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자식보다 가까운 이웃

전화를 자주 하느냐 안 하느냐로 효·불효를 따진다면 나는 불효자에 속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속은 그렇지 않겠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한다고 엄마는 애써 위안하신다. 연세에 비해 건강한 축이기도 하고 자식들 전화에 애면글면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걸로 효도를 대신하는 셈이다. 며칠 전 태풍이 왔을 때야 걱정이 돼 전화를 드렸다. 형제 중 가장 늦게 안부를 물어 온다며 듣기 좋은 투정을 부리신다. 별 일 없으셨느냐는 의례적인 인사에 그럴 리가 있었겠냐고 기다린 듯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다른 형제들에게 몇 번이나 쏟아놓았을 그 황망했던 사건은 이러했다.성당에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는데 초로의 사내가 마당에서 서성이더란다. 뉘신가 했더니 엄마 소맷자락을 붙잡고 지붕으로 올라가더란다. 맙소사!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사내가 보여준 장면은 반쯤 허빈 기와로 만신창이가 된 지붕이더란다. 아침나절부터 몰래 지붕에 올라가 장난감 기와를 만지듯 한 장 한 장 뜯어냈던 모양이었다.이웃집 도움으로 경찰이 달려왔다. 안면부지인 사람이 남의 집 지붕은 왜 뜯었냐니까 태풍에 비샐까 손봐주려 했다는 황당한 답이 돌아왔다. 예전에 지붕 개량 일을 한 적이 있는, 정신질환자의 우발적 소행으로 잠정결론이 났단다. 오뉴월 닭이 오죽하여 지붕에 올라갈까, 라며 엄마는 사내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며 연민했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기도 잠깐, 지붕 허빈 사내를 위해 며칠 째 기도하는 중이라 했다.해프닝을 지켜본 이웃과 성당 사람들이 합심해 지붕을 도로 덮어 주시더란다. 팔순을 훨씬 넘긴 엄마가 송수화기 너머로 하는 말 - 이웃은 자식 보다 가깝고 늙을수록 믿는 데가 있어야 한데이. 자식 말고 의지할 데가 있는 엄마의 삶이 감사할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05

매스게임

의미 있는 사진전 하나가 개최된다. 서울 안국동 한 갤러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라는 타이틀로 이달 말까지 전시한다는 소식이다. 일간지 정치부 사진 기자 출신의 최재영 사진가의 엄선된 작품을 모았다. 역대 일곱 명의 대통령과 당시 대선에 도전한 후보 등 사십여 점의 모습을 담고 있단다. 전시회를 알리는 소식 중 유독 눈길이 가는 한 컷의 사진이 있다. 전국체전 개막식 스탠드 매스게임에서 연출된 전두환 부부의 얼굴상이다. 카드섹션이라 불리는 그 작업은 그 시절 흔히 행해진 권력자를 향한 강제된 퍼포먼스였다. 몇 컷의 장면을 얻기 위해 주로 1천명 이상의 고등학생이 동원됐다.그 시절 학창 시절을 보낸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서로 다른 학교에서 모인 남녀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내용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매스게임 연습에 매달려야만 했다. 대형에 맞춰 훌라후프를 던졌다, 감았다를 수도 없이 하는 사이 여름이 깊어갔다. 이성을 가까이 접할 수 있고, 수업을 빼먹는다는 기쁨만으로 힘든지도 모르고 뙤약볕을 즐기던 시절이었다.애국이란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하던 사회, 집단의 힘을 과시하던 사회, 권력자 개인을 추앙하게 만들던 사회, 그런 억눌림이 일상화되었어도 절실하게 자각하지 못했던 사회. 이런 일이 불과 삼십 년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이 이 사진전이 갖는 일반적인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그에 못지않게 그 사진들을 보면서 자신만이 겪은 아련한 땀 냄새를 되불러내는 일, 이것도 사진전이 베푸는 중요한 감흥이 되어 준다.철 지난 매스게임 한 컷 사진을 통해 시대가 주는 보편적 정서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개별자로서의 특별한 심상이 떠오르는 일. 사진이 주는 최대의 매력이다. 고린내 나던 운동화를 말리며 매스게임 연습을 하던 그 때의 검은 눈동자들, 풀풀 날리는 먼지처럼 운동장을 떠도는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04

그릇된 욕망

성폭행 사건 뉴스가 끊이질 않는다. 특히 아동성폭행 범죄도 증가일로에 있단다. 이번엔 나주에서 7세 어린이가 이불째 보쌈 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온 국민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린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법적, 사회적 안전망이 강화되는가 싶었는데 별 소용이 없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강압적인 신체접촉이나 성적학대 등을 소아성폭행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제껏 보도된 대부분의 사실처럼 가해자와 피해자는 안면이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다. 또한 가해자가 정신질환이나 범법자 등 특수 상황에 처한 경우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평범한 사람일 경우도 많다. 이번도 예외가 아니다. 한 마디로 이웃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롤리타`에도 소아성애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어린 롤리타와 성인 험버트는 각각 유혹하는 적극적 피해자와 유혹당하는 수동적 가해자로 설명될 수 있다. 정황상 상호 교감이 전제된 롤리타의 언행에 비해 일반적으로 성폭행 피해자는 자기 의사에 반해 오롯이 육체적, 심리적 무참함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나보코프가 어린 소녀를 등장 시켜 하고 싶었던 말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색이었지 성폭행범을 위한 변명서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20세기가 인정하는 문학작품의 목록에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소설 롤리타로 인해 생긴 `롤리타 콤플렉스`는 오욕에 찌든 남성들의 순수에 대한 열망이자 환타지를 대변한다. 예술의 범주 안에서 허용되는 인간을 탐구하는 자유로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양심이란 게 있어 스스로 인간 행동 양식을 제어한다. 언제나 그것을 벗어날 때가 문제다. 인면수심의 욕망을 분출하는 대상으로 어린 영혼이 감당해야할 고통은 너무 크다. 열등감의 발로가 현실에서 잘못 변용될 때의 나쁜 예를 지켜보는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03

바람 불고 비 스칠 때

바람은 잔잔했고 비는 부슬거렸다. 기상청의 예보가 아니라면 태풍 언저리에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거센 바람의 주요 길목들은 상처가 깊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 강풍의 결이 살짝 비껴갔다. 가을맞이에 좋을 적당한 비바람만 안겨 주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기에 맞춤한 날씨였다.그녀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 몇날며칠 고심해서 썼을 그녀 글의 첫 독자가 되는 게 오늘 내가 할 일이다. 그녀가 베푸는 밝고 다사로운 에너지를 생각하면 그 글의 독자가 되어달라는 그녀의 청은 천 번이라도 내겐 행운으로 여겨질 뿐이다. 혀에 감기는 커피번은 부드러웠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시고 싶었던 캐러멜마키야토는 달콤했다. 비오는 날엔 대화든 미감이든 부드럽고 달콤한 게 제격이다.그녀의 글은 창을 타고 내리는 빗물처럼 시원했고, 숙성된 반죽처럼 차졌다. 젊은 날 우정의 삽화 몇 장과 역사적 현장성을 조합한 노고의 결정체였다. 한 땀 한 땀 기억의 조각보를 글맛이란 바느질로 기워내고 있었다. 쉼 없는 행보를 하는 그녀의 열정이 존경스럽다고 내가 말했다. 세상은 거저 얻는 게 없다고 그녀가 답했다. 바람 불고 낙엽 떨어지는구나, 단순히 이런 느낌만 있으면 늙은 거래요. 그 사람의 물리적 나이가 아무리 젊어도 그건 늙은 거래요. 바람이 부는구나 저 바람 갈라야지. 낙엽 지는구나 저 낙엽 낚아야지. 적어도 이런 감흥이 남아있다면 그건 젊은 거래요. 아무리 나이 들어도 그건 젊게 사는 거래요.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매사에 마음이 젊으니 저리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맘 품새를 가졌나 싶다. 그녀의 기가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모든 주변인은 멘토가 될 만하다. 바람 불고 비 스칠 때 그런 사람과의 커피 타임은 짜릿하기만 하다. 서로의 부족한 기를 나누는 그 오롯한 맛./김살로메(소설가)

2012-08-31

신 죽란시사 (新 竹欄詩社)

나이와 우정은 별 상관관계가 없다. 소통이 되고, 공감하기 쉬우며, 연대하기 좋은 성향끼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레 친구가 된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연꽃 피고 비오는 날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모임 이름도 고상하여라. 죽란회. 다산 선생이 주도한 친교 모임인 죽란시사를 빌린 것이다. 정조 때 젊은 학자시절 정약용은 `죽란시사`(竹欄詩社)란 사교 클럽을 만들었다. 술 마시고, 시 지으며, 꽃 감상하는 풍류 모임이었다. 딱딱한 학술 단체가 아니라 음풍농월하는 친목 서클답게 모임이름이 시적이다. 죽란은 다산 집 뜰의 화단 난간을 이르는 말이다. 지나다니는 하인들의 옷깃에 꽃이 다칠세라 대나무 난간을 꽃밭에 설치했는데 그것을 모임 이름으로 삼았다.십여 명이 넘는 당대의 엘리트 회원들은 정기·비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는데 그 규약 또한 참으로 독창적이고 시적이다. 살구꽃 처음 피면 모이고, 첫 복숭아꽃 피면 모이고, 참외 익으면 모이고, 서쪽 못에 연꽃 피면 모이고…. 물론 비정기적 모임도 있었다. 아들 낳거나, 승진하거나, 자제가 과거 급제할 경우였다. 올곧고 치열하게 살았던 다산의 생애에 죽란시사 같은 젊은 날의 삽화가 있었다는 건 큰 위안이었을 게다.다산 선생의 낭만성을 높이 산 지인의 주도로 모임을 가진 지 제법 되었다. 앞선 성현들이 네 살 차 전후의 동년배 모임이었다면 뒤따르는 이들의 나이엔 경계가 없다. 뜰 갖지 않았으니 꽃 망칠까 드리울 대나무 울도 없다. 죽란 없는 죽란회는 죽란시사의 얼을 좇을 뿐이다. 연꽃 흐드러지고 비 스치는 날, 술과 시 대신 커피와 수다가 있었지만 자연 더불어 교감하는 그 정신만은 오롯이 닮고 싶은 것이다.다산 선생의 규약에 나오는 다음 정기모임은 국화꽃 필 무렵이다. 마음 앞서 기다려지는 건 달력을 대신한 선생의 낭만적 화법 때문인지도 모른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30

태풍 볼라벤

며칠 전 도서관 어린이 독서교실에서였다. 한 녀석이 손바닥에 볼펜으로 쓴 `ㅂ, ㄹ, ㅂ` 세 글자 초성을 몰래 보여준다. `초성 게임`에 쓸 자음을 준비해온 것이다. 초성 게임이란 각 낱글자의 자음 초성 정보만으로 출제자가 의도한 낱말을 유추해서 맞히는 게임이다. 수업 막바지는 언제나 이 게임을 하는데 서로 답을 맞히려는 아이들은 저마다 `브라보`라거나 `보리밥`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녀석이 무슨 단어를 말하려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태풍, 이라고 녀석이 힌트를 주었을 때도 제대로 눈치 채지 못했다. 저학년인 아이가 일주일 내도록 고심해 태풍 이름 `볼라벤`을 초성 게임으로 준비해 왔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는 아직 볼라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전이라 사람들 관심 밖일 때였다. 하지만 아이는 초성 게임 하나를 위해 눈과 귀를 온통 뉴스에다 고정시켰던 것이다. 말하자면 게임에 대비해 자신만의 준비를 철저히 한 셈이다. 그날 아무도 답을 맞히지 못했으므로 풍선껌 상품은 녀석 차지였다.초강력 태풍 볼라벤이 북상 중이다. 한반도를 향해 북진 중인데 강풍반경이 500km에 달한단다. 보도 매체들마다 앞 다퉈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서남쪽 지방에선 피해가 속출하고 휴교령도 내려졌다. 몇 년 전 전 국토를 휩쓸었던 `매미`보다 위력이 세다는데, 동해안 쪽은 살짝 비껴가려는지 아직은 잠잠하다. 수치화된 정보보다 심각하지 않으니 호들갑 떤다고 넘겨짚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자연 재해 대비 앞에서는 차라리 호들갑이 괜찮다. 준비하지 않고 당하는 것보다 부산떨다 다행인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태풍 볼라벤, 동심을 들뜨게 한 단어 정도로만 만족하고, 현상에서는 적당한 비바람으로 그 소임을 다하기만 바랄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29

사진에 대한 단상

오랜만에 네 식구 모였다. 아들 기숙사가 있는 학교 근처에서 소박한 외식을 한다. 여권 사진이 필요하다는 아들을 따라 사진관에 들른다. 간 김에 가족 이미지 컷도 덤으로 찍기로 한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에 관한 노트 덕분이다. `카메라 루시다`는 사진 읽기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시선이 담긴 책이다. 그 중 `스투디움`과 `푼크툼`에 대한 잔상이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의 사진 한 컷은 객관적이면서도 개별적인 경험의 산물이다. 특정 사진에 대해 떠오르는 공통된 심상, 작가의 의도 등을 스투디움이라 한다면 구경꾼 개별자의 폐부를 찔러대는 정서적 감흥을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객관적이고, 평면적이고, 대중적이며, 이해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입체적이며, 개별적이며, 은밀해도 좋은 것이다.단순히 보여 지는 것 이상인 푼크툼은 심연의 창고에서 꺼내는 숨은그림찾기와 같다. 옛날 사진 한 장을 꺼냈을 때 오롯한 나만의 내면 풍경이 떠오르는 상태가 푼크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금파리로 팔뚝을 문질렀을 때 생기는 상처 같은 기억들. 서늘하고 아름다운 그 푼크툼의 세계를 떠올리기 위해 우리는 한 컷의 사진을 간직한다.목덜미에 내려앉던 도시 뒷골목의 후텁지근함, 숯불 연기가 눈을 찔러대던 삼겹살집, 밤이슬 피해 나온 지렁이를 밟아 미안해하던 멈칫거림. 헤어지기 아쉬워 깍지 낀 손을 죄던 힘, 아득한 계단 위로 일렁이며 멀어져가던 실루엣, 그 적막한 밤을 깨워주던 날짐승의 울음소리. 오늘 찍은 한 컷 사진 속에서 이 정서들은 나만의 푼크툼이 되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찰나가 포착한 숨은 풍경을 찾기 위해 지금도 누군가는 셔터를 누른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28

비염 유감

기침이 그치지 않는다. 마른 콧물에도 휴지는 쌓이고, 간헐적인 재채기엔 진저리가 따른다. 들숨과 날숨의 콧김, 어디에도 냄새가 섞여들지 못한다. 안과 밖을 드나드는 저 도저한 호흡 주기에 내 후각의 기미는 희미해져만 간다. 잊혀가는 전설처럼 냄새는 코끝에서 아련하고, 비염의 온갖 낌새는 끝내 후각상실이란 후유증으로 수렴되는 중이다. 빗님 오신다. 공중을 떠도는 습기는 떼로 몰려 호흡기에 달라붙는데 비릿한 혐의를 품은 그 어떤 냄새도 내 후각을 풀어놓진 못한다. 무취의 괴로움을 견뎌야 하는 건 중증 비염의 가장 큰 형벌이다. 향을 못 맡으면 무기력해지고 무기력은 비염을 악화시키고 악화된 비염은 다시 향기를 앗아가고.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이 몸과 마음의 순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책으로라도 품새를 다잡는다.잘못 고른 책일까. 엉너리로 가득 찬 문장은 넘치도록 진열된 청과전의 과일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과잉된 비유야 개성으로 치부하더라도 그 불분명한 문장 앞에서는 실소가 인다. 한데 어느 순간, 주관적이고 불가해한 이미지들이 주는 마력에 이끌려 책장 넘기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진열대에서 떨어진 석류 서른 개쯤 훔쳐 먹은 듯한 불안한 새콤달콤함이 책 속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화려한 불협화음이 내는 그 청량감은 감각적이고 부조리한 날 것들을 직감으로만 바라보려는 작가의 뻔뻔하고 자유로운 자의식 덕이었다. 그 뿌리를 헤집느라 데우려던 김치찌개를 다 태워버렸다.가스레인지 위 두 시간의 최강 불꽃에 코팅된 냄비가 주저앉고 온 집안엔 그 청량감의 백만 배나 되는 연기가 자욱했다. 일층까지 누린내 진동했다는 누군가의 초인종이 있기 전까지 내 시야는 온통 혼돈 속에 갇혀 있었고, 후각 안테나는 그 어떤 냄새도 감지할 수 없었다. 비염 앓는 우기에 읽는 책 한 권은 내면의 혼란과 동시에 일상의 두려움을 환기시킨다. 이래저래 심란한 늦여름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27

도둑들

개봉 이십 여일 만에 영화 `도둑들`이 천만 관객을 넘어섰다. 우리 영화사에서 여섯 번째란다. 기록 행진 중인 이 영화를 놓치면 국민 된 도리(?)가 아닐 것 같아 뒤늦게 조조 티켓을 끊었다. 빠른 전개로 지루함을 걷어냈고, 시퀀스마다 시각적 효과를 보탰으며, 적재적소에 감칠맛 나는 대사가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를 흉내 냈다 하더라도 내용상 진일보했으니 그리 큰 흠이 될 것도 없어 뵌다. 대중성을 겨냥한 상업 영화답게 관객들 마음을 제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열 명의 도둑들은 제 그릇 만큼의 영향력으로 서로 얽히고설킨다. 이 진흙탕 싸움에 심리전은 필수요, 배신과 음모 또한 난무한다. 그 많은 도둑들 중 유난히 눈길 가는 캐릭터가 있었다. `씹던껌`. 닉네임처럼 그녀는 누군가 씹다 버린 껌 같은 퇴물 연기파 도둑이다. 국내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홍콩 배우 임달화와 짝을 이뤘는데, 중년의 로맨스와 허망한 죽음이 영화 전개와는 어울리지 않게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바람결을 가르는 외로운 미소, 고급 투피스에 이는 보푸라기 같은 생채기, 거친 대사로 숨기고픈 힘겨운 생의 환멸 등 반생을 넘긴 중년 여성이 품을 수 있는 온갖 비의를 씹던껌은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었다. 일반적인 도둑들의 행태와는 걸맞지 않은 그들의 로맨스가 죽음으로 치달을 때 황망하고 안타까운 건 잠시였다. 어쩜 그들의 죽음이 승화된 로맨스의 다른 길은 아니었을까 하고 감독의 의중을 넘겨짚게도 되는 것이었다.힘들고 외롭다고 눈으로 말하는 여자, 그리하여 남이 버린 꿈을 씹다 버린 껌 줍듯 산 여자, 결국 죽음으로 용도 폐기된 여자. 하지만 끝내 죽어서 사랑을 산 여자. 영화가 끝날 때까지 덜 꿰맞춘 직소퍼즐을 만난 것처럼 허하게 만드는 여자. 클림트 그림처럼 아련한 그 실루엣을 찾아 자꾸만 조각그림을 맞춰보게 되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24

검색 필터링

대선이 몇 달 앞으로 다가왔다. 은연중에 그곳으로 관심이 쏠린다. 새누리당은 느긋하게 후보를 확정지었고, 민주당도 싱겁긴 하지만 막바지 후보 경선이 한창이다. 장외 후보인 안철수 교수도 공식 선언만 하지 않았다 뿐 어떤 식으로든 이번 레이스에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대선 주자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유권자들의 눈과 귀도 조금씩 예민해져 간다. 이렇다 할 후보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적당한 긴장과 느긋한 시선으로 이번 레이스를 관전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직 어느 후보도 완결판 공약이나 깔끔한 정책으로 유권자들을 매혹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와중에 느닷없이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에서 검색 논란이 진행 중이다.박근혜, 안철수 두 후보에 대한 민망한 검색어가 실시간 1위로 오르내리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성인 인증을 받아야 검색이 가능한 특정 단어가 대선 후보 이름과 연결되면 그 절차 없이도 곧바로 검색창에 뜨는 어이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특정 후보를 물 먹이기 위한 네이버 측의 꼼수라 여기고, 그 쪽에서는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일축한다. 이슈화 된 검색어 수치가 일정 이상 올라가면 성인인증이 해제된다는 해명이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네티즌이 몇이나 될까. 그간 상위에 오른 검색어를 그들 입맛대로 삭제한 경우가 없지 않은데다, 다른 포털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그 문구에 대해서 검색 필터링이 가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불필요한 검색어가 뜨지 않게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포털 사이트 검색어 하나만으로도 네거티브 전략에 이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누군가의 장난질에 의해 민심이 흔들릴 수 있다면 이건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검색 필터링에 대한 네이버의 명확한 기준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여야 막론하고 인터넷 상에서 피해보는 후보자는 없어야 한다. 그래야 안심하고 대선 레이스를 지켜볼 수 있지 않겠는가./김살로메(소설가)

2012-08-23

타인의 취향

타인의 취향을 업무나 사람됨의 평가 잣대로 삼아선 곤란하다. 그것이 먹을거리일 경우는 특히 그렇다. 말은 이렇게 해도 타인의 먹거리 취향에 대한 저마다의 편견이 있긴 하다. 매운 걸 못 먹는 사람을 보면 맺고 끊는 게 불분명할 것 같고, 급하게 먹는 이들은 성격도 불같아 뵈고, 국물을 남기는 이들을 보면 지나치게 건강을 챙기는 사람 같아 보인다. 내게도 그런 편견이 있긴 하다. 무조건 커피를 멀리하고 녹차나 매실 등 웰빙 음료만 찾는 사람들을 보면 건강 염려한(念慮漢)이 아닐까 하고, 음료수 하나 고르는데도 오랜 고심을 하는 걸 보면 까다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하지만 그건 타인의 취향일 뿐 시비 걸 마음은 추호도 없다. 커피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크게 마시지도 않고, 녹차를 좋아하지 않지만 자주 마시기도 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마실 거리는 다만 마실 거리일 뿐이다.아메리카노 커피 심부름 때문에 진보 정치계 한 쪽이 떠들썩하다. 회의 중 비서진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 것도 못마땅한데, 매장에서 파는 아메리카노를 사오게 해 마신다는 게 문제란다. 뭐 이런 코미디가 있나 싶다. 생각하는 게 다른 계파들끼리 정파 싸움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노동자와 민중을 생각하는 당의 커피는 꼭 셀프 믹스커피여야만 하나? 노동자는 스타벅스 매장 같은 데서 아메리카노나 캐러멜마키야토를 마시면 안 되나?주입되고 세뇌된 뿌리는 편견이라는 잎사귀를 낳는다. 노동자와 민중의 먹거리 취향에도 계급이 있어야 하나? 굶어죽는 시대도 아닌데 자신들의 잣대로 타인의 취향을 재단하는 이 저급 코미디만도 못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진보든 보수든 커피는 커피일 뿐이다. 취향대로 마시면 된다. 이름 좀 구린 아메리카노면 어떻고 좀 비싼 매장 커피면 어떠리. 사회는 진화하는데 사고가 퇴보하면 그 그룹은 갑갑한 소굴로만 남을 뿐이다.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 한 잔이 제대로 생각나는 하루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22

집 밥

요리가 대세인 시대를 사는 것 같다. 텔레비전을 켜면 예능과 드라마 못지않게 요리 천국이다. 고든 램지, 제이미 올리버, 빅마마 같은 전문가들이 나와 눈부신 요리 세계를 보여준 지도 오래 되었다. 즐기면서 잘하는 분야가 있다는 건 부럽다. 요리를 아주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조리대 앞에 서는 게 두렵다. 자신이 없으니 밥상 차리는 일은 언제나 가슴 짓누르는 숙제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텅 빈 냉장고를 보며 한숨지을 때가 많다.그래도 외지에 갔던 아이들이 돌아오는 격주말이면 신경을 쓴다. 그렇게 해서라도 부족한 모성을 보상 받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중복되지 않게 식단을 짜가며 요란을 떤다. 아침엔 초밥, 점심엔 냉면, 저녁엔 피자, 다음날 아침엔 고깃국, 점심은 스파게티, 저녁은 삼겹살. 내가 봐도 평소의 내가 아니다. 한 끼 준비하고 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돌아서 한 끼 차리고 나면 지쳐 드러누울 지경이다. 화장실을 자주 가긴 했지만 아들이 잘 먹어주니 내심 뿌듯해하고 있었다.그런데 저녁 운동을 갔다 온 부자가 속내 이야기를 한다. 집 밥이 그리웠는데, 아들이 먹은 건 집 밥이 아니라 요리였다나. 이것저것 신경 쓰는 엄마한테 미안해서 솔직하게 말 못했는데 아들이 바란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소박한 밥상이란다. 식구끼리 먹는 밥은 돌밥도 찰밥으로 보이고, 푸성귀도 산삼 되어 넘어간다나. 구수한 된장찌개에 시원한 열무김치, 그 정도가 진정한 `집 밥`이란다.`한 밥에 오르고 한 밥에 내린다`는 어른들 말씀에 기대, 잘 먹여야 한다는 과장된 모성을 발휘한 게 도리어 소화 불량을 불렀던 것이다. 바깥 더운밥보다 내 집 식은 밥이 낫다는 단순한 원리를 왜 몰랐을까. 집 자체가 최고의 밥이고 엄마 자체가 최선의 반찬이라는 생각을 왜 깨치지 못했을까. 보상 심리가 차려낸 오지랖 밥상 앞에서 괜히 쑥스러워지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21

야구 열풍

우리 지역에서도 프로야구 경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새 야구 경기장이 생기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반갑기만 하다. 게임이 진행된 지난 이틀 동안 환히 밝힌 조명탑만 보아도 가슴이 설렜?? 관전을 하는 행운을 누리진 못했지만 텔레비전 중계를 보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꿈에라도 포항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적 느낌이긴 하지만 포항에 대한 첫 인상 중에 하나가 `축구 도시`라는 것이었다. 남녀노소 모두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 프로 축구 구단이 있고, 전용 구장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라지만 어느 누구도 축구만큼 야구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상대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야구 경기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조금 의아했다.나와 동시대를 지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숨 막히게 재미있던 고교야구 중계 관전을 거쳐 프로야구 개막 시대를 온 청춘으로 맞이한 때가 있었다. 그 추억 때문에라도 야구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자연스레 발현되는 것이다. 한데 이제 포항에서도 그 시절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축구와 더불어 야구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야구장 건립이 고맙기만 하다.많은 예산을 들인 만큼 그 활용도를 높일 수 있었으면 한다. 질 높은 국내외 야구 경기를 적극 유치하고, 무엇보다 연일 꽉 찬 관중석인 만큼 새 경기장에서 하는 프로 게임 수가 계획했던 것보다 늘어났으면 좋겠다. 증축 계획이 있다니 표를 못 구해 안타까운 일도 빨리 해소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우리 지역민을 위한 프로야구 구단도 생겨난다면 더할 게 없겠다. 경제적 문화적 효과를 넘어 도시 브랜드 상승효과까지 누릴 수 있는 이 열기가 지속되기를. 스포츠를 통한 도시 이미지 제고도 나쁠 건 없지 않은가./김살로메(소설가)

2012-08-20

잘 넘어지기

하루에도 수십 번 넘어진다. 말실수로 후회하고, 오해로 상처 받고, 앞서 짚어 난감하고, 이루지 못해 번민한다. 일상은 넘어짐의 연속이다. 넘어진다는 건 지극히 인간적이다. 따라서 잘못이 아니다. 자주 넘어져도 좋으나 잘 넘어져야 한다. 사람의 별에서 구석자리 하나 세내어 살면서 잘 넘어진다는 건 위안 받을 너른 가슴을 만나는 걸 말한다. 유도나 레슬링 경기를 보면 넘어뜨리는 것 못지않게 넘어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일어나야 하는 운동 경기와는 달리, 심리적으로 넘어질 때는 잘 받아주는 주변이 있어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라는 말도 넘어질 때 잘 받아주는 걸 의미한다.일본영화 `카모메식당`을 봤다. 외롭고 상처 입은 캐릭터들은 헬싱키에 차린 카모메식당에 와서 제 슬픔을 부려놓는다. `세상 어디에 있어도 슬픈 사람은 슬프고, 외로운 사람은 외롭지요` 핀란드 숲 넓은 배경을 안고 사는 그들은 마냥 평화롭고 여유 있게 살 줄 알았는데 저마다의 사연으로 식당 창문 앞을 서성이는 걸 보고 일본인 식당주인이 읊조리듯 하는 말이다.이국의 길모퉁이 작은 식당엔 외톨이 청년, 버림받은 여자, 아픔을 간직한 자, 외곬 중년남 등 이웃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넘어지기 쉬운 영혼들이 모여든다. 도저히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은 카모메식당은 정갈하고 상큼한 매력으로 손님들을 매혹한다. 그곳엔 마법 같은 루왁 커피와 주먹밥 그리고 시나몬롤빵이 있다. 하지만 절대강자는 역시 넘어지기 쉬운 영혼들을 보듬는 주인의 따뜻한 시선이다. 잘 넘어지려면 잘 받아줘야 한다. 카모메식당이야말로 힐링의 원조가 아닐까./김살로메(소설가)

2012-08-17

사죄와 유감

또 다시 광복절이다. 잔혹한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은커녕 그들의 태도는 무성의와 몰염치로 일관한다. 징용자와 위안부 문제 등 해결해야할 숱한 과제들은 모른 체하고 교과서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우리를 자극한다. 한쪽은 마음에서 우러난 사죄를 필요로 하고 그들은 유감을 표시함으로써 면죄부를 대신했다고 생각한다. 2차 대전 종전 후 유럽에서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통해 비교적 과거 청산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독일의 진심어린 사죄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아시아의 도쿄 전범 재판은 통치권 국가의 이해관계 때문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죄는커녕 관례상 쓰는 `유감`이란 말을 듣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이번 런던올림픽에서 `독도 세리머니`를 펼친 박종우 선수 해프닝에 대해 대한축구협회가 `사죄` 이메일을 보냈다고 일본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사죄가 아니라 `유감`이었다는 협회 측의 해명이 있었지만 그것마저 넌센스다. 박종우 선수를 보호하고 문제를 확대시키고 싶지 않은 관계자들의 상황은 이해하지만 불필요한 제스처임에는 틀림없다. 우발적이고도 우연한 사건에 대해 올림픽위원회에 소명할 의무는 있을지언정 정치적 문제로 이슈화시켜 시비를 건 일본에게 빌미를 제공할 필요는 없었다.`유감`(regret)은 두루뭉술한 미안함 정도를 나타내는 외교 수사이고, `사죄`(apology)는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때 쓰는 표현이다. 박종우의 경우 사죄는커녕 유감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문제를 삼는다면 관중석에서 날아온 `독도는 우리땅` 종이를 들고 경기장을 뛴 우리 축구선수가 아니라 욱일승천기가 디자인된 유니폼을 입은 일본 체조선수여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그 문양보다 더 의도적인 정치행위가 어디 있는가.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시점에서 그들이 통상적인 유감이 아닌 진심어린 사죄를 해야 하는 건 독도가 우리 땅인 것만큼이나 자명한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16

피스토리우스

그에게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턴을 받을 때부터 꼴찌였던 레이스를 역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주자로 나선 그에게 관중들은 환호했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순간이었다. 남자 육상 1600m 계주 결승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앵커로 나선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 그의 질주를 통해 지구촌 사람들은 인간 존엄과 불굴의 의지를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다리 절단 장애인이 패럴림픽을 넘어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의족을 찼다는 건 그의 외적인 모습일 뿐 실제 그는 몸이 불편하다는 의식을 거의 하지 않는단다. 무릎 아래 뼈가 없이 태어난 그는 돌도 되기 전 종아리를 절단해야 했다. 자라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패배의식 같은 걸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단다. 처음부터 그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 많고 적극적인 보통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가족 덕이다.`패배자는 결승선을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사람이 아니라 달려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갓난아기 때 써 뒀다는 어머니의 이 한마디는 그의 평생 좌우명이 되었다. 가족의 긍정적이고 열린 시선이 그를 낙천적이고 도전적인 청년으로 이끌었다. 장애인 선수가 아니라 육상선수일 뿐이라는 그의 신념이 마음자락을 잡아끈다.탄소섬유 보철의 달리기 효과를 주장하는 일부 시각을 잠재우고 올림픽 무대에 섰다는 것 자체로 그는 주목 받아 마땅하다. 스스로 바라보는 만큼 타인도 그 사람을 바라봐준다. 당당한 자기만의 길을 내며 달리는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치타 닮은 그의 의족을 곁눈질할 게 아니라 여름밤 서늘한 바람 같은 그의 영혼을 보듬을 일이다.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하루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13

뫼르소의 태양

강렬한 태양을 벗어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고작해야 계곡이나 바다 찾아 물 한 번 담그는 정도의 일탈이겠지만 일상의 틀을 훌훌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거다. 그도 잠시 결국은 세상이 원하는 삶, 가족이 바라는 생활, 본인 스스로가 규정한 테두리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다.하지만 여기 제대로 된 일탈 종결자가 있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문제적 인간 뫼르소.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흘리지 않고, 연애를 하되 깊이 사랑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며, 타는 듯한 태양빛에 홀려 살인을 저지르는 사내다. 평범하고 규범적인 인간 군상과 자신이 왜 다른지조차 자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천상 자유인. 자신이 일탈적 선상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는 실존적 인간형이다.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뫼르소에겐 사랑, 도덕, 가족애, 신념 그리고 종교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은`아무래도 상관없어`이다. 도덕적으로 계산할 줄 모르고, 종교적 원죄의식엔 물들지도 않았다. 애초에 인간에 관한 연민이나 사회가 부여한 관습이나 질서에서 자유로운 인간일 뿐이다. 우발적 살인으로 재판정에 섰지만 자기변명마저 혐오한다. 자신을 위한 재판이건만 자신도 타인이 되어버리는 부조리한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한 여름에 이 작품이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격렬하게 이마에 내리꽂히던 뫼르소만의 실존적 태양 때문이리라. 실존주의는 누가 뭐래도 개별자의 삶을 우선한다. 타인에게 상처나 방해 없는 실존이라면 나도 기꺼이 그 배에 승선하리라. 개별자의 자유의지가 존중되는 사회야말로 가장 건강한 집단이라 생각하므로.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 타자에게 유해한 손짓을 가한 뫼르소는 부조리한 상황극의 주인공이 되기엔 2프로 부족한 감도 없지 않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10

편견이라는 모자

누구나 자신만의 거울로 세상을 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자기가 꾸려온 삶의 방식대로 사물과 사람을 본다. 객관적 눈을 가졌다고 자부할수록 실은 편견이라는 잣대가 웃자란 경우일 때가 많다. 각자 경험한 만큼 사물을 평가하고, 스스로 처한 상황에 따라 사람을 평가한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할수록 그 경계는 실체가 없다.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카페에 들렀다. 휴가철이라 다들 산과 바다로 떠났는지 실내에는 우리밖에 없다. 심심했는지 곁자리에 앉은 사장이 슬쩍 우리 수다에 끼어든다. 눈치를 보더니 본심을 얘기한다. 테이크아웃해서는 안 되는 팥빙수를 사간 고객이 카페 전용 빙수 용기를 돌려주지 않는단다. 몇 호에 사는지도 모르는 그 손님 하나가 주민들 이미지를 다 흐려놓았다고 흥분한다. 업주 입장에서 양심불량인 그 손님이 서운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주민들 이미지까지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 싶다.영국의 수필가 알프레드 가드너는 그의 작품`모자철학`에서 이런 인간의 속성을 잘 묘파했다. 작품 속 모자가게 주인은 모자 크기(머리크기)로 손님을 판단한다. 변호사나 선장 등 전문직 종사자는 머리가 크고, 일용직이나 육체노동자 등 단순직종인들은 머리가 작다는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마찬가지로 금융업자는 돈의 유무에 따라, 가구상은 의자의 질에 따라, 미식가는 요리 솜씨에 따라 상대를 재단한다는 것이다. 가드너식대로라면 카페사장은 빙수 그릇을 되돌려주느냐 아니냐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했다.사람은 이해하고 소통하는 관계이지 판단하고 평가하는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한데도 우리는 세상을 제 안의 눈으로만 본다. 그 눈은 결코 객관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다. 편견이라는 모자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하겠지만 그 모자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만이라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고 싶은 사실을 볼 뿐, 봐야할 진실을 보는 데서는 언제나 멀리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09

간고등어

어릴 적 풍경 하나. 어스름이 깔리면 삼삼오오 오일장에 나섰던 사람들의 귀가 행렬이 이어진다. 흙먼지 날리며 신작로를 따라 막차가 지나간다. 차비 몇 십 원이 아까워 대부분 버스조차 타지 못하고 걸어서 귀가 중이다. 차바퀴가 뿜어내는 신작로 흙먼지만 애꿎게 손사래로 걷어낼 뿐 묵묵히 남은 귀갓길을 재촉하고 있다. 아낙들은 똬리에만 의존해 큰 소주병을 머리에 이었다. 제수품이나 생필품이 담긴 보자기를 양손에 들었으므로 남는 손이 없다. 등유가 담긴 그 병은 간들간들 위태롭기만 하다. 하지만 절대로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묘기를 넘어 신기한 일로 내 기억의 저장고에 남아 있다.남정네들은 얼큰하게 취했다. 소 판 돈으로 두둑해진 허리춤의 그들 손엔 새끼줄에 엮인 간고등어 한 손이 들려 있었다. 옴팡지게 깊은 내륙에만 살아왔던 사람들은 비린 고기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냉장 시설이 마땅찮던 그 시절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것이 간고등어였으리라. 차비와 맞바꾼 비릿한 손끝을 풀어 한 집의 가장은 어린 자식과 늙어가는 노모를 위해 한 끼 밥상을 부풀렸다. 그렇게 간고등어는 어린 시절 최고의 찬이었다.안동 간고등어 업계가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모두 욕심 때문이다. 덜 노동하고 더 얻고 싶은 욕구는 편법 영업이라는 병폐를 낳았다. 타지역에서 완제품을 들여와 포장만 하거나, 아예 상표를 빌려주고 대여비만 챙기기도 했단다. 이런 과정에서 원산지도 불분명한 저질 수입산이 덤핑 판매되기도 했단다. 무늬만 안동간고등어가 유통된 셈이다.그때는 안동간고등어라는 이름조차 없었다. 그저 시골 사람들에겐 최고의 찬일 뿐이었다. 한 가계를 책임진, 취한 아비가 오일장에서 돌아온다. 새끼줄에 엮인 한 손의 간고등어를 흔들며 사립문께부터 제 새끼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 그 무구했던 시절로 상혼을 되돌리기를 바라는 건 너무 동화적일까./김살로메(소설가)

2012-08-08

띠지를 연민함

주문한 책들이 배달됐다. 맨 위의 것 한 권을 집어 올리는데 종잇조각이 너덜거린다. 책을 감싸는 띠지다. 강렬한 붉은색의 띠지는 다섯 권 중 네 권에나 둘러져있다. 더위 탓일까. 성가시게만 보이는 띠지를 보고 있자니 자원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띠지의 존재이유는 광고 효과 때문일 것이다. 서점에서 손수 책을 고르던 시절에는 그 시각적 덕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종 커뮤니티가 활발하고 인터넷 서점이 발달한 지금에는 그 효과를 장담하지 못한다.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띠지 문구를 보고 구매욕을 발동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그래도 띠지를 굳이 변호하자면 장식효과 및 책 보호 역할도 한다고 할 수 있다. 일정 부분 책갈피 기능도 담당해준다. 하지만 띠지의 모든 기능을 설명해도 실용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대부분 책 주인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신세다. 본문용보다 빳빳한 재질에다 컬러 인쇄까지 해야 하니 그 제작비 또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3000부 기준에 권당 100원 쯤 든다니 비용 대비 그 효율성이 미미하다.띠지 문화는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있단다. 일본에서 출판마케팅 기법으로 90년대 후반부터 활용했는데 우리 업계가 흉내 낸 거란다. 누구를 위한 띠지일까.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봐도 출판업자들의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관행처럼 굳어온 악습을 과감하게 뿌리칠 용기가 없는 건 아닐까.좋은 책은 화려한 띠지가 퍼뜨려주는 게 아니다. 책 내용이 말해줄 뿐이다. 자원, 시간, 인력을 낭비하면서까지 띠지를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모양새에 비해 효과는 미미한 띠지. 유통 기한 십초의 운명인 띠지를 연민하는 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