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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 트라우마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2-10-30 21:09 게재일 2012-10-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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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을 선물 받았다. 보기엔 오렌지색인데 칠하고 나면 입술이 선홍색으로 바뀐다. 다양한 세상에 살다보니 화장품에도 요술이 적용되나 보다. 실은 립스틱을 포함한 화장품에 큰 관심이 없다. 기초화장품에다 꼭 필요한 색조화장품, 일 년에 몇 번 쓸까 말까한 향수 두어 종류가 가진 화장품의 전부이다.

립스틱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건 치장하는 걸 귀찮아해서이다. 그래도 다른 이유를 찾자면 어릴 때의 어떤 영향 때문이다. 그 시절 대개 그랬듯이 부모님은 알뜰한 살림꾼이셨다. 돈을 낭비하거나 재물을 허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가까운 친척 중에 소비를 미덕으로 아는 이가 있었다. 그 집 처마에 걸린 마늘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고, 제대로 말리지 않은 연탄은 부서진 채 마당에 뒹굴었다. 부모님은 말했다. `저렇게 살면 큰일 난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소리를 들었으므로 나는 커서 살림을 못할까 걱정하는 아이가 되어갔다.

어느 날 그 집 화장대에서 예닐곱 개 정도의 립스틱을 본적이 있다. 색깔별로 놓인 그 `구찌베니`를 보는 순간, 부모님께 세뇌당한 어린 뇌는 그 친척이 정상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나중에 커서도 구찌베니 따위를 많이 사는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알뜰한 것과 구찌베니 숫자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세상을 알아가면서 부모님처럼 알뜰하게 산다고 잘산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실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은연 중 알뜰 콤플렉스가 마음 깊이 자리 잡은 모양이다. 립스틱 한 통을 후벼 팔 때까지 써야 직성이 풀리는 건 그 영향 때문일 것이다. 못 마시는 술은 노력해도 늘지 않듯이, 립스틱 하나도 낭비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트라우마 때문이다.

큰맘 먹고 갈색빛 감도는 매직 립스틱을 더 사야겠다. 아니 색깔별로 맞춤한 립스틱을 마구 갖춰도 좋겠다. 깊어가는 가을, 요술 같은 여자로 변신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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