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정주 출신인 김소월의 시에는 섬세한 향토 방언이 800여 개나 결 고운 무늬를 이루어 향토적인 전통 가락과 장단과 어울린다. 소월은 20년대의 문학 일상어와 평북 방언을 구분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일상어로서, 모어로서 방언을 사용하였다. 소월은 시 작품에 평균 2개 이상의 방언 내지 방언 변이형을 사용하고 있을 만큼 방언을 풍족하게 시에 수용하였다. 방언을 표준어와 대립되는 관점에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어로 인지하였고, 자연스럽게 시어로 사용함으로써 가장 전통에 근접한 서정시의 최고봉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소월이 사용한 북방의 언어는 개여울에 흐르는 서정적 울림의 샘처럼 마르지 않고 우리들에게 감동을 전해 주고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매문사, 1925)에 실렸던 ‘기억’이라는 시 1연에서는 무려 5군데나 의미 해석이 어려운 방언 시어가 나온다.‘싀밋업시’, ‘실벗듯한’, ‘머리낄’, ‘슷고’, ‘잔물’, ‘해적이다’, ‘축업은’, ‘시메산골’, ‘하롯길’과 같은 시어는‘표준국어대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은 고어이자 평안도 방언이다. 향토색 짙으며 이미 소멸의 길로 들어선 이런 시어는 해석하기가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싀밋업시’는 ‘멋쩍게’라는 의미의 평안 방언인데 ‘평북방언사전’에도 보이지 않아 그 의미를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싀멋업시’는 소월이‘팔베개 노래조’의 서사에서와 ‘시초’에서 사용한 시어이다. “무슨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망연히 있음”을 뜻한다고 이기문 교수의 설명을 듣자 겨우 시 문맥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실 벗듯한’은 ‘실’이 ‘뻐듯한’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벗듯한’으로 교열함으로써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머리낄’은 ‘머리카락’의 방언형이다. 그러나 시집‘진달래꽃’에서는 ‘머리길’로 교열함으로써 엄청난 오류를 범헀다. ‘슷고’는 “담벼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대어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을 의미하므로 ‘스치고’의 의미로 교열하면 좋을 듯하다. 가수 정미조가 가요로 불러서 80년대에 인기를 끈 노랫말이었던 소월의 시 ‘개여울’에도 많은 평북 방언이 보인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에서 ‘잔물’이란 시어는 ‘작은 못’의 의미를 지닌 방언이다.‘해적이다’는 ‘풀따기’에도 보이는데 “무엇을 헤쳐서 들추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평안도 방언이다. 남부 방언에서도 ‘희적거리다, 해적거리다’라는 방언이 있으니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었다가 이젠 고어가 된 어휘다.
김억(1939)편 ‘소월시초’‘님에게’라는 시에는 ‘축업은’(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축업은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님에게’)이라는 시어가 있다. ‘축업은(추겁은)’은 평북 방언으로 ‘추겁다, 추거워’로 변칙 활용을 하며 ‘축축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미래사에서 출판한 ‘진달래꽃’(1991)에서는 ‘축업은’(‘님에게’), ‘추거운’(‘여자의 냄새‘)으로 달리 표기가 되어 있다. ‘추겁다’라는 방언을 잘못 이해한 결과로 동일한 시어를 이처럼 서로 다르게 교열해 버린 것이다. ‘축축하다’보다 물기가 좀 더 빠진 상태를 ‘눅눅하다’라고 하는데 이 ‘눅눅하다’의 방언형인 ‘누겁다’ 역시 소월의 ‘오과의 읍’에 나타난다. ‘시 산’에서 보인 ‘시메산골’은 ‘두메산골’과 함께 ‘인적이 드문 산골 마을’이라는 의미로 오늘날까지 정주 지방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의 길”이라는 뜻인 ‘하롯길’이라는 방언형도 이 작품의 외롭고 쓸쓸한 전경을 드러내는데 매우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모든 언어나 방언은 고도의 표현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흔히들 세계의 언어와 방언이 많은 것은 경제적으로 낭비라는 주장이 있다. 개인이나 기업이 의사소통을 하는데 많은 경비가 지출된다는 근거에서다. 사실 세계에 언어와 방언이 다양하면 할수록 이에 대처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언어의 다종성이 가져다주는 지적 축적이나 문화 창조의 힘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방언은 시와 소설을 창작하는데 놀라우리만치 위력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들 방언이 사라지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사고와 세계관, 지식과 이해의 단위를 영원히 상실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우리가 향토 언어, 방언을 아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