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금과옥조가 된 `3권 분립`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스키외다. 그는 1748년 `법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입법·행정·사법 3권 분립의 가치를 주창했다. 국회·법원에 대해 우월한 지위에서 3권을 조정하던 대한민국은 제5공화국헌법에서 비로소 권력분산적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대통령이 입법부·사법부에 대해 우월한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검찰조직은 `정권의 시녀` 또는 `권력의 사냥개`라는 악명이 붙어있다. 오늘날 행정수반의 인사권 안에 있는 검찰에 대해 벌어지는 정치적 논란에 대해서는 대략 그 불가피성을 수긍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으로 법원의 결정만은 존중하는 불문율을 갖고 있다. `법원의 판결`을 모든 논란의 종착점으로 여기는 자세야 말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堡壘)라고 믿기 때문이다.
최근 일어난 `한명숙 전 총리의 만기출소`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유죄판결` 두 개의 이슈와 논란들이 `법`에 대한 국민감정의 한 끝을 강력하게 할퀴고 있다. 사실 두 개의 이슈는 `법`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나라에서 항용 일어나는 범사에 지나지 않는다. 유죄판결을 받은 한 정치인은 죗값은 치르고 옥문을 나섰고, 이 나라 최고 재벌가의 상속인은 유죄가 인정돼 징역형을 선고받았을 따름이다. 이 두 개의 이슈는 `화젯거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논란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 이 나라에 법이 살아있다는 엄중한 증좌로 여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이슈들을 놓고 정치권이 충돌하고, 민심이 나뉘는 것을 보면 우리의 ‘법 의식`이 얼마나 어설픈가 의구심이 스며든다.
한명숙 전 총리의 만기출소에 즈음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멘트는 충격적이다. 한 전 총리의 교도소 출소현장은 2년 전 수감 당시처럼 독립투사 출소현장을 방불케 했다. 그 자리에서 추 대표는 “기소도 잘못됐고 재판도 잘못됐다”고 말했다. 도저히 집권당 대표의 발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억울한 옥살이`라는 민주당의 관련성명에 이르러서야 그 발언의 저의가 읽힌다. 민주당은 “정치탄압을 기획하고 검찰권을 남용하며 정권에 부화뇌동한 관련자들은, 청산돼야 할 적폐세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굳이 찍어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한 전 총리에 대해 만장일치로 유죄판결을 내렸던 14명 대법관들을 싸잡아 `적폐세력`이라고 몰아친 셈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포함한 10명은 아직도 임기가 남아 있다.
그러던 민주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법원의 `징역 5년` 실형 선고 직후 “오늘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법부의 냉철한 판결을 국민들과 함께 존중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법부 판결에 대한 집권여당의 도를 넘은 감탄고토(甘呑苦吐) 행태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법(法)마저도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의 먹이로 삼는 이런 천박한 행태의 뿌리는 무엇인가.
문재인정권은 스스로 `촛불정권`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맞아 개최한 보고회에서 “국민이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해 ‘국회 패싱` 논란을 빚었다. `광장정치`를 염두에 둔 듯한 정부여당의 언행들을 지배하는 키워드는 `촛불집회`나 `댓글`이다. 그런 수단들을 권력의 핵심수단으로 판단하고 있음이 여실하다.
그래서 `촛불`로 `사법`까지 장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면 이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둥에 톱날을 들이대는 무시무시한 낭패다. 대법원 판사들마저도 `정치 풍향계(風向鷄)` 취급하는 편견은 끔찍하다. 문득, 추미애 대표의 과거가 궁금해진다. 추 대표도 판사시절 그렇게 권력의 입맛 살펴가며 재판을 했을까. `촛불`인가, `법`인가.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