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라하의 봄`을 다시 본다. 십 년도 훨씬 넘은 영화인데 너무 길어서 몇 번이나 보다가 중간에 포기했었다. 원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현대사에 기반을 둔 철학적 사유를 요구한다면 영화는 그저 그런 스토리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원작과 연결하려는 그 어떤 목적도 없었다. 다만 `카레닌`의 존재에 오래토록 여운이 남는다.
카레닌은 여주인공 테레사가 키우는 개 이름이다. 테레사의 사랑은 의심하는 사랑이고, 욕망하는 관계이며, 질척이는 무거움이다. 이 모든 원인 제공자는 바람둥이 남편 토마스다. 하지만 그 누군들 무거움의 껍질을 벗고 세파에 가볍게 내던지며 사는 그를 원망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 사랑의 본질은 실연에 있고, 치졸함에 있으며, 실패에 있다. 영원 회귀니 불변진리니 하는 건 부질없다. 이런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가는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카레닌을 등장시켜 끝까지 독자를 심란하게 만든다.
카레닌으로 대표되는 개의 사랑은 이해관계가 없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사랑 따윈 뭔지도 모른다. 괴롭히지도 않으며, 의심하지도 않고 기대조차 없다. 저울질도 탐색도 없으며 파괴와 집착과도 멀다. 거기 그대로 변함없이 있을 뿐이다. 가변하는 인간이 불변하는 개에게 해줄 수 있는 위대한 축복은 안락사이다. 믿음이 보장되지 않는 인간끼리는 쉽게 할 수 없는 최대의 선물인 카레닌의 안락사. 죽음으로써 시퍼렇게 살아있는 카레닌의 순정이 거대한 돛으로 걸려있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