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 논설위원신라시대 화백회의(和白會議)는 진골 이상의 20여명 귀족들이 참여해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던 최고 의사결정기구였다. 국가형태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던 시대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연맹왕국 사로국(斯國) 6개 촌락의 대표들이 모여 중대사를 논하던 남당(南堂)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화백회의는 의사결정 방식이 `만장일치제(滿場一致制)`였다는 점에서 후세 사학자들과 정치가들에게 큰 관심을 끈다. 그런데 놀랍게도, 21세기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내용상 `만장일치제`가 운영되고 있다. 그 어떤 법안도 소속의원 전원 또는 100%에 준하는 찬동의사가 발현되지 않으면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는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할 지 모르지만, 근년 국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행태를 보면 `우리 국회가 만장일치제를 택하고 있다`는 단정은 부인하기가 어렵다. 바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다.국회선진화법은 지난 2012년 5월 2일 국회본회의를 통과해 19대국회부터 3년여 적용되고 있는 현행 국회법이다. 그 이전 오랫동안 우리 국회의사당은 늘 꼴불견 격투기나, 낯 뜨거운 날치기가 벌어지는 추태 현장이었다. 바로 그 검은 역사를 종식시키고자 만든 법이 국회선진화법이다. 그러나 이 법은 마치 `경유엔진`차에다가 무식하게 `휘발유`를 주유하고 냅다 달리려고 하는 자동차처럼 만성적인 `정치고장(政治故障)`의 원천이 되고 말았다.국회선진화법 실시는 전혀 신사적이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은 정치풍토를 간과한 치명적인 실수다. 정치가 선진화된 다음에나 비로소 선용될 고상한(?) 법 장치를 성급하게 만들어 적용한 것이다. 흡사, 부작용이 검증되지 않은 항암제를 환자에게 마구 투여한 과오와도 같다. `예산안 법정시한 준수`와 `몸싸움 근절`만 지키는데 유효할 따름, 의회민주주의의 건강성을 모두 망가뜨리는 새로운 암종(癌腫)으로 발전했다.현행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의장의 쟁점법안 직권상정을 원천 봉쇄하고 있다. 쟁점법안에 대한 안건 조정도 위원회 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이 찬성해야 가능하다. 신속처리 대상 안건의 지정 역시 재적 5분의 3이상의 찬성을 요한다. 얼핏 보았을 때는, 법률안에 대해서 국회의원들이 각자 소신껏 표결에 응하기만 한다면 긴요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그러나 이 대목에 결정적 함정이 있다. 우리 국회는 유사 이래 쟁점법안 처리에 있어서 국회의원의 소신투표가 제대로 보장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것이 아무리 민생을 위해서 절박한 법안이라고 해도 쟁점법안은 무조건 여야 협상의 흥정거리로 전락한다.올 11월 30일 현재 국회 의석분포는 총원 294명에 새누리당 157석(53.4%), 새정치민주연합 127석(43.2%), 정의당 5석(1.7%), 무소속 5석(1.7%)이다. `당론투표` 방식이 철칙으로 지켜지고 있는 완고한 정치풍토에서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어느 한 편이 3분의 2가 되거나, 5분의 3이 될 확률은 제로(0)다. 그러니, 선진화법의 의결방식은 형식상 `특별정족수제도`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만장일치제`로 작동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어깃장에 `다수`가 형편없이 끌려 다니고 있는 몰골이 오늘날 대한민국 국회의 자화상인 것이다. 이 골칫거리를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은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하는 것 하나 뿐이다. 국회는 하루빨리 과반수를 의결조건으로 하는 절대다수결(Absolute majority)을 회복해야 한다. `만장일치제`덫에 걸린 `불량국회`가 갈 길 바쁜 박근혜정부의 발목을 틀어잡고 있다. 원인을 뻔히 알면서도, 여당의 `무기력`과 야당의 `몽니정치`를 어쩌지 못해 애태우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안타깝다. 규모도 아주 작고, 현안도 극소수였던 신라 화백제도의 `만장일치제`는 어디까지나 역사 속의 화석일 따름이다.
2015-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