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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날 위의 ‘한국당’

안재휘논설위원김진태 의원이 깔아준 멍석 위에서 지만원 씨가 ‘편견’ 굿판을 벌이고, 이종명·김순례 의원이 덩달아 춤을 춘 ‘5·18 망언’ 소동 후폭풍이 자유한국당을 막다른 골목길로 몰아가고 있다. ‘5·18 망언’ 사태는 경제정책실패와 북한 비핵화 지지부진의 여파, 당정 인사들의 잇따른 구설수 늪에서 버둥거리던 청와대와 민주당, 그리고 진보세력 모두에게 반격의 핵폭탄을 제공한 망동이다.봄 날씨를 연상시키는 따뜻한 주말 청계광장이 사람들로 넘쳐났다. 5·18 비상시국회의와 5·18역사왜곡처벌 광주운동본부가 주최한 ‘5·18 민주화운동 왜곡·모독·망언 3인 국회의원 퇴출! 5·18 학살 역사 왜곡 처벌법 제정! 자유한국당 해체! 범국민대회’라는 외우기도 힘든 긴 이름의 행사에 광주에서만 1천500여명 시민들이 상경했단다.참여시민단체가 550여 개라고 발표된 이 날 집회에는 여야 4당 소속 국회의원 20여 명과 이용섭 광주시장, 박원순 서울시장,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등도 참석했다. 집회에서는 ‘지만원 구속’‘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 퇴출’ ‘5·18 왜곡 처벌 특별법 제정’ ‘5·18 진상조사위 출범 협조’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인근 지역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보수성향의 태극기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5·18 가짜 유공자를 공개하라’, ‘문재인 대통령은 퇴진하라’고 주장하며 5·18 망언규탄 시위대에 거친 말을 쏟아내기도 했지만 이 날의 태극기집회가 자아내는 보편적 공명은 미미했다.그런데, 일방적 군중심리의 여파로 추진되는 이른바 ‘5·18 망언 처벌법’이라는 이름의 법안은 참으로 걱정스럽다. 개정안은 5·18을 비방·왜곡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람을 7년 이하 징역 또는 7천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법안 발의에 동참한 국회의원은 모두 166명에 이른다니 심각한 일이다.입법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독일과 프랑스 등의 경우들을 사례로 든다. 독일은 1985년 형법 제130조 3항에 ‘홀로코스트 부인’을 금지하는 규정을 담았다. 형법 86조에 나치 상징 깃발과 슬로건을 사용할 경우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으로 엄벌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도 1990년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 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나치학살 부인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하지만 ‘5·18 망언 처벌법’이라는 이름의 개정안은 이렇게 허투루 다룰 법안이 결코 아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야만의 칼로 악용될 개연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현령비현령이거나 견강부회의 궤변기술을 동원해 국민의 기본권을 훼손시킬 여지가 다분하다. 갖가지 편법으로 표현의 자유를 난도질했던 뼈아픈 정치사를 아직 무시해서는 안 된다.문제는 지리멸렬의 뻘밭에서 도무지 헤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형편이다. 27일로 예정된 전당대회가 한국당을 살려낼 가능성은 여전히 높지 않다. 국민의 가슴이 뭉클하도록 ‘혁신과 부활’의 기적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상처를 후벼 파는 드잡이판이 되어버린 전당대회를 놓고 대다수 여론은 또다시 비관 일변도다. ‘싹수가 노란’ 간판 내리고 각자 흩어져 각자도생이나 모색하라는 주문이 줄을 잇는다.자유한국당이 칼날 위에 서 있다. 한 발만 더 삐끗하면 산산조각이다. 도로친박당, 도로수구꼴통당으로 돌아가 낡은 필름이나 돌릴 시대착오적인 광풍 속에 갇힐 것이라는 낙망이 난무한다. 나라와 당의 ‘미래’를 겨루는 희망의 설계도가 넘쳐나기를 바랐던 많은 이들을 모조리 절망의 섬에 가두고 있다. ‘폐업만이 답’이라는 충고를 반박할 여지란 추호도 없게 만든 보수 야당의 행태에 가슴을 친다. 운명의 순간이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다.

2019-02-24

‘신공항’ 망국론

안재휘 논설위원윤흥길의 ‘완장’은 권력의 횡포가 심한 우리 사회를 풍자한 대표적 소설이다. 무위도식하며 건달로 살다가 보잘것없는 저수지 감시인으로 채용된 ‘임종술’은 완장을 차고 으스대며 행패를 부린다. 낚시질 온 도시의 남녀들에게 기합을 주기도 하고 고기를 잡던 초등학교 동창 부자를 폭행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자신을 고용한 사장 일행의 낚시까지 단속하다가 해고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완장을 차고 저수지 지키는 일에 몰두한다.기형적으로 성장해온 이 나라 포퓰리즘 민주주의의 행태가 기가 막힌다. 이제는 다 잦아든 줄 알았던 ‘동남권 신공항’ 망령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놀랍게도, 10여 년 만에 가까스로 잠재운 영남권 지역갈등의 막장드라마를 다시 무대에 끌어올린 이는 대통령이다.문 대통령은 부산사람들 앞에서 “부산·울산·경남의 타당성 검증 결과를 놓고 5개 광역자치단체의 뜻이 하나로 모아지면 결정이 수월해질 것이고, 만약 생각이 다르면 총리실에서 검증 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업이 표류하거나 지나치게 늦어져서는 안 된다”는 가속페달까지 덧붙였다. 바로 읽으나, 뒤집어 읽으나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목을 맨 부울경(부산·울산·경남) 단체장들에게 힘을 실어준 발언이다.그래놓고, 청와대는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는 따분한 해설만 거듭한다. 5개 광역단체의 뜻이 하나가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 ‘총리실’은 왜 동원하는가. 5개 단체가 합의되지 않으면 그만두면 될 일이다. 수많은 논란과 갈등과 소모전을 치른 끝에 겨우 봉합한 이슈를 단지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도 되는 건지 참으로 궁금하다.온 국민이 ‘신공항’ 건설을 지역발전의 도깨비방망이로 여기게 만든 것은 득표를 위해 ‘국익’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내팽개친 뭇 정치인들이다. 문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 시절에 “부산에서 5석만 더민주에 주면 박근혜 정부 임기가 끝나기 전에 신공항을 착공하겠다”고 말했다. 예타(예비타당성심사)면제 사업으로 결정된 ‘새만금 국제공항’도 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발표한 다음 전북권 10명의 국회의원들이 발 벗고 나선 결과물이다.외국의 전문가들은 좁은 국토에 공항 유치경쟁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우리네 풍토를 비웃는다. 기존 국내공항들만 해도 이미 골칫덩어리다. 경제 논리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 논리로 만들어진 결과다. 현재 우리나라엔 국제공항 8개와 국내공항 7개 등 모두 15개 공항(군용공항 제외)이 있다. 지난해 전국 10개 지방공항의 적자를 모두 합친 금액은 무려 797억 원이다. 지방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이라 개선의 여지도 적다. 지난해 최악의 적자를 낸 무안공항은 텅 빈 활주로에 인근 주민들이 수확한 고추를 말리는 장면으로 화제가 돼 ‘고추 말리는 공항’으로도 유명하다.‘신공항’ 경쟁은 나라 말아먹을 병폐다. 4대강 사업을 질타하며 정부의 토목공사를 죄악시하던 문재인 정권이 느닷없이 ‘가덕도 신공항’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은 어이없는 반전이다. 경제정책 실패를 만회할 방안으로 그토록 경멸하던 ‘토목사업’을 답으로 찾아내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방을 다니며 토목 공약을 더 퍼부을 심산이라면 참 서글픈 일이다. 정권이 바뀔 적마다 나랏일을 뒤집어엎는 국가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소설 ‘완장’에서 기고만장한 종술에게 ‘완장의 허황됨’을 일깨워주는 사람은 뜻밖으로 술집 작부 부월이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그녀의 일갈은 전율을 부른다. ‘국익’을 팽개치고 완장질에 여념이 없는 우리 정치권을 향해 제대로 된 권력의 지혜를 가르칠 부월은 정녕 없는가. 권력은 마구 휘둘러 뒤집어엎는 게 아니라, ‘공감’하는 정책으로 나라의 미래를 개척하라는 계시임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2019-02-17

‘대안부재(代案不在)’의 비극

안재휘 논설위원오는 27일 전당대회를 앞둔 자유한국당이 오리무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한국당 전대는 애초부터 친박(친박근혜계)이냐, 비박(비박근혜계)이냐의 논란을 중심으로 ‘계파 갈등’이라는 고질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 영입으로 인해 대안(代案)에 목말라 있던 일부 지지자들의 쏠림현상이 감지되면서 다른 주자들의 경계심이 날카롭다. 정치 권력 쟁패에 나타나는 변수는 워낙 변화무쌍해서 예측도 대응도 늘 난제다. 황교안의 등장에 기대는 사람들의 심리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그 바탕을 이룬다. 한국의 민심은 늘 이런저런 경력이 덕지덕지 붙은 기성 정치인보다는 뭔가 있을 것 같은 ‘거물 신인’을 선호한다. 그런 국민성향을 잘 꿰고 있는 정치권은 마땅한 인재만 있으면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 그렇게 정치권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가 만신창이가 된 인재가 어디 한둘이던가. 한국 정치는 여전히 명망가들의 고약한 무덤이다. 하필이면 제2차 북미회담이 2월 27일로 결정이 나서 한국당이 비상이 걸렸다. 일부에서 음모설까지 나왔으나 무리한 상정(想定)이다. 암중모색에 빠진 전대 출마 후보들을 중심으로 전대 연기론이 불거졌다. 그러나 당 지도부와 선거대책위원회는 전대 일정을 바꾸지 않기로 정했다. 다들 어쨌든 난감한 지경에 빠졌다.그런데 설 명절이 지나자마자 자유한국당 안에서 골치 아픈 ‘자살폭탄’ 하나가 터졌다. 김진태·이종명(비례대표) 의원이 극우 논객 지만원 씨를 초청해 이른바 ‘5·18 진상규명 대국민 공청회’를 연 것이다. 지만원 씨는 이날도 “5·18은 북한 특수군 600명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는 종래의 주장을 거듭했고, “당시 광주 상황을 북한에서 전부 생중계했다”는 말까지 보탰다.공청회에서 김진태, 이종명 그리고 김순례(비례대표) 의원 등은 민주화 운동을 ‘폭동’으로, 5·18 유공자를 ‘괴물집단’으로 표현했다. 김성찬·백승주·이완영 의원 등 한국당 주요 인사들도 함께한 자리였다. 이 땅에는 5·18에 대한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시각이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자체가 온전한 진실을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돼야 한다. 수백 수천 년이 흘러도 논쟁이 남는 게 역사의 특성이다.그러나 하필이면 이 시점에 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이런 이벤트를 벌이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예상대로 정치권이 시끌시끌하다.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권이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당의 공식입장이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도 “5·18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발전의 밑거름이 된 사건”이라며 수습에 나섰다. 이런 해프닝이 남기는 이미지 손상의 크기는 가늠조차 어렵다. 결과적으로 자유한국당이 여전히 콩가루 조직임이 입증됐다.역사적 사건에 대한 합리적인 회의(懷疑)는 지성인의 의무다. 그럼에도 그것이 정치 행위로 나타날 때는 얘기가 다르다. 문재인 정권의 거듭된 실정(失政)과 부조리가 민심을 흔들고 있는 이 시점에 제1야당은 ‘선택과 집중’으로 이슈 몰이를 해야 할 시점이다. 구성원들의 무차별적 전선확대는 정치 초짜들도 안 하는 한심한 ‘뻘짓’이다. 자유한국당은 정말 수구꼴통 주홍글씨의 변함없는 포로인가. 지금 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설 명절 민심을 들어봤다. 집권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실망이 많이 늘었다. 각자 이유는 달랐지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더라는 말이 무성하다. 그러나 아무도 대안을 말하지는 못했다. ‘자유한국당’을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딱히 누군가를 떠올리는 자신만만한 민심도 찾기 어려웠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은 ‘대안’도 없는 ‘절망’의 늪에서 ‘비극’을 더 오랫동안 견뎌야 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2019-02-10

포퓰리즘 바이러스

안재휘 논설위원조선은 사대부들의 지독한 사색당파로 망한 나라다. 학자에 따라서는 ‘당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니라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객관적 시각의 통사(通史)로 볼 때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은 미화될 여지가 없다. 사색당파의 논쟁들은 하나같이 ‘백성’과 ‘국가’를 위하는 충정을 명분으로 걸어놓고 있지만 그 행태와 뒷이야기에는 냉혹한 흑백논리와 더럽고 편협한 욕망만 우글거린다. 절대권력자인 왕을 지렛대로 쓰려는 그들의 음모는 필사적이었다. 지금 이 나라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축이 임금이었던 반면, 지금은 국민의 지지율이 권력의 향배를 가름한다는 측면이 다를 뿐이다. 예전에는 왕이 얼마나 영특한가의 요소가 권력을 가르고 국운을 결정짓는 핵심변수였고, 지금은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현명한가가 성패의 관건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다(水可載舟 亦可覆舟)’는 공자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민심’의 요체를 깨닫게 하는 절묘한 비유로 다가온다. 그러나 공자의 이 말은 백성의 마음이란 결코 한곳에 머물러있지 않음을 예고하는 고약한 은유로도 읽어야 마땅하다.현대정치에 있어서 정치권은 끊임없이 국민의 어리석음을 파고든다. 특히 이 나라 정치인들이 최대한 악용하고 있는 무기가 바로 포퓰리즘(populism)이다. 절대다수의 정치인들은 포퓰리즘이라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구사해 민심을 훔치고, 권력을 얻어 누릴 것인가에 골몰해 있다. 그들 입에서 나오는 ‘민생’이니, ‘애국’이니 하는 용어들은 민심을 홀리기 위한 과장된 형용사요 궤변의 꾐수일 따름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지고 있는 정책의 혼선과 부작용들은 대개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테마들이다. 우리는 작금 국가 주요정책이 포퓰리즘의 경연 속에서 함부로 다뤄질 때 어떤 참담한 혼란으로 귀결되는지를 절절히 체험하고 있다. ‘최저임금’ 문제가 그렇고, ‘탈원전’ 문제가 그렇다.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섣부른 ‘탈원전’이 국민 삶에 어떤 처참한 결과로 나타나는지는 이미 충분히 입증됐다. 그 시발점이 바로 지난 대선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와 진보 시민단체가 지지세력의 핵심인 문재인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이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탈원전’을 덜컥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비운의 출발점이었다. 정책은 방향이 중요하다.그러나 방향이 옳다고 무조건 “당장 시행하겠다”고 공약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범죄적 선거행태다. 어설픈 선거공약 하나가 나라를 말아먹을 수도 있음을 공연히 묵과하는 정치인들의 언행이란 참으로 사악하다. 당장 표가 된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내놓고 보는 엉터리 공약들은 반드시 치명적인 시행착오를 불러온다. 최저임금을 감당해야 하는 중소 영세사업자들의 처지를 전혀 헤아리지 않고 폭증을 감행해버린 정부의 처사는 아무리 곱씹어도 이해가 안 간다. 이유라곤 그저 ‘공약이었다’는 것 하나뿐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윤똑똑이 얼치기 지식인들의 곡학아세를 앞세워 그런 하책을 쓴 이면은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는다. ‘탈원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핵발전기술 강국 ‘대한민국’의 위상을 하루아침에 개차반으로 매장해버린 결정적인 실수를 대체 어찌할 참인가.문제는 여전히 포퓰리즘 바이러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권이 지지율을 떠받치는 맹종세력의 눈치만 살핀다는 사실이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겐 세금 많이 걷어서 나눠주면 입을 막을 수 있다는 심보다. 나라야 망하건 말건 권력만 유지하면 된다는 가치관에 갇혀 살던 조선시대 무한 당쟁 앞잡이들의 행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포퓰리즘 바이러스의 노예로 온존하는 사특한 정치꾼들과 어리석은 민심이 합작해내는 이 불량한 정치행태를 대체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2019-01-27

‘김혜교’ 또는 ‘예의’ 논란

안재휘 논설위원손혜원 스캔들을 논하려면, 아무래도 청와대의 국채발행 장난질 실체를 고발한 신재민 전 사무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누가 뭐래도 손혜원은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해프닝에 앞장서온 더불어민주당 친문 강경파다. 웬만한 사람들은 손혜원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다 안다. 적어도 민주당 안에서 손혜원의 언행을 제어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 신재민 폭로사태가 벌어졌을 때, 손혜원은 야속하리만치 앙칼지게 물어뜯었다. 자식 같은 사람에게 왜 저러나 했다. 그런데, 신 전 사무관이 극단적인 선택을 예고한 뒤 한 모텔에서 발견돼 입원하고 난 다음 손혜원이 그에 관한 비방글들을 삭제하면서 올린 글을 읽다가 소름이 쫙 끼쳤다.손혜원은 “신재민 씨 돈 의혹 글을 내린 건 그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강단 없는 자라서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글을 내린 이유가 ‘(신재민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강단 없는 자라서’였다는 것인데, ‘죽지도 못하는 놈이라서’로 읽힐 여지가 많아 인면수심(人面獸心)마저 떠오르게 한다.정부재정정책 의사결정과정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바른말을 하고 나선 아들 같은, 또는 조카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모진 마음으로 잔혹한 언어들을 내뿜을 수 있을까 안타까웠다. 야구 감독 선동열을 불러놓고 내뱉은 그의 언어 또한 ‘예의’하고는 거리가 멀었었다. 최근 불붙은 목포 근대문화역사공간을 둘러싼 전형적인 투기행태를 놓고도 손혜원은 무지막지 ‘배 째라’ 행태다.국회 파견판사를 통해 지인 재판을 청탁했다는 의혹을 받는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파견판사를 만난 기억이 없다고 사뭇 오리발이다. 검찰은 서 의원이 2015년 국회 파견판사를 국회의원실로 불렀다는 사실과 당시 파견판사가 ‘청탁’ 내용을 임종헌 행정처 차장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확보했다. 서 의원에 대해 겨우 서면 조사만 했다는 검찰은 이리저리 핑계만 대고 있다.문제의 핵심은 서 의원의 지인 아들이라는 해당 피의자가 누범(累犯)임에도 500만 원의 벌금형만 받았다는 사실이다. 청탁의 기록이 선연하고, 죄목변경은 안 됐어도 불법 로비였다는 혐의가 넉넉하다. 그런데 서 의원은 갑자기 치매환자 놀음이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며 재판정 출석을 거부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변명과 엇비슷하다.정용기 자유한국당 정책위의장이 최근의 손혜원·서영교 ‘쌍끌이’ 논란을 “김정숙 여사를 믿고 설치는 것”이라고 작심 비판하며 ‘김혜교 스캔들’이라고 명명했다. 김병준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영부인의 친구라는 위세를 얻고 자기의 사익을 추구한 게 아니냐는 점이 국민이 생각하고 있는 의혹의 본질”이라고 정리했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손 의원과 영부인 김정숙 여사의 숙명여고 동창 인연을 거론하며 “이번 사건은 초권력형 비리”라고 주장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정치판이 아무리 혼탁해도 지켜야 할 예의와 선이 있다”고 거세게 비판했다.대통령 신년기자회견 자리에서 돌직구를 던진 경기방송 김예령 기자에게 ‘예의’를 가르치려 들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단언하거니와, 기자가 예의를 다 지키면 기자가 아니다. 게다가 김 기자의 질문은 대통령에게 거북할지언정 예의 없는 질문은 아니었다. 도대체 이 정권과 여당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야당 시절 자기들이 했던 온갖 ‘싸가지 없는 진보(강준만 교수의 책 제목)’ 행태는 다 까먹었는지 지금은 왜 뜬금없는 치매 흉내에다가 ‘예의’ 타령인지 모르겠다.같은 죄목으로 전 정권 실세들과 공무원들까지 다 잡아넣은 정권이 벌이는 ‘직권남용’, ‘직무유기’ 행태가 가관이다. 아니, 그 이면에 도사린 ‘내로남불’, ‘후안무치’ 의식이 무슨 행패를 더 양산해낼 것인지가 더 걱정이다.

2019-01-20

고양이들의 ‘생선’ 전쟁

안재휘논설위원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자문위원회가 국회의원 수를 현행 300명에서 360명으로 늘리고 연동형 비례대표제(정당별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배분)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 권고안을 냈다. 권고안은 이밖에 ‘투표 참여 연령 만 18세 하향’, ‘공천제도 개혁’ 등도 담고 있다. 하지만 정개특위가 금세 합의안을 도출해낼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긍정적인 신호도 없다. 정개특위 자문위가 내놓은 권고안에 대하여 거대 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부터 난색이다. 구체성도 떨어지고, 그동안 숱하게 제기돼 왔던 문제들에 대한 깊은 고민도 엿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인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따끔한 지적도 따라붙는다.선거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현상 자체가 문제다. 정치개혁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고, 모든 제도나 장치들이 연계돼 있음에도 다들 선거제도 하나에만 오목렌즈를 들이대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승자독식의 폐해를 차단하고 양대 정당의 독과점 체제를 개선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임에 틀림이 없다.그러나 흔히들 사례로 들고 있는 독일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 중심형’ 정치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 중심형’ 정치체제를 그냥 둔 채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덜컥 도입하는 것은 기형적 정치환경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중·대선거구제와 내각제가 함께 작동될 때나 최상의 의미를 띠는 것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논리에 전문가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문제는 정치권이 하나같이 지독한 이기주의에 발을 담근 채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논리들만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바짝 매달리는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 야3당의 주장은 어쨌든 이 제도가 군소정당에 유리해질 공산이 크다는 예측에 기인한다. 지난 제20대 총선 결과 더불어민주당은 25.5%의 정당 득표율로 41%의 의석수를 가져간 반면, 정의당은 7.2%의 정당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2%의 의석수만을 차지했다. 거대 정당은 과대 대표되고 중소 정당은 과소 대표되는 현 선거제도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례다.거대 양당의 당리당략이 골칫거리다. 민주당이 말하는 ‘절충형 비례대표제’는 비례의석 수의 50%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배분하고 50%는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배분한다는 것이다. 비례의석 확보에 유리하다는 계산에서 비롯된 대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근본적으로 권력 구조 자체를 함께 변경해야 그 목적이 실현될 수 있다. 최소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과감히 수술하는 헌법개정만이라도 수반돼야 마땅하다. 그런 측면에서 ‘개헌’과 연계하는 전략을 선택한 한국당의 목소리는 더불어민주당 2중대·3중대의 점유율 폭등을 우려하여 고약한 옵션을 건 측면이 있다 해도, 근본적으로 옳다.의원정수를 늘리는 문제에 대한 민심의 근본적인 반발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 때문이다. 일 잘하는 일꾼들을 늘리자는데 무턱대고 반대할 국민은 없다. 일을 형편없이 하는 이유가 ‘일손 부족’이라고 생각하는 여론 또한 없다. 매일 멱살잡이 드잡이 닭싸움만 일삼고 있는 오합지졸들이 밥만 더 먹자고 대들고, 일꾼을 더 늘려달라고 조르는 짓을 묵인할 주인이 어디 있을까. 이 문제는 근원적으로 낮은 정치생산성 이슈와 맞닿아 있다.어쩌다가 고양이들한테 맡긴 생선가게가 엉망이 돼가고 있다. 정치인들을 위한 선거제도 개혁이 아니라, ‘개헌’ 문제를 포함한 진정한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제 주인들이 저 위태로운 생선가게를 빼앗아야 할텐데 걱정이다. 어떻게든, 국민이 직접 나설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고양이들에게 맡긴 생선가게가 잘 돌아갈 확률은 0%다.

2019-01-13

‘늑대’와 ‘미꾸라지’

안재휘논설위원정초에 발표된 김정은의 신년사에는 ‘핵보유국’이라는 자만심의 여유가 한껏 묻어났다. 이탈리아산으로 추정된다는 초호화 가구가 배치된 거실에 앉아서 성명서를 읽는 방식으로 진행된 신년사 낭독은 그 형식부터가 생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화판 거실에 앉아서 읽는 그 형식만 바뀌었지, 신년사 내용에는 우리가 걱정해야 할 대목들이 즐비하다. ‘평화’는 낭만적인 의지만 갖고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현실을 다시 한번 깨우쳐준다.김정은은 우리에게 지난 9월의 남북 군사합의서의 범위를 훌쩍 넘은 군사적 요구부터 해왔다. ‘외세’와의 군사훈련 중단과 ‘외세’로부터의 전략자산을 포함한 전쟁 장비 반입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그가 줄기차게 주장해온 ‘조선반도 비핵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서를 제공한다. 그가 말하는 비핵화는 문재인 정부가 애써 의역해온 ‘북한 비핵화’가 아니다. 여차하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을러대는 대목에서는 늑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쩍 빛난다.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에 대해서 그는 ‘무조건적이고 대가 없이’라는 표현을 동원했다. 연평도 포격과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 비극을 영 잊어달라는 이야기다. 남북대화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나오나 간 보려는 제안임에 틀림이 없다. 판을 깨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몰린 우리 정부 입장은 무엇인가.미국에는 비핵화와 관련해서 성의를 보였으니 결단을 내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핵 리스트 제출은커녕 풍계리 핵실험장 갱도 입구 폭파 쇼 이후 폐기에 대한 검증 사찰조차 수용하지 않는 그들이다.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을 선포했다”는 대목은 스스로 핵보유국임을 자랑하는 말로 들린다.시중에는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단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송곳니를 쉽사리 뽑아줄 리 만무한 늑대의 본능을 이제서야 깨달아가고 있는 셈이다. 결국, 답은 하나밖에 남지 않을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대한민국이 전략핵무기를 확보하는 것 말고 무슨 해법이 있나. 국수주의로 돌아가는 수상한 미국을 언제까지 믿어야 할 것인가.‘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양치기들이 말 못 할 수난을 당하고 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특별감찰반원이었던 검찰 수사관 김태우의 ‘민간인 사찰’ 폭로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 사정(司正) 게임을 벌여온 문재인 정부에 치명타다. 기획재정부 전 사무관이 까발린 청와대의 민간기업 인사개입, 적자 국채발행 압력 의혹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메시지는 팽개치고 메신저들을 맹폭하는 행태가 한없이 모질다.청와대는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검찰 수사관에게 대뜸 ‘미꾸라지’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공격했다. 야당 쪽에서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겨냥해 ‘미꾸라지 도매상’이라는 반격을 퍼부었다. 청와대에서 일하는 한 특감반원이 행사한 권력은 ‘청와대가 한 것’으로 정의돼야 한다. 사과 한마디 없이 김태우를 뿔난 미꾸라지 취급하는 태도가 한심하다.‘늑대의 송곳니를 보았다’고 고백한 양치기 소년의 인격에 마구 칼질을 하는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의 몰인정은 더 기가 막힌다. 손혜원이 신재민을 겨냥해 동원한 인격살인 용어들은 어른의 언어로는 부적합하기 짝이 없다. 내 편이 아니면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막무가내로 물어뜯는 야멸찬 인성으로 어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다닐까 싶다.사람들은 이제 ‘늑대’를 ‘미꾸라지’라고 우기는 배리(背理)를 방관하지 않는다. 북한을 늑대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서 늑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늑대의 음모를 폭로한 전·현직 공직자들을 미꾸라지라고 매도한다고 해서 늑대의 흉계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정치꾼들의 살벌한 청백전 고질병 앞에서 국민들은 또다시 수상한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 ‘늑대’는 있다.

2019-01-06

‘홍카콜라’의 비법(飛法)

안재휘논설위원홍준표가 돌아왔다. 정치 재개를 선언하며 내놓은 유튜브 채널 ‘TV홍카콜라’가 날개를 달았다. 18일 첫 방송 이래 구독자 수가 15만 명을 넘겼고 누적 방문자 수는 200만 명을 넘나든다. ‘남북 정상회담 대가설’ 등 특유의 ‘독설 잔치’로 존재감을 알리면서, 유튜브 채널을 달구는 숱한 우파 논객을 압도하는 기세다. 며칠 전에는 자신의 또 다른 프로젝트인 ‘프리덤코리아포럼’을 발족했다. 보수의 진지를 구축하고 이념전을 펴겠다는 신호다.가파른 내리막길로 접어든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마침내 대선 득표율(41.1%) 수준인 43.8%로 떨어지고 부정평가가 50%를 넘어 51.6%로 치솟는 중이다. 두 달 전 정치토크쇼 출연마저 마다하며 정치와의 단절을 선언했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근거 없는 문 대통령 비방을 막겠다’는 변명을 앞세워 ‘어용지식인’으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팟캐스트 ‘유시민의 알릴레오’는 첫 방송 전부터 구독자 2만 명을 넘어섰다.유 이사장의 등장은 홍 전 대표의 복귀와 무관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홍 전 대표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국민적인 기대가 한풀 꺾이는 시점에 와신상담을 끝내고 나선 꼴이고, 유 이사장은 불난 집에 소화기를 들고 달려드는 인상일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벌일 예측불허의 맞대결이 진작부터 세간의 관심을 폭증시키고 있다. 홍준표가 “우리는 참패했고 나라는 통째로 넘어갔다. 모두가 제 잘못”이라며 떠난 것이 지난 6월 중순이었으니까, 채 반년도 안되어 정치무대로 돌아온 셈이다. 그가 밝힌 회귀의 명분은 “대선이나 지방선거 때 홍준표의 말이 옳았다는 지적에 힘입어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예측된 일이긴 해도 그 배경은 역시 문재인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일 것이다.저격수로 나선 유시민의 속내는 사실상 편안한 게 아니다. 여권에서 유시민만큼 ‘논쟁에 강하고 친노, 친문에 두루 연결된 준비된 스타’를 찾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홍 전 대표와는 달리 그가 굳이 ‘정치 재개’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문재인 정권의 조기 레임덕을 촉발시킬 수 있으리라는 걱정의 발로일 것이다. 자신의 출격이 오히려 정권의 내리막길을 가속화시킬 수도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아닐까 싶다.어쨌든 홍준표가 돌아왔다. 좋거나 싫거나 간에 정치권에는 바람이 불어닥칠 것이다. 홍준표에 대한 비판은 그의 언변이 정적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국민들에게 거부감을 사고도 남을만큼 사납고 거칠다는 점이다. 세상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특유의 독설과 경계를 넘나드는 과장된 폭로성 발언은 그의 매력이자 동시에 한계다. 그런 그의 특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인다.‘홍카콜라’의 인기가 단숨에 솟구쳐오르는 현상의 또다른 요소는 보수 야권의 ‘대안부재’다. 그 황량한 공간이 ’홍카콜라’ 비상을 허용하는 환경이다. 그렇다면 지금 홍준표의 비상이 한계를 극복하고 불패의 거목으로까지 성장하는 신호탄일 것인가. 잘라 말해서, 지금과 같은 수준이라면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지난 대선에서 맛본 필패의 구도가 또다시 만들어질 공산이 매우 높다.홍준표가 극우 보수의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할 수 없는 한, 그는 여전히 보수와 중도 민심을 분열시키는 상수(常數)에 머물 개연성이 높다. 민주당이 이미 그런 셈법으로 ‘홍카콜라의 비상’에 오히려 쾌재를 부르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현 정권의 지지도 하락이 홍준표에게 일시적으로 도약의 공간을 내줄지언정 넘보지 못할 대권 주자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최대변수는 결코 아니다. 홍준표는 스스로 변해야 한다. 특히 보수혁신의 역량을 확실하게 입증해야 한다. 거품투성이 ‘인기’가 아닌 견고한 ‘지지’를 견인해낼 ‘홍카콜라의 비법(飛法)’은 그 뒤에나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2018-12-30

사면초가의 ‘황포돛대’

안재휘 논설위원얼마 전 친노(親노무현 팬클럽) 멤버를 자처하는 한 사업가와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친문(親문재인) 활동을 하시는 분일 텐데, 굳이 친문이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평소에 책을 좋아하고 시집을 찾아 읽기도 하기에 자연스럽게 문학 이야기가 소재가 되었다. 그런데 자리가 길어지면서 조금 취기가 돌 무렵에 내게 느닷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KAL기 폭파된 것 틀림없나요?” “천안함 폭침이 맞습니까?”사상검증에 들어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언짢았지만, 일단 참고 대답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가 조사하여 발표한 것을 저는 기본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러자 그는 “틀렸어요. 모두 다 조작이에요. 어떻게 그걸 믿어요?”하고 언성을 높였다. 가소롭다는 듯한 그의 눈빛이 느껴졌다.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해줬다. “틀린 게 아니라, 생각이 다른 거겠지요. 저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정신적 장애인’들을 제일 딱하게 여깁니다.”문재인 정권이 최대의 위기국면으로 몰려가고 있다. 이 정권은 치명적인 실수를 거듭하고 있다. ‘적폐청산’ 여론몰이로 정적들을 이 잡듯 잡아내는 행위부터 어불성설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종식시킨다면서 호기롭게 출범한 이 정권 역시 황제적 권력을 휘두른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정책들이 ‘깜짝쇼’ 방식으로 추진되는 관행부터 올바르지 않다.‘탈원전’ 정책은 최악이다. 나라 곳간을 거덜내고도 남을 실책이라는 항간의 지적이 그르지 않아 보인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은 ‘일자리 정부’ 캐치프레이즈를 완전히 찢어발겼다. 상가 거리에는 인적이 사라졌다. 아이들에게 들으니 “8시간짜리 일자리는커녕 4시간짜리도 얻어내기 힘들다”고 한다. 경제는 바야흐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캄캄한 동굴 속을 헤매고 있다.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발탁될 무렵 그가 국정감사장에서 했다고 알려진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던 말은 정말 멋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 이제는 슬슬 미심쩍어지고 있다. 굴러다니는 뒷얘기는 차치하고라도, 어째서 이 나라의 ‘적폐’가 온전히 한쪽 진영에만 쏠려 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 때문이다. ‘10대 0’ 경기도 재미없는데, 이 경기는 하물며 ‘1000대 0’처럼 느껴진다.‘북한 비핵화’전선은 어찌 돼가고 있는가. 연내에 서울에 오리라 장담했던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다시 장막 속에 주저앉은 느낌이다. 김정은의 입만 쳐다보는 청와대의 모습은 자괴감마저 부른다. 11월 중간선거를 넘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속 타는 한반도의 민생들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리무중이다. 작금 ‘시리아 철군’결단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심사는 아찔하다.‘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의혹’이 일파만파다. 김태우 전 특감반 수사관과 청와대 간 공방전에서 청와대는 일단 스텝이 많이 꼬였다.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패착을 거듭하는 청와대의 뒤에 웅숭깊은 ‘확증편향’의 어두운 그늘이 보인다. 제1야당이 논란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청와대가 정치인·언론·교수·기업 등 민간인 사찰을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진행했다면서 관련 자료를 직접 공개했다. 한국당은 대통령실장과 민정수석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했다.청와대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은 정말 억울해하는 표정이다.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 난리를 치느냐는 눈빛이었다. 문득, 이면우 교수가 쓴 ‘생존의 W이론’에 나오는 ‘황포돛대 이론’이 떠올랐다. 청와대는 혹여 터무니없는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노를 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려 나라를 아예 거대한 폭포 낭떠러지 쪽으로 힘차게 저어가는 중이라면 정말 큰일이다. 나라 꼴이 참 말이 아니다.

2018-12-23

짜고 치는 ‘백의종군’

▲ 안재휘논설위원역사 속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은 무인 관료들에게 내리는 처벌의 하나였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내리는 결정이 결코 아니었다. 계급이나 직책없이(白衣) 군문에 종사한다(從軍)는 뜻인 백의종군은 5단계 처벌 중 감옥에 가두는 도형과 곤장을 때리는 장형 사이 경징계의 벌(罰)이었다. 정확하게는 무과 과거 급제자의 신분은 유지해주면서 계급과 직책을 박탈하는 형벌이었다. ‘백의종군’ 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번이나 당한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린다. 첫 번째는 1587년 조산보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직책을 맡던 중 북방 오랑캐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받은 백의종군 처분이었다. 두 번째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과의 갈등에다가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왜국의 작전에 휘말린 선조가 수군통제사 자리를 뺏고 백의종군을 명한 처벌이었다. 두 번 모두 억울한 조치였다. 최근 정치권에서 일어난 이른바 ‘셀프 백의종군’은 야릇하다. ‘친형 강제입원’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과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된 이재명 경기지사는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당의 단합을 위해 필요할 때까지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 평당원으로 돌아가 당원의 의무에만 충실하겠다”면서 백의종군 의사를 밝혔다. 하루 뒤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경수 경남지사도 백의종군을 선언했다.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즉각 이재명 지사에 대한 징계를 유보했다. 이해찬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재명 지사에 대해 “별도 징계는 하지 않기로 했다”며 “재판 결과를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굳이 야당들의 비판과 반발이 아니더라도 ‘셀프 백의종군’은 수상하다. 정황상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느껴진다.민주당이 ‘징계유보’ 결정을 내리는 과정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다. 민주당은 당초 검찰의 기소가 결정되면 징계를 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막상 기소 결정이 나자 당사자는 생뚱맞은 ‘셀프 백의종군’을 밝히고, 당은 고민하는 시늉조차도 안 하고 ‘징계유보’ 결정을 내렸다.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권무죄(有權無罪)라는 말이다. 큰 물고기는 다 빠져나가고, 잔챙이만 걸려드는 마법의 그물도 생각난다. 그 앞뒤 안 맞는 이상한 그물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예나 지금이나 살아남는 일마저 버거운 민초들의 삶이 애처롭다. 언제까지 힘센 자와 돈 있는 자들에게만 유리한 요상한 법치(法治)의 이율배반을 견뎌야 할까. 역사에 비춰 보아도, 상식에 견줘 보아도 현직 벼슬을 유지하는 백의종군이라니 어림없다. 집권당의 입장에서 차기 대선주자 군(群)에 속한 이재명·김경수 두 도백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부실로 인한 민심이반이 점차 심각해지는 시점에 내부갈등마저 폭발한다면 긴박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으리라는 위기의식의 발로일 것으로 짐작되기는 한다.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게 간단할까.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의 청색 완장을 동원해 끈질기게 ‘정치보복’을 일삼는 일도 그렇거니와, 자신들의 허물에는 말도 안 되는 ‘셀프 백의종군’ 쇼와 ‘징계유보’ 결정을 핑퐁하는 행태가 민심에 미칠 악영향은 뜻밖으로 깊고 넓을 수 있다. 여차하면 관습적 ‘오만방자(傲慢放恣)’ 구태에 갇히는 수도 있다.정의가 샘물처럼 살아있는 세상을 일궈내는 일이 이렇게도 어려운가.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시시비비의 천칭으로 지도층의 양심을 정죄해나가는 신실한 정부는 결국 불가능한 것일까. ‘권력’의 자장에 의해 좌우되는 이상한 ‘정의’ 에 장삼이사 평범한 백성들은 답답하기만 하다. 이재명·김경수 두 정치인의 기소와 백의종군은 과연 이순신 장군처럼 역사에 억울한 일로 기록될 수 있을까. 흉중을 파고드는 찝찝한 기운이 만만찮은 엄동 한복판이다.

2018-12-17

고양이 밥그릇 ‘생선’ 빼앗기

▲ 안재휘 논설위원부족한 음식을 놓고 힘센 맞이와 둘째만 배불리 먹고 나머지 동생들을 늘 주리게 만든다면 이는 온당한 처사인가. 자유민주주의가 신봉해온 다수결 원칙은 옳다. 이견이 존재할 때 합리적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공정한 방법은 없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단순다수의 선택에 따르는 단순다수결(simple majority)이야말로 비용을 줄이고 속도를 높이는 지혜로운 의사 결정법이다. 그러나 이 단순다수결은 단지 승자라는 이유로 소수가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독점하는 모순을 파생한다.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과반수로 결정하는 절대다수결(absolute majority), 3분의2나 4분의3 등 특정 다수의 결정에 따르는 제한다수결(qualified majority)을 적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다수결은 결선투표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제한다수결은 결론이 안 날 개연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국회가 2019년도 국가예산안을 야3당의 불참 속에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등의 힘만으로 처리했다. 통과된 내년도 예산 규모는 올해보다 40조원 늘어난 469조6천억원이다. 그런데 예산안 통과 이후에 불어닥친 후폭풍이 예사롭지 않다.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 야 3당은 예산안 처리를 ‘더불어한국당(?)의 국민 기만’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예산안 처리와 선거제도 개혁을 함께 처리하자고 주장하던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지난 6일부터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손 대표가 단식에 돌입하면서 내놓은 입장발표는 자못 비장하다. 그는 “내가 무슨 욕심을 갖겠는가. 이제 나를 바칠 때가 됐다”고 선언했다. 군소 3당이 주장하는 선거제도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다.국회입법조사처가 발표한 “비례대표의 비율이 낮고, 득표율과 의석율의 불비례성이 높다”는 분석보고서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우리 선거제도의 모순은 이제 인내할 수준을 넘어섰음이 자명하다. 우리는 전체의석(300석) 대비 비례대표(47석)가 15.7%에 불과한 반면, 독일의 경우 총의석 598+알파(α) 중 지역구 299석, 비례의석 299+α로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이 1대 1수준이다. 뉴질랜드는 총 의석 120+α, 지역구 65석, 비례 55+α로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1.2대 1이다. 스코틀랜드는 130석 중 지역구 73석, 비례 56석으로 1.3대 1의 비율을 보인다.우리 국회의 비례대표 비율 상향은 시대적 흐름에 정확하게 부응한다. 단순다수제와 양당제, 소선거구제가 품고 있는 승자독식(勝者獨食) 구조의 독소를 놔두고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돼 있기 때문이다. 야3당이 주장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배경은 어디까지나 다당제의 착근을 원하는 민심이다. 실제 여론조사에서도 다당제에 대한 선호도는 절반을 넘나든다. 이제 정치를 두 줄로 세워서 꾸려가기에는 현대인들의 삶이 참으로 다양하다. 다양성 추구는 미래로 나아가는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우리 정치는 다수결 의사결정 구조가 빚어낸 콩도르세의 역설(Condorcet paradox)에 깊이 걸려들었다. 그럼에도 민주당·한국당 거대양당은 당리당략적 계산에만 갇혀 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집권 여당이 가장 손해를 보게 된다’고 소아병적인 견제심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이제 먹이를 나누는 일을 고양이들에게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 선진국처럼, 중립을 철저하게 담보할 수 있는 민간위원회가 중심에 서서 확 바꿔내야 한다. 표심의 왜곡·사표(死票)·승자독식의 관행을 끊어내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선거제도 개편은 시급한 과제다. 고양이 밥그릇에 놓인 저 생선을 빼앗아 다시 나눠야 할 때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추상같은 결단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2018-12-10

보수 재결집의 조건

▲ 안재휘 논설위원지금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는 것은 ‘맹신’이다. 색안경 단단히 끼고 앉아 도무지 사고의 유연성이라고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 편협한 아집 속에 갇혀서 민초들이야 죽든 말든 개의치 않고 좌파 정치실험을 거듭하는 ‘맹신’이 가장 큰 문제다. 공기가 안 좋을 때 미세먼지 피하듯 집안에 꼭꼭 숨어 있다가 조금 살 만하니까 우르르 밖으로 쏟아져나와 케케묵은 권력욕 찌꺼기로 남은 극우 선동가나 불러대는 초라한 ‘맹신’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보수 재결집’ 흐름이 날마다 뉴스가 되고 있다. 누가 누구를 만났네, 누구와 무슨 말을 나눴네 세간의 관심이 치솟기 시작했다. 진보정권의 치세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급상승한 가운데 나타난 이 같은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입에서 나오는 ‘보수통합’이라는 용어부터 마뜩치 않다. ‘보수통합’이라는 개념이 주는 ‘리모델링’ 이미지는 사뭇 부정적이다. 그냥 권력 유지와 확산을 위해서 다짜고짜 뭉치고 보자는 심리라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난날 권력 중심에 서서 양양하던 보수 정권을 말아먹은 사람들은 한 발짝 물러서는 게 맞다. 그런 바탕 속에서 새로운 보수의 성격을 정하고 지표를 세워 재건축에 안성맞춤인 싱싱한 재목들을 과감하게 영입하는 형식의 재집결이어야 한다.지금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국민들이 보수정당에 바라는 것은 결코 썩은 석가래, 낡은 기둥, 더러운 대들보들을 허겁지겁 주워다가 다시 끼워 맞추는 구태의연한 ‘수구 꼴보수 리모델링’ 따위는 아닐 것이다. 민심에 깊숙이 발 담근 새로운 설계도를 보고 싱싱한 재목들이 스스로 몰려드는 미더운 누각을 ‘재건축’하라는 묵시일 것이다. ‘개혁적 보수’ 또는 ‘중도개혁’이라는 미래지향적 이념좌표에 부응하는 알찬 설계도부터 완성해내는 것이 순서다.재건축의 대목수가 되려는 보수 인사들은 적어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를 몸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급락하고 정책들이 차례로 죽을 쑤고 있으니 이때를 놓치지 말자고 달려 나와 모래처럼 손가락을 빠져나간 옛 영화와 권세를 다시 움켜쥘 요량이라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험악한 배신감 허들을 너끈히 뛰어넘을 만큼 신실한 성찰부터 인정받는 것이 맞다.‘반문연대론’ 따위의 정치공학적 결집은 ‘국민지지’를 확보하기는커녕 ‘구태정치’ 이미지만 덧낼 것이다. 말을 다 안 해서 그렇지 지금 국민들은 ‘보수’에 대한 알레르기를 깊이 감추고 있다. 아무리 덧칠을 해도 쉽사리 변하지 않는 이 두꺼운 거부감을 단박에 해소할 만큼 ‘새로운 보수’의 깃발은 감동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패거리 의식에 병든 일부 민심을 겨냥한 퇴행적 재집합 호루라기라면 필경 몰락의 덫에 영 갇히고 말 것이다.한 국가사회가 이념적 건강성을 유지하고 나아가려면,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런 것을 그르다 하는’ 철두철미한 시시비비(是是非非) 정신으로 무장한 평범한 중도민심이 강해야 한다. 군중심리에 기대어 선전 선동에 혈안에 돼 있는 병든 정치가 판을 치는 오늘날 나라의 무게중심을 든든히 잡아주는 평형수로서 민심이 충실할 때 비로소 희망이 있다. 하염없이 중우정치(衆愚政治)를 조장하는 이 저질정치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정치 혁명이 절실한 상황이다.‘보수 정치’가 이 같은 시대적 과업을 지금 완수해내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정말 미래가 사라진다. 작금의 ‘보수 재결집’이 지난날 국민들을 절망시킨 ‘불통 보수’의 회귀를 꿈꾸는 것이라면 이건 결코 아니다. 만일 그런 성격의 흐름으로 민심에 다시 각인된다면 이 땅에 ‘보수’는 정말 끝이다. 어떻게든 중도의 민심 밭을 건실하게 일궈내야 한다. ‘보수통합’이 아니다. 제대로 된 ‘보수 재건축’이 정답이다.

2018-12-03

‘오지선다형’ 정치의 함정

▲ 안재휘 논설위원‘어떤 부모가 과년한 아들에게 맞선을 보러 가자고 했더니, 신붓감 다섯 명을 데려다 놓지 않으면 안 나가겠다고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객관식 시험에만 익숙한, 찍기식 공부가 빚어내는 부작용을 풍자한 것으로 들린다. 매사 그렇게 정답만 알면 되는 식으로 문제를 상대하는 버릇과 능력을 키운 사람은 여러모로 부실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과정’이라는 말은 진리다. 고지만 탈환하면 수단은 상관치 않는 것이 ‘군사문화’라면, 민주주의는 달라야 한다. ‘성과 지상주의’에 함몰되어 구성원의 권리나 소비자의 권익을 무시하고 몰아쳐 성장만을 추구해온 시절이 있었다. 이젠 그래서는 안 된다.정치도 마찬가지다. 아니, 정치야말로 객관식 문제 풀듯이 달려들어서는 결코 정답에 다다를 수가 없다. 설사 그렇게 문제를 조금 풀어낸다고 하더라도 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클 수밖에 없다. 과거 정권들이 장밋빛 공약들을 앞세워 당선된 다음에 해법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한 일들은 부지기수다. 꼼짝없이 사기꾼 이미지를 얻고 국민을 분통 터지게 만든 사례도 즐비하다.오류는 각종 선거에서부터 비롯된다. 뭇 정당과 후보들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화려한 공약을 쏟아낸다. 그 공약의 명분을 살펴보면 구구절절 옳다. 다만 그 많은 예산을 어떻게 조달할 것이냐, 부작용은 또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으면 진보와 보수의 대답은 늘 뻔하다. 진보는 ‘부자 증세’를 해법으로 말하고, 보수는 ‘절약’을 방책으로 말한다. 그런데 둘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진보건 보수건 그들이 내놓는 무지막지한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천문학적인 예산부터 ‘증세’가 아니고서는 결코 마련할 수가 없는 거액이다. 그들은 어거지로 밀어붙이는 정책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 수도 있음을 궤변까지 동원해가며 애써 간과한다. 문제는 정치인들 모두가 그런 내막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거듭한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들이 엄혹한 시련 속으로 접어들었다. 지난해 5월의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진보정치권과 노동계의 주장을 ‘포퓰리즘 공약’에 쓸어 담았다. 준비도 검토도 제대로 되지 않은 설익은 공약들이 남발됐다. 그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정권에 대한 제1채권자로 자리잡았다.공약은 대체로 ‘귀납’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제목부터 정하고, 그게 득표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무조건 내걸고 본다. 과정을 검증치 않고 정답 여부를 판정하는 ‘오지선다형’ 문제를 푸는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유권자들은 더 허술하다. 바람 따라, 편 가르기에 맞춰서 들쥐처럼 표심을 정하는 유권자들의 선택양식은 매번 엉터리다.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부터 뭇매를 맞고 있다. 저소득층을 잘살게 한다는 이 정책은 오지선다형 문제의 답변으로는 정답이다. 그런데 정작 그 여파는 못사는 사람들을 더 못살게 만드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에서부터 탈이 났고, ‘혁신성장’은 발동조차 제대로 못 걸었다. 고차방정식으로 풀어도 정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를 어설프게 덧셈 뺄셈으로 풀려고 대들다가 닥친 심각한 낭패 꼴이다.‘한반도 평화’도 마찬가지다. 객관식으로 따져서는 무조건 정답이다. 누가 감히 이 청청한 명분을 부정할 것인가. 시간을 들여서 주관식으로 꼼꼼히 풀어야 할 문제를 ‘연역 방식’으로 답부터 정해놓고, 시도 때도 없이 남남갈등을 부풀리면서 쩔쩔매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아니 대한민국이 ‘오지선다형’ 정치의 깊디깊은 함정에 빠져들었다. 모순의 대가는 정권과 국민에게 실로 혹독하다. 엄동설한은 닥쳐오는데, 민생부터 먼저 꽁꽁 얼어붙고 있다. 어떻게든 모두 멀쩡하게 살아남아야 할 텐데, 참으로 걱정스러운 을씨년스러운 겨울 문턱이다.

2018-11-26

‘숙려기간’은 끝났다

▲ 안재휘 논설위원‘이혼 숙려기간’이란 제도가 있다. 이혼이 드물지 않게 된 현대의 세태에 맞게 협의이혼 당사자가 일정 기간(양육해야 할 자녀가 있는 경우는 3개월, 그런 자녀가 없는 경우는 1개월)동안 좀 더 생각해보라고 주는 숙고의 시간을 말한다. 지난 2008년 도입된 이 제도는 대체로 ‘홧김 이혼’ 등 결혼생활의 성급한 파경을 예방하는 효과를 뚜렷하게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자유한국당이 전원책 조직강화특위위원 해촉 후폭풍으로 어수선하다. 애초부터 ‘차도살인(借刀殺人)’을 위해 잠시 빌린 칼이 아니냐는 의심 속에 ‘실패’하리란 비관이 무성했었다. 방송해설가 기질을 그예 참지 못하고 무슨 독립군 선봉이나 된 것처럼 나서던 모습부터 이상했다. 칼을 치켜들고서 그렇게 말이 많은 무사를 무서워할 악어가 세상에 어디 있나.전원책 사태를 전후해 수면 위로 급상승한 계파전쟁 양상은 한국당이 위험한 휴화산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보수정치를 말아먹은 시절의 아귀다툼 의식에서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물속에서 음험한 눈알만 뻐끔거리고 있었던 악어떼같다. 세월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농단 행태가 국민의 기억에서 잊히기를 기다리고, 진보정권의 실수만을 기다리고 있는 구시대적 처신으로 읽힐 따름이다.오늘날의 한국당은 반성도 개혁도 안중에 없이 옛 영화만 회억하며 썩은 이빨을 갈고 있는 늙은 사자 집단같은 이미지다. 이런 희귀한 정치패를 바라보는 민심은 어떻게 흐를까. 우선 전 변호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대체로 곱지 않다. 고난도의 미적분 기술로 풀어야 할 복잡한 수학문제를 유치한 덧셈 뺄셈으로 풀려고 대들었다가 망신당한 꼴이라는 비판도 있다.대다수의 비평이 김병준 비대위원장을 함께 겨냥한다. 특히 그 서투른 용병술이 입방아의 대상이 된다. 미상불, 자유한국당은 정치권 안팎에서 우스갯거리가 되고 있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범친박 쪽에서 나오는 “무너진 집수리 공사를 맡겼더니 현장 공사감독과 배관공이 싸우는 꼴”이라는 비웃음은 견디기가 참으로 버거울 듯하다.김수민 바른미래당 원내대변인의 논평이 송곳같다. 김 원내대변인은 “한국당의 쇄신을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했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한국당이 벌떡 일어났다. 알고 보니 죽은 척하고 있었던 모양”이라며 전원책을 ‘불행한 장의사’라고 지칭했다. 그는 “그(전원책)가 떠난 폐가엔 다시 좀비들의 노래, 구태보수의 찬송가가 흘러나온다”고 힐난했다.삼성그룹 회장 이건희가 “(한국의)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평한 것은 지난 1995년이다. 이 발언은 이후 한동안 삼성에 적잖은 시련을 안겨주었지만, 대국민 이미지 향상엔 크게 기여했다. ‘정치는 4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이 평가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국민이 많다는 것은 비극이다.자유한국당은 패색이 짙은 장기판, ‘낡은 보수’라는 대마(大馬)가 잡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바둑판에 미련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갈 길이 보인다. 김병준 비대위의 출범으로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국민들은 이번 조강특위 파동으로 ‘역시나’ 하고 고개를 떨궜다. 제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구시대의 관점에서 내놓는 모든 말들은 ‘수구꼴통’으로 몰리게 돼 있다.이제는 판을 엎을 시간이다. 현존하는 권력의 모순을 스스로 치유할 수 없을 때 국민여론은 정치권에 해산명령을 내린다. 국민들은 지난해 ‘대통령 탄핵’이라는 끔찍한 일을 겪고도 한국당을 아주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인내의 ‘숙려기간’은 모두 지나갔다. 한국당 앞에는 ‘헤쳐 모여’로 가는 갈림길만 남았다. ‘정계 재편’ 말고 길이 없다. 혁신이 무섭고, ‘수구보수’의 옛 영화만 그리운 이들은 이제 정치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새로운 깃발을 올려야 할 시점이다.

2018-11-19

‘태극기’를 돌려다오

▲ 안재휘논설위원드디어, 남한에 ‘김정은 팬클럽’이 출범했다.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한 좌파단체가 ‘백두칭송위원회 결성 선포’ 행사를 열고 “김정은!”을 연호하며 ‘백두혈통’을 찬양했다. 국민주권연대와 한국대학생연합 등 13개 단체는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평양 주민들과 비슷하게 붉은 색 조화(造花)까지 들고 흔들었다. 이날 발표된 이들의 선언문에 김정은은 ‘자주 통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진정 어린 모습’으로 묘사됐다. ‘백두칭송위원회’ 공동대표라는 사람들은 “전 국민적 환영 분위기를 조성해 역사적인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자주 통일의 일대 사변(事變)으로 만들어 분단 적폐 세력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단체를 주도하고 있는 리더그룹 한 사람의 말이 뇌리에 와서 꽂힌다. 그는 “단일기와 단일기 배지 달기 운동을 통해 전국을 단일기 물결로 도배하겠다”고 했다. 나날이 위상이 추락해가고 있는 우리의 ‘태극기’가 떠오른다. 어쩌다가, 바라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애국의 상징, ‘태극기’가 어느새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돼가고 있나 한숨이 절로 난다.지지난해부터 시작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부르짖던 촛불시위 이후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로 뛰쳐나온 박 대통령 지지자들의 등장은 해방 이후 보기 드물었던 또 다른 ‘태극기’ 수난시대를 알리는 비극의 신호탄이었다. 마치 이 나라는 ‘촛불’과 ‘태극기’ 두 패로 갈려서 하고한 날 팔뚝질이나 해대는 이상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와 ‘박근혜 대통령 석방’을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태극기 부대’라는 고유명사가 붙여졌다. 자유한국당 조직강화특위 위원이었던 전원책 변호사가 이 문제를 건드렸다. 그는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태극기 부대는 극우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그게 아니라도, 민초들은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광복절에 태극기 게양하는 것조차도 주저주저한다는 말이 나돌았던 판이다. 조강특위 위원의 경솔한 말 한마디가 제1야당 한국당을 더욱 곤경에 처박아 넣었다. 한국당이 곧 ‘태극기당’이 될 것이라는 진보 정치인, 진보언론들의 비아냥과 저주는 더욱 신랄해지고 있다.‘박근혜 탄핵 무효’를 끈질기게 외치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드러난 전 정권의 실정(失政) 진상이 너무나 끔찍하다. 정권을 넘겨주고 지리멸렬하는 ‘보수정치’의 현주소만 보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수 민심과 동떨어진 편견을 외치는 자리에 태극기를 전유물처럼 앞세우는 모습은 씁쓸하다.마찬가지로, ‘태극기’를 마치 수구꼴통의 상징인 양 여기는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젖어 들고 있는 인식의 오류도 하루빨리 시정돼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촛불집회를 포함해 어떤 집회를 해도 떳떳하게 태극기를 걸어놓거나 손에 들 수 있어야 한다. 신성한 가치를 품고 있는 ‘태극기’의 의미와 상징을 훼손하는 그 어떤 언행도 중단돼야 마땅하다.이 나라의 어느 군대도 ‘태극기 부대’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정당은 모두 ‘태극기당’이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이제 태극기를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시간이다. ‘인공기’를 국기로 삼겠다는 음모가 아니라면, ‘단일기’를 ‘태극기’의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하는 불순한 의도는 차단돼야 한다. 태극기를 지키기 위해 희생되신 선열들을 결코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태극기를 들고 3·1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총칼에 쓰러진 희생자 수는 7천500여명에 이른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가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전몰장병은 또 얼마인가. 태극기를 하루빨리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 국민이다.

2018-11-12

병역거부 ‘무죄’ 단상(斷想)

▲ 안재휘 논설위원이순신(李舜臣)은 전라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 씨를 여수의 고움내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다. 어머니 변 씨는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라고 격려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전란을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당파싸움을 지속하다가 불과 44년만에 병자호란의 참화를 다시 당했다. 조정은 군역(軍役)을 감당하는 양인(良人) 계급이 급격히 줄어 들어가는 데도 제도를 바꾸지 않았다. 천민들은 물론 현직 관료, 학생(성균관 유생, 사학 유생, 향교 생도)과 2품 이상의 전직 관료 등은 모두 군역을 면제받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귀족의 의무) 따위는 싹수조차 전혀 없었다.실학의 비조라고 일컬어지는 유형원(柳馨遠)은 반계수록에서 ‘천하 공공의 이(理)로 말한다면, 어찌 사천(私賤)만이 국민이 아니겠는가?’라고 개탄한다. 그는 국방에 대해서 병농일치의 군사 조직과 함께 성지 수축과 무기 개선·정기적인 군사훈련 실시 등을 주장하면서 천민을 줄여나갈 방안만 내놓았을뿐 ‘노비해방’의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조선은 자력으로 나라를 지킬 시스템도 의지도 준비돼 있지 않은 나라였다.군역 대신에 군포(세금으로 내는 옷감)를 내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가 실시됐고, 돈을 받고 대신 군역을 치러주는 말도 안 되는 대립군제(代立軍制)까지 시행됐으니 참으로 한심한 나라였다. 많은 이들이 조선을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라고 기억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식 사대주의에 찌들어 세상을 도무지 넓고 깊게 살피려고 하지 않았던 이상한 국가였다.종교적 신념 등을 이유로 한 병역거부는 정당한 사유에 해당돼 ‘무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현역병 입영을 거부해 기소된 오모 씨의 상고심에서 대법관 9대4의 무죄 취지로 사건을 2심으로 돌려보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유죄라고 본 2004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가 14년만에 바뀐 것이다. 현재 같은 사유로 재판을 받는 930여명의 병역거부자들에 대해서도 줄줄이 무죄 선고가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결코 가벼운 변화가 아니다.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의무’보다 개인적 ‘양심’의 가치를 상위에 자리매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여론은 일파만파다. 군필자들의 상대적 박탈감 토로와 함께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은 비양심적인가”라는 거부감까지 표출되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대법원 판결에 반대하는 내용의 청원 글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관심은 급속히 ‘대체복무’에 쏠린다. 소방서와 교도소에서 합숙하는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복무기간은 2021년 말까지 단축되는 현역 18개월의 두 배인 36개월이 유력하단다. 이제 국민여론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고 36개월간 소방서나 교도소에서 근무하는 불공평을 용인할 것이냐 여부에 달려 있다.‘국방’은 이제 그동안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국민의 의무’ 개념에서 빠졌다. 인구감소가 병력자원 감소로 이어지고 있는 국면이다. 이러고도 이 나라의 안보는 과연 넉넉할까. 이순신은 충청도 아산 본가에 머물고 있던 셋째아들 이면이 급습한 왜군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다가 도륙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규한다. 사랑하던 아들 이면이 죽은 지 1년여만인 1598년 11월 이순신은 남해 노량 해전에서 왜선 200여 척을 쳐부수고 장렬히 전사한다.

2018-11-05

‘낙하산’ 묵극(默劇)

▲ 안재휘 논설위원관직사냥(獵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캠프에 얼쩡거렸던 사람들이 ‘낙하산’을 타고 소리없이 공기업 임원을 비롯한 고위직에 내려앉은 일이 비일비재하다. 바른미래당이 지난 25일을 ‘낙하산 근절의 날’로 지정하고 문재인 정부의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人事)를 집중적으로 폭로했다. 바른미래당이 밝힌 현 정부의 ‘낙하산’ 현상은 전 정권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바른미래당이 공개한 ‘낙하산·캠코더 인사 현황’에 따르면 문 정부 출범 이후 임명된 공공기관 낙하산은 최고위 임원 364명의 44%인 161명(기관장 94명·감사 67명)으로 파악됐다. 이는 국회 상임위별로 소관 공공기관 340곳의 신규 상임·비상임 이사 1천722명을 전수조사한 결과다. 김관영 바른당 원내대표는 “올 9월까지 문 정부 1년 4개월 동안 박근혜 정부 초기 2년보다 더 많은 낙하산 인사가 이뤄졌다”고 비판했다.이명박 정부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박근혜 정부의 정피아(정치인+마피아)라는 풍자적 네이밍으로 여론에 끈질기게 오르내리던 ‘낙하산’ 논란에 우리는 넌덜머리가 나 있다. 정치권의 엽관 행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전인수식 핑계로 못 끊어내는 고질적 악습 중의 하나다. 정권의 정책수행 효율성을 위해서 불가피한 필요악이라는 당위론도 있고, 선거전 동지들에게 해줄 게 그것밖에 없다는 현실론까지 무성하다.관행처럼 받아들여져 온 엽관제(獵官制·spoils system)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의 폐해로 얼룩진 우리 정치가 빚어낸 불행한 유산이다. 아무리 보아도 전문성이 부족한 인사들을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공직에 부적(不適)하게 갖다 꽂는 이 같은 부조리는 ‘누군가 언젠가는’ 완전히 끊어내야 할 적폐임에 틀림없다. 엽관제를 처음 시작한 미국에서는 지난 1881년 대사직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찰스 귀토가 제20대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을 암살한 사건을 계기로 폐지됐다. 대신 능력기준으로 공직자를 임명하는 메리트 시스템(merit system)이 등장했다. 조선시대에도 벼슬을 얻으려고 고관대작이나 권세가를 분주하게 찾아다니는 분추경리(奔趨競利)가 극심해 ‘분경금지법’까지 만든 적이 있다. 엽관이 옳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대선캠프나 시민단체, 여당 경력이 대부분인 인사들을 갖가지 편법까지 동원하면서 정부와 공기업에 내려앉히는 행위는 국민들이 바라는 정의로운 나라, 효율적인 국가의 개념에 전혀 맞지 않다. 특히 ‘불공정’ 관행에 대해서 더이상 참지 않는 우리 국민들에게 비겁하게 과거를 핑계대는 일은 이제 용납되지 않는다. ‘누군가 언젠가는’ 끊어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왜 지금은 안 되는가. 역대정권들은 거친 ‘낙하산 논란’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필경 이 정권도 눈 질끈 감고, 귀 막고, 말없이 꿋꿋이 공직 나눠먹기에 열중할 것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기묘한 묵극(默劇)이 펼쳐질 것이다. 정권이 내리꽂는 ‘낙하산 인사’ 부조리가 최근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고용세습’의 뿌리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이걸 이대로 두고서 ‘고용정의’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문재인 정권은 보수정권의 낙하산 인사 폐해를 맹비난하며 권력을 잡은 정권이다. 국민들은 최소한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정권이 집권과 함께 전리품 나눠먹듯 되레 더 많은 ‘낙하산 인사’를 일삼고 있다니 어이가 없다. ‘적폐청산’을 노래처럼 불러대는 당신들의 눈에 ‘낙하산 인사’는 정녕 ‘적폐’로 보이지 않는 것인가. 아니, ‘낙하산 인사’ 행태는 당신들이 한사코 추종하는 ‘촛불정신’에 과연 부합하는가. 민심의 눈으로 묻고 또 묻는다.

2018-10-29

한국당 ‘가치논쟁’ 어디로 갔나

▲ 안재휘논설위원시대를 제대로 못 읽어내는 자유한국당의 난독증(難讀症) 고질병이 도지고 있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질 때의 장담처럼 환골탈태의 새 길을 열어가기는커녕 미래가 점점 더 혼미해지고 있다. 그 중에도 가장 수상한 것은 민심의 소재와 나라의 비전을 담은 감동적인 이정표를 세우고 새 깃발 아래 인재들을 품으리라던 밑그림이 사라진 일이다. 뒷방에서 무슨 말들을 나누는지 다 알 수는 없으나, 혁신을 위한 몸짓은 여전히 감감하다.전권을 약속받고 조직강화특별위원이 된 전원책 위원은 날마다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은 담론들을 흘려 호사가들 따따부따의 소재를 보태고 있다. 조용히 조직정비의 칼자루를 휘둘러야 할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새로운 척도를 위한 사전작업일 수는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시대에 맞고 미래가치에 부합하는 일관된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원책의 발언은 사방에서 ‘갈팡질팡’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극렬 친박그룹인 일명 ‘태극기부대’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한 것부터 반향이 깊다. 지난 2012년 비상대책위가 ‘경제민주화’란 이름으로 진보주의 강령을 받아들인 것을 한국당 침몰의 원인이라고 지목하면서 전원책을 향한 우려의 눈길은 부쩍 사나워지고 있다. ‘적폐청산’ 폭탄에 초토화된 보수를 포괄할 설계도의 포석일지라도 방향이 그래가지고는 안 된다. 끼리끼리 뭉치는데는 유리할망정 민심을 얻는데는 오히려 역효과다. 국민들이 원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진취적인 가치는 모두 진보에게 내어주고, 케케묵은 꼴보수 시대의 향수만 부여안고 퇴행하겠다는 심산이 아닌 이상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 도대체 김병준 위원장이 야심차게 말하던 치열한 ‘가치논쟁’은 어디로 갔는가. 전원책의 어지러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전혀 논쟁하지 않는 한국당 정치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정책에서 여러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따가운 지적이 점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변화가 단박에 자유한국당을 필두로 하는 보수정치권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분석하는 것은 명백한 오판이다. 자기가 잘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허물로 인한 반대급부만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발상은 이제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자유한국당은 다수 국민들이 ‘묻지마 지지’를 견고히 받쳐주던 시대를 완전히 잊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이 남긴 ‘국정농단’으로 깨지고 부서진 잔해가 아직 발 아래에 그대로 널려 있다. 터무니없는 추억에 젖어 진보정권의 에러(Error)에나 박장대소하는 일로 반전의 기회를 노린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바닥민심에 발 담그지 않은 정치담론은 소용이 없다. 지향점부터 확 바꿔야 한다.자유한국당을 향한 민심의 요체는 여전히 ‘수구꼴통’·‘반평화 세력’·‘부패집단’·‘부자들만 편드는 정치인’·‘기득권 수호세력’·‘패거리 정치의 화신’ 따위의 부정적 이미지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확(的確)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혁신의 틀을 짜야 한다. 어느 부분이 썩고 병들었는지, 민심을 얻기 위해서 세워야 할 혁신의 깃발은 어때야 하는지부터 확정하는 것이 순서다.지금도 늦지 않았다. ‘가치논쟁’의 용광로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야 한다. 그 안에서 타 죽을 각오를 하고 치열하게 논쟁하라. 이 시대에 ‘보수정치’가 정녕 존재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지혜를 짜내고 또 짜내야 한다. 조강특위 위원 한 사람의 말에 이리저리 출렁거리는 이 해괴한 난장 속에서 더 이상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지독한 난독증을 그대로 갖고서는 도무지 희망이 없다. 이쯤 됐으면 제발 뭔가 좀 시원하게 달라져야 할 것 아닌가.

2018-10-22

아찔한 ‘애드벌룬’ 풍경

▲ 안재휘논설위원‘애드벌룬’이라는 이름의 정치기법이 있다. 여론의 향배를 슬쩍 떠보고 대응하기 위해서 파격적인 이슈를 던져보는 정치술수다. 일단 띄워보고, 반응이 좋으면 막 밀어붙이고, 여론이 사나우면 흔히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거나 “진중치 못했다”며 사과 입장을 취해 거둬들이는 절차를 밟는다. 주요 정치인이나 정당들은 이슈 선점으로 자신들의 지명도를 높이는 이득까지 얻을 수 있는 이 정치기법을 간단없이 쓴다. 국정감사장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5·24 대북제재 조치 해제를 검토 중”이라는 깜짝 답변을 내놓아 정치권이 시끌하다. 강 장관의 발언에 외교부 수장이라면 당연히 따라 붙어야 할 ‘북한의 비핵화 진전이 있을 때’라는 수식어는 없었다. 야당의 질타가 빗발치자 강 장관은 “범정부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말이 너무 앞섰다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논란은 미국 쪽에서 심각한 사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 장관의 발언과 관련한 기자의 질문에 “한국은 우리의 승인(approval)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며 강경한 어조로 반박했다. 트럼프가 쓴 단어가 유쾌하지는 않지만, 강 장관의 발언을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해 보인다.국감장 모습은 전형적인 ‘짜고 치는 고스톱’ 장면이다. 주연은 최근 입만 열었다 하면 난리법석의 흙먼지를 일으키는 이해찬 대표였다. 작년 봄 대선 유세에서 “극우 보수세력을 철저히 궤멸시켜야 한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던 이 대표는 ‘20년 장기집권’에 이어 ‘50년 장기집권’까지 부르댔다. 평양에서는 북한 안동춘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에게 “제가 살아 있는한 (정권을) 절대 안 뺏기게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는 말도 했다. 노회한 정치인 이해찬의 “국가보안법 논의”등 평양발언을 포함한 일련의 언급들은 결코 실수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출한 ‘4·27 판문점선언 비준동의안’ 의결 여부를 놓고 정치권은 치열하게 내연(內燃) 중이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비준동의안 비용추계서를 보면, 판문점선언 이행에 필요한 내년도 총예산은 4천712억원으로 올해 예산에 준해 편성된 1천726억원보다 2천986억원이 늘어났다.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예산은 앞으로 얼마나 투입될지 모른다. 북한경제 정상화비용에 대해 씨티그룹은 약 70조8천억 원을 전망했고, 미래에셋대우는 총 112조원으로 추계했다. 지난 2014년 금융위원회는 ‘통일금융 보고서’를 통해 총 153조1천2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했다. 정부여당의 국회비준 요구는 ‘백지수표’에 서명을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작금 한반도 하늘에는 한 가지라도 삐끗하면 8천만 겨레의 생존이 위태롭게 될 수 있는 아찔한 애드벌룬들이 수두룩하다. 걱정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반통일’‘반평화’ 내지는 ‘적폐세력’으로 몰아때리며,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무한신뢰를 바탕으로 대북 과속패달을 밟고 있는 문재인 정권은 도무지 실패를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여전히 ‘먹을 것 없는 잔치판’을 벌여놓고 소문만 부풀리는 정부여당의 대북전략은 정녕 괜찮은 걸까. 자기 패를 미리 다 보여주는 이런 협상행태는 또 무슨 희한한 외교기술인가 싶다.무엇보다도 미국과의 엇박자가 불안요소다. ‘보수’는 우리가 이렇게 배은망덕하게 굴다가 미군이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진보’는 미국을 자극하면서도 결코 미군철수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욱대기는 풍경도 얄궂다. 아무리 김정은의 입지를 위한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해도 신묘한 해법이 되기에는 여전히 어림없어 보이는, 남한의 ‘불가역적’ 무장해제가 걱정스럽다. 한반도 평화를 갈구하는 국민들의 염원은 점점 더 혼미한 ‘도박’의 영역 깊숙한 곳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2018-10-15

전원책의 ‘태산명동(泰山鳴動)’

▲ 안재휘논설위원더불어민주당 수장 이해찬 대표의 ‘장기집권’ 호언은 이제 습관이 된 듯하다. 지난 8월에는 ‘20년 장기집권’을 언급하더니, 9월에는 ‘50년 장기집권’을 입줄에 올렸다. 며칠 전 10·4공동선언 11돌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평양에 가서는 북측 정치인들과 면담하면서 “제가 살아있는 한 절대 (정권을) 안 빼앗기게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고 호기를 부렸다. ‘보수궤멸론’을 부르대는 강골정치인 이해찬의 거듭된 ‘장기집권’ 발언에 대해 제대로 논박하는 보수정치인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권 판세운동장의 기울기가 워낙 가파르다보니까 잽이든 어퍼컷이든 그저 무차별로 얻어맞고만 있을 따름인 모양새다. 보수정치가 전열정비를 제대로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스로 변할 결기와 능력 자체가 없는 데다가 여전히 사사로운 권력유지의 옹졸한 욕망들만 그득하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당내 253개 당협위원장 직무 평가와 인선을 주도할 조직강화특별위원으로 보수논객 전원책 변호사를 발탁했다. 2020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허물어진 집을 새로 지어낼 대목수로 전 변호사를 영입한 것이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의 편법이라는 일각의 비판에 김 비대위원장은 일단 ‘모든 결과는 내 책임’이라고 막아선 형국이다. 전 변호사가 국민들로부터 한국당이 외면당하는 원인으로 박근혜 정부의 실정 혹은 탄핵 과정에서의 ‘책임의식 부재’를 지적한 것은 적절하다. “명망가 정치를 없애야 한다”면서 계파정치 청산을 강조한 대목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평소에 했던 “부패 정치인은 단두대로 보내야 한다”는 극언 때문인지 전 변호사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끌벅적한 ‘칼춤’만을 연상한다.정치현장 경험이 없는 그의 활약을 놓고 벌써부터 비관론이 득달같다. ‘태산을 울리고 흔들지만, 겨우 쥐새끼 한 마리 나올 것(泰山鳴動鼠一匹)’ 이라는 악담마저 횡행한다. 그 동안 정치권에서 숱하게 일어났던 ‘물갈이’ 소동을 반추해보면 그런 박절한 전망들을 무작정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썩은 물은 그대로 두고 ‘붕어갈이’만 거듭했던 어리석음에 대한 우려의 발로일 것이다.이 나라 보수정치의 운명을 좌우할 제1야당 자유한국당 재건축은 미래지향적 이념좌표와 민심을 제대로 읽어낸 정치지표 혁신이 우선돼야 한다. 당협위원장 교체같은 ‘붕어갈이’는 그 맨 마지막 절차가 돼야 마땅하다. 섣부른 인적청산에 앞서 ‘가치논쟁’부터 시작하겠다던, 김병준 위원장이 취임일성으로 천명한 혁신 밑그림이 문득 떠오른다.물밑에서 얼마나 진척이 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김병준호(號)가 한국당을 이끌어온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의미 있는 ‘가치논쟁’이 제대로 일어난 기억이 별로 없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좀 더디더라도, 썩은 물을 그냥 두고서 새 붕어만 찾으러 다니는 어리석은 방책에 함몰돼서는 안 된다. 미래를 향하는 민심에 바탕을 둔 새로운 보수이념 정체성 구축이 더 시급하다. 새로운 보수의 가치를 녹여낸 감동적인 이정표를 먼저 세워놓고 그 아래에 다시 모이자고 외치는 것이 백번 옳다. 전원책의 말처럼 이번이 자유한국당의 운명을 결정할 최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제대로 해야 한다. 앞장 선 이들 어느 누구도 사심(私心)에 묶여서는 안 된다.작금 경제정책과 대북정책에서 과속과 도박을 일삼는 정권 앞에서 보수의 목소리는 초라한 넋두리 취급밖에 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여태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차원의 장기폭정 질곡 아래에서 신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한국당 전원책의 ‘태산명동’ 함수풀이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고작 쥐새끼 한 마리 나오는 처참한 결말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명을 부디 잊지 말기를 당부한다.

2018-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