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무척 젊게 만들어주는`오랜 친구`는 한 가지 단서를 달고 있어야 한다.`자주 만난 오랜 친구`가 아니라 `오랜 만에 만난 오랜 친구`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삼십 년 정도는 못 만났던 사이라야 우리를 젊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랜 친구라도 자주 만나면 늙음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고, 삼십 년 만에 만나면 `젊음`을 환기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육체적 현실은 늙었으나 심적 현상은 그때그대로임을 확인하는 청량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대학동창 열댓 명이 거의 삼십 년 만에 만났다. 이것저것 다급해진 궁금증만큼 섞어 마신 술 때문에 누군가는 빨리 취했다. 민낯을 드러낸 채 싱크대 앞에서 칫솔질까지 해대는 여자 동창들의 뻔뻔함도 남자애들의 무람없는 너털웃음 속에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삼십 년이 무색할 정도로 모두 순순한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내를 잃은 이도, 자식을 먼저 보낸 이도 있었다. 잘난 마누라를 만난 이도, 보수적인 남편을 거느린 이도 있었다. 사회적으로 앞장서는 이도, 주변부에서 겉도는 이도 있었다. 다양한 세상만큼 각양각색의 삶을 변주하고 있었지만, 같은 이십대를 살았다는 공감대 하나만으로 웃고 떠들며 젊은 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삼십 년 시간의 강을 용케도 건너왔다. 앞으로 쌓아갈 나머지 삼십 년도 그렇게 과장 없이, 침잠도 없이 담담하게 맞고 싶다. 늦가을 흩어지던 낙엽비 아래서 제 젊음을 사고 싶다면 오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소집할 일이다. 책 못지않은 젊음을 가져다줄 테니.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