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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춘의 맛깔나는 전라도 방언시

등록일 2024-05-13 19:40 게재일 2024-05-1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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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2009년 10월 23일 ‘문학어의 생명’ 주제로 2009 서울문학인대회가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서울(이사장 김후란)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기조발표자였던 필자는 “모든 창조적인 문학 언어나 방언은 고도의 표현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며 방언의 효용성을 강조했다. 서정춘의 시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을 인용하며 “방언의 사용은 표준어라는 규범에서 벗어남으로써 오히려 더욱 풍성해지고 또 한껏 무게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며 “안일한 감상주의나 자아 분열적 글쓰기 방식이 아니라 당당하게 전라도적 언어풍경의 윤기를 발하게 해주는 문학의 언어는 주술이요, 언어의 위반”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당시 서정춘의 시에는 순창 토박이말이 맛깔나게 숙성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시인의 시선이 지역 정서에 충분히 곰삭아 있어서 궁상스럽지 않다.

그의 시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을 한 번 살펴보자.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어머니는 어덕배기 구뎅이에 호박씨를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기칼 떽기칼로 나물 캐고 있고./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나는/나는/나는/몽당이 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

이 시는 ‘봄, 파르티잔’, ‘캘린더 호수’ 시집에 실려 있다. 한국시인협회가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엮은 100명의 시인들이 쓴 방언시집 ‘요엄창 큰 비바리야 냉바리야’에도 실려 있다. 평범한 시골의 일상 풍경이 펼쳐지다가 갑자기 몽당이손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을 빌려보려고 재를 넘는 시적자아가 등장한다. 농촌 고유의 정취를 진하게 풍기는 방언인 ‘남새밭’은 채소밭, ‘찌끌다’는 끼얹다, ‘어덕배기’는 언덕, ‘떽기칼’은 공식 사전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화살촉처럼 만들어진 칼을 말한다. 이 칼은 농촌에서 부엌의 식칼, 들판의 낫 다음으로 다용도로 많이 사용한 칼이다. ‘몽당손’은 사고로 손가락이 잘린 손이다. 한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정순이가 등장해 여한 없는 하루의 삶을 시작한다. 안분지족이다. 가난이 몸에 익은 문학 소년은 백석시집을 빌려보려 고개를 넘는다. 읍내 서점으로 새 책을 사러가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빌리러 가는 길인데도 그 뒷모습은 너무나 행복에 겨워 보인다. 동구 밖에서 깨금박질하다가 이내 꼬불꼬불 산길 돌고 돌아가며 땀방울 훔쳐내곤 하지만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지금 우리시대보다 더 가난하고 투박한 삶으로 하루살이를 이어가던 시절의 풍경화다. 그 시절 풍진세상의 농촌 풍경인데도 정겨운 미소와 희망과 추억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서정춘 시인은 군더더기 없는 단어로 함축적인 시를 선보이면서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이 연출된다. 특히 전라도 방언을 통해 농촌 풍경과 추억과 친근감을 동시에 재현했다. 마치 ‘TV문학관’이나 ‘전원일기’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느낌을 준다.

방언의 풍경 속에는 과거를 호명하는 기호가 삽입된다. ‘꼭지’라는 시의 주인공인 꼭지는 ‘몽당이손 아재비’와 같이 우리의 평범한 이웃사람이다.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걷다가 또 쉬는데/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노랗다./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 떨어져나가듯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이 시 한 복판에 핀 노란 민들레가 시골 풍경화를 불러온다. 노란 민들레에서 못 먹어 부황 든 아이 꼭지의 얼굴을 연상하고 못 얻어먹어 말라비틀어진 젖꼭지를 주전자 뚜껑 꼭지로 상상한다.

서정춘 시편의 미학은 절제미와 함축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류’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하얀 순천의 음결이 섞인 부사 ‘하르르’라는 어휘는 “미풍에 단풍을 휘날리는 가을의 비명이 은닉되어 있”는 것 같다. 비단옷 스치는 듯한 의태어 ‘하르르’가 안겨주는 섬세한 느낌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여울 물소리’를 만나 함께 어우러지며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감각을 자극하며 절묘한 효과를 획득한다. 이렇듯 서정춘은 서정주에 버금갈 만큼 토속어를 가장 잘 활용하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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