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핀 길을 누나는 떠났네/ 동생들 남들처럼 공부시키겠다고/ 서울로 떠나간 지 석 달 만에/ ‘좋은데 취직해서 몸성히 잘있단다’/ 적어 보낸 편지에도 소액환에도/ 찔레꽃 냄새가 묻어있었네// 달마다 부쳐 오는 우편환으로/ 중학을 마치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찔레꽃 냄새의 의미를 차츰 알 것 같았네/ 명절날 어쩌다 집을 찾은 누나의/ 어둡고 퀭한 표정에서 어렴풋이/ 그것이 슬픔의 냄새인 줄을 나는 알았네// 고등학교를 마치던 해 어느 봄날,/ 작은 보퉁이 하나로 돌아온 누나는/ 철지난 꽃잎처럼 시들어 갔네/ 기미와 황달로 누렇게 뜬 얼굴에/ 아침마다 하얗게 분화장을 하고는/ 나를 보고 쓸쓸히 웃어주던 누나// 누나가 묻혀있는 뒷산 언덕엔/ 해마다 오월이면 꿈결처럼 새하얗게/ 분화장한 얼굴로 찔레꽃이 피어/ 흐드러지게 흐드러지게 분냄새를 날리고/ 저승의 기별인 양 적막하게/ 온종일 뻐꾸기가 울고 있었네” - 졸시‘찔레꽃’
아까시나무 꽃에 이어 찔레꽃이 한창이다. 아까시나무는 미국 동남부가 원산지이지만 찔레꽃은 우리나라 토종이다.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들녘이나 산자락에 흔하게 피는 수수한 꽃이지만 향기는 어느 꽃 못지않다. 시골 소녀처럼 순박한 느낌을 주는 찔레라는 이름은 아마도 가시가 많아서 붙은 것 같다. 같은 장미과의 화려한 꽃들의 가시가 근접을 불허하는 도도한 느낌을 준다면 찔레의 가시는 초식동물에게 먹히지 않으려는 생존수단으로 보인다. 찔레꽃이 우리 정서에 깊이 와 닿는 것은 그것이 보릿고개의 막바지에 피기 때문이고, 그때쯤 적막하게 뻐꾸기가 울기 시작하는 까닭일 것이다.
보릿고개 언덕에 피던 찔레꽃은 우리네 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초등학교나 겨우 마치고 도시로 가서 ‘공순이’가 되어야 했던 누이들이다. 봉제공장 지하실에서 하루 열 몇 시간 재봉틀을 돌리거나, 제 또래들이 교복입고 통학하는 버스의 안내양이 되어 밤늦도록 졸음을 참아가며 번 돈으로 동생들 학비를 댄 누이들이다. 심지어는 유흥업소를 전전하며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간 누이들도 적지 않았다. 소리꾼 장사익은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퍼서 목 놓아 울었다고 노래하는데, 그에게도 무슨 애달픈 사연이 있었는가 모르겠다.
너무 뻔한 소리가 되겠지만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데에는 그런 누이들의 땀과 눈물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일당 몇 백 원의 노동으로 기업을 키웠고, 동생들 공부시켜 인재를 길렀다. 그야말로 산업역군들이었지만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않는다. 소위 ‘민주화운동’을 하였다는 운동권 대학생들은 오늘날 국가유공자 대접을 받으며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청와대의 요직에 앉기도 하지만,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공순이들은 이름 없는 민초로 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뿐이다.
연암 박지원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광활한 요동 벌판을 보고 통곡하기에 좋은 곳이라 했지만, 찔레꽃 피고 뻐꾸기 울면 나도 저 들녘에 나가 술잔을 기울이며 울고 싶어진다. 아프고 서럽게 보릿고개를 넘어온 이 땅의 모든 이름 없는 누이들을 생각하며.