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에 발표된 김정은의 신년사에는 ‘핵보유국’이라는 자만심의 여유가 한껏 묻어났다. 이탈리아산으로 추정된다는 초호화 가구가 배치된 거실에 앉아서 성명서를 읽는 방식으로 진행된 신년사 낭독은 그 형식부터가 생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화판 거실에 앉아서 읽는 그 형식만 바뀌었지, 신년사 내용에는 우리가 걱정해야 할 대목들이 즐비하다. ‘평화’는 낭만적인 의지만 갖고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현실을 다시 한번 깨우쳐준다.
김정은은 우리에게 지난 9월의 남북 군사합의서의 범위를 훌쩍 넘은 군사적 요구부터 해왔다. ‘외세’와의 군사훈련 중단과 ‘외세’로부터의 전략자산을 포함한 전쟁 장비 반입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그가 줄기차게 주장해온 ‘조선반도 비핵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서를 제공한다. 그가 말하는 비핵화는 문재인 정부가 애써 의역해온 ‘북한 비핵화’가 아니다. 여차하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을러대는 대목에서는 늑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쩍 빛난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에 대해서 그는 ‘무조건적이고 대가 없이’라는 표현을 동원했다. 연평도 포격과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 비극을 영 잊어달라는 이야기다. 남북대화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나오나 간 보려는 제안임에 틀림이 없다. 판을 깨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몰린 우리 정부 입장은 무엇인가.
미국에는 비핵화와 관련해서 성의를 보였으니 결단을 내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핵 리스트 제출은커녕 풍계리 핵실험장 갱도 입구 폭파 쇼 이후 폐기에 대한 검증 사찰조차 수용하지 않는 그들이다.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을 선포했다”는 대목은 스스로 핵보유국임을 자랑하는 말로 들린다.
시중에는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단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송곳니를 쉽사리 뽑아줄 리 만무한 늑대의 본능을 이제서야 깨달아가고 있는 셈이다. 결국, 답은 하나밖에 남지 않을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대한민국이 전략핵무기를 확보하는 것 말고 무슨 해법이 있나. 국수주의로 돌아가는 수상한 미국을 언제까지 믿어야 할 것인가.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양치기들이 말 못 할 수난을 당하고 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특별감찰반원이었던 검찰 수사관 김태우의 ‘민간인 사찰’ 폭로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 사정(司正) 게임을 벌여온 문재인 정부에 치명타다. 기획재정부 전 사무관이 까발린 청와대의 민간기업 인사개입, 적자 국채발행 압력 의혹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메시지는 팽개치고 메신저들을 맹폭하는 행태가 한없이 모질다.
청와대는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검찰 수사관에게 대뜸 ‘미꾸라지’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공격했다. 야당 쪽에서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겨냥해 ‘미꾸라지 도매상’이라는 반격을 퍼부었다. 청와대에서 일하는 한 특감반원이 행사한 권력은 ‘청와대가 한 것’으로 정의돼야 한다. 사과 한마디 없이 김태우를 뿔난 미꾸라지 취급하는 태도가 한심하다.
‘늑대의 송곳니를 보았다’고 고백한 양치기 소년의 인격에 마구 칼질을 하는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의 몰인정은 더 기가 막힌다. 손혜원이 신재민을 겨냥해 동원한 인격살인 용어들은 어른의 언어로는 부적합하기 짝이 없다. 내 편이 아니면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막무가내로 물어뜯는 야멸찬 인성으로 어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다닐까 싶다.
사람들은 이제 ‘늑대’를 ‘미꾸라지’라고 우기는 배리(背理)를 방관하지 않는다. 북한을 늑대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서 늑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늑대의 음모를 폭로한 전·현직 공직자들을 미꾸라지라고 매도한다고 해서 늑대의 흉계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정치꾼들의 살벌한 청백전 고질병 앞에서 국민들은 또다시 수상한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 ‘늑대’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