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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몰염치(沒廉恥) 파노라마

▲ 안재휘 논설위원인터넷과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발달로 우리 사회에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에 갇힌 인신공격, 칭찬이 범람한다. 정치선동이 쌓아온 적개심이라는 갈등유발의 악성 촉매들이 세상을 삭막하게 만들고 있다. 도무지 이성적인 견해는 먹히지 않고, 이념의 잣대로 상대방 떠보는 일에만 열중이다. 온전한 사상도 아닌 염치없는 `편먹기` 근성이 인간다움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 2월 17일 새벽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인터넷에는 한정석 영장전담판사를 향해 “정의를 실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판사님만이 대한민국 희망입니다” 등등의 글들이 도배됐다. 그런데 지난 11일 김재철 전 MBC 사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자 이를 담당한 강부영 판사를 대놓고 비난하는 글들이 넘쳐났다.22일 오후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에 대한 구속적부심에서 석방 결정을 내려지자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신광렬 재판장에 대한 신상털이가 시작됐다. `적폐 부역자 하나 추가` `역사책에 적폐 표본으로 (이름) 석 자 새겨야` `길에서 누구한테 터졌으면` 같은 저급한 비방성 글들도 다수 올라왔다. 다음 아고라에도 `소나무 재선충 같은 존재` `적폐를 몰아내고 처단해야 한다`는 글들이 봇물을 이뤘다.문제는 정치권마저도 선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신광렬 판사는 우병우 전 수석과 TK(대구·경북) 동향, 연수원 동기로 같은 성향”이라고 공격했다. 같은 당 안민석 의원도 페이스북에 `적폐 판사들을 향해 국민과 떼창으로 욕하고 싶다`고 썼다.그러는 사이에 국회는 24일 비난여론을 무시하고 국회의원 사무실마다 8급 공무원의 수를 1명씩 총 300명을 늘리는 내용의 법안을 가결했다. 올해 말부터 현행 7명에서 한 명 늘어난 8명의 별정직 공무원 보좌진을 둘 수 있게 됐다. 인턴사원 1명을 정규직으로 만든 일이라, 동일업무 근로자의 차별해소와 정부의 일자리창출 정책과 맞아떨어진다고 극구 해명하지만 염치없어 보이는 행태임에는 틀림없다.자유한국당은 정우택 원내대표의 후임을 선출하기 위해 다음달 15일 원내대표·정책위의장 선거를 치른다. 차기 원내대표 후보군에 소위 친박으로 분류되는 정치인들이 포함됐다. 이를 두고 한 보수언론인은 탈북한 북한병사 몸에서 발견된 기생충에 빗대어 `회충이야 구충제 몇 알이면 사라지겠지만 무너지는 보수에서 마지막 단물까지 빨아 먹겠다는 기생충 박멸은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라고 통탄한다.`몰염치(沒廉恥) 시리즈`는 또 있다. 법무부가 특정 정치집회와 관련해 형사처벌을 받은 참가자 전원에 대해 특별사면을 검토하라고 22일 전국 검찰청에 지시했단다. 법무부가 콕 집은 집회는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밀양 송전탑 반대` `서울 용산 화재 참사`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반대` `세월호 관련` 등 5개다. `참가자 전원 사면`이라는 기준이 또 다른 형평성 위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법치국가`의 담장에 마구잡이로 곡괭이질, 돌팔매질을 해대는 네티즌들의 일탈을 자제시키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부추기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들의 편벽한 언행은 자제돼야 한다. 정권을 잡고도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저 지독한 성마름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법관들의 낱낱 결정을 하나씩 찍어 이념색깔론으로 재단하여 마구발방 퍼붓는 악성 모욕, 국민정서는 아랑곳없이 눈 질끈 감고 세금으로 쓰는 사무실 직원을 늘리는 국회, 온 세상에 나라 망신을 시키고도 도무지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는 비정상적인 정치패거리, 보복의 칼질을 넘어 자기네 지지자들 범법흔적 모두를 모조리 씻어주려는 편협한 권력행태 등 온당치 못한 뭇 세력들의 `몰염치 파노라마`가 나라의 미래를 시커멓게 멍들이고 있다.

2017-11-27

`청산`과 `보복` 사이

▲ 안재휘 논설위원TV 사극에 비쳐지는 사화(士禍) 장면은 끔찍하다. 피투성이의 특정당파 일행이 굴비두름처럼 엮여 나와 피가 튀는 매질을 당하고, 주리 틀리는 장면은 아이들이 볼까 두려울 정도다. 피비린내 나는 사화는 15세기 말 조선 연산군 때 시작돼 16세기 전반 명종 때까지 4차례나 거듭됐다.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사화의 본질이 `복수`였다는 평가에는 이의가 없다. 참변은 계속됐다. 특히 숙종(肅宗)은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변을 일으켰다는 게 사가(史家)들의 분석이다. 상대 당을 제거해 붕당정치의 본질을 흐린 역사는 갑인예송 이후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이 서인에 의해 대규모로 숙청된 경신대출척(1680년)에서 시작된다.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 사사되고 남인이 다시 등용된 기사환국(1689년) 역시 유사한 비극이었다.문재인정부의 사정(司正)정국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청와대에 40억원대의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를 상납한 혐의를 받는 박근혜정부 시절의 세 국정원장 중 남재준·이병기 전 원장이 구속됐다.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상납을 요구했다”고 진술한 이병호 전 원장만 구속을 면했다.이명박(MB)정부 때 국방부장관이었다가 박근혜정부에서도 국가안보실장으로 관직을 이어나갔던 김관진 전 장관도 사이버사령부의 댓글공작 관련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국가안보실장 시절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을 불법 수정한 혐의까지 받고 있다. MB를 검찰청 포토라인에 세우기 위한 수순을 차곡차곡 밟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검찰은 사이버사령부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공격하고 그 성과를 청와대에 보고한 정황, `우리 사람을 철저하게 가려 뽑아야 한다`는 MB의 지시 정황이 담긴 문건을 확보했다고 흘리고 있다. MB는 얼마 전 바레인 출국에 앞서 자신을 향한 `적폐청산 수사`를 `보복`이라고 규정했다.전병헌 전 청와대정무수석이 검찰의 소환조사 대상이 된 사태의 의미는 분명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최경환 의원을 비롯한 여러 명의 야당 정치인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린다. 정치인들 사이에는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내어주고 뼈를 부러뜨림)의 보복극이 시작됐다`는 비명이 흘러 다닌다.여야를 불문하고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시절은 괴롭다. 여차하면 `육참`의 희생양이 되거나, `골단`의 목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일 따름, 정치인들의 행태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속정당이 다르다고 아주 다를 이유도 없다.정권이 바뀔 적마다 늘 반복돼온 이 같은 장면은 생소한 일이 아니다. `보복`이라고 써놓고 `개혁`이라고 읽고, `복수`라고 써놓고 `청산`이라고 우기는 푸닥거리는 번번이 펼쳐져 왔다. 잇따르는 `위법·불법` 폭로를 집권당은 한사코 `적폐청산`이라고 욱대기고, 야당은 `복수극`이라고 극구 반발하는 충돌이 깊어지고 있다.사정정국이 진정한 혁신이 되려면 마녀사냥으로만 치달아서는 안 된다.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을 속속들이 고쳐내는 일에 집중돼야 한다. 아적(我賊)을 딱 갈라놓고, 적이면 무조건 옭아 넣고 아군이면 적당히 봐주는 식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며, 엄정해야 할 `법`을 시시때때 코에 걸었다가 귀에 걸었다가 하는 남용은 결국 자승자박이 될 확률이 높다.정부여당의 `적폐청산` 드라이브가 역사에 `개혁`으로 남기 위해서는 그 전후좌우가 공명정대해야 함은 물론이요, 형평성에 있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행여 훈구파의 `주초위왕(走肖爲王)` 장난질에 부화뇌동한 중종(中宗) 대의 기묘사화 같은 참담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고작 38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은 천재사상가 조광조(趙光祖)는 참 억울했을 것 같다.

2017-11-20

`정계개편` 연산법

▲ 안재휘 논설위원문명의 이기가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영역은 제한적이다. 전자제품의 등장은 오히려 인간 두뇌의 사칙연산 기능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있다. 간단한 덧셈마저도 계산기부터 찾는 인간의 행동양태가 이를 증명한다. 스마트폰의 발달은 전화번호를 외우는 기능부터 퇴화시켰다. 장구한 세월 사랑받던 주판(珠板)이나 암산법은 이제 박물관 진열장 속으로 들어갔다. 정계개편론이 무성하다, 바른정당이 쪼개져 교섭단체 지위를 잃었고, 국민의당도 흔들리고 있다. 미구에 정치권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한다. 5당 구조가 깨어질 것이라는 예상에서부터 결국 보수 대 진보의 1대1구도로 재편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전망도 나온다. 바야흐로 정치인들의 계산기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다. 각자의 입지가 유리해질 방향을 찾아내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을 것이다.5대 정당의 성향을 구성원들의 이미지로 단순분석하면 이렇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다수의 진보와 소수의 중도로 구성된다. 자유한국당은 다수의 보수와 소수의 중도가 섞여 있다. 국민의당은 진보와 중도가 반반 쯤 되지만 호남이 기반이라는 점에서 진보가 조금 더 강하다. 보수와 중도가 반반 정도이던 바른정당은 중도 쪽만 남았다. 정의당은 자임하듯이 진보정당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이처럼 이념적 스펙트럼으로서의 명징한 정당구조가 아닌 까닭에 다당제라고 하지만 사실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나뉜 변태적 이합집산(離合集散)일 따름이다. 바른정당의 균열도, 국민의당의 내부지진도 결국은 이 불안정 구조에 기인한다. 혁신방안으로 `정계개편`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념적 성향대로의 `헤쳐모여`를 가로막고 있는 강력한 요소는 따로 있다.그것은 바로 정당이 갖고 있는 `지역성`이다. 시나브로 튀어나오는 `전국정당화`란 구호는 `세력 확장`의 욕심표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역성을 갖지 못하는 정당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치인들은 선거에서의 당락에 어떤 깃발이 유리한지에 대해서만 골몰한다. 정치거목들과의 사사로운 인연이 정당선택의 결정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출신지역 때문에 발이 묶인 정치인들은 수두룩하다.민심은 여전히 다당제를 선호한다. 지난 11월초 문화일보가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결과에서 바람직한 정당 구조를 묻는 질문에 무려 65.0%의 응답자가 `다당제`라고 답했다. `양당제`를 꼽은 비율은 29.4%에 불과했다. 한국당 지지층 가운데서 48.7%가 양당제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것이 이채롭다.다수의 민심은 유불리만 따지는 정치인들 셈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결국 지금까지 그랬듯이 정치권의 재편 논쟁은 정치인들의 계산기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정당구조에 대해 가장 고민이 큰 쪽은 문재인 대통령이어야 맞다. 현재의 정당구도는 의회권력과 행정부 권력의 이원적 정통성이 충돌하는 여소야대의 부정적 요소가 극명하게 노출돼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이 느긋할 수 있는 환경이 존재한다. 바로 국민들의 굳건한 지지율이다. 소속은 다르지만 국민의당 쪽 호남정치인들이 문재인정권의 곤경을 끝내 외면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도 있다. 결정적인 실정이 나오지 않는 조건에서 문 대통령의 치세에 내응할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대변수인 문 대통령이 `헤쳐모여`를 서둘러 외칠 이유란 당분간 없어 보인다.민심이라는 예측불허의 변수가 상존하는 한 정치인들의 계산기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1+1이 꼭 2가 되란 법이 없다. 보수를 뭉쳤다가 결집된 진보에 당하거나, 진보의 뭉침이 보수의 집결을 초래한 사례는 많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의 계산기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계산기가 만들어내는 연산이 적중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진정 국민을 위한 `정계개편`이 아닌 한 그렇다.

2017-11-13

다언삭궁 (多言數窮)

▲ 안재휘 논설위원`말이 많을수록 자주 궁색해지니 속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는 말이 있다. 도덕경 제5장에 나온다. 노자(子)는 제23장에서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希言自然)`고 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장에 걸쳐 `말이 많은 것(多言)`을 경계했다. 일상생활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의 적격성에 대한 정치적 논란 파장이 깊다. 제기되고 있는 의혹들을 불법여부의 기준으로만 보면 중대한 하자로 분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과거의 여러 말과 글들은 합법·불법 차원을 뛰어넘는 중대한 이중성의 문제점을 노정한다.문재인 대선캠프에서 정책본부 부본부장으로 있을 적에 홍 후보자는 “입시기관이 돼버린 특목고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작 자신의 딸이 학비가 연 1천500만원에 달하는 청심국제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1998년 홍 후보자가 발간한 저서`삼수·사수를 해서라도 서울대에 가라`(미래와 사람들)는 학벌주의의 진수를 보여준다. 연세대학교 출신인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성공한 사람들은 세계의 천재와 경쟁해나갈 수 있는 근본적인 소양이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런 해괴한 조언을 펼치기도 한다. “농구공만 던지면서 스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며, 대부분의 경우 `거렁뱅이`가 되기 십상이다.”2007년 11월 그가 김상조·유종일과 함께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린 `한국경제 새판 짜기`(미들하우스)에서는 노무현정부에 대해 맹비판을 퍼붓는다. “노무현 정부는 조만간 끝나지만 이 (노무현 정부의 실패와 관련한) 공범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또 있다. 2001년에 낸 책 `한국은 망한다`(이슈투데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후에 부패방지를 위해 남긴 성과는 거의 없다”고 썼다.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임명을 꿈꾸는 홍 후보자는 지난 2009년 지상파의 한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런 놀라운 말을 한다. “가장 지속가능하고 가장 좋은 일자리가 대기업 일자리거든요. 대기업에 가서 거기서 직장생활하는 것이 가장 훈련을 많이 하고 좋은 일자리입니다.” 하지만 그는 화려하게 변신한다.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2012년을 기점으로 진보·좌파진영을 옹호하는 수려한 논리들을 잇달아 펼쳐 내놓는다.그나마나, 홍 후보자의 자격논란과 관련한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언급은 정말 어이가 없다. 그는 `특목고` 문제와 관련한 표리부동 논란에 대해 “제도적으로 고치자는 것이지, 딸이 국제중을 갔다고 도덕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고 두둔했다. 그러면서 “그럼 여러분(기자)도 쓰신 기사대로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단다.기가 막힐 노릇이다. 인사실패 논란으로 이미 여러 차례 곤욕을 치른 청와대의 절박한 심사는 이해가 간다. 아무리 그래도 `겸양`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취재기자들에게까지 `너희들은 기사대로 살고 있느냐`고 공박하는 오만한 태도는 참으로 소화하기가 버겁다. 홍 후보자는 국회 청문위원들이 요구한 자료도 일체 내놓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 `국민정서`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청문회는 청문회고 임명은 임명이니 눈 감고 귀 막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고 버티기로 작정한 모양이다.랍비(유대교 율법교사)가 제자들에게 상자를 두 개 주면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담아오라고 했더니 두 상자 다 혀를 가득 담아 왔다던가. 이쯤 되면 `다언삭궁(多言數窮)`의 덫에 걸려든 사람들은 혀를 잘라버리고 싶을 만큼 낭패감에 빠져 있어야 옳다. 이런 짐작마저도 순진한 착각이라면 참 씁쓸한 일이다.

2017-11-06

`지방분권형 개헌` 앞길의 허들(Hurdle)

▲ 안재휘 논설위원지난 2003년에 출간된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경제학부 장하준 교수의 명저(名著) `사다리 걷어차기`는 선진국들의 성장 신화 속에 숨겨진 은밀한 역사를 구체적 자료에 근거하여 논증했다. 이 책에서 장 교수는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 및 후진국들에게 강요하는 정책이나 제도의 모순과 위선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높은 곳에 먼저 올라간 존재가 더 이상 못 올라오게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못된 행태는 경제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남 여수에서 열린 지방자치의 날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방분권 정책 이정표를 내놨다. 제2국무회의를 제도화하고, 지방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개칭하는 내용과 입법권·행정권·재정권·복지권의 4대 지방 자치권을 헌법에 담겠다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국가기능의 과감한 지방 이양을 위해 내년부터 `지방이양일괄법` 제정을 단계별로 추진하고, 지방재정 분권을 위해 국세와 지방세 비율을 7대3으로 조정하겠다고 강조했다.이날 문 대통령이 밝힌 내용들은 지방분권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의제를 총괄하고 있다. 정부도 이에 발맞춰 광역단위 자치경찰제 도입, 주민투표제 및 소환제 활성화 등 향후 5년간 추진할 자치분권 로드맵을 발표했다. 또 시·도 소방본부에 소속돼 있는 지방직 소방공무원 4만4천792명을 국가직으로 전환하고, 현 정부 임기 내 소방 현장인력 2만여 명을 확충하겠다고 밝혔다.지방분권형 개헌을 염원해온 지역민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다. 호불호를 떠나서, 문재인 대통령만큼 지방분권을 위해 옹골차게 의지를 밝힌 지도자가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행정수반이 이토록 힘차게 깃발을 들고 일어섰으니 마치 지방분권형 개헌의 숙원은 다 이뤄질 듯한 낙관이 스며든다. 하지만 정말 이 길이 그렇게 녹록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보짓이다.많은 이들이 벌써부터 국회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걱정소리를 늘어놓는다. 1년 365일 땅따먹기 권력쟁패에 여념이 없는 정치꾼들이 중앙집권체제로 누려온 무소불위의 권력을 그렇게 호락호락 내려놓을 성 싶으냐는 비아냥조차 나온다. 실제로도 그렇다. 여의도 정치권에서 `지방분권형 개헌`에 대한 신실한 열기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허구한날 상대방의 썩어빠진 쓰레기통이나 둘러엎고, 사사건건 사보타지나 일삼는 무리들은 가짜 만병통치약 팔듯 엉터리 `민심`을 팔아먹는다. 제아무리 시대적 과제라고 해도 그런 정치꾼들이 `지방분권형 개헌`을 흔쾌히 사명으로 걸머질 이유가 있을까보냐는 예단이 횡행한다. 국회가 정말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다면 큰일이다.대다수 중앙관료들의 엘리트 의식도 만만치 않다. 그들의 뇌리는 `지방에 재정과 권한을 주면 말아 먹는다`는 논리에 절어있다. 하지만 그 속내에는 결국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부박한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권한을 넘겨주지도 않고 주야장천 부정론만 펴는 그들의 논리는 걸음마조차 시키지 않으면서 아이가 걷기를 바라는 형편없는 자기모순이다.벌써부터 그런 변설에 놀아난 논객들이 “그게 잘 될까?”하는 케케묵은 지레짐작을 펼치고 있다. 또 다시 `총론 찬성, 각론 반대`의 고약한 습성이 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차별적인 선입관을 깨는 일이 급선무다. 지역민들의 소원이면서 이 나라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과업인 `지방분권형 개헌`의 열쇠를 작동시키기 위한 눈물겨운 사투(死鬪)를 시작할 때가 됐다.국회의원들을 맨투맨으로 맡아서 설득하고, 감시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들이 `정계개편` 따위의 권력쟁탈전에 정신 팔려 역사적 숙제인 `지방분권형 개헌`을 등한시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서야 한다. 저 높은 곳에서 사다리를 걷어차기 위해 버둥대는 기득권 중앙집권주의 의식의 발목도 묶어내야 한다. 지금보다 더한 호기(好期)는 없었다. 우리는 이 절박한 허들경기에서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된다.

2017-10-30

`이벤트 정치`의 그늘

▲ 안재휘논설위원재임 중 원자력발전소 축소정책을 폈던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이 얼마 전 서울 장충동 장충아레나에서 열린 제18회 세계지식포럼 기조연설에서 한 말은 뜻밖이었다. 그는 연설에서 “프랑스 전력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원전”이라며 “포퓰리스트들은 탈원전 문제를 너무 성급하게, 쉽게 말한다”고 지적했다. 신고리5·6호기공론화위원회(공론화위)는 정부에 신고리5·6호기 공사를 재개할 것을 권고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최종 여론조사에서 `건설 재개` 쪽을 선택한 비율이 59.5%로서 `건설 중단` 쪽을 선택한 비율 40.5%보다 19% 포인트 높았다.의아스럽게도 청와대가 앞장서서 호들갑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공론화위 발표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번 공론조사를 “감동적인 과정이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이 모델을 다른 사회갈등 현안에 적용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우리 정치권에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라는 개념이 강력한 또 하나의 화두로 던져지고 있다.대의민주주의를 선택한 우리나라의 국회가 끝 모를 정쟁에 휩쓸려 제 역할을 해오지 못한 얼룩진 정치사는 길고도 복잡하다. 그 끝에서 대통령마저 `직접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 같은 새 길을 언급하고 있는 현실은 착잡한 일이다. 행정수반이 저래서는 안 된다는 비판과 국회가 얼마나 구제불능이면 저럴 것이냐는 공감이 교차한다.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국회는 도무지 진정한 수치심이 없다. 청와대가 국민지지를 등에 업고 입법부의 권능을 잇달아 깔아뭉개고 있는데도 마땅한 반성과 처신은 아랑곳없이 고리타분한 권위주의 행태만 거듭하고 있다. 예민한 국가적 이슈에 대한 해결능력을 상실한 이빨 빠진 사자들의 메아리 없는 으름장만 무성하다.더불어민주당 강훈식 원내대변인은 공론화위의 결정에 대해 “좋은 선례”라는 초라한 평가를 내놨고,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공론화위라는 조직으로 책임을 떠넘기고자 했다”고 지적했다. 국민의당 손금주 수석대변인은 “막대한 손해는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 따졌고, 바른정당 전지명 대변인은 “포퓰리즘이 만들어낸 재앙의 시작점”이라고 힐난했다.걱정스럽다. 입법·사법·행정 3권이 올곧게 따로서지 못한 얼치기 민주주의국가에 살고 있다는 현실이 새록새록 서글퍼지는 나날에 민초들의 걱정과 의심은 늘어만 간다. 대통령의 무리한 공약 하나를 고치기 위해 천문학적 재정이 낭비돼야 하고, 수많은 지역민들이 피폐위기에 떨어야 하는 게 이 나라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민의 대표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다시 유권자에게 `외주`를 줘서 해결해야만 하는 게 이 나라다.문 대통령은 지난 6월 19일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원전 중심의 발전정책을 폐기하고 탈핵시대로 가겠다”고 밝혔다. 멋있어 보였다. 웬만한 다른 나라에서는 엄두도 못 낼 `탈핵` 선언을 용감하게 했으니 참 멋있는 이벤트였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뚜껑 열고 보니 친환경에너지 대체정책이란 것은 씨도 안 먹힐 탁상공론이고, 원전 수출전선에는 `자살폭탄`이 터지고 말았다. 원전수주 경쟁국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탈핵` 선언 동영상을 앞으로도 얼마나 더 틀어댈 것인가. 원전산업에 온통 기대어 달려왔던 동해안 지역 지자체들은 폭격을 맞은 듯 아수라장이 됐다. 청와대의 반응은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생뚱맞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감동적`이란 말인가.묻고 싶다. 신고리 5·6호기 건설현장을 그렇게 꼭 멈춰놓고 답을 찾아야 했는가. 앞으로도 약속을 뒤집고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공론화위원회`라는 이름의 비겁한 수단을 정말 계속 동원할 참인가. 국회는 왜 `숙의민주주의`라는 심층적인 해법을 동원하지 못하는 것인가.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포퓰리즘과 이벤트 정치의 그늘이 깊고도 음습하다.

2017-10-23

`호통`과 `소통` 사이

▲ 안재휘 논설위원세종대왕은 재위 32년 동안 무려 1천928회의 경연(經筵)을 했다. 경연이란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일을 말한다. 산술적으로, 세종은 한 달에 평균 5번 이상 신하들과 함께 앉아 치열하게 공부하고 문답을 나누면서 나랏일의 갈래를 잡았다는 얘기다. 어전회의나 경연을 열 때마다 세종이 가장 먼저 한 말은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라는 질문(以爲何如)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군주가 모든 권력을 틀어쥔 왕조시대에 신하들의 생각을 먼저 물으면서 회의를 시작했다는 것은 세종이 `소통`의 가치가 무엇인지, 집단지성의 효용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옳다. 질문은 고민과 사유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좋은 질문은 궁구의 깊이를 더하고 토론에서 올바른 결론을 찾아가는 핵심 열쇠가 된다.정기국회 국정감사가 시작됐다. 올 국감도 여지없이 문을 열자마자 여야 정치권의 거친 샅바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정권교체가 이뤄진 이후 첫 번째 국감이고,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인 탓에 정쟁의 험상은 예측을 불허한다. 13일 헌법재판소 국감에서 여야는 국회에서 헌재소장 인준이 부결된 김이수 재판관의 소장대행 인정여부를 놓고 거친 충돌을 벌인 끝에 결국 파행으로 치달았다.헌재의 국감이 시작되자마자 야당 의원들은 소장 권한대행 체제는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은 위법적 체제라며 인정할 수 없다고 막아섰다. 여당 의원들은 야당이 잘못된 사실에 근거해서 국감을 거부하고 있다면서 야당이 국감을 파행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한 헌재에 대한 보복이라고 몰아쳤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논쟁에 화염을 키웠다.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야당의 국감 거부사태를 “국법질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서 “삼권분립을 존중해주실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는 글을 올렸다. 왜 그랬을까.야당들이 문재인 대통령이 대야 정치공방에 직접 뛰어든 데 대해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논평에서 “비상식적이고 일그러진 헌재를 만든 당사자가 바로 문 대통령”이라고 역공했다. 국민의당 이행자 대변인도 “대통령은 새로운 헌재소장을 즉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바른정당 전지명 대변인은 “문 대통령의 글은 국회의 임명동의권을 무력화시킨다”고 꼬집었다.헌법재판소에서의 한판 티격태격은 미구에 몰아닥칠 국감난장에서의 격투 워밍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세 장악을 위한 온갖 폭로전이 난무할 것이고, 민심에 불을 지르려는 선동전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조곤조곤 따져 묻고 귀 여겨 답을 듣는 제대로 된 감사현장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벽력같이 호통을 치고 모멸감을 주는 언사가 난무하는 꼴불견이 짐작된다. 제3공화국까지 존재하던 우리 국회의 국정감사권은 제4공화국 때 부패양산과 관계기관의 사무진행 저해를 이유로 삭제됐었다. 제5공화국 헌법에서 국정조사권으로 변경되었다가, 1987년 제6공화국 헌법에서 국정감사권으로 부활된 우여곡절의 역사를 갖고 있다. 국정감사가 알차게 진행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거나 정쟁의 입씨름 판으로 변질돼 헛바퀴를 돌아 국민들 사이에 `국감 무용론(無用論)`이 퍼지는 현상을 은근히 바라는 쪽은 어디일까.오늘날 `국정감사제도`는 옛날 왕들이 국정을 이끌어가던 경연의 확대된 형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국민들은 공무원들을 불러다 놓고 마구잡이로 호통이나 쳐대는 비생산적인 권력자랑 국감장을 가장 혐오한다. 경연을 진정한 소통의 정치현장으로 삼았던 세종대왕의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 전문성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무장한 채 각종 국정의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차분하게 묻고 또 묻는 선량들이 수두룩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2017-10-16

추석민심, 그 `아전인수`의 벽

▲ 안재휘 논설위원“세상에서 정력이 가장 센 사람은 누구일까요?” 김영삼(YS) 정부 초기에 유행했던 난센스 퀴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내내 사정(査正)을 지속하겠다”고 선언했다. 공직자 재산공개, 하나회 해체와 정치군부 숙정, 역사바로세우기, 1995년 지방자치제 확대 실시, 금융실명제 등 YS는 숨 쉴 겨를이 없도록 개혁드라이브를 몰아쳤다. 임기 말 IMF외환위기 초래로 빛이 바래긴 했지만 YS정부의 개혁 의지는 대단했다. 세상이 온통 어수선하다. 들려오는 소음만으로 판단하면, 머지않아 참혹한 전란(戰亂)이 일어날 가능성조차 있다. 나라 밖에서는 한반도 하늘에 시커먼 전운이 끼어 있다는데, 희한하게도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무신경하다. 무슨 까닭인지 정치권조차 아무런 긴장감이 없다. 집권 정부여당은 탄핵으로 옥에 갇힌 전 대통령을 넘어 이명박 전전 대통령까지 옭아 넣으려고 혈안이 된 모습이다.칼자루를 잃은 보수야권은 전전긍긍이다. 정작 국민들이 바라고 또 바라는 `보수혁신`은 얼개조차 못 내놓고 있다. 집권세력의 전방위적인 압박전술에 지리멸렬 군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폐청산`이라는 신무기에 장착된 억하심정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읽힌다. 정말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아직 우리는 `보복정치` 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돌이켜보면 역대 정권들이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다들 그랬다. `개혁`이나 `혁신`이라는 말을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하지 않은 정권이 없었다. 물론 그런 설거지들이 형편없던 우리 사회의 수준을 일정부분 끌어올린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를 키워온 다른 나라들에 비춰보아도 결코 뒤처지지 않을 만큼 단기간에 고쳐낸 구태들이 적지 않다.그러나 우리 정치가 여태 못 잘라낸 지독한 고질병 `패거리기질` 때문에 일어나는 퇴행적 소란은 통탄스럽다. 정치인들은 모든 사건을 오직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틀 속에 우겨넣고 떠들어댄다. 집권세력은 민심에 불을 지를 슬로건 하나를 내걸고 줄기차게 몰아친다. 그리고 그 폭포 속으로 정적들을 두름두름 몰아넣을 궁리에 몰두한다.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 타깃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거친 `정치보복` 논란이 시작됐다. 여권 세력의 일사불란한 칼질에 보수정치권은 고작 독설로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추석명절이 지나면 `적폐청산`에 대한 민심이 갈래를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돈다. 명절기간 특별한 소통이 이뤄지면서 모종의 변곡점이 형성될 거라는 분석인 것이다.정치인들은 어김없이 서울역으로, 고속버스터미널로 사진을 찍으러 달려가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 각자 듣고 온 민심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것이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정치인들이 전하는 명절민심이 신실해 보인 기억은 없다. 하나같이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벽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와서는 하고 싶은 말만 읊조린다.이번 추석명절에는 국민들이 제발 정치인들의 유치한 선동에 휘둘리지 말기를 희원한다. 북한의 핵폭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안보위기 앞에서 주야장천 냄새나는 쓰레기통이나 엎어놓고 상대패거리 개망신시킬 꼼수나 주물럭거리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고 꾸짖어야 한다. 참회하고 거듭나라 그렇게 혼쭐을 냈건만 도무지 요지부동인 정치인들에게는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도리깨를 휘둘러야 한다.명절이 끝나고 여의도에 모여든 정치인들이 국민통합과 번영을 위한 가슴 뛰는 새로운 설계도를 펼쳐 보이기를 소망한다. 부디 전쟁의 참변이 두려워 라면박스부터 사재야하나 어째야 하나 고민하는 민생들을 안심시킬 강력한 국가안보 묘책부터 생산해내주기를 희망한다. 제도와 관행 개선에 초점을 맞춘 YS의 개혁은 무엇보다도 명분에 허점이 적었던 까닭에 긍정적 평가를 남기고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2017-10-02

`적폐청산` 신드롬의 이면

▲ 안재휘 논설위원이래저래 기가 막힌다. 예견된 일이긴 하지만, 온 나라가 `적폐청산` 광풍에 휩쓸려가고 있다. 박근혜정부를 넘어서 이명박정부에 이르기까지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가 존재했다는 까발림 뉴스가 놀랍다. 국정원을 가재뒤짐해서 밝혀낸, 과거정권이 국가재산을 이용해 `내 입맛에 맞는 사람`을 `건전·우파·애국` 등으로 포장해 지원했다는 의혹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그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배우, 개그맨이 마치 작전 중인 첨병처럼 기자들 앞에 차례로 나서서 살기 찬 음성으로 `이명박 단죄`를 부르대는 모습은 더 놀랍다. 미상불 `적폐청산` 구호는 약방의 감초이자 만병통치약으로 마구 처방되고 있다. 정계·언론계·교육계를 넘어서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적폐청산` 기치아래 크고 작은 소동이 번지는 중이다.문재인정부 들어 부처마다 `위원회`와 `TF(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는 뉴스가 연일 생산된다. 오죽하면 `자고 나면 위원회와 TF가 하나씩 생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부처마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적폐청산`·`개혁` 키워드는 빠짐없이 들어있다. 이들은 과거 정권에서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목표를 공유한다.부인의 공관병 갑질 논란의 주인공 박찬주 육군대장이 끝내 구속됐다. 당초 `직권남용`으로 걸어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압수수색 등을 통해 들춰낸 `고철업자로부터 1천만 원`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했다. 한번 얽어맨 용의자에게 소위 별건(別件)수사를 통해 밝혀낸 제2, 제3의 혐의로 기어이 구속시키는 관행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다.재계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경영주체들이 회사경영은 뒷전이고 처세에 더 골몰해야 하는 처지란다. 새 정부 정책에서 획기적인 성장전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경제수장인 기획재정부장관은 힘이 없다는 말이 나돈다. 4차 산업혁명을 주관하는 과기정통부장관은 통신업계와 씨름 중이고, 산업통상자원부장관도 탈(脫)원전 문제에 빠져 있다.문재인정부를 떠받치는 진보세력들은 일촉즉발의 `북한 핵` 대응보다 `적폐청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하기야 진보세력의 생각이란 `북한은 절대로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에 뿌리가 닿아 있다. 그들 눈에는 강력한 대북압박을 주장하면서 한미동맹 강화에 몰두해야만 하는 문 대통령의 선택이 사뭇 못마땅할 것이다.진보언론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들의 주의주장들을 보면, 떠름한 표현들이 드물지 않다. 마지못해 떠밀려가는 문 대통령의 대응에 대해서마저 `반대` 입장이 흐드러졌다. 갖가지 불가사유를 붙여가면서 핵무장도 안 된다, 핵잠수함도 안 된다… `안 된다` 타령 일색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 중 아무도 현실감 있는 대안을 내놓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촛불정신`은 마치 신흥종교처럼 떠받들어진다. `적폐청산`은 불가침의 경전처럼 운위된다. 주최 측 주장 연인원 1천700만 명 `촛불민심`이 모두 정말 지금처럼 아적(我敵)을 딱 갈라놓고 상대방을 타작하라는 민심일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구태를 청산한다면서 똑같은 방식을 답습하는 것은 진정한 청산이 아니다. 인민재판식 적폐청산은 또 다른 블랙리스트요, 새로운 적폐로의 전락이다.당장 핵미사일이 날아올지 모르는데, 언제까지 한가로이 환경영향평가나 하고 있을 건가. 트럼프가 `북한 절멸(絶滅)`까지 입줄에 올리고 북한정권이 이를 `개 짖는 소리`라며 태평양에서 수소폭탄실험을 하겠다는데, 우리 정치권은 `적폐청산`을 놓고 주야장천 드잡이굿판이나 벌일 참인가.적폐청산은 해야 한다. 다른 세력을 아주 절멸시키려는 작심으로 온 나라를 `위원회`나 `TF` 천지로 만드는 `적폐청산`이라면 옳지 않다. 그나마나, 이렇게 하구한날 밤낮없이 쓰레기통만 뒤집어엎다가 `소`는 누가 키우나. 대관절 언제 키우나 그래?

2017-09-25

문정인의 `러시안룰렛` 게임

▲ 안재휘 논설위원1636년 쇠퇴해가는 명나라와의 교전 상태에서 즉위하여 내몽골을 평정한 후금의 홍타이지(태종)는 국호를 청(淸)으로 바꿨다. 그는 조선 인조(仁祖)에게 형제관계가 아닌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해온다. 조선 조정은 일전불사를 주장하는 주전파(主戰派)와 전략적 차원의 타협을 강조하는 주화파(主和派)로 갈려 큰 논쟁이 벌어지지만 강경파인 척화 주전론이 득세한다. 삼천리강토가 유린당한 처참한 병자호란의 발발경위다. 전쟁 열흘만에 청군은 수도 한양을 짓밟는다. 조선은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냈고 형언하기 힘든 치욕을 당해야 했다. 남한산성에 피신해있던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송파)에서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바친다. 주전파였던 김상헌과 삼학사(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이 청에 잡혀가 옥사한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없다지만, 만약 그때 조정에서 주화파가 대세를 장악했다면 과연 상황은 달라졌을까.핵과 미사일개발에 올인하고 있는 북한의 무한질주를 막아낼 묘방을 놓고 대한민국이 또다시 두 패로 갈려 큰 논쟁이 벌어졌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더 이상 대화로는 북핵위기의 해법이 나올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을 굳혀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다른 셈법에 빠져 있는 듯하다.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한국의 핵무장론이 비등하고 있다. 자체핵개발보다는 비교적 장애요소가 적은 전술핵 재배치 문제를 놓고 추진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안 된다는 입장이 극렬하게 부딪치고 있는 양상이다. 정부여당은 `반대` 입장을 굳혔다. 한동안 `핵무장론`에 동조하는 듯하던 민주당내 일부 여론은 금세 제압을 당한 낌새다.문 대통령이 `전술핵재배치 불가` 입장을 천명했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부 장관과 만나 전술핵 재배치 문제를 논의한데 이어 최근 국회에서 `배치 검토`를 언급한 송영무 국방장관은 청와대로부터 경고까지 받았다는 후문이다. 문재인정부의 끈덕진 `대화` 의지를 떠받치고 있는 논리의 중심에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특보이자 연세대 명예특임교수인 `문정인`이 있다. 문 특보는 며칠 전 한반도평화포럼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강연에서 “북한은 핵탄두 소형화 능력 등을 고려해 볼때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 같은 상황인식 하에 비핵화 전략을 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체제는 압박한다고 쉽게 망할 것 같지는 않다”고 언급해 유엔안보리의 제재 압박 결정을 평가절하했다. 예측 불가능한 북한의 다음 행동을 추측하는 것은 어차피 가설(假說)논쟁의 영역이다. `핵무장`을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은 북한이 남한을 향해서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협박할 것이라는 비관이 출발점이다. 이를 반대하는 주장에는 북한이 한반도에서 핵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소신이 작용한다. 두 가설 모두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한다.문정인의 발언 중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사실상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는 정부여당 내에서조차 정리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엇박자다. 미국도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할 생각이 없고, 문 대통령 역시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는 인식을 표명하고 있다. 송영무 국방장관의 `김정은 참수작전` 언급까지 호통을 칠 정도로 이 정부 대북정책의 핵심인물인 문정인의 끈질긴 주장의 진짜 배경은 도대체 뭔가.병자호란때 조선 조정의 주전-주화 패거리다툼은 중국의 정세를 오판해 벌인 `우물안개구리`식 당쟁이었다. 그런데 적화통일로 남한을 쓸어버리려는 집단의 행동예측을 놓고 벌이는 이 허망한 도박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온 세상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가졌으니 꼬시고 달래야 한다`고 욱대기는 문정인의 억센 신념은 과연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대한민국 오천만의 운명이 그의 위험천만한 `러시안룰렛` 게임에 맡겨져 가고 있다.

2017-09-18

`개구리밥`의 분열기질

▲ 안재휘 논설위원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중의 뇌리에서 까마득히 잊혔지만, 한중관계에서 가장 참혹했던 중국의 횡포와 만행은 정묘·병자호란 때 벌어진 포로에 얽힌 역사다. 병자호란(1636) 당시 청국은 전후 처리를 통한 조선인 포로들의 경제적 가치를 더 중시해 대대적인 포로 사냥에 골몰했다. 최명길의 보고문에 의하면, 처참하게 끌려간 남녀 백성들은 무려 당시 총인구의 10분의 1인 50만 명에 달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심양으로 잡혀간 조선 여인들 중 많은 수가 청군 장수의 첩이 되어 만주족 본처의 악랄한 투기(妬忌)에 희생됐다. 조선 여인의 얼굴에 끓는 물을 퍼붓거나 혹독한 고문을 서슴지 않는 악독한 본처도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엄청난 몸값을 주고 돌아온 속환녀(贖還女)들은 실절(失節)했다는 이유로 다시 대문 밖으로 내쳐졌다. 따지고 보면 당시 조선 여성들을 짓밟은 청군의 끔찍한 만행은 일제의 종군위안부 참상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중국이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중국은 관영 언론을 통해 우리 정부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발사대 4기 임시배치에 대해 천박한 용어를 총동원해 공세를 펼치고 있다. 중국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온 환구시보를 비롯한 관영매체들은 `악성종양`, `강대국에 낀 개구리밥(부평초) 신세`, `2차 한반도 전쟁의 순장물`이라는 등 온갖 멸시와 모욕과 악담을 있는 대로 다 퍼붓고 있다.`개구리밥`이라는 조롱이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적확하게 찌른 셈이기도 해서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치욕스럽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일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한국을 마치 제후국처럼 거론한 적이 있다. 입줄에 올리기 싫지만, 중국을 `상국(上國)`이라고 받들어 모시면서 시시때때 금품과 병력과 여성들을 바쳐 온존을 구걸해온 장구한 역사는 엄존한다.애걸이든 아첨이든, 주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나라의 모습을 용케 유지해온 역사가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온 백성이 참살을 당할지도 모를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도 한 줌 권력욕에 취해 파쟁(派爭)을 그치지 않았던 졸장부들의 숱한 분열상이다. 무명조개의 속살만 탐하는 도요새, 도요새의 부리를 물고 놔주지 않다가 함께 어부에게 잡혀먹히고 마는 아둔한 조가비의 모습 딱 그 꼴이었다.작금 벌어지고 있는 정세를 살펴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실감난다. 병자호란을 전후해 국제정세에 어둡기 짝이 없는 청맹과니 대신들이 친명파(親明派)와 친청파(親淸派)로 나뉘어 다투던 그 모습이 명찰만 바뀌어 재연되는 느낌이다. 온 겨레가 핵폭탄 인질이 된 시점에도 머리를 맞대고 살길을 모색하기는커녕 내년 지방선거에서 이길 궁리에만 빠진 여야 정치권의 행태가 참괴한 역사의 데자뷔(旣視感)로 다가온다.여당과 진보세력들은 북한의 핵개발 완성으로 골동품이 되고 만 `한반도 비핵화` `운전자론` 같은 헛소리를 걷어치워야 한다. 사드 임시배치를 두고 `공약위반`이나 `배신`을 부르대려면 북핵 위기에 대한 딱 부러지는 해법부터 내놓는 것이 순서다. 북한의 핵 공갈이 목전에 다다른 지금 우리는 체질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사방 적들로 둘러싸인 악조건에서도 똘똘 뭉쳐 사즉생의 자세로 강국을 유지하는 이스라엘의 결기를 조금이라도 따라 배워야 한다.대한민국을 `개구리밥`쯤으로 여기는 중국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피를 토해도 시원찮을 치욕의 역사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나라가 결딴날 지도 모를 절박한 상황 앞에서까지 비겁하게 분열하는 습성부터 제발 고쳐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길 `핵무장`을 놓고 왈가왈부 다투는 모습부터 일신해야 한다. `힘`이 뒷받침 되지 않는 `대화`요구는 오직 `애원`으로 들릴 따름이라는 진실을 부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2017-09-11

`코드(Code)` 대란

▲ 안재휘 논설위원중국방문 중에 한 관료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여전히 `마오쩌둥(毛澤東)`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수천 년 피눈물 나는 삶을 이어온 중국 인민들에게 최초로 `땅`을 나눠준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나 마오에게는 `10년 동란`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라는 치욕적인 실정(失政)의 역사가 있다. 문화대혁명에 동원된, 대학생과 중·고등학생이 중심이 된 홍위병은 전국을 돌며 무차별적인 파괴를 저질렀다. 엄청난 문화재와 예술품이 부서지거나 불살라졌고 `반혁명 인사`로 지목된 무수한 사람들이 홍위병 대회에 끌려나와 조리돌림을 당했다. 학대 끝에 목숨을 잃거나, 자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훗날 그것은 참담한 경제실패를 가리려는 마오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이념투쟁` 대재앙이었음이 판명되었다.문재인정부 출범이후 시작된 `코드(Code)` 논쟁이 점입가경이다. 새 정권이 탄생할 적마다 되풀이되는 구태의연한 혼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발탁인사를 놓고 과거의 언행을 탈탈 털어내는 작업이 지속되고 있다. 보수 야당들은 지명된 인사들에게서 위험한 이념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혈안이다. 진보 여당은 추천된 인사가 혹여 꼴통보수 인식의 소유자가 아닌지 샅샅이 살핀다.이유정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스스로 물러났다. 사퇴요인이 비록 `불법 주식투자` 의혹이었지만 야권의 비토 초점은 정치편향성이었다. 이 후보자는 2002년과 2012년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2004년에는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을 했다.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시 재판관 9명 중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낸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와 진보성향이 뚜렷한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임명동의안 처리도 먹구름이 걷히지 않았다. 여소야대 구조의 국회가 제 기능을 찾는 일은 여전히 지난하다.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는 특이하다.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당시의 독재에 대해 “대안이 없었다”고 주장한 점이 문제가 되면서 `뉴라이트 사관(史觀)` 논란에 휩싸였다. 여당의 일부 의원들이 여러 채널을 통해 청와대에 박 후보자 임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이번 정권에서도 `코드` 논쟁은 여지없이 공영방송으로 불똥이 옮겨 붙었다. 체포영장까지 발부된 MBC 김장겸 사장(임기 2020년 3월)과 함께 KBS 고대영 사장(임기 2018년 11월)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KBS에서는 노무현 후보 특보를 지낸 서동구 씨를 필두로 정연주·김인규·길환영 전 사장 등이 망신을 당했다. MBC에서는 엄기영·김재철·안광한 전 대표 등이 적격성 시비의 중심에 섰었다.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정권교체기마다 벌어지는 이 같은 혼란상은 공영방송을 `대선의 전리품` 정도로 여기는 정치권의 고질적인 탐욕이 근본 원인이다. 엄정하게 중립적인 인물이 사장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놓지 않는 한 부작용과 혼란은 종식시키기 어렵다.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일부 야당 추천 이사도 동의해야 사장 선임이 가능하게 만드는` 법안이 계류 중이다. 여러 사회기구에서 추천하는 이사들로 이사회 정원을 대폭 늘려 정치성을 희석시키는 방안도 대안으로 나와 있다.돌이켜보면,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참으로 오싹한 흉계였다. 그러나 작금 펼쳐지고 있는 `적폐청산` 신드롬 역시 자칫하면 가공할 후유증을 초래할 여지가 있다. `20세기 분서갱유`였던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역사를 30년 이상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국민들 사이에, 무분별한 적폐 재단(裁斷)과 인민재판식 처결로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가 양산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이 깊다. 대한민국의 100년 미래를 생각하는 `통 큰` 리더십이 절실한 요즘이다.

2017-09-04

`촛불`인가, `법(法)`인가

▲ 안재휘 논설위원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금과옥조가 된 `3권 분립`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스키외다. 그는 1748년 `법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입법·행정·사법 3권 분립의 가치를 주창했다. 국회·법원에 대해 우월한 지위에서 3권을 조정하던 대한민국은 제5공화국헌법에서 비로소 권력분산적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대통령이 입법부·사법부에 대해 우월한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검찰조직은 `정권의 시녀` 또는 `권력의 사냥개`라는 악명이 붙어있다. 오늘날 행정수반의 인사권 안에 있는 검찰에 대해 벌어지는 정치적 논란에 대해서는 대략 그 불가피성을 수긍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으로 법원의 결정만은 존중하는 불문율을 갖고 있다. `법원의 판결`을 모든 논란의 종착점으로 여기는 자세야 말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堡壘)라고 믿기 때문이다.최근 일어난 `한명숙 전 총리의 만기출소`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유죄판결` 두 개의 이슈와 논란들이 `법`에 대한 국민감정의 한 끝을 강력하게 할퀴고 있다. 사실 두 개의 이슈는 `법`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나라에서 항용 일어나는 범사에 지나지 않는다. 유죄판결을 받은 한 정치인은 죗값은 치르고 옥문을 나섰고, 이 나라 최고 재벌가의 상속인은 유죄가 인정돼 징역형을 선고받았을 따름이다. 이 두 개의 이슈는 `화젯거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논란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 이 나라에 법이 살아있다는 엄중한 증좌로 여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이슈들을 놓고 정치권이 충돌하고, 민심이 나뉘는 것을 보면 우리의 ‘법 의식`이 얼마나 어설픈가 의구심이 스며든다.한명숙 전 총리의 만기출소에 즈음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멘트는 충격적이다. 한 전 총리의 교도소 출소현장은 2년 전 수감 당시처럼 독립투사 출소현장을 방불케 했다. 그 자리에서 추 대표는 “기소도 잘못됐고 재판도 잘못됐다”고 말했다. 도저히 집권당 대표의 발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억울한 옥살이`라는 민주당의 관련성명에 이르러서야 그 발언의 저의가 읽힌다. 민주당은 “정치탄압을 기획하고 검찰권을 남용하며 정권에 부화뇌동한 관련자들은, 청산돼야 할 적폐세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굳이 찍어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한 전 총리에 대해 만장일치로 유죄판결을 내렸던 14명 대법관들을 싸잡아 `적폐세력`이라고 몰아친 셈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포함한 10명은 아직도 임기가 남아 있다.그러던 민주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법원의 `징역 5년` 실형 선고 직후 “오늘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법부의 냉철한 판결을 국민들과 함께 존중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법부 판결에 대한 집권여당의 도를 넘은 감탄고토(甘呑苦吐) 행태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법(法)마저도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의 먹이로 삼는 이런 천박한 행태의 뿌리는 무엇인가.문재인정권은 스스로 `촛불정권`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맞아 개최한 보고회에서 “국민이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해 ‘국회 패싱` 논란을 빚었다. `광장정치`를 염두에 둔 듯한 정부여당의 언행들을 지배하는 키워드는 `촛불집회`나 `댓글`이다. 그런 수단들을 권력의 핵심수단으로 판단하고 있음이 여실하다.그래서 `촛불`로 `사법`까지 장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면 이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둥에 톱날을 들이대는 무시무시한 낭패다. 대법원 판사들마저도 `정치 풍향계(風向鷄)` 취급하는 편견은 끔찍하다. 문득, 추미애 대표의 과거가 궁금해진다. 추 대표도 판사시절 그렇게 권력의 입맛 살펴가며 재판을 했을까. `촛불`인가, `법`인가.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

2017-08-28

`레드라인(Red line)`에 관한 명상

▲ 안재휘 논설위원“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상 우리 60만 군대는 한 명도 못 움직입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북한은 휴전선에서 남한의 주요 도시를 일제히 포격할 겁니다. 우리가 6·25 때 수없이 죽었는데 지금은 무기도 훨씬 강력해졌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나는 우리 역사와 국민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소” 1994년 새벽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했다는 말이다. 2015년 발행된 `김영삼 회고록`은 당시의 상황을 `일촉즉발의 위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순양함의 영변 핵시설 및 평양 폭격에 대비해 주한미군 가족과 민간인 및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키려는 계획까지 발표되기 직전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결정을 뒤늦게 후회했다는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한동안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쟁을 막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레드라인(Red line)` 발언을 놓고 여야 정치권이 연일 난타전이다. `레드라인`은 대북정책에서 봉쇄정책으로 전환하는 기준선을 의미한다. 문 대통령은 기준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북한이 ICBM 탄도미사일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서 무기화하는 것을 레드라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자유한국당 이철우 최고위원은 “북한이 ICBM에 핵 탄두를 싣는 날은 세상이 망하는 날이지, 레드라인이 아니다”라고 매서운 비판을 날렸다.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 또한 “ICBM 핵탄두 탑재를 레드라인이라고 했는데 그 이전까지는 실험을 허용한다는 것인가”라고 파고들었다. 박주선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레드라인이 이미 임계점에 도달한다고 하면 이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지, 전쟁 없다는 말로 전쟁 없어지고 비핵화 실현되는 건지 구체성이 없다”고 꼬집었다.적지 않은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문 대통령의 `레드라인` 답변을 실수 내지는 패착이라고 일컫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통령이 말씀을 잘 했다”면서“대통령이 안보와 외교 문제에 관한 한 단호한 원칙과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옹호하고 나섰다.“전쟁만은 안 된다”는 말은 구구절절 옳다. 그러나 미국을 향해 던진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은 마땅한 수단이 없는 공허한 결기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지만, 만에 하나 북한이 진짜로 괌을 향해 미사일을 쏘는 날이면 어찌할 것인가. 한미동맹을 깨지 않는 한 우리는 미국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조지프 던포드 미국 합참의장은 최근 “동맹국 중 하나의 국가, 한쪽에 대해 공격이 있는 경우, 미국과 동맹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기자회견 발언에서 “북한이 어떤 수단으로든 미국을 공격하면 모두가 파멸”이라는 정도라도 경고했어야 맞지 않았을까.온갖 악조건을 물려받은 상황에서 전쟁참화를 막아내야 하는 문 대통령의 번민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마도 밤잠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만, `동맹파`의 이성이 기여할 여지가 없도록 온통 `자주파` 참모들에 둘러싸인 현실이 걱정거리다.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는 한, 대륙간 탄도탄(ICBM) 이야기는 강 건너 불일 따름이다.고려대 남성욱 교수의 “ICBM에 핵탄두를 탑재하는 단계는 레드라인이 아니라 모든 대책이 무용지물인 `블랙라인` 단계”라는 지적에 눈길이 간다. 한국의 입장에서 북한은 이미 레드라인을 넘었다. 우리는 이미 레드라인과 블랙라인의 중간 어디쯤에 놓여서 죽느냐, 항복하느냐 고민해야 하는 딱한 처지로 내몰려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끔찍한 `미군철수`, `북미평화협정` 이야기가 어느새 여기저기에서 불거지고 있는데.

2017-08-21

`양치기 소년`의 침묵

▲ 안재휘 논설위원세르비아계 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를 저격 살해한다. `사라예보사건`으로 기록된 이 암살테러는 결과적으로 무려 1천여만 명이 죽고, 2천여만 명이 다친 세기적인 비극 1차 세계대전의 촉발점이 된다. 그렇게 뜻밖으로 사소한 사건이 엄청난 전쟁 참화의 시발이 되는 요인은 휘발성이 한껏 높아진 시대상황이다. 미국과 북한이 연일 극단의 막말들을 동원하며 설전을 벌이고 있다. 북한은 미국령 괌을 포위 사격하겠다고 위협한 데 이어 연일 대규모 군중대회를 열며 `사흘 만에 347만5천명이 북한군 입대와 재입대를 신청했다`고 광분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북한이 현명하지 않게 행동할 경우 군사적 해결책이 완전히 준비됐고, 장전됐다”고 선언했다.이제 어느 쪽이 됐든 방아쇠 당기는 일만 남은 형국이다. 임계점에 다다른 북한 리스크가 주식·외환·채권시장을 동시에 덮쳤다. 북·미 충돌에 대한 증시 불안감은 세계적으로 번져가는 중이다. 미국 다우존스 산업지수와 나스닥 종합지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 할 것 없이 매물이 쏟아지면서 전방위 하락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차분한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다. 미국 일간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는 `한국민들의 놀랄 정도로 심드렁한 분위기(surprisingly blase)`라는 제목의 서울발 기사를 전했다. 신문은 “내 생애에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대학생과 북한접경 주민들의 동일한 반응을 전하고 있다.일부에서 동맹국 미국이 선전포고를 당한 마당에 한국정부가 입장을 내놓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다. 일본과 호주가 미-일상호방위조약, 그리고 ANZUS동맹(미국-호주-뉴질랜드 3국 안전보장조약)에 입각해 북한의 미사일을 떨어뜨리겠다고 밝힌 것과는 대조적이라는 지적이다. 물론 가능한 북한을 자극하지 말아야 할 우리 정부의 입장을 간과한 관점이긴 하다.남북 분단 이후 영일 없이 지속돼온 북한의 위협으로 인해 우리는 모두 심각한 `전쟁공포 불감증`에 걸려 있다. 가공할 비대칭 무기를 자랑하며 `핵 공갈`을 일삼아온 북한이 동맹국 미국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한 마당에도 `강 건너 불 보듯`하는 우리의 대응은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서울 불바다` 발언에도 평온을 깨지 않는 것이 여전히 번영의 대들보일까. `전쟁은 절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작금의 이 확신은 정말 괜찮은 것일까.우리 사회에서 `북한의 위협`을 전망하고 `전쟁` 가능성을 알려주는 신실한 `경고음`이 사라진 데는 또 다른 씁쓸한 사연이 내재해 있다. 과거 권위주의 수구정권과 그 들러리들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때려잡는 도구로 `위기설`을 함부로 남용한 결과다. 그 누구라도 `북한의 위협`을 쉽게 말하다가는 `색깔론`이라는 무차별 역풍을 맞는 희한한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LA타임스에 실린 “서울 주민은 전쟁에 사실상 무방비나 다름없다. 형식적인 대피 행동강령만 있을 뿐”이라는 한 전문가의 고백은 끔찍하다. 수도권을 겨냥한 북한 장사정포가 무려 2천여 문이나 된다는데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싶다. 용감하든지 아니면 어리석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자조(自嘲)마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늑대는 있다. 그리고 늑대는 호시탐탐 양들을 노리고 있다. `양치기 소년`들이 일제히 침묵하는, 아니 모조리 도망쳐버린 목장에서 `늑대는 없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무덤덤히 살아가는 양들의 모습이 처연하다. 미국과 북한이 연일 선전포고를 날리고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깨우쳐줄 정직한 목동은 과연 등장할 것인가. 참담한 전쟁의 비극을 막아낼 지혜로운 `양치기 소년`이 그립다.

2017-08-14

`패싱(Passing)`과 `낫씽(Nothing)` 사이

▲ 안재휘 논설위원1907년 6월 25일 고종(高宗)의 밀명을 받고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이준·이위종 3인의 특사들은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들을 상대로 을사조약의 불법성 폭로에 혼신을 기울였다. 하지만 행사 초청국인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는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조약을 승인한 이상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했다. 이들은 하는 수 없이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控告詞)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낸다. 7월 9일에는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알리고 주권 회복에 원조를 청하는 절규를 쏟아내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헤이그 밀사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고종 퇴위, `정미칠조약` 체결, `신문지법`·`보안법` 공포에 이어 `군대해산령`으로 이어져 대한제국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 이후 한반도 위기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4월 김일성 주석의 105번째 생일(태양절)을 계기로 제기됐던 `4월 위기설`이 무사히 넘어가나 싶더니 이번에는 `위기설`을 넘어서 끔찍한 `8월 전쟁설`로까지 번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 정가안팎에서 불거지는 범상치 않은 말들이 촉각을 모은다.올해 94세인 헨리 키신저는 또 다시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다. 북한 인권특사를 지낸 레프코위츠는 “미국은 더 이상 남한 주도의 통일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베이징에 분명히 선언하라”고 주문했다. 미국 맥매스터 안보보좌관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주장이 엇갈린다. 린지 그레이엄 미 상원(공화당) 의원이 한 방송에 출연해 전한 북한과 관련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클라이맥스다.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이 나더라도 거기서 나는 것이고, 수천명이 죽더라도 거기서 죽는 것이지 여기(미국 본토)서 죽는 게 아니다”라고 했단다. 그 말을 놓고 `북한에 대한 경고의 의미일 뿐`이라는 해석과 `뭔가 있다`는 추측이 교차된다. 한국은 연일 전운(戰雲)을 연상시키는 북한과 미국의 입만 쳐다보고 일희일비하는 꼴이 됐다.정치권은 여전하다. 북한이 ICBM급 미사일을 쏘아대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휴가를 간 것은 문제가 있네, 아니네 지지고 볶는다. 논란은 한미정상이 통화하지 않는 문제를 놓고 한국이 배제되는 `코리아 패싱(Passing)` 국면이 아니냐는 의구심 시비로 번졌다. 야당의 한 의원은 `코리아 낫씽(Nothing)`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우리가 아직도 강대국 이해관계의 포로로 살고 있다는 현실이 통탄스럽다. 한반도의 운명을 마음대로 난도질한 카이로·얄타·포츠담 회담이 떠오른다. 일본·청나라·러시아·영국·미국이 조약과 거래를 통해 대한제국의 운명을 요리할 때의 처지가 생각 나 가슴이 먹먹해진다.아무리 생각해봐도 범국가적인 딴딴한 `결기`를 모아내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부터 달라져야 한다. 큰 눈을 떠야 한다. 지금은 죽고살기로 권력쟁패에만 몰두할 때가 아니다. 한반도를 파멸로 몰아가는 북한정권에 대해서, 내밀하게 북한을 두둔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 강력한 `자체 핵무장` 의지를 펼칠 때가 됐다.110년 전, `큰 도둑들의 만찬회`에서 완전히 무시당한 대한제국의 한을 품고 이국땅 헤이그에서 쓸쓸히 죽어간 이준 열사의 가슴은 얼마나 처연했을까. 어쩌면 일제의 간악한 마수에 독살 당했을 지도 모를 그의 순국을 우리는 어떤 교훈으로 이어받고 있는가. ``패싱`과 `낫씽` 사이 절박한 위기 속에서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는 열사의 유훈을 떠올린다.

2017-08-07

`귀걸이` 대 `코걸이`

▲ 안재휘 논설위원“`말(馬)`이란 형태를 명명한 것이고,`희다(白)`란 색깔을 명명한 것이다. 색깔을 명명한 것은 형태를 명명함이 아니다. 그래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 공손룡의 유명한 궤변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이다. 논리와 실재의 괴리를 반영해 실재하지 않은 `말`이란 개념의 장애를 뛰어넘어 백마라는 실재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논설로 전해진다. 명실을 바로잡아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였다는 해석도 있다. 궤변이라는 단어에 나오는 `궤(詭)`는 말을 나타내는 언(言)과 위험하다는 뜻의 위(危)를 합한 글자다. 궤(詭)에는 `속이다`, `기만하다`는 뜻이 있고, `어그러지다`나 `헐뜯는다`는 뜻도 있다. 한국의 정치문화에 있어서 궤변술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정권교체 경험을 하게 된 뒤부터 더욱 난무하는 정치인들의 교졸한 논리변신에 국민들의 억장이 막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문재인정부 출범 이후의 정치권 논란들을 톺아보노라면 어쩌면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입장을 180도 바꾸고, 상대방이 하던 말을 부끄럼 없이 따라 할 수 있을까 어이가 없어진다. 정말 약이 오르는 것은 수려한 궤변술에 포장된 그들의 뒤집은 말들이 어쩌면 또 그렇게 그럴싸하냐는 점이다.`담뱃값 인하` 논란은 낡은 양당제 정치가 남긴 포퓰리즘 정치의 후안무치한 막장드라마다. 지난 2014년 국민건강증진을 위한다며 담뱃값을 2천500원에서 4천500원으로 올렸던 자유한국당(한나라당)이 `서민감세`를 이유로 담뱃값 인하 법안을 내놨다. 한국당은 “과거 담뱃값 인상은 깊이 생각하지 못한 정책이었다”는 자아비판까지 덧붙이고 있다. 한국당의 `담뱃세 인하` 카드가 `부자증세`를 추진하는 더불어민주당을 곤혹스럽게 하려는 정치공세임은 불문가지다. 통과된 추경 11조원 중 8조원가량이 담뱃세 등의 초과세수로 채워진 점을 겨냥해 콕 찌른 것이다. 민주당을 궁지로 몰려는 정략이지만, 일단은 되레 사방에서 모다깃매를 맞고 있다. 입장 바뀌었다고 말을 홀랑 뒤집은 경박한 행태에 맹공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소요예산을 감당하기에 어림 턱도 없는 `부자증세`로 높은 지지도를 고착화해보려는 민주당이나, 뜬금없는 `서민감세`로 토라진 민심을 다독거려보려는 한국당의 행태는 케케묵은 양당제가 빚어낸 한심한 인기영합주의 정치의 클라이맥스다. `명예 과세`에다가 `사랑 과세`, `존경 과세`라니 그 허접한 궤설들이 허탈을 부른다. 불과 수개월 전에 벌인 공방의 논리는 똑같고 공수만 바뀐 모순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이들은 공직자들이다. 상대방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다 바꿔 주장하고 있는 여야 정치인들의 호통에 그저 “네네”만 거듭해야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란다. 호통 치던 국회의원들이 나중에 공직자들에게 “입장이 바뀐 것을 이해해 달라”고 당부하곤 하는 풍경은 정말 요상하기 짝이 없다.진영논리에 빠진 청백전 정치의 가장 고약한 증상은 `반대를 위한 반대` 습성이다. 오랜 기간 천박한 논리에 젖어 궤변을 탐닉하다보면 이성적인 판단력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보편적인 가치관이 붕괴되고 억지주장이 임계점을 넘게 되면 아예 아적(我敵)의식의 앙상한 기준만 남아 추레한 정치꾼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 종착지에 `철학부재`의 피폐한 쓰레기정치가 기다리고 있다.한국정치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쓰레기 논쟁터로 변하고 있다. 천박한 `귀걸이`와 `코걸이` 논리들의 충돌만 어질더분한 난장으로 퇴락해가고 있다. 좀처럼 멈출 줄 모르는 포퓰리즘의 저질 향연 속에 웅크려 앉은 민초들이 처연하다. 민심을 훔치려는 저의만이 춤을 추는 정치의 영역에서 사특한 궤변들을 걷어내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이 녹슨 `기만`과 `헐뜯음`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고서야 대체 무슨 미래가 있으랴.

2017-07-31

`쓰레기통` 걷어차기

▲ 안재휘 논설위원`파사현정(破邪顯正)`은 불가(佛家)에서 나온 말이다.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 정도로 해석된다. 철학자 탁석산 박사가 한 방송에서 이 사자성어를 현 정부의 `적폐청산` 드라이브에 대입해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적폐청산`은 이번 정권뿐 아니라 모든 정권이 해왔다고 전제하고, 5·16 이후의 `정치깡패 검거`, `삼청교육대`, `범죄와의 전쟁` 사례를 들며 허점을 비판했다. 탁석산의 주장은 `파사`에 치중하기보다는 `현정`에 먼저 주력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요약된다. 그는 자기 집에 바퀴벌레가 있다고 그것만 다 때려잡으면 집이 깨끗해지리라는 생각은 오류라고 설명했다. 집권초기 1년 동안 `적폐청산`에 진을 다 빼다가는 결국 `현정`에 실패하게 되고 만다는 논리다. 탁 박사의 지적은 문재인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경계심을 잘 대변하고 있다.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의 으뜸자리를 `적폐청산`이 차지한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이미 지난 대선과정에서 문 대통령이 모진 비판에도 불구하고 끝내 움켜쥔 구호였기 때문이다. 전 정권의 무절제한 권력실태를 주요대상으로 내세우지만, 막상 실행 단계에 들어가면 광폭의 `보복정치` 논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문 대통령은 참여정부 때 운용하다 사장된 `반(反)부패기관협의회` 부활 선언으로 `적폐청산` 신호탄을 쏘았다. 이에 맞춰 검찰은 수리온 헬기를 개발한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납품 관련기업들에 대한 대대적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서는 부처별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하기로 했다.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여야 의원 40여 명과 함께 `최순실 재산몰수 특별법 추진 의원모임`을 만들었다. 이 법안은 위원회가 압수수색 영장까지 발부받아 재산을 조사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달 출범한 경찰개혁위원회는 과거 경찰의 인권침해 사건의 재조사를 담당할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하라고 권고했다.정권이 바뀔 적마다 불거지는 청와대의 부실 인수인계 논란은 이번에도 예외가 없었다. 정상적인 인수인계가 없어 전 정부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던 청와대가 두 달 만에 이 방 저 방 캐비닛에서 상당한 문서를 찾았다고 호들갑이다. 마치 숨겨진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기자들에게 `대서특필`을 암시하기에 바쁘다.치욕스러운 `탄핵`을 당한 전 정권의 처지에서 제대로 넘겨줄 성의가 남아있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은 된다. 그럼에도`백지 인수인계`나 `캐비닛 서류` 사태는 나라의 심장인 청와대의 일이라고 믿기 어려운 부끄러운 소란이다. 정작 안타까운 것은 정치를 좌지우지하려는 청와대의 의욕이 과도해 보인다는 점이다.청와대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방으로 대형 거울에 둘러싸인 방에서 지냈다`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더니, 이번에는 `박근혜 침대`를 들고 나와 `고민`이란다. 청와대 주인이 바뀔 적의 선례에 따르면 그만인 일을 포장해 언론에 흘리는 의도가 수상쩍다. 아무래도, 청와대가 `쓰레기통 걷어차기`에 너무 골몰하는게 아닌가 싶다.문재인정부로서는 임기 내내 `박근혜`와 `최순실`을 재탕, 삼탕 몇 십 탕이라도 우려먹을 호재로 여길지 모른다. 누가 뭐라고 하든 여차하면 들고 나와 상처를 후비고 까뒤집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정말 알아야 할 것은 그런 `편 가르기`행태야말로 가장 사악한 적폐라는 사실이다.적폐청산은 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현재 권력`이 `죽은 권력`을 야비하게 짓밟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은 안 된다. `상대편은 깡그리 부수고, 내 편을 내세우는 것`을 `파사현정`이라고 욱대길 것인가. 그 저열한 패거리의식부터 청산하는 것이 순서다.`파사`보다도 `현정`이 먼저라는 탁석산의 충언은 백번 옳다.

2017-07-24

`이율배반`의 통치학

▲ 안재휘 논설위원`절차적 민주주의(Procedural democracy)`를 충족하는 핵심요인은 권력에 도전하는 다수 정당의 존재, 정당한 선거에 의한 합법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정권교체, 법치주의에 입각한 공정한 통치 등이다. 실질적 민주주의(Essential democracy)는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현, 정부정책의 여론 중시, 소수의 의견 존중, 이익집단의 존재와 정책결정 영향력 등이 주요 판단요인이다. 독재정권이거나 부실한 정권일수록 마키아벨리의 이론처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부조리한 현상을 양산한다. 과거 집권 세력들은 내용적으로는 자기들 마음대로 온갖 권력을 휘둘렀지만 형식적으로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엉터리 민주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된 궤변과 억지논리는 계량하기 힘들 만큼 많다.문재인 대통령의 파격적인 소통행보와 9년 만의 진보정권이라는 생기까지 겹치면서 국민들의 기대치는 그야말로 고공행진이다. 숫자만을 놓고 본다면 `팥으로 메주를 쑤겠다`고 해도 믿음을 놓지 않을 기세다. 새 정부가 이렇듯 국민들로부터 원망(願望)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잘하면 큰 국가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좋은 환경요소 중 하나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정당한 절차를 통해 정책을 펼쳐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핵심이다.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부터 국민 여론이 정직하게 반영돼야 할 것이고, 의사결정 과정부터 민주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목적 제일주의의 교졸한 통치술이 발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매사가 그렇듯 `합법성`이 `정당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문재인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에 가속도가 붙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이사회는 거센 반론에도 불구하고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일시중단을 결정했다. 재적 이사 13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의결 반대자는 비상임이사 한 명뿐이었고, 12명이 신고리 5·6호기 공사 일시중단에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다.정부는 `공론화위원회`를 구성, 일정 규모 시민 배심원단을 선정해 공사 영구중단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을 맡길 방침이다. 7조원이 넘으리라고 추산되는 매몰비용은 물론, 중동 두바이에 건설하고 있는 원전 등 유망한 수출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거론된다. 벌써부터 `공론화위원회`는 절차를 지켰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한 허울뿐인 거수기에 불과할 것이라는 비판이 나돈다.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행할 예정이던 기념우표 발행이 무산됐다. 구미시가 신청한 박정희 기념우표는 우정사업본부가 지난해 5월 우표발행심의위를 열어서 발행을 결정했었다. 그랬던 사업이 지난 12일 개최된 심의위에서 동일한 17명 심의위원들에 의해 거꾸로 뒤집혔다. 정치권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국가·역사 발전에 공로가 있다면 기념하는 관례를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개척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한번 결정한 기념우표 발행을 재론하고 번복한 것 자체가 천박하고 옹졸한 처사이자, 통합의 정신에도 명백히 어긋난다. 권력 앞에서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누운` 꼴인 우정사업본부의 행태가 대구경북(TK) 정서에 끼칠 악영향은 빤하다. 재조사를 천명한 4대강사업, `환경영향평가` 태클로 묶어놓은 사드(THAAD)배치, 공사 일시중단을 결정한 신고리 원전 5·6호기, 그리고 박정희 탄생기념우표 발행 취소 등 일련의 조치들을 일관하는 형식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부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질적 민주주의`의 잣대로 들여다보면 이율배반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혹여 그 의욕적인 발상 안에 `목적이 수단을 지배하는` 요소는 없는지 면밀히 살펴볼 일이다. 지금은 국민들 사이에 분란(紛亂)의 불씨를 남길 때가 아니다.

2017-07-17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철조망

▲ 안재휘 논설위원1973년 1월 28일 미국과 북베트남(월맹) 사이에 체결된 `파리평화협정`은 남베트남(자유베트남)의 소멸을 초래한 비극적 평화협정으로 유명하다. 이 협정으로 남베트남의 `척추`였던 미군이 빠져나오자 베트남은 불과 2년 3개월 만에 공산화됐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10년 동안 무려 5천억 달러(약 577조2천500억 원)의 전쟁비용을 지출하고도 세계사에 길이 남을 망신을 당했다. `파리평화협정`은 평화협정이 궁극적인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중대한 교훈을 남겼다.독일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에서 한반도 평화구상을 밝혔다. 과감한 제안들이 포함될 것으로 예측됐던 `베를린 구상`은 그러나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는 게 주된 평가다. 문재인정부의 대북정책 실타래를 뒤죽박죽 헝클어 놓은 것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라는 사변(事變)이었다.북한은 지난 4일 발사한 화성-14형 미사일이 미국의 알래스카와 서부까지 타격할 수 있는 ICBM이었다고 발표했고, 미국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반응이 나왔다. 한미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보란 듯이 감행된 북한의 도발은 메시지가 분명하다. 북한의 ICBM 발사 가능성을 부정하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핵문제 해결의 운전대를 잡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을 동시에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셈이다.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제적인 대결 국면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최고의 비결은 `채찍과 당근` 기법이다. 대개의 경우 채찍과 당근의 무게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평화로운 해법이 도출된다. 채찍이 너무 가혹하거나, 당근이 과도하면 균형이 깨어져 난기류를 초래한다. 남북한의 관계, 국제사회와 북한의 관계에도 이 원리는 정확하게 작동된다.북핵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날로 악화되고, 북한의 미사일 능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는 시점에 우리는 문제를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미국을 향해 내놓고 있는 요구조건은 `적대정책 폐기`, `미·북 국교 정상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 전환` 등으로 요약된다. 모든 요구조건이 충족되면 김정은은 정말 도발의지를 접을까. 천만 만만의 말씀이다.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는 분명한 착시(錯視)다. 북한체제가 허위의 모래밭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평화체제 구축과 함께 국제교류가 확대되면 북한이 외부세계에 노출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바깥세상에 노출되는 순간 김씨 일족의 신성(神聖)과 백두혈족 신화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게 전망해보아도 북한이 빗장을 풀 가능성은 희박하다.문재인 대통령이 주창한 `남북 평화협정`에 대해서 북한은 콧방귀도 안 뀐다. 북한에게 한국정부는 `미제의 괴뢰집단`일 뿐이다. `평화협정`이라면 정전협정의 파트너인 미국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또 어떤가. 한반도 전체가 중국에게 비우호적 세력권으로 변화하는 사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내려고 하는 것이 전략의 핵심이다.우리는 남북대화를 통해 북핵문제 해결과 통일의 길을 개척하고자 하지만 통미봉남(通美封南)에 집착하는 북한은 거들떠볼 생각이 없다. 우리가 내민 당근을 맛있게 받아먹으면서 미국과 맞서 싸울 기력만 북돋울 따름이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의 체면을 지키는 수준에서 `북한 제재`에 동참하는 척하면서 반심(半心)을 쓴다. 도무지 우리가 끼어들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당근과 채찍의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다. `남북 평화협정` 정도의 당근정책은 씨도 안 먹힐 하수(下手)다. `핵(核)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은 핵(核)밖에 없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다. 이 시점에, 우리가 “방어적 목적의 핵무장을 검토하자”는 정도의 채찍이라도 작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대한민국은 지금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철조망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2017-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