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는 고전설화나 동화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이솝은 우화 `토끼와 거북`에서 토끼를 오만하고 어리석은 동물로 등장시키지만 `겁 많은 토끼와 개구리`에서는 맹수 공포에 찌든 나머지 자살하려고 연못으로 몰려갔다 놀라서 달아나는 개구리들을 보고 용기를 얻는 지혜로운 존재로 풍자한다. 토끼는 대체로 유순하고 깨끗하며 귀엽고 예쁘고 나약한 존재의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정치인들은 선거판에서 유권자들을 `토끼`에 비유하곤 한다. `집토끼 단속`이라느니 `산토끼 사냥`이라느니 하는 말을 쓴다. 워낙 예민하여 작은 소리에도 쏜살같이 달아나기 십상인 기질이 유권자의 성향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인 별칭이기도 할 것이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20대 총선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등 거대정당들은 소위 `집토끼`들의 반란으로 애를 먹고 있다.
새누리당은 공천과정에서 불거진 `막장공천`논란으로 심장부인 TK(대구경북)지역에서 이상기류에 휘말려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좀처럼 청산이 안 되는 친노패권주의의 덫에 걸려 갈팡질팡하다가 급기야 분당사태까지 빚으며 혼란을 겪었다. 더민주당은 호남민심을 되잡으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정권교체의 새로운 대안`을 표방하고 나선 국민의당 쓰나미에 휩쓸려 좀처럼 맥을 추지 못하고 있는 양상이다.
사실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인들이 입줄에 올리는 `토끼`표현은 온당치 못한 별명이다. 특히 전통적 지지기반인 영·호남의 지지자들을 `집토끼`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분히 모욕적이다. 우리에 가둬놓은 존재들이니 무슨 짓을 해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방자한 인식의 틀을 대변한다. 선거 때만 넙죽 엎드려 “주인으로 받들겠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고, 당선증만 거머쥐면 곧바로 고약한 갑(甲)질노릇을 일삼는 게 그들의 속성 아니던가.
새누리당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 주연의 `막장공천` 칼춤으로 촉발된 대구 총선은 끝까지 화젯거리다. 대구 유권자들의 노여움을 좀처럼 씻기 힘들어서인지 새누리당 후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사죄문`을 읽었다. 정(情)에 약한 토끼들의 본성을 또다시 흔들어보려는 작심일 것이다. 은퇴한 노정객 박찬종은 한 방송에 나와 이렇게 비판했다. “용서를 빌어야 할 내용이 `공천잘못`이라면 사죄가 아니라 `사퇴`하는 게 맞지 않나요?”
공당(公黨)의 잘못된 공천으로 후보자가 된 사람들이 엎드려서 빌어야 할 원죄란 무엇인가. 그 잘못을 광정할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또다시 `권력의 칼`을 쥐게 해달라고 엎드리는 행위는 과연 합리적인가. 서청원 최고위원은 새누리당 후보들이 엎드려 사죄문을 읽은 직후에 대구에 찾아와 “피해자는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외쳤다. 대구민심의 혼돈은 최저점을 찍은 사전선거 투표율이 여실히 반증한다.
20대 총선 선거판에서 일어나고 있는`토끼`들의 반란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유권자들은 지금 터무니없는 지역감정의 포로가 돼 어떤 깡패 짓을 하더라도 용서하고 권력을 갖다 바치는 `집토끼`취급에 넌더리가 났다. 나라 곳간이야 거덜나든 말든 온갖 감언이설로 표 구걸에 나선 정치인들의 후안무치한 언행에 `산토끼`들도 단단히 뿔이 났다. 완강한 카르텔을 무기로 공고한 권력을 탐닉하는 패거리정치를 향해 레드카드를 내밀고 있다.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유권자는 결코 `토끼`라고 일컬어져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이 `토끼`가 되고, 유권자가 `호랑이`로서의 존엄을 인정받는 나라가 참 민주국가다. 이번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을 힘없는 `토끼`로 무시하면서 무단히 `호랑이`노릇을 해오던 인사들부터 가려내야 한다. TK선거 결과가 전국적으로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최소한,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끈질긴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가 관전 포인트다. TK유권자들은 살아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