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모국어가 단일하고 균질한 소리로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 다성적인 방언으로 엮어져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울 일이 아니다. 홍경나 시인이 시의 언어로 발성하는 모어는 소통되는 장소를 확대하려는, 시로 된 씨앗을 푸른 하늘에 날린다. 시집 ‘초승밥’(현대시학, 2022)에 담아낸 모어의 우주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하릅강생이 복실일 후치다가/욜로졸로 서리병아릴 후치다가/개구멍바지 꿰찬 용남이는 가을볕 따신 마당귀/아물 따다 무더기 똥 내깔기고/똥 묻은 똥구녁을 하늘로 치켜든다.”(‘눈썹담’) 이 시에서 방언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하룻강아지가 천방지축 까불며 마당을 뛰어다니는 꼴이나 어린 용남이가 푸짐하게 똥을 싸고 그것도 모자라 궁둥이를 하늘로 치켜드는 해맑은 모습을 실감나게 살려내기는 어려웠으리라. ‘후치다(내쫓다)’, ‘욜로졸로(요리조리)’, ‘아물따나(아무데나)’처럼 토속적인 경상도 방언 낱말에 묻어있는 풍경화가 다정하다. 방언이 가진 시간성의 이중성이라고 할까 과거로 되돌려 주는 기억의 환기장치로서도 멋진 구실을 해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모어를 최대한의 시속으로 투입한다. 기억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 간의 호응을 통해 과거로의 기억력을 되살려내는 시적 확장을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주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성의 회귀인 동시에 장소에 대한 기억과 마주치며 완성된다. 방언이 호명해 주는 장소, 혹은 대상이나 사건과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품고 있다. “사창댁 우리 할매/콩지럼 내릴 오리알콩/소반다듬이 하시네/얽은 콩 쪼가리 콩 벌게이 슨 콩/밤결 내 고르시네//사창댁 우리 할매/콩지럼시루 쪼록쪼록 바가치물 치며/한 치 두 치 콩지럼 내리는 소리 들어라시네/오구구 오구구 뿌리 트는/긴 짓소리”(‘콩지럼’)이라는 시는 유년의 기억들을 불러온다. 할머니가 콩나물을 기르기 위해 콩을 고르는 일부터 시루에 물을 주며 애지중지 키워내는 기억 속의 풍경화에서는 그 풍경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방언의 악센트와 리듬을 타고 있다. 시는 노래여야 한다. 리듬을 타며 흥얼거리며 화를 참아내는 할머니의 ‘몸짓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콩지럼’(콩나물)이나 ‘오리알콩’(토종 콩나물콩), ‘소반다듬이’(소반에 곡식을 놓고 고르는 일)라는 독특한 방언들이 배치되지 않고서는 도무지 그 풍경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초가집 부엌에서 올라온 검은 검정이 천장에 스며들어 가무스럼한 방안에는 할머니의 냄새까지 배어있다.
홍경나 시인의 경북 방언은 현재의 경상도의 모습이나 풍경화만 그리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한 회생 장치로서 방언을 이용하고 있다. 그 속에는 옛날 소리와 삶의 풍경들이 서사적인 구성을 가지며 때로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의 풍경들을 조명해 주기도 한다. ‘개보름쇠기’는 우리 고유의 풍습 가운데 하나인 ‘개보름’에 얽힌 이야기다. “사대부 팔대부 하동 포수 앞세운 농악대 아제들이 대청지신 큰방성주 조왕지신 철용지신 우리 집 지신풀이 돌 땐 목줄을 닿는 데까지 끌고 나와 덧배기 반덧배기 별달거리 다드래기로 뜀질해쌓다가 싱둥겅둥 윷가치 노는 백구마당 모닥불 불똥 구경하다 백지로 불똥재 앉은 빈 밥그륵을 복실이캉 지캉 서리 연분홍 똥꼬녁을 핥는 거맹키 밝게 달강달강 딧설거지하는 거맹키 밝게 핥아쌓다가 둥두렷이 장뚝산을 돌아 중문 지붕만댕이께 넘쳐 오는 정월 보름달을 짖었다.”(‘개보름쇠기’) 경상도에서는 개가 너무 잘 자라서 살이 찌거나 파리가 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대보름이 뜨기 전까지 하루 종일 굶긴다. 시인은 이 서사 구조에 공동체적 무의식에서 소환한 농악놀이의 풍경과 풍물소리도 섞어 넣었다. 너무나 리얼하다.
시인의 무의식에는 온갖 오래 묵은 기억들이 잠재해 있다. 방언의 음성으로 호명하는 순간 큰물 밀려들듯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시인을 과거로 호명해낸 방언의 미학이 여기에서 발화하기 시작한다. “불 간 자리엔/얼마나 두들겨 댔는지/생목 꺾인/새까맣게 그슨 청솔가지만 남았다//집집마다 오줌 싸는 꿈을 꾸었다”(‘쥐불’)에서 유년 시절의 풍경이 생생할 뿐이다. 시의 미학적 본질인 ‘낯설게 하기’는 과거의 기억을 방언으로 호명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경북 언어의 보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살아있는 ‘말’들을 ‘시’로 재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