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달’과 ‘손가락’ 사이

▲ 안재휘논설위원지난 8월 26일, 임명된 지 1년 남짓밖에 안 된 통계청장이 석연찮은 이유로 전격 교체됐을 때 정치권 내외의 반응은 격렬했었다. “‘소득주도성장’이 안 되니 ‘통계주도성장’ 하자는 거냐”는 비난에서부터 “기상청장 바꾸면 날씨가 바뀌느냐”는 비아냥에 이르기까지 여론은 대체로 곱지 않았다. 집권 더불어민주당의 정책에 대해서 대략 박수를 치고 있는 민주평화당에서 내놓은 당시의 반응은 두고 기억에 남는다. 평화당 홍성문 대변인의 논평은 ‘정부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자르는 우를 범하질 않길 바란다’라는 제목부터 대단히 이례적이고 맵짰다. “국민들의 눈을 속이려는 또 다른 시도에 불과한 것”이라는 힐난까지도 들어 있었다.‘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사자성어는 ‘달을 보라고 손을 들어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본다’ 정도로 직역이 된다. 본질을 외면한 채 지엽적인 것에 집착한다는 뜻을 달과 손가락에 빗대고 있다. 제아무리 비판적인 견해가 쇄도해도 날이 갈수록 오히려 정책추진의 강단(剛斷)이 높아지는 문재인 정부의 통치행태를 놓고 이 사자성어를 동원하는 지식인들이 늘고 있다.추석연휴 전날 감행된 심재철 의원실 및 소속 보좌관 3명의 자택 ‘기습’ 압수수색과 잇따른 제소전으로 촉발된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격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김병준 비대위원장 및 김성태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는 압수수색과 고발 사태를 “명백한 야당 탄압”이라고 규정하며 날선 대여투쟁에 돌입했다. 정부여당은 심 의원의 정보취득이 불법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는 목적의 가치 못지않게 수단의 적법성을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불법하게 취득한 정보자산은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얘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현재의 집권세력 역시 그런 ‘특수한 경우’를 충분히 활용하여 과거 야당시절에는 대여투쟁의 이슈를 만들어왔고, 현재는 ‘정치보복’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편법까지 동원하여 ‘적폐청산’의 빌미를 만들어내고 있다.심재철 의원이 확보한 청와대 등 공직자들의 47만 건 지출내역을 둘러싼 여야 정치권의 공방을 지켜보노라면 과거 언젠가 많이 본 듯한 논리와 형용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해 강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야말로 공수교대(攻守交代)의 유치한 되풀이다. 정치권의 지독한 건망증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라고나 할까. 아니, 빤히 알면서도 거듭 주고받는 뻔뻔한 상호논박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오늘 ‘달’의 실상을 강조하는 편은 분명 지난 날 ‘손가락’을 강력 시비했던 쪽이다. 예전에는 정확하게 그 반대였다. 제아무리 상황에 따라서, 형편에 따라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궤변을 일삼는 게 정치라지만, 이건 정말 너무 심하지 싶다. 심재철 의원이 알아낸 ‘달의 비밀’은 일단 낱낱이 공개되고 검증되는 게 옳다. 심 의원이 의적이냐, 도적이냐는 또 다른 문제다.‘도덕성’을 무기삼아 권력을 잡은 정치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은 바로 그 ‘도덕성 시비’의 덫이다. ‘특활비’ 기록을 낱낱이 까발려 의법 처리하는 방법으로 혹독하게 전개해온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 지금껏 다소나마 용인된 것은 자신들은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예단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 측면에서 심재철 의원이 확보한 특활비 자료내용은 휘발성이 대단히 높다. ‘달’과 ‘손가락’ 사이, 그 아찔한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 민초들은 어지럽다. ‘달’이든 ‘손가락’이든 둘 다 마냥 온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이번 논란이 결과적으로 정치진화의 한 이정표가 될 것임을 믿고 싶다. 어쩌면 지금까지 ‘적폐청산’ 운동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10대0, 100대0의 야릇한 게임의 비밀이 풀릴지도 모른다. 화들짝 놀라 예민하고 기민하게 극렬 반응하는 기획재정부와 청와대의 움직임에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2018-10-01

‘제왕’은 사라졌나

▲ 안재휘논설위원1973년에 나온 미국의 역사학자 슐레징거 2세(Arthur Meier Schlesinger, Jr.)의 ‘제왕적 대통령제(The Imperial Presidency)’라는 책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시끄럽던 닉슨 행정부의 막강한 권위를 묘사한 제목이다. ‘제왕적’이라는 말은 명목상 ‘3권 분립’을 선택하고 있으면서도 행정부의 권한이 과대한 경우 극단적으로 대통령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로 회자된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도 수없이 언급돼 왔다. 대통령이 나라의 온갖 크고 작은 일들을 다 들여다보고 좌지우지하려고 한다고 해서 ‘만기친람(萬機親覽)’이라는 비판용어까지 등장했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비난은 보수정권시절 진보 야권(野圈)에서는 약방의 감초였다. 아마도 진보인사들 중에 이 말을 입줄에 올리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제왕적’이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박근혜정부 시절에 가장 많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소위 ‘진박(眞朴)’을 앞세워 집권당의 공천마저 마음대로 주물러 터지게 만들던 시절에는 당시 여권(與圈)에서마저 불거진 비판용어이기도 하다. 각기 이유는 다를지언정 ‘분권형 대통령제’를 담은 ‘개헌’은 굳어진 국민들의 여망이다. 한 사람에게 ‘제왕적’ 권력이 쏠리는 일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참지 않게 된 것이다.문재인정권은 ‘촛불정신’을 숭앙한다. 그러나 각자의 관점에 따라서 필요한 논리를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촛불정신’이라는 개념을 남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통령이 제왕적 권한을 가지고 무소불위의 힘을 과용하는 것은 ‘촛불정신’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소한 박 대통령 탄핵 이전과 이후는 우리가 분명히 달라야 한다.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의장단과 여야 정당 대표들을 대동하고 싶어했다. 통일문제가, 북한 비핵화 문제가 민족의 염원인 만큼 그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안’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결정은 자기들끼리 다 해놓고, 행사장에 와서 박수나 치라고 욱대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판문점선언’ 국회 비준 논리도 여러 측면에서 억지스럽다. 김정은의 비위를 맞추어주어 용단을 끌어내는 일은 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략에 정치권 모두가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지난 4월 판문점 정상회담 내용에 대해 정치권은 인식도 내용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청와대는 그 공(功)을 눈곱만큼도 나눠줄 의사가 없었다.중요한 것은 북한의 비핵화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점이다. 며칠 전 미국NBC뉴스는 미국 전·현직 고위관리 3명을 인용해 “북한이 올해에만, 최대 8기의 핵무기를 제작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도대체 뭣 때문에 ‘판문점선언’ 비준과 평양 정상회담 동행을 주장하는가. 공(功)은 자기들이 다 갖고, 들러리로 나서서 박수만 쳐달라는 고약한 심사의 기반은 또 무엇인가.다른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문재인정권도 드디어 ‘오만방자’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듯하다. 실업자가 넘쳐나는 시대에 ‘전 정권’탓만 하면서 미심쩍은 경제정책을 막 밀어붙이는 것부터가 그렇다. 대통령비서실장은 평양정상회담 동행을 거절한 국회의장단과 야당 지도부를 향해 ‘꽃할배’라고 조롱했다. 이낙연 총리는 한국은행의 고유권한인 ‘금리인상’ 문제를 잘못 건드려 금융시장이 화들짝 움찔거리자 전전긍긍하고 있다.촛불민심을 자처하는 분들에게 정중히 묻는다. 이제 “제왕은 사라졌느냐”고.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지금 참 행복하냐”고. 진보 정치인들에게 또 묻는다. 개헌도 안 되고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제왕적 대통령제’ 문제를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왜 이렇게 단 한 분도 없이 사라졌느냐”고.

2018-09-17

‘평화’와 ‘평화 구걸’ 사이

▲ 안재휘논설위원작금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비관론의 요체는 이렇다. 지난 연초부터 시작된 ‘평화 공세’로 김정은은 시간벌기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게다가 잘하면 ‘종전선언’ 매듭을 풀어 남한을 향한 ‘미군철수’ 요구의 명분을 장착할 수도 있게 됐다. 남북, 북미회담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확보하여 남한에 사사건건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는 존재로 발돋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상황이다. 문재인정권과 여당이 꿈꾸고 있는 한반도 평화 구축 시나리오는 크게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남측대표들은 우선 김정은을 철석같이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김정은으로 하여금 북한 군부와 북한주민들에게 “핵을 내려놓자”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자는 심산인 듯하다. 위험하더라도, ‘종전선언’ 같은 선언적 조치들을 양보하면 김정은도 북한내부 정치에서 더욱 장악력을 키울 것이라는 판단일 것이다.김정은이 북한주민들에게, 특히 군부에게 “거 봐라. 남한도 미국도 내 말을 다 듣지 않느냐”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게 해줘야 북한 비핵화의 선제적 조치들을 추진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계산일 지도 모른다. 한미가 ‘종전선언’조차도 안 해주는 상황에서 핵무기 리스트를 내놓아라, 핵탄두를 몽땅 미국으로 반출하자고 하면 김정은이 군부의 반발이나 북한인민들의 거부감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략적 배려일 것이다.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아직껏 ‘북한 비핵화’와 관련하여 어떤 제대로 된 약속의 말도 김정은이나 북측 대표단의 육성으로 들은 바가 없다. 모두가 그들을 만나고 돌아온 우리 측 인사들의 ‘카더라’ 전언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북한의 비핵화 시한은 은근슬쩍 늘어나버렸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4·27정상회담에서 ‘1년 이내’에 비핵화를 하기로 합의했다고 우리는 들었다.그런데 이번 평양을 다녀온 특사단은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2021년 1월 종료) 내에 비핵화 완료’라는 김정은의 말을 전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비핵화 시한은 지금부터 따져도 2년 4개월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종전선언’의 의미는 심각하다. ‘종전선언’을 하고나면 ‘한미연합군사훈련’은 한반도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북한은 “종전해놓고 무슨 짓이냐”고 발끈하면서 모든 것을 뒤엎을 게 불문가지(不問可知)다.아마도 남한의 반미세력들은 곧바로 ‘양키 고 홈’을 노골적으로 외치고 나설 것이다. 그랬을 때, 미국의 여론변화는 최대의 분수령이 될 확률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미국 국민들이 훨씬 더 이기적이 됐다는 뚜렷한 증좌다. 북한은 영리하게도 ICBM(대륙간탄도탄) 개발을 접은 척하면서 미국 내 여론을 흔들고 있다. 직접적인 위협도 사라진 마당에, ‘물러가라’고 아우성치는 반미의 나라 대한민국에 굳이 미군을 주둔시킬 실익(實益)이 사라졌다고 판단할 개연성이 없지 않다는 얘기다.문재인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려면 먼저 김정은과 북한 지도층을 ‘정상(正常)’이라고 믿어야 한다. 정부의 대북정책을 불안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그런 신뢰감을 넉넉히 갖고 있지 못하다. 그 동안 북한이 저질러온 만행들을 살펴보면 그 불신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사이비 종교국가 형태인 북한이 약속을 신실히 지킨 기억이 별로 없는 게 현실이다.남북의 문제, 국가안보는 때에 따라서 좀 손해보고 대충 넘어가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상대는 핵미사일을 개발했다고 큰소리를 떵떵 치는 집단이다. 한 번의 실수가 멸망을 부를 수도 있다. 북한 비핵화에 의미 있는 진전이 없는 한 ‘종전선언’은 패착이 될 확률이 높다. 우리는 지금 ‘평화’와 ‘평화 구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구걸로 얻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2018-09-10

‘미운 놈’ 떡 빼앗기

▲ 안재휘논설위원걱정스럽고 또 걱정스럽다. 여차하면 걷잡을 수 없는 지역감정이 폭발할 판이다. 아니, 어쩌면 시한폭탄의 초시계는 이미 작동이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며 한껏 멋을 부리며 출발한 정권이다. 그런 정권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왜 이렇게 하는지 속 시원한 설명이라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예산 정치보복’ 아니냐는 지역의 분노를 묵살하고 넘어갈 일이 결코 아니다. 최근 윤곽을 드러낸 정부의 2019년도 시도별 국비예산안이 아연실색을 부르고 있다. ‘TK패싱’ ‘TK예산 차별’ 소문은 벌써부터 떠돌았다.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이상한 대목이 한 두 곳이 아니다. 대구시는 요구액보다 4천100억원이 깎인 2조8천900억원으로서 반영률이 87.5%에 머물렀다. 경북은 올해보다 839억원이 줄어든 3조1천635억원의 국비가 책정됐다. 당초 요구액보다는 2조3천억원이나 잘린 58% 수준에 그쳤다.반면에 광주광역시 예산은 2018년 예산대비 13.2%(2천346억원) 증가한 2조149억원이 확보돼 잔치 분위기란다. 전남은 올 예산대비 6천8억원(10.9%) 늘어난 6조1천41억원이 반영됐다. 부산시는 올해보다 7천186억원(13.5%) 늘어난 6조613억원, 경남도도 올해 국비보다 2천602억원(5.7%) 증가한 4조8천268억 원이 반영됐다. 그래서 발칵 뒤집혔다. 자유한국당 대구경북발전협의회는 지난달 30일 국회 기자회견을 통해 “문재인정부는 대구 경북 죽이기 예산을 사과하고, 즉각 보완대책을 마련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장관 5명, 차관 4명을 교체한 문재인정부 2기 인사도 ‘완전한 TK패싱’으로 끝났다.‘TK예산 차별’ 의혹에 대해 민주당 김태년 정책위의장은 “예산과 정책에 있어서 절대로 TK차별이 없다”면서 뚱딴지처럼 구미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연 일을 증거로 들었다. 기획재정부(기재부) 예산실장은 TK예산 차별의 경우 “상대적으로 완료사업 비중이 높은 탓”이라는 어불성설의 해명을 늘어놓았다.제아무리 궤변을 펼쳐놓아도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인구가 336만명인 광주·전남에 배정된 예산이 8조1천190억원인 반면 인구가 516만명이나 되는 대구·경북의 예산은 6조535억원에 불과하다는 불합리는 어떻게 설명할 텐가. 대구시는 “반영되지 못한 신규·계속 사업이 많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경북도는 “도민의 삶과 안전에 관련된 생존 예산이 외면당했다”며 반발하고 있다.예산차별을 놓고 ‘적폐청산의 한 과정’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과거 TK정권 치하에서 대구·경북도 그랬으니 입 닥치라는 심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역감정’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이런 불장난이야말로 미래를 망치는 망국적 정치행태다. 고래(古來)로,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참지 못한다’고 했다. 정녕 이렇게 간다면 이 나라 정치는 지역주의의 포로 영역에서 꼼짝 못하고 끝내 썩어문드러질 것이다.‘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에는 선조들의 깊은 깨달음이 녹아 있다. 미운 사람일수록 잘해 주고 감정을 쌓지 않아야 한다는, 문자 그대로 ‘탕평’의 지혜를 담고 있다. ‘보수궤멸을 통한 20년 집권’을 부르대면서 야당을 향해 ‘협조’를 외치는 일이 우스꽝스럽듯이, TK지역 예산을 싹둑 잘라놓고 ‘TK 각별관리’를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가까스로 치유의 공감대를 넓혀가던 ‘지역감정’의 골을 이렇게 마구발방 파헤치고 있는 정부의 예산정책은 각성되고 혁신돼야 한다. 지역의 숙원예산은 왕창 깎고, 인재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무슨 ‘협치’ 타령인가. ‘미운 놈 떡 빼앗기’로 성취할 수 있는 선진 민주주의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018-09-03

‘산타클로스’의 변명

▲ 안재휘논설위원‘못 되면 조상 탓, 잘되면 제 공(功)’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면서 뭔가 일이 안 풀릴 때마다 ‘남 탓’만 하는 찌질한 인간들을 숱하게 본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 주야장청 시시콜콜 반대하고 헐뜯는 기술을 발휘하던 정치세력의 유치한 속성이 있다. 막상 정권을 잡은 뒤에는 영락없이, 하는 일이 잘되면 공치사에 여념이 없고 잘못되면 전(前) 정권 허물로 뒤집어씌우는 궤변생산에 몰두한다. 급격히 거꾸러지고 있는 경제지표를 둘러싼 정치공방이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정책’에 대한 야당과 경제계의 거듭된 비판에 청와대와 여당은 분명하게 ‘No!’라고 답했다. 25일 전당대회 영상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현재의 경제정책 기조를 ‘올바른 길’이라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은 이해찬 의원을 새 당 대표로 뽑으면서 ‘정면 돌파’ 기류를 뒷받침했다.임금 인상이 소비를 촉진하고 그 결과 경제에 선순환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골간이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글로벌 경쟁체제에서 이는 통하는 이론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한국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임금이 올라 제품 경쟁력이 떨어지면 그 자리는 다른 나라 제품이 차지하게 돼 국내 일자리가 줄고, 결국 소비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시장의 반응은 이 같은 부정적 견해에 근접하고 있다.23일 발표된 올해 2분기 가계 동향조사를 보면 소득최하위 20% 가계의 소득은 7.6% 감소했다. 반면 소득 최상위 20% 가계의 소득은 10.3% 늘어났다. 최상위 가계와 차상위 가계의 근로소득은 2분기 중 12.9%와 4.0% 늘어난 반면 최하위 가계와 차하위 가계의 근로소득은 같은 기간 15.9%와 2.7% 감소했다. 2분기만 놓고 보면 이는 2003년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큰 폭의 등락이다.하지만, 문 대통령의 분석은 각도가 다르다. 전당대회 축사에서 문 대통령은 “전체적으로 보면 고용의 양과 질이 개선되었다”면서 “성장률도 지난 정부보다 나아졌고 전반적인 가계소득도 높아졌다”고 적시했다. 이어서 “이것이 혁신성장과 함께 포용적 성장을 위한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가 더욱 다양한 정책수단으로 강화되어야 하는 이유”라고 강변하고 있다.청와대와 여당은 작금의 ‘고용쇼크’ 또는 ‘불평등 쇼크’의 범인이 최저임금 폭증과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지목을 합리적 추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정책의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데 이를 정치적으로 불순하게 공격한다는 인식인 것이다. 오히려 국고를 마중물로 더 쏟아부어야 할 타이밍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쯤 되면 사실상 막아설 대책이 없다. 제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칼자루 쥔 사람들이 지금 마음대로 하고 나중에 책임지겠다고 할 때, 이를 말릴 방도란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문재인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산타클로스’ 정책이 정말로 기적을 일궈낼 지는 아직 명징하게 알 방법이 없다. 밥솥의 물이 끓고 뜸이 들어 밥이 익자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치를 모르는 바보가 어디 있을까. 다만 그때까지 생존의 변방으로 내몰린 서민들이, 위태로이 부작용을 견뎌가고 있는 중산층이 과연 무사할까 그게 걱정일 따름이다. 아니, 이 나라 경제가 회복불능의 수렁 속으로 아주 굴러 떨어지지나 않았으면 좋겠다.아무렇거나, 입만 열면 지나간 정권 탓을 쏟아내는 못된 버릇만이라도 제발 끊어줬으면 좋겠다. 산타클로스에게 왜 변명이 필요할 것인가. 승용차 뒤 유리창에 ‘내 탓이오’ 스티커를 붙이면서 ‘탐욕과 교만, 적대감’을 부추기는 인간의 잘못을 ‘지금, 여기, 나’한테서부터 찾아보자는 감동적인 인성회복 운동을 펼치셨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문득 문득 떠오르는 요즘이다.

2018-08-27

기묘한 사법적 판단, ‘민심’을 흔들다

▲ 안재휘논설위원요 며칠 사이에 유력 여권인사들에 대한 이상한 두 개의 사법적 판단이 여론을 들끓게 하고 있다. 하나는 여비서 김지은 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정에 선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가 언도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드루킹 댓글조작사건의 공범자로 지목된 김경수 경남지사에 대해 특별검사가 신청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사태다. 이 두 개의 결론은 ‘살아있는 권력’에게 턱없이 관대한 사법부의 이율배반적 적폐의 소산으로 기록될 조짐이 농후하다.‘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5차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에서 변호사가 대독한 전 충남도 정무비서 김지은 씨의 편지내용이 애절하다. 김 씨는 “‘죽어야 제대로 된 미투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야 할까’라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면서 사법부를 향해 “왜 내게는 묻고 가해자에게는 묻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김 씨는 “안희정에게는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그렇게 여러 차례 농락했나 물으셨나. 왜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느냐고 물으셨나. 왜 검찰 출두 직후 자신의 휴대전화를 파기했느냐고 물으셨나”라고 절규했다. 김 씨는 “위력은 있지만, 위력은 아니다. 원치 않은 성관계는 있었지만 성폭력은 아니다. 뭐가 아니라는 것인가. 바로잡을 때까지 살아내겠다”고 다짐해 듣는 이들을 울렸다.민심을 더욱 요동치게 만드는 일은 드루킹 댓글조작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김경수 경남지사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사건이다. 박범석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는 드루킹 여론 조작 게이트에 연루된 혐의로 신청된 허익범 특검팀의 김 지사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박 판사는 “다툼의 여지가 있고, 증거인멸 가능성도 소명이 부족하다”고 결정사유를 밝혔다. 성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사법부 판단은 ‘유권무죄(有權無罪)’의 이미지를 또렷이 남긴 10건의 특검법, 11차례 특검의 씁쓸한 기억을 반추하게 한다. 천양지차인 정치권의 반응부터 귀가 아프다.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무죄판결에 대해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반응은 ‘안 지사 논평 없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신보라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미투운동에 대한 사형선고”라며 강력 반발했다.김경수 지사 구속영장 기각에 대해서 김현 민주당 대변인은 “사필귀정”이라면서 “구속영장 청구는 불순한 정치행위에 불과했다”고 난타했다.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의 비탄은 섬뜩하다. 기각 당일 페이스북에 올린 김 원내대표의 ‘살아 있는 권력이랍시고 백정의 서슬 퍼런 칼로 겁박’이나, ‘망나니들의 핏빛 어린 칼날에 사법부의 정의도 한강물에 다 떠내려 보냈다’는 표현은 격앙된 심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종철 바른미래당 대변인은 “백원우 민정비서관은 웃으며 조사받으러 가고, 김경수 지사는 큰소리치고 주먹을 흔들었다“며 “결국 특검과 여당의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라고 싸잡아 공격했다. 극우논객으로 통하는 조갑제 대표의 이색주장이 눈길을 끈다. 그는 유튜브 방송에서 “김경수 영장 기각으로 이명박·박근혜 구속 재판 이유도 사라졌다”며 두 전직 대통령 석방을 촉구했다. 그는“불구속 재판이라는 원칙은 두 전직 대통령에도 적용돼야 한다. 두 사람은 거주가 확실하며 도망갈 염려가 없다”고 주장의 근거를 댔다.안희정은 정말 무죄인가. 김경수도 무고한 인물인가. 사법부의 형평성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사법부의 판단에 민심이 요동치는 나라는 온전한 나라가 아니다. 모시던 도지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수행 여비서의 경천동지할 폭로와 경찰이 노골적으로 은폐해 복잡하게 만든 여론조작 사건마저 ‘권자불패(權者不敗)’의 부끄러운 역사의 공동묘지에 묻어버릴 것인가. 경계없이 흔들리는 정의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민심이 표표하다.

2018-08-20

‘쇼통(Show通) 정치’의 그늘

▲ 안재휘 논설위원현대정치를 움직이는 변수 중 ‘여론’ 만큼 강력한 요소는 없다. 민심’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잠행(潛行)을 다니던 옛날 치자(治者)들의 관행은 현대사회에서 여론조사라는 과학적 기법으로 완전히 대체된 셈이다. 물론 오늘날도 골목골목을 다니며 진솔한 민심을 듣는 일이 정치인들에게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여론조사 결과가 다시 여론을 움직여 다수를 형성해가는 ‘밴드왜건(band wagon) 효과’는 정치인들에게 대단히 매혹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아이디어와 적절한 액션은 정치인에게 필수요소가 됐다. 그 메커니즘의 꼭대기에 ‘쇼(show) 정치’가 있다. 대중을 향해 멋진 말만 골라서 쏟아내고, 유행을 좇아 뛰어다니는 ‘정치 쇼’는 여론몰이의 핵심 수단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현대정치가 ‘쇼 정치’에 깊숙이 침윤되면서 일어난 ‘선도(先導)기능의 상실’이다. 민심을 이끌어가는 정치는 사라지고, 민심의 꽁무니를 뒤쫓아 다니면서 영합하는 일에만 온통 신경을 쓰는 게 정치인들의 일상이 돼버린 것이다. 표심을 훔치기 위해 ‘공약’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영합에 몰두하는 정치풍토가 횡행하면서 포퓰리즘은 한도 끝도 없이 확장되고 있다.정치인들은 ‘권력을 움켜쥐고 지키는 일’에만 능력을 키울 따름, 길게 내다보고 크게 바라보며 나라의 앞날이나 국민들의 미래를 제대로 융성해갈 용의주도한 정책을 만들고 끌고나가는 힘은 키우지 않는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지지율 하나에 모든 가치를 예속시키고, 스스로 온갖 궤변으로 포장된 시대착오적 정치공학의 인질이 되어 산다.많은 이들은 ‘유권자들이 문제’라고 개탄한다. 맞다. 그 공약의 허점 따위는 제대로 가늠해보지 않고 일단 나랏돈으로 막 나눠준다는 후보부터 찍고 본다. 현실성 문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상적인 공약을 내놓는 후보들에게 무조건 지지를 몰아준다. 그런 측면에서 확실히 유권자들이 문제인 것은 맞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어리석음을 키운 일에 정치인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감성에 호소하는 정치가 효과적이라는 믿음 때문에 만들어진 ‘쇼통(show通) 정치’의 횡행이 유권자들의 수준을 하향평준화시켜온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기술자들이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서 아이디어를 온갖 감성공략에 맞춰놓고 오만 ‘정치 쇼’를 획책하는 짓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미 그 재앙은 혹독하게 나타나고 있다.문재인정권이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동력삼아 집중해온 정책은 최저임금제 대폭인상, 탈원전, 북한 비핵화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 정책의 공통된 특징은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관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핵(核)의 위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과업, 북한의 비핵화로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를 걷어내겠다는 발상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제대로 해놓은 준비가 없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집권당 정치기술자들은 힘겹게 기업을 이끌어가고 있는 절대다수 중소 영세자영업자들을 ‘임금착취 세력’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원전산업에 미래를 걸고 살아온 동해안 지역민들에게 아무 대책이 없었음이 노정됐다. 판문점과 싱가포르에서 폼 잡고 사진 찍은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결국 수상하게 돌아가고 있다.진정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기자들 불러 사진 찍는 일부터 생각하는 ‘쇼통’은 결코 올바른 소통이 아니다. 40도를 육박하는 찜통더위에 옥탑방 한 달간 빌렸다고 사진 찍고 공무원들이 배달해준 밥 먹는 게 무슨 거룩한 소통인가. 오늘날 ‘여론조작’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은 도대체 몇이나 되나. 진심어린 잠행의 미덕은 사라지고 오직 정치공학적 ‘쇼통’에만 정신이 팔린 뭇 정치인들의 행태에 참말이지 구역질이 솟고 넌더리가 난다.

2018-08-13

진보의 ‘퇴보(退步)’

▲ 안재휘 논설위원노회찬, 그의 자살에 동의하지 않는다. 생전에 그가 보여준 신실한 정치활동에 대한 평가에 인색할 이유는 없으나, 죽음 뒤에 펼쳐지는 과도한 예찬 또한 듣기 거북하다. 한 인간의 삶을 놓고 ○X문제풀이 식으로 접근하거나 흑백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천박하다. 우리는 모든 이슈에 대해 다면적으로 분석하여 긍정과 부정적 요소를 함께 말하는 일에 서툴기 짝이 없다. 부작용에 대한 대응책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마구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는 악질이거나 최소한 돌팔이다. 중환자일수록 수술계획은 철저히 실용적이어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신약(新藥)을 함부로 사용하는 일도 자제돼야 마땅하다. 일어날 수 있는 현상에 대한 예측은 적확(的確)해야 하고 대비책은 과학적이어야 한다. 그게 진보다. 진보는 그래야 마땅하다.인류는 교졸한 궤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념가설에 의한 비용을 무수하게 낭비하면서 온존해왔다. 그 중에도 이념과잉의 시행착오로 인해 치러야 했던 희생은 너무 컸다. 그 교조적 가설과 세뇌된 오신(誤信)이 빚어낸 비극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대개의 급진주의자들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명분의 노예가 되어 자신들의 오판과 부작용에 대해서 무책임하다.국민들은 문재인정부를 노무현정부의 후예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이제 많은 전문가들이 차이점을 적나라하게 짚어가며 ‘퇴보’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노무현정부의 정책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른 실용주의’로 지칭된다. 교조적 극좌들이 ‘변절’이라고 마구 공격을 해댔을 때, 분노와 좌절을 금치 못하던 노 전 대통령의 처연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문재인정부가 진보 교조주의의 덫에 걸려든 징조들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현장의 무성한 비명을 무시하고 “최저임금이 고용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가 없다” “최저임금의 긍정적 효과가 90%”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 그 명징한 조짐이다.소득주도 성장은 장기 성장동력 확충과는 무관하다. 알바생들의 시급을 올려서 나라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발상은 개그 소재로도 못 써먹을 공염불이다. 안 되면 전 정권 탓만 해온 문재인정권의 핑계가 늘고 있다.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최저임금 인상 파동과 관련 “정부정책 방향이 잘못됐다기보다 우리 경제 구조적 문제 영향이 더 크다”고 말했다. 빠져나갈 구멍부터 만들어 놓고 일하는 장관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최저임금 파동에 대한 대책을 말하는 진보운동가들의 철없는 논리는 소름을 돋게 한다. “자영업자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더 망해야 한다”는 망발까지 주저하지 않는다. 파생될 문제점들에 대한 대비책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보이는 그 강퍅한 인식을 떠받치고 있는 알량한 지식의 두께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재벌개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부동산 보유세 강화, 복지증세, 관료개혁…. 단 한 가지도 동의하지 못할 목표는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체력과 체질이 부작용을 견딜만한 상황인지에 대한 철저한 계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김병준 한국당 비대위원장이 지난 5월에 쓴 칼럼 한 토막을 빌린다. ‘좋은 음식도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난다. 체질에 맞지 않는 경우는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노회찬이 지난 17대 의원 시절을 반성하면서 내놓은 고백은 오늘날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진보진영에게 필요한 건 실용노선, 즉 실사구시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되돌아봐도 성공한 혁명은 모두 실용노선이었다. ‘실사구시’를 진보의 기본철학으로 삼아야 한다” 자기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의 죽음 앞에서 눈물콧물만 쏟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그가 남긴 숙제를 풀어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다르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여 ‘진보의 퇴보(退步)’를 막아내는 게 우선이다. 고(故) 노회찬 의원의 명복을 빈다.

2018-08-06

별들의 ‘거짓말’

▲ 안재휘논설위원젊은 날 군문에서 장교교육을 막 받기 시작했을 때 교관으로부터 들은 멋진 말이 있다. “군(軍)이란 상명하복(上命下服)이라는 지극히 비이성적인 전통으로 ‘국방’이라는 위대한 이성을 구축하는 존재”라는 정의다. 상명에 무조건 복종하는 습성을 붙이는 훈련을 받으면서 적잖이 혼란스러웠던 그 때, 그 교관의 말은 소중한 깨달음으로 각인됐다. 그 깨달음은 고달픈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종요로운 정신적 자양분으로 작용했었다. 최근 창군 이래 대한민국 국군에 최악의 하극상(下剋上) 혼란이 펼쳐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지난해 3월 탄핵 정국 때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계엄검토 문건과 관련해 번지고 있는 논란이 엉뚱한 곳으로 비약되면서 군 전체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폭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무사 계엄문건’ 사태의 본질은 그것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개념계획’ 시나리오였느냐, 아니면 ’실행계획’까지 준비됐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건을 놓고 청와대와 국방부 장관이 이견을 보인 데 이어, 이번엔 장관과 부하가 국회에서 대놓고 폭로전을 벌이는 사상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국민 앞에서 서로 자신이 옳다고 싸우는 군 최고 수뇌부의 추태는 경악을 부른다. 머릿속에 ‘당나라군대’, ‘개판’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기무사 문건을 둘러싸고 나뉘어지는 정치적 관점은 천양지차다. 이 문건을 일종의 ‘개념계획’에 불과했다고 보는 쪽은 대뜸, 논란을 확대재생산하는 청와대의 속내를 의심한다. 이미 지난 3월16일에 인지한 문건을 묵혀두었다가 ‘탄핵정국 친위쿠데타’로 포장해서 국면전환용으로 써먹고 있다는 주장이다. 북핵문제와 경제문제 등이 꼬이면서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해석인 것이다.반면 청와대와 여당은 촛불시위 국면에서 엄청난 ‘친위쿠데타’가 음모되었고, 그 실행계획을 기무사가 작성했다는 식으로 확대선전하려고 한다. 문건내용을 거두절미해 자극적인 내용만을 펼쳐놓고 국민들의 분노를 부추긴다. 대통령이 거듭 공개적으로 심각성을 부각시킨 일이 정략적 의도를 의심 받는 의혹의 빌미가 되고 있다.청와대도 인정하듯이 문건은 ‘탄핵이 기각됐을 경우의 상황을 가정해서’ 만들어진 내용이다. 그런데 마치 평화적인 광화문 촛불시위대를 군대가 마구잡이로 쓸어버리려고 했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전제를 인위적으로 생략한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기무사 문건이 비밀문서로 분류되지도 않고 평문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군대의 모든 작전계획은 최소한 2급 비밀로 분류된다. 그런데 공식라인을 통해서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된 문건을 놓고 은밀한 ‘쿠데타 실행계획’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기무사 문건을 놓고 천인공노할 반란행위로 침소봉대하는 쪽이나, 국회마저도 무력화시키려는 위험한 탁상공론이 들어간 군 권력기관의 스케치 내용을 애써 무시하는 쪽 모두 어설프긴 마찬가지다. 누군가 명령을 내렸을 것이고, 상명에 복종해야할 요원들이 과잉충성심까지 발동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실체를 파헤치는 일은 냉정한 이성과 판단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쿠데타의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성취한 나라의 군 정보기관이 하는 수상한 짓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불행한 역사의 되풀이를 막을 촘촘한 제도적 혁신이 꼭 필요하다.사태의 본질과는 다르게, 국회에 출석한 장군들이 서로 상대방을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삿대질을 해대는 풍경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보아도 ‘진실’을 밝히려는 순정보다는 ‘각자도생’의 천박한 본능만 처연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어느새 세월이 바뀌어 상명하불복(上命下不服)이 국방력의 원천(?)이 되었나, 한탄이 절로 나온다. 북한의 평화공세 속에 안 그래도 흔들리는 국가안보가 더욱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걱정이 새록거린다.

2018-07-30

김병준의 ‘대도(大道)’

▲ 안재휘 논설위원민주주의의 두 날개 중 한 쪽이 부러진 채 허공을 표류하고 있는 한국정치의 위태로움이 극에 달하고 있다. 급격히 기울어진 운동장 높은 곳 진보세력에겐 나날이 패착과 오만의 징조가 얼비치고, 낮은 곳 보수 쪽은 여전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리멸렬(支離滅裂)’ 그 자체다. 물론 모두가 자업자득이다. 남 탓을 할 처지도 못된다. 권력을 잘못 만진 죗값이요, 시대를 오독(誤讀)한 형벌이다. 최근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극복할 사명을 오롯이 짊어진 인물이 김병준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이다. 폐허 위에서 제1야당 재건축의 막중한 소임을 맡은 그가 과연 방황하는 이 나라 보수민심을 다시 묶어낼 수 있을 것인지, 난치 수준에 이른 한국당의 고질을 말끔히 고쳐낼 것인지가 최대의 관심사다.‘김병준’의 길은 과연 여의할 것인가. 잘라 말해서, 그는 성공확률이 결코 높지 않은 가시밭길에 서 있다. 여야를 불문하고 그가 상대해야 할 기성 정치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남 헐뜯기, 시시때때 제 몫 챙기기, 주야장천 편 가르기에 이골이 난 기술자들이다. 여차하면 목덜미 급소를 물어뜯을 수도 있는 독사의 이빨을 지닌 이들이 수두룩하다. 출발선에 서자마자 ‘김영란법’ 위반 내사라는 야젓잖은 경찰정보를 내돌려 디스에 열중하는 저의부터 성성하지 않은가.‘여의도 정치’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은 김 위원장의 약점이다. 찍어내기 기술이 탁월한 여당을 대적하고, 사분오열된 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뻘밭을 뒹굴고 있는 한국당 정치인들을 추슬러내는 일은 힘겨울 것이다. 그러나 매너리즘에 빠져있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다. 여의도의 썩은 문법과 교졸한 장난질의 천적은 오직 대의(大義)밖에 없다. 김 위원장이 여야 정치권을 망라하는 한국정치 전체를 조망하면서 대안을 강구해나가려는 자세는 든든하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에 대해서 “우리 역사의 아픔”이라면서도 “그분들의 잘못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해석한 대목은 적확하다. “대통령을 잘못 찍을 수밖에 없는 공정부터 고쳐야 한다”는 처방도 야심차다.섣부른 인적청산에 앞서 ‘가치논쟁’부터 시작하겠다는 김병준 위원장의 혁신 밑그림 역시 옳다. 계파를 갈라치기하는 수법은 이미 퇴행적이다. 가치관을 점검하고, 민심의 소재를 정확하게 짚어내어 미래지향적인 이념좌표,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책방향을 설정하는 일부터 하는 것이 맞다. 자유한국당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 가치척도는 어디에 있는지부터 석명하여 검증받아야 한다.역학관계에 얽혀 ‘물러나라’ 어째라 하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건강한 논쟁을 통해 국민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개혁적 보수’의 깃발을 만들어 세우고 그 이정표의 가치에 부합하는 사람들만을 뭉쳐내는 것이 맞다. 그 모든 작업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가 바로 개혁적 보수(또는 중도보수) 대통합이나 연정(聯政)이 돼야 한다. 여의도 정가 일각에서 벌써부터 ‘김병준+손학규+α’라는 덧셈 공식이 나돈다. 그러나 차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뭉치자고 대드는 것은 ‘흡수통합’ 과욕의 산물로 갈등을 덧낼 따름이다. 합치지 못할 이유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방법으로 접근해가야 한다. 상대방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존중하는 성숙한 정치만이 참된 민심을 견인한다.큰길을 가야 한다. 시종일관 대도(大道)를 지키면서 나아갈 때, 김병준을 넘어뜨리려는 그 어떤 불순한 의도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짜증스러운 ‘반대를 위한 천박한 반대’가 아니라, 다수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대안 있는 비판’의 야당전통을 창조해가야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감동적인 ‘정책 정당’, ‘대안 야당’의 출현을 소망한다.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균형 감각을 지닌 정책전문가 김병준의 맹활약을 기대한다.

2018-07-23

‘옥타곤’에 갇힌 을(乙)들의 비명

▲ 안재휘 논설위원문재인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만났다. 인도 삼성전자 공장 준공식에서 이 부회장을 만난 문 대통령은 “한국에서도 더 많이 투자하고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 장면을 놓고 가장 크게 놀란 측은 진보진영인 것같다. 진보논객들이 ‘박근혜, 최순실과 함께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의 주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만남의 부적절성을 부르댄다. 국민들이 못 볼 장면까지 보게 됐다고 한탄하기도 한다.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진보성향 시민단체들을 겨냥해 근본주의적 성향과 개혁조급증, 경직성을 지적했다가 호되게 씹히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별도합산 토지 종부세를 빌미삼아 동네북 취급이다. 진보인사들은 J노믹스의 핵심인 소득주도 성장정책을 이끌어 온 대표적 인물인 홍장표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경질에 아예 ‘목이 잘렸다’면서 분노한다.최저임금위원회가 내년 최저임금을 10.9% 인상해 시간당 8천350원으로 의결한데 대한 반향이 심각하다. 시중에는 벌써부터 ‘문재인 정부도 경제에서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걱정이 심심찮게 나돈다. 단언하기는 조금 이를지 모르지만, 일련의 사태는 정부의 경제정책에 문제가 없지 않음을 여실히 반영한다.최저임금을 올려서 소득주도 성장을 이끌어내겠다는 이론은 좋은 정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성과를 담보하기 위한 절대조건이 있다. 경제주체들 모두가 변화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정부는 그렇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문재인 정부의 경제팀은 최저임금은 덜컥 인상해놓고, 노동수요를 증가시키는 정책을 유효하게 창출해내지 못했다. 그 무책임 때문에 이 난리가 났다.최저임금 노동자를 고용하는 계층은 소상공인들, 소위 ‘먹이사슬의 차상위 계층’이다. 이들의 지불능력을 늘려주는 것이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정권은 소상공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기만 하고 있다. 내수 진작을 위한 거시정책도 없다. 상가 임대료는 전혀 낮아지지 않았다. 임차인이 대낮에 식칼을 들고 건물주를 노려 쫓아다니는 판이다. 재벌 대기업이 수조 원의 사내 유보금을 풀도록 하는 효과적인 정책수단도 없다.집권여당은 이제 와서 “최저임금 인상에 부담을 느끼는 영세 소상공인·자영업자 보호 대책에 국회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인들이 정말 그런 묘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경험칙에 따르면, 국회는 고작 중소상공인들에게 인건비 일부를 당분간 지원해주는 미봉책이나 만들어 내놓고 업적 선전에나 몰두할 공산이 크다. 벼랑 끝에 몰아놓고 혈세를 털어서 입에다가 사탕 몇 개 물려주는 짓이야말로 정치가 국민에게 하지 말아야 할 천박한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오죽하면 영세 소상공인들이 길거리에 나서서 ‘불복종 운동’을 벼를까.영세 소상공인들도,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빈곤층도 모두 을(乙)이다. ‘최저임금’ 갈등의 현장은 잘 나가는 대기업과 진보 정치인들과 귀족노동운동가를 포함한 ‘갑(甲)’들이 펼쳐놓은 격투기장이 됐다. 도무지 빠져나갈 길이라곤 없는 8각의 옥타곤(Octagon) 철망 안에서 영세소상공인들과 싸구려 노동판을 기웃거려며 살아가는 서민들만 갇혀 있다. 힘없는 을(乙)들끼리 전쟁 붙여놓고 제 앞길만 살피는 윤똑똑이 고관대작들은 과연 누구인가.문재인 대통령은 왜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만나 일자리를 주문했을까. ‘소득주도 성장론’의 한계를 상징하는 회동은 아니었을까. 서민들은 지독한 불경기와 씨가 말라가는 일자리에 비명을 지르는데, 문 대통령은 경제지표 흔들리는 사태만 한사코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저임금을 왕창 올리면 경제가 잘 돌아가리라는 무지개 꿈은 언제까지 유효한가. 막다른 골목길에서 울고 있는 개살구들이 한없이 슬퍼보이는 나날이다.

2018-07-16

‘평화’ 만취 과속스캔들(?)

▲ 안재휘논설위원지난 6일부터 이틀 간 평양에서 열린 북미 고위급회담의 뒷말이 수상하다. “진전을 이뤘다고 생각한다”는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소감과는 다르게 북한의 힐난이 살벌하다. 북한은 “미국 측은 싱가포르 수뇌 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배치되게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 나왔다”고 비난했다. 북한의 악담 속에 담긴 주장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남북-북미정상회담의 성과와는 사뭇 딴판이라는 것이 문제다. 미국 내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핵을 폐기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뿐’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나돈단다.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테드 리우, 게리 코놀리 등 민주당 의원들은 최근 에드 로이스 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내 6·12 북미정상회담의 비핵화 합의와 북한의 핵 포기 의사의 진정성 등에 대한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고 나섰다.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신호탄으로 대한민국은 지금 남북교류 열풍이 뜨겁다. 정부는 북한과 SOC(사회간접자본)사업 등을 위한 사전작업에 분주하다. 남북 간 스포츠, 문화교류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지방자치단체들도 유행처럼 다양한 남북 공동사업을 앞다투어 기획하여 달려들고 있다.북미정상회담 결과는 한반도 전쟁위협 제거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의혹들을 수두룩 남겼다. 아니나 다를까, 북미 간 후속 고위급회담 이후에 나온 북한의 말이 야릇하다. 북한은 “미국 측은 싱가포르 수뇌 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배치되게”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CVID’와 ‘(핵시설) 신고’, ‘(핵 폐기)검증’ 문제를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요구”라고 성토하고 있다.그렇다면, 판문점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들은 약속은 도대체 무엇이며, 트럼프 미 대통령은 또 무엇을 합의했는지 다시 물어야 할 판이다. 북한이 지금까지 한 것이라곤 용도를 다한 풍계리 핵 실험장 갱도입구 폭파 쇼 말고 뭐가 있나. 그런데도 우리는 크고 작은 한미군사훈련까지 중단했다. 북미정상회담으로 마치 북한의 핵무기가 금세 사라질 것 같던 온 국민의 기대는 한낱 무지개꿈이 됐다.문 대통령의 대북행보에 연일 찬사를 쏟아내던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이 돌연 “정부가 지나친 남북 간 광폭운전을 하는 것 같다”고 지적해 궁금증을 사고 있다.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근식 교수는 “모두가 평화 분위기에 취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면서, 김정은의 진정성을 기대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북한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것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많이 만나고, 자주 만날수록 좋다. 정부여당의 주장처럼 그것은 북한이 핵을 완전히 내려놓고 정상적인 국가로서 국제사회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처럼 속절없는 ‘평화’타령에 취하여 과속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하다.정말 심각한 것은 우리 국민들의 ‘무장해제’ 심리다. 국민 중 89%가 판문점회담을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78%가 김정은을 믿을 수 있다고 답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현재 우리 군은 연합훈련 중단에 이어 자체 훈련도 스톱된 상황이란다. 첨단무기 개발도 멈췄고, 전방 진지공사까지 스톱됐다는 소문까지 들린다.무엇 때문에 대한민국이 이렇게 무장해제를 서둘러야 하는가. 트럼프 대통령이 중간선거에서 이기고, 재선에 성공한들 우리에게 그게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 마음대로 대한민국의 안보를 헐값에 팔아넘기는가. 북한의 저의를 우려하는 합리적인 의심마저도 ‘반통일 세력’으로 몰아 때리는 이 ‘평화’ 만취 광풍 속에서 참다운 우국(憂國)마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 이래도 괜찮은가.

2018-07-09

‘악마’의 속삭임

▲ 안재휘논설위원“(지난 정권의)결정에 중대한 어떤 문제나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영남권 신공항에 대한 기존 입장을 뒤집기는 쉽지 않다” 정치인들의 말은 더러 조건에 찍힌 방점을 주목해야 한다. 최근 영남권 최대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가덕도 신공항’ 재추진 논란에 대한 홍익표 민주당 정책위 수석부의장의 발언이 수상하다.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는 언중유골(言中有骨)이 역력하다. 민주당 소속인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지역의 광역단체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영남권 신공항 건설을 위한 테스크포스(TF) 구성을 결정했다. 오거돈 부산시장, 송철호 울산시장, 김경수 경남지사 등 PK(부산경남) 지역의 광역단체장 당선자들이 ‘가덕도 신공항’ 재추진 의사를 밝힌 것이다. 겉으로는 지난 6.13 지방선거 공약 재확인 차원이지만 이 문제는 결코 그런 수준에서 설계된 간단한 정치적 액션이 아니다. ‘가덕도 신공항’ 공론화는 지방선거 결과 빈사상태에 빠진 영남지역의 보수정당을 아예 확인 사살하겠다는 의지가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선전포고다. 문재인정권이 TK(대구·경북)를 버리겠다는 심산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다고 낙관하는 것은 심각한 오판이다. 지금처럼 PK지역에서 한껏 목소리를 키우면 일단 정치적 이슈가 되어 국민들의 첨예한 주목거리가 된다.PK지역에 떠돌고 있는 풍문 안에 논란을 단박에 잠재울 마스터키가 있다. 일단 만병통치인 적폐청산 차원에서, 박근혜정부 시절 진행됐던 동남권 신공항 심사과정을 조사할 위원회를 만든다. 그 위원회가 당시 친박 실세들이 ‘VIP의 뜻’을 앞세워 심사에 부당하게 개입해 김해공항을 확장하고 대구공항과 K2 공군기지를 합친 ‘대구통합공항’을 이전하는 것으로 결론을 유도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면 그만이다.이미 여권 내에는 당시 몇몇 친박 인사들이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확인했다는 말이 굴러다닌다는 보도도 나왔다. 청와대 관계자도 신공항과 관련해 “논의해본 적은 없다”면서도 “문제 제기를 한 만큼 들여다보겠다”는 야릇한 대답을 내놓고 있다. 과연 권영진 대구시장이나, 이철우 경북지사, 지역출신 의원들이 보여주고 있는 어설픈 반발 정도로 막아낼 수 있는 쓰나미일까. 아무래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읽힌다.민주당은 이미 TK지역에 의미 있는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동남권 신공항 결론 도출과정을 ‘적폐’로 몰아 때리면, 문재인정권이 팥으로 메주를 쑨 대도 지지해줄 막강한 동력이 전국적으로 발동될 것이다. 그러면 곧바로 게임오버다. PK지역의 민주당은 콘크리트 지지기반을 착착 구축하게 될 것이고, 영남지역에서 보수정당은 설 땅이 더욱 좁아질 것이다. TK 입장에서 작금의 ‘가덕도 신공항’ 프로젝트 논란은 초대형 재난이다.돌아보면 보수정권의 몰락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동남권 신공항’(또는 ‘영남권 신공항’)이슈를 놓고 분별없이 악화시킨 안방갈등에서 이미 잉태됐다고 해도 넘치지 않을 것이다. “지도를 놓고 보니 가덕도나 밀양이나 거기가 거긴데 왜 싸우는지 모르겠다”던 미국 한 전문가의 말이 생각난다. 도무지 큰 눈으로 바라볼 줄도, 전략적으로 사고할 줄도 모른 채 소지역주의 선동에 기대어 망국적 정치를 해온 소인배들의 업보치고는 참으로 가혹하다.그러나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이 이 문제를 정략의 계산기 안에서만 주무른다면, 부메랑이 되어 심각한 재앙으로 돌아올 확률이 높다. 높은 지지율에 취해 ‘악마’의 속삭임에 솔깃해하는 권력은 여지없이 위험하다. 오늘날 지리멸렬한 보수 정치인들이야 당장 대책이 없을 테지만, 국민들도 다 그렇게 문문할까. 권력의 귀를 간질여 오만방자를 부추기는 저 음흉한 ‘악마’의 혀를 경계해야 할 때다.

2018-07-02

‘붕어갈이’의 비극

▲ 안재휘논설위원정치권 선거에서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다. 매번 이길 수도 없고, 번번이 지지도 않는다.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이 정책정당으로서 미더운 비전을 거듭 내놓아 민심을 얻음으로써 다시 이기는 것이 정상적인 프로세스다. 그러나 냉정히 돌아보면 우리 정치사는 야당이 잘 해서 권력을 차지하는 경우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지방선거에서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자유한국당의 균열이 상상을 초월한다. 당을 정말 살려내기 위해서라면 리모델링 수준으로는 어림 없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국당이 슬쩍 인테리어나 바꾸는 방법으로는 되살아날 가망은 없다. 일부 의원들이 반성의 표시로 ‘총선 불출마’라는 결코 쉽지 않은 용단을 내리고 있음은 그나마 주목거리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어떻게 발전적으로 극복하느냐 하는 대목부터 정리가 돼야 한다. 공공연하게 친박-비박으로 나뉘어 앙앙불락 권력쟁탈전을 벌이던 눈꼴 신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행태가 나타나선 안 된다. 박근혜 정권 초기부터 권력의 확대재생산에는 관심이 없고, 권력독식 행태를 보이며 마이너스 게임에 열중하던 자칭 ‘친박 핵심’들의 어리석음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박근혜 정권의 실패 요인을 따지자고 들자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박근혜 정부 패착의 깊이를 얕게 보아서는 안 된다. 박 대통령 탄핵은 보수정당의 침체된 이념과 언행에 대한 거듭된 좌절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정권의 핵심을 자처하며 으스댔던 친박 핵심들은 아직도 참담한 침묵모드다.보수의 재건(再建)을 위해서는 누구 몇 사람 십자가에 매달고 지나가려는 식으로 얄팍하게 덤벼서는 안 된다. 극우, 수구꼴통, 꼰대, 부자 편, 묻지마 지지 정치꾼들의 족쇄 안에서 역사를 옹졸하게 바라보아 온 그릇된 보수의 이념바탕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친박 아집도 부수고, 비박 핑계도 주저앉혀야 한다. 사람 쫓아내는 혁신은 결국 패싸움으로 번지고 만다. 인적 청산 그게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자유한국당은 존재이유부터 찾아야 한다. 이 시대에 대한민국에 왜 자유한국당이 있어야 하는지부터 철저하게 석명(釋明)해야 한다. 구닥다리 곰팡내 나는 뒤떨어진 논리로 민초들을 더 이상 낙담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대화마저 ‘나라를 통째로 넘긴다’는 깃발부터 내둘러 평화를 갈망하는 대다수 국민들을 아연케 했던 고장 난 시계부터 고쳐야 한다.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현재로서는 절대다수 국민들은 자유한국당이 달라졌다고 믿지 않는다. 아니,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 동안 국민들에게 무릎 꿇어 절하고는 ‘물갈이’ 한답시고 외야에 있는 멀쩡한 신예들 데려다가 바보 강시 꼴 만든 일이 한두 번이었던가. 천하에 제아무리 좋은 인재라고 해도 현재의 한국당 풍토로는 안 된다. 또 다시 썩은 어항에 새 붕어를 집어넣는 초라한 시행착오는 하지 말아야 한다.이제 어설픈 ‘붕어갈이’로 이 땅 보수정치의 위상을 되세울 길은 없다. 시대변화의 조류와 진정한 개혁적 보수의 이상에 맞는 새로운 노선부터 정립해야 한다. 때로는 진보정당들보다도 더 혁신적인 정책들을 어젠다로 설정해 내놓을 수 있는 열린 정치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야당으로서, 정부의 옳은 정책에 대해 때로는 진정성 있는 박수도 쳐야 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의 섬에서 하루속히 빠져나와야 한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물갈이’가 필요하다.민심에 전혀 닿지 않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부터 청소해야 한다. 국민들이 바라보는 지평과 일치하지 않는 안목을 지닌 정당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한번 떠난 민심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은 지금 ‘욕심을 비우면 길이 되고, 미련을 채우면 늪이 되는’ 얄궂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다.

2018-06-25

식언(食言)의 힘

▲ 안재휘논설위원‘망매해갈(望梅解渴)’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AC196년 조조가 완성(宛城)의 군벌인 장수(張繡)를 공격하러 가다가 병사들이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자 갑자기 일어나 “저 산 너머에 매실나무숲이 있다”고 소리를 질러 병사들로 하여금 힘을 내게 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나폴레옹이 알프스산맥을 넘을 때 산 너머에 병사들을 기다리는 아리따운 처녀들과 풍족한 음식이 넘쳐난다는 말로 사기를 끌어올렸다는 비슷한 이야기도 있다. 살다보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황당한 일을 당할 때가 더러 있다. 한반도 평화 구축을 놓고 벌어지는 작금의 사변들이 꼭 그렇다. 전쟁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한다는데,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누군들 마다할 이유가 왜 있으랴. 그러나 지난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결과는 꺼림칙한 느낌을 짙게 남기고 있다.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그 어떤 선지자들도 ‘정치’를 ‘거짓말’이라고 정의하지 않았음에도 현대정치는 경계 없는 식언(食言) 잔치다. 우리는 이미 여러 날을 북한 핵과 관련하여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라는 낯선 사자성어에 중독돼 살았다. 북미회담 당사자들은 세계인들을 향해 하루아침에 북한 비핵화의 기적을 이뤄낼 것처럼 장담해왔다. 하지만 트럼프-김정은 회담의 결과물에서 CVID는 결국 빠졌다. 북한 비핵화의 합의된 타임스케줄도 사라졌다. 도대체 무엇을 이뤘느냐는 회의적인 비판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북미회담 결과는 용두사미(龍頭蛇尾)를 넘어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로 나타난 느낌이다. 왠지 누군가에게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아주 거둘 수가 없는 형편인 것이다.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연초에 ‘경제 우선’으로 통치노선을 바꾼 이래 벌어진 평화무드 속에서 한미 대통령들의 정치적 과장에 휘둘려 우리 모두가 결국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 몰골이었다는 자괴감이 든다. 북한이 느닷없이 핵무기와 미사일, 화학무기 다 내주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들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란 사실상 추호도 있지 않았다.한동안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평화잔치는 더 큰 숙제를 남긴 채 흘러갔다. 북한은 부지불식간에 ‘핵보유국’이 돼가고 있고, 대한민국은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더욱 더 바짝 붙잡지 않고는 안보를 장담할 수 없는 위태로운 나라로 전락하고 있는 중은 아닐까. ‘우리도 핵보유국 이 돼야 한다’는 담론마저 자취를 감춘 대한민국은 강대국의 체스판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희생양 꼴이다.지방선거를 지나고 나니 또다시 국민들의 마음을 뒤흔든 무수한 ‘식언’들이 고약한 찌꺼기처럼 남아 있다. 선거에 나선 사람들이 표심을 현혹하기 위해 마구 내던져놓은 숱한 약속들 중에는 또 얼마나 많은 헛말들이 있을 것인가. 그 가짜약속들이 만들어낼 모순은 가차 없이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 것인데, 벌써부터 걱정이다.‘한미연합훈련 중단’이 또다시 이 나라 정치권의 최대 논쟁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한 트럼프의 약속을 정당화하기 위한 미국 고위급들의 중언부언도 길어지고 있다. 당사자들의 주장처럼, 북한의 진정성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공이라면 당분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처지가 된 우리 국민들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북한이 ICBM(대륙간 탄도탄) 개발을 그만둔다하니 동맹국 미국이 슬그머니 배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식언‘을 매개로 하여 권력을 쟁취하고, 우격다짐으로 힘을 키워가는 동안 백성들은 점점 더 고달파진다. 이 각박한 시대에 조조는 누구이고 나폴레옹은 또 누구인가. 그 무한대의 모순방정식 안에서 민초들의 삶이 날로 초라하기만 하다.

2018-06-18

‘지방선거’해야 ‘지방선거’된다

▲ 안재휘 논설위원축구선수를 뽑는 선발전을 탁구시합으로 하자하면 어떻게 될까. 탁구선수를 뽑자면서 축구경기를 시키면 또 어떻게 될까. 중앙정치권이 벌이고 있는 대형 정치이슈에 볼모잡힌 야릇한 지방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분위기를 살펴보니 이대로라면 진짜 ‘지방선거’는 애당초 글렀다. 지역일꾼을 뽑는다는 타이틀이 무색하도록, 이번 선거는 정당 하나를 딱 골라놓고 좌고우면할 것 없이 한 줄로 찍어내는 줄 투표로 끝날 공산이 커졌다. 6·13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사전투표율이 각각 20.14%, 21.07%로 마무리됐다. 사전투표소에서 한동안 살펴보니 줄 투표 민심이 여실했다. 늙은 아버지를 투표소에 들여보내며 ‘무조건 ○번만 찍으셔요.’하니까 노인 역시 ‘알았어.’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전투표율을 놓고 여야 할 것 없이 따로 또 같이 ‘환영’일색이다. 동상이몽이든지, 아전인수에 빠져들었든지, 아니면 최소한 모두가 포커 페이스일 것이다.말로는 지역일꾼을 뽑는다지만,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면면을 거의 알지 못한다. 유권자들이 후보들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옳지 않다. 먹고 살기도 바쁜 힘겨운 시절에 선거에 나선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시시콜콜 톺아볼 여력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 기회, 그런 분위기는 국가와 정치권이 만들어줘야 마땅하다.후보들의 유세를 ‘소음’이라며 못견뎌하는 유권자들이 많아졌다. 두고두고 실망만 덧내오던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짜증이 투영된 결과일 것이다. 지역발전이 절실하네, 분권이 필요하네 어쩌고 백날 떠들어봤자 귀담아 듣는 이가 없다. TV를 비롯한 온갖 매체들은 북미회담, 대한항공, 드루킹, 재판거래가 어쩌고…지역의 현안에는 닿지 않는 별나라 담론들로 가득찬 뉴스만 줄창 나온다.입으로만 ‘지방선거’라고 부를 따름, 중앙정치권부터 제대로 된 ‘지방선거’를 치를 의지가 없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기에 적당히 편승하기만 해도 승산이 높다는 계산인 듯하다. 더욱이 선거 하루 전날에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고, 이게 이 정권의 혁혁한 업적이라는 감회일 테니 더할 나위 없이 넉넉한 선거판일 것이다.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새 정권으로부터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속수무책 당하는 수난국면 아래에서 문자 그대로 ‘내 코가 석 자’인 신세다. 이처럼 엉뚱한 외생변수가 강고한 판에 지역발전이니, 분권이니 하는 어젠다에 발목이 잡힐 이유도 여유도 없는 게 중앙정치권이다. 어쩌면 계산 빠른 정치권 인사들은 지방선거 이후에 펼쳐질 정계의 진동을 벌써 감지하고 새로운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지역현안에 대한 제대로 된 토론 한 번 열리지 않는 선거가 무슨 수로 온전한 지방선거가 되랴. 자치의식과 능력을 길러낼 시스템조차 제대로 없는 완강한 중앙집권적 통치구조 아래에서 지방분권이란 언감생심 허황된 욕심일 지도 모른다. 지방선거가 중앙정치놀음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이 참담할 따름이다. 지방분권을 ‘분열’이라고만 인식하는 중앙정치꾼들의 천박한 인식 안에서 이 나라의 지방자치는 여전히 초라하기 짝이 없다. 우리 스스로 깨어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중앙정치논리 따위 다 물리치고, 요 며칠만이라도 정당이름 다 잊어버리고 지방선거에 나선 후보들 중 지방자치의 대한 신념과 자질과 비전을 제대로 갖춘 인물이 누구인지 세세히 짚어보면 안 될까.축구선수를 뽑는데 탁구실력을 견주고, 탁구선수를 뽑기로 해놓고 축구실력을 비교하고 있는 이 지독한 모순으로부터 탈출할 용기를 아주 놓아선 안 된다. 전국이 골고루 잘 사는 나라가 돼야 민주주의가 비로소 완성된다는 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어려워도, 유권자가 ‘지방선거’를 해야 ‘지방선거’가 된다.

2018-06-11

대법관들의 이상한 침묵

▲ 안재휘논설위원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핵폭탄’이 등장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세 기둥 중의 하나인 사법부의 중추 대법원이 무참히 흔들리고 있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나서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강제 수사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법치’의 기본은 사법부에 대한 ‘무한 신뢰’다. 법원의 중립성과 판사의 양심이 의심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란 한낱 허울에 불과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은 조사결과 보고서에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판사 사찰과 재판 개입 등을 시도한 정황이 발견됐다고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지난 2014년 하반기부터 본격화한 상고법원 설치 안에 비판적인 판사들을 감시하고, 특정 재판에 대해 청와대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억장이 막힌다. 나라가 제아무리 허술하여 행정부가 정치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입법부가 밤낮 멱살잡이만 한다 하라도 법원은 절대중립을 지키고 원칙을 고수해야 하는 최후의 보루 아닌가. 이 기막힌 소동을 놓고 여지없이 세상은 또 두 갈래로 갈렸다. 한 쪽은 사법개혁의 당위성을 말하고, 다른 한 쪽은 사법부 장악음모라고 외친다.작금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는 현상처럼, 이 사건의 모양새 역시 ‘항명’의 이미지를 감수하는 내부고발자의 모습으로 ‘투사’적 행태를 보이는 판사가 있다. 얼마 전 일선검사가 검찰총장을 향해 반기를 드는 일로 세상이 어지럽더니, 이번에는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의 차성안 판사가 나서서 불법사찰을 당했다며 끝장을 보겠다는 식으로 할 말 못할 말 다 내뱉는 결기를 보이고 있다.차 판사는 특조단의 조사보고서 발표 직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특조단이 형사고발 의견을 못 내겠고, 대법원장도 그리하신다면 내가 국민과 함께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다른 판사들도 차 판사의 의견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 뒤따른다. 이쯤 되면 법원을 중심으로, 이 나라의 사법기관에 ‘혁명’정국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위계질서 따위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난센스다.법관의 판결을 놓고 가타부타 떠들어대고, 그 이면에 무슨 거래가 있다고 악악대면서 전임 대법원장을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외쳐대는 나라가 온전한 나라일 수는 없다. 이 사태의 핵심은 두 갈래다. 그 하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에 사법부가 청와대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냐 아니냐다. 두 번째는 결과적으로 그 거래가 재판관들의 판결에 영향이 미쳤는지의 여부다.우리가 이 혼돈의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대법원 판사들이 재판거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이 입증되는 것뿐이다. 만약에 박근혜 정권 때 대법원이 통진당, 전교조, KTX 해고 재판 등 논란이 있는 판결을 놓고 거래를 했다는 의혹에 티끌만큼이라도 진실이 있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법치국가가 아니다. 그 어떤 재판도, 그 어떤 판결도 정당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일부의 반발처럼 이 소동에 사법을 장악하기 위한 권력의 음모와 작전이 추호라도 개입돼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행태야말로 나라를 말아먹을 농단이요 중대범죄일 것이다.이 시점에서 국민들의 궁금증은 대법관들의 입장에 쏠려 있다. 사법부 핵심 속살의 실체적 진실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들이 그들인 까닭이다. 그 시절을 직접 경험한 대법관 7명이 먼저 입을 열어 양심을 밝혀야 한다. 전임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줄줄이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는 날에는 나라꼴이 절단나고 말 것이다. 충역(忠逆)을 가르는 시퍼런 칼날 위에 이 나라 사법부가 위태로이 서 있다.

2018-06-04

7천7백만의 ‘롤러코스터’

▲ 안재휘논설위원북한의 대외 협상기술은 ‘벼랑 끝 전술’로 통칭된다. 외교를 포함한 모든 대외 현안에서 북한 대표들은 극언을 넘나든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서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효력을 보아왔다. 한마디로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상태에서 북한의 행악질은 번번이 먹혔다. 북한은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전쟁의 피해와 고난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패악을 당하고도 매번 유야무야 넘겨왔다. 오는 6월 12일로 예정된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요 며칠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어지럽기만 하다. 예외 없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김정은과 ‘미치광이 전술’로 대응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결은 일단 미국의 승세로 귀결됐다. 김정은이 중국 시진핑에게 뭔가 언질을 받고 난 다음 태도가 돌변해 사달이 났다는 것인데 자세한 내막은 아직 모른다.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 취소를 전격 발표하자 놀란 북한의 황급한 태도 변화가 있었고, 그리고 트럼프의 회담취소 번복 소동의 끝자락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극비리에 다시 만났다. 그야말로 남북한 7천7백만 겨레의 생살(生殺) 희비가 롤러코스터 위에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다.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장 요긴한 것은 ‘냉정’이다.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일희일비하여 운전대를 좌우로 급변시키는 행위만큼 위험한 짓은 없다. 문제의 근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가장 적절한 선택지를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야 정치권이 보여주고 있는 기울어진 해석과 대응들은 국민 불안을 키운다. 정부여당은 다분히 ‘감상적 낙관’일색이고, 보수정치인들은 지나친 비토로 ‘반 평화 세력’ 이미지만 키우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세상 그 어떤 문제보다도 복잡하다. 평화무드 속에서 나오는 키워드란 하나 같이 고도의 난제다. 우선 우리가 소원하는 ‘북한의 비핵화’만 해도 그렇다. 북한은 미군철수를 위해 기만전술을 펼칠 뿐 절대로 비핵화를 단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을 명쾌하게 뒤집을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북한 체제보장’이라는 약속과 ‘북한을 한국처럼 번영토록 할 것’이라는 비전도 결코 병존할 수 없는 조건이다. 세계 유일의 가혹한 독제체제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번영을 일군다는 말인가. ‘인권’ 문제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위태로운 화약고다. 강제수용소 따위 북한 정권이 쌓아놓은 ‘반인권(反人權)’ 적폐부터 난공불락이다. 외부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벌집 쑤시기나 다를 바 없다. 완전히 깨질 것 같던 북미정상회담이 극적으로 회복양상으로 돌아온 것은 다행한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6일의 긴급회동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시점에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말하고 있는 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 전 공사는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25년 전부터 악용해온 시간 끌기 명분이라고 정의한다.한반도 평화의 앞길에 수많은 모순과 난제가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북 간, 또는 북미 간 대화를 지나치게 부정적 시각으로 평가절하하는 습성을 경계해야 한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의 말처럼 ‘회담이 깨질 것 같으면 박수 보내고 성사될 것 같으면 야유를 보내는’ 수준의 야당노릇은 개선돼야 한다.물론 더 큰 숙제가 있다. 시대착오적인 획일 전제주의의 유치한 눈으로 남한의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를 해괴한 욕설을 앞세워 사사건건 시비하는 북한의 못된 ‘벼랑 끝 전술’ 버르장머리를 고쳐내는 일이다. 침착하고 차가운 가슴으로 이 역사의 벼랑길를 기어이 넘어가야 한다. 7천7백만 겨레의 안온한 삶을 보장해내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소명인 까닭이다.

2018-05-28

비상식의 ‘난장(亂場)’

▲ 안재휘 논설위원세상이 온통 ‘몰상식’으로 넘쳐난다. ‘한미군사훈련’을 용인한다던 북한의 생트집 뒤집기 버릇이 도졌다. 경찰이 굼벵이수사로 증거인멸 시간을 한껏 벌어준 ‘드루킹’ 사건을 파리 한 마리에 비유하던 집권여당은 ‘특검’ 이슈 앞에서 하염없이 잔꾀를 부리고 있다. 대기업 노동자들은 길거리로 뛰쳐나와 ‘총수 퇴진’을 외친다.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온 대한민국을 지탱해주는 가장 강력한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상식(常識)’이다. 우리가 가진 상식 중의 으뜸은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핵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을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삼은 탁월한 선택이 오늘날 이 나라의 번영을 담보해왔다.지난 3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김정은으로부터 직접 한미 연합훈련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받았다고 전했다. 4월에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고,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감동적인 약속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일부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굳이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꺼내지 않은 것은 앞으로 남한 내의 진보좌파들이 대신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북한이 남북 고위급회담을 걷어찬 것이 태영호 전 북한공사가 출간한 책 ‘태영호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태영호를 추방하자’는 청원이 나돌기 시작했단다.경찰이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의 대북전단 살포를 막아내기 위해 전전긍긍이다.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 정부여당이 진력하고 있는 시점에 태영호 전 공사가 책을 펴내어 북한 권부의 실상을 까발리고, 대북 전단지를 굳이 날려보내는 일이 야속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추방하자고 외치거나, 힘으로 막아서는 일은 자유민주주의 상식에 어긋난다.2016년 4월 집단 탈북한 북한식당 여성 종업원들의 탈북이 국정원의 기획탈북이었다는 폭로가 나온 후 통일부의 말이 확 바뀌었다. 탈북종업원들과 북한에 억류 중인 우리 국민 6명의 교환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나돈다. 그 일이 정권을 위한 국정원 공작의 결과물이었다면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통일부의 입장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히는 건 납득이 안 간다.상식에 안 맞는 현상들 중에 ‘드루킹 사건’보다 더 야릇한 일은 없다. 드루킹이 한 언론사를 통해서 ‘탄원서’라는 이름의 폭로폭탄을 터뜨렸다. 검찰마저 “드루킹 등이 작년 1월경 ‘킹크랩’을 구축한 후 이때부터 뉴스 댓글 순위를 조작해 여론이 왜곡된 사태가 이 사건의 실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청와대는 아직도 “정부여당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대한항공(KAL) 직원들이 도심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경영권 박탈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물벼락 갑질’ 논란 이후 사법기관과 언론이 이 잡듯이 찾아내고 있는 대한항공 사주일가의 ‘갑질’ 행각은 국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직원들이 길거리에 나서서 ‘사주 퇴진’을 외치는 일은 ‘자본주의’의 기본질서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다.상식이 이렇게 흔들려서는 안 된다. 북한이 교졸하고 어이없는 핑계로 국제합의를 순식간에 뒤집어엎은 사례는 한두 번이 아니다. 성과에 갈급한 나머지 북한에 무한정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댓글 조작으로 국민여론을 오도한 사건을 왜곡하여 오만가지 궤변으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정치는 삼가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포퓰리즘 강풍은 하루빨리 중단돼야 한다. 비상식의 난장(亂場),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이 난세(亂世)를 위탁한 민심은 없다.

2018-05-21

숨어있는 ‘드루킹’이 더 문제다

▲ 안재휘 논설위원자유한국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제주도지사 재선에 도전하고 있는 원희룡 후보 측이 “제주에도 드루킹이 있다”는 흥미로운 발표를 내놨다. 더불어민주당 문대림 후보 관련 특정 기사의 조회 수와 댓글 추천 수 등을 누군가가 조작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문 후보에게 유리한 것 같은 기사에 대해 작금 국민들의 촉각이 쏠려 있는 네이버(NAVER)에서는 댓글이 단 7건 뿐인 반면, 다음(Daum)에서는 무려 6천여 개가 달린다는 사실을 사례로 들었다. ‘드루킹 사태’는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의 단식투쟁까지 불러온 이 나라 정치권을 덮친 심각한 먹구름이다. 합법적인 ‘여론형성’과 불법적 ‘여론조작’ 사이의 모호한 공간을 파고드는 새로운 형태의 진화된 선동술책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음이 자명하다. 인터넷 댓글의 영향력은 ‘거름 지고 장에 간다’는 전통적인 군중심리와 정확하게 연동된다. 그 힘은 대세를 무턱대고 따르는 ‘밴드왜건(Band wagon) 효과’로 나타난다.인터넷 댓글 조작의 영향력은 일대 유행하고 있는 여론조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무응답이나 답변거부 비율이 반영되지 않는 여론조사 결과는 민심을 오도하는 심각한 폐해를 낳는다. 그 치명적인 부실 문제를 지적하면, 여론조사 맹신자들은 ‘트렌드(추이)만 참고하면 된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실제로 백분율로 발표되는 숫자가 가져오는 착시와, 그에 따른 밴드왜건 현상은 결정적이다. 사람들은 여론조사 숫자에 무한히 휘둘린다. 그 단세포적인 착각과 오신(誤信)의 허점을 파고드는 기술이 댓글공작이다. 유권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인 여론조사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중대하게 그르치고 있는 셈이다. 인터넷에서 무차별로 달라붙는 댓글의 숫자와 내용에 자신의 판단을 맡기는 현상의 허점을 여론조작의 기술이 순식간에 파고들어 선택지를 장악해가는 시스템인 것이다.댓글조작의 1차 먹잇감은 여론조사다. 댓글공작에 영향을 받은 여론조사 결과는 곧 밴드왜건 효과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투표에서 조작된 민심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이 메커니즘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정치인들이라면 다 알고 있다. 지난 정권의 불법 댓글부대 운영이 이를 증명한다. 이제 민간 차원의 댓글 장난과 여론조작의 먹이사슬에 대해서 우리는 끈질기게 추궁해야만 한다.시대가 바뀌었을 뿐, 신성해야 할 국민들의 선택이 여전히 그렇게 저열한 음모에 의해서 조작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영향력이 막강해진 인터넷 공간의 또 다른 여론주도 권력이 더러운 거래에 혹하는 한 이 나라 민주주의에는 희망이 없다. 우여곡절 속에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발전시켜온 현대 민주주의의 결실들이 고작 교졸한 인터넷 여론조작의 산물이라면 참기 어려운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는 ‘드루킹’ 사건을 보면서 ‘빙산의 일각’을 상상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이다. 아직 안 들킨 수많은 드루킹들이 어둠 속에서 여론조작의 새로운 기법 개발에 몰두하고 있을 것을 상상하면 소름이 돋는다. 댓글을 조작하는 세력을 알면서도 댓글의 정량평가만을 통해 뉴스밸류를 마구 매긴 포털의 몰상식 또한 철저히 따져봐야 할 병폐다.‘드루킹 사태’는 대한민국 정치권과 언론계는 물론, 나아가 국민 전체를 바보로 만든 엄청난 대사건이다. 드루킹은 청와대가 자신의 인사 청탁을 받아주지 않자 서슴없이 칼끝을 정반대로 겨누어 찔렀다. 여론조작에 확신이 없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행동이다. 전례없는 한반도 평화무드가 ‘드루킹’사건을 순식간에 망각의 늪으로 밀어 넣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건강한 미래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냥 묻어놓고 갈 일이 아니다. 또 다른 드루킹들이 여전히 암약하고 있을 여론시장의 음험한 뒷골목은 오늘 정말 괜찮은가.

2018-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