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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식중독

이번 명절에는 소위 역귀성이라는 걸 했다. 새벽에 출발해서 그런지 정체 구간 없이 수월하게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사정이 달랐다. 오후 한 시 쯤에 나섰는데 열 시간 꼬박 도로에만 갇혀 있었다. 운전하는 남편에 대한 배려도 없이, 원 없이 자고, 인터넷 검색도 하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었지만 시간이 남기만 한 귀갓길이었다. 귀성이든, 역귀성이든 이제 명절 교통 체증은 당연한 것이 되어가나 보다. 너무 늦은 귀갓길이라 각각 당신들 댁에 머물고 계신 어머님과 친정 엄마께 들른다는 계획은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날 두 분을 뵈러 다시 대구로 출발했다. 느끼한 명절 음식에 길들여진 입맛을 되살리는 데는 회가 제격이다 싶어 포장 주문해 갔다. 어른들이 좋아하기도 하지만, 따로 요리할 필요도 없는 편리한(?) 효도법이기도 했다.느끼하던 입안이 개운해졌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모두 난리가 났다. 구토, 설사, 오한, 근육통, 고열, 두통 등이 차례로 이어졌다. 회를 먹은 십여 명 대부분이 두어 시간 만에 이런 증상에 시달렸다.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지사제와 항생제를 처방받거나, 밤새 움켜쥔 배를 안고 온 방안을 누비거나 했다.무엇보다 두 어른과 친구분들께 너무 미안하고 맘이 불편했다. 항생제를 덜 쓴 횟감이 오면 그럴 수 있다면서 횟집에서도 사과를 해왔다. 그쪽에서도 의도적으로 폐 끼치자고 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그 횟집을 찾진 않겠지만 왜 그런 생선을 썼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이틀 꼬박 앓으면서 생각한다. 선의의 행동에도 오류가 따를 수 있다고. 그 오류는 우연에 의해 생기지만 그 파장은 의도하지 않게 커질 수도 있다고. 세상일은 절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저마다 최선을 다하지만 우발적 상황에 따라 우리 일상은 휘어지고 꼬일 수 있다. 닥치면 당해야만 하는 치명적 우연이 우리 삶을 관장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다. 조심만으로 안 되는 게 세상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5

공짜는 없다

미국 격언에`There is no free lunch`라는 말이 있다.`프리 런치`란 서부 개척시대에 술집에서 내놓던 점심을 말한다. 일견 공짜로 보이지만 실은 비싼 술값 안에 끼니 값까지 포함되어 있다. 모 경제학 책에도 이런 예화가 나온다. 경제에 대해 알고 싶은 왕이 학자들에게 책을 쓰라고 지시했다. 수십 권의 완성된 책을 보자 질려버린 왕은 한 권으로 줄이라고 했다. 그것도 길었다. 단 한 줄로 줄이라고 하자 배고팠던 학자들의 요약문은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것이었다나.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거절을 못하거나, 순간의 판단 실수로 공짜에 혹할 때가 있다. 유명 대학 음료 사업부라며 콜 센터 직원이 몇 차례나 전화를 걸어온다. 내가 속한 모임에 판촉 행사 차 직원이 잠깐 들르겠단다. 십여 분 시간만 내주면 되고 부담 느낄 필요가 없는데다 점심 도시락까지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짜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마라고 약속을 해버렸다.일식 도시락 앞에서 판촉 직원이 멘트를 한다. 그 어떤 강매도 강압도 없었다. 나름 정중했다. 난공불락인 아줌마 고객들을 상대로, 한 가계의 책임자이자 직장인인 그가 최선을 다한다. 맘이 짠하다. 눈치껏 주변을 살피니 다른 사람들 맘도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 블루베리 음료를 무턱대고 사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어릴 적 제 아비를, 지금의 제 남편을 보는 것 같은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목도한 우리들은 도시락에다 코를 박은 채 별 말이 없다. 이런 먹먹한 분위기였으면 차라리 만날 약속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었다. 반도 비우지 못한 각자의 도시락을 밀어낼 때, 단내 나는 판촉남, 아니 한 집안 가장의 말끝이 흐려지고 손끝 또한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코 공짜 점심은 없었다. 여태껏 먹은 밥 중 가장 값비싼 것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 한 끼의 점심./김살로메(소설가)

2012-10-04

개천절

알고 지내는 필리핀 친구가 있다. 귀화한 지 몇 년 되었는데 타국에서 온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 우리말이 서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우리 역사와 문화에도 낯설다. 그녀가 묻는다. 개천절이 뭐냐고? 모국어를 맘대로 구사하는 사람들끼리도 개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난감한데, 이방인 출신이 진지하게 물어오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단군이 최초로 우리나라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뒤통수가 당긴다. 평소 그런 순수한 의미보다는 합법적 공휴일이구나, 하는 실리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필리핀에도 독립기념일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것이냐고 묻는다. 애매모호하기만 한 광복절이란 이름이 그들의 독립기념일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개천절은 오롯이 제 정체성을 살피는 것과 연관이 깊다고 내가 말한다. 유수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 않으면 갖기 힘든 뼈대 있는 기념일. 하지만 그 진중한 의미를 정작 우리는 잊고 산다.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최초의 국가 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한 날이 개천절이다. 하지만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의 본뜻은 100여 년 앞선 기원전 2457년 환웅 시대로 소급된다.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의 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날이 음력 시월상달 초사흗날이었다. 상달은 으뜸달을 말하는데, 풍요와 수확의 계절인 시월이 상달이 되는 건 당연했다.개천절은 이처럼 건국 신화의 경축일이자,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근거하는 자긍의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시월상달은 당연히 음력이었겠지만 그것을 따지는 건 단군 이야기가 신화냐, 역사냐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일반 시민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일 년에 한 번쯤 되새겨 보는 날은 필요하다. 그런 자긍의 뿌리가 올해로 4345년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2

프라이데이와 방드르디

책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 이름을 참 센스 있게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모험 항해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가 그런 경우이다. 앞부분의 항해와 난파 과정, 무인도 표류와 정착 분투기 등은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오직 프라이데이가 나오는 장면부터 눈길이 확 끌린다. 금요일에 발견하였다고 이름마저 프라이데이인 로빈슨 크루소의 충직한 노예. 로빈슨 크루소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림자 역할에 머문 프라이데이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갈증을 성찰한 작가 미셀 투르니에가 전혀 다른 프라이데이를 창조해냈다.`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란 재구성 소설을 내놓은 것이다.18세기 초, 로빈슨 크루소가 나온 당시는 백인과 영국과 문명인과 기독교가 세계관의 기준이 될 때였다. 그러니 계몽주의적 입장을 가진 그들은 자기들 기준 밖의 것은 모두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다. 흑인 원주민 프라이데이가 주체성을 확립할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패러디 작에서는 프랑스 말로 금요일에 해당하는 `방드르디`란 이름이 프라이데이 대신 등장한다.프라이데이가 단순하고 착한 노예였다면 방드르디는 당당하고 천진난만한 주체자였다. 프라이데이가 수동성을 의미할 때 방드르디는 능동성을 부여받았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투르니에 작품에서는 방드르디의 협력자이자 야만의 자연인으로 순응한다. 세계관의 전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상에 미개와 문명의 경계가 어디 있냐고 질문해주는 것 같아 후련했다.우리가 문명이라고 말할 때 그 구분법은 휘파람 부는 날의 미세한 심장의 떨림을 알아차리는가, 개미에게도 그들 고유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바람 부는 언덕의 풀냄새만으로도 공기의 흐름을 눈치 채는가 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가늠자를 들이대 줄 나만의 `금요일`을 찾아 옷깃 한 번 여며 보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8

단춧구멍에 들꽃을

왜 이렇게 생겨 먹어서 사람들과 충돌만 일삼는 거지? 왜 선생님과 사이는 좋지 못하지? 왜 급우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서먹서먹하기만 하지? 왜 선생님들 하는 짓이 다 우스꽝스럽게만 보이지? 왜 얌전한 모범생이 되지 못하고 시 나부랭이나 끼적이다가 놀림감만 되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청소년기는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찼으리라. 그의 중편 소설`토니오 크뢰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하다. 그 은밀한 고백 밑바탕에는 평범한 시민성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의 고뇌가 숨어 있다. 토니오는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인데다 깊이 보고 자세히 본다.동급생 미소년 한스를 해바라기하지만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라는 가혹한 교훈을 얻을 뿐이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소녀 잉에를 맘에 품지만 상대는 악의 없이 무심할 뿐이다. 평온하고 건전한 시민을 대표하는 한스나 잉에는 예술가적 기질로 길 잃은 시민이 되어버린 토니오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겨우 열네 살에 토니오는 자신의 길이 평범한 시민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각한다.정돈되고 명상적인 부르주아 아버지와, 자유롭고 정열적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운명적으로 시민 계급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에 방황할 수밖에 없는 토니오 크뢰거. 그는 두 세계 중 어느 곳에도 안주할 수 없다. 예술가 그룹에서는 경멸과 환멸을, 시민 계급에서는 굴욕과 패배감을 맛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부러워해 마지않던 시민성을 경외와 긍정의 시선으로 수용한다. 시민 계급의 밝음을 사랑하고 질투하는, 인간적인 예술가가 되겠다고 고백한다.토니오 크뢰거는 조금은 평범하지 않다고 믿는 우리들 자화상이다. 단춧구멍에 들꽃을 꽂은 채 단정히 책을 읽는 아버지와, 만돌린을 들고 거리의 악사로 나서는 집시 풍의 엄마가 공존하는 게 고뇌하는 사람의 마음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7

햄버거 가게 높임말

바쁘다는 핑계로 패스트 푸드를 애용할 때가 있다. 해로운 게 너무 많이 들었다지만, 맛있는 데다 무엇보다 간편하니 찾을 수밖에. 요즘은 차를 타고 주문하는 `드라이브 쓰루`라는 편리한 제도도 있어 할인 스티커를 챙겨 가며 활용하는 편이다. 햄버거 가게에 가면 영양가 낮은 음식을 먹는다는 불안감보다 더 불편한 게 있다. 근무자들의 언어 습관이 그것이다. `고객님, 이번에 새로 나온 치킨 버거세요.`, `오늘 특별세트 메뉴는 새우버거세요. 점심시간이라 할인되십니다.` 하나 같이 저렇게 말한다. 처음엔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다가 자꾸 듣다 보면 실소가 나온다.종업원 입장에서는 고객은 왕이니 무조건 높이면 좋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친절하고 공손한 표현을 찾다 보니 높임말 어미인 `시`자를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 `-시-`는 주체의 동작이나 상태를 높일 때 쓰이는 어미인데, 기본적으로 사람에게만 쓸 수 있다. 주체의 사물까지 높여서 말하기엔 우스꽝스럽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최대한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그런 언어 습관을 낳은 것이다.햄버거 가게를 예를 들어서 그렇지 보험회사, 백화점, 병원, 은행 등 서비스가 요구되는 직종에서는 어디든지 그런 어법을 만날 수 있다. 처리하는 데 2, 3일 걸리세요. 이 옷이 더 비싸세요. 이쪽으로 가시면 병동이 나오세요. 이 상품 이율이 더 높으세요. - 과잉 친절이 베푸는 높임말 향연을 듣다 보면 피로감이 몰려온다. 대접 받고도 놀림 받는 찜찜함을 업체 측에서는 알 리 없다. 그렇게 말하라고 요구한 자도 없고, 그렇게 말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준 이도 없는 자연발생적 화법이므로.항공업계나 백화점 등에서 고객들의 이런 불만을 접수하고 고쳐나가고 있다니 다행이다. 이런 작은 실천이야말로 고객 감동 서비스가 아니겠나. 소비자만 제대로 높여줘도 고마운 일이다. 그들이 취할 상품까지 높일 필요야./김살로메(소설가)

2012-09-26

장갑 낀 시인

적재적소에 맞는 단어를 활용하는 게 쉬운 건 아니다. 하지만 위대한 시인들은 언제나 앞서간다. 나들이 차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비장하고 서정적인 시 한 편이 흘러나온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외국어 낱말`이라는 산문시였다. 간략한 내용은 이러했다. 폴란드는 지독하게 춥다며, 라고 한 프랑스 여인이 날씨 이야기로 화제를 이끈다. 어쩌면 시인 자신일 폴란드인은 멋들어지게 대답하고 싶었다. 내 조국에는 시인들이 장갑을 낀 채 시를 쓰고, 달빛이 방안을 비출 때 비로소 장갑을 벗는다고. 시 속에는 황량한 부엉이 소리와 바다표범을 기르는 어부들의 노래가 있다고. 꼭 밟은 눈 더미 위에다 잉크 묻힌 고드름으로 서정시를 새긴다고. 물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직접 도끼로 호수에다 바람구멍을 만들어야 한다고.하지만 정작 시인은 프랑스어로 `바다표범`이 생각나지 않고 `고드름`과 `바람구멍`도 확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폴란드 거기는 무척 춥다면서요?` 라고 묻는 여인에게 저토록 섬세한 시 대신 `뭐, 대충 그렇죠.`라고 짧고 냉랭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외국어 낱말로 시적 심상을 표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시인은 말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바람결처럼 자유자재로 언어를 다루는 그녀의 서정적 확신에 심장이 떨렸다. 추위를 견디며 시를 쓰던 쉼보르스카를 상상하느라 서툰 외국어 때문에 소통에 힘겨워하는 그녀는 뒷전일 정도였다. 모국어로 충분히 좋은 시를 썼으니 까짓것 외국어 낱말에 좀 서투르면 어떤가.평범한 우리말 단어 하나도 제대로 주무르지 못하는 건 내 안의 정서가 외국어 낱말처럼 서툴기 때문이다. 두껍게 언 마음 호수에다 도끼로 바람구멍 한 점 내고 싶다. 그리하여 장갑 낀 쉼보르스카 여사처럼 바다표범과 고드름을 맘껏 불러내고 싶다. 은밀한 결구로 화룡점정 하나 찍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또 가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5

먼지가 되어

가수 김광석이 있었지.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덤덤하면서도 슬퍼보였다. 기타와 간주용 하모니카가 잘 어울리던 남자. 하모니카 목걸개 장치가 제 운명의 덫처럼 보이던 남자. 끝내 불운을 넘어서지 못하고 세상을 등져버린 남자. 너무 일찍 전설이 돼버린 포크 가수. 그가 죽은 지 십 년도 훨씬 넘었지만 팬들 가슴 속에선 언제나 부활 중이다. `서른 즈음에`같은 경우엔 금세기 최고의 노랫말과 노래가 될 정도였다. 그가 전설이 되고, 그의 노래가 신화처럼 붙박이는 동안, 대구 방천시장엔 벽화로 만든 그의 거리까지 생겨났다.만인의 김광석은 거기까지였으면 싶었다. 나 혼자만의 욕망일 한 곡쯤은 숨겨두고 싶었다. 그의 사후 앨범 `노래 이야기` 첫 번째 수록곡인 `먼지가 되어`가 그런 노래였다. 노랫말 주인도, 작곡자도, 노래의 원주인도 그가 아니었다. 라이브로 리메이크한 그 노래는 김광석 것 아닌 것이 김광석에게 와서 듣는 이의 감성을 후벼 파는 그런 종류였다.그 노래가 검색어 앞 순위를 다투고 있다. 모 방송 가수 발굴 프로그램에서 경쟁자끼리 듀엣으로 불렀는데 화제가 되었단다. 뒤늦게 동영상 화면을 찾아봤다. 난리 날만하다. 락 버전으로 부른, 두 도전자의 하모니에 눈과 귀가 뚫렸다. 김광석의 담담함도 좋지만 젊은 듀엣의 패기도 만만찮았다. 먼저 그 진가를 발견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갈 때의 야릇한 서운함 같은 게 잠깐 밀려왔다. 하지만 진작 누군들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인가.혼자만 간직하고픈 것일수록 만인의 것이 되기 쉽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적극 광고나 해야겠다. `시를 써 봐도 모자란 당신`이 생각나는 이들아, `먼지가 되어`를 다섯 번만 들어 보라. 김광석의 라이브도 좋고, 젊은 듀엣의 도전곡도 상관없다. 가을맞이 선물로 이보다 맞춤한 감성 충전제는 없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4

바라매 아니 뮐쌔

태풍 산바가 휩쓸고 간 자리는 나름 심각했나 보다. 온종일 집안에 갇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가로수들이 요동쳤고 강물이 둔치까지 삼키긴 했다. 하지만 태풍이 올 때면 늘 있는 일쯤으로 여겼다. 요즘 유행하는 시스템 창호가 바람소리마저 막아주는 바람에 창 너머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그림 속 풍경처럼 대했던 것이다. 다음날 나서 본 거리도 깨끗했다. 나쁜 공기를 몰아낸 덕인지 하늘 역시 맑고 드높았다. 모든 게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서야 무심하게 맞을 태풍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숙사 천장에 비가 새고, 마당에 물이 차오르고, 벽 틈으로 비가 스며들고.집으로 돌아오면서 아파트 화단 풍경을 보고 제대로 실감하게 되었다. 조경수 중 삼십 퍼센트 정도는 뿌리째 뽑혀 넘어져 있었다. 신생 아파트라 심은 지 얼마 안 된 것들이었다. 트럭에 실어 올 때의 모습 그대로 뿌리가 친친 감겨 있었다.가로수나 조경수가 넘어지는 건 나무 잘못도 태풍 잘못도 아니다. 사람 잘못이다. 숲 속 나무가 강한 바람에 넘어진다는 소리는 잘 듣지 못했다. 아무리 작은 나무라도 그 뿌리 단단히 내렸기 때문에 태풍조차 넘보지 못한다. 하지만 가로수의 운명은 그렇지 않다. 옮겨 심는 과정에서 밑동을 동여맨 고무 밴드 때문에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아 쉽게 넘어지는 것이다.뿌리 내리기 쉽지 않은 건 우리 일상도 마찬가지다. 맘속 뿌리는 작은 비바람에도 흔들리기 쉽고, 어떨 땐 송두리째 뽑혀 나가기도 한다. 어느 순간 동여맨 고무밴드가 스스로를 옭아매 뿌리 내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라고 조상들은 노래했다. `곶 됴코 여름 한` 그날을 위해서라면 제 몸 옭아맨 끄나풀부터 걷어내야 한다. 강한 바람은 뿌리 얕은 나무를 데려가지 아무리 작더라도 뿌리 깊은 나무는 쓰러뜨리지 못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1

차칸남자 대 착한남자

드라마 한 편의 제목이 이슈가 되고 있다. 현재 방영중인 KBS 수목드라마의 원 제목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남자`이다. 한데 방송사는 보도 자료를 통해 다음 회부터는 `차칸남자`에서 바른 표기법인 `착한남자`로 타이틀을 바꿔 올린단다. 시청자들의 정서를 고려하고 올바른 국어사용에 대한 공영방송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란다. 제목을 바꾼 진짜 이유는 한글 관련 단체들의 압력 때문이다. 그들은 `차칸남자`가 우리말을 파괴한다며 항의 공문을 방송사에 전달했다. 국립국어원 역시 개선을 요구하는 권고문을 보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방송사의 올바른(?) 제목 바꾸기가 맘에 들지 않는다. 참으로 융통성 없고, 경직된 사회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만 하다.나는 한 때 한글전용 학생운동을 한 전력이 있을 만큼 우리글을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한글을 사랑하는 것과 예술적 표현의 자유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표기법에 맞는 글자를 고집하면서까지 작가의 창작 의도를 방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차칸남자`와 `착한남자` 사이는 `무릎팍도사`와 `무르팍도사` 만큼의 거리가 있다. 더 비유하자면, 피카소더러 불분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 대신 분명하고 이해 가능한 구상화를 그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맞춤법을 따지며 시비를 걸기 전에,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는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살짝 비트는 표기법조차 용인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다지 건강한 사회는 못 된다. 바른 국어사용만이 국민 정서 함양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경직된 사고를 벗어나 소통이 되는 사회를 꾸리는 게 더 급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0

사소한 것은 없다

무슨 일이든지 직접 겪고 나서야 공감하기 쉽다. 커피를 즐겨 마셔도 속 쓰리지 않고, 불면에 시달리지 않던 호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언니는 커피를 마실 때면 지나치게 신중했다. 하루에 두 잔 정도 마셨다면 아무리 입맛에 당겨도 더 이상 마시질 않았다. 면도날로 오려내듯 속이 따끔거리는 데다 잠이 제대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젊은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마셔도 속이 쓰리기는커녕 잠만 잘 잤다. 언니가 별나다고 치부했다.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요즘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커피를 마시면 속이 콕콕 쑤시고 불면의 밤도 각오해야 한다. 이 오묘하고 불쾌한 경험이 잦아진 뒤에야 언니가 헛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당사자가 겪어 보기 전에는 완전하게 공감하기 힘든 것이다.병적인 징후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고소공포증을 느끼는 부류이다.`바이킹`이란 놀이기구가 처음 나왔을 때 주제도 모르고 올라탔다가 혼비백산을 한 적이 있다. 얼마 전 대둔산에 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몇 십 미터 이상 가파르게 뻗은 철제 사다리를 오기 하나로 도전했다가 눈물바다가 됐다. 되돌아설 수도 없는 그 까마득한 계단을 오르는 심정은 끝없는 지옥 밑바닥을 헤매는 것과 같았다. 허벅지는 후들거리고, 심장은 옥죄어왔다. 공포심의 절대 풍경이 있다면 그것이 아닐까 싶었다.이런 이야기를 하면 고소 공포 체질이 아닌 사람들은 이해를 잘 하지 못한다. 그것쯤이야 한다.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 없으니 공감하기 쉽지 않아서 그렇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다만, 세상엔 하찮은 것도 사소한 것도 없다. 아픔은 아픔이고, 공포는 공포일뿐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덜 아프고, 내가 느끼지 않았다고 덜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섣불리 사물이나 대상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사소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으므로./김살로메(소설가)

2012-09-19

세상의 온도

불편해야 진실에 가깝다. 따뜻하고, 다감하고, 온화한 거리엔 희망이 넘쳐나긴 한다. 하지만 그 희망은 대책 없기 일쑤고 진실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 좋은 생각 가득한 월간 잡지를 읽는다고 세상이 좋은 것으로 넘실대는 게 아닌 것과 같다. 삶의 실체는 언제나 도덕적, 미적 판단을 유보한 뒷골목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낭만성이나 연민의 눈길을 앞세우지 않은 채 그곳에 발 디뎌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쉽게 생의 뒷골목을 들여다 보려하지 않는다. 구차하고 불편부당한 현실에 현미경을 들이대면서까지 제 영혼을 구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파랑새를 찾는 틸틸과 미틸처럼 희망이란 아득한 꿈을 찾아 나서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게 더 나은 삶이라고 은연중 배웠기 때문이다.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에서도 여전히 세상은 희망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고 말한다. 너저분하고 적나라한 화면은 트라우마 깊은 감독 내면의 분신처럼 다가왔다. 관람자는 불쾌하고 불편한 화면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평범한 눈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삶의 넌더리를 날 것으로 훑어대는 불친절한 카메라의 눈. 어쩌자고 감독은 저 비루하고 음산하고 가학적인 구원의 세계로 우리를 잡아끄는가.불편하다고 외면할 수는 없다. 지난한 세월, 감독에게 뱄을 상처와 아픔의 철학이 세상을 향해 공명 되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 나온 그가 말했다. `음침하다`는 세간의 그의 영화 선입견에 대해 `영화는 제가 바라본 세계이고, 제가 본 세상의 온도를 표현한 것`이라고.세상은 살아내는 자마다 다 다르고, 그 삶을 바라보는 온도 또한 각자 다르다. 평범하고 미온적인 온도보다 싸늘하고 냉정한 온도가 더 진실에 가깝다는 건 언제나 김기덕이 말하는 방식이다. 불편해도 내가 김기덕 영화를 신뢰하는 이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8

바위에 새기는 말(言)

사람은 기록의 동물이다. 욕망하고 기원하는 것을 마음에만 새기면 누가 알아 줄 것인가? 맘과 맘으로만 신을 만날 수 있었다면, 인류사를 통틀어 그토록 많은 신을 위한 제단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간절한 약자로서 신 앞에 드러나기를 바라는 존재였다. 신에게 보낼 그 소망의 말들을 새기는 게 선사시대 사람들의 최대 고충 중 하나였다. 문자가 없던 그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 흔적 남기기가 바위에 뭔가를 새기거나 그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영원에 호소하고 싶었던 그들은 그렇게 암각화를 우리 곁에 남겼다.볕 좋은 날이었다. 지인들의 안내로 칠포리 곤륜산 기슭 암각화를 보러 갔다. 바위에 새긴 마음의 소리를 대하는 첫 느낌은 `너무 먼 당신`이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고래, 거북, 사람 등 실체가 확실한 그림만 상상하다가 추상적이고 모호하기만 한 그림을 만나는 순간 당황했다. 잠시나마 이 바위그림이 청동기시대 이후 까마득한 시간 여행 중이라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멀리서 봤을 땐 의자 같아 보였으나 가까이서 보니 방패나 실패 또는 칼자루 모양 같았다. 무슨 그림인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기야 조상들이 내던져준 추상의 의미 앞에서 구상적 실체를 의문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그림의 숨은 의미 찾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지모신일 거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의 말씀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도 않았다.다만 그 옛날부터 사람은 생각하고, 기록하기를 욕망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 좋고 산 밝은 그 터전에, 하염없이 소원하고 기원하는 실체적 진실로서 우리 조상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숙연해지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7

김기덕의 신발

김기덕 감독이 화제다. 영화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쾌거 못지않게, 수상식 때 입은 옷과 신었던 신발까지 관심을 받는다. 대충 틀어 올린 은빛 머리칼과 소박한 듯 허름한 갈색톤 개량한복은 무척 잘 어울렸다. 사진 기자들이 찍어 올린 낡고 구겨진 신발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김기덕답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제 참석용으로 급히 산 그 한복은 이백만 원이 훨씬 넘는데다, 구겨 신은 운동화 역시 스페인 산 유명브랜드로 삼십 만원이 넘는단다. 일견 남루해 뵈는 그의 패션 감각을 동정했던 사람들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전 패션이야말로 김기덕을 더욱 김기덕답게 표현했다고 나는 믿는다.영화제는 다가오고 옷은 적당히 입어야겠고, 아무데나 들른 곳이 고가의 옷집이었을 뿐이라고 감독은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다. 신발까지 갖춰 신는 게 귀찮아, 이미 내 몸이 된 것 같은 운동화를 그대로 신고 갔을 지도 모른다.`예술가란 언제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기 귀에 들려오는 것을 마음 한 구석에 솔직하게 적어놓는 열성적인 노동자다`라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다. 이 말을 김기덕 감독에게도 빗대볼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 일관되게 자신에게 귀 기울였으며, 그 마음 한 쪽을 솔직하게 스크린에다 담은 열성적 노동자였다. 그런 사람에게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예술은 누가 뭐래도 사기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사기를 쳐서라도 희망 또는 진실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그 노정에 편하게 구겨진 신발 한 켤레쯤 있어야 되는 건 당연하다. 감독도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술가에게도 각자의 영역이 있다. 깨끗하고 반듯한 구두를 신고 시상대에 오를 사람은 많다. 김기덕은 뒤축 접힌 낡은 운동화를 신을 때 제격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4

눈썰미

눈썰미가 없어서 곤란할 때가 많다. 한 마디로 오해 받기 쉽고, 그 때문에 자책하기 일쑤다. 우선 주부로서 보자면, 냉장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른다. 겨자 소스나 케첩이 든 칸을 찾아내지 못하고, 캔맥주가 남아 있는지 없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매번 나는 헤매고 금세 다른 식구들은 잘도 알아낸다. 딱 보면 아는데 왜 모르는지 이해가 안 간단다. 사람 보는 눈썰미라고 예외일 리 없다.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 한, 몇 번 본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수십 번 봤더라도 환경이 달라지면 알아보지 못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주 본 동네 병원 의사도 가운을 벗으면 알아보지 못한다.오늘도 그랬다. 독서클럽 한 회원이 오래 전에도 나와 같이 독서 모임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고 상대방이 더 당황했다. 내 눈썰미 없음이 또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사람을 잘 기억해주는 것도 인간관계에 대한 예의가 될 수 있을 터인데, 같은 상황에서 한쪽은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고 다른 쪽은 눈치조차 못 챈다면 그보다 민망하고 미안할 데가 있을까.이러니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긴장부터 하게 된다. 다음에 저 사람을 못 알아보면 어쩌지 하는 강박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면서, 왜 기억하면 좋은 것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 걸까? 지우고 싶은 것은 지우고 떠올리고 싶은 것만 남기는 마법의 약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해본다. 사람이 완벽하면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질질 흘리고, 풀썩 주저앉고, 쩔쩔 매봐야 진정 산다는 것의 숭고함을 알게 된다. 완벽한 일상만 꾸린다면 세상이 제 위주로 움직인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명민한 눈치 때문에 피곤해지는 것보다 차라리 어설픈 눈썰미가 가져다주는 자책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위안해보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3

닭개장

지인과 무슨 얘기 끝에 닭개장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얼큰한 그 국을 먹어 본 지도 까마득하다. 그 시절을 불러내고파 `닭개장`이라고 자판을 치는데 자꾸 빨간 줄이 쳐진다. 표기법이 잘못 되었나? 내친 김에 옳은 표기법을 찾아 인터넷 검색을 해본다. `닭계장`이 아니라 분명 `닭개장`이라고 국립국어원에서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육개장, 닭개장이라고 말 할 때 `개장`은 개장국에서 온 말이다. 개고기와 각종 야채를 넣어 얼큰하게 끓인 국이 개장국인데,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으면 육개장, 닭고기를 넣으면 닭개장이 되는 것이다.어렸을 때 시골에서는 개장국이 흔했다. 여름한철 집집마다 키운 누렁이는 그 국의 원재료가 되어 가마솥 속으로 사라졌다. 개장국을 못 먹는 어린 영혼을 대신해 엄마는 닭 모가지를 비틀고 털을 뽑아 닭개장을 끓여주었다. 그 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잘게 찢은 닭살과 푹 곤 우거지, 고사리 등이 어우러져 구수하고 시원한 맛을 내던 국. 손수 키우던 가축을 잡아 먹거리로 만든 행위는 같았건만, 어린 입맛은 개장국은 거부해도 닭개장은 허락했다. 동네 어귀, 껍질 벗겨진 채 장대에 매달려 있던 개들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지금도 나는 소위 보신탕은 가까이 하지 못한다.이른 나이에 도회지로 나온 뒤로는 그 국을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닭개장은 내게 그렇게 시골생활과 어울리는 음식으로만 남아 있다. 내친 김에 지인들이랑 유명하다는 국밥집을 찾았다. 애석하게도 메뉴엔 닭개장이 사라지고 없었다. 잔품이 많이 들고 수익도 신통찮아 메뉴를 바꿨단다.닭개장을 대신한 `온밥` 앞에서 옛 시간을 돌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그리워한 건 닭개장 맛 자체가 아니었다. 걸쭉하고 매콤했던 그 추억의 시간을 한 숟갈 깊이 떠먹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2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관련 재판 과정이 점입가경이다. 그 책의 절도 혐의 항소심에서 피고인이 무죄를 선고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자신의 억울함만 풀면 피고는 책을 문화재청에 기증하겠단다. 앞선 민사 재판에서 책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원고 역시 책만 돌려받으면 기증하겠다고 서약서를 쓴 바 있다. 책은 피고가 꼭꼭 숨겨 두고 내놓지 않고 있다. 실물 없는 상황에서 나온 양측의 주장과 재판부의 판결이라 갈 길이 멀게만 보인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문제가 된 상주본 말고도 한 부가 더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 때 안동에서 발견된 것인데, 전형필 선생의 노력으로 현재 간송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을 만큼 소중한 우리 문화재이다. 개인적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간송 전형필 선생의 일대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문화재를 지켜온 선생에게 귀하지 않은 유물이 있었을까만 6·25전쟁 피난 때도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어 갈 만큼 아꼈다. 전문가들 역시 해례본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국보 중의 국보로 여기고 있다.크게 보아 훈민정음은 해례본과 언해본이 있다. 1446년 간행된 해례본은 쉽게 말해 한자로 된 풀이서인데,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의미, 사용법 등이 소개되어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증명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어준다. 우리가 학교 때 열심히 외웠던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의 훈민정음 서문은 월인석보에 수록된 한글 해설서인데 세조 때 간행된 언해본이다.훈민정음 해례본의 소유주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돈으로 가늠할 수 없는 그 책이 하루 빨리 공개되고, 더 이상 훼손됨이 없이 문화유산으로서 제 가치를 다하기를 바랄 뿐이다. 상고심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피고의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시민으로서 초조하고 안타깝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1

재봉틀

발판 달린 재봉틀 하나 마루에 놓여 있다. 이른 햇살이 창 넓은 동쪽 집 마루 깊숙이 내려앉는다. 햇발 곧게 받은 재봉틀의 돌림바퀴가 투명하게 빛난다. 몸체를 받치는 테이블 위에는 자투리 꽃무늬 천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다. 순서에 맞게 더듬더듬 실을 꿴 엄마는 돌림바퀴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장방형의 페달을 밟는다. 앞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발판 위의 엄마 발. 시공간을 넘어 잠시 아련한 기억의 창가로 떠나게 하는 건 순전히`히다리 포목점`때문이다. 히다리 포목점은 엄마의 재봉틀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다다다다, 소리를 내는 재봉틀 발판 곁을 주인공 마리오는 안식처로 생각했다. 그 위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타는 느낌으로 혼자만의 황홀한 시간 여행을 한다. 순한 모리오와는 달리 그 시절 나는 격자무늬 엄마의 재봉틀 페달이 창살 같다고 생각했다. 숭고한 노동의 다른 이름인 쉼 없이 돌아가는 그 소리에 동조 없는 연민으로 일관했다. 엄마의 삶이, 한 가계의 일상이 좀 더 환한 꽃무늬로 피어나기를 바랐다.상처 많은 청년 모리오는 엄마가 죽은 뒤 가보 같은 재봉틀을 자신의 아파트로 옮겨온다. 그리곤 엄마처럼 바느질을 한다. 스커트 만들 꽃무늬 천을 찾아 몇 시간이나 헤맨 끝에 검은고양이 `사부로`씨의 안내로 히다리 포목점에 이른다. 모리오가 아닌 나는 그런 시간이 오면 엄마의 재봉틀을 소중히 간직하게 될까? 재봉틀의 기본조차 모르는 나는 바느질은커녕 모리오처럼 꽃무늬 천을 찾아 오래된 섬유 거리를 헤매지도 않을 것이다.다만 꽃무늬 천으로 만든 엄마의 다양한 베갯잇을 보면서 재봉틀 페달을 돌리던 엄마 발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모리오가 제 엄마의 꽃무니 스커트를 재현할 때, 나는 가만 엄마의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 히다리 포목점 그 치유의 골목을 꿈속에서나 기웃거려 보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0

착한 식당

세상사 돌아가는 것 못지않게 사람들은 먹는 것에도 관심이 많다. 오죽하면 `먹거리 X파일` 같은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을까. 식자재를 살피고, 식당의 위생 상태를 점검하며, 때로는 조리 과정의 충격적인 실상을 고발하기도 하는 그 프로그램을 통해 먹거리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 프로그램 중 `착한 식당`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주변 제보를 바탕으로 철저한 검증을 거쳐 타당성이 있을 경우 해당 식당을 착한 식당으로 선정하는 것이다. 암행 취재에 재검증 과정 등, 보기에 따라 불편할 수도 있지만 나름 유익한 프로그램이다.가끔씩 친구들과 가는 짜장면집이 있다. 여름내 덥다는 핑계로 미루기만 했다가 오늘 드디어 그곳에 들렀다. 그 집에서 차려지는 건 짜장면과 단무지만이 아니다. 티끌 하나 없는 정갈한 분위기, 무뚝뚝한 주인장을 대신하는 잔잔한 음악, 안으로 다져 둔 주인의 정성까지 만나게 된다.손수 채취해서 덖은 수국차가 전식으로 나오고, 짜장면이 끝나갈 즈음이면 자연산 감자튀김과 즉석에서 갈아낸 커피가 후식으로 나온다. 짜장면 한 그릇 시켰을 뿐인데 황후의 밥상이 따로 없다. 혀에 착착 감기는 맛집이 아니니 바쁘지 않아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주인의 마음 씀이 천성으로 고운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텃밭에서 가꾼 호박잎과 고추까지 덤으로 싸주는 주인장을 뒤로 하며 착한 식당에 대해 생각한다. 그 짜장면집이야말로 내가 선정한 내 맘대로 착한 식당이다. 식재료와 조리과정에 거짓이 없고, 서비스와 위생 상태가 좋은데다 적정한 가격을 유지한다면 객관적으로 착한 식당의 합격점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은 중요하지 않다.착한 식당의 제 일 조건은 음식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주인이 담백하면 그 음식에 거짓이 낄 리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07

당신 곁의 공

피지 모누리키 섬에 가야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기억해내기 좋은 오후다. 완전한 고립을 즐길 맞춤한 시간이다. 아파트 너머 강 물결은 잔잔하고 담장 밖 거리의 차 소리조차 새어들지 않는다. 그 섬에 가서 희고 둥근 공인 윌슨과 하룻밤을 지새우리라.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그 몸에 찍어 사람 얼굴을 그려 넣으리라.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고립감이 찾아오면 맘껏 튕겨 울적함을 달래보리라. 피지의 모누리키 섬이 배경인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런 상상을 하게 된다. 개봉한지 십년이 넘은 영화는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무인도에 갇힌 남자는 같이 떨어진 소포꾸러미 중 윌슨 상표가 붙은 배구공을 윌슨이라 이름 짓고 친구 삼는다. 삶에 대한 열망과 운명에 대한 원망이 혼재된 4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남자는 제 자리로 돌아온다.원시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해서 우리 삶이 온전할 것인가. 영화 제목처럼 산다는 건 저마다 망망대해에 버려져 표류하는 것과 같다. 살아갈 희망이 사라진대도, 어긋난 사랑이 부서진대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게 삶이다.이제 남자는 새로운 삶의 지표를 설정해야 한다. 황량한 사거리에 한장의 지도를 든 남자. 저쪽으로 가면 텍사스고 이쪽으로 돌면 캘리포니아지요. 낯선 아가씨의 익숙한 친절을 뒤로 하고 담담히 지도를 접는 남자. 하늘색 티셔츠 안으로 꿈꾸듯 바람이 일고, M자로 벗겨진 남자의 이마 위로 생에 대한 호기심이 얼비친다. 오른쪽으로 입 꼬리를 자주 올리는 남자가 독백을 한다. `살 만한 게 인생이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솟을 테고, 그 세파에 무엇이 실려 올지 어떻게 알아?`결말을 알 수 없는 그 여정에도 빠져서는 안 될 게 있다. 윌슨이란 이름의 배구공 하나. 소통과 위안을 주는 그 어떤 소품도 남자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