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일의 경남 방언시
경남 합천 율곡면에서 태어난 박태일 시인은 시인으로서나 현대문학사 연구에서나 뚜렷한 봉우리 위에 선 학자이기도 하다. 대학을 은퇴할 무렵 연변의 나그네가 되어 연길 안까이 시편들을 시집으로 묶더니 자신의 시선집으로 ‘용을 낚는 사람들’(소명충판, 2024)을 펴냈다. 이 시전집 전반에 경상남도의 산천을 흐르는 물소리와 산새소리가 듀엣으로 합창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박태일의 세 번째 시집 ‘가을 악견산’과 네 번째 시집인 ‘풀나라’에서는 시인이 유년의 회상공간으로 한 경상남도 일대의 경관이 소리문법으로 리듬을 타고 그리움과 만난다. 제3시집에서‘가을 악견산’,‘거창노래’,‘합천노래’와 제4시집 ‘용전사기골’, ‘황강’은 연작시이다. 봄이면 봄의 소리로 여름이면 소낙비 소리로 가을이면 낙엽지는 소리로 산천의 경관이 바뀌고 자낙자낙한 서정의 메아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가끔은 표준 언어에서 벗어난 소리문법인 방언이 툭툭 튀어나온다. 박태일의 시 세계가 이토록 경건하고 진실할 줄을 어이 알았으랴. 가난한 농촌 아이일 적에 체험한 삶의 고뇌를 회상과 기억의 방식으로 변주해 눈물을 정화수로 바꾸는 소리문법으로 쓴 시어들, 태백산맥의 마지막 가야산과 산청 산의 끝자락의 뻐꾹새 울음소리, 바람과 햇살 휩쓸려 내리는 송화가루의 휘날리는 적막, 갑자기 땅땅 총소리에 쓰러지는 숱한 바지저고리가 노란 초가집 지붕으로 날아가는 거창양민 학살의 아픔들…. 경남 사투리를 간간히 섞어 쓰는 노래는 치유의 정화수로 지난 역사의 끝자락에 뿌려놓는다.
“피멍 들었제 동복이 아제/쪼그려 앉아 박하 잎만 찧게/저수지 못 미쳐 목이 죄인 물줄기/타닥타닥 옴개구리도 밟으며/애드럽게 집게칼로/손금이나 다듬게//제실 가는 흙담 위 붉은 감또개/고픈 날 숨어 씹던/짚가리 그늘//매호 높은 봉우리에는 속기 많은 산중과 아들과/그 아들이 지른 된똥에 잠자리 날고” -‘합천노래’에는 한국 현대사의 이념적 갈등의 슬픔이 잔잔하게 깔려 있다. 전쟁의 난리 통에 지리산 자락에 있는 합천과 거창지역이 좌우로 갈려 학살이 자행된 역사. 치유하기 힘든 아픔을 추궁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지만 시인은 그 아픔을 오롯이 정화로 깨끗이 씻어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격렬하지 않은 옛 기억을 그냥 그대로 호명하고 있다. 동복이 아제 어린 시절 홀로 소꿉놀이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잘근잘근 경남 사투리로 ‘옴개구리’, ‘애드럽게’, ‘된똥’이라는 지역어를 들춰내어 북바치는 슬픔을 지난 추억으로 묘사하여 슬픔을 잠재우고 있다.
지리산 자락 의령으로 흘러내리는‘황강’연작시는 물길처럼 유유히 흐르는 고향의 어린 시절의 풍경화를 소리로 리듬으로 이끌어낸다. 진주로 시집가 혼자되었다는 ‘콩점이’의 설화같은 이야기를 민요자락처럼 펼쳐내고 있다.
“두렁콩 배는 날에 해가 저물어/진주로 시집간 콩점이 생각/곡식도 씨 따는데/사람이 못 딸까/내리 딸 넷에 아들/남편 상났단 소식도 이어 들리고//콩점아콩점아 콩 보자/사타리에 점 보자/잔불 놓던 둑너머엔/첫날 첫 봄밤//달빛 홀로 다복다복 어디로 왔나”-‘황강 7’
어린 시절 마을에 함께 살던 콩점이, 사타리(사타구니)에 까만 콩같은 점이 있어서 콩점이라 불린 아이. 진주로 시집간 첫날밤의 풍경과 어린 시절 둑너미에 옹기종이 모여 앉아 잔불 지르던 추억이 한 몸으로 엉켜 훤한 달빛으로 걸어오고 있다. 살짝 섞어 넣은 방언의 촉매작용은 그 그립고 안타까운 추억 속으로 회전한다.
“콩점아콩점아 콩 보자/사타리에 점 보자” 동요의 리듬은 표준어문법으로 질주하는 시어를 경상도 가락으로 되일으켜 우리들의 감흥을 일깨워 준다. “황강 물 굴불굴불 황강 옥이와 귀엣말 즐겁습니다/황강 모래 엄지 검지 발가락 새 물꽃 되어 흐르듯이/간지러운 옛말이 들리는 봄/재첩 볼우물이 고운 옥이 마을”-‘황강 9’
콩점이와 동명이인일 수도 있는 옥이에 대한 그리움이 황강 물줄기로 이어져 온다. 옥이와 고향마을의 추억은 간지러운 옛말, 방언으로 도란도란 울려와 봄을 불러온다. 붉은 진달래꽃빛이 물꽃이 되고 옥이가 속삭이던 귀엣말이 봄빛으로 물드는데 “혼자 사는 옥이 엄지 검지 손톱이 뭉개져 까”매져 세월의 무상함을 저토록 처연하게 나직한 소리로 속삭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