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긴급 성명발표가 예고된다. 온 국민의 촉각이 집중된 가운데 대통령이 마이크 앞에 선다.
“저는 오늘 이 시간부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겠습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증폭된 저와 제 측근들에 대한 온갖 의혹을 전면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목과 질시로 인해 두 쪽으로 갈라진 조국의 극한혼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기에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자 합니다. 진실여부를 떠나서, 이 혼란상은 모두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이 시간 이후 각계각층이 일체의 갈등과 앙금을 씻어내고 대한민국이 화합 속에 평화롭기를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국민들이 꿈꾸고 있는 `홍해의 기적` 같은 상상 중 하나다. 파멸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아무리 둘러보고 머리를 쥐어짜내어 보아도 길이 없다. 헌재 결정 이후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 나오고 있는 `낙관`은 그 어느 것도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의 98주년 3·1절 기념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들지 못했다는 소식은 참담하다. 내란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국기마저 정쟁의 상징물이 된 역사는 없다. 국경일에도 `태극기`를 마음 편히 들거나 게양하지 못하는 희한한 일은 오늘날 우리가 맞닥트린 분열상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대변한다. 우리에게 `태극기`란 어떤 존재인가. 1882년 미국과 수호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국기가 처음 제정됐다. 같은해 9월 수신사로 일본으로 향하던 박영효는 고종의 명을 받아 배 위에서 태극문양과 그 둘레에 건곤감리 4괘를 그려 넣은 국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태극기는 머지않아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처절한 탄압의 대상물이 된다. 삼일절은 바로 참혹한 태극기 수난사의 시발점이다. 고종의 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과 함께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시작됐다.
일본의 기록은 당시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1천542회나 벌어졌고, 참가인원은 202만3천89명, 사망자수가 7천509명에 이른다고 쓰고 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가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전몰장병은 또 얼마인가. 태극기에는 피흘려 지킨 이 나라의 숭고한 역사와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탄핵 이슈를 놓고 주말마다 벌어지는 극단적인 두 집회의 이름이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로 명명된 것은 비극이다. 촛불이 담고 있는 염원과 태극기가 담고 있는 애국은 결코 대립의 개념일 수가 없다. 많은 국민들은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왜 태극기를 들지 못하는지, 태극기 꼭대기에 왜 기어이 노란 리본을 묶어 매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태극기집회`에는 왜 촛불이 금기시돼야 하는지도 납득하지 못한다. 해를 넘겨가며 확대돼온 국론분열과 대치 양상의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혹자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어른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이는 4류에 머물고 있는 수준미달의 정치가 문제라고 말한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혼란의 핵심 원인은 이 나라에 참다운 `애국자(愛國者)`가 없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순국하신 애국 열사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아신다면 피눈물을 흘리실 것이다. 일체의 사(私)를 버리고 나라를 위해 영육을 희생하신 그 분들의 눈에 작금의 이 나라 꼴은 얼마나 절망적일 것인가. 오늘날 칼끝대치 국면에서 사심을 버리고 먼저 물러서는 지도자가 진정한 애국자다. 태극기와 촛불을 함께 들고 길거리에 나서는 감격의 날을 꿈꾸는 국민들의 갈망이 부디 헛된 망상이 아니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영원히, 태극기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는 국민으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