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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앉아서

등록일 2021-09-02 18:45 게재일 2021-09-0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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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14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멍때리기’는 ‘멍하게 있기’란 의미의 신조어다. 매년 이어지다가 지금은 코로나19로 중단되었단다. 대회를 기획한 비주얼 아티스트 웁쓰(예명) 양은 이렇게 취지를 설명한다. “어느 날 갑자기 번아웃이 왔어요. 작업을 해도 아무런 능률도 오르지 않고 그렇다고 일을 놓으면 죄책감 때문에 잠을 못 이뤘죠. 그러다 하루는 철저히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제야 일이 손에 잡혔죠. 다른 사람들도 잠깐 자신의 삶을 멈추고 돌아보는 기회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대회는 90분 동안 진행되는데, 평가 항목은 기술점수와 예술점수 두 가지다. 기술점수는 10∼15분마다 심박수를 재는 것으로, 안정적이고 편안한 심박수를 가진 참가자가 고득점을 얻을 수 있다. 예술점수는 대회를 지켜보는 시민들이 ‘멍 때리기’를 가장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스티커를 붙여 평가한다.

“멍때리는 걸 시간 낭비로 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대회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어요.”

옵쓰 양의 이 말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미국의 뇌과학자 마커스 라이컬은 ‘아무런 인지활동을 하지 않을 때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 된다’는 걸 알아냈다. 뇌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이 영역을 DMN(default mode network)이라 명명하고, 이는 마치 컴퓨터를 리셋(reset)하게 되면 초기설정으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DMN은 잠을 자는 동안이나 몽상을 즐길 때처럼 외부의 자극이 없을 때 활발한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의사이자 뇌 영상 전문가인 스리니 필레이 박사도 그의 저서 ‘Thinker Dabble Doodle Try’에서 멍하게 있는 것이 인지적 평온을 가져오고,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창의성을 키워주고, 기억력을 강화시키고, 목표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돕는다고 설명한다. 더욱 효율적인 아이디어와 생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멍하게 있는 시간, 즉 ‘비 집중 모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날마다 들판으로 나가 한참씩 멍하니 앉아 있곤 한다.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벼논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이나 풀꽃이 피어있는 것, 잠자리가 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일부러 보려고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오관을 열어놓고 앉아 있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몸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이나 떠오르는 생각도 그대로 내버려둔다. 명상이나 좌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잡념을 떨치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아무런 목적이나 의지가 없는 휴식일 뿐이다. 어떤 경지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두뇌의 휴식을 바라는 것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생명의 충일감 같은 걸 누린다고나 할까.

그렇게 멍하니 있다 보면 어느새 세계에 대한 왜곡이나 편견이 없어진다. 그 어떤 것과도 이해관계로 얽히지 않고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속하지도 않는다. 부질없는 욕심이나 망집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와 평온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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