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축구역사는 거스 히딩크(Guus Hiddink) 이전과 이후로 나눠 기록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2002월드컵 4강 신화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우리 축구가 국제무대에서 줄곧 `뻥 축구`로 남우세를 당해온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냈다는 사실이다. 히딩크는 명성이 아닌 실력과 상태만으로 선수를 뽑았다. 운동복을 빠트리고 연습장에 나온 한 스타플레이어를 그가 끝내 외면한 일화는 유명하다.
뿐만이 아니었다. 히딩크는 포지션별로 선수들을 복수로 선발해 공정하면서도 혹독한 경쟁을 시켰다. 내부긴장 강화로 실력향상은 물론이고 주전선수 부상에도 대비했다. 그는 `경쟁이 없으면 경쟁력도 없다`는 진리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수십 년 고질적 병폐였던 축구계 파벌주의를 얼씬도 못하게 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훈련을 실시한 것이 월드컵 4강 달성의 진짜 비결이었던 것이다.
새누리당이 공천특별기구를 구성하고 내년 4월 치러질 20대 총선의 준비 작업을 본격화했다. 새누리당 공천을 둘러싸고 당 안팎에서는 `험지출마론` `전략공천``우선추천``계파안배` 등의 낯익은 용어들이 산발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전략공천`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략공천`이라는 이름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치졸한 당쟁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몹시도 따가웠던 모양이다.
대신 새누리당은 지난해 2월 개정된 당헌 103조의 규정을 구실로 `전략공천`이라는 말을 슬며시 `우선추천`이라는 말로 바꿨다. 워낙 교졸한 말장난으로 국민들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일에 이골이 난 정치인들이라지만, 국민들 귀에는 `둘러치나 메치나 마찬가지`인 궤변으로 들려온다. 용어 하나 슬쩍 바꿔 입에 물고서는 또다시 낯 뜨거운 학살을 음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거둬지지 않는다.
사실 `전략공천`이라는 본질적 개념은 선거에서 대단히 유효한 작전용어다. 여권 일각에서 이어지고 있는 `험지 출마론`이야말로 전략공천의 정확한 의미에 맞닿는 아이디어다. 총선은 의회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의 권력지도를 만드는 최고의 결전장이다. 의석 하나하나가 정당의 미래 정치력과 직결된다. 한 자리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이기는 게임`을 시도해야 한다.
김무성 대표가 “전략공천은 없다”는 공언을 거둬들였다는 뉴스는 없었다. 그런데 새누리당 공천특별위원장인 황진하 사무총장은 “대구·경북(TK)도 우선추천 지역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결선투표제 역시 “최고위원회의 제안일 뿐 도입이 확정된 건 아니다”라고 밝혔다. 공천작업을 막 시작한 새누리당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변화 조짐을 느끼게 하는 발언이다.
하지만, 황 사무총장의 발언을 당헌 규정에 맞춰보면 어긋난 부분이 확연히 드러난다. 당헌에 명시된 `우선추천` 조건은 `여성·장애인 등 정치적 소수자의 추천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한 지역`과 `공모에 신청한 후보자가 없거나, 여론조사 결과 등을 참작하여 추천 신청자들의 경쟁력이 현저히 낮다고 판단한 지역` 두 가지로 한정돼 있다. 어디에다 꿰어 맞춰 봐도 TK지역은 해당사항이 없다.
말이 공천이지, 실상은 본선이나 다름없는 새누리당의 TK공천은 4월 총선을 앞두고 치러지는, 집권당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예고편이다. TK공천을 얼마나 공평무사하게 치러내느냐 하는 성적표는 곧 새누리당의 미래를 결정짓는 척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불편부당한 민주적 공천절차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저급한 파벌주의를 일체 배격하고, 치열한 경쟁으로 진정한 경쟁력을 키워 대한민국의 축구 위상을 몇 단계 끌어올린 히딩크의 성공열쇠를 우리 정치권이 반추해볼 가치는 이미 충분하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패거리정치의 볼모가 되어 유치한 `뻥 정치`로 국민 골칫거리로 남아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