.”/춘향이 놀래어, “벌써 나왔겄구나.”/“버얼써부터 나왔어라우.” ‘보니까’가 음절 사이가 뭉쳐져 ‘봉께’로, ‘갑이요’가 움라우트 실현되어 ‘개비요’, ‘벌써’가 장음의 음절 늘이기로 ‘버얼써’, 종결어미가 ‘왔었어요’가 ‘왔어라우’로 실현된 남부전라도 종결어미는 노래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거시기’만 알아도 전라도 방언을 거의 다 배운 셈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채만식의 ‘천하태평춘’과 ‘탁류’에는 “아니야 저 거시기 서울아씨 시집 안보내우?”/(‘천하태평춘’)과 “저 거시기 조사나 잘 좀 해보았수?”‘탁류’)와 같이 ‘거시기’가 곳곳에 보인다. ‘거시기’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명사로서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때, 그 이름 대신으로 쓰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감탄사로서 “하려는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얼른 말하기 거북할 때, 그 말 대신으로 쓰는 군말”의 뜻을 가지고 있다. 전북방언에서는 ‘거시기허다’로 동사를 대신하는 용법으로도 쓰인다. ‘거시기’는 명확하지 않은 사물이나 사실을 말할 때 쓰이고, ‘거시기허다’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나 동작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전라도 구어 가운데 대표선수라 할 수 있다.

채만식의 소설에는 ‘돌라먹다’(속이다), ‘갱기찮다’(괜찮다) 등 전북 군산 방언, 혹은 채만식의 개인 방언(idolect)이 작품 속에 소복하게 담겨져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아리랑’, 이병천의 ‘모래내모래톱’과 최명희의 ‘혼불’에 나타나는 ‘달챙이’(허기는 달챙이 숟가락 하나라도 빼놓고 가면 거그서 아쉬울팅게. -‘모래내모래톱’, 놋숟가락 닳아진 달챙이가 거꾸로 꽂혀 있어 이상해 보인다.-‘혼불’)는 ‘놋쇠나 무쇠로 만든, 끝이 상당히 많이 닳은 숟가락’을 의미한다.

이 숟가락은 누룽지를 긁을 때 주로 사용하였고, 닳아서 쓸모가 없게 되면 문고리에 거꾸로 꽂아서 열쇠처럼 사용하던 것이었다. ‘매급시’, ‘매럽시’(맥없이), ‘매시럽다’는 “솜씨가 매시랍다, 손끝이 매시랍다”는 표현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걸로 보아 ‘솜씨가 좋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전라 방언에는 “꽤 많다”라는 의미로 ‘솔찬하다’라는 낱말이 있다, 전라 방언의 대표적인 낱말이다. 솔찮다’는 전라도 작가들이 쓴 문학작품에 전라도답게, 전라도스럽게 심심찮게 보인다.

장일구는 ‘혼불의 언어’(한길사)에서 요절한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에 담긴 절절한 전라방언을 가려내어 분석하고 있다. “근디 누구는 남원산성 그 거창헌 거이 입 안으로 옴시레기 들왔다고 허고이.”, “사랑마당에서 우세두세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상머슴이 고한다.”와 같이 ‘옴시레기’(모두, 전부), ‘우세두세’(조용하다, 두런두런)와 같은 찰진 전라도 특유한 방언은 대화체에서뿐만 아니라 지문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몇 년 전 작고한 칼럼니스트 김서령의 ‘김서령의 家라는 수필집에는 전남 나주 죽설헌에 살고 있는 박태후 화가와의 대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봄에 서령 씨가 만지던 배꽃이 자라서 된 열매요. 쌍다구는 시퍼래도 맛은 괜찮을 거요, 먹고 더 달라고는 마쇼, 잉.” 일상의 생생한 구어체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쌍다구’(생김새, 또는 생긴 모양)나 문말 어미 ‘마쇼, 잉’에서 전남 방언 특유의 맛깔을 느낄 수 있다.

비음을 섞어 길게 끄는 전라방언을 들으면 백제어의 깊은 방언고고학의 심해에 풍덩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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