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각화는 댐 건너 먼 풍경으로만 보였다. 답사 온 한 무리의 학생들이 앞 다퉈 망원경으로 호수 건너를 관찰한다. 고래, 사슴 등 그림이 보인다고 소리치는 쪽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쪽으로 나뉜다. 보인다고 소리치는 쪽은 소수지만 목소리가 크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말하는 쪽은 다수지만 목소리가 작다. 안 보이는 쪽의 소리가 작은 건, 꼭 봐야 하는 것을 남들은 봤다는데 자신은 못 봤으니 주눅이 들어서 그렇다.
그들 틈에 끼어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수면에 직각으로 내리뻗은 절벽단층만 보일 뿐 암각화는 렌즈 어디에도 상이 맺히지 않는다. 세월에 풍화되어 그림이 흐릿해진 걸까. 아님 안경 없이 봐서 그런 걸까? 땀까지 흘려가며 망원렌즈와 씨름하고 있는데 현장지킴이 아저씨가 말을 건넨다. 뭘 봤다는 학생들은 착각한 거란다. 암각화는 얼마 전 태풍 때 수위가 높아져 물속에 갇혔단다. 갈수기에나 드러날 텐데 그나마 이끼나 먼지가 껴 제대로 된 그림을 보기는 쉽지 않단다.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이란 말이 있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을 말하고, 견문은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을 말한다. 시청과 견문은 그 깊이와 넓이가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시청`하면서 `견문`했다고 착각한다.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는데도 `시청`이라도 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안 본 사람이 흘려 본 사람을 이기고, 흘려본 사람은 제대로 본 사람을 앞선다. 그런 부조리한 상황이 곳곳에서 연출된다. 제대로 보고 듣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시청에 머물 게 아니라 견문을 넓히는 연습이 무던히도 필요한 나날이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