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김상곤` 딜레마

▲ 안재휘 논설위원`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란 국적·인종·성·종교·성 정체성·정치적 견해·사회적 위치·외모 등에 대해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발언을 말한다. 증오의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증오언설(憎惡言說)`이라고도 한다. 독일·영국·일본 등은 형법을 통해 `헤이트 스피치`를 징역형으로 규제한다. 특히 독일 의회는 최근 5천만 유로(652억8천800만원)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강력한 법을 제정했다. 교육부장관에 지명된 김상곤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를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혼란에 빠졌다. 청문회 양상은 공수(攻守)가 완전히 바뀐 채 `무차별 공격`과 `낯 두꺼운 두둔`으로 일관된 짜증나는 구닥다리 연속극이었다. 다만 진보정권으로 바뀐 정치현실을 반영하듯 여당 청문위원들의 입에서 `사상검증` `매카시즘` `색깔론` 등의 용어를 동원한 극렬한 엄호가 쏟아졌다는 점이 달랐다.최근 벌어지고 있는 국회 인사청문회는 야당 공격수들의 형편없는 전투력이 노골적으로 들통나는 요령부득의 솜방망이 검증 쇼다. 특히 자유한국당 소속 위원들의 청문 수준은 궤멸 위기에 처한 보수정당의 허술한 속살을 적나라하게 노정한다. 보수 세력의 몰락을 불러온 으뜸이유로 지적되는 `이념적 빈곤`이 곧바로 `논리의 빈곤`으로 이어지는 현장이 인사청문회장이다.국가의 존속과 권력 재생산에 필수적인 헤게모니는 `물리력`과 `시민적 동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한국의 보수는 케케묵은 논리에 갇혀 공론영역에서 주장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설득력은 반대세력으로부터도 일정부분 공감을 얻는 수준까지 확보돼야 비로소 성공한다. 소위 `싸가지 없는 언어폭력`으로 극렬지지자들이나 만족시키는 구태로는 어림 턱도 없다.김상곤 인사청문회에서 나타난 야당 청문위원들의 인격모독성 발언이나 지나친 사상검증 공세를 `증오언설`이라고 공박한 여당 청문위원들의 지적에 일부 납득할 여지는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견줘볼 때 현재 야당의 티 뜯기는 과거 제1야당이던 시절 더불어민주당의 무지막지한 발목잡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여당 의원들의 `헤이트 스피치` 비난은 고소(苦笑)를 부른다.여야의 청문보고서 채택 합의여부와 관계없이 문재인 대통령은 김상곤 후보자를 임명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표절왕`이라는 지적뿐만 아니라 유독 사상편향성 문제에 샛눈이 꽂힌 김 후보자의 임명여부는 큰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 짐작컨대, 김 후보자에 대한 임명 강행은 본격적인 정치적 냉기류를 불러올 것이다.여당과 진보성향 언론들이 입을 모아 `하자가 없다`고 박박 우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상곤 후보자에 대한 걸쩍지근한 이미지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김 후보자는 국가보안법 폐지·한총련 합법화·이라크전 파병 반대·한미 FTA 반대·주한미군철수·한미동맹 폐기선언·반제민족해방·자본주의 타도 등을 주장하는 민교협·전국교수노동조합·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맑스코뮤날레 등 진보단체의 중심에서 활약해왔다.그는 청문회장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해 “일부 개선이 필요하다”고 한걸음 물러섰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더 효율적이고 더 민주적이게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 학자적 소신”이라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답변은 신념을 감추기 위한 궤변(詭辯) 잔상을 남기고 있다. 적지 않은 국민들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가 왜 명징하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지 궁금해 한다.김상곤 교육부장관 후보자가 정부여당의 필사적인 옹호를 등에 업고 임명되었을 경우 일어날 국민적 갈등이 벌써부터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김상곤이 바라보고 있는 `교육혁신`의 지평선은 대체 어느 지점인가. 아이들의 미래를 맡겨도 될 만큼 그의 `자유민주주의` 의지는 신실(信實)한가.

2017-07-03

`귀머거리 정치`의 늪

▲ 안재휘 논설위원아테네(Athens) 민주정은 추첨을 통해 공직자를 선출하는 제도를 갖고 있었다. 시민들은 추첨 결과를 곧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제도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추첨을 통해 선원이나 건축가, 또는 플루트 연주자를 뽑지 않는다”며 공직자 선출제도를 비웃었다. 스파르타와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참패한 상태에 있던 아테네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런 시대적 상황이 어리석음을 깨우는 `등에` 같은 존재였던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갔다.BC 399년 5월 시인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신(神)을 거부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며 고발했다. 소크라테스는 재판 과정에서 아테네 법관들로부터 “만약 철학을 포기하면 석방해주겠다”는 회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음미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말로 거절한다. 배심원 중 과반수가 소크라테스의 유죄를 인정했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독미나리에서 채취한 독이 담긴 독배를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여의도가 `귀머거리 정치`의 늪에 빠졌다. 정부여당은 여론 지지율 마약에 휘둘려 `편견`을 `확신`이라고 우기기 시작했고, 야권은 제 역할을 찾지 못해 허둥대고 있다. 국민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들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재야세력들이 서둘러 대선 청구서를 들이밀며 길거리로 나섰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당장 지키라며 깃발을 흔들어대고, 청와대 앞에는 `의사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의 억센 주장들이 넘쳐난다.문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수상한 잡음들이 전통적인 `한미동맹`의 미래에 암운을 던지고 있다. 반미 세력들의 준동을 의심케 하는 현상마저 얼비친다. `사드배치 결사반대` 구호를 외치는 데모대가 미국대사관을 포위하는 시위 이벤트까지 벌였다. 미국으로 날아가 `문재인 대통령의 뜻`도 아닌 이상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던 문정인 대통령외교안보특보는 개선장군처럼 큰소리를 치며 돌아왔다.문정인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아무도 하지 않는 말을 용기 있게 했다”고 치켜세웠고, 우상호 전 원내대표는 “문 특보 발언은 북한용”이라며 역성을 들었다. 박지원 전 국민의당 대표는 “문 특보의 워싱턴 발언은 옳았다”고 종래의 비판을 뒤집었다. 청와대는 분명히 문 특보의 발언이 한미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엄중 경고했다고 밝혔었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가.정부여당은 역할을 분담하여 한쪽으로는 애드벌룬 띄워놓고, 다른 쪽에서 오리발 내미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법을 구사하기 시작한 게 분명하다. 혹여 높은 지지율에 취한 나머지 귀를 아예 닫고 가겠다는 신호는 아닐까 우려스럽다. 민심의 소리에 `귀머거리` 행세를 하는 것은 비단 정부여당 뿐이 아니다. 정권의 처참한 실패로 문패를 바꿔 단 자유한국당 역시 마찬가지다.자유한국당은 아무래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만년 지지층에 너무 오래 젖어 있어서 오감이 퇴행한 듯하다. 이 혹독한 정치적 빙하기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국회의원 철밥통 임기를 믿고 민심의 바다에서 아예 촉수를 거둬들인 모양새다. 이렇게 반성도 통회도 없는 낯 두꺼운 행태로 권력놀음에 빠져서 당권을 노린 막말전쟁이나 벌이고 있는 모습이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소크라테스가 말한 `음미되는 삶`을 되새겨본다. `귀머거리 정치`가 바라는 것은 필경 `벙어리 국민`일 것이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묻고 또 묻는 방식으로 세상을 깨우쳤던 소크라테스는 결코 `벙어리 국민`을 원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희대의 현자를 독살한 아테네의 귀머거리들은 머지 않아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귀 닫고 궤변만을 일삼는 이 나라 정치가들은 대체 어떤 나라를 그리고 있는 것일까. 이 답답하고 유치한 `귀머거리 정치`의 늪에서 헤어날 길은 정녕 있는가.

2017-06-26

`네모난 삼각형` 찾기

▲ 안재휘 논설위원세종 시대를 떠받친 정치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황희(黃喜)에 대한 후세들의 평가는 `최상의 청백리(淸白吏)`에서 `최악의 탐관오리`에 이르기까지 극단을 오간다. 일국의 정승이 멍석을 깔고 살면서 보리밥과 된장·풋고추밖에 없는 밥상을 받고 살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세종실록에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았다`거나 살인한 유부녀를 숨겨주면서 간통을 저지른 너저분한 인사였다는 기록을 함께 남겼다황희는 세종 8년(1426년) 우의정에 제수된 이래 무려 24년 동안 정승 자리에 있었고, 1432년부터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세종의 부왕인 태종 이방원이 황희에게 “내 아들을 부탁한다”고 당부했기 때문에 세종대왕도 그를 가벼이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황희가 정세판단 능력이 기민하고 업무수행능력이 탁월했으며 무엇보다도 주군의 심리를 잘 간파했다는 점이다.문재인 정부가 집권초기 인사문제로 덜컹거리고 있다. 발탁한 인재들이 뜻밖의 도덕성 시비에 걸리면서 스텝이 꼬이고 있는 모양새다.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첫 낙마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에 이어 강경화 외무부장관까지 임명 강행 수순을 밟았다.문 대통령은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며 여론조사에서 나오는 높은 지지율에 기대 야당의 반대를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박수현 청와대대변인의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데 참고하는 과정으로 인사청문회를 이해하고 있다”는 브리핑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참고용`이라고는 말한 정권이 또 있었던 지를 되짚어보게 한다.일련의 발언들은 높은 지지율에 취한 청와대 내부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시시콜콜 어깃장을 놓는 야당 행태는 온당치 못하다는 세평을 업고 내달리고자 하는 심사가 읽힌다. 문 대통령이 야당의 반대를 묵살하고 장관 임명을 밀어붙이는 것은 절박감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국민의 뜻 존중`이 `국회 무시`와 병치될 수 없는 모순은 어떻게 해결할 참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우리 정치풍토에서 야당의 고질적 `발목잡기` 근성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국민들은 현재의 정부여당이 불과 몇 달 전까지 어떤 야당이었는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민주당의 야당노릇은 작금의 야당 행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거칠었었다. 이는 지난날 자신들의 언행에 대한 성찰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는 빼도 박도 못할 사유다.취임 이후 지속되던 문 대통령의 광폭 소통 행보가 주춤거리고 있다. 장관 인선 발표도 홍보수석에게 미루고 있고, 비서관회의 모두발언 형식으로 정치현안에 대한 견해를 일방적으로 피력해 뉴스를 만드는 전 정권의 불통행태도 다시 나타났다. 스스로 제시한 5대원칙에 발목이 잡혀 조각 문제가 삐걱거리는 데 대한 진솔한 자기고백 따위의 반전책은 애써 생략하고 있다.야당을 비롯한 비판자들은 문 대통령의 모습에서 `쇼통(Show通)의 그림자`를 느낀다고 말한다. 대중의 인기를 높이는데 유효한 보여주기 식 소통 이벤트를 지속하면서, 돌아앉아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는 듯한 이미지가 슬슬 어른거린다. 이 불길한 `도로 불통(不通)`의 먹구름을 걷어낼 묘책을 찾아내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이 직접 국민 앞에 나서서 신실(信實)하게 반성하고 해명하고 다짐하는 절차가 필요해 보인다.오늘날 국가운영의 동량(棟樑)을 구하는 일은 `네모난 삼각형`을 찾아내야 하는 어불성설의 난제와 같다. 개똥밭 군중 속에서 오물 한 점 묻지 않은 `별종`을 찾아내는 일만큼 지난하다. 제아무리 위대한 세종대왕이라고 해도 오늘날 같으면 황희처럼 불가사의한 인재를 찾아 국정을 맡기기란 어림없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낮은 자세로 초심을 지켜가는 권력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는 일이다.

2017-06-19

`꼼수` 대 `꼼수`

▲ 안재휘 논설위원친구가 되기로 서로 약속한 나귀와 여우가 숲 속에서 무서운 사자를 만났다. 이때 여우가 사자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저 나귀를 잡게 해줄 테니 나는 살려 달라”고 간청한다. 사자가 “알았다”라고 하자 여우는 나귀에게 돌아와 “살아날 방법이 있으니 따라오라”고 꾀어서 웅덩이에 빠트린다. 그러자 사자는 웅덩이에 빠진 나귀는 나중에 잡아먹기로 하고 여우부터 먼저 물어뜯는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나귀, 여우 그리고 사자`의 줄거리다. 해묵은 한반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문제가 또다시 국내는 물론 동맹국인 한국과 미국 사이에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사드 미사일 4기 추가 반입이 국방부 보고에서 누락된 것을 알게 된 문재인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발표로 시작된 논란은 일파만파다. 국방부 정책실장이 직무에서 배제되고, 청와대는 `환경영향평가` 카드로 미사일 추가 배치에 빗장을 걸었다.문 대통령이 사드부지 70만㎡에 대한 일반 환경영향평가를 지시함으로써 최소한 1년 가량은 온전한 배치가 불가능하게 됐다. 파장은 미국 정치권에까지 닿아 이런저런 수상한 뉴스들이 불거져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은 `사드보고 누락 청문회`까지 거론하며 을러대는 반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배치 강행을 주장하고 국민의당은 문 대통령에게 대안을 촉구하고 있다. 청와대는 국방부가 전체 공여 부지를 33만㎡ 이하로 축소해 소규모 환경영향평가를 진행하는 `쪼개기 공여` 꼼수를 부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논란이다. 사드 부지가 환경영향평가법이 정하고 있는 `국방부장관이 군사작전의 긴급한 수행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예외규정에 해당되느냐 아니냐 하는 관점이 핵심이다국방부가 `쪼개기 공여` 꼼수를 부렸다면, 청와대는 `보고누락` 까발리기에다가 `환경영향평가` 꼼수를 동원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판국을 `긴급`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차원에서 곧장 판별이 될 문제다. 국방보다도 더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국정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해답은 자명하다.`사드`는 본질적으로 동맹국 미국의 군대가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전략자산이다. 미국은 북핵 위기가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전략폭격기나 핵잠수함, 항공모함을 잇달아 한반도 주변에 모으고 있다. 항공모함이나 핵잠수함도 환경영향평가를 받아야 하니 기다리라고 해야 비로소 이 나라가 주권국가로서의 자존심과 체면이 살아나는 것인가. 도대체 지금 한반도는 위기인가 아닌가.정말 코믹한 것은 중국이 한반도 사드 배치 반대의 명분으로 삼고 있는 `레이더`가 이미 성주골프장 미군 사드포대에서 가동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드포대에 미사일을 마저 배치하는 일만 왜 문제가 되는가. 사드배치가 미국본토 방어용이기 때문에 용납이 안 된다는 일부의 주장은 미국을 혈맹으로 인정하지 않는 큰일날 논리다.북한의 야포와 다연장 로켓포 1만3천여 문의 존재를 거론하면서 마치 남의 나라 일처럼 `사드`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북한 핵 공격을 막을 속 시원한 대안을 따로 들어본 적이 없다.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한미동맹`의 균열이다. 미국의 야릇한 움직임이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외교는 일호차착을 허용하지 않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펼쳐진다. 괴팍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장사꾼 꼼수기질을 발휘해 느닷없이 `미군철수`를 외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정말 무시할 수 있나. 어쩌면 우리는 지금 부질없는 공론으로 두 개의 벌집을 한꺼번에 잘못 건드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금의 형편으로 보아 대한민국이 이솝 우화 속 사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나귀인가 여우인가. 아니, 사자에게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서 이럴 때 나귀와 여우는 정녕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은가.

2017-06-12

`철밥통` 광풍 주의보

▲ 안재휘 논설위원중국 정(鄭)나라 재상 자산(子産)이 진수와 유수라는 강을 건너지 못해 쩔쩔매는 사람들을 수레로 건너가게 해줬다는 말을 들은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해가 11월이 될 때까지 도강(돌다리)이 만들어지고 12월이 될 때 여량(다리)이 만들어지면 백성들은 건너는 것을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歲十一月徒?成 十二月輿梁成 民未病涉也).” 맹자 이루장구(離婁章句) 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정치가의 참 역할에 대한 교훈으로 곧잘 인용된다. 문재인 정부가 여야 정치인들로부터 “너무 잘해서 무섭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순항하고 있다. 한때 걱정을 샀던 초대 총리 인준과정도 우여곡절 끝에 넘어갔다. 국민들의 기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물론 이는 그동안 켜켜이 쌓인 `비정상`의 더께가 워낙 깊었던 반증이기도 하다.문재인 정부는 스스로를 `일자리 정부`라 일컫는다. 대통령이 집무실에 상황판을 걸어놓고 고용을 독려한다. 대통령 직속 기관인 일자리위원회는 `일자리 100일 계획`도 발표했다. 비정규직을 과다하게 고용하는 대기업에 고용부담금을 물리는 `채찍` 정책까지 거론됐다. 정책의 효과가 뜻대로 나타난다면 놀라운 성공작이 될 것이다.새 정부 일자리정책의 핵심은 경제·사회·행정 시스템을 바꿔 일자리 선순환 구조를 만듦으로써 소득주도 성장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다. 하반기 추경을 통해 연내 1만2천여 명의 공무원을 더 고용하고, 5년 내에 17만4천명을 추가로 채용하겠다는 계획이다.문 대통령의 `공공일자리 81만 개` 공약의 대다수인 64만 개 일자리는 정부나 공기업 예산으로 고용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꿔주는 것으로 귀결됐다. 새 정부의 의지가 이처럼 강하다보니 지방정부도 `일자리 창출`에 정책의 방점을 찍고 있다. 청와대를 본 따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하는 곳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모든 정책은 극복해야 할 비관들이 따라다닌다. `고용 만능주의` 집착이 구조개혁 지연과 기업의 생산성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력이 떨어져 오히려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심려도 있다. 무엇보다도 대기업의 옆구리를 찌르는 방식은 부작용이 크고 지속가능성도 희박하다는 지적이 많다.새 정부의 대규모 공무원 신규채용 소식에 `공시족(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이 뜨겁다. 한 인터넷 공시생 카페에서는 “3년 넘게 다닌 중소기업 퇴사하고 공기업에 도전한다”는 식의 새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수백 대 일까지 경쟁률이 상승해온 공무원 시험이 또 어떤 씁쓸한 광풍으로 낭인(人)들을 양산할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우수한 인재들이 애국충정으로 공직에 몰려드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좀 다르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회원 33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유로 `노후 보장`이 전체 응답률 26%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한마디로 `철밥통`을 찾아서 몰려들고 있다는 이야기다.궁극적으로 민간 기업에서 진정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대기업을 압박하거나 기존 일자리를 쪼개어 실직자들에게 나눠주는 수준으로는 어림 턱도 없다. 큰 기업들이 스스로 나서서 공모 방식으로 청장년들의 벤처창업을 지원해 `일자리 다리`를 놓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정책의견에 솔깃해진다.어리석은 농부가 밭에서 발아한 싹이 빨리 자라지 않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싹들을 조금씩 뽑아 올렸다가 모두 죽는 바람에 농사를 아예 망쳤다던가. 맹자가 제자인 공손추(公孫丑)와 호연지기 키우는 법을 주제로 대화하다가 들려주었다는 발묘조장(拔苗助長) 우화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미리 두드려보아야 할 `도강`, 과감한 규제개혁 등 새로 놓아주어야 할 `여량`이 한 둘이 아니다.

2017-06-05

`태클정치`의 먹이사슬

▲ 안재휘 논설위원공자는 `말`을 `부끄러움`과 등치시키는 논리를 구사했다. 논어 헌문편(憲文編)에는 `군자는 말을 부끄러워하고 행동은 앞선다(恥其言而過其行)`는 말이 나온다. 공자의 말씀 이면에는 `실천`과 `책임`의 가치에 대한 깊은 경계가 있다. 그러나 공자의 귀한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 정치권에서 더 이상 진리로 존중되지 않는다. 선거운동을 하러 나선 어떤 입후보자가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마을사람들이 “우리 동네에는 강이 없다”고 하자 당황할 줄 알았던 그 후보가 뻔뻔한 얼굴로 “그러면 강을 만들어서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다시 공약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과거 선거철 정치인들의 공약 기준에는 `실천가능성` 따위가 있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할 수 있다면 무슨 약속이든지 다 내뱉고 본다. 그나마 시민단체나 언론의 감시비판이 없다면 `달을 훔쳐다 주겠다`는 황당한 언약도 불사할 것이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아 발생하는 논란쯤은 우습게 여긴다. 현란한 수사와 교묘한 논리로 지난 언행들을 정당화시키면 그만이라는 심산인 것이다.`국민 지지율 90% 육박`이라는 경이로운 국민관심을 받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 내정한 고위직 인사들의 `위장전입` 논란으로 곤혹에 빠졌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병역면탈·부동산투기·세금탈루·위장전입·논문표절 관련자 등 소위 공직임명 `5대 불가사유`라는 것을 콕 집어 천명한 것이 족쇄가 됐다.인사 청문 대상 고위공직 예정자들의 낙마(馬) 퍼레이드는 으레 일어나는 참사여서 아주 예견되지 못한 일은 아니다. 역대 정부에서 검증공세에 걸려 망신을 당한 총리·장관 후보자는 노무현 정부 2명, 이명박 정부 10명이었다. 박근혜 정부에 이르러서는 7명의 총리 후보자 가운데 무려 3명이 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했고, 1명은 청문회까지 가지도 못 했다.인사청문회는 미국이 230년 전인 1787년 헌법제정의회에서 고위공직자에 대한 의회 인준권을 규정하면서 세계에서 맨 처음 시작됐다. 부적격자를 완벽하게 걸러내는 백악관의 사전검증 시스템 덕분에 미국에서는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인사가 드물다. 한국은 2000년 6월에 인사청문회제도를 도입했으니 고작 17년이다. 우리 정치의 인사청문회는 험악한 `태클정치`의 사냥터다.때마다 되풀이되는 인사청문회 파열음은 국민들이 원하는 공직자 윤리수준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시대 변화의 느린 속도가 빚어내고 있는 비극이다. 바뀐 세상의 기준에 맞는 인재를 골라내는 일은 내남없이 무질서의 개흙밭에서 구르며 살아온 사람들 중에서 흙 묻지 않은 별종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지난한 과제다.여야 의원들 모두 상대방을 향해 날리고 있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비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대방이 어제 그랬다는 이유가 오늘 내 허물을 정당화시켜주는 증참이 될 수는 없다. 번번이 벌어지는 혹독한 인사검증 공방전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국가대표 축구선수 선발전을 씨름경기로 치르고 있는 듯한 희한한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망국적인 `청백전` 정치의식에서 해방돼야 한다. 담백하게 사과하고 거듭거듭 양해를 구하는 길밖에 없다. 청와대비서실장이 나서서 “빵 한 조각 닭 한 마리에 얽힌 사연”이 어쩌고 하며 고상한 변명을 늘어놓거나, 여당이 앞장서서 “국민 10명중 7명이 찬성하는 총리인준 민심을 겸허히 받들라”는 식으로 여론독재를 획책할 일이 결코 아니다.그것이 당장 `네모 난 세모`를 찾는 난해한 일일지라도 우리는 공직자의 윤리수준을 드높이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태클정치` 먹이사슬의 주식(主食)인 `빈 약속`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릇된 풍토부터 기필코 끊어내야 한다. `말을 부끄러워하고 행동을 앞세우는` 그런 선진정치가 무르익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나마나, 어물쩍 넘어가기는 참 어렵게 생겼다.

2017-05-29

`국민`에 충성하는 검찰

▲ 안재휘 논설위원1925년 4월 개벽(開闢) 58호에 발표된 박영희(朴英熙)의 소설 `사냥개`는 30년대 이후 밀려든 피할 수 없었던 문명사를 미리 내비친 단서로 회자된다. 첩을 다섯이나 거느리고 사는 인색한 부자인 주인공 정호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좋은 사냥개를 사서 키우면서 밥을 굶긴다. 온갖 악몽과 환영에 시달리던 정호가 안방으로 가려다가 배고픔으로 밤새 짖어대던 사냥개에게 그만 물려 죽고 마는 것으로 소설은 끝맺음된다. 문재인 정부가 `검찰개혁`에 칼을 빼들었다. 검찰이 달라져야 나라가 바뀐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상당히 오래됐다. 우리는 그 동안 칼과 저울을 들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명을 지닌 검·판사의 충격적인 타락상 앞에서 할 말을 잊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홍만표 전 검사장, 최유정 전 부장판사에서부터 진경준 검사장, 김수천 부장판사, 김형준 부장검사까지 일부 전·현직 판검사들의 비리 행태는 법률 청부업자나 사법 거간꾼에 가까웠다.사법정의를 위협하는 보다 근원적인 폐단은 `정치검찰` 논란이다. 사실상 우리 검찰은 유권무죄(有權無罪)의 힐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별로 없다. 권력의 칼자루와 가까운 사범들에게는 솜방망이 처벌 일변도인 반면, 다른 혐의자들에게는 가혹한 법 집행을 한다는 편파수사 시비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정치검찰`은 외견상 형평성을 맞추는 척하면서 차별적 처리에 능한 기회주의 실력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그러나 일부 정치검사, 부패검사들의 고질적 일탈을 놓고서 검찰 모두를 마치 범죄 집단처럼 몰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왜곡된 조직문화 속에서 출세지향주의에 빠진 일부 구성원에 있다. 대다수의 검찰이 올곧은 사명감으로 정의와 공익을 지키기 위해서 무한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순기능마저 없다면 이나마 우리 국가사회가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신임 서울중앙지검장에 윤석열 대전고등검찰청 검사가 임명된 것은 연수원 기수가 다섯 계단이나 내려갔다는 점에서 파격 그 자체다. 200명이 넘는 검사를 거느리는 서울중앙지검의 검사장은 법무부 검찰국장과 함께 검찰 내 `빅2`의 요직이다. 윤 지검장은 지난해 박영수 특검에 발탁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등 대표적인 `특수통` 강골검사로 통한다.두 말할 필요도 없이, 권력자들이 국가기관을 장악해가는 힘의 원천은 `인사권`이다. 윤 지검장 인사를 놓고 정치권과 법조계에서 `절차상 하자`라는 시비가 일고 있다. 검사를 임명할 때 법무부장관의 제청을 듣게 돼 있는 현행 검찰청법 34조(검사의 임명 및 보직) 1항을 준수했느냐 아니냐가 논란의 핵심이다. 일단 청와대는 요지부동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문재인 대통령은 전광석화 같은 파격인사를 신호탄으로 검찰개혁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와 수사·기소권 분리 등 각종 제도 개혁과 부패 검사들에 대한 인적 청산이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검찰개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향후 어떤 정권이 오더라도 검찰을 한낱 사냥개로 야비하게 부리지 못하도록 공정하고 독립적인 인사행정의 틀을 짜놓는 것이 핵심이다.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에게 따라다니는 어록들이 국민들의 기대를 높이고 있다. 국회 국정감사장의 증인으로 나와서 한 “나는 조직에 충성하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위법한 지휘·감독은 따를 필요가 없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또한 박영수 특검팀 수사팀장 당시 보복수사 가능성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냐”라고 일축했던 일화도 있다. 검찰이 `권력의 사냥개`라는 오랜 원성으로부터 부디 벗어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사람`이 아닌 `국민`에게만 충성하는 새롭고 참다운 검찰을 고대한다.

2017-05-22

`적폐청산`과 `통합`의 협곡

▲ 안재휘 논설위원미래학(Futurology)은 과거 또는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측하고, 그 모델을 제공하는 학문이다. 현실도피의 무책임한 엉터리 학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대사회 속에서 미래사회를 시사하는 변화의 조짐을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미래학은 현재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국가사회의 미래를 진단하고 개척해가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미래학은 정치 영역의 핵심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법 기술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우리 정치권에는 사시사철 `과거` 논란만 난무한다. 그 동안 이 나라의 정치는 정적(政敵)의 지난날 언행을 놓고 괘발새발 까발리는 험담경쟁이 전부였다. 무릇 선거기간 중에는 엄청난 `상대방 쓰레기통 둘러엎기` 전쟁이 벌어진다.짧고도 긴 대통령선거의 터널에서 승자가 된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 포석이 한창이다. 예상했던 대로 문 대통령의 밑돌 깔기에는 `파격` 이미지를 심으려는 의중이 강하다. 당선 직후 야당당사 방문, 대중들과 쉽게 어울리는 대통령, 까칠한 진보교수의 민정수석 기용, 참모들과의 격의 없는 업무스타일 구축 등 일거수일투족이 흥미로운 뉴스가 되고 있다.신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하늘을 찌른다. 각자의 소망에 자신의 신산한 삶의 앞길을 열어주리라는 절박함이 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부 야권과 언론의 지엽적 꼬투리잡기는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갓 출범한 정권에 대한 패자의 감정발산 이상도 이하도 아닌 쩨쩨한 티 뜯기는 별반 의미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신임 대통령의 행보가 `보여주기` 식에 머무르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은 슬며시 생긴다. 형식은 내용을 능가하지 못하고, 내용은 이미지를 웃돌지 못하고, 이미지는 진정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진실만큼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진심이 배제되고 지속가능성이 희박한 `쇼`는 오히려 부작용만 남긴다는 사실을 잠시도 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적폐청산`은 한방(韓方)의 부자(附子)처럼 자칫 정쟁촉발의 맹독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약제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관찰은 `적폐청산`과 `통합`이라는 두 가지 과제의 충돌가능성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에 집중될 필요가 있다. 과연 `적폐청산`이 정상세포는 살리고 악성 종양세포만 선별적으로 파괴해내는 기적의 항암제(抗癌劑)로 작용할 것인지가 핵심 관전 포인트다.문 대통령은 제19대 대통령 취임선서식에서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고 말했다. 여야 정치인들을 자주 만나겠다는 약속도 제대로 실천된다면 괄목할 업적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문 대통령은 남의 쓰레기통을 뒤져 갈등의 불씨를 만드는 일에 능란한 `법 기술자들`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에게 방향타를 온전히 맡겨서도 안 된다. 선거 도중 불거져 나왔던 이해찬 의원의 `보수 궤멸` 발언의 파장이 얼마나 깊이 박힌 비수인지를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인권운동가인 넬슨 만델라의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상기한다. 그는 27년여 간의 옥고를 치른 뒤 감옥을 나서며 “나는 여기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국민인 여러분의 겸손한 종으로 섰습니다”라고 말했다. 노벨평화상까지 받고 대통령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영국인도 아니면서 영국의회 중앙 홀에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인물 1위`의 자리에 동상으로 서 있다.문재인 대통령이 첫 단추를 잘못 꿰어 임기 내내 `과거`에 발목이 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부디 `적폐청산`과 `통합` 사이의 협곡에 애꿎은 민생이 갇히는 가혹한 모순이 목도되지 않기를 참마음으로 고대한다.

2017-05-15

`돌메달 대선` 읽기

▲ 안재휘 논설위원더러 거액이 오가는 도박에 사용돼 물의를 빚기는 하지만, 화투(花鬪)는 우리 민중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심심풀이 놀이도구다. 화투는 대체로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에 전한 `카르타(carta)놀이 딱지`가 원형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인들이 그것을 본떠 `하나후다(花札)`라는 것을 만들었고, 조선조 말엽 혹은 일제강점 이후에 우리나라로 들어와 현재에 이르렀다 한다. 고스톱(Go-Stop) 또는 고도리라고 불리는 화투놀이가 있다. 보통 3점 이상 먼저 내는 사람이 이기게 된다. `고(go)`를 선언한 참여자가 점수를 더 못 내고 3점을 낸 다른 참여자가 끝내 없을 때를 `나가리`라고 부른다. 화투를 잘 모르는 초짜가 끼거나 `못 먹어도 고(go)`를 일삼는 참가자가 있으면 판은 복잡하게 엉킨다. 정상적인 사람일수록 판 읽기는 헷갈리고 엉뚱한 사람이 승자가 되기도 한다.후보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쳐온 `5·9장미대선`이 목전에 다다랐다. `반문정서(문재인 반대 정서)`와 안철수의 `가능성`이란 두 축을 중심으로 한때 양강구도가 형성됐던 대선전은 여론조사가 금지된 `깜깜이 선거` 직전에 1강 2중의 혼전으로 흘렀다.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영·호남 지역대결이 묽어지고 다당제(多黨制)의 정착이 암시되고 있다는 점 등이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일단 영남이나 호남에서 한 후보에게 몰표를 행사하는 `묻지 마 투표` 양상이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가 관심사다. 유권자들이 다소나마 `정책`을 변별하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우리 정치문화가 한 발짝 선진화할 수 있다는 기대도 갖게 한다. 그러나 `세탁기에 집어넣고 돌린다`느니, `적폐청산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느니 하는 케케묵은 분열획책 공약이 나오는 등 우려스러운 대목도 없지 않다.정해진 경기규칙에 맞춰서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며 달린다는 점에서 선거는 육상경기와 꽤 닮았다. 하지만 `은메달이 없다`는 점에서 선거는 육상경기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 2등은 곧 꼴등이나 마찬가지다. 1등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창졸간에 망각의 늪에 폐기하는 게 선거다.지난 2015년 7월이던가,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경상도 국회의원은 동메달”이라는 발언을 내놓아 시끌했던 일이 있었다. 김 대표의 `동메달` 발언에 대해 노정객 박찬종 변호사는 한 방송에서 “(경상도 국회의원은) 동메달도 아니고 `돌메달`”이라며 한술 더 떴다. 본선보다 더 치열한 예선전을 간과한 발언이라는 분통을 샀지만, `지역 몰표` 행태를 세차게 꼬집은 말임에는 틀림없었다.프랑스식 결선투표가 없는 환경에서 다자대결로 치러지는 이번 선거는 어느 주자도 과반을 넘지 못하는 `돌메달 선거`가 될 공산이 크다. 당선자의 영예도, 낙선자의 변명도 모두 보석 값을 매겨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참여자들이 `못 먹어도 고(go)`를 외치는 고스톱 판처럼 된 대선전은 그러나 `흔들기`도 없고, `나가리`도 없다.이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당제 정치치제`의 고착화 부분이다. 어차피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협치` 내지는 `연정(聯政)`아니고는 국정을 움직일 수 없게 돼 있다. 집권당이 오만한 태도로 민심을 작위적으로 끌어가려고 하거나, 광장정치 포퓰리즘 장난에 매몰된다면 국가적 혼란은 극에 달할 수도 있다. 결국 이번 선거는 `혼란의 매듭`이기보다는 `새로운 신호탄`으로서의 의미가 더 깊다.이제 유권자들의 선택만 남았다. 누구를 당선자로 낼 것인가의 수준을 넘어서는 전략적 안목이 요긴해졌다. 선거판을 명료하게 이끌어 선택지를 편하게 만들어주지 못한 정치권의 요령부득이 원망스럽기는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런 현상 자체가 시대변화의 산물인 것을. 선거이후에 대한 깊디깊은 혜안이 필요해진 `돌메달 대선` 앞에서, 유권자들의 심모원려(深謀遠慮)만이 절실한 단 하루가 남았다.

2017-05-08

재미없는 `대선 드라마`

▲ 안재휘 논설위원`번개 맨`이라고 불리는 세기의 스프린터가 있다. 지난해 브라질 리우올림픽에서 사상 첫 올림픽 100m·200m 3연패 대기록을 세운 자메이카의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Usain St. Leo Bolt)다. 구름관중을 몰고 다니는 그가 참가하는 모든 육상경기에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최대 관점은 신기록이 아니라 볼트를 이길 선수가 나올 것이냐 아니냐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그는 명실상부한 세계최고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5·9장미대선이 1주일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선거전이 오히려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문재인 대망론`을 위협하던 안철수의 지지세가 한풀 꺾이면서 뜨거운 각축양상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곧 여론조사 금지기간에 들어서서 `깜깜이 선거`가 시작되면 각 진영의 주장만 난무할 뿐 조금이나마 여론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창틈마저 사실상 차단된다.5·9장미대선을 재미없게 만드는 요인은 처음부터 있었다. 선거판 자체가 애초부터 대통령 탄핵으로 비롯된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담론과 가설들이 춤을 추면서 갖가지 경우의 수가 운위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초기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를 찍어야 옳으냐고 묻는다. 유권자들은 여전히 헷갈리고 있음이 분명하다.대선후보 TV토론이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지난 4월13일 SBS TV토론의 시청률은 1부 11.6%, 2부 10.8%로 집계됐고, 19일 KBS 1TV가 단독 생중계한 토론의 시청률은 26.4%였다. 23일 밤 7개 채널에서 생중계한 토론의 시청률은 38.477%, 28일 밤 생중계된 토론의 시청률이 31.199%로 나타나 나름대로 가능성은 있다. 온통 상대방의 허물을 까발리려고 허둥대는 생방송 토론을 지켜보자니 선거전략 컨설턴트 석종득의 이론이 떠오른다.그는 저서 `선거 전략 선거 캠페인`에서 “방송토론은 득점을 위한 찬스가 아니라, 실점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일종의 장애물 경기”라면서 “주도권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토론을 일방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무작정 물어뜯다가 자신의 이(齒)만 부러지는 우스꽝스러운 연상이 자꾸 어른거린다.이 시점에서, 선거판을 완전히 뒤엎을 변수가 아직 남아있을 것이냐는 질문에 전문가들도 횡설수설이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엄중한 현실이 새로운 가설을 차단하고 있다. 물론 선거판을 이렇게 맥 빠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다른 소망을 품게 할 만큼 두각을 나타내는 주자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선거판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기울어진 운동장` 꼴로 흘러가고 있다.그렇다면 과연 후보자들은 어떤 심사일까. 지지율이 사뭇 저고도비행 중인 후보들은 정말 유세장 장담처럼 유권자들이 막판에 자신에게 몰표를 몰아줄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관전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럴 개연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미 선거결과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선거 이후를 더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돌아보면 대통령선거는 물론, 각종 선거에서 고배를 마시고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끝내 뜻을 이룬 위인들이 없지 않다. 정치인생에서 낙선은 그야말로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다. 바꿔 말하면,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의 필승의지를 곧이곧대로 읽는 것은 오류일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제아무리 우사인 볼트가 출전하는 육상경기라 하더라도 다른 선수들이 승부욕을 지레 접은 모습으로 경기에 임한다면 흥미로울 까닭이 없다. 전략도 어림없고 전술도 마땅찮은 마당에 자중지란까지 겪고 있는 속 타는 주자들의 동동거림이 안타깝다. 근년 들어 번번이 틀리기만 해온 `여론조사의 실패`를 마지막 희망으로 품어야 할까. 대선 드라마의 재미를 만들어내는 일은 이제 오롯이 유권자들의 몫으로 남겨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2017-05-01

고장 난 `계산기`

▲ 안재휘 논설위원문명의 이기(利器)는 인류에게 늘 행복만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인 컴퓨터는 아직도 인간에게 검증이 끝나지 않은 미지의 총아(寵兒)다. 분명한 것은 상상초월의 전자기술이 한순간 인간을 바보로 만들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을 컴퓨터 칩에 맡기고 사는 많은 사람들은 가족의 전화번호마저 잊어버리기 일쑤다. 우리는 간단한 덧셈조차 전자계산기를 두드리는 암산(暗算)퇴행의 시대를 살고 있다.`5·9장미대선` 선거전이 끝 모르게 달아오르고 있다. 열기가 너무 뜨거워 과연 임계압력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우려마저 든다. 각 대선후보들의 과거지사들이 시시콜콜 도마에 올라 무차별 난도질을 당한다. 여론조사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선거캠프의 모습도 날로 사나워지고 있다.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지는, 아귀들의 지옥전쟁 같은 지독한 난타전에 국민들은 넋을 잃을 정도다.이번 대선에서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사생결단을 겨루던 종래의 선거패턴이 사라졌다. `보수는 분열로 망하고, 진보는 자충수로 망한다`는 새로운 속설이 나돌기도 한다. 진보 또는 중도 정치세력에게 이번 선거는 `굴러 들어온 떡`이다. 혈투를 벌이는 그들의 서슬 반대편에서, 보수는 자기들끼리 멱살잡이에 여념이 없는 꼴이다.흥미로운 반전드라마가 펼쳐지는 기적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현실화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이미 전력을 몽땅 쏟아 붓는 조직 총동원전이 시작됐고, 변별력을 키우는 새로운 선거형식이란 무의미해지고 있다. 혼전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예측은 흔들릴 것이다. 어떤 계산기가 정확한지가 관건이 될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아직 시간이 있다고는 하지만, 보수 후보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걱정스러운 구석이 적지 않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꿈꾸는 `좌3 우1` 4자구도 선거는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을 오르내리게 하는 요인이 보수 표심으로 드러나면서 개연성을 얻지 못하는 양상이다. `홍준표를 찍으면 문재인이 된다`는 이른바 `홍찍문` 구호가 설득력을 놓지 않고 있는 형국이다.둘로 나뉜 보수후보들의 지지율 분포에 촉각이 곤두서고 있다. 큰 틀에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어떻게든 전체 선거구도를 양자대결로 만들어 승부를 보겠다는 결단이다. `후보단일화`나 `후보사퇴`라는 카드로 가능하다. 또 하나는 이번 선거와 관계없이 미래를 보겠다는 판단이다. `야당`을 각오하고 끝까지 완주해 민심을 확인하는 것이다.후보가 여럿이니 끝까지 가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은 각종 선거 때마다 반드시 나타나는 오아시스 같은 착시(錯視)다. 꼴등에게 물어보아도, 자기가 꼭 당선될 줄 알았다고 답변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분열`로 선거를 망친 역사는 냉혹하다.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후보들의 예측 연산(演算)이 오류를 일으켰다는 점이다.1997년 15대,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 때 이회창의 낙선이 그랬다. 불과 30%대의 득표로 진보교육감이 당선된 2010년 서울시교육감 선거, 2014년 서울시교육감 선거와 경기도교육감 선거 결과도 추레한 보수분열의 결과물이었다. 하물며 진보와 중도의 선두다툼으로 펼쳐지고 있는 이번 선거에서 갈라진 보수 후보들 계산기의 정상작동 여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종요롭다. 그들의 계산기가 오작동하고 있는 한 유권자들은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대통령 탄핵이라는 쓰나미에 휩쓸려 부랴사랴 치러지는 이번 대선을 앞두고 일촉즉발의 예민한 쟁점들이 분초를 다투며 튀어 오른다. 유권자들이 알아서 대세를 갈라 주리라는 믿음은, 가상(嘉尙)하긴 할 망정 실현되기에는 어림없다. 지금부터는 대선후보들의 계산기 성능이 핵심변수다. 고장 난 계산기를 두드리며 한사코 달려가는 선거전이 또 다른 대한민국 불행의 씨앗이 될 지도 모른다.

2017-04-24

`판크라티온`이 정답이다

▲ 안재휘 논설위원`판크라티온(Pancration)`은 BC 648년 제33회 고대올림픽대회(올림피아드)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돼 많은 인기를 누린 격렬한 실전무예다. 습한 모래나 진흙 위에서 맨손으로 붙어 주먹지르기·발차기·꺾기·던지기·조르기 등 모든 기술을 사용한다. 물어뜯기와 눈 후비기만은 허용되지 않는 파울이었고, 상대방이 항복할 때까지 경기를 계속하는 방식이었다. 1976년 6월에 벌어진 프로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의 대결을 시발점으로 판크라티온은 새로운 격투스포츠 `이종격투기`로 부활돼 각광받고 있다. 이종격투기는 1993년 일본에서 시작된 K-1과 프라이드FC, 미국의 UFC 등이 있다. 사람들이 이종격투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여럿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작위(作爲)가 일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맨몸 `진검승부`라는 점이다. 대한민국 초기 `고무신 선거`·`막걸리 선거`로 시작된 선거풍토는 여전히 관성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1987년 13대 대선 땐 민정당 노태우 후보 측이 1조원이 넘는 천문학적 돈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2002년 대선자금 수사 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캠프가 LG그룹으로부터 150억 원의 현금을 실은 2.5t 트럭을 통째로 받은 사실이 밝혀져 `차떼기 정당`이란 오명을 뒤집어썼다.2004년 5월 21일 대검중앙수사부는 대기업들로부터 이회창 후보 측이 823억, 노무현 대통령 측이 113억을 받았다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선거비용으로 쓸 수 있는 금액은 대선후보 1인당 509억9천400만원까지다. 각 후보 진영마다 거액의 선거자금을 조달하는 문제로 비상이 걸려 있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 구태의연한 고비용 선거운동 양식을 들여다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미디어 혁명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오프라인 공간에서 아직도 거액이 동원되는 선거가 통용되고 있는 현실은 도무지 납득이 안 간다. 유권자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전파공간을 도외시하는 갑론을박은 유치하다.대선후보 TV토론회에 도입키로 한 `스탠딩 토론`을 둘러싼 공방이 뜨겁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측이 “발언권이 주어졌을 때만 서서 하자”고 제안한 게 도화선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측에서 “두 시간도 서 있지 못하겠다는 것이냐”고 비난하고 나섰고,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측도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가세했다. 이에 문 후보가 직접 `어떤 형식이든 자신 있다`고 스탠딩 토론을 수용하며 역공을 펴고 있다. 우리는 과거 대선에서 지지율이 높은 후보일수록 `토론`을 극구 회피해왔던 비겁한 모습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온전히 `불리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조직선거에 맛 들린 선거꾼들의 엉뚱한 주장이 난무하지만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이 절대 부족한 이번 대선을 가장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는 방안은 `이종격투기` 방식의 생방송 `끝장토론` 뿐이다.`인기발언 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는 횟수를 늘리면 간단히 해결된다. 양자토론이든 다자토론이든 여러 차례 지속해나가면 진짜와 가짜는 판별이 나게 돼 있다. 거듭되는 라이브토론은 말만 번지르르한 인물과 비전과 진정성을 가진 능력자를 가려내주기 마련이다. 국민들은 8각의 옥타곤(철조망 링) 안에서 모든 작위를 배제하고 오로지 실력만을 겨루는 현대판 `판크라티온` 방식의 토론경쟁을 보고 싶어 한다.패거리들을 몰고 재래시장을 방문해서 떡볶이를 받아먹거나 난전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와 어색한 포옹을 하는 대선후보의 제스처는 이제 식상하다. 그게 대체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지도자를 뽑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생방송 `끝장토론`이 정답이다. 온갖 핑계를 대며 맞짱토론을 거부하는 후보는 그 역량이 수상쩍다고 보면 대략 맞을 것이다.

2017-04-18

보수민심의 `실연(失戀)` 증후군

▲ 안재휘 논설위원사회심리학자 이철우는 저서 `심리학이 연애를 말하다`에서 실연(失戀)을 당한 사람의 행동을 명료하게 분석한다. 그는 실연 이후의 심리상태를 `미련`, `실연상대의 거절`, `실연으로부터의 회피` 등으로 구분한다. 가장 흔한 행동유형은 `미련`이다. `미련`은 실연 상대에 대한 정이 사라지지 않고 희망적 관측(Wishful Thinking)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자기가 매일 쌓아올린 환상의 벽을 허물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실연상대의 거절`은 적개심을 품고 몸부림치는 `적의`, 사진·편지 같은 것을 태우거나 찢어버리는 `관계해소` 따위의 행태를 보여준다. 바람직한 반응은 `실연으로부터의 회피`다. 이별이 불가피했다거나 연애가 계속됐다면 불행했을 거라는 자기합리화로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긍정적 해석`, 다른 이성을 만나는 행동을 보이는 `치환`, 스포츠·레저·공부 등으로 실연의 고통을 잊는 `기분전환` 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가 본격화되고 있다. 검찰은 이달 17일 대통령 선거운동 공식 개시 전에 박 전 대통령을 재판에 넘기기 위해 이틀에 한 번꼴로 구치소를 직접 방문해 조사하는 방식으로 수사를 지속하는 중이다. 국민들의 관심은 박 전 대통령이 검찰조사에서 혐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지에 쏠려 있다. 아직도 똑 떨어지는 `진실`을 들어보지 못한 보수민심은 복잡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대선판세에 나타나는 보수민심은 여전히 유랑(流浪) 중이다. 반기문에게 쏠렸던 보수민심은 황교안 쪽으로 흘러갔다가 안희정을 거쳐 안철수 언저리에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면서 거듭 헛물만 켜고 있는 보수민심은 주류에서 밀려나 `캐스팅보트` 역할에 몰리는 굴욕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바야흐로 보수표심은 차악(次惡)을 골라내야 할지도 모를 곤경에 처했다.5·9대선 표심 향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약진으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양강구도가 형성되면서 양 진영의 흙밭싸움이 치열하다. `국정농단` 여파로 한껏 토라진 다수 민심은 좀처럼 보수후보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친박 세력`을 단단히 업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시선은 아직 서늘하고, 터무니없이 `배신자` 이미지를 뒤집어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또한 악전고투다.TK 민심이 지금처럼 복잡해진 적은 없었다. 한마디로 뭉뚱그려 말하자면 예기치 않게 갑자기 실연당한 연인의 처지 딱 그 양상이다. 많은 지역민들이 아직도 `미련`의 족쇄에 발목이 잡혀 있다. 무한애정을 쏟아온 히로인이 결코 그럴 리가 없다는 부정의식에 묶여 있다. `희망적 관측`의 미몽에서 좀처럼 깨어나지 못한 채 뭔가 거대한 모함과 협잡에 휘말려 있으리라는 음모론마저 성성하다.TK정치가 `보수의 메카`이자 `한국정치의 중심`이라는 명예를 되살려내려면 지금의 퇴행적 몽상에서 하루빨리 깨어나야 한다. 사태를 직시하는 혜안과 현실을 인정하는 용기가 발휘돼야 한다. 진보정치와의 전선을 좀 더 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용단을 내릴 수도 있어야 한다. TK정치의 위대성은 바로 극적인 상황에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담대한 결단을 실행함으로써 발휘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시간이 없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이번 대통령선거는 정상적인 선거가 아니다.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미련`의 뻘밭에 주저앉아 침울할 여유가 없다. `긍정적 해석`이든 `치환`이든 다시 달려갈 힘의 원천을 만들어내야 한다. 나라를 위한 바른길을 닦아내기 위해서는 때로 `양보`의 덕목이 먼저 필요할 때가 있다. 변화무쌍하게 전개될 선거양상 속에서 새로운 선택의 갈래를 찾아내야 한다. TK정치가 이렇게 무기력한 역사를 써내려가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2017-04-11

슬픈 `묵극(默劇)`

▲ 안재휘 논설위원독일의 여론조사 기관인 알렌스바흐 연구소 설립자이자 소장인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이 정리한 `침묵의 나선이론(The spiral of silence theory)`은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주류에 속하고 싶은 인간의 강한 욕망이 침묵의 나선을 만든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이 다수의 의견과 동일하면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만 소수의 의견일 경우에는 남에게 나쁜 평가를 받거나 고립되는 것이 두려워 침묵하게 된다는 것이다.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결국 영어(囹圄)의 처지가 됐다. 지난 수개월동안 지속된 탄핵정국 속에서 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해괴한 이야기들을 숱하게 듣고 보았다. 그렇게 눈과 귀를 괴롭혔던 민망하기 짝이 없는 권력의 속살들은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구속으로 귀결됐다. 이 나라의 국민이라면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사변 끝에 펼쳐지는 조기대선이 가변성을 띠고 치열하게 펼쳐지는 중이다.각 정당의 후보들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판세가 거칠게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원내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각종 여론조사 지지율 선두 추세가 굳건하다. 한동안 문재인 대세론을 위협하는 듯했던 안희정 바람은 결국 역부족으로 잦아들었다. 문재인을 향한 민심은 지지율과 거부감 모두가 높게 나타나 사뭇 이율배반적이다.문재인의 선두질주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동력은 역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초래된 보수정치의 몰락이다. 보수정치가 지리멸렬한 현재의 추세라면 5월 9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정치는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가 어려울 게 자명하다. 문재인을 향한 민심 속에는 대안부재론과 불안이 공존한다. 그가 선두주자임을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왠지 못 미더운 구석이 느껴지는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북핵문제에는 미지근하고 북한과의 조건 없는 대화와 지원재개를 공언한다. UN의 북한인권결의안 투표에 김정일의 의중을 물었다는 의혹과 `사드` 배치를 놓고 보이고 있는 애매모호함도 꺼림칙하다. 헌재에서 탄핵안을 심리 중일 때 그는 “탄핵이 기각되면 혁명뿐”이라며 공공연히 선동정치를 펼쳐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그를 옹위하고 있는 소위 친문세력의 무지막지한 홍위병식 문자폭탄은 비판정치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국민의당 후보 입지를 굳힌 안철수 전 대표가 문재인 후보와의 맞대결에서 엇비슷한 지지율을 보였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눈길이 간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과반수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국민의당 간 후보 단일화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는 대목은 또 한 번 야릇한 민심을 반영하고 있다. 아무래도 작금의 여론흐름에 `침묵의 나선이론`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벌써부터 `투표하러 가기 싫다`는 소리가 즐비하다. 만일 이 같은 흐름이 조금 더 지속된다면 5·9대선 투표율은 형편없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후보는 따로 없고, 선두를 달리고 있는 주자는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유권자들은 투표를 포기하는 것 말고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 당선자는 있으되 민심을 흔연히 누리지는 못하는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지는 것은 결코 건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모든 것을 잃고 옥에 갇힌 박 전 대통령을 향해 오만 악담을 계속 퍼붓고 있는 세력들의 살찬 모습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대선국면에서 국가적 비극을 활용해보려는 권력지향 세력의 모진 발싸심들도 잔인해 보인다. 물론 이 모든 살풍경이 박 전 대통령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항간의 촌평에 동의한다.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 단 한 번도 정상적인 기대와 전망을 좇아준 적 없는 박 전 대통령은 여전히 침묵 중이다. 무구한 민초들을 한없이 우울하게 하는 이 `슬픈 묵극(默劇)`들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2017-04-04

`적폐청산`에 관한 명상

▲ 안재휘 논설위원지난해 치러진 미국대통령선거 결과는 복잡계(Complex System) 연구가 표방하는 전제의 타당성을 증명한 이변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여론조사 과학의 완벽한 실패다. 선거 당일까지도 뉴욕타임스의 85퍼센트 확률을 비롯해 대부분의 언론사와 여론조사 기관은 9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힐러리의 당선을 예측했었다. 전통적인 과학적 여론조사기법들이 모두 헛것이라는 사실이 또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여론조사의 부정확성은 미국대선 훨씬 전인 지난해 4월 한국의 20대 총선과 6월에 진행된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찬반 국민투표에서 이미 입증됐었다. `인과관계에 대한 종래의 견해가 하나의 원인에 대응하는 하나의 결과라는 단순한 관계의 설정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는 복잡계 학자들의 비판이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종래의 선형(線型)시스템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과학이 신뢰성을 크게 잃고 있는 셈이다.우리 정치권은 바야흐로 5월 9일로 예정된 장미대선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가는 기관차처럼 뜨겁다. 진보정당 위주로 펼쳐지는 선거판의 기울기는 요지부동이다. 4월초 각 정당의 후보들이 확정되면 어찌 변할지 모르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수정당은 여전히 의미 있는 수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공천경쟁에서 드러나는, 상대방의 말꼬리를 물어뜯고 약점을 할퀴는 방식의 선거풍토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대통령선거는 시대정신이 반영된 이슈를 토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만드는 후보가 승리한다. 모진 단어를 동원해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선동에 휘둘리는 `회고적 투표`가 아니라 누가 국가를 잘 이끌어 갈 것인가를 기준으로 `전향적 투표` 행태가 나타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결국은 심판론을 앞세운 캠페인보다는 미래에 대한 신실한 청사진으로 유권자들로부터 미더움을 높이는 전략이 주효하다는 이야기다.가파르게 기울어진 운동장 높은 곳 진보진영 후보들의 선거캠페인에서 `적폐청산` 구호는 약방의 감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모든 후보들이 이들의 다짐에 대해 `좌파정권의 적폐`를 들먹거려 역공하거나, `정체성 부정`으로 몰아가는 형식으로 연일 성토하고 있다. 더민주당 안희정 후보는 `적폐청산` 구호에 대해 “미움과 분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우려를 거듭 내놓았다.걱정했던 대로, 문재인 후보가 `적폐청산 특별조사위원회` 설치를 입줄에 올렸다. 일단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더 파헤치겠다는 의지표명이었음에도 위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권력보다 `독한 술`은 없다. 처음엔 사람이 권력을 쥐지만 그 다음엔 권력이 사람을 삼킨다. `적폐청산` 선동이 광장정치에 편승해 무소불위의 광풍을 일으키는 날이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1966년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 광장정치였던 문화대혁명은 10년간 무려 300만명을 숙청했고, 경제피폐와 부정부패를 만연시켰다. 중국공산당마저 뒤늦게 `극좌적 오류`였다고 공식 평가했다. 전두환 군부가 국민적 환심을 사는 동시에 공포분위기 조성을 위해 단행한 삼청교육대는 449명 사망(후유증 사망자 포함)을 비롯해 정신장애 등 상해자를 2천678명이나 발생시킨 부끄러운 인권침해 역사였다.대선후보 지지도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유례없이 믿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불가측성을 바탕으로 하는 복잡계가 작동되고 있다면, 개표결과가 발표되기 직전까지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레이스가 될 것이다. 유권자들 스스로도 지금 당장 자신이 어떤 인물을 지지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한 선거판이 흘러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최저 투표율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측마저 나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번 선거 역시 `회고적 투표`보다는 `전향적 투표`가 승패를 가를 것이라는 점이다.

2017-03-28

`잠룡(潛龍)`들의 셈법

▲ 안재휘 논설위원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6백여만 명의 유태인 학살을 비롯한 끔찍한 세계사적 범죄를 저지른 독일의 비극은 1934년 투표율 95.7%, 득표율 88.1%로 히틀러 총리를 대통령직까지 겸할 수 있는 총통으로 뽑은 선거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직접선거로 지도자를 뽑았기 때문에 독일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했고, 스스럼없이 전쟁과 학살 범죄를 저질렀다. 단지 선거제도를 준수한다는 것만으로 올바른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5월 9일에 치러질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이 후보선출 과정에 돌입했다. 예기치 않게 닥쳐온 조기대선을 향해 뛰는 주자들의 발걸음이 바쁘기 한량없는 시점이다. 이번 선거에도 어김없이 주자들 간의 유치한 `빨간딱지` 붙이기 놀이에 불이 붙었다. 상대방의 `과거` 쓰레기통을 뒤집어엎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나오면 악의적인 침소봉대와 왜곡을 잔뜩 `처발라` 동네방네 쌍나팔을 불어댄다.단기간 펼쳐지는 선거일수록 네거티브 전략이 큰 효과를 본다는 특성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도 음모가 활개를 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과거 대선과정에서 저질러진 추악한 흑역사들을 뚜렷이 기억한다. 역대 대선에서 가장 강력했던 네거티브 캠페인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상대로 한 `두 아들 병역비리 의혹`이었다. 이 전 총재는 유리한 판세에도 불구하고 이 의혹에 발목이 잡혀 두 차례나 낙선하는 비운을 겪었다.이회창 전 총재의 아들 병역비리는 결국 무혐의 처리됐고,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씨는 형사처벌까지 받았지만 대선은 이미 끝난 뒤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당시 70대 초반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상대측으로부터 치매에 걸렸다는 공격을 당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최태민과의 사이에 딸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곤욕을 치렀다.이명박 전 대통령 또한 `BBK 주가조작` 사건 관련 의혹에 휘말렸었다. 김대중·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들은 모두 제기된 의혹들을 `정면 돌파` 방식으로 극복하고 당선장을 거머쥐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회창 전 총재는 결국 상대의 네거티브 캠페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게 패인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선거판에서는 상대방의 네거티브에 대응하고 극복하는 능력도 주요한 평가덕목으로 치부된다.각 정당들이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에 돌입했고, 해보겠다고 나선 후보들이 즐비함에도 대선전은 시들하다. 생동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경선무대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하나같이 시큰둥하다. 대통령 탄핵의 여파로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 형식이 돼버린 선거구도가 흥미를 앗아가 버린 원인이다. 이렇게 진보진영의 집안잔치 일색으로 치러지면서 보수·중도 진영의 존재감이 사라진 선거는 정말 괜찮은 것일까.각 정당의 후보가 결정되고 난 뒤가 더 문제다. 대선주자들이 어떤 셈법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라진다. 더불어민주당의 정당지지도가 과반을 넘나드는 상황 속에서 다른 정당들과 후보들이 떨어지더라도 개별적인 정치야망을 위해 지명도라도 높이겠다는 심산으로 줄줄이 뻗대는 모습을 보인다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 있다. 작금 보수·중도 진영의 지리멸렬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선거제도가 갖는 가장 중요한 장점은 `긴장감`이다. 팽팽히 맞서는 선거를 통해서 `견제와 감시`라는 건강한 정서가 형성되고, 당선자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폭로·공작정치의 유혹이 난무하는 선거판에서 결과를 포기하고 이름이나 알리겠다고 우후죽순 나선 선거는 위태로움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일방적인 선거는 상상을 초월한 국가적 재앙으로 귀결될 수 있다. 19대 대통령선거가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독일국민 95.7%의 88.1% 지지가 히틀러를 끝내 괴물총통으로 만들었다.

2017-03-21

부러진 `날개`

▲ 안재휘 논설위원`반대의 일치`라는 개념이 있다. 15세기 독일의 추기경이자 수학자·철학자인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가 신의 무한성을 입증하기 위해 내놓은 이론이다. 쿠사누스는 원을 무한히 축소하면 원주(圓柱)에 일치하고 무한히 확대하면 원주의 곡률(曲)은 차차 0에 이르러 곡선은 직선에 가까워지며, 삼각형의 한 변을 무한히 확대하면 일직선이 된다는 원리를 동원해 설명했다. 이 개념은 두 눈이 반대방향을 응시하고 날갯죽지의 두 근육도 엇나가게 작동하지만 결과적으로 한 곳으로 날아가는 새날개의 원리와 함께 자주 인용된다. 언론인 출신으로서 진보 사회운동가였던 고(故) 리영희 교수는 저서에서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와 우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의 상태”라고 말한 바 있다.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인용`으로 귀결되면서 온 나라가 황망의 끌탕이다. 헌정 사상 최초라는 오명을 기록한 박 대통령의 파면은 보수정치의 몰락을 상징한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기치로 내걸고 이 나라의 정치를 주도해온 보수정치는 입지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현실화되고 있는 조기대선 국면에서 보수주의를 대표할 변변한 후보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결국 대한민국 정치는 한쪽 날개가 완전히 부러져 비상(飛翔)이 미심쩍은 초라한 `새` 꼴이 됐다. 허겁지겁 치러야 하는 대선판도는 가파르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대통령선거가 부실해질 위험이 한층 더 높아졌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부족한 대통령을 물러 앉힌 다음 또다시 대통령선거를 엉성하게 치르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일단 진보세력 내전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5월 장미(薔薇)대선`은 `적폐 대청소론`과 `국민 대통합론`의 맞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엄청난 변란을 겪으면서 `적폐청산`과 `대통합`은 온 국민들이 갈망하고 있는 으뜸 주제들이다. 더께로 쌓인 폐해들을 일소하는 일과 갈가리 찢긴 민심을 치유하는 작업은 그 어느 쪽도 소홀히 할 사명이 아니다. 굳이 뉘앙스를 나눠 예측하자면 `적폐 대청소`를 주장하는 쪽은 다소 과격한 인상이고, `국민통합`을 부르짖는 쪽은 세력연대나 권력분산 쪽에 우선순위를 둘 것으로 전망된다. 그 목표에 큰 차이가 있지 않다면, 방법론이나 우선순위는 핵심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비극적인 국가불행에 대해 현저한 인식의 간극이 암운이다.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결정 이후 묵묵부답으로 국민들의 허망을 보탰다.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갈등의 방아쇠인 팽목항으로 먼저 달려갔다.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는 “미국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으스댔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박 전 대통령을 향해 “청와대 불법점거”라면서 `싸가지 없는 진보`의 면모를 또 한번 과시했다.대통령 탄핵을 견인해낸 촛불집회는 열광의 `축제`를 연출했다. 태극기를 들고 나섰던 사람들 중에 3명이나 되는 귀한 생명이 희생됐다. 더 이상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통합`과 `치유`는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화합`을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것은 치졸한 악덕이다. 헌재 결정 직후 국회소추위원장인 바른정당 권성동 의원이 밝힌 “누구의 승리도, 누구의 패배도 아니다”라는 소감은 백번 옳다.현격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용단이 절실하다. 움켜쥐려고 하면 더 빠져나가는 민심의 오묘한 본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순정한 `비움`의 자세로 뭉쳐내야 한다. 당장 판을 뒤집어엎겠다는 섣부른 욕심은 금물이다. 부러진 날개를 하루빨리 고쳐내어 `반대의 일치`라는 순기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이 나라는 위험하다. 대한민국이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서 지금 가장 필요한 약은 오로지 `진정한 화합` 하나뿐이다.

2017-03-13

`태극기`가 기가 막혀

▲ 안재휘 논설위원대통령의 긴급 성명발표가 예고된다. 온 국민의 촉각이 집중된 가운데 대통령이 마이크 앞에 선다. “저는 오늘 이 시간부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겠습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증폭된 저와 제 측근들에 대한 온갖 의혹을 전면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목과 질시로 인해 두 쪽으로 갈라진 조국의 극한혼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기에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자 합니다. 진실여부를 떠나서, 이 혼란상은 모두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이 시간 이후 각계각층이 일체의 갈등과 앙금을 씻어내고 대한민국이 화합 속에 평화롭기를 진심으로 호소합니다.”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국민들이 꿈꾸고 있는 `홍해의 기적` 같은 상상 중 하나다. 파멸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아무리 둘러보고 머리를 쥐어짜내어 보아도 길이 없다. 헌재 결정 이후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 나오고 있는 `낙관`은 그 어느 것도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의 98주년 3·1절 기념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들지 못했다는 소식은 참담하다. 내란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국기마저 정쟁의 상징물이 된 역사는 없다. 국경일에도 `태극기`를 마음 편히 들거나 게양하지 못하는 희한한 일은 오늘날 우리가 맞닥트린 분열상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대변한다. 우리에게 `태극기`란 어떤 존재인가. 1882년 미국과 수호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국기가 처음 제정됐다. 같은해 9월 수신사로 일본으로 향하던 박영효는 고종의 명을 받아 배 위에서 태극문양과 그 둘레에 건곤감리 4괘를 그려 넣은 국기를 만들었다.하지만 우리의 태극기는 머지않아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처절한 탄압의 대상물이 된다. 삼일절은 바로 참혹한 태극기 수난사의 시발점이다. 고종의 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과 함께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시작됐다.일본의 기록은 당시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1천542회나 벌어졌고, 참가인원은 202만3천89명, 사망자수가 7천509명에 이른다고 쓰고 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가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전몰장병은 또 얼마인가. 태극기에는 피흘려 지킨 이 나라의 숭고한 역사와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탄핵 이슈를 놓고 주말마다 벌어지는 극단적인 두 집회의 이름이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로 명명된 것은 비극이다. 촛불이 담고 있는 염원과 태극기가 담고 있는 애국은 결코 대립의 개념일 수가 없다. 많은 국민들은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왜 태극기를 들지 못하는지, 태극기 꼭대기에 왜 기어이 노란 리본을 묶어 매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태극기집회`에는 왜 촛불이 금기시돼야 하는지도 납득하지 못한다. 해를 넘겨가며 확대돼온 국론분열과 대치 양상의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혹자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어른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이는 4류에 머물고 있는 수준미달의 정치가 문제라고 말한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혼란의 핵심 원인은 이 나라에 참다운 `애국자(愛國者)`가 없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순국하신 애국 열사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아신다면 피눈물을 흘리실 것이다. 일체의 사(私)를 버리고 나라를 위해 영육을 희생하신 그 분들의 눈에 작금의 이 나라 꼴은 얼마나 절망적일 것인가. 오늘날 칼끝대치 국면에서 사심을 버리고 먼저 물러서는 지도자가 진정한 애국자다. 태극기와 촛불을 함께 들고 길거리에 나서는 감격의 날을 꿈꾸는 국민들의 갈망이 부디 헛된 망상이 아니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영원히, 태극기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는 국민으로 살아야 한다.

2017-03-07

`분노`와 `쓰레기통`

▲ 안재휘 논설위원`팬덤(fandom)`은 `광신자`를 뜻하는 영어의 fanatic과 `영지(領地) 또는 나라`를 뜻하는 접미사 dom의 합성어다.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거나 몰입하여 그 속에 빠져드는 사람을 가리킨다. K-pop으로 대표되는 한류(韓流)의 성공비결은 특정 연예인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팬덤`의 과학적인 조직과 관리운영이다. 한번 양산된 `팬덤`의 아성은 완고하다. 정치권에서도 이 `팬덤` 현상은 지속적으로 발현돼왔다. 스타정치인을 중심으로 `~계`라는 이름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 패거리정치도 일종의 `팬덤정치`다. 민주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 `팬덤정치`는 순기능을 한 사례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나라는 지금 엇나간 `팬덤정치`가 빚어내는 가공할 부작용의 한복판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조기대선을 상정해 펼쳐지고 있는 대선 정국은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대구·경북에서 38.0%로 으뜸자리를 차지했다는 여론조사결과(리얼미터)가 눈에 띈다. 전·현직 대통령 호감도 조사에서 대구·경북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36.1%)이 박정희 전 대통령(31.0%)을 앞섰다는 결과(리서치뷰)도 보인다.선두권을 굳건히 장식하고 있는 잠룡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다. 최근 두 주자들은 `분노`와 `사랑` 논쟁으로 한바탕 부딪쳤다. 논란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선한 의지`를 인정하는 취지의 안희정 발언에 대해 문재인이 “분노가 빠져 있다”고 지적하면서 시작됐다. 안희정은 “지도자의 분노는 피바람을 일으킨다”고 맞대응했다.문재인은 다시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심 없이 어떻게 정의를 바로 세우겠느냐”고 반문했고, 안희정은 “분노의 실천과 마무리는 사랑”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친문(親文)세력의 집중포화 속에 안희정은 결국 꼬리를 내려 “적절치 못했다”고 사과했다.그러던 사이에 문재인 캠프 자문단 공동위원장인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의 해괴한 발언이 정치권을 강타했다. 정세현은 언론인터뷰에서 김정남 독살사건과 관련 “비난만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라면서 `김대중 납치` `이승만 정적제거`의 역사를 들었다. 그는 독살사건에 대해 “인권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의문”이라고까지 언급했다.안희정과 정세현의 발언 논란은 모두 `말실수`인 것처럼 유야무야 돼가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의 입에서 나온 `분노`라는 단어가 갖는 비상한 의미는 흘려듣기가 어렵다. 분노에 불을 지르는 방식으로 `노사모`라는 팬덤그룹을 형성해 성공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했던 문재인의 `분노`는 그의 `대청소론`과 연계돼 불길하다. 정세현의 발언은 더 심각하다. 정세현의 논리는 정확하게 `물귀신 작전`에 닿아있다. 유력 대선주자 캠프의 자문위원장이 `쓰레기통 뒤집어엎는` 비겁한 수법으로 대한민국을 `똥 묻은 놈` 취급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단종(端宗)`의 사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비아냥거림마저 나온다.`연정(聯政)` 희망을 말하던 안희정이 벼락 맞은 듯 일순간 꺾여가는 모습에서 또 하나의 암운을 본다. 모조리 청산하겠다고 벼르는 지도자가 일으킬 정치보복 광풍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온 세계를 경악시키고 있는 `김정남 독살` 사건마저도 이단공단(以短攻短)의 허술한 논리로 두둔하는, 소위 통일전문가의 발언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특정 정치인을 딱 정해놓고 무슨 짓을 저질러도 끝까지 지지하는 `팬덤정치`의 만연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는 생생히 목도하고 있다. `독재`의 유혹이나 `농단`의 변태로 흐르기 십상인 `팬덤정치`는 분명히 혁신해야 할 대상이다. `촛불`과 `태극기` 집회의 이면에 웅크린 저 어둑한 `팬덤`의 망령을 하루빨리 극복해내지 않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2017-02-28

`잔인한 봄`이 온다

▲ 안재휘 논설위원`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만주 하얼빈 역에서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께서 남긴 여러 유묵(遺墨) 중 보물 제569-6호는 압권이다. `이로움을 보았을 때는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는 목숨을 바치라`는 내용의 이 글귀는 윗물 아랫물 가릴 것 없이 사리사욕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참담한 현실에 준엄한 채찍으로 다가온다. `잔인한 3월`이 오고 있다. 대한민국은 마치 마주보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두 개의 기관차처럼 위태롭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시작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용돌이가 주말마다 전국 곳곳을 전쟁터로 만들고 있다. 혹자들은 `구한말 혼란기 데자뷔(旣視感)`를 말하고, 또 다른 이는 `제2의 IMF 구제금융` 위기를 입줄에 올린다.헌법재판소(헌재)는 탄핵소추안에 대한 결정 초읽기에 들어갔다.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정반대의 주장을 담은 초대형 집회들이 거리를 휩쓴다. 입으로는 `판결 존중`을 말하면서도 군중은 마치 제 말대로 결정해주지 않으면 법정이라도 때려 부술 기세다. 유력정치인들의 “다른 결론이 나오면 민심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예단은 교졸한 `협박`이다.봄은 저만치 올동말동하고 있는데, 헌재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철없는 `러시안 룰렛` 게임에 민심은 점점 더 얼어붙고 있다. 마치 헌재 결정 이후에는 나라가 거덜이 나도 상관없다는 듯한 이판사판 기세다. 이 어리석음의 도가니를 탈출할 묘방은 정녕 없는 것일까. 국회의원들이 `광장정치` 선동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입법부의 자존심을 내팽개친 몰염치한 행태다.예측불허의 혼돈 속에서 행정부는 납작 엎드려 눈알만 굴리고, 나라꼴이야 뭐가 됐든 정치권은 `권력 더 움켜쥐기`에 미쳐 있다. 기업들은 몸조심 모드에 들어가면서 일자리 사정은 바야흐로 최악으로 치닫는 중이다. 국제사회에서 `KOREA`의 이미지는 한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지쳐나자빠지는 서민들을 진심으로 돌아보는 위정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나라를 정말 결딴낼 지도 모를 갈등은 `사드 배치` 찬반 논란이다. 북한의 거듭된 `핵 공갈`에 둔감해진 민심을 비집고, `사드 배치` 반대론자들이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북한권부를 `핵 포기` 설득이 가능한 집단으로 여기는 그들의 관점은 과연 옳은 것인가. 김정남 독살 사건을 보면서도, 목숨 내걸고 권력자에게 `핵 포기` 용단을 건의할 참모가 북한에 있다고 여전히 믿는 것인가.역사를 돌이켜보아야 길이 보인다. 인조는 조정 내에서 벌어진 친명(親명나라)-친청(親청나라)파의 우물 안 개구리식 당파싸움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삼전도에서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국치(國恥)를 기록한 비루한 군주가 됐다. 고종은 아버지인 대원군과 왕비 명성황후의 치졸한 권세다툼을 다스리지 못해 망국의 비운을 피하지 못했다.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이 끝나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기대선이 치러진다면 정치권은 또 얼마나 많은 거짓말들을 흩뿌려댈까. 그 무지막지한 포퓰리즘 광풍에 나라꼴은 만신창이가 되고, 마비된 민심은 또다시 엉터리 지도자를 뽑는 것은 아닐까. 아니, `북핵` 대처를 놓고 갈팡질팡하는 국론분열이 끝내 북한의 오판을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나라의 참 주인인 국민들이 진실로 중심을 잡아야 할 대목은 한 둘이 아니다.`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이면이 까발려지면서 드러난 `이로움을 보았을 때 정의를 생각하는` 지도자가 없는 현실이 슬프다. 국방의 영역인 `사드 배치`를 놓고 권력셈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선놀음을 보니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는 목숨을 바치려는` 위인 또한 없는 나라 형편이 비통하다. 입춘대앙(立春大殃), `잔인한 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건만, 믿고 기댈만한 기둥 하나 없이 각자도생(各自圖生) 처지에 몰려있는 민초들만 서럽다.

2017-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