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교수 로이 J. 레위키(Roy J. Lewicki) 등 전문가 5명의 공저 `최고의 협상`은 투쟁적 협상상황에서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전략을 다섯 단계로 설명한다. 첫째 적대감 완화, 둘째 소통강화, 셋째 쟁점의 수와 규모 축소, 넷째 합의근거를 찾기 위한 공통점 확립, 다섯째 바람직한 옵션과 대안 강화 등이다. 사시사철 멱살잡이에 빠져 생산성 빵점짜리 국회운영을 탐닉해온 우리 정치권의 행태에 비쳐보면 한숨이 나올 덕목이다.
정치권은 각 정당이 새 원내대표를 선출하는 등 뜻밖이었던 4·13총선 결과의 충격에서 급속도로 벗어나고 있다. 3당 체제 구축이라는 상황이 강제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정치권을 관통하고 있는 으뜸 화두는 `협치(협력정치)`다. 오랜 세월 투쟁적 협상에만 몰두하던 우리 정치권이 과연 모범적인 협치를 수월하게 이뤄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총선 이후 새누리당은 정진석 당선자를 새 원내대표로 선출했다. 정 원내대표는 선출과정에서 당·청관계의 재정립을 선제적으로 강조했으나, 친박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었다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의구심을 아주 털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4·13총선 직후 석고대죄를 기대했던 국민들은 새누리당의 모습에서 선연한 반성의 이미지를 인식하지는 못한다. 새누리당의 계파전쟁은 불안정한 휴화산으로 비쳐진다.
원내 1당 등극이라는 뜻밖의 선거결과에 달뜬 더불어민주당은 예상대로 주류들이 신속히 `친노본색`을 드러내면서 김종인 대표를 몰아내려는 이른바 `토사김팽(兎死金烹)` 폭풍을 겪었다. 몇 달 더 대표직에 머무르게 하는 것으로 어물쩍 타협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문재인 원톱`체제 구축이 끝난 분위기다. 김종인 대표가 누차 부르짖던 `운동권 행태 청산`도 진작 물 건너간 것으로 읽힌다.
총선에서 의외의 짭짤한 성과를 거둔 국민의당은 오너 격인 안철수 공동대표의 구설수를 중심으로 지지도 폭락이라는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호남 석권을 바탕삼아 3당의 입지를 확보한 국민의당은 그게 아니어도 정체성에 대한 불안정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교육부를 없애버리자”거나 양적완화와 관련한 박근혜 대통령 폄훼발언 등 예상을 벗어나는 안철수 대표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어이가 없다.
국민들은 지난달 선거전에서 각 정당과 정치인들이 내놓은 약속들을 낱낱이 기억한다. 추악한 계파다툼으로 선거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가 여론의 뭇매에 무릎을 꿇던 새누리당의 읍소, `친노 패권주의 청산`이라는 카드로 과감한 혁신을 약속하며 국민들을 한사코 꼬드기던 더불어민주당의 변신술을 기억한다. 호남 민심을 파고들며 `새 정치`의 가능성을 맹약했던 국민의당의 호소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뒤 정치권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국민들의 온갖 기억을 허무하게 한다. 계파갈등 추태를 뼛속깊이 반성한다던 새누리당의 처신에 대오각성의 징후는 흐릿하다. 당내 패권주의를 청산하고 합리적 진보로의 정책지향점 변경을 선언했던 더불어민주당의 최근 흐름은 뻔뻔하기만 하다. 이념적 좌표조차 오락가락하는 국민의당을 이끌고 있는 안철수 대표의 정치행태에 `새 정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마치 사기를 당한 듯한 기분에 빠져드는 국민들이 늘고 있다. 정치권이 `선거가 끝나면 표심을 뭉개버리는` 토사민팽(兎死民烹) 관행에서 벗어났다는 징조는 없다. 정치꾼들은 아마도, 국민들이 조만간 자기들의 추태들을 깡그리 망각할 것이라고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정치권은 과연 원만한 협치의 틀을 만들어낼 것인가. 새로 뽑힌 3당 원내대표들은 진정한 협치의 본질이 `양보(讓步)`에 있다는 진리를 절절히 깨닫고 있기는 할까. 정치권이 적대감을 일소하고 왕성한 소통을 펼치는 `최고의 협상`으로 국민들의 피폐한 삶을 개선시켜 주길 거듭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