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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돈벼락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주역(周易)은 중국 주(周)나라의 역서(易書)다. ‘점술에 관한 것을 기록한 책’을 역서라 한다.주역을 역경(易經)이라고 경전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점복(占卜)의 원리가 천지자연 변이(變易)의 이치로 인간사의 변이를 풀어내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근원인 태극(太極)에서 음(陰)과 양(陽)이 갈라지고, 음양이 사상(四象)으로, 사상이 팔괘(八卦)로, 팔괘를 다시 64괘로 나누어서 각 괘마다 괘사(卦辭)를 붙여 점술의 근거로 삼고 있다.경기도 성남시 개발사업에 참여한 회사명으로 유명해진 ‘천화동인’과 ‘화천대유’는 주역의 64괘 중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괘의 이름이다.괘사의 풀이는 학자들마다 의견의 차이가 있지만, 천화동인(天火同人)의 괘상(卦象)은 ‘널리 뜻 맞는 동지를 얻어 서로 협력하고 노력하면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순조롭게 잘 통한다’는 의미로 풀기도 한다. 화천대유(火天大有)는 ‘음기와 양기가 서로 통해 이슬과 비를 내리니, 만물이 생장하고 오곡이 잘 여물어 크게 부유하게 될 상’이란 풀이가 있어 둘 다 돈과 권력이 되는 거사를 도모하기에 좋은 괘라는 얘기가 된다. 하필 주역의 괘명을 회사 이름으로 정한 이유가 뭘까. 혹시 회사를 설립하려고 점을 쳐보니 대박 날 점괘가 나와서 그것으로 회사명을 삼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중천의 해도 저녁이면 지는 것처럼 길흉화복이란 바뀌게 마련인 것이 또한 주역의 원리다.돈벼락을 맞은 사람들 얘기가 요즘 뜨겁게 매스컴을 달구고 있다. 성남시 대잠동 도시개발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 얘기다. 수천만 원의 자본으로 시작해서 몇 년 만에 수천억 원의 이득을 보았다니, 그야말로 단군 이래 최대의 돈벼락이 아닐 수 없다. 천억 원이라면 십억 원짜리 복권을 한꺼번에 백 번이나 당첨이 된 것과 같은 액수인데,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경악과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자본금이 고작 수억 원인 조그만 회사에 고위급 전직 법조계 인사들이 관여 했다는 것만도 의혹의 소지가 다분하다. 권순일 전 대법관, 김수남 전 검찰총장, 박영수 전 특검, 강찬우 전 검사장 등이 그들이다.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것을 대비해서 고위급 전관 법조인들을 대거 영입한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야당 국회의원의 아들이 6년을 근무하고 퇴직하면서 50억 원을 받은 사실까지 드러나 사태는 더 혼란스러워진다. 어떤 인연으로 엮였던지 간에 썩은 고기에 파리들이 몰려든 것을 연상케 하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재앙이듯 대명천지의 돈벼락도 화근이기 쉽다. 거액의 복권 당첨자들의 말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일확천금의 대박이 해피엔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돈벼락 한번 맞아보고 싶다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한번 뿐인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인생의 소중한 것 중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기에 하는 말이다.

2021-09-30

조국수홍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지지난해부터 ‘조국수호’란 말이 세간의 논란거리가 됐다. 나라가 침략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이 나도는지 의아한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조국’은 조국(祖國)이 아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청와대 민정수석을 거쳐 법무부장관이 된 지 36일 만에 물러난 조국(曺國)이란 사람을 수호(?)하자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에 검찰청 앞에 수만 인파가 모여서 목이 터지게 ‘조국수호’를 외쳐댔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범법자로 몰린 조국이란 사람을 결사적으로 수호해야 할 이유는 바로 ‘검찰개혁’때문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검찰개혁이 그토록 절체절명의 사안이라면 새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우선으로 착수할 일이지, 검찰이 지난 정권을 적폐로 몰아 수백 명을 단죄할 때는 박수를 치다가 그 칼끝이 현 정권 실세들을 향하자 화들짝 놀라 검찰개혁을 들고 나오는 건 너무나 속 보이는 짓이었다. 게다가 최고 학벌에다 최상위 지도층에 오른 부모가 자식들 출세를 위해서 스무 가지가 넘는 위법과 편법을 저질렀음에도 그렇게 목숨 걸고 수호해야 할 명분이 되는가? 조금이라도 상식적인 사고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해괴한 현상에 어찌 아연하지 않겠는가.그들의 죄과는 비단 법적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라를 끌어갈 동량들을 길러내는 대학의 교수라는 것과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할 법무부 장관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국가와 국민에 미치는 파장이 결코 적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명백한 죄과가 드러나 법원의 유죄판결이 났음에도 잘못을 시인하거나 반성하는 태도가 전혀 없는 데다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마저 일말의 회의도 없이 오로지 조국수호를 외친다는 것은 상당수 민심들까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준다. 단순히 입시부정의 비리를 넘어 민심을 분열하고 어지럽히는 해악을 끼쳤다는 것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최근에는 ‘조국수홍’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 얼마 전 제일야당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가 윤석열 후보의 검찰총장시절 조국 일가의 수사가 지나쳤다고 몰아세운 데서 비롯된 말이다. 그는 ‘일가족 살육’이란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 “조국 일가의 비리를 수사하면서 정권의 온갖 핍박과 좌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검사의 길을 가고 있다”며 “그대는 진정 대한민국의 검사”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나는 해방 이후 이런 검사를 본 일이 없다”거나 “훗날 검사들의 표상이 되고 귀감이 될 것”이라고까지 했던 그가 태도를 돌변한 것이다. 조국수호 좌파들의 환심을 사서 역선택 지지로 대권후보경쟁에서 윤석열을 이겨보겠다는 속셈인 것을 비꼬는 말이 조국수홍이다. 정치판에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의 됨됨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예사다. 삿된 편견을 버리면 그들이 하려는 것이 과연 나라와 국민을 위한 봉사인지 자신의 야욕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있을 터인데, 그걸 모르는 국민들이 많을수록 나라는 위태로워진다.

2021-09-23

달 따러 가자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뒷동산에 올라가 무동을 타고/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윤석중의 동시에 박태현이 곡을 붙인 동요‘달 따러 가자’의 일절이다. 노래를 불러보면 한 아름 달을 껴안은 듯 가슴이 환해지는 동요다. 중천에 높이 떠 있는 달이 아니라 장대로 따서 망태에 담을 수 있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는 달이다. 천진무구한 동심 앞에 달은 신비의 대상이거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초가지붕 위에 얹힌 박덩이처럼 가깝고도 친숙한 사물일 뿐이다.달을 따려면 뒷동산에 달이 떠오를 때 서둘러 가야 한다.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동무들을 불러내어,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라 장대 들고 망태 메고 가야 한다. 달이 높아 장대가 닿지 않으면 동무의 어깨에 무동을 타고 따면 된다. 착실하게 계획과 준비까지 하였으니 달을 따는 일에 조금의 차질이나 망설임이 있을 수가 없다. 실로 엄청난 천문학적 사건이 될 일을 아이들 몇이서 놀이처럼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달을 따오려는 이유도 소박하고 기특하다. “옆집에 순이네는 불을 못 켜서/ 밤이면 바느질도 못한다더라/ 얘들아 나오너라 달을 따다가/ 순이 엄마 방에다 달아드리자”아마도 이 동시는 루이 암스트롱이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갔다 오기 전에 씌어졌을 것이다. 우주복을 입은 암스트롱이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달은 우리의 달이 아니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같은 달의 사진은 수십만 년 인류가 우러러보며 한숨짓고 눈물짓던 그 달이 아니었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달음박질하고 숨바꼭질하던 달도 아니었다.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다니, 영악한 요즘 아이들에게는 ‘코끼리 냉장고에 넣기’와 같은 난센스쯤으로나 들릴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아폴로 우주선 이전에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들에겐 그것이 애틋한 그리움의 정경으로 떠오르는 것은.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연중 가장 크고 밝은 보름달을 맞는 명절이다. 수천 년 농경사회에서 가장 풍요로운 명절이었던 추석이지만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그 의미와 활기가 차츰 시들해져가는 형편이다. 더구나 코로나19 때문에 올해도 더 한층 쪼그라든 명절이 될 것이다. 물론 한가위 달도 옛날의 그 달이 아니다. 불야성을 이루는 인공의 불빛 때문에 달빛이 생기를 잃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옛날과는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생활의 리듬과 생체리듬까지 차고 기우는 달에 맞추었던 농경사회에서 멀리 떠나온 오늘에는 매연 낀 도시의 밤하늘에 없는 듯 걸려 있는 게 달이다.휘황찬란한 불빛과 넘쳐나는 영상매체의 볼거리들을 얻은 대신 우리는 달을 잃었다. 누리를 환하게 비추던 보름달의 그윽하고 아늑하고 신비롭던 정경이 퇴색해버렸다. 아이들도 이제는 달을 노래하지 않는다. 달밤에 모여서 술래잡기나 그림자밟기를 하지 않고, 뒷동산으로 달을 따러갈 생각 따윈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아이들에게 달을 찾아주는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동산에 달이 뜨면 아이들을 불러내자.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

2021-09-16

9월의 기도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저 찬란한 태양/ 마음의 문을 열어/ 온 몸으로 빛을 느끼게 하소서// 우울한 마음/ 어두운 마음/ 모두 지워버리고//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9월의 길을 나서게 하소서// 꽃길을 거닐고/ 높고 푸르른 하늘을 바라다보며/ 자유롭게 비상하는/ 꿈이 있게 하소서// 꿈을 말하고/ 꿈을 쓰고/ 꿈을 노래하고/ 꿈을 춤추게 하소서// 이 가을에/ 떠나지 말게 하시고/ 이 가을에/ 사랑이 더 깊어지게 하소서”수녀(修女)의 신분이기도 한 이해인 시인의 ‘9월의 기도’란 시다. 시인의 감성에 신앙인의 영성이 깃들어 가을 하늘처럼 높고 청명하다. 이 시에서처럼 꿈과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여름의 열기가 차츰 가라앉는 9월이면 우리의 마음도 차분해지고 종교인이 아니라도 저 하늘에다 무언가 빌고 싶어진다. 하늘이 높푸르고 햇볕이 정갈해지고 바람이 상쾌해져서 온 누리가 정복한 은총으로 가득할 때, 문득 인간사를 돌아보게 되고 몇 마디 간절한 기도의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바람이 서늘해진 가을이 오고 있지만 대선정국은 오히려 열기를 더하고 있다. 열기가 증가할수록 혼탁해지는 것이 정치권의 열역학법칙이라고나 할까, 갈수록 온갖 권모술수와 이전투구가 난무하는 양상이다. 민심도 그에 따라 갈팡질팡 이리저리 휩쓸리고 부화뇌동하여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룬다. 부디 이 뜨거운 혼란과 혼탁의 도가니에서 정의롭고 후덕한 인품의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그래서 상식이 통하고 정의가 살아있는 나라, 서로가 적개심을 버리고 화합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내년 대선에서는 부디 편을 갈라서 내편이 아니면 다 적이고 악이라는 적패몰이로 반목과 증오를 조장하는 인물이 대통령으로 뽑히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람이 먼저라면서 자기편 사람들만 먼저인 정권, 인권을 내세우면서 정작 폭정과 기아에 허덕이는 북녘 동포들 인권은 안중에도 없고 오히려 세습독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만 전전긍긍하는 정권, 탈북한 청년들을 포승으로 묶어 강제로 돌려보내는가 하면 안타깝고 간절한 통일의 염원을 담은 대북전단까지 처벌하는 법을 만드는 정권, 언론과 검찰과 법원까지 같은 패거리들로 장악해서 저들의 실정과 비리를 덮으려는 수작을 개혁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는 정권, 민심을 현혹하기 위한 퍼주기 포퓰리즘으로 나라를 빚더미 위에 올려놓는 정권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높은 수준의 품격이나 지성까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수신제가는 갖춘 인물이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패륜과 비행이 일반화되는 천박하고 패역한 사회로 타락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하고 성향이 비뚤어지면 그것에 동조하고 아부하는 세력들이 모여들어 득세를 하게 마련이고, 그렇게 혼탁해진 윗물이 아랫물까지 오염시킨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배웠다. 언젠가 방한을 한, 아역스타로 이름을 날린 미국의 여배우가 어린 나이에도 참 당찬 말을 했다.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불평할 권리가 없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불평하는 세상을 바꾸려고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2021-09-09

멍하니 앉아서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14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멍때리기’는 ‘멍하게 있기’란 의미의 신조어다. 매년 이어지다가 지금은 코로나19로 중단되었단다. 대회를 기획한 비주얼 아티스트 웁쓰(예명) 양은 이렇게 취지를 설명한다. “어느 날 갑자기 번아웃이 왔어요. 작업을 해도 아무런 능률도 오르지 않고 그렇다고 일을 놓으면 죄책감 때문에 잠을 못 이뤘죠. 그러다 하루는 철저히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제야 일이 손에 잡혔죠. 다른 사람들도 잠깐 자신의 삶을 멈추고 돌아보는 기회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대회는 90분 동안 진행되는데, 평가 항목은 기술점수와 예술점수 두 가지다. 기술점수는 10∼15분마다 심박수를 재는 것으로, 안정적이고 편안한 심박수를 가진 참가자가 고득점을 얻을 수 있다. 예술점수는 대회를 지켜보는 시민들이 ‘멍 때리기’를 가장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스티커를 붙여 평가한다.“멍때리는 걸 시간 낭비로 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대회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어요.”옵쓰 양의 이 말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미국의 뇌과학자 마커스 라이컬은 ‘아무런 인지활동을 하지 않을 때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 된다’는 걸 알아냈다. 뇌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이 영역을 DMN(default mode network)이라 명명하고, 이는 마치 컴퓨터를 리셋(reset)하게 되면 초기설정으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DMN은 잠을 자는 동안이나 몽상을 즐길 때처럼 외부의 자극이 없을 때 활발한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의사이자 뇌 영상 전문가인 스리니 필레이 박사도 그의 저서 ‘Thinker Dabble Doodle Try’에서 멍하게 있는 것이 인지적 평온을 가져오고,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창의성을 키워주고, 기억력을 강화시키고, 목표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돕는다고 설명한다. 더욱 효율적인 아이디어와 생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멍하게 있는 시간, 즉 ‘비 집중 모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날마다 들판으로 나가 한참씩 멍하니 앉아 있곤 한다.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벼논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이나 풀꽃이 피어있는 것, 잠자리가 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일부러 보려고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오관을 열어놓고 앉아 있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몸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이나 떠오르는 생각도 그대로 내버려둔다. 명상이나 좌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잡념을 떨치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아무런 목적이나 의지가 없는 휴식일 뿐이다. 어떤 경지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두뇌의 휴식을 바라는 것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생명의 충일감 같은 걸 누린다고나 할까.그렇게 멍하니 있다 보면 어느새 세계에 대한 왜곡이나 편견이 없어진다. 그 어떤 것과도 이해관계로 얽히지 않고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속하지도 않는다. 부질없는 욕심이나 망집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와 평온을 가질 수 있다.

2021-09-02

반면교사(反面敎師)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1979년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점령 하에 들어가자 이슬람조직을 중심으로 미국 등의 지원을 받은 저항세력들이 10여 년간 반소항쟁을 벌였다. 그 결과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하였으나, 군벌들이 내전을 벌이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탈레반은 엄격한 이슬람 규율로 무장하고 전국을 빠른 속도로 장악해갔다. 수도 카불의 무력한 기득권층과 북부 양귀비 재배 지역에서 아편매매 수입으로 횡포를 부리던 이른바 마약 군벌들과 경합하다가 1997년에 정권을 잡았다.집권 후 탈레반의 극단적 이슬람근본주의 정책은 세계인의 지탄을 받았다. 부정부패 청산을 명목으로 하는 숙청작업과 함께 대부분의 방송국을 폐쇄하는 등 언론을 탄압하고 종교의 자유를 억압했다. 특히 국제사회를 경악케 한 것은 여성의 교육을 전면 금지하고 모든 여성들을 집안에 감금시킨 탈레반의 조치였다. 부르카(얼굴과 온몸을 가리는 검은 옷) 착용을 의무화한 것은 물론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금하고 외출하는 것도 막았다. 2001년 3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바미얀 석불을 폭파시켜 유네스코와 많은 국가들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미국은 9·11 테러 사건의 배후인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라덴이 아프간에 있는 것을 파악하고 탈레반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탈레반이 그 요구를 일축하자 미국을 위시한 국제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작전을 단행했고, 그해 12월 탈레반 정권은 축출되었다. 9·11테러 20주기인 지난 4월, 조 바이던 대통령이 20년간 주둔하던 미군의 철수를 선포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탈레반이 체결한 평화협정에 따른 거였다. 그러나 철수가 다 끝나기도 전에 탈레반은 다시 수도 카불을 점령해버렸다. 평화협정 따위는 걷어차버리고 곳곳에서 끔찍한 살육을 자행했다. 죽기로 싸우겠다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돈을 챙겨 국외로 달아나고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하미드카르자이 국제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국경지역에선 자식만이라도 살리겠다고 철조망 위로 아이를 던지는 여자들도 있었다.미군이 철수하고 아프간이 탈레반에 함락되는 것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필자뿐일까? 황장엽 선생의 폭로대로라면 남한에는 지금 수만 명의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고, 수십 년 전부터 탈레반을 방불케 하는 종북주사파들의 활동으로 이제는 반공·방첩을 주장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로 국민들 대다수가 좌경화되었다. 허구한 날 미군 철수를 외치고, 사드배치를 막고, 한미연합 군사훈련까지 못 하게 하는 등 핵무기를 가진 북한 앞에서 정신적으로는 이미 무장해제를 한 상태다. 군대조차 수뇌부부터 국가수호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이대로 좌파정권이 이어져서 그들의 바람대로 북한과 평화협정을 하고 미군이 철수하고 나면 대한민국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볼 때 결코 안심할 일이 아닌 것 같다. 표퓰리즘으로 망한 베네수엘라나 안보와 자유수호의 의지가 없어 탈레반에게 나라를 내준 아프간을 반면교사로 배우지 못한다면 결국 그들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21-08-26

가을은 오는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일제히 벼가 팬 들판에 가을빛이 일렁거린다. 바람의 감촉도 많이 달라졌다. 개망초와 달맞이꽃은 쇠어가고 코스모스와 쑥부쟁이가 제철 준비를 하고 있다. 잠자리들이 무리지어 날고 메뚜기가 뛰어다닌다. 입추를 지났으니 절기로는 가을에 들어섰지만 팔월 말까지는 아직 여름철이다. 아무튼 날마다 들에 나가서 계절의 미세한 추이까지 온몸으로 맞으며 살다보니 아무런 여한도 있을 게 없다.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엔 하루도 풍진이 가라앉을 날이 없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겹친 대한민국 대선정국은 아수라장이다. 시시각각 대선을 향해 치달아가는 정국은 온갖 음모와 훼방과 이전투구가 난무하고 있다. 이만큼 거리를 두고 개괄하는 정세에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수준은 고사하고 뒷골목 불량배를 방불케 하는 인성을 가진 인물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는데도 상당수의 국민들이 지지를 한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을 뭐라고 해야 하나. 한편 야당의 대표가 정권교체를 위한 대여투쟁이 아니라 자기당의 대권주자들과의 싸움에만 집착하는 것도 기가 막히는 일이다.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후반은 코로나19로 유지한 정권이라고. 코로나19를 핑계로 반대시위를 원천봉쇄할 수 있었고, 재난지원금을 명목으로 돈을 퍼주고 표를 사는 금권선거를 맘 놓고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국회의석 180석을 차지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저들 맘대로 법을 만들거나 바꿀 수도 있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무슨 수로 반정부 시위를 막고 정권을 유지하겠는가.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통일혁명당이 주최하는 ‘문재인 탄핵’ 시위를 원천봉쇄한 것도 코로나19를 빌미로 해서였다. 좌파세력을 주축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간, 소위 ‘촛불혁명’이라는 시위로 탄생한 정권이면서 이제 와서 저들의 실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대해서는 원천봉쇄하는 걸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가. 얼마 전에 민노총이 불법집회를 강행했을 때는 몇 마디 형식적인 우려와 경고의 표명 정도로 넘어간 정부가 이번에는 코로나 수칙을 엄격하게 지키겠다는데도 비상계엄 이상의 삼엄한 통제로 봉쇄했다. 이 정권의 정체성과 뿌리가 어디인지 잘 보여주는 일이다.반년여 앞으로 다가온 대선을 앞두고 뜻있는 사람들의 불안과 걱정이 높아지고 있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정권교체에 걸림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선 공정한 경쟁을 하기에는 여권이 움켜쥔 기득권의 칼자루가 너무 많다. 기왕의 기울어진 운동장에다 전염병을 핑계로 국민의 기본권인 집회의 자유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칼자루와 국민의 혈세를 무조건 퍼주고 표를 살 수 있는 칼자루, 북한을 끌어들여 평화쇼를 연출할 수 있는 칼자루, 장악한 언론을 통한 선전선동으로 민심을 왜곡할 수 있는 칼자루 등을 쥐고 불공정을 자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국을 이렇게 몰아가는 좌파세력들 뿐 아니라 묵인하고 방관하는 것도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국민들의 각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거듭 강조해도 지나친 게 아니다.

2021-08-19

정상화(正常化) 운동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서울 종로구 한 고서점 벽에 야권 대선주자의 배우자를 모욕하는 벽화를 그려 논란이 되자 그 벽화를 그리게 한 서점주인은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말을 했다. 타인의 인격을 짓밟은 만행을 저질러 놓고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던진 말이다. 그야말로 상식이 전도된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다. 요즘 대한민국은 무엇이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지 혼란스러운 세상이 되었다. 아니 비정상이 오히려 활개를 치고 득세하는 형국이다. 이것이 곧 망국(亡國)의 징조가 아닐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이 정권 들어 정상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법치, 경제, 외교, 안보, 국방, 언론, 교육 등 어느 하나도 정상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나라의 기강인 법치가 무너진 것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온통 죄파세력이 장악하고 오로지 저들의 출세와 집권연장을 위해서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는 빚이 눈덩이처럼 늘어나는데도 퍼주기 매표행위에만 혈안이 되어있고, 국방은 핵무기를 쥔 적 앞에서 정신적 무장해제를 하고 눈치 보기에만 급급한 실정이다. 한사코 거꾸로만 가는 외교로 나라망신을 자초하고, 좌경화된 교육과 언론은 국가의 정체성마저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이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일에 국운이 달려있다. 산업화로 굶주림을 벗어나고 민주화로 독재를 청산 했다면 지금은 정상화 운동으로 비정상을 바로잡아야 할 때다. 민주화 과정에 틈입한 불순세력들이 민주화의 기수를 종북·사회주의로 돌려놓은 걸 모르고 그대로 추종해 가다보니 나라 전체가 좌측으로 기울게 된 것이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상당수의 인사들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방향을 바꾸었지만, 아직도 무지와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권력과 돈에 맛을 들인 대다수의 운동권 출신들은 거머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다보니 나라가 비정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나라를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선 우선 정권을 바꾸어야 한다. 더이상 좌파들에게 정권을 맡겨서는 북한과 베네수엘라 같은 패망의 길을 면할 수가 없다. 비단 좌경화된 이념적 비정상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준법은 물론 상식과 도의가 무너지고 전도되어 불법과 파렴치와 내로남불이 민심을 혼란과 타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것이 민심이다. 히틀러에 열광한 것도 민심이고 스탈린이나 모택동을 지지한 것도, 김일성을 신으로 떠받든 것도 민심이었다. 교활하고 악의적인 프로파간다와 표퓰리즘으로 얼마든지 의도대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이 민심이다. 특히나 정보통신이 전 국민을 하나의 그물로 엮어놓은 지금은 왜곡과 거짓선동으로 민심을 뒤집기가 손바닥 뒤집듯 쉬워졌다.양식(良識)과 정의감을 가진 사람들이 앞장서서 헌신적 역할을 해야 희망이 생긴다. 이런 시국에도 사리분별을 못하고 좌경화된 시류에 편승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역사와 민족에 죄를 짓는 일이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구국의 사명감으로 정상화 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것이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2021-08-12

아, 대한민국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올림픽 개막식에 각국의 선수들이 입장하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총 206개 참가국 가운데 참가선수의 규모만도 12번째이고, 역대 메달획득 성적도 1984년 이후로는 대부분 10위권 내에 들었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올림픽을 치른 1988년에는 메달성적이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스포츠 경기가 국위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지만 참가선수의 규모와 성적의 우위는 국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200여 국가 중에 상위 5% 내에 든다는 건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일이다. 그런데 그런 국격에 오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나라 MBC방송이 이번 올림픽 개막식을 중개하면서 몰상식한 짓을 저질러 세계인의 지탄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에 분노를 더하고 있다. 그것은 몰상식한 정도를 넘어 비열하고 사악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우크라이나를 소개할 때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아이티를 소개할 때는 시위대 사진과 대통령 암살사건을 내보낸 것처럼 그 나라들이 대한민국을 소개할 때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과 광주사태의 영상을 내보내면 뭐라고 할 것인가. 좌파노조가 장악한 방송이 온갖 편파방송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더니 급기야는 온 세계에 내놓고 나라망신을 시키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일제의 식민통치와 6·25전쟁의 참화로 세계 최빈국이었던 시절을 겪어온 세대로서는 세계 10위권에 든 대한민국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른다.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열악한 부존자원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맨주먹과 피땀으로 일군 나라였다. 다른 나라의 구호물자로 허기를 때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경제뿐만 아니라 스포츠까지 세계 상위권에 드는 강국으로 보무당당하게 입장하는 걸 보고 어찌 가슴 벅차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감회가 없을 것인가.한편으로는 올림픽조차 참가를 못 하는 세계 최하위권 빈민국인 북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겨레가 이렇게도 극명하게 엇갈리는 분단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한스러움이 북받친다. 그것은 곧 한사코 통일을 가로막는 만고역적 김일성 일족의 세습체제에 대한 원한과 분노이기도 하다. 통일이 시급하고 절실한 이유는 우선 기아와 폭정에 허덕이는 북녘 동포들을 구해내야 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치면 세계 굴지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일단은 김일성 일족의 세습체제를 종식시키는 것이 통일의 첫걸음이라는 걸 모르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 체제를 비호하고 동조하는 정권이나 세력들은 민족의 반역으로 엄단하고 척결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심각한 것은 국민의 상당수가 위기의식이 없다는 것이다.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 현실로나 사회주의·전체주의로 가면 패망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한 것은 투철한 반공정신을 기반으로 한 때문이라는 걸 패망 직전의 북한이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의 좌파 정권은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은커녕 정체성마저 부정하고 폄훼하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국민들이 정신을 차려야 나라가 산다.

2021-08-05

여름날의 동심(童心)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여름은 아이들의 계절이었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란 말이 있지만 여름은 어느 세대보다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계절이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부채질이나 하는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종일 쏘다니며 놀았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데다 요즘처럼 학원에 다니는 아이도 없었으니 여름방학동안에는 하루 종일 밖에서 노는 게 일이었다. 지금은 까마득히 멀어진 옛일이지만 그 때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동요를 듣거나 부르면 단박에 그 시절로 달려가게 된다.“모래성이 차례로 허물어지면/ 아이들도 하나둘 집으로 가고/ 내가 만든 모래성이 사라져 가니/ 산위에는 별이 홀로 반짝거려요// 밀려오는 물결에 자취도 없이/ 모래성이 하나 둘 허물어지고/ 파도가 어둠을 실어올 때에/ 마을에는 호롱불이 곱게 켜져요”박홍근의 동시에 권길상이 곡을 붙인 ‘모래성’이란 동요다.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놀던 아이들이 날이 저물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면 하늘에는 별이 돋아나고 마을에는 호롱불이 켜진다는 내용이다. 노래하는 아이들의 티 없이 맑고 고운 목소리가 그려내는 이 아름다운 정경을 무엇에 비길까. 어린 시절 그런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슴이 울컥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리라.“저 멀리 하늘에 구름이 간다/ 외양간 송아지 음메 음메 울적에/ 어머니 얼굴을 그리며 간다/ 고향을 부르면서 구름은 간다// 저 멀리 하늘에 구름이 간다/ 뒤뜰에 봉숭아 곱게 곱게 필적에/ 어릴 때 놀던 곳 찾으러 간다/ 고향을 부르면서 구름은 간다” - 정근 시, 이수인 곡 ‘구름’동시는 아이들이 직접 짓기도 하지만 어른들이 동심으로 돌아가서 쓰기도 한다. 그래서 동시의 화자는 언제나 어린이가 된다. 이 동요도 화자는 어린이지만 고향과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어른이 지은 동시다. 외양간에서 송아지가 울고 뒤뜰에 봉숭아가 곱게 피는 고향에는 나를 반겨주는 엄마가 있었다. 그곳에서 발원한 동심은 어른이 되어서도 꿈엔들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내 고향 가고 싶다 그리운 언덕/ 동무들과 함께 올라 뛰놀던 언덕/ 오늘도 그 동무들 언덕에 올라/ 메아리 부르겠지 나를 찾겠지// 내 고향 언제 가나 그리운 언덕/ 옛 동무들 보고 싶다 뛰놀던 언덕/ 오늘도 흰 구름은 산을 넘는데/ 메아리 불러본다 나만 혼자서” - 강소천의 시, 정세문 곡 ‘그리운 언덕’태어나서 늙도록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사람도 이 노래를 부르면 코허리가 시큰해지는 것은 왜일까. 고향이란 단순히 태어나고 자란 장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 시절과 그 속에 담긴 추억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심은 천진무구한 인간 본래의 마음이다. 그래서 성서에도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 아닌 이상 사람은 누구에게나 동심이 있다. 다만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때 묻고 무뎌졌을 뿐이다. 요즘 아이들은 동요보다는 성인가요를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가장 아름답고 순수해야 할 동심의 시절을 건너뛰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021-07-29

여름 한나절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고가철로가 지나가면서 그 밑으로 길게 그늘을 지운다. 더위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한낮에 그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피서를 한다. 들판 한가운데는 사방이 틔어 있어서 어느 쪽에서 부는 바람도 다 맞을 수가 있다. 아무리 찌는 더위라도 웃통을 벗고 앉아서 부채질을 하면 견딜 만한 것이 들판의 그늘이다.들판에는 벼들만 사는 게 아니라 바람도 산다. 날마다 들판을 거닐면 무엇보다 바람과 친밀해진다. 사계절이 온통 바람의 계절이다. 미풍에서 태풍까지, 열풍에서 삭풍까지 무수한 바람의 스펙트럼에 민감해진다. 사람의 마음결을 느끼듯이 바람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 바람에 몸과 마음을 열어놓고 있으면 우주의, 생명의 세세한 기미까지 감지하는 감성이 살아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한 폴 발레리의 시구도 아마 그런 감성의 일단에서 나왔을 것이다.철로 그늘에 앉아서 바라보는 시야의 절반은 들판과 그 끝의 산이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이다. 하늘과 땅이 반반인 이런 구도가 더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평생 들판을 거닐며 살아오다 보니 아무리 명승절경이라도 시야가 막혀 있으면 나는 답답함을 느낀다. 이 들판은 분지라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들판 한가운데서는 어느 쪽을 봐도 시계의 절반 이상이 하늘이어서 좋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머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직립보행 하는 거라고 했던가, 비록 땅에 발을 딛고 땅에서 먹이를 구하지만 수시로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야 인간다운 거라는 생각이다.여름 들판은 키가 자란 벼들로 진초록 물결이 넘실댄다. 작열하는 햇빛을 뭇 생명의 양식인 유기물로 합성하는 역할이어서 그런지 벼들의 초록은 삼복더위를 압도하는 기세다. 이 들판에는 벼들 말고도 내가 앉아 있는 주변에 개망초꽃도 피어있고 토끼풀과 강아지풀도 있다. 개망초꽃과 토끼풀꽃에는 벌과 나비가 날아든다. 가만히 보면 꿀벌과 나비는 생태가 사뭇 다르다. 꿀벌이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부지런히 꿀을 모으는 반면 나비들은 먹이활동 보다는 춤추며 날아다니는 게 더 일인 것 같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를 닮았다. 나풀거리며 초록 들판을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들은 무대 위의 발레리나를 연상케 한다. 잠자리도 나비와 베짱이의 생태를 닮았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유유히 날고 있는 잠자리들의 비행에는 별다른 목적이 없어 보인다. 날기 위해서 태어나서 나는 게 곧 삶인 모양이다.들판에서는 심심하지가 않다. 나비와 잠자리뿐 아니라 이따금 백로도 우아한 날갯짓으로 너울너울 무대를 가로지르고 청둥오리나 산비둘기가 잠깐씩 등장하기도 한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갖가지 형상으로 배경을 바꾼다. 여름들판에서는 아쉬운 것도 없다. 인간사회의 일쯤은 사소한 것이 된다. 물론 그 사소한 것들에 목을 매는 사람도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다. 이 여름 나에게 가장 큰 행운은 이 철로의 그늘을 무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어느 재벌의 호화별장과도 바꿀 마음이 없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누가 믿거나 말거나 이 들판의 여름 한가운데서 나는 더 바라는 게 없다.

2021-07-22

공정(公正)의 잣대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요즘 들어 부쩍 공정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공정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터이다. 지금의 정권이 출발부터 공정과 평등, 정의를 기치로 내걸고 지난 정권을 모조리 적폐로 몰아 단죄한 것이 공정에 대한 논란의 발단이었다. 이 정권과 여당은 그것이 마치 자기들만의 전유물인 양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댔다. 저들은 무슨 짓을 해도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황당한 선민의식과 후안무치가 사회를 편파와 분열의 막장으로 몰아간 것이다.말은 쉽지만 공정이란 간단명료하게 시비가 가려질 개념은 아니다. 편을 갈라 내 편은 옳고 네 편은 그르다는 식의 적대적인 양분논리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서울대 김범수 교수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을 때 세상에 완벽하게 공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저마다 사회경제적 배경이 다르고 타고난 능력과 성향, 외모 등 차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삶의 모든 순간이 불공정의 연속이다.”고 했다. 그렇다고 불공정을 묵인하고 방치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을 지향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보다 다수가 안정되고 행복한 사회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정사회란 법과 원칙이 지켜지고, 상식이 통하며, 못 가진 자에 대한 가진 자의 양보와 배려가 있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시책과 법 적용이 공정해야겠지만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사회 전반에 걸쳐 국민들의 양식과 도덕적 수준이 향상되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다른 한 축이 되어야 한다. 기득권자들의 지위와 인맥을 이용한 비리와 부정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만 가증될 따름이다.코로나19 재난지원금 지급 기준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전 국민에게 일인당 얼마씩 지급하는 게 가장 공평한 처사라는 주장도 있고, 절박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지급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공평하기로야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난지원금이란 취지와 부합하지 않는다. 코로나19 때문에 생존에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경제적 손실이 없거나 오히려 득을 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양보나 배려가 우선되지 않은 공평이 올바른 일일 수 없다는 걸 안다면 무엇이 더 공정한 잣대인지 자명해 질 것이다.여당의 대권주자들 중에는 전 국민이나 하위 80%까지 지원 대상으로 하자는 인사들이 있다. 재난지원금으로 매표행위를 하려는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절박한 국민들의 고통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많은 표를 긁어모을 수 있는가 일 뿐이다. 그래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아우성에는 아랑곳없이 정의로운 척 공평이란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이다. 재난지원금은 마땅히 가장 심각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을 위한 긴급 구호책이 되어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매표행위를 하는 사악한 포퓰리즘에 현혹되는 국민이 없기를 바란다.

2021-07-15

대통령 자질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내년 3월의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이 스무 명을 넘는다고 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부고 말고는 매스컴을 많이 탈수록 좋다는 말도 있듯이, 그 중에는 별로 가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름이라도 알리려고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면면들을 보자 하니 나라와 국민을 위한 봉사보다는 권력욕에 눈먼 자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아무튼 한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려면 상당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릇된 생각이나 부족한 능력 때문에 나라를 곤경에 빠뜨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이래 지금까지 열두 번째 대통령을 겪고 있다. 10년 이상 장기집권한 대통령도 있고 과도기에 잠시 대통령 직을 맡았던 사람도 있다. 시대와 처지에 따라 대통령의 역할도 다를 수밖에 없을 터인데,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초석을 놓고 기반을 다진 두 대통령이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는 생각이다.이승만 대통령의 투철한 반공의식과 국제적 식견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을 설득해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도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도 당시의 절대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열악한 조건과 중구난방인 민심을 결집해서 나라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는데 뛰어난 통찰력과 추진력을 발휘했다. 공과가 엇갈리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두 대통령의 공로는 어떤 허물로도 다 가릴 수 없는 업적이었다.산업화도 민주화도 상당수준 달성하여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OECD 국가인 지금은 과연 어떤 대통령이 적당할까. 개혁이나 혁명을 외치기보다는 기왕의 성과를 잘 살리고 모자라거나 잘못된 분은 착실히 개선해 나가는 일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그에 걸맞은 선진국형 지도자가 요구된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식의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지도자가 얼마나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지는 충분히 절감했다. 나라의 안정과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건강한 상식과 품위 있는 인격의 소유자가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다음으로 중요한 덕목은 인재등용의 안목과 공정이다. 사심이나 편견에 사로잡힌 소위 ‘캠코드’ 인사가 민심을 갈라놓고 국정을 망치는 걸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각 분야마다 내편 네편 가리지 않고 유능하고 덕망 있는 인재들을 등용해 소신껏 능력을 발휘하도록 맡기고 지원해야 한다. 수석이나 보좌관들도 눈치나 보고 아첨하는 자들이 아니라 언제든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인물을 골라야 한다. 특히 민감한 문제나 나라의 명운이 걸린 사항은 외부 전문가들까지 초청해서 며칠이고 밤샘토론이라도 벌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세계정세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거시적인 안목도 갖추어야 한다. 그럴 능력이 부족하면 언제든지 마음을 열어 놓고 배울 자세가 된 사람이라야 한다. 다행히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사람들 중에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지만, 국민들의 의식과 수준이 문제다.

2021-07-08

고집이란 이름의 기관차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우선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습니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습니다. 참모들과 머리와 어깨를 맞대고 토론하겠습니다.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습니다.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때로는 광화문 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의 일부다. 4년이 지난 오늘, 위에 나열한 공약 중에 하나라도 지켜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모르겠다. 도리어 취임사와는 반대의 길을 쇠고집으로 걸어왔다는 생각이다. 고집불통인 사람은 자기성찰이나 반성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속된 말로 한번 꽂히면 독선이나 확증편향에 빠지게 되고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탈원전정책과 소득주도성장정책, 부동산정책, 대북정책 등이다. 그것이 잘못된 정책이란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눈과 귀를 틀어막고 초지일관으로 밀고나간 것이 지금까지의 국정이다.탈원전정책만 하더라도 나라에 끼진 손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것이다. 신규 원전건설을 중단시키거나 계획을 백지화하고, 7천억 원을 들여 보수한 월성 1호기도 경제성을 조작해서 조기 폐쇄했다. 국내 새 원전건설을 전면 중단하는 것은 원전산업 자체를 붕괴시켜 부품산업을 몰락시키고 해외 수출 길을 막는 일이다. 그 결과 핵심부품 기업들이 도산의 위기에 처하고 전문기술 인력이 해외로 흩어지고 있다. 대학에도 관련학과의 지원자가 없어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산업이 폐쇄의 길로 가고 있다.소득주도성장과 급격한 최저임금상향 정책으로 저소득층과 자영업자들이 궁지에 몰리고 빈부의 격차는 더 심해져도 초지일관이고, 단세포적인 부동산 정책은 집값과 세금만 올려놓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병적인 집착을 보인 대북정책은 김정은의 농간에 놀아나는 사기쇼나 연출하면서 다른 나라의 비웃음을 샀다. 얼마 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은을 “매우 솔직하고 열정적이며 강한 결단력을 보여줬다. 국제적인 감각도 있다”고 평가하자, 타임지 기자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 위원장은 자신의 고모부와 이복형을 냉혹하게 살해했으며, 2014년 유엔 인권조사위원회(COI)의 역사적인 보고서에 따르면 몰살, 고문, 강간, 기근 장기화 야기 등 반인륜 범죄를 주도한 인물이다”라고 꼬집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자랑이라고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자 여기저기서 날선 비판이 쏟아졌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문 대통령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잔인한 독재자를 ‘가치 있는 지도자’로 묘사하며 북한 정권의 인권 유린에 눈 감고 있다고 비난했다.일국의 지도자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호불호를 떠나서 나라의 위상을 생각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한 인식도 가져야 한다.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일편단심 스토킹에 가까울 정도로 ‘김정은 바라기’를 하는 것은 심각한 결격사유가 아닐 수 없다. 독선과 아집과 망상을 연료로 한, 고집이라는 이름의 기관차가 달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2021-07-01

끝나지 않은 6·25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한반도 북쪽의 김일성이 동족살상의 전쟁을 일으킨 지 72년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동안 계속됐던 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지금까지 휴전상태로 있다. 6·25전쟁의 발발부터 전개과정은 명약관화한 일인데도 아직까지 논란거리로 만들려는 자들이 있다는 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수많은 희생으로 지켜낸 대한민국인데, 이 정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6·25가 김일성의 남침이었다고 말하는 걸 꺼리는 자들이 있다니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닌가.김일성이 남침준비를 해놓고 소련의 허락을 받기 위해 몇 차례나 스탈린을 찾아가서 간청한 사실도 이미 다 밝혀진 바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재가를 미루던 스탈린이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이 비밀리에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야 중국이 동조한다는 조건으로 남침전쟁을 승인하였다. 이처럼 6·25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이 치밀하게 모의하고 계획한 전쟁이었다. 반면 대한민국은 북한의 기습남침에 대비하지를 못하였다. 그해 6월초엔 사단장 등 지휘부의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고, 6월 23일부로 경계강화 조치를 해제시켜 전방부대 병력의 3분의 1가량이 외출이나 농번기 휴가를 나간 상태였다.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였다. 김일성은 그날 오후 1시 35분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이 오늘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침을 하여 반격을 한 것’이라고 남침을 은폐하였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국군은 사력을 다해 대항하였으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역부족으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남침 사실을 보고받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지시했다. 유엔은 신속히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퇴각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유엔군의 파병을 결의했다.유엔의 결정에 따라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병력을 지원했고 5개국이 의료지원, 39개국이 물자나 재정을 지원했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서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고 낙동강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던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명령으로 10월 1일에는 국군 3사단이, 7일에는 유엔군이 38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 국군1사단이 평양에 입성했다. 여세를 몰아 선발대는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10월 19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여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가 1952년 서울을 재수복, 3월 말에는 38선을 회복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막후 접촉에서 휴전에 동의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그리고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사의 유례가 없는 최장기간 휴전상태로 전쟁의 위험을 안고 사는 처지다. 더구나 김정은 일당은 지금 핵보유국임을 천명하고 대한민국을 협박하고 있다. 북쪽의 비대칭 핵위협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한미공조를 공고히 하는 수밖에 없다. 6·25를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악의를 가지고 왜곡하는 것은 심각한 해악이다.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진상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

2021-06-24

정치판의 새바람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치세의 경륜이란 나이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삼국지의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해서 ‘함께 난세를 구하자’고 불러낸 제갈량도 당시 불과 27세였고,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한 것도 30세 이전이었다. 싯다르타는 서른다섯에 득도를 하였고,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경륜을 펼친 것도 삼십대 초반이었다. 중국 위나라의 왕필(王弼)이란 천재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가장 심오하고 난해하다는 ‘도덕경’과 ‘주역’의 주(注)와 약례를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나이를 먹을수록 지혜와 덕성이 향상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분별이 흐려지고 완고해지는 사람도 적지가 않다.서른여섯 살의 정치인이 제일 야당의 대표로 선출되어 정치판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 나이에 국회의원 백 명이 넘는 당의 대표가 된 것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고 다른 나라에도 없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국회의원도 한번 못 해본 젊은이가 당 대표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기는 하나 삼십대 중반이란 나이가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미심쩍은 것은 그의 나이가 아니라 과연 이 난국을 수월하게 헤쳐나갈 역량과 품성을 갖추었는가 하는 것이다. 당원이 아닌 일반인 여론조사에서는 압도적인 다수가 그를 지지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왜 대다수 국민들이 당 대표의 경력이 있는 다선의 후보들보다 제일 나이가 어리고 낙선한 경력 밖에 없는 그에게 지지를 보냈는가를 알아야 앞으로 당 운영의 방향에 차질이 없을 것이다.이준석을 선택한 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 때문일 것이다. 3류 정치에 식상하고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소위 ‘촛불혁명’으로 새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새로움은커녕 구태의연에다 한 술을 더 떠서 오만불손, 파렴치, 무능에 사악하기까지 한 정권에 실망과 낙담을 한 국민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당대표 수락연설에서도 밝혔듯이 그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권교체다. 야권을 규합하고 가장 역량 있는 후보를 선출하여 내년 대선에 승리하는 것이 제일야당 대표로서의 역할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잡음과 균열을 어떻게 봉합하고 통일시키는가에 자신과 당의 정치적 성패는 물론 나라의 명운도 달려있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당대표로서 이준석의 행보는 전철과 자전거로 출근하는 모습에서 보듯이 일단 젊은이답게 신선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인습이나 타성에 얽매이지 않는 발랄하고 당돌한 태도도 새로움의 한 요소가 될 것이다. 다만 경쾌함이 경박함으로 가서는 안 될 것이고, 당돌함이 치기나 무례에 머물러서도 안 될 것이다. 젊다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열려있다는 것이고, 사람의 그릇은 얼마나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마음과 생각을 열어놓고 편견이나 아집이 없이 얼마나 다양한 정보를 수용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가는 이제부터 두고 볼 일이다. 정치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기왕 젊은 대표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여망을 동력으로 삼아 당을 쇄신하고 야권을 통합하여 새로운 정치로 불어가는 새바람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1-06-17

국민의 자격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부모가 대한민국 국적인 자녀들은 출생신고를 하면 바로 대한민국 국적을 갖게 된다. 반면 외국인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려면 일정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일반귀화의 경우 5년 이상 거주를 하고 한국의 법을 위반한 사실이 없는 사람으로서 일정 금액의 재정입증과 귀화추천서를 갖추어서 관할 출입국에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 또는 귀화용 필기시험 내지 면접시험을 치루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한국 국적 배우자와 결혼한 경우에는 결혼한 상태로 2년 이상 계속 대한민국에 주소가 있거나, 결혼 후 3년이 지나고 1년 이상 거주한 주소가 있으면 귀화신청을 할 수가 있다. 그 밖에도 간이귀화, 특별귀화, 국적회복 등의 신청을 통해서도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다.대개의 국가가 그러하듯이 대한민국에서도 국적취득과 동시에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부여된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고, 법 앞에 평등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신체적 자유, 사회경제적 자유, 정신적 자유와 같은 국가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교육을 받을 권리, 취업의 권리,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같은 생존적기본권 있다. 그 밖에도 청원권, 채판청구권, 형사보상청구권, 국가배상청구권 같은 청원적기본권도 있고, 피선거권, 공무원담임권, 국민표결권 같은 참정권도 있다.다양한 권리에 비해 의무는 비교적 단출한 편이다.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교육을 받게 할 의무, 근로의 의무, 환경보전의 의무, 재산권 행사의 공공복리 적합의 의무 등이다. 여기서 납세의 의무는 법률로써 조세의 종목과 세율을 정하는 조세법률주의 원칙에 따른다. 국방의 의무는 병역법에 의한 군복무 뿐만 아니라 예비군이나 민방위대의 복무 등으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영토를 보전하기 위한 의무를 말한다. 또한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가 있으며, 일을 할 의무와 환경보전을 위해 노력할 의무, 자신의 재산이라 할지라도 공공의 복리에 위배되는 행사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국가가 정상적인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국민의 삶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는 방글라데시나 시리아 난민촌에 관한 보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국가를 위태롭고 피폐하게 하는 것은 외세가 아니라 바로 자국의 국민들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다 같은 국가가 아니듯이 국민이라고 다 같은 국민은 아니다. 미개하고 열악한 국가의 국민이 있는가 하면 부강하고 안정된 국가의 국민도 있다. 정의롭고 풍요로운 선진국의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하고 포퓰리즘에 현혹되고 프로파간다에 휩쓸리지 않는 건강한 양식도 필수다.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이 주인이므로 나라의 운영을 위정자들에게만 맡겨놓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주인)된 도리가 아니다. 국민 각자가 선진국민의 자격을 갖추고 참여했을 때 비로소 선진국가 되는 것이다.

2021-06-10

모내기 풍경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모내기철이다. 논배미마다 물을 가득 싣고 트랙터로 써레질을 하여 이앙기로 모를 심는다. 소를 몰아 논을 갈고 손으로 모를 심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이앙기 몇 대가 드넓은 들판에 모내기를 끝내는데 불과 일주일 남짓 걸린다. 손으로 일일이 모를 심는 데는 온 동네 사람들을 총동원해도 한 달이 넘게 걸리던 시절과는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모내기철은 농번기 중에도 가장 바쁜 때였다. 보리를 베고 타작을 하는 일과 겹치기 때문이다. 논에도 이모작으로 보리를 심었으니, 그것을 베어내고 나서야 논을 갈아 모를 심었다. 초등학생들까지 일손을 도우라고 가정실습이란 명목으로 일주일가량 휴교를 했다.모내기를 하려면 당연히 물이 있어야 한다. 봄 가뭄이라도 들면 저수지가 없는 천수답 주인은 하늘만 쳐다보며 애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도 온 들판을 다 적시기에 넉넉하지 않으면 자기 논에 먼저 물을 끌어대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들판에서 밤샘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물꼬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죽하면 ‘제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제 논에 물 들어가는 걸 볼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말까지 생겼을까. 지금은 저수지 정비는 물론 들판 곳곳에 관정까지 뚫어서 전기 스위치만 올리면 양수기가 작동을 하도록 되어 있으니 웬만한 가뭄쯤은 걱정이 없다.모심기는 혼자서 할 수가 없었다. 품앗이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모심기일 것이다. 웬만한 논이면 열 사람 이상의 일손이 필요하기 때문에 서로 돌아가면서 손을 모아 모를 심어주는 품앗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을 할 때에는 흥을 돋우는 노래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동네마다 노래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 한둘은 있어서 일하는 분위기를 흥겹게 한다. 새참으로 막걸리를 한 사발씩 돌리고 매기고 받는 모심기노래에 맞추어 모를 심다보면 노동의 고단함을 잊을 수가 있었다. 들이 넓은 우리 고장에선 모심기 노래를 비롯한 농요가 발달했는데 기계 영농으로 사라진 풍경이 되었다. 다행히 최근에 농요보존회를 발족해서 그 명맥을 이으려는 분들이 있어 여간 반가운 마음이 아니다.달라진 영농방법은 생태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요즘 들판에는 개구리가 거의 없다. 트랙터로 갈고 써레질 하는 바람에 땅속에서 월동하던 개구리들이 무사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제초제와 살충제의 살포로 메뚜기 같은 곤충들과 수생벌레들이 드물어져서 그것을 먹이로 하는 새들도 개체수가 줄었다. 이맘때쯤이면 강남에서 돌아와 분주하게 날아다닐 제비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 높이 솟아올라 지저귀던 종달새 소리를 들은 기억도 까마득하다.1960년대까지는 농업이 우리나라의 주요산업이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농업인구였던 것이 1970년대부터 급감해서 지금은 전체인구의 5%이하로 줄어들었다. 거기다가 기계영농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농촌문화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오랜 세월 이어오던 모내기 풍경이 사라진 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뭔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이 없는 것도 아니다.

2021-06-03

찔레꽃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찔레꽃 핀 길을 누나는 떠났네/ 동생들 남들처럼 공부시키겠다고/ 서울로 떠나간 지 석 달 만에/ ‘좋은데 취직해서 몸성히 잘있단다’/ 적어 보낸 편지에도 소액환에도/ 찔레꽃 냄새가 묻어있었네// 달마다 부쳐 오는 우편환으로/ 중학을 마치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찔레꽃 냄새의 의미를 차츰 알 것 같았네/ 명절날 어쩌다 집을 찾은 누나의/ 어둡고 퀭한 표정에서 어렴풋이/ 그것이 슬픔의 냄새인 줄을 나는 알았네// 고등학교를 마치던 해 어느 봄날,/ 작은 보퉁이 하나로 돌아온 누나는/ 철지난 꽃잎처럼 시들어 갔네/ 기미와 황달로 누렇게 뜬 얼굴에/ 아침마다 하얗게 분화장을 하고는/ 나를 보고 쓸쓸히 웃어주던 누나// 누나가 묻혀있는 뒷산 언덕엔/ 해마다 오월이면 꿈결처럼 새하얗게/ 분화장한 얼굴로 찔레꽃이 피어/ 흐드러지게 흐드러지게 분냄새를 날리고/ 저승의 기별인 양 적막하게/ 온종일 뻐꾸기가 울고 있었네” - 졸시‘찔레꽃’아까시나무 꽃에 이어 찔레꽃이 한창이다. 아까시나무는 미국 동남부가 원산지이지만 찔레꽃은 우리나라 토종이다.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들녘이나 산자락에 흔하게 피는 수수한 꽃이지만 향기는 어느 꽃 못지않다. 시골 소녀처럼 순박한 느낌을 주는 찔레라는 이름은 아마도 가시가 많아서 붙은 것 같다. 같은 장미과의 화려한 꽃들의 가시가 근접을 불허하는 도도한 느낌을 준다면 찔레의 가시는 초식동물에게 먹히지 않으려는 생존수단으로 보인다. 찔레꽃이 우리 정서에 깊이 와 닿는 것은 그것이 보릿고개의 막바지에 피기 때문이고, 그때쯤 적막하게 뻐꾸기가 울기 시작하는 까닭일 것이다.보릿고개 언덕에 피던 찔레꽃은 우리네 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초등학교나 겨우 마치고 도시로 가서 ‘공순이’가 되어야 했던 누이들이다. 봉제공장 지하실에서 하루 열 몇 시간 재봉틀을 돌리거나, 제 또래들이 교복입고 통학하는 버스의 안내양이 되어 밤늦도록 졸음을 참아가며 번 돈으로 동생들 학비를 댄 누이들이다. 심지어는 유흥업소를 전전하며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간 누이들도 적지 않았다. 소리꾼 장사익은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퍼서 목 놓아 울었다고 노래하는데, 그에게도 무슨 애달픈 사연이 있었는가 모르겠다.너무 뻔한 소리가 되겠지만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데에는 그런 누이들의 땀과 눈물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일당 몇 백 원의 노동으로 기업을 키웠고, 동생들 공부시켜 인재를 길렀다. 그야말로 산업역군들이었지만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않는다. 소위 ‘민주화운동’을 하였다는 운동권 대학생들은 오늘날 국가유공자 대접을 받으며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청와대의 요직에 앉기도 하지만,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공순이들은 이름 없는 민초로 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뿐이다.연암 박지원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광활한 요동 벌판을 보고 통곡하기에 좋은 곳이라 했지만, 찔레꽃 피고 뻐꾸기 울면 나도 저 들녘에 나가 술잔을 기울이며 울고 싶어진다. 아프고 서럽게 보릿고개를 넘어온 이 땅의 모든 이름 없는 누이들을 생각하며.

2021-05-27

사람과 정치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정치학(Politika)’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오늘날의 정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 구성원들 공통의 과제와 비전, 업무 등을 토론과 논쟁을 통해 논의하는 것을 ‘정치적 삶’으로 보았으나, 지금은 ‘국가의 주권자가 그 영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일, 또는 권력의 획득, 유지, 행사 따위에 관한 활동’을 정치라 한다. 삶의 본질적 요소로서의 정치가 사회제도적 장치나 실행으로 변이 된 셈이다. 한자어‘政治’는 고대 중국의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에 ‘道洽政治’라는 문장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정(政)은 자신의 부조화한 면을 다스려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와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정치란 남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닦은 후 남을 돕는 것을 말한다. 政治가 politics의 번역어로 되면서 그 의미도 달라진 것이다.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있다. 헌법의 전문에는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확고히 하여’라는 조문과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는 조항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헌법재판소도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본다고 판시하고 있다.대한민국이 이만큼 살게 된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고수해온 덕분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개념인 자유민주주의는 헌법으로 규정한 우리나라의 정체성이다. 공산주의를 선택한 나라들은 모두가 몰락하여 체제를 바꾸거나 수정하였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남한과 비슷한 시기에 공산주의를 도입한 북한이 거지꼴이 된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완벽한 체제가 될 수는 없을지언정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할 이유를 역사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사회현실에 몸담고 사는 이상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다. 정치참여는 호불호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고 의무다.우리는 지금 잘못된 정권의 선택이 얼마나 나라와 국민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지 절감하고 있다. 개탄스럽게도 현 정권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는 아마도 북쪽의 김일성일족이 내세우는 ‘지상천국’을 닮은 것 같다. 입법부와 사법부, 공영방송까지 장악한 정권의 사회주의, 전체주의로의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건 국민들의 저항과 선거에 의한 심판 밖에 없다. 이런 시국에 양비론이나 펼치는 냉소주의나 무관심은 몰지각하고 비겁한 회피일 뿐이다. 국민 각자가 몸담은 현실을 직시하고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소양을 길러야 바람직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2021-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