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뒷동산에 올라가 무동을 타고/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
윤석중의 동시에 박태현이 곡을 붙인 동요‘달 따러 가자’의 일절이다. 노래를 불러보면 한 아름 달을 껴안은 듯 가슴이 환해지는 동요다. 중천에 높이 떠 있는 달이 아니라 장대로 따서 망태에 담을 수 있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는 달이다. 천진무구한 동심 앞에 달은 신비의 대상이거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초가지붕 위에 얹힌 박덩이처럼 가깝고도 친숙한 사물일 뿐이다.
달을 따려면 뒷동산에 달이 떠오를 때 서둘러 가야 한다.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동무들을 불러내어,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라 장대 들고 망태 메고 가야 한다. 달이 높아 장대가 닿지 않으면 동무의 어깨에 무동을 타고 따면 된다. 착실하게 계획과 준비까지 하였으니 달을 따는 일에 조금의 차질이나 망설임이 있을 수가 없다. 실로 엄청난 천문학적 사건이 될 일을 아이들 몇이서 놀이처럼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달을 따오려는 이유도 소박하고 기특하다. “옆집에 순이네는 불을 못 켜서/ 밤이면 바느질도 못한다더라/ 얘들아 나오너라 달을 따다가/ 순이 엄마 방에다 달아드리자”
아마도 이 동시는 루이 암스트롱이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갔다 오기 전에 씌어졌을 것이다. 우주복을 입은 암스트롱이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달은 우리의 달이 아니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같은 달의 사진은 수십만 년 인류가 우러러보며 한숨짓고 눈물짓던 그 달이 아니었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달음박질하고 숨바꼭질하던 달도 아니었다.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다니, 영악한 요즘 아이들에게는 ‘코끼리 냉장고에 넣기’와 같은 난센스쯤으로나 들릴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아폴로 우주선 이전에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들에겐 그것이 애틋한 그리움의 정경으로 떠오르는 것은.
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연중 가장 크고 밝은 보름달을 맞는 명절이다. 수천 년 농경사회에서 가장 풍요로운 명절이었던 추석이지만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그 의미와 활기가 차츰 시들해져가는 형편이다. 더구나 코로나19 때문에 올해도 더 한층 쪼그라든 명절이 될 것이다. 물론 한가위 달도 옛날의 그 달이 아니다. 불야성을 이루는 인공의 불빛 때문에 달빛이 생기를 잃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옛날과는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생활의 리듬과 생체리듬까지 차고 기우는 달에 맞추었던 농경사회에서 멀리 떠나온 오늘에는 매연 낀 도시의 밤하늘에 없는 듯 걸려 있는 게 달이다.
휘황찬란한 불빛과 넘쳐나는 영상매체의 볼거리들을 얻은 대신 우리는 달을 잃었다. 누리를 환하게 비추던 보름달의 그윽하고 아늑하고 신비롭던 정경이 퇴색해버렸다. 아이들도 이제는 달을 노래하지 않는다. 달밤에 모여서 술래잡기나 그림자밟기를 하지 않고, 뒷동산으로 달을 따러갈 생각 따윈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아이들에게 달을 찾아주는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동산에 달이 뜨면 아이들을 불러내자.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