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6월 25일 고종(高宗)의 밀명을 받고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이준·이위종 3인의 특사들은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들을 상대로 을사조약의 불법성 폭로에 혼신을 기울였다. 하지만 행사 초청국인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는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조약을 승인한 이상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했다.
이들은 하는 수 없이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控告詞)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낸다. 7월 9일에는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알리고 주권 회복에 원조를 청하는 절규를 쏟아내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헤이그 밀사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고종 퇴위, `정미칠조약` 체결, `신문지법`·`보안법` 공포에 이어 `군대해산령`으로 이어져 대한제국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 이후 한반도 위기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4월 김일성 주석의 105번째 생일(태양절)을 계기로 제기됐던 `4월 위기설`이 무사히 넘어가나 싶더니 이번에는 `위기설`을 넘어서 끔찍한 `8월 전쟁설`로까지 번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 정가안팎에서 불거지는 범상치 않은 말들이 촉각을 모은다.
올해 94세인 헨리 키신저는 또 다시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다. 북한 인권특사를 지낸 레프코위츠는 “미국은 더 이상 남한 주도의 통일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베이징에 분명히 선언하라”고 주문했다. 미국 맥매스터 안보보좌관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주장이 엇갈린다. 린지 그레이엄 미 상원(공화당) 의원이 한 방송에 출연해 전한 북한과 관련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클라이맥스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이 나더라도 거기서 나는 것이고, 수천명이 죽더라도 거기서 죽는 것이지 여기(미국 본토)서 죽는 게 아니다”라고 했단다. 그 말을 놓고 `북한에 대한 경고의 의미일 뿐`이라는 해석과 `뭔가 있다`는 추측이 교차된다. 한국은 연일 전운(戰雲)을 연상시키는 북한과 미국의 입만 쳐다보고 일희일비하는 꼴이 됐다.
정치권은 여전하다. 북한이 ICBM급 미사일을 쏘아대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휴가를 간 것은 문제가 있네, 아니네 지지고 볶는다. 논란은 한미정상이 통화하지 않는 문제를 놓고 한국이 배제되는 `코리아 패싱(Passing)` 국면이 아니냐는 의구심 시비로 번졌다. 야당의 한 의원은 `코리아 낫씽(Nothing)`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우리가 아직도 강대국 이해관계의 포로로 살고 있다는 현실이 통탄스럽다. 한반도의 운명을 마음대로 난도질한 카이로·얄타·포츠담 회담이 떠오른다. 일본·청나라·러시아·영국·미국이 조약과 거래를 통해 대한제국의 운명을 요리할 때의 처지가 생각 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범국가적인 딴딴한 `결기`를 모아내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부터 달라져야 한다. 큰 눈을 떠야 한다. 지금은 죽고살기로 권력쟁패에만 몰두할 때가 아니다. 한반도를 파멸로 몰아가는 북한정권에 대해서, 내밀하게 북한을 두둔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 강력한 `자체 핵무장` 의지를 펼칠 때가 됐다.
110년 전, `큰 도둑들의 만찬회`에서 완전히 무시당한 대한제국의 한을 품고 이국땅 헤이그에서 쓸쓸히 죽어간 이준 열사의 가슴은 얼마나 처연했을까. 어쩌면 일제의 간악한 마수에 독살 당했을 지도 모를 그의 순국을 우리는 어떤 교훈으로 이어받고 있는가. ``패싱`과 `낫씽` 사이 절박한 위기 속에서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는 열사의 유훈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